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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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새로운 집에서도 고통은 떠나지 않고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집을 얻어 이사를 온 것 같았다. 싼 집이라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하 방이고 다다미방이어도 다락도 위아래로 다 있었다. 부엌 바로 앞에 처음으로 쓸 수 있는 수도도 있어 아이들 키우는데도 별 불편함이 없이 키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좋은 것도 잠시뿐이었다. 안집 아저씨는 야근을 하기 때문에 낮에도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방음이 잘되지 않는 옛날 집이었기에, 아이들이 조금만 웃어도 안집 아주머니가 달려와 “애들 단속 좀 잘하시오! 우리는 낮이 밤이란 말이요.” 하고 야단을 했다. 첫아이는 다섯 살, 둘째 아이는 세 살인데 숨을 죽이고 쥐 죽은 듯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골동품 자개 일을 했는데 하루는 두 아이가 엉엉 울고 들어왔다.

큰아이가 “안집 언니가 텔레비전 보여준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돈 10원씩 내라고 하면서 막 때렸어. 엄마, 우리도 텔레비전 사. 응?”이라고 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큰아이는 친정어머니께로 보내고, 둘째 아이는 내가 업고 골동품 자개 일을 했다. 아이가 순하니 업지 않고 일할 수도 있었지만, 니퍼로 자른 날카로운 자개에 찔릴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게 했다.

 

252. 처음으로 개를 키우다

 

가져갈 것도 없는 집이긴 했지만, 도둑이 다녀간 뒤 어머니가 시골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가져오셨다. 나는 강아지를 무척 예뻐했다. 시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니 강아지와 놀아줄 시간은 없었지만, 밥을 줄 때만이라도 함께했다. “이쁜아! 너는 사람들이 볼 때 하찮은 미물이지만 나에게는 이쁜이란다. 안집 아저씨가 밤에 근무하여 낮에 잠을 자니 짖으면 안 된다. 알았지?” 강아지는 안 보면 보고 싶을 정도로 예쁜 짓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안집에 손님이 오는데 강아지가 짖자 안집 아주머니가 발로 차는 시늉을 하며 “콱!” 하고 위협했다. 나는 강아지에게 다가가 “이쁜아, 우리 집이나 안집에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 오거든 짖지 말고 도둑이나 나쁜 사람이 올 때만 짖어. 알았지?”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외숙모와 작은외숙모께서 집에 찾아오셨는데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자 개를 키워보신 외숙모들은 “뭔 개가 바보같이 생전 처음 본 사람한테 반갑다고 꼬리를 흔든다냐?”라고 하셨다.

나는 “개가 우리말도 잘 알아들어요. 밥도 먹으라고 하면 먹어요. 우리 집에 아는 사람들이 오면 꼬리를 흔들고 반겨요. 안집에 아는 사람이 오면 짖지는 않는데 꼬리는 안 흔들어요. 강아지 때 제가 그렇게 교육을 했거든요.” 하고 웃었더니 “뭔 말이라냐?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예, 사람인 우리도 안집에 찾아온 손님인지, 빚쟁이인 줄 모르는데 빚쟁이 올 때와 거지 올 때는 짖더라고요. 지금도 보세요. 외숙모들을 어찌 안다고 꼬리를 흔들겠어요.”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셨다.그때 거지가 들어오자 개가 컹컹 짖어댔다. 그러자 외숙모들은 “우메, 진짜네? 너무 신기하다. 어찌 개가 그리도 영리한가?”라고 하셨다. 강아지에서부터 큰 개가 될 때까지 그대로 했다. 어머니가 우리 개를 보며 “개가 너무 영리하여 사람도 다 알아본다.” 하고 늘 말씀하셨어도 나는 처음 개를 키워봤기에 모든 개가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외숙모가 “사람인 우리도 모르는데 미물인 개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라고 하시니 나는 그때서야 그 말을 듣고 신기하기만 했다.

 

253. 개가 죽은 것은 내 탓이다

 

어느 날, 전에 살던 집 앞에서 가게를 했던 이웃집에서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다. 둘째 아이를 업고 갔더니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음식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집에 가서 골동품 자개를 해야 해서 저녁만 얼른 먹고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계속 말을 걸며 따라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집 대문을 꽝 닫고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가지 않고 대문을 두드리자 개가 계속 짖어댔다. 밤새 골동품 자개를 만드느라 새벽까지 일하는데 그때까지도 계속 짖기에 그 사람이 그때까지 있는 줄 알았다. 아침에 밥하려고 나와 보니 이쁜이는 문 앞을 향해 죽어있었다. 남편과 함께 살펴보니 돼지고기 세 덩이가 있었는데 한 덩이도 채 다 먹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독약을 묻혀 놨기에 한 덩이도 다 먹지 못하고 죽었을까?

 “이쁜아, 네가 이렇게 죽은 것은 내가 준 거 아니고는 먹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지 못한 내 잘못이야. 네 주인을 지켜주기 위해 이렇게 희생을 치러주었구나. 미안해!” 나는 가슴을 치면서 내 탓으로 생각하여 울면서, 우리 이쁜이는 죽었지만, 그가 회개하고 뉘우쳐 유부녀를 따라다니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파서 그렇게 짖어댔는데, 죽기 전에 보고 싶어서 방문 쪽을 향해 그렇게 울부짖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일만 하고 있었으니…. 이쁜아 미안해! 편안하게 고이 잠들어라.’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울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내가 더 이쁜 개 사다 줄게.”라고 하여 “이런 이별이 싫으니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을래요.” 하고 이쁜이를 금성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254. 시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안집에 사는 사람도 세를 사는 사람인데 우리가 전기와 물을 많이 쓴다고 야단을 하여 그분에게 “내실만큼만 내시면 나머지는 제가 다 내겠습니다.”라고 했다. 물을 그렇게 최대한 아껴 쓰는데도 그녀는 수도의 원수 밸브를 잠가 버리는 때가 많았다. 저녁에 전깃불을 조금이라도 늦게까지 켜놓고 있으면 불을 빨리 끄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시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쉴 수가 없었다. 꼭 법관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우겨서 서울로 학교 보냈기에 어떤 일을 해서라도 학비를 대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3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일해야 했기에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어머님께 “어머님께서 아이를 맡아주시면 골동품 자개 일을 많이 해서 삼촌 학비도 대주고 어머니 용돈도 더 많이 드릴게요.”라고 하였더니 “나 용돈 벌어서 좋고 내 아들 학교 보내서 좋지.”라고 쾌히 승낙하고 아이를 데려가셨다. 능률이 올라 밤늦게까지 일했더니 불을 오래 켠다고 안집에서 야단을 했다. 내가 전기세를 많이 내겠다고 해도 소용없어, 전기세를 우리가 다 내겠다고까지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일을 안 하면 안 되어 할 수 없이 빛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밤에는 창문과 문에다 두꺼운 이불을 쳐서 못을 박고 반창고까지 붙여서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일을 하며 내가 쓴 전기보다 더 많은 전기세를 냈다. 밥은 아침에 해서 저녁까지 먹고 틈틈이 짬 내서 부지런히 살림도 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열심히 했더니 돈이 꽤나 많이 들어왔다. 자개 한 장 만드는데 작은 것은 50원, 큰 것은 300~350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은 작은 것은 30원, 큰 것은 150~200원을 받아도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내가 만든 것은 “꼼꼼하게 잘했다.”라며 상품 가치를 크게 인정받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다른 이들은 만들면서 많은 조각을 허비하는데, 나는 연구를 하면서 자를 때도 하나도 버려지지 않도록 자르고, 아주 작은 조각도 다 붙여서 예쁜 모양을 낼 수 있었다. 다들 너무너무 좋다고 500원 줄 테니 빨리 좀 해달라고 성화였다. 조금만 부지런히 하면 큰돈도 모을 수가 있어 신이 나고 기뻤다.255. 호남 비료공장의 직원이라는 그는?

아침 일찍 자개 폐품을 사러 광주행 버스를 탔는데 어떤 청년이 계속 바라다보다가 버스에서 내리자 따라왔다. 뒤로 가면 뒤로 따라오고 앞으로 가면 앞으로 따라와 곤욕을 치렀다. 한 공장이 아니라 여러 공장을 돌아다니며 자개 폐품 한 포대 50kg 정도를 사 모으고 그것을 낑낑대며 가지고 오는데 그 남자는 들어다 주겠다며 내가 가는 곳마다 다 따라왔지만, 그에게 주지 않았다.그러자 그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아니, 왜 계속 따라다니는 거예요? 저는 애들 엄마예요. 유부녀라고요.”라고 하자 그는 “유부녀면 어떻고, 애들 엄마면 어때요? 저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아가씨를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어떻게 만날 줄을 몰라 혼자 애를 끓이다가 ‘오늘은 어떻게든 만나자.’ 생각하고 아침도 안 먹고 와서 기다렸어요. 사실은 저 호남 비료공장에 다니는데요, 오늘은 쉬면서 소를 잡고 회식을 하는 날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이 제게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저는 결혼 했다고요. 돌아가세요.”라고 하는데도 전혀 말이 안 통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나주 집으로 못 내려오고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시댁으로 갔다. 그도 택시로 거기까지 따라왔다. 벨을 누르니 시어머니가 나오셨다. “어쩐 일이냐?” “어머님 댁에서 자고 가려고요.”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밤이 되어 ‘자고 간다고 했으니 이제는 갔겠지?’ 하고 나왔더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댁에서 자기로하고 대문을 잠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주로 와서 남편에게 이야기해줬다. 며칠 뒤, 남편과 함께 외출하려고 나오는데 그 청년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제가 말했던 그 사람이에요.”라고 하자 남편이 악수를 청하며 “아, 잘 왔네. 정말 잘 왔어. 지금 우리 바쁘게 가야 할 곳이 있어 가니까 다음에 꼭 한번 놀러 오게. 우리 술 한 잔 같이하세.” 하고 바쁘게 길을 재촉했다. 그 뒤로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256.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아이를 다시 데려오시다

 

일주일 만에 시어머님은 아이를 데려오셨다. 그동안 아이가 없어서 부지런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는데 아이를 데려오시니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신 셈 치고 아이에게 신경을 쓰면서 한 장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이가 걸어 다니다가 날카로운 자개 조각에 찔려 피가 나는 일이 잦았다. 어른도 잘못하면 찔려 피가 날 때가 많았는데, 아이가 자개에 찔려 빼지 못하면 애를 먹어야 했기에 20kg 정도 나가는 아이를 업고 힘들게 일을 해야 했다. 시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시어머니께 돈을 계속해서 드려야 했기에 부지런히 했지만, 아이를 업고 하다 보니 힘이 들고 능률이 저조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많이 해서 작게 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일하니 기쁘게 할 수 있었다.

 

257. 유산 후 또 세 번째 임신을 하다

 

셋째 아이가 유산이 된 뒤, 또다시 셋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임신은 다른 때보다 유난히 입덧이 심해 밥을 전혀 먹을 수 없었다. 시동생과 시어머니 뒷바라지를 하려면 쉴 수가 없었기에 오로지 일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이를 업고 기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했다. 친정어머니는 다섯째 시동생 합격할 때까지만이라도 농사를 지어 돕겠다고 큰아이만 데리고 시골로 가셨다. 그러다 어느 날 오셔서 “임신까지 해 놓고 그렇게 찬밥으로 때우면서 세 살이나 된 큰애까지 업고 일하다가 큰일 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집에 다녀오마.”라고 하시더니 다음 날 전기밥솥을 사 오셔서 “고생이 되더라도 밥이라도 따뜻하게 먹으면서 일해야지, 그리고 김 서방 하루 종일 일하고 오면 따뜻한 밥을 차려 줘야지”라고 하셨다. 눈물이 났다. 돈이 없는 걸 뻔히 아는데 또 무엇을 팔아 전기밥솥을 사 오셨는지 마음이 저렸다. 하지만 찬밥만 조금씩 먹다가 따뜻한 밥을 먹으니 좋았다.

다음 날 시어머님이 오셔서 전기밥솥을 보시더니 “안 보이던 전기밥솥이 다 있네?” 라고 하셨다. 나는 “친정어머니께서 따뜻한 밥이라도 먹으면서 일하라고 사 오셨는데 어머니 가지고 가서 쓰셔요.”라고 하면서 용돈을 드렸더니 바로 밥솥 안에 든 밥을 그릇에 퍼 놓고 가져가셨다. 난 단 하루 썼을 뿐이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아줌마들이 전기세 10원 가지고도 머리채를 잡고 싸울 때라 서민들은 비싼 전기밥솥은 구경조차 못 했다.

친정어머니께는 너무 죄송했지만 ‘찬밥 먹으며 따뜻한 밥 먹은 셈 치자’는 마음으로 드리고 나니 마음이 뿌듯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이를 업고 계속해서 일을 한 탓인지 한두 방울의 출혈이 보였다. 전에 시댁에서 심하게 일하면서 임신 3개월 되었을 때 유산이 된 적이 있었기에 친정어머니께서 이번 아이는 태몽이 너무 좋으니 조심하라고 하셨다.그런데 출혈이 있으니 친정어머니가 “큰 아이 낳으려니 더 조심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광주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다녀오라고 하셨다. 광주의 한 산부인과에 가니 의사가 “출혈을 했으니 언제 유산이 될지 모르고, 8개월쯤 기형아를 낳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등 좋지 않은 말을 하여 크게 걱정되었다.

 

258. 아이가 죽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

 

결과가 너무 나쁘게 나와, 다른 병원에서 확실하게 알아보자고 하여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에 찾아갔다. “아이가 2주 전에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는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원장의 소리에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녜요,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 원장은 나의 아랫배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당신 자궁이 지금 썩어간다는 것을 왜 몰라요!” 하면서 화를 냈다.

그래도 나는 또다시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라고 했더니 원장은 나의 말을 무시한 채 남편에게 “선생님, 어떡하실 건가요?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아내가 위험합니다.”라고 했다. 분명히 태동이 있어 나는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기에 남편에게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 빨리 집으로 가요.” 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위험하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내의 몸이라도 빨리 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신 몸을 생각해서라도 의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절대로 수술하지 않겠다고 우는 나에게 가슴 아파하며 말했다.

원장은 계속 “당신 자궁이 썩어가고 있단 말이요.”라고 하더니 남편에게 “당신 아내 살릴라요, 죽일라요. 당신 아내라도 살리려면 빨리 수술해야 돼요. 안 그러면 아내와 아이 둘 다 잃을 것이요.”라고 하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남편을 설득했다. 나는 울면서 “아이는 절대로 죽지 않았으니 수술하지 않겠어요.” 하고 도망가려고 하자, 그들은 강제로 나를 붙잡아다가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양 손발을 묶는 것이 아닌가! 수술하지 않겠다고 소리 지르는 나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왼쪽 팔목에 마취제를 놓았는데 마취가 되지 않자 오른쪽 어깨에 놓았지만 그래도 안 되어 허벅지에 놓았다. 이렇게 간호사 세 사람이 마취를 계속해도 안 되니, 의사가 입에다 마취를 시도했지만 결국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마취가 안 된 상태에서 원장은 4개월 된 아이를 수술하기 시작했다. 마취가 되지 않았기에 나는 원장이 무엇을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기계로 돌리고 다음에 집어내고, 이런 끔찍한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15분이면 끝난다는 수술이 1시간 30분 넘게 걸렸다.

마취가 되지 않은 채 수술했기에 나는 모든 것을 보았고, 들었고,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수술을 끝낸 원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도 보았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한 짓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살인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손에 죄 없는 귀한 생명이 죽어가다니….’ 하고 생각하면서 한없이 울부짖었다.

 

259. 수술이 끝나고부터 진통이 시작되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몇 초의 간격도 없이 계속해서 진통을 겪었다. 아이 낳을 때의 진통은 계속 오는 것이 아니라 간격을 두고 오는 것인데, 1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계속 진통이 온 것이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오신 우리 이모님은 내가 죽는 줄 알고 “아가, 아가 눈을 떠봐, 정신 차려!”라고 하면서 우셨다. 병원에서는 나를 한 시간이 넘도록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가, 우리 이모님이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도 그대로 놔둘 거냐?”라고 하며 호통 치시자 그때야 네 사람이 함께 들어서 분만실로 옮겼다.

병원에서는 나를 진통제로 겨우 숨을 쉬게 한 다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병원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피가 펑펑 쏟아져 나왔기에 다시 들어가 말했더니,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아요.”라고 하면서 솜뭉치 두 개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하라는 대로 했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기에 피가 밖에까지 새어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친정어머니는 멀쩡한 사람이 병원 갔다가 초주검이 되어 들어오는 모습에 너무 놀라 당황하셨으며, 아이를 잃었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라고 통탄하며 우셨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 같은 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셨던 어머니께서는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네 몸 관리라도 잘해야 한다.”라고 위로하시며 나를 극진히 간호해 주셨다.

 

260. 계속되는 출혈

 

병원에서 돌아온 뒤부터 소변이 3분 간격으로 계속 나와 낮에도 밤에도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친정어머니는 소변을 보게 하려고 나를 일으켜서 계속 요강에 앉혔다가 자리에 눕히기를 밤새 반복했다. 남편은 너무 안타까워 차라리 기저귀를 차라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소변 때문에 내가 일주일간을 잠을 자지 못하자 어머니는 괘종시계 소리마저 나지 않게 하시고, 밖에 서서 계시며 길 가는 사람들에게까지 조용히 해달라고 하셨다.

그러한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눈을 붙일 수가 없었고 출혈 또한 계속되었는데, 일주일쯤 후에는 피가 검붉은 색으로 변하여 흘렀다. 병원에 연락했더니 빨리 와보라고 하여 나는 남편의 부축을 받아 병원에 가고 친정어머니는 남편에게 나를 입원시키라고 신신당부하신 후 두 아이를 데리고 시골집으로 내려가셨다. 겨울이 아닌데도 춥고 떨리는 비정상인 몸 상태와 너무 아파 고통받는 것을 보시며 너무 안타까우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