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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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출혈이 그치지 않아 재수술 하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아무 말도 없이 수술대에 올려놓고 또다시 수술하기 시작했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이모님께 재수술했다고 전화를 걸었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의사가 “잘못된 것 좀 제거했지, 무슨 재수술이야?”라고 하며 호통치는데 그때 이모님이 들어오셨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잘못된 것 좀 제거한 것이 잘못이에요?” “처음부터 잘했어야죠. 일단 잘못되어 아프니 입원이나 시켜주세요.”

그 말을 들은 병원원장은 “무슨 입원을 해요? 아무렇지도 않은데….”라고 하며 입원을 시켜 주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으로 갈 수가 없어 여관으로 갔더니, 10월 1일인데도 연탄불을 피우지 않아 하숙집, 여인숙, 호텔까지 다 들렀지만 아무 데도 불을 넣는 곳이 없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결혼한 시누이 집으로 가니, 시누이와 시누이 남편은 나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장작불을 지피고 연탄불도 함께 때주어 추운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재수술을 받고 소변은 15분 간격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따로 방을 내준 것이 아니기에 소변으로 인해 밖으로 들락거리다 보니 너무 힘들어 결국 시누이 집에서도 전혀 자지 못하고 집으로 와야 했다. 수면제라도 먹으면 잠을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남편은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찾았는데, 수면제는 없다고 하며 안정제를 지어주어 가지고 왔다. 나는 잠을 자다가 소변을 보더라도 할 수 없다면서 안정제를 먹게 되었다.

 

262. 죽어있는 아내를 본 남편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병원에 다녀온 뒤로 나의 병간호를 하기 위해 잠을 거의 자지 못하던 남편은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자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서 깊이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참 잘 됐다. 진즉 그런 방법을 쓸걸.’ 하며 다시 자려고 하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아내를 만져 보자 온몸이 돌처럼 굳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그때 시간은 새벽 3시경, 나의 눈을 떨리는 손으로 뒤집어본 남편은 검은자는 없고, 흰자위만 보이자 아연실색하였다. 수술 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잠 한숨도 자지 못하고 전혀 먹지도 못한 몸에 신경안정제 한 알을 먹었는데, 수술 후 8일 만에 죽었던 것이었다.

남편은 정신을 못 차리다가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최선의 방법을 써 봐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나주에 하나밖에 없는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원장이 12시까지 술 먹고 들어왔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이 진료를 못 본다고 했다. 병원을 다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나주에 종합병원은 없었고 개인병원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만약에 그 원장이 술을 먹지 않고 진료를 봤더라면 산부인과 쪽으로 봤을 텐데 술 먹게 한 것 또한 주님의 안배하심이리라.

 

263. 담장을 넘어서

 

그 당시 통행 금지가 있었으므로 자정만 넘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나주에서는 공중전화가 없어서 남편은 전화하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경황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 직장 사무실 담장을 넘어 들어가 전화번호부를 보고 광주, 목포에 있는 산부인과라는 곳은 모두 전화해봤지만, 환자를 받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부인은 죽어있는데도 병원을 찾지 못한 남편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때야 대학병원 응급실을 생각해냈다. 통행 금지 시간 때문에 파출소에 연락하고 직장 운전기사 집 담장을 넘어가 사람들을 깨운 뒤, 숙직하던 두 사람과 기사와 네 사람이 함께 죽어있는 나를 들어서 차에 올렸는데 너무 무거워서 혼이 났다 한다.

 

264.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어서 돌아가거라.”

 

어떤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여러 사람 대열에 끼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왜 네가 여기 왔느냐, 네가 해야 될 일들이 많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어서 돌아가거라.”라고 하는 음성이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내가 가만히 있자, 누군가가 “너에게 말하지 않느냐?”라고 하며 내 등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눈을 뜨게 되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지나서였다. 영화에서만 봐왔던 장면을 내가 직접 체험하다니…. 처음에 눈을 떴을 때는 희미하게 어떤 물체만 보였는데 그 물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더니 어렴풋이 남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몇 사람이 가운을 덮고 있던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구나.’ 나는 꼭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265. 수술한 지 13일 만에 태가 나오다

 

죽었다가 살아난 지 3일 만에야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퇴원하여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안 계셨기에 안집 아주머니가 죽을 쑤어주셨다는데, 전혀 생각나질 않았다. 딸이 입원했으려니 생각한 어머니는 5일 만에 집에 오셔서 딸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이 우셨다. 어렸을 때는 장사 나갔다 돌아오셔서 어린 딸이 불쌍해서 우셨는데 그런 어머니께 시집가서라도 효도를 하고자 했건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술한 지 13일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방에서 요강에다 소변을 보는데, 아기 날 때처럼 힘이 써지며 무엇인가 뭉클하게 나왔다. 어머니께 “요강을 화장실에 버리지 말고 하수구에 부어 봐주세요.”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뭉클하게 나왔던 것은 바로 아이의 태였다. 하루만 안 나와도 위험하다고 하는 태가 13일 만에 나온 것이다. 깨끗하게 씻어달라고 하여 나주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을 했는데, 그것을 본 산부인과 원장님은 “웬 떨어져 나간 아이의 태를 다 가지고 다녀요?”라고 하며 언짢게 큰소리쳤다.

 

266. 항의를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아이를 잃은 것은 너무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프지만 한 번 그렇게 된 거 없었던 일로 셈 치고 봉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그런 피해를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의 태를 가지고 병원에 가서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친정어머니와 남편은 “그 사람들이 잘해주려고 했겠지, 못 해주려고 그랬겠느냐?”라고 하였다.

자식을 잃은 엄마와 옆에서 지켜본 사람과의 생각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나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누가 보장할 것인가? “아이가 죽지 않았으니 수술하지 않겠어요! 지금 아이가 놀고 있다고요.”라고 하며 그렇게 울부짖으며 매달리고 사정했는데도 의사는 도망가는 나를 강제로 끌어다가 수술대에 팔다리를 꽁꽁 묶어놓고 수 했다.

그때 남편은 의사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기에 ‘아내가 아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고집을 부린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아내가 아닌 것에 대해서 그렇게 고집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분별력을 가지고 아내의 말을 들어줬다면 상황은 천지 차이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절규보다도 그들의 말을 더 믿었기에 간호사와 의사들이 나를 잡아가는데도 말리지 않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는데 수술이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남편을 속이고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4개월 된 아이는 죽었다 해도 유도분만을 해야 하는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두 시간여 동안이나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나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된 채 강제로 잡혀가서 낙태를 당한 것이다. 더군다나 수술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내 몸 안에서 태가 13일간이나 머물러 부패하고 있었으니 몸은 더욱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태아와 임신부가 돈벌이 수단으로 희생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항의하려고 했던 것이기에 친정어머니와 그이의 간곡한 만류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셈 치기에는 너무 큰 아픔이었다. 살아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절규하던 아내의 말에 귀 기울여 배를 한 번만 만져봤어도 아이가 노는 것을 알았을 텐데 의사의 말만 믿었던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남편이 마음 아파할까 봐 단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다.

이는 의료사고가 아니라 엄청난 범죄행위였지만 나는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면서, 처절하게 아픈 마음을 아이가 없었던 셈 치고, 교통사고가 난 셈 치고 봉헌하며 돈의 노예가 되어 살인을 일삼던 그들을 용서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죄 없는 태아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산모까지 죽일 수 있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다시는 그런 살인을 저지르지 않도록 간구하며,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 죽어간 태아의 명복을 빌었다. ‘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힘이 없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해 너를 지키지 못했구나.’

 

267. “여보, 미안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 남편은 나의 손을 꼬옥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여보,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고 시가집 돌보랴, 남편 돌보랴, 시동생들 돌보랴, 다섯째 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도 큰아이를 업고 열심히 일하다가 당신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모두가 내 탓이야. 여보, 이제 잘할게. 잘살아 보도록 힘을 다하여 내가 노력할게, 응? 여보.”라고 하며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아내의 얼굴을 만지며 남편은 울고 있었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날 때는 작았지만 큰딸도 젖만 먹고도 무럭무럭 자랐고, 둘째인 큰아들은 젖으로 키운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8.4kg이 넘어 간호사들도 놀랐다. 그리고 돌이 되자 우량아 선발 대회에 내보내라고 했고, 두 돌이 지난 뒤에는 20Kg이 나가 너무 커서 징그럽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동생들 가르치느라 골동품 자개를 만들면서 자개들을 풀로 붙여야 하는데 아이가 이것저것 만지니 풀도 먹을 수 있었고 뾰쪽한 자개에 찔릴 수도 있어 내려놓지 못하고 업고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니 남편 마음이 더욱 아팠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 병원이 궁금하여 찾아가 봤더니 그 병원은 없어졌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그 병원 원장은 그렇게 야비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낙태를 강행하다가 내 아이가 희생된 지 3년 만에 그 만행이 들통나 문을 닫고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내 마음은 씁쓸했다. 내가 그때 남편과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내 생각대로 했었다면 많은 아이를 구하고 산모들의 건강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순명이라는 미명 아래 무고한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팠던 나는, 하느님을 알고 나서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줬다.

 

268.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강제 낙태를 당하고 난 뒤, 나의 온몸이 굳어지기 시작하여 남편과 어머니가 교대로 마사지해야 했다. 몸이 바닥에 닿는 곳은 다 굳어버리기 때문에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물러 주어야 했다. 병원에 가기조차 힘이 들어 매일 집에서 주사를 맞아도 고통은 도무지 그치지 않고,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불러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면서 보내는 나날은 한숨뿐이었다. 우리 집 생활이 너무 어려워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도 사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누워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떤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시동생만은 꼭 성공시켜야겠다.’라는 집념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269. 한의원에 찾아가니

 

친정어머니께서 돈을 구해 오셔서 그이에게 “어디가 용하다는 한의원이 있는데, 데리고 가보게.” 하고 말하니 그이는 택시를 불러 나를 태우고 그곳을 찾아갔다. 차에서도 몸이 굳으니 이쪽저쪽으로 나를 건너다니면서 주무르기를 계속했다. 한약방에 도착하니 손님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모두 자신의 순서를 양보해 주었다.

한의사의 말을 듣고 나는 울고 말았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도 나의 아픈 곳을 상세하게 잘 알고 있는지 너무나 놀랐다. 나에게 어디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더라도 나조차 아픈 곳을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 이제 됐다. 진맥을 너무 잘하니 약도 잘 듣겠지.’ 하는 생각으로 한약을 지어 와서 달여 먹었으나 그대로 모두 다 토해내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무슨 약이 듣는단 말인가? 무엇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약과 음식 모두를 먹을 수 없으니, 나를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남편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270. “당신들, 며느리 구박 그만하시오.”

 

어느 날 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시작은 어머니가 계략을 꾸몄다. 시골에 계시는 시할머님과 시작은어머니, 그리고 시어머님이 어느 날 갑자기 시골 시작은어머니 댁으로 나를 불러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다.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어린 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 되어 따라갔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점쟁이 집이었다.

점쟁이가 내 나이와 생일과 시를 말하라고 하여 말했더니, 신이 들린 것처럼 “너같이 천한 것이 어찌 우리 집에 들어와 가문을 더럽히느냐. 당장에 이 집에서 나가거라!”라고 하면서 온갖 욕을 해대었다. 아기 업은 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 처지가 너무 처량하여 눈물이 나려 했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고 사랑받은 셈 치려 했지만, 이 상황은 해도 해도 너무 가혹했다.

그런데 그토록 심하게 욕을 해대던 점쟁이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어 시댁 식구들을 향해 “당신들, 이 며느리 금 방석에 가만히 앉혀놔도 될 사람인디 그렇게 구박하다니 구박 그만하시오! 하늘에서 내려준 이 며느리를 방안에 가만히 앉혀놓고 먹여도 시원찮은데 그렇게 구박하고 쫓아내려고 하다니 쯔쯔쯧.”라고 하는 등등 처음과는 정반대되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며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시작은어머니가 혼비백산해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하고 싹싹 빌었다. 나는 그동안 결혼해서부터 빚 갚아주기 시작하여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빚보증과 시댁에 빚 얻어서 돈 대드리고, 온갖 구박 다 받아 가며 돈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힘들게 살면서 시달리며 받아왔던 서러움들이 사랑받은 셈 치기에는 너무 버거울지경에 이르러, 복받치는 눈물이 한꺼번에 왈칵 쏟아져 내렸다. 언젠가 시어머님께서는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들이 깊은 관계일지라도 사주만 좋지 않았으면 헤어지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점쟁이와 미리 짜놓고 나를 데리고 점쟁이에게 간 것은 점보기를 좋아했던 시작은어머니가 “점쟁이한테 데리고 가서 홀어머니 밑에서 혼자 옹호 받고 커서 맨날 아프기만 한 저 애를 친정으로 보내 버립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떨리고 두려웠겠는가! 그 자리에 친정어머니나 남편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긴장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 둘을 낳고 사는 며느리가 그동안 시집을 위해 도움을 줄 때는 그렇게도 만족해하고 좋아하셨지만, 몸이 많이 아프고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으니 불만스러워하시며 점을 보고 그 점괘를 핑계로 나를 내보내려고 하셨으니…. 그 말들과 행동 속에서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와 아픈 마음을 당해 보지 않고는 그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그 점쟁이를 통해서 악을 선으로 바꿔주신 주님의 놀라우신 계획이었음을 그 당시 어찌 알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