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제목 없음
   

목차 보기 1

목차 보기 2

목차 보기 3

목차 보기 4

 

   
   

 

 

 

 

 

271. “처녀 장가 보내줄 테니 아픈 마누라 보내버려.”

 

남편이 의형 집에 가자고 하여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아이들과 함께 남편 의형 집에 갔다. 그 집에서 잠을 자고, 힘들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아침을 준비하는데 안방에서 남편 의형의 소리가 들려왔다. “만복아! 아파서 비실거리는 마누라 내보내 버려라, 내가 처녀 장가 보내줄게.”라고 하는데도 남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혼자 옹호 받고 커서 저 모양이지.”라고 하는 의형의 소리가 밖에 있었던 나에게까지 크게 들려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않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던가. 또 우리 어머니께서도 아비 없는 자식, 홀어미 딸 소리 안 듣게 하시려고 얼마나 엄하게 기르셨던가! 그렇게 살아오신 내 어머니를 욕되게 하는 치욕적인 말에 나는 보이지 않는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거기다가 그분의 큰딸이 한마디를 또 덧붙였다. “저렇게 아픈 딸을 왜 시집보냈을까? 나 같으면 아픈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라고 하더니 “나 같으면 시집 안 갔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편에게 먼저 가겠다 하고 그 집을 나오니 남편이 뒤따라왔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안심이에요, 광주 어머님도 건강한 며느리를 원하였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당신은 참 좋은 형님을 두셨어요.”라고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이제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처녀 장가 갈 수 있으니 말이에요.”라고 하는 나의 말에 남편은 “여보! 당신은 농담으로 한 말 가지고 뭘 그래.”라고 했다. 무심코 하는 한마디 말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아픔과 상처를 주며 영혼을 죽이는 것인지? 나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들이 냇가에서 조그만 돌을 재미로 던지고 있을 때, 한 개구리가 냇가에서 나와 그 애들에게 하는 말이 “얘들아, 너희는 그 조그만 돌을 재미로 냇가에 던지지만, 그 돌에 맞아 내 동료들은 죽어 가고 있단다.”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272.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미련 없이 떠나자

 

“건강한 며느리 데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이!”라고 하시던 시어머님 말씀과 “처녀 장가보내줄게!”라고 하던 남편의 의형, 나를 시집에서 내쫓기 위해 점쟁이와 짜고 나를 점쟁이에게 데려갔던 시작은 어머니의 일들은 병약해 있던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옳은가를 분별할 수가 없었다. 상의할만한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곁에서 조언해줄 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시댁을 위해서라면 몸이 으스러진다 하여도 이 한 몸 온전히 불태워 살아보려 했던 불굴의 의지는 “맨날 아프기만 한 저 애를 친정으로 보내버립시다.”라고 하던 시작은어머니, “아파서 비실거리는 마누라 보내버려, 내가 처녀 장가 보내줄게!”라고 하던 의형의 말에 모든 것을 셈 치며 굳건하게 살아왔던 나의 마음과 함께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보라와 비바람 속에서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푸르름을 잃지 않고 더 나은 관대한 삶을 살며 모든 이에게 기쁨과 희망과 화평을 줄 수 있는 평화의 길잡이로 살기를 원했는데, 나의 의지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고통이 나를 지배하였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나의 꿈을 실현하고자 어떻게 해서든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일어나게 되기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의 그 심란한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나에게 남편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걸림돌같이 생각하고 있음에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자신이 없어지며 무기력해졌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좋아, 그이를 위해서 내가 없어져 주는 것이 최선의 길일까?’ 하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지며 번민에 싸이게 되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 내 마음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묻혀 가고 있었고, 험난한 나의 인생행로가 너무 힘겹고 벅차 절망에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잘살아 보려고 피나는 노력으로 내 몸 사리지 않고 일해 왔던 노력의 대가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기에 나를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없어져 주자. 모두가 나 하나 없어짐으로 인하여 화평해질 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못 하겠는가.’ 남편은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뻐꾸기를 생각해 보았다. 뻐꾸기는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아둔다. 그러면 다른 새가 뻐꾸기를 대신해서 키워준다는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그래, 나 대신 좋은 엄마를 만나 잘 살 수 있을 거야.’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나는 남편에게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는 간단한 유서를 남기고 아무도 보지 않는 밤 시간을 이용하여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다는 저수지로 향해 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머니, 나 하나를 위하여 그 숱한 고통 중에도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신 어머니! 이 못난 불효녀를 용서해 주세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졌어야 했는데….’ 내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아버지를 따라 함께 죽자고 하셨다. 함께 물에 빠졌다가 행여 딸이 혼자 살아나게 되면 고아가 될 수도 있으니 딸이 죽은 것을 확인하신 후 죽기 위해 나의 발을 잡고 거꾸로 샘 속에 집어넣으셨는데….’

그렇게도 발버둥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딸을 어머니는 차마 죽일 수가 없어 힘겨워도 이제까지 살아오셨는데,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 두려움 없이 가자. 사랑하기에 떠나자.’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나는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73. “불쌍한 네 어머니는 어떻게 하려고….”

 

얼마쯤 들어갔을까? 몸이 물속에 잠기려고 하는 순간, “불쌍한 네 어머니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물속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죽을 용기가 부족함인가? 아니면 내가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니까 어머니 걱정에 마음속에서 느낀 소리인가?’ 하고 생각했다.

수영도 전혀 못 했던 내가 이제는 저수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심산으로 위로 올라가 눈을 감고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또다시 “너를 낳아 기른 네 어머니를 생각해 보아라.”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274. 불쌍한 내 어머니를 위하여 내 생을 바치고자 결심을 하고

 

나는 밤을 지새우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래, 이제 남은 생애를 나 하나만을 위하여 희생해 오신 불쌍한 어머니를 모시고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살아보아야지. 이제까지는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희생하셨지만,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차례다.’ 지난밤에 썼던 유서를 찢어버리고 다른 내용의 글을 써놓은 뒤,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기회를 봐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친정어머니께서는 나의 행동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시고 “어떻게 왔느냐?” 하고 물으셨다. “김 서방이 수원으로 출장을 가서 그동안 여기에서 좀 있으려고 왔어요.”라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그래?”라고 하셨다. 무슨 결정을 내려야 되겠는데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 당시에는 100여 호가 넘는 그 동네에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집이 한 집뿐이었다. 밤이 되자 큰딸이 “텔레비전 보고 싶어.”라고 하여 어머니께서는 그 집에 함께 가자고 하셨고, 답답했던 나는 딸을 데리고 따라갔다. 그 집은 전에 남편을 사위 삼으려고 애썼던 외재당숙의 집이었다. 그 동네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들어왔을 때라 외재당숙모님들과 동네 아줌마들이 많이 와계셨다.

그런데 어머니 재종동생인 그 외재당숙이 나를 보자마자 “김 서방 단속 좀 잘해라.”라고 하시기에 “왜요?” 하고 모르는 척하고 물었더니, “남자들이 잘생기면 여자들이 따르는 법이다. 남자들이란 그럴 수가 있는데 호주머니가 가벼워질 수 있어서 말해준다.”라고 하며 여러 말을 하셨다. 옆에 계시던 외재당숙모님들도 그것 보라는 듯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전에 돈 많은 집에 시집가라고 하셨던 분들이 계셨기에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텔레비전 때문에 이 집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나는 외재당숙에게 “그 아가씨는 저의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데 가서 좀 도와주라고 제가 남편에게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요? 나쁜 눈으로 보면 모두가 나쁜 거예요. 검은 눈으로 보면 검게 보이고, 맑은 눈으로 보면 맑게 보이는 거예요.”라고 하는데 눈물이 나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분은 진흥회 회장으로서 내 남편을 자기 사위 삼으려고 애썼던 분이며, 그 딸도 내 남편을 너무나 좋아하여 나와 결혼하기 전에 남편을 만나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나로 인하여 마음에 두었던 사람을 사위로 삼지 못한 사실이 나를 보자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지성인으로서 정말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받은 셈 치고 집으로 왔다.

 

 

275.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돼.”

 

어머니는 우울한 나의 모습에 눈치를 살피시다가, 기회를 놓칠세라 “너 무슨 일 있지?” 하고 물으셨다. 때는 이때라고 생각한 나는 남편과 헤어져야만 하는 사정을 말씀드리며 “어머니, 죄송해요. 김 서방과 헤어지고 나 어머니 모시고 살게요. 허락해 주셔요, 네?”라고 하자 아주 쉽게 “그래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허락해 주실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그 꼴을 볼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방에 가만히 누워 있을 테니까 이 집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놓고 그 뒤로는 네 맘대로 해라.”라고 하시며 밖으로 나가시더니 석유곤로에 쓰기 위해 사다 놓은 통에 든 석유를 가져와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어떤 타협도 할 수가 없었다. 나 하나만 보며 살아오신 어머니를 속상하게 해 드릴 수 없었기에 어머니께 용서를 청했다. 그러나 앞으로 살아갈 길이 캄캄하고 암담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하염없이 울고 말았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며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나?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하기만 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어머니가 서둘러 나주에 함께 가자고 하시기에 나는 거역할 수가 없어서 따라갔다. 남편은 퇴근하고 나를 데리러 오려고 했었다 한다. “여보! 미안해, 이 모든 것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 이제 우리 함께 힘을 모아 새롭게 시작합시다.” 하면서 아내 없는 하룻밤을 지내면서 쓴 글을 보여주었다.

“여보! 당신을 생각하는 순간순간이 행복한 고독이요, 즐거운 고통이라는 생각 속에 오직 당신으로 인하여 나는 오늘도 존재하고 있소. 이 시간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오. 당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이 곧 나의 눈물이란 걸 당신은 알고 있지 않소. 눈을 감으나 뜨나,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내 마음은 가득 차 있소.

당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곧 나의 피요, 나의 뛰는 심장의 고동이 곧 당신의 맥박이니 내가 곧 당신이요, 당신이 곧 내가 아니요.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고, 당신이 곧 나로 인하여 존재하는 이 모든 대자연이 곧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오. 내 사랑하는 당신, 우리의 꿈의 낙원을 이룩해 봅시다.”

 

276. 사이비 종교인 줄도 모르고

 

1975년 봄, 이가 아파도 시어머니 돈 해드려야 하므로 치과에도 못 가고 누워 있다가, 도저히 더는 못 견디고 사사로 하는 치과에 갔다. 그의 부인이 내가 환자라는 것을 알고 자기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데, 좋은 곳이 있어 가려고 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 아이가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 예쁘고 귀여워 나무랄 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후에 움직이는 것을 보니 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머, 어쩜 좋아. 저렇게 예쁜 아이가 저 모습이 되다니….’ 내가 아픈 것보다 그 아이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아무도 몰라야 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지리산에 있는데, 거기에 가면 병이 다 치료될 수 있어. 돈은 하나도 들지 않아도 되니 빈손으로 가도 돼.”라고 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중얼거렸다. “나 하나만을 키우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가슴에 딸의 무덤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그동안 잘살아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잘살아 보려고 몸부림쳤던 나에게도 이제 살길이 생겼다.’라는 생각에 나는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남편은 너무 놀라 “여보, 정신 차려. 거기는 사이비 종교야, 절대로 가면 안 돼!” 하고 말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이성을 잃은 나는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나는 가야 해요. 딸 하나만을 위해 한 생을 바쳐 오신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던 나는, 다음날 떠나려고 작정하고 짐을 꾸려 놓은 후에 누워 있었다. 병원이며 용하다는 한의원을 다 다녀 봐도 아내의 병을 고쳐 주지 못한 남편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누워 있는 아내를 측은히 바라보고만 있기에 나는 남편이 안쓰러워 “텔레비전이나 보세요.” 하고 말했다.

남편은 즉시 TV를 켰다. 그런데 TV를 켜자마자 “여보, 저것 봐!” 하고 부르짖듯 급하게 외치는 남편의 말을 듣고 TV를 보는 순간, 나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내일이면 만날 수 있는 교주가 손에 수갑을 차고 잡혀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하느님의 손길이 나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몰랐기에 앞길이 막막해져 ‘내가 살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며 울고 말았다.

 

277. 임신 3개월에 터미널에서 당한 구타

 

남편이 영암 지소장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위해 남편과 함께 영암에서 방을 얻으러 돌아다녔다. 적은 돈으로 방을 얻어야 했으므로 어렵사리 방을 얻어 계약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남편과 함께 버스 계단을 막 오르고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여기에 누군가 창녀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가까이서 “저런 똥갈보같은 년은 죽여 버려야 돼!”라고 하여 ‘누가 그렇게도 잘못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어떤 창녀가 있나?’라고 하며 내려다보다가 나는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그 욕설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향하여 퍼부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자식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 년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있어!” 나는 너무 놀라 당황하였지만, 옆에 있는 남편이 있었기에 힘이 되어,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즉시 “너 이 년 이리와, 죽여 버리겠어.” 하고 나를 확 잡아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남편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그는 나를 발로 차고 막무가내로 짓밟았다. 남편이 그를 막으면서 “내 부인이오!”라고 해도 소용없었고, 함께 방을 보러 다녔던 집안 시누이가 “우리 올케언니예요!”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나를 일으켜 세우니 “유부남을 쫓아다니는 저런 년을 죽여야 돼!”라고 하며 또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남편이 “나의 부인인데 왜 그러느냐!”라고 하여도 패악이 계속되자 남편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몸으로만 나를 이리 막고 저리 막았다. 그래도 그 청년이 계속 나를 죽이겠다고 하자 남편이 “멈춰! 네가 뭔데 감히 남의 부인의 몸에 손을 대!” 하고 소리치니 그 청년은 그 틈을 이용해 또 나를 여지없이 발로 차고 때렸다.

얼마나 세게 차 버렸는지 차 타는 곳에서 차가 오가는 신작로(큰 도로)에 뚝 떨어져 가야 할 버스도 가지 못하고 오가던 차들도 다 정지되었다. 그 많은 사람이 차에서 내려다보고, 일부는 내려와서 구경하고,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도 다 모여들어 그 근방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다시피 하였다. 남편은 시누이에게 나를 맡기고 파출소에 달려갔는데, 그 청년은 그 순간에도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 더러운 년아, 똥갈보 같은 너를 내가 변소로 데리고 가서 콱 박아버릴 거야!” 하고 나를 끌고 가는데 누구 하나 말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그 청년과 실랑이를 하다 보니 나의 옷은 물론 그 청년의 가죽 잠바도 많이 찢어졌다. 평상시에도 먹지 못하여 몸이 쇠약했지만, 그때는 강제로 당한 낙태로 인하여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상태였고, 그에 더하여 병원의 권유로 임신하여 입덧까지도 심하였으므로 고통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278.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나는 나를 폭행한 그 청년과 함께 파출소로 연행되어 갔다. 그때 출혈이 조금씩 시작됨을 느꼈다.

조서를 다 꾸미고 난 뒤 나를 폭행한 그 사람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누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누님이 너무 예쁘고 어리게 보여 열아홉 살인 제 동생의 또래인 줄 알고 혼 좀 내주고자 그랬습니다. 부부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 했기에 유부남을 따라다니는 처녀들과 같은 부류로 몰아버려 이렇게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위인데 한참 밑의 동생으로 생각하였으니 용서해 주신다면 새 출발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용서 청했다.

나는 성호경을 크게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하고 용서해 주었다.

나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늘 하느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소중한 아이까지 잃었지만 그를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용서한다는 말이 나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파출소 직원들이 손을 이마 옆에 대고 빙빙 돌리며 “이 사람들 정신이 돈 사람들 아니야?” 하고 소곤대며 비웃었다. 그들의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옷이 다 찢기도록 폭행당하고, 막 끌려다니며 맞고도 조건 없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했으니 하느님을 몰랐던 그들에게는 생소하게만 느껴졌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란 것을…. 이 일로 임신 3개월이 된 아이가 유산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산이 되었다는 것은 남편과 시누이만 알고 있었다.

 

279. 태아는 유산이 되고

 

파출소를 나오자 출혈이 심했지만,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없었다. 조서까지 끝마치고 파출소에서 나오니 시간이 너무 늦어 병원이나 약국 모두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영암에는 밤늦게 찾아갈 수 있는 응급실도 없었다. 급한 대로 패드라도 살 수 있었다면 그런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을 터였지만, 슈퍼도 문 연 곳이 없어 그조차도 살 수 없었기에 화장실에 가서 패드 대신 속옷을 찢어서 임시방편으로 하혈을 막았으나 피는 계속 새어 나왔고, 통증은 너무 심했다.

‘배상받는 것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며 행한 나의 용서가 그 청년이 새사람으로 태어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내가 당한 그 모든 고통들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그 당시 나는 아직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이유도 모르는 채 폭행을 당해 아이까지 유산되었어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또한 젊고 예쁜 내 탓으로 받아들여 사랑받은 셈 치고 그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었다.

이를 모든 이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그 청년 엄마의 입장에 서 보았다. 이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 잘못되는 것을 가만히 보겠는가! 하물며 그 청년의 어버이가 그렇게 가르쳤겠는가?

아이들 키우는 것만은 부모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했거늘, 아이를 갖기 위하여 그렇게도 고생했는데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소중한 아이까지 잃게 되니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그 청년의 앞날을 생각하며 아픔 중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었다. 내가 당한 일들 때문에 그 청년이 구속되거나 또 내가 손해 배상을 받는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조건 없이 베푼 나의 용서를 통해 그 청년도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기 바랐다.

 

280. 방세 치를 돈이 없어

 

시어머님이 우리의 방값을 미리 빼 가시면서 우리가 영암으로 이사 가면 주시겠다고 하셨기에 그 말을 믿고 방세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이사 가는데, 인편을 통해 5,000원을 보내주셨다. “세상에, 웬일이야. 멀리 가니까 이사비용도 다 주시는구나.”라고 하며 너무나 감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을 뿐, 그 뒤로는 한마디 말씀도, 소식도 없어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혹시 방세 치를 돈을 가지고 내려오시려나 생각했지만, 끝내 방값을 주시기는커녕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친정어머님이 즉시 광주로 올라가셔서 이모님께 부탁하여 빚을 내 방세 치를 돈을 마련해 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