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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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형님, 누님! 어디 가세요?” 하고 달려온 사람은?

 

광주 시댁에 가기 위해 남편과 함께 영암 버스 정류장에 나갔는데, 어떤 청년이 달려오면서 “형님, 누님! 어디 가세요?”라고 했다. ‘어? 나에게 누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하고 바라보았다. “형님, 저예요. 저 모르시겠어요?”라고 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니, 파출소에서 내가 용서한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용서받았던 그 청년이었다.

남편은 반갑게 그와 악수를 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누님, 괜찮으세요? 그날 정말 죄송했어요,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라고 하면서 남편에게 어디 가냐고 물어보았다. 남편이 광주 집에 좀 다녀오려고 한다고 하자 잽싸게 광주 차표 두 장을 끊어다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매표소에 근무했는데 그 뒤로도 우리가 영암을 떠날 때까지 우리가 정류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반드시 쫓아와서 표를 끊어 주었다.

 

282. 아이를 가지면 계속 유산이 되다

 

산부인과에서 강제로 당한 수술로 인하여 임신이 어려운 데다가 정류장에서 청년에게 무차별하게 당했던 폭행으로 인하여 유산이 된 이후, 아이를 가지기만 하면 2~3개월쯤에 계속 유산이 되어 여러 가지로 방법을 강구해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쇠약한 데다 임신만 하면 계속 유산이 되니 몸은 더욱 힘들어졌다.

큰딸이 6살이었는데 집에 있을 때는 심부름뿐만 아니라 설거지까지도 해줄 정도였다. 의사와 약사의 권유로 태반약이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그 약을 먹고, 주사도 맞으며 아이가 유산되지 않도록 하는 게 그때에는 나의 가장 큰 임무였다. ‘엄마의 실수로 인하여 고귀한 생명이 죽어간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의 책임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283. “먼지까지라도 다 털어서 시어머니 드리게.”

 

친정어머니는 딸을 출가시켰는데도 항상 마음이 편치 못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시골에서 우리 농사도 짓고 계셨지만, 돈 없이 아프기만 한 딸이 시동생들 가르치려고 먹지도 못하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 남의 밭농사까지 소작 얻어서 지어오셨다. 그렇게 농사지은 것을 바리바리 싸서 머리에 이고 끙끙대며 오시는데, 어머니께서 집으로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시댁으로 가지고 가다가 유산이 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시댁에 바치는 희생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하다가 자리에 누워 3일간을 꼼짝하지 못하자, 가까운 곳에서 살던 직원 윤봉두 계장님 부인이 먹을 것을 해다 주면서 “어이,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가?”라고 하기에 “그럼,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어.”라고 하자, “정말 별일이야. 남들은 못 가져와서 야단인데, 먹을 것도 변변히 못 먹으면서 친정어머니가 애써 해다 주신 곡식까지도 다 갖다 드리다니….”라고 했다.

“친정어머니께는 너무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젊으니까 괜찮아. 자녀들이 많은 시어머님은 더 못 잡수시고 못 쓰신다고 생각하니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지. 안쓰럽잖아.”라고 하자 그 친구는 “아이고 못 말려, 먼지까지라도 다 털어서 시어머니께 갖다 드리게. 천성이야, 천성.”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284. 큰딸이 입학을 하고

 

큰딸이 입학을 하게 되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묻는 말에 딸애 혼자 모든 것을 대답하고 손을 들어 칠판의 빈 곳에 글씨를 다 쓰는 것이었다. 입학하기 전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치원에 다녔는데, 우리 아이는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했고 집에서 공부도 별로 가르쳐 주지 못했는데 계속 1등을 했다.

그 당시 생일이 빠른 일곱 살은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는데, 일곱 살에 학교에 다녔기에 걱정스러워 혹시라도 잘하지 못할 것 같으면 1년 후에 보내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나 학교생활을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 욕심 많은 학부형은 처음 보네요.”라고 하며 놀라셨다. 나는 하느님 알기 전에는 모든 것이 1등이어야 했으나 하느님 알고 나서는 세상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았다.

 

285. 3만 원짜리 전셋집

 

셋째 아이를 임신하여 어렵게 생활하던 중 남편이 또 발령이 나서 이사를 해야 했는데, 시어머님께서 “다섯째에게 돈 20만 원을 보냈다.” 하고 돈을 요구하셨기에 방세를 빼서 20만 원을 채워드렸다. 그러고 나니 이사할 돈이 모자라 할머니가 혼자 사시는 집의 3만 원짜리 전세 단칸방을 얻어 갔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워 식사 때도 오시라고 하여 함께 식사도 하고, 음식도 함께 나누었다. 나는 노인들을 좋아한다. 특히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노인들을, 부족하지만 나의 사랑으로 채워 드리고자 노력했기에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기쁨의 일부가 되었다.

 

286. “여보! 나 없이도 살 수 있지?”

 

1976년 어느 날, 남편이 창백한 얼굴로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쓰러졌다. 놀라서 바로 눕히고 가족 모두가 걱정되어 둘러앉아서 지켜보고 있는데, 남편이 나의 손을 꼬옥 잡으며 “여보! 나 없어도 살 수 있지?” 하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닌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하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고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너무 놀라 남편의 눈을 뒤집어보니 아직 검은자가 보여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눈물 흘리며 급히 할머니께 부탁드렸다. “할머니, 지금 너무 급해요. 남편이 죽어가고 있는데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차를 좀 알아봐 주시면 좋겠어요. 트럭이라도 좋아요.”라고 했더니 평소 우리 부부를 좋아하시던 분이라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트럭이라도 타고 영암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 당시 영암 군서면에는 택시도 없어 부를 수 없고 영암 읍내에서 불러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해서였다.

영암 병원에 도착하여 진찰 결과 처음엔 혈압이 너무 높아 잡히지도 않더니 주사를 맞은 후 280 정도 나왔다. 계속 치료를 하자 220으로 떨어져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남편은 주사 맞는 것을 원래 싫어하여 입원해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듯 빨리 퇴원시켜 달라고 했지만, “지금 퇴원하면 위험합니다.” 하고 병원장이 직접 퇴원을 막았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병원장 모르게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고,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먹을 약과 주사약을 알아두었기에 약국에서 주사약과 필요한 약들을 샀다. 주사도 놓지 못하는 내가 주사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스러웠으나 남편이 너무 완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병원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간절히 간구했다. “하느님, 저는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이 제 남편을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주사를 놓았더니 남편은 “어? 병원에서 맞을 때는 엄청 아팠는데, 당신이 주사를 놓으니 하나도 안 아프네.”라고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혈압에 좋은 음식으로 식생활 개선에 무진 애를 썼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2주일 후에는 남편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안집 할머니는 “모두가 자네의 극진한 사랑과 정성 덕분으로 남편을 살린 게야, 혈압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자네의 그 착한 심성 덕분에 병이 빨리 나은 거야.” 하고 칭찬하셨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너무 부끄러웠지만, 부족하나마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이를 위해 노력하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287. 유치원 다니던 큰아들의 착함

 

남편이 발가락을 너무 아파해서 보니 생손앓이였다. 전에 나도 생손앓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약을 써도 낫지 않고 병원에 가도 치료가 안 돼 제비꽃을 찧어서 붙이니 금방 나았다. 그래서 뒷집에 들어가기 전 길가 풀 속에서 제비꽃을 땄다. 그때 유치원에 다니는 큰아들이 쫓아와서 “엄마, 안 돼!”라고 했다. “왜?” “이건 도둑질이야.” “이건 풀인데? 풀을 뽑는 거니까 도둑이 아니야.” 하자 아들은 그래도 주인에게 얘기하고 해야 한다고 했다.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남의 것은 절대로 손대거나 만져서도 안 되고, 더욱이 욕심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풀 한 포기라도 그냥 뽑으면 도둑이라고 하니 얼마나 귀엽고 기특한지 나는 아이를 안고 “그래, 엄마가 잘못했다. 주인에게 말하고 뽑을게.”라고 했더니 “응, 그래야 해.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라고 했다.

사실 길가에 난 풀이라 주인이 있을 수 없었지만 나는 바로 뒷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다. 뒷집 아주머니는 “우메, 뭔 이런 착한 애가 있대?”라고 하더니 아이에게 “어른 공경 잘하고 항상 착하게 사는 엄마를 닮아서 너도 그렇게 착하구나.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그 풀 다 파가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알았지?”라고 하자 “네, 감사합니다.” 하고 절하자 “아이고, 예쁜 것이 말도 예쁘게 잘하고 인사도 잘하네.” 하고 감추어 두었던 귀한 곶감을 내주었다. 그 후에도 아이는 길에서 물건이나 심지어 500원짜리 동전만 주워도 파출소에 가져다주니 어린 것이 어른보다 낫다고 파출소 직원들도 다 예뻐했다.

 

288. 오! 하느님, 그 집사를 용서하소서

 

어느 날, 안집 할머니가 외출 중이었는데 할머니가 가꾸어놓으신 잘 익은 호박 한 통이 없어졌다. 나는 혹시라도 나를 의심하실까 봐 걱정이 대단하였다. 샘터에서 빨래를 해서 오는데, 집 앞 가까이에 이르러서 어떤 사람이 가득 싣고 가던 볏단 달구지에서 벼 두 단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걸 모르고 가기에 ‘빨리 가서 알려줘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쏜살같이 걸어갔다.

그런데 우리 바로 앞집 아줌마가 볏단을 얼른 집어서 자기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란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아줌마가 교회 집사였기 때문에 더 놀랐다. 그래서 호박이 없어진 곳을 바라보니 그 집에서 충분히 딸 수 있는 거리였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틈에 호박이 없어져 혹시라도 내가 의심받을까 봐 걱정하던 차에 나는 그 집에 일부러 음식을 해 갖고 가서 부엌으로 들어갔더니 호박은 거기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오! 하느님, 그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소서. 나는 맥이 풀렸다. 남의 물건에 손도 대지 못하던 내가 하루에 두 번이나, 그것도 청렴한 줄로만 알았던 교회 집사가 남의 물건 훔치는 것을 보았으니…. 그전에 나주에서 보았던 할머니를 냉대했던 집사, 도둑질하는 집사를 떠올리니 하느님 믿는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던 나에게 하느님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289. 임신 9개월 만에 진통은 시작되었는데

 

아이를 가진 지 9개월째 되었을 때부터 진통이 왔다. 돈이 없어 병원에는 가지 못하고 한약을 달여서 마시면 낫겠거니 했다. 그런데 한약을 마시려고만 하면 진통이 멎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진통이 1개월 반이나 계속되었다. 1~2분 간격으로 진통이 올 때마다 달여 놓은 한약을 마시려고 입에 대기만 하면 진통이 멎었으며, 아이는 나오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고문과도 같았다.

친정 어머님은 두 아이를 돌보시면서도 계속해서 내 병간호까지 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첫아이 낳을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한약 두 첩 먹고 아이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먹지도 못하면서 한약을 달이고 또 달여 놨다가 결국은 먹지 못해 많은 약을 버리기만 했다. 이렇게 1개월쯤 고통을 겪다가 광주에 있는 산부인과를 갔더니 너무 놀라워했다.

“세상에, 이런 상태로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라고 하며 큰일 나기 전에 유도분만을 하여 아기를 낳도록 하자는 병원장의 말에 시어머니께 허락을 받기 위해 “준비가 안 됐으니 집에 가서 준비하고 올게요.” 하고 나오려 했다. 그러나 남편은 병원장님 말대로 하자고 권유했지만 나는 시어머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전화가 없었던 때라 진통을 겪으면서도 시댁을 향하여 몸부림치며 갔다.

 

290. 시어머님의 반대로 유도 분만을 하지도 못한 채

 

시어머님은 깜짝 놀라셨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며 빨리 유도분만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격분하신 시어머님의 말씀이 내 귀를 때렸다. “아기들은 누구나 시와 때를 맞추어 나오는 것인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서 아기가 저절로 나오기를 기다려라!”라고 하시기에 우리는 그대로 집을 나와야 했는데 진통이 너무 심하여 걷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남편은 너무 안타까워 “여보, 괜찮겠어?”라고 했다. 나는 아기가 나올까 봐 걱정되었지만,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명해야 된다는 생각에 괜찮다고 했다. 어렵사리 광주에서 영암 군서 집까지 계속 3분 간격으로 진통하면서 와야했다. 기다리던 아이가 나오지 않아 한의원을 찾았는데, 1주일 정도 기다리면 낳겠다고 하여 진통으로 계속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렸지만 아이는 소식이 없었다. 2주일을 기다려도 아이가 나오지 않자 또다시 한의원에 갔더니 이제는 아기 낳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