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내 딸을 꼭 좀 살려주시오.” 애원하시던 친정어머니
친정어머니께서는 한의원 원장님에게 “여보시오, 우리 딸을 좀 살려주시오.”라고 하자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병원으로 가 보시오.”라고 했다. 그곳에는 산부인과도 없을뿐더러,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다. 없는 살림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1개월 반 넘게 계속해서 진통을 겪었으니 무슨 힘이 남아 있었겠는가. 어렵게 아이를 낳아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친정어머니께서는 또다시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울면서 의원을 붙잡고 통사정하셨다. “여보시오, 어떤 방법이라도 좀 써주시오.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내 딸을 꼭 좀 살려주시오.” “혹시 용약을 먹으면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그럼 빨리 지어 주시오.” 하니, 의원이 한약 일곱 첩을 지어주어서 그 약을 달여 먹고 딸아이를
낳게 되었다.
292. 엄청난 출혈을
1977년, 나는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방은 피로 물들었고 몸은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아이 낳을 때 남편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나 남편이 출근하기 전이었기에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어머니와 남편이 드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가 싶더니 곧 정신을 잃었다. 그 뒤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와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된 나의 옷도 다 새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출혈을 했는지 어머니께서 손으로 훔쳐 담은 피가 요강으로 하나 가득, 큰 세숫대야로 하나 가득이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수혈은커녕 링거주사 한 병도 맞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미역국을 해주시면 그걸 어머니 눈치 봐가며 내가 먹은
셈 치고 남편 챙겨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이 낳은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우리 방에서 한참 먼 주인집에서 선풍기를 켜기만 해도 숨이 차오르고 멎는 것 같아 헐떡거렸다. 너무 큰 고통 속에 힘겹게 아이를 낳고 보니, 아이를 낳으면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조그만 희망마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93. 밤마다 걸려온 전화
안집 할머니와의 사이가 전보다 더욱 돈독하게 되자 할머니는 “나에게는 걸려올 전화가 별로 없으니 자네가 쓰게.”라고 하며 전화선을 연결해 우리가 전화를 쓸 수 있게 해주셨다. 게다가 아이를 낳으면 좋아진다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병이 더욱 악화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시고 할머니가 아이들을 봐주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자네 부부에게 버릴 것이라고는 변소에서 버리는 것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어쩌다 그렇게 아프게 되었는지 안타깝구먼.” 하고 걱정하셨다.
그런데 네 번째 아이 낳을 달이 된 겨울에 밤마다 새벽 1시에서 5시까지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영암에 사는 할머니의 며느리가 남편이 화투 치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시어머니에게 찾아내라고 하며 밤마다 괴롭히는 전화였다.
한밤중임에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나에게 하소연하면서 할머니를 바꿔 달라고 하기에, 나는 “할머니가 지금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어요? 밤중에 전화하시면 잠에서 깨어나 잠도 못 주무시고 걱정도 많이 하실텐데….”라고 했더니 “그래도 자기 아들이니까 어머니가 찾아내야 하지 않아요?”라고 하였다.
아들 때문에 며느리로부터 심한 고통을 겪고 계시는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워 참다못한 나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기와 여기의 거리가 얼마인데, 아들을 어디서 찾으시겠어요. 어머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요. 애기 엄마가 남편을 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남편이 돌아오도록 노력해 보셔요.” 하고 말하자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요? 당신 남편이 그런다면 당신도 참지
못할 거예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애기 엄마, 내가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리 바가지 긁어봐야 돈이 나오나요, 남편이 돌아오나요. 돈이 나오고 남편이 돌아온다면 바가지 많이 긁어야지요. 그러나 바가지 긁어서 나오는 건 불화고 깊은 상처만 깊어지고, 사랑은 더 멀어지게 되어 속만 상하니 잘 참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준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남편이 도박을 끊고 애기 엄마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당신 남편은 조금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우리는 월급에도 손을 댈 때가 있단 말이에요.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어서 우리 시어머니나 바꿔요.”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리치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바꾸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받으신 할머니는 “얘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냐?”라고 하시자 며느리가 “어머니 아들이니 어머니가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세요. 더는 못 살겠으니 이제는 끝장을 낼라요.”라고 했다.
이러한 대화들로 괴로워 우시는 할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결혼까지 한 아들을 할머니가 어떻게 고쳐주겠는가. 나는 남편이 노름하고 외박을 할 때 시어머님이 아실까 봐 오해 받아가면서도 숨겼는데, 이렇게 시어머니를 괴롭히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며 너무 안타까워 할머니를 더 정성껏 돌봐드렸다.
294. 우리 소장님은 너무 일을 잘하셔서 부담스러워
어느 날 지도소에 가서 소장인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두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와 볼일을 보는 게 아니라 소장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아이고 지난번 소장님이 편했지. 지금 소장님은 너무 힘들어. 우리를 시키면 될 일도 자기가 다 해버리니 오히려 더 부담스럽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지난번 소장님은 시간만 때우니 우리도 시간만 때우면 됐는데 김 소장님은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잘하시는지 원, 쉴 수가 있어야지.” 그들은 소장의 부인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소장 흉을 한참이나 보았다. 이어서 듣기 민망한 말들도 서슴없이 하며 남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여자들만 남의 이야기를 잘하는 줄 알았더니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남자나 여자나 사람 나름이겠지.’라고 하면서 그들이 나갈 때까지 많은 시간을 꼼짝하지 못하고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 안에서 그들의 일치를 위하여 봉헌하면서 희생을 치렀다.
295. 임신한 상태에서 우물 속에 들어가
1978년 여름, 깊은 우물들도 다 말라붙을 정도로 지독한 가뭄이 들었던 해였다. 그해 나는 셋째가 돌도 채 지나지 않아 넷째를 임신한 상태였고, 힘들게 셋째를 낳으면서 상한 몸이 회복되기도 전이었지만 기쁘게 아이 셋을 혼자 돌봤다. 친정어머니는 다섯째 시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으셨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혼자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동네 먼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다 먹고 빨래도 해야 했고 밥도 아궁이에 불을 때서 해야 했기에 할 일이 많아 온종일 아픈 몸을 돌보지도 못하고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건강한 셈 치고 기쁘게 했다.
그렇게 힘들어도 우물을 사용할 때 나는 청결을 위해 늘 우물 겉까지 깨끗이 씻었기에 우물에 이끼가 낀 적이 없었다. 나는 동네 사람들도 깨끗이 사용할 수 있도록 먼 곳에 있던 동네 우물도 그 주위까지 깨끗이 청소하면서 사용했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하자, 날씨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얼른 빨래를 하려고 밥상도 치우지 않고 다녀오는데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친정어머니가 사주신 보행기에 셋째 아이를 태우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찬장 다리에 보행기를 묶어놨는데 아이가 얼마나 용을 썼던지 그 끈이 풀려 있었고, 보행기를 밀고 밥상으로 가서 장부에게 주기 위하여 아침에 고추를 갈아서 갓 담은
매운 김치를 입에 넣다가 눈과 코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온 얼굴에도 빨간 고춧물 범벅이 되어 얼마나 맵고 아파 울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씻어주면서 마음이 아파 얼마나 울었던가! ‘아가, 미안해. 밥상을 치우지 않은 엄마 잘못으로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하고 울었다. 그때 안집 할머니가 오셔서 “새댁, 이제는 안 되겠다. 샘을 파야지.”라고 하셨다. “예?” “이런 어린애를 두고 어떻게 멀리 물 길으러 다니고 빨래하러 다닌단 말인가?” “제가 할 일이니 당연히 해야지요.” 하는데도 “그러지
말고 샘을 파세.”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제가요?” “응, 나하고 같이 파보세. 있는 샘이 말랐으니 조금만 더 파내면 될 거야.”
임신했다는 말도 못 하고 난처해하자 “그럼 양동이에 줄을 매달아 내려보내게. 내가 샘에 들어가 흙을 퍼서 담으면 자네가 들어 올려 흙을 버리고 다시 넣어주면 되네.”라고 하셨다. 나는 셋째를 힘들게 낳아 몸 상태가 안 좋았으므로 넷째를 낳으면 넷째는 낳기 전부터 조리를 잘하려고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기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주인이 하자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사실 할머니는 나와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당신이 멀리까지 물을 길어다 오기가 힘드셨기에 그런 제안을 하신 것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해보자 마음먹고 샘으로 갔다. 그 두레박 샘은 깊이가 7m 정도 됐는데 밑에서부터 돌 하나하나를 둥글게 쌓아 올려 지상에서 1m 높이로 마무리를 지은 8m 깊이의 우물이었다.
처음엔 할머니가 들어가려고 하셨는데 무서워서 못하겠다며 나보고 좀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양동이에 줄을 달아 밑으로 내려놓고 샘에 들어갔다. 임신상태였기에 조심조심 이쪽 돌, 저쪽 돌을 밟고 내려가며 ‘아가야, 미안해. 근데 우리 함께 좋은 일 하는 거란다. 할머니가 물 길으러 다니시기가 얼마나 힘드시겠니? 우리 사랑받은 셈 치고 잘 봉헌하자.’
하고 얘기했다. 어렵게 우물 바닥에 닿아 발을 딛자마자 몸이 진흙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물 먹은 진흙이 수렁처럼 된 것이다. 나는 괜찮지만 4개월 된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너무 차가워 몸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였지만 정신을 차려 돌을 잡고 수렁에서 몸부림하다가 겨우 양발을 돌에 디딜 수 있었다. 힘들게 흙을 퍼서 양동이에 반 정도 채웠더니 할머니가 끌어 올리지를 못하셨다. 많이 덜어내도 못 하시기에 나는 할머니가 허리라도 다치실까 봐
“할머니 놔두세요!” 하고, 양동이에 흙을 가득 채운 뒤 이쪽저쪽 돌을 딛고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발을 딛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넉넉히 있는 게 아니었기에 조금 나온 돌을 겨우겨우 잡고, 딛고 가느라 더욱 힘들었지만, 할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할 수 있었다. 지상부 높이부터는 돌이 튀어나온 곳이 없어 1m 높이를 발을 들어 올려 겨우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혼자 우물로 들어가서 흙을 퍼 담고 다시 나와 끌어올리기를 반복했다.
우물 밖으로 나와 양동이를 끌어 올릴 때마다 할머니는 옆에서 “한 번!” “두 번!” 하고 숫자를 세셨는데, 우물로 들어가서 흙을 퍼 담고 다시 나와 끌어올리기를 스무 번 정도 하자 맑은 물이 나오는 것을 보며, ‘나도 흙탕물이 아니라 맑은 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맑은 물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자.’라고 다짐을 하면서 올라왔다.
33번을 퍼 올리니 할머니가 잡수실 만큼 샘이 채워진 것 같아 그만하려고 했는데 할머니는 2번만 더 하자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근육이 굳어지고 발도 다 오그라들어 더는 오르내릴 수가 없었는데, 결국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그때야 “아이고 새댁, 내 욕심만 채웠네. 미안하네. 어서 들어가 쉬소.”라고 하셨다. 모든 힘이 다 빠진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가려고 할 때 이웃집 아저씨가 들어왔다. 그분은 우물 옆에 샘 속에서 퍼낸 흙이 수북이 쌓인 것을 보더니 “우메, 샘을 파 부렀소?”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우리 새댁이 다 했다요.”라고 하니 “아니, 참말이랑가?” “응, 참말이여.”
“우메, 뭔 일이라요. 장정 상일꾼이 해도 하루 걸려 할 위험한 일을, 새댁이 혼자 반나절도 안 돼 저 많은 흙을 다 퍼냈단 말이요?” 하고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흙도 아니고 물을 가득 머금은 진흙이었기에 아주 무거워 남자가 해도 힘들었을 일을 할머니를 위해 해낼 수 있었음에 흐뭇해하면서 ‘내가 죽음을 불사하고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해냈으니 많은 물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많은 물이 나온 셈 치자. 그리고 우리 집 빨래는 나가서 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나는 겨우 씻고 방에 들어가 누워서 아기 젖을 먹이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쁨에 겨워 흥분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새댁! 새댁! 물이 많이 나와, 맑은 물이 많이 나온다고!” 일어나서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었다. 나도 너무 좋아 달려가 봤더니 맑은 물이 두레박에 가득 담겨져 나왔다. 흙물이 가라앉으려면 며칠이 걸릴 거라고들 했는데 몇 시간도 안 돼 맑은 물이 나오다니! 가뭄이 몹시도 심했기에 먹을 물도
귀해 야단들이었지만, 내가 판 샘은 빨래까지 해도 물이 남을 정도였기에 다른 이들도 길어갔지만 물은 부족하지 않고 모두가 풍부하게 쓸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주님의 개입이셨다. 아니라면 어찌 몇 시간 만에 맑은 물이 샘솟듯 나올 수 있었겠으며, 어찌 33번 만에 내가 더는 일을 못 하도록 쓰러지게 하셨겠는가! 이렇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정도로 사랑 실천은 위대하다. 왜냐면 성치 않은 몸에 임신까지 한 상태였지만 나를 다 내어놓고 그 힘든 일을 했는데도 뱃속의 아이도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건강했고, 매운 김치를
먹은 셋째 아이도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96. 한 오토바이에 여섯 사람이 타고 다니다
그 당시 인구정책 구호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는데 나는 아이 셋을 낳고도 또 임신했다. 그런데 옆집 새댁이 갑자기 찾아와 “새댁은 도회지에서 살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에요. 요즘에는 아이 셋을 낳으면 미개인이고 넷을 낳으면 야만인이라고 방도 얻기 힘들어요. 그러니 여기서 오래오래 살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1978년, 그 옛날에도 야만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어린 생명을 거리낌 없이 죽이는 낙태가 자행되었다. 나는 아이를 많이 낳아 미개인이나 야만인 소리를 듣는 것은 견딜 수 있다 하더라도 태중에 있는 넷째 아이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다. 그래서 배를 만지며 ‘아가야, 미안해. 상처받지 말아라. 나쁜 말에는 귀를 막고 좋은 말만 가려듣는 착한 아가가 되어라.’라고 하며 바쁘다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 당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 나가기 위해 남편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앞에 큰아이들 둘을 태우고, 나는 셋째를 안고 뒤에 타고 갔다. 마을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야, 저기 다섯이 타고 가네.”라고 하자 남편이 웃으며 가만히 “다섯이 아니라 여섯인데…. 하하하.” 하였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 중 한 사람이 “또 모르지, 뱃속에 하나
더 들어 있는지?”라고 하자 옆 사람이 “에끼, 이 사람아! 설마 그럴 리가….”라고 했다.
그 말은 어떻게 애를 넷이나 낳을 수 있겠냐는 의미로 들렸다. 나는 아이들을 많이 키우느라 힘이 들고, 야만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한다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는 모습을 꼭 보리라 다짐하였다. 그리고 내가 잠시도 쉬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일을 하며 많은 고통으로 온몸이 부서질지라도 나의 사랑과 희생이 아이들에게 흘러 들어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297. 20리 길의 산골에서 나무를
매일 나무를 때서 밥을 해 먹으니 나무가 많이 들어갔다. 학생 때나 처녀 시절에는 내가 나무를 많이 했기에 마음 놓고 땔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셋이나 있고, 임신 중이라 한 번씩 안집 할머니랑 함께 갈퀴로 긁어 땔나무를 장만해야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친정어머니가 석유곤로를 사 주셨지만, 시어머니께 돈을 해 드리고, 시동생들 가르쳐야 되니 석유값을
아끼기 위하여 급할 때 아니고는 거의 쓰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데다가 2월은 넷째의 출산 달이기에 땔나무가 더욱 많이 필요한데 내가 나무를 해 모으기는 역부족이라 마른 소나무를 사기로 했다. 안집 할머니께 값이 싸면서도 좋은 나무 구할 데를 물어보니 “가까운 소나무 가게는 너무 비싸고, 20여 리 떨어진 시골에 가서 사는 게 제일 좋기는 한데 너무 멀어서 그 무거운 몸으로 어찌 가겠는가?” 하며 “좀 비싸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사소.”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리어카를 끌고 갔다.
시골의 나무장수는 나를 보고 놀라며 “아니, 이렇게 몸이 무거운 새댁이 어떻게 20리가 되는 서호정까지 나무를 가지고 가려고 그래?”라고 하셨다. “괜찮아요.” “얼마나 가지고 가게?” “10단만 주세요.” “뭐? 10단이면 남자가 끌고 가야 할 정도로 무거운데 임신한 새댁이 가져갈 수 있겠어? 5단 가져가기도 벅찰 텐데?” “네, 괜찮아요. 가져갈 수 있어요.” “그럼,
내가 단단히 묶어줄게, 홑몸이 아닌 새댁이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걸 보니 너무 예뻐서 한 단을 더 주고 싶은데 더는 너무 무거우니 가격을 싸게 줄게.”
나는 얼른 “한 단 더 주신다면 가지고 갈 수는 있어요.” 하고 웃었다. 면 소재지에서 사면 한 단의 양이 1/2이 적은데 여기선 나무가 좋으면서도 단도 커서 엄청나게 싼 데다가 혹시 땔 나무가 부족하여 다시 사기 위해 오려면 아이를 낳은 뒤가 될 터라 너무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좋았어. 얼굴도 예쁜데 말도 예쁘게 해서 한 단 더 주고 가격도 싸게 준다!”
8개월 된 배 속의 아이와 11단의 땔나무를 리어카가 넘칠 정도로 한가득 싣고 울퉁불퉁한 좁은 산길을 오르내리며 오는 20리 길이 너무 힘들어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렸다. 다섯 단만 해도 리어카로 하나 찰 정도인데 11단을 실었으니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조금만 잘못해도 기우뚱하여 쓰려지려 했기에 조심조심해서 걸어 더 많은 시간과 힘이 들었지만 내가 조금 희생하여 싼 가격에 가족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든 것도 잊고 오는 길만 2시간이 넘는 추운 길을 콧노래 부르며 기쁘게 왔다.
남편은 직장 충신에 불우 청소년들 야학을 해주기에 바빠 아내가 얼마나 힘든지,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살며 사랑받은 셈 치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러니 그 어떤 누구도 섭섭하지 않았고, 나는 이렇게 하는데 저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럴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298. 출산 예정일을 3일 앞둔 엄동설한에 쫓겨나다
출산 예정일을 3일 앞두고 아기 낳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안집 할머니의 며느리가 자신이 집으로 들어올 것이니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그해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몸도 불편한 데다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이 엄동설한에 이사를 하려니 막막했다. 그래서 나는 한 달 만이라도 여유를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막무가내였다. 할머니는 내가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 미안한 마음에 안쓰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다.
그러나 아들 때문에 며느리가 너무나 많이 속상해하니 아무 말씀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셨다. 3일 후에 이사 오겠다고 당장 집을 비워 달라고 떼를 쓰니 비워 주어야지 어쩌겠는가! 집 없는 아픔을 뒤로한 채 급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걷고 또 걸어서 군서면 소재지와 동네들을 다 돌아다닌 끝에 살던 집에서 반대편인 윗동네에 독채 빈집을 하나 찾아냈다.
방세가 비싸면서도 집도 좋지 않아 세가 나가지 않는 집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계약했다. 나는 돈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또 큰이모님을 통해 빚을 얻었다. 할머니의 슬픔, 나의 고통, 우리는 함께 울었다. “할머니, 몸 건강하셔야 해요. 그리고 며느리가 잘못하더라도 이해와 용서로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셔요.”
할머니의 우시는 모습을 뒤로하고 눈 오는 추운 겨울에, 그것도 아기 낳을 예정일 이틀 전에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하면서 집 없는 설움을 맛보아야 했다. 무거운 몸으로 운동하는 셈 치고 3km 정도의 먼 길을 리어카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데 뱃속에서 아기가 막 움직여서 ‘아가야, 미안해. 너도 힘들지? 그러나 편하게 있는 셈 치고 잘 봉헌하자. 알았지?’라고 하자 대답이라도
하듯이 발로 툭툭툭 세 번을 찼다.
나는 아이에게 화답했다. ‘그래, 고마워. 너는 엄마 뱃속에서 여러 가지 위험한 일들을 치렀으니 세상에 나와서도 아주 강한 아이가 될 거야.’ 그렇게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했다.
임신 4개월에 죽음을 불사하고 순명하는 마음으로 힘들고 위험하게 판 샘을 두고 와야 했으나 아쉬워하지 않고 할머니께 선물한 셈 치니 위안이 되었고, 몇 개월간은 물을 풍족하게 쓸 수 있었기에 그것만으로 감사하면서 그 집을 나왔다. 부디 그 물을 먹고 며느리도 변화되어 할머니에게 효도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299. 네 번째 아이는 대학병원에서
1977년, 셋째를 낳으면서 출혈을 너무 많이 했기에 넷째 출산이 좀 두려웠다. 출산 이틀 전 힘들게 이사하여 몸에 무리가 왔다. 무거운 몸이 더 힘들어지더니 이사한 지 하루 지나 새벽 2시경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1979년 1월부터 처음으로 의료보험 제도가 생겼는데, 처음 생긴 제도이기에 1월에는 불안정하다고 하였다. 아이의 출산 예정일이 1월이라 나는 아이가 2월에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에 대고 ‘아기야, 힘들지만 엄마 배 속에서 좀 더 있다가 나오면 안 되겠니? 그러나 엄마 뜻대로가 아닌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라고 했더니 또다시 응답이라도 하듯이 배를 세 번이나 세게 톡톡톡 찼다. 그런데 이삿짐을 정리하고 하루 지나서 새벽에 또 진통이 왔다. 셋째 낳을 때 너무 힘들었기에 서둘러 병원에 가기 위해 남편과 함께 도로변까지 나와 한참을
기다리는데 진통이 가라앉아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예정일 날 진통을 한 번 하고는 아이는 얌전하게 있어 ‘어머, 아가야. 엄마의 원의대로 더 있다 나올 거야?’라고 했더니 또다시 응답하듯 발로 세 번을 거세게 찼다. ‘어머, 내 사랑하는 아기야, 넌 분명 우람한 아들일 거야. 그러니 그 모든 역경을 다 이겨냈지.’ 그 당시 병원에도 가지 않았으나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정일이 보름도 훨씬 지난 2월 17일 새벽에
진통이 왔다. 남편은 함께 도로에 나가면서 “이 시간에 차가 있을까?” 하고 걱정하였다.
나는 자신 있게 “아마 차가 올 거예요.”라고 하는데 바로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제가 아기 낳으려고 진통을 하는데 혹시 영암까지라도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어서 타세요. 어느 산부인과로 가실 건데요?” “전대 병원으로 가려고요.” “거기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하더니 차비도 안 받고 우리를 광주 전대병원 응급실로 데려다줬다. 나는 응급실을
거쳐 바로 분만실로 옮겨졌다. 생전 모르는 이가 갑자기 나타나 도와주었음은 주님께서 개입해 주셨음이리라!
그런데 그때 간호사들이 들어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해도 나의 옷을 다 벗기고 환자복을 입혀줬다. 그 시간에 시골에서 어떤 산모가 왔는데 그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너무 괴로워 신음하면서 아래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데도 간호사들이 못 본 체하여 “나는 괜찮으니 저 산모를 좀 돌봐주세요.”라고 했더니 “그냥 두면 알아서 하겠죠.”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산모는 집에서 아이를 낳다가 안 돼, 시골 산부인과로 갔는데 아이가 발하나만 나오다가 못 나와 대학병원으로 온 것이다. 산모나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머리부터 나와야 할 아이가 거꾸로 나오다가 못 나오고 있는 아주 위급한 상태인데도 저렇게 무관심 속에 푸대접을 받다니!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 ‘나는 어떤 누구라도 편애하지 않으리라.
아니, 불쌍한 사람 편에서 그들의 위로가 되어 주리라.’라고 다짐했다.
그 사람보다 상태가 나은 나에게는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면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그를 가만 놔두니 결국 그는 쓰러져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하느님을 잘 몰랐지만, 마음속으로 ‘제발 저 푸대접 받은 불쌍한 산모와 아이가 안전하게 해주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약하고 힘든 사람 편에서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라고 또다시 생각하며 그
산모를 위해 나의 산고와 진통을 봉헌했다.
나는 셋째를 낳을 때 죽다시피 했기에 밖에서는 어머니와 이모님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안타깝게 보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그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진통이 조금 잦아질 때마다 웃으면서 손을 흔드니 간호사들이 “어머, 아기 낳으면서 이렇게 웃으면서 손 흔드는 분 처음 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라고 했다. “더 힘든 것도 견디는데요?” “예? 아기 낳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어요?” “그럼요.” “어머머.”
역시 내 생각대로 넷째는 아들이었다. 종합병원에서는 아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간호사에게 “우리 아기는요?”라고 했더니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저기 있잖아요.”라고 했다. 간호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기는 수건에 싸여 내 곁에 얌전하게 뉘어져 있었다.
‘아! 바뀔 염려는 없겠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아이를 낳으면 신생아실로 데리고 가는데, 나의 마음을 아신 주님께서 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내 곁에 아이를 놔둘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입원해 있는 내내 아이를 신생아실로 보내지 않고 내 곁에 데리고 있다가 퇴원했는데 대학병원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넷째 아이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크게 낳았다. 대학병원에서 아이를 낳았기에 남편이 곁에 없어 처음으로 내가 미역국을 먹게 되었다. 퇴원해서도 남편은 직장 일에 충실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 미역국을 내가 먹게 되니 젖도 처음으로 풍족하게 나와 아이는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300. 시어머니께 쌀을 사드리기 위하여
친정어머니께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낳은 아기이니까 몸조리만 잘하면 병이 나을 수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극진히 간호해주셨다. 그러다 쌀이 떨어져 쌀을 가져오신다고 시골집으로 가셨는데, 그날 시어머님께서는 나에게 쌀을 사달라고 광주에서 영암 군서까지 약 200리(80km) 길을 내려오셨다, 아기 낳은 지 3주도 채 못 되어 산후조리 중인 나에게
정미소에서 쌀을 사달라고 오신 것이다.
아직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시어머님께 순명하는 마음으로 혼자 리어카를 끌고 가까운 정미소에 갔으나 그곳에 쌀이 없어 먼 곳에 있는 정미소를 몇 군데 왔다 갔다 걸어 다니며 겨우 80kg 쌀 한 가마니를 사드렸다. (지금은 쌀이 흔하지만, 그때는 쌀이 귀해 정미소에서도 쌀이 없을 때가 있었음) 지금은 돈을 주고 시키기만 해도 배달해주지만 그 당시에는 정미소에
리어카를 가지고 가서 본인이 가져가야 했기에 광주 가는 버스에 직접 실어 드리고 나니 출혈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 20리쯤이나 걸었을까? 출혈이 문제가 아니라, 조금도 걷기 힘들 정도로 온 다리가 퉁퉁 붓고 발바닥은 너무 뜨거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사랑받은 셈 쳐 보았지만, 집에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팠고, 피가 신발에 가득 차 질척거리면 신발을 벗어 피를 붓고 털면서 겨우 집에 와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계속된 고통으로 인해 한 달가량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밤낮으로 계속 서서 아픈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래도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려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발바닥이 뜨거운 증상은 몇 년이 되어도 낫지 않고 계속되었었다.
친정어머님은 딸 고생시키지 않고 병 낫게 해주시려고 밤낮으로 애쓰시며 시골집으로 쌀 가지러 가시던 날, 시어머님은 쌀 사 달라고 오신 이 모든 일들이 인간적으로는 가혹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예비하신 일들임을 먼 훗날 깨닫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