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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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출산 앞둔 나를 쫓아낸 새댁의 비참한 죽음

 

나는 쉼 없이 일하는 중에 다리가 너무 아파 동동 구르다가 잠깐 앉아서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전에 살던 주인집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얼마나 반가운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할머니는 “자네가 우리 집에서 이사 간 뒤 너무 보고 싶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네. 그리고 그 깊은 샘을 홑몸도 아닌 그 몸으로 새댁이 판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더라고. 장정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런데 임신한 새댁이 시상에 그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해냈는가? 생각할수록 너무 미안하고 고맙네. 나는 그 물을 마실 때마다 착한 자네 생각이 나서 보고싶어 견딜 수 없었다네. 그리고 자네가 늘 담가준 물김치 정말 맛있었어. 난 죽을 때까지 자네를 잊지 못할 거야. 자네 부부는 버릴 것이라곤 변소에서 보는 대소변뿐이야.” 하셔서 “아니에요. 할머니, 제가 얼마나 부족한데요. 저는 노력할 뿐이에요.”라고 했다.

“자네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또 없을 것이여! 그저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고 만삭 중에도 갈퀴나무 해다 불 대고 혼자 리어카를 끌고 그 먼 곳까지 소나무 해다가 때는 사람이 어디 또 있당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 할머니는 넷째 아이를 보면서 “아이구, 엄마 배 속에서 엄마랑 같이 그렇게 많이 고생하더니 착하고 좋은 일 많이 하는 엄마한테 태어나서 생긴 것도 잘 생겼네.”라고 하셨다.

“며느님은 이제 잘해요?” “아이고, 말도 마소.” “지금도 힘들게 해요?” “만삭인 자네를 그렇게 쫓아 보내놓고 좋았것는가? 자네 보내놓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네.”“예? 어쨌는데요?” “아니, 지 신랑이랑 내 앞에서 쥐약을 들고 지 말 안 들으면 죽겠다고 엄포를 놓더니 쥐약을 입에 넣는 척하기에 뺏었는데도 입으로 조금 들어갔어. 그런데 글쎄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러 바로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끝내 살아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네. 의사는 아주 소량을 먹었고, 위도 세척했으니 그렇게 죽을 수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하더라고. 자네같이 착한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결국은 그렇게 되었네.”“저는 괜찮은데 할머니가 너무 고생하셨어요.”

우리는 또다시 부둥켜안고 울었다. “자네 시어머니는 얼마나 좋을까이. 자네같이 착하고 천사 같은 며느리를 얻었으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거야.” “아녜요. 할머니, 저는 너무 부족해요. 단지 노력할 뿐이에요. 할머니 이제는 행복하셔야 해요.” “그래, 자네도 이제 행복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이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 흘리면서 놓을 줄 모르셨다.

 

302. 큰아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지만

 

큰딸이 8살 때, 사색이 되어 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엄마, 엄마! 주형이가 떨어졌어!” “어디서?” 놀란 나는 대답도 듣기 전에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위험한 곳은 다리밖에 없어 그곳으로 달려가면서 “아버지, 착한 우리 아들 살려주세요.”라고 했는데 6살의 아들은 큰 돌들이 많은 다리 밑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이거 큰일 났네.’ 하고 내려갔더니 다행히 큰 돌들 사이 땅으로 떨어져 전혀 다치지 않았다. 1~2mm만 비켜 떨어졌다면 머리를 크게 다쳤을 정도로 돌들 사이는 딱 머리 하나 들어갈 수 있는 간격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오다 친정어머니와 큰딸을 만났다.

어머니는 “아니, 너 어떻게 그렇게 번개 치듯이 빨리 달려갈 수가 있냐? 바람에 날아간 줄 알았다야.”라고 하셨다. 큰딸도 “엄마! 진짜 바람같이 휙 날아갔어. 엄마 달리기 진짜 잘해. 우리가 금방 따라 나갔는데 엄마는 벌써 다리에 가 있었어.”라고 하여 “그것이 모정인가 봐!”라고 했다.

나는 이 일을 회고하면서, 성모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이 조수불급한 위험에 처하면 그렇게 번개처럼 빠르게 망토를 펼치시고 날아와 구해주실 거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303. 셋째 아이가 물에 떠내려가 잡으려다가

 

넷째 아이는 생각보다 순산했기에 몸이 가벼워져 기뻐했는데, 그것도 잠시, 시어머님 쌀 사드리기 위하여 많이 걸었던 여독이 전혀 풀리지 않아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시어머님이 자주 10만 원 또는 20만 원을 다섯째에게 보냈다며 돈을 가져가시니 아이들까지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친정어머니께서는 딸을 돕기 위해서 농사일을 그만두실 수 없었으니,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나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때 시골에는 수도가 없어 개천에 나가서 빨래를 해야 했다. 갓난아이가 있는데 셋째 아이를 놔둘 수가 없어 데리고 개천에 나갔다. 많은 사람이 빨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일회용 기저귀나 생리대도 없었기에 누구는 아이 똥 기저귀를, 또 누구는 생리대를 빨고 있었기에 나는 더 깨끗한 곳에서 빨래를 하기 위해 ‘가장 윗물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하여 빨랫감을 가지고 올라갔다.그곳은 물이 밑으로 흘러 떨어지는 폭포 같은 곳이어서 아래는 많이 깊었지만 빨래하기에는 참 좋았다. 힘이 없어 주저앉아서 빨래하는데, 셋째 아이가 저도 빨래한다고 흉내를 내다가 빨랫감을 놓쳐 그걸 잡으려고 하는 순간, 세찬 물살에 휩쓸렸다. 떠내려가는 아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잡지 못하였기에 나는 아이가 폭포 밑으로 떠내려가 잘못될까 봐 망설임 없이 폭포로 뛰어내렸다.

 나는 내 몸 하나도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안간힘을 다해 아이를 건져서 겨우겨우 올라와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나는 춥고 떨리고 배가 너무 아파 쓰러지고 말았다. 전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기에 물을 너무 무서워했지만, 그 순간에 어떻게 주춤하지도 않고 퐁당 뛰어들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무섭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고 오직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모정이며 성모님께서 우리가 위험할 때 그것보다 더한 모정으로 그렇게 구해주시리라.

 

304. 영암 병원으로

 

나는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영암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급성 맹장염인 것 같다며, 급성으로 왔기 때문에 복막염이 될까 봐 위험하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입원하여 수술할 형편이 못 되니 치료해보다가 안 되면 수술할 테니 우선은 통원 치료하도록 해달라고 했다. 의사가 계속 위험하다고 하여 “나는 아이들이 넷이나 돼요, 그 애들을 돌봐야 하니 우선 그렇게 치료해 주세요, 네?” 하고 사정했다.

수술하면 돈이 많이 들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기에 통원치료를 택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나의 말에 복막염이 되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명을 한 뒤에야 후에 응급조치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일째 병원에 가던 날 “도저히 치료가 안 되니 수술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더는 버틸 자신도 없었고,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의논하여 광주 전대병원으로 입원하였다. 아무래도 광주 시댁 가까운 곳으로 가면 가족이 많으니, 아무도 없는 영암보다는 아이들도 좀 맡길 수 있어 훨씬 낫겠다 싶어서였다. 남편과 친정어머니는 즉시 수술하는 줄 알고 병원까지 따라오셨지만, 수술은 하지 않고 계속 검사만 하니 남편은 직장 때문에 할 수 없이 내려가고 친정어머니께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집으로 가셨다.

 

305. 병명을 찾아내지 못했던 외로운 3일

 

복통이 시작되어 몸부림을 쳤지만 입원한 지 이틀 후에서야 병명이 나왔다. 산부인과와 내과에서 각각 검사한 결과 ‘자궁 뼈 골반염’이라 했고, 다음에는 ‘열병’이라기도 했다. 또 얼마 후에는 ‘자궁 외 임신’이라고 하더니 또 그 후에는 ‘맹장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병명이 이렇게 네 가지로 나와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인데도 산부인과와 외과에서는 서로 미루며 급성 환자인 나를 계속 방치해 두었다.

그때 생후 4개월 된 넷째 아이는 젖을 먹여야 하기에 내가 병원에 데리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진통 속에서 아이와 함께 울었다. 아이는 내가 전혀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빈 젖을 빨며 얼마나 배가 고파서 울고,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안타까움과 아무리 많이 아파도 아이 때문에 제대로 몸부림칠 수도 없어 그것까지도 너무 고통이 되어 울고 또 울었다.

병실이 없어서 1인실에 입원하여 혼자 있게 되었는데 내 몸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 상태에서 홀로 아이까지 돌봐주어야 했기에 사랑받은 셈 치거나 혼자 편히 쉬는 셈 치기가 너무 어려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306. 걸을 수가 없어 기어서 외과를 찾아가다

 

숨이 넘어갈 듯이 고통이 너무 심해졌기에 할 수 없이 아이를 병실에 혼자 두고, 걸을 수도 없었기에 기어서 외과를 찾아갔다. 외과에서는 그런 나를 보고 너무 놀라며 “아니, 이럴 수가! 산부인과에서 아직도 수술을 안 시켰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더니, 그들은 산부인과 사람들을 좋지 않게 말하며 빨리 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보호자가 각서를 써야 하는데 당장 곁에 보호자가 없어 각서를 쓸 수가 없으니, 의사들은 위험한 환자를 두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고통에 힘겨워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휠체어에 나를 태우고 전화박스로 데려갔다. 그러나 내가 전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의사가 직접 전화를 해줬는데 남편은 거리가 너무 멀어 빨리 올 수가 없었기에 그나마 가까이에 있던 광주지방 검찰청에 다니는 둘째 시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오도록 하였다. 그때 나는 말도 못 하고, 글씨도 쓸 수가 없는 상태여서 의사는 나의 입놀림으로 겨우 알아내어 아주 어렵게 검찰청에 있는 시동생을 부른 것이다.

 

307. 수술하러 가는데 대변이 마려워도

 

양팔에 링거를 꽂고 수술하러 갔는데 다른 사람의 수술이 지연되어 나는 수술실에서 꽤 오랫동안 기다리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대변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마려워서 간호사들에게 아무리 호소를 해도 외면해 버렸다. 그들은 끝까지 대변을 보게 해주지 않은 채 나를 수술실로 옮겼다. 관장은 시키지 못하더라도 나오려고 하는 대변까지 보지 못하게 한 채 전신마취를 시키다니….

수술대 위에 누워서 보니 산부인과, 외과에서 나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약 15명가량 되었다. 의사가 “내가 보이느냐?” 하고 묻는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나서 정신을 잃었다.

 

308. 친정어머니 쓰러지시다

 

친정어머니와 이모님은 내가 수술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쫓아오시어, 수술이 잘되어 무사히 나오기를 기다리셨다. 수술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져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마침 하얀 천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환자가 실려 나오는 것을 보고 친정어머니는 ‘딸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죽어서 실려 나온 그 사람은 수술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가족들이 너무 아쉬워 죽어도 좋으니 수술 좀 해 달라고 사정하여 수술했는데, 수술하는 도중에 심장이 멎은 것이다. 하필 딸이 나올 시간과 겹쳐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차에, 하얀 천으로 덮인 시체가 나오니 딸인 줄 알고 쓰러지신 것이다.

 

309. 간호사에게까지 맞고 차이며

 

예전에 4개월 된 아이를 강제로 수술시킬 때 마취가 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더니 이번에는 전신마취를 강하게 하여 빨리 깨어나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수술하느라 관장도 하지 않은 채로 했는데 3일이 지나도 가스가 나오지 않아 몸부림쳐야 했다. 온몸이 뒤틀리고 움직일 수도 없이 고통을 겪는데 간호사가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떼어내기로 한 자궁이 너무나 깨끗하여 떼어내지 않았는데도 소변 한 번 보는 것이 얼마나 따갑고 아픈지, 아기 낳을 때보다 훨씬 더 고통이 심했다. 차라리 죽는 사람이 행복해 보일 정도로 너무 아팠다. 가스가 나오도록 나를 거꾸로 세워서 등을 두드리고, 반듯이 눕혔다가 거꾸로 눕혔다가, 엎었다 뒤집었다 물건 다루듯이 했는데 아무리 해도 가스는 나오지 않았다.

걸어보라고 해도 전혀 걸을 수가 없어 엉거주춤하고 있으니 간호사가 “이런 아줌마 정말 처음 보네, 자궁암 수술해도 괜찮은데 맹장 수술하고 그렇게 엄살 부려요?” 하고 나를 무릎으로 차고 손으로 밀치면서 등을 때렸다. 이렇게 간호사에게까지 맞고 차이며 눈물을 머금고 가스가 나오도록 찜질도 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310. 일어나지 못했던 자궁암 수술 환자가 가스 소리에

 

수술한 지 사흘이 지나도 가스가 나오지 않아 몸부림치고 있을 때, 거꾸로 엎어놓고 등을 두드리니 아주 작게나마 가스가 나왔다. 그때 함께 있던 자궁암 수술 환자가 갑자기 “엄마야!” 하고 반갑게 큰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니,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라 쳐다봤다. 그 환자는 수술 후 일어나지도 못하던 상태였는데, 내가 너무나 걱정이 되었던 그는 나에게서 가스가 나오자 너무 좋아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것이다.

가스가 나온 것을 가족들보다도 더 좋아하던 그는 내가 몸부림치며 울고 있을 때, “아이,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라고 하면서 함께 울어주던 환자다. 한참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였지만, 수술하여 젖을 물리지 못하자 젖이 퉁퉁 불어 가슴을 조여 매게 되니 여름에 땀띠까지 많이 나고, 젖몸살까지 난 나를 가스를 내보내기 위해 엎었다 뒤집었다 갖가지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본인이 더 안타까워하며 울어주었다. 고통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스가 나왔는데도 전과 마찬가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의 성화로 걸어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며, 먹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여 먹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음식을 먹으면 모두 토했다. 심지어 수박즙을 내어 먹어도 토하니, 어머니께서는 딸이 죽을까 봐 전전긍긍이시고 자궁암 환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병실에 있는 자궁암 수술환자는 가족이 보신탕을 끓여왔다고 하며 먹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먹지 못한다고 했더니 억지로라도 먹어보라고 계속 권하기에 더는 그 사랑을 거부할 수가 없어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고 삼켰더니 그것만은 토하지 않았다. 그 환자의 사랑이 먹지 못하던 것을 먹을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그 사랑이 얼마나 고마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