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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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한마디의 말 때문에

 

수술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 반듯이 서지를 못 했다. 간호사들은 나의 고통은 무시한 채 “엄살 좀 고만하세요. 아기도 아닌 어른이 뭐가 그렇게 겁이 많아요, 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엄살을 부려요?” 하며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나를 밀치며 늘 윽박지르곤 하였다. 나는 네 명의 아이를 너무나 힘들게 낳았지만, 그때마다 안간힘을 쓰면서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아이들을 낳으니 독하다는 말도 들었고, 사람들은 나에게 고통을 잘 참는다고 말들을 했는데….

수술 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뱃속도 당겨 죽을 지경인데도 간호사들은 입버릇처럼 그런 말들을 서슴없이 해댔다. 그런 와중에 시어머님이 오셔서 “우리는 너한테 오느라고 택시비만도 얼마나 들어갔는지 아냐?”라고 하시니 너무나 부담스러워 나의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더는 병원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댁의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줄 알고 광주에 입원했던 것이었으나 정작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부담만 늘었다. 그러나 도움받은 셈 치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니 서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고통에 시달리며 늘 토하고만 있으니 서숙(좁쌀) 미음이 속을 가라앉히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 좋다고 하여 나를 위해서는 누구에게 부탁해보지 않던 내가 손아래 동서에게 어렵게 부탁했더니, “시어머니한테 말씀드릴게요.”라고 했으나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친정어머니께서는 셋째 아이를 데리고 나의 병간호를 하셨기에 그것마저도 먹어보지 못한 채 퇴원을 하면서 ‘그래, 서숙 미음을 못 먹었지만 내 형제가 있어서 사랑으로 쑤어다 준 서숙 미음을 먹은 셈 치자.’ 하며 봉헌하였다.

 

312. 개신교에 나가게 되다

 

친정어머니는 농사일 때문에 나의 병간호를 위해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실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셋째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셨다가 농사일을 남에게 맡기시고 거동도 못 하는 죽어가는 딸을 위하여 다시 집으로 오셨다. 시간이 지나면 병이 조금이라도 나아야 할 텐데 더욱 심해져만 가니 이웃에서도 너무들 놀라 “의학으로는 낫기 어려운 병인가 보다, 마귀 병인지도 몰라.” 하고 걱정하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우리 집에 방문하도록 해주었다.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있는 나에게 장로교회에서 목사님과 여러분들이 오셔서 교회에 나오도록 권유하였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교회를 나갈 수가 있겠냐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들이 데리러 오겠다고 하였다. 그 후로 나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주일마다 자가용으로 교회에 데리고 가고, 끝나면 데려다주었으며 집으로도 여러분들이 방문하여 기도도 많이 해주었다. 육신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분들의 정성만은 아주 대단하여 이웃 형제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다.

 

313. 남편은 직장 충신

 

퇴원 후에도 나는 극심한 고통중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남편은 직장에서 많은 일을 했다. 그 당시 영암군 지도소에서 네 가지 특수작물이 들어와 지소에서 하나씩 맡아서 해야 했는데 11개 지소의 지소장들이 하나도 하기 어려워 모두가 핑계를 대고 안 맡으려고 했으나, 남편은 자청해서 세 가지 특수작물을 혼자 맡아 하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바빴겠는가!

낮에는 그들과 함께 특수작물을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밤이면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을 가르치느라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은 밥 먹고, 옷 갈아입고, 잠자러 들어오는 장소일 뿐,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야말로 남편은 직장 충신이었다. 그런 남편이 아내가 얼마나 아파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가를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사회인으로 봐서는 정말 훌륭한 일꾼이었다. 직장인 모두가 그이처럼 헌신한다면 국가는 발전하며 사회 또한 번영하게 될 것이다.

 

314. 수술 자리가 터져 거즈가 나오다니

 

고통의 연속이었다.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 혼자 외롭게 숨죽여 울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꿈 많았던 어린 시절, 그 누구보다도 잘 살아 보려는 의지와는 반대로, 끝이 없는 망망대해를 외로이 건너야만 하는 풍랑 속의 위태로운 나그네 같은 모습. 나는 지긋지긋한 병마와 힘겹게 싸우며 처절한 고통 속에서 남몰래 울어야 했다. 아무리 이겨내 보려고 노력해도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건강한 셈 치기가 너무 어려웠다.

친정어머니는 농사일로 잠깐 집에 가셨고, 남편은 바쁜 직장 일로 인해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나는 그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잠시도 쉬지 못하고 네 아이를 돌봐야 했다. 아이들은 순하고 착했으나 고통스러운 몸으로 갓난아이부터 초등학생까지 네 명의 아이들과 가정을 돌보는 일은 너무 힘겨웠다.움직이려고만 하면 배가 뒤틀린 듯 너무 아파 고꾸라지곤 하였다. 그래도 누워 있을 수만은 없어 일해야 했는데 배가 당겨 서지를 못 하니, 엉거주춤 걷다가 기어가면서 아이들이 혹시라도 나의 이런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걱정할세라 눈물을 감추고 안간힘을 다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해야 할 일을 했다. 밤이 되어 아이들은 잠이 들었는데, 큰딸 아이는 고통을 겪고 있는 엄마가 걱정스러웠는지 잠도 자지 않고 시중을 들어주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수술할 때 열 바늘을 꿰맨 자리 중 위에서 세 번째 자리가 염증이 생긴 것처럼 유별나게 아프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보았더니 피부가 아주 엷어져 3cm 정도가 곧 터질 것만 같아 화장지로 그곳을 잡고 잡아당겨 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꿰맨 자리가 염증이 생겼으려니….’라고 생각한 나는 염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잡아당겼는데 무엇인가가 피고름과 함께 섞여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손동작을 멈출 수가 없어 계속 잡아당기니 한참 만에 그 물질이 완전히 다 나오게 되었다. 들어보지도 못했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큰딸은 너무 놀라 “엄마, 그만해! 창자가 나오나 봐!” 하고 소리 내어 울었고, 나는 나대로 ‘정말 창자가 나왔나? 그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이 어린 것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니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외롭게 자랐기에 외롭지 않기 위해 시부모님 모두 계시고 형제가 많은 곳으로 시집가 남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낳아서 우리 아이들은 외롭지 않게 해주고자 했던 나의 생각이 어리석게 느껴져 한없이 울었다. 이렇게 많이 아파서 몸부림쳐도, 밤 12시가 넘어 수술한 배에서 무엇인가 길게 터져 나왔어도 함께 걱정하고 돌봐주어야 할 남편마저 내 곁에 없었다. 병원에 갈 수도 없어 치료도 못 한 채 아픈 배를 움켜잡고 어찌할 바를 몰라 딸을 붙들고 얼마나 울었던가. 한 번 터져버린 울음은 그치질 않았다.

 

315. 병원에서 나를 실험 대상으로

 

아침이 돼서야 들어온 남편은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거즈가 나온 것 같아, 빨리 병원에 가봐.”라고 하는 말만 남긴 채 직장 일이 바쁘다며 고통에 신음하는 아내를 홀로 두고 출근하였다. 혼자 걷기도 힘들었던 나는 수술했던 병원은 멀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동네병원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겨우 걸어가 수술 자리에서 나온 것을 보여주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의사는 “이것은 거즈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수술할 때 산부인과와 외과 두 곳의 실험 대상이 된 것’이라는 말을 그 의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15명 정도가 죽 둘러서서 수술하였는데 떼어내야 한다던 자궁도 떼어내지 않고 맹장만 떼어냈는데도 그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것은 산부인과는 외과의 것을, 외과에서는 산부인과의 것을 실험하다 보니 시간에 쫓겨 그렇게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빨리 배를 닫아야 했으므로 무성의한 처사로 빼내어야 할 거즈를 그대로 둔 채 바쁘게 꿰매버린 것’이라는 의사의 말이 실감이 갔다. ‘그래, 이왕에 이렇게 된 것, 그들이 나로 인하여 많은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면 더욱 좋겠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그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의 의술에 조금이라도 도움 보탬이 되어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내가 희생하더라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사랑받은 셈 쳤다.

 

316. 3개월간 계속 터져 나오는 피고름

 

동네병원을 찾은 첫날, 거즈가 터져 나온 자리에 소독만 하고 상처 난 곳에 새 거즈를 대고 반창고로 붙여 주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피고름이 나왔다. 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동네 작은 병원에 가서 소독하고 주사를 맞아도 아무 소용이 없어 영암 병원으로 가서 보였더니 깜짝 놀랐다. 거즈가 터져 나온 자리에 싱을 박아 넣어야만 새살이 차오르는 것인데 멍청하게 그냥 치료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치료를 시작했는데 전혀 차도가 없었다. 그러나 3개월 동안 매일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하고, 한의원에서도 먹고 바르라고 준 약을 먹고 발라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내가 살아보기 위하여 홀로 매일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로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 것이 정말 죽기보다도 어려운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내 어머니를 위하여, 넷이나 되는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이대로는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어 그 고통스러운 길을 계속 다녔다. 어떤 것을 두고 고통이라 하는가? 육신의 처참한 고통 속에서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지 못해서 몸부림치며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나의 삶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바로 죽음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잘 걷지 못하니 돈이라도 있으면 편하게 택시라도 타고 갈 수 있고, 큰 병원에 갈 수도 있겠지만 매일 1km의 동네병원에 엉거주춤 걸어 다니면서 돈이 없는데 행여 시어머니가 또 찾아오셔서 돈 달라 하실까 봐 그 조바심은 또 어떠했던가. 죽으면 현재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나 혼자의 몸이 아니었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건강한 셈 치고 살아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죽음에서 새 삶으로 도전해 보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317. 어린 큰딸의 지극한 효성

 

수술 후 출혈까지 계속되어 나의 고통은 더 증가되었다. 어느 날, 자리에 누워 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딸이 개천에서 아빠의 예비군복까지 깨끗이 빨아와서 빨랫줄에 널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특하고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그런 마음을 속으로 삭이면서 생각했다. ‘다른 애들 같으면 마음껏 뛰어놀 나이인데, 그토록 엄마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니!’

아이를 낳고도 몸이 아파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니, 큰딸은 천으로 된 아이 똥 기저귀까지 개천에 가지고 나가서 깨끗하게 빨아왔다. 나는 큰딸에게 “얘야! 어른도 똥 기저귀를 깨끗하게 빨지 못할 텐데,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빨 수 있었니?”라고 했더니 “엄마,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물로 헹구어 내고 비누 묻혀서 수세미로 잘 닦으면 깨끗해져.

엄마! 빨래는 내가 학교 갔다 와서 다 할 테니까,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서 빨리 병 나아야 해, 응? 엄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알았지, 응? 엄마!”라고 하며 다가와 손을 잡고 입 맞추며 웃어 주곤 하였다. 나도 함께 따라 웃었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늘 슬픔과 괴로움이 교차했다. 큰딸은 쉴 사이 없이 엄마의 시중을 들어주고자 애썼고 어떤 일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늘 미소 지어 보였다.

피 묻은 속옷을 옷장 틈 사이에 감추어 놓았더니 그것까지도 깨끗하게 빨랫줄에 널려있는 것이었다. 큰딸은 혹 거지가 와서 우리가 먹을 밥을 주어 우리는 굶게 되어도 한 번도 배고프다는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또는 기쁘게 엄마의 뜻에 따랐다. 병들어 있는 엄마가 살림을 못 하고 아빠가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공부도 일도 열심히 했다.

집에서는 엄마 대신 집안일 하며 동생들을 돌보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는데도 학교에서 1, 2등을 다투니 모범생으로 인정해 주어 모든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이렇게 큰딸이 온갖 정성을 다하니 나는 이 사랑스러운 딸을 생각해서라도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나도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어. 꼭 살아날 거야.’ 하고 다짐하며 딸의 효성에 늘 눈물짓곤 하였다. ‘하느님! 이 어린 착한 천사와도 같은 딸의 효성과 정성을 거두지 마시고 부디 저를 살려주소서.’

 

318. 고통 중에 있던 나에게 직원의 횡포는 죽음 자체였으나

 

내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네 아이를 모두 돌보기 어려우니 셋째는 친정어머니가 데리고 가셨다.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해도 병세가 나날이 심해져 거의 실신 상태에서 넷째 아이를 안고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남편의 심부름으로 농촌지도소 직원이 왔다. 그가 안방으로 들어와 “소장님이 심부름을 보냈습니다.”라고 하여 겨우 일어나는데 갑자기 뒤에서 껴안으며 “사모님, 사모합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모님께 반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나는 너무 놀라 사정없이 그를 밀쳐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나는 병자예요.” 해도 그는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힘없는 나에게 막무가내로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나는 다리를 꼬고 절대로 풀지 못하도록 하며 주님께 간절히 청했다. ‘주님, 힘없는 저를 이 성적 악마로부터 지켜주세요.’ 하고 간절히 청했다. 그는 한 시간여 동안 내 다리를 풀려고 땀까지 줄줄 흘리면서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일어나 나에게 무릎을 꿇더니 제사 때나 하던 큰절을 하면서 용서를 청했다.

“사모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프신 사모님이 이렇게 강하시다니 정말 존경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여자는 닭대가리라면서 엔조이 상대로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근데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세상에 계시다니! 정말, 정말 놀랍습니다. 사모님만은 세상 여자들하고는 다릅니다.”라고 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자신이 찜하면 아궁이에 불을 못 때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결혼식에 가서 신부가 맘에 들면 첫날밤 보내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여자를 범했고, 유부녀고, 처녀고 누가 되었든 간에 맘만 먹으면 모두 다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사모님 덕분에 이제 여자가 닭대가리나, 엔조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잘못 살았던 과거를 오늘 졸업하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렵니다.” 그래서 내가 “알았으니 이제부터 그렇게 잘못한 일들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결혼해서 아내에게 잘해주세요.”라고 했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동안 사모님이 걸어 다니시면 몸매도, 또 얼굴도 얼마나 예쁘신지, 아프시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우신지 ‘언젠가는 내가 한 번 꼭 맛봐야지!’라고 하다가 오늘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오늘 사모님을 통해 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그가 방에서 나가자, 나는 그 힘없음에도 한 시간여를 나를 지켰다는 안도감에 아니, 주님께서 지켜주셨음에 감사드리며 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악독한 음란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에 끔찍하고 아찔한 일을 겪었지만 사랑받은 셈 치니 마음은 흐뭇했다. 퇴근한 남편에게 말했다. “생선가게에 고양이를 보내면 어떻게 해요?” 했더니 “뭔 말이여?” “아니, 나 혼자 있는데 남자 직원을 혼자 보내면 어떻게 해요?” 했다. “왜?” “나를 성폭행하려고 해서 내가 한 시간여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그래도 다리 꼬아버렸더니 못 풀대요!” 그랬더니 남편은 놀라지도 않고 “그랬어?” 했다.

그 후 그 직원이 결혼한다고 남편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내가 그 자리에 가면 그가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음란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개입해 주시어 나를 통해 악을 선으로 바꿔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렸다.

 

319. 시골 할머니가 개 한 마리를

 

아무것도 소화하지 못했던 내가 그래도 보신탕만은 소화할 수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하고 있을 때, 성당에 다니지 못하게 하셨던 시골 시할머니께서 개 한 마리를 잡아 오셨다. 모처럼 먹게 된 보신탕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전혀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먹으려고 해도 토해버리고 먹지를 못하니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또다시 꺼내어 먹으려고 데웠다가 못 먹고 다시 냉장고에 넣기를 계속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보신탕이 물이 되어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자꾸 끓이면 졸여져서 진해져야 하는데 물이 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먹은 셈 치고 버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먹지는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도 시할머니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어 그 한 가지 해주신 것이었지만 어찌나 고마웠던지 계속 최선을 다하여 도와드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자랐기에 더는 외롭지 않기 위하여 형제가 많은 곳을 선택해 결혼했고, 시어머님과 형제들이 사는 광주에서 수술했지만, 형제애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정도로 그들에게 향했던 나의 사랑이었건만, 내가 아프게 되자 그들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 되어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와 가장 가까웠던 큰시누이에게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만이라도 넷째 아이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더니 일주일 만에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너무 고마워 영양제 식품을 사줬는데 더 못 해줘서 아쉬웠다. 내가 병원에서 고통 중에 몸부림칠 때 시동생들은 딱 한 번 왔는데 나에게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소주를 사 와서 자기들끼리 한쪽에서 먹고 갔다.

그런데 시어머님은 “너한테 다니느라고 우리 식구들 택시비만도 얼마나 들어간 줄 아냐?” 하고 역정을 내셨다. 내가 우애를 돈독히 하려고 심혈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해 몸이 으스러지도록 노력한 결과가 과연 이런 것이라니…. 그렇지만 ‘시어머님과 시댁 형제들이 잘해준 셈 치고’ 마음을 기쁘게 갖기로 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가슴 아픈 그 말씀까지 “얘야, 많이 아프지? 고생한다. 조리 잘하여라.”라고 하는 애정 어린 부드러운 사랑의 말을 들은 셈 치고 봉헌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내 마음을 스스로 달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홀로서기를 잘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길을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역사하셨음이리라. 그러니 누가 모질게 대하고 상처를 주더라도 원망하고 화내는 대신 셈 치고 아름답게 봉헌한다면 하느님께는 기쁨이 될 것이다.

 

320. 죽지 못해 사는 나의 삶이 안타까워서

 

병원을 계속 다녀도 터진 수술 자리가 더 악화되어 자리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돈이 없어 큰 병원에는 갈 엄두도 못 내고 더더구나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시느라 친정어머니까지 꼼짝을 못 하셨다. 돈이 얼마 들지 않는 동네병원이긴 하지만 없는 형편에 계속 다니다 보니, 친정어머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오시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생활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매달 형제들이 시어머님을 위하여 조금씩 모아 넣던 곗돈과 다섯째 시동생에게 우리가 보내는 돈 외에 시어머니가 보내신다던 돈을 그달은 시어머니께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어머님은 월급날이 되자 그날 바로 집에 오셨다. 그날도 어김없이 돈을 달라고 하시기에 시어머님께 어렵게 사정하였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다음 달에 나오는 보너스로 꼭 갚을 테니 서울 시동생에게 보낼 돈과 어머니의 곗돈도 둘째 시동생에게 한 달만 입체 좀 해 달라고 부탁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이달만 그렇게 해주세요, 네? 어머니.” 하고 마음을 졸이며 조심스레 드린 말이 끝나자마자 시어머님은 주먹으로 마루를 쾅쾅 두들기시며 호통을 치셨다. “너희들, 나 아니면 끝도 못 마쳐야!”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빚내어 시동생을 가르쳤는데 시동생에게 보냈다면서 당시 10만 원에서 20만 원씩을 더 가져가신 시어머님은 오히려 아픈 나에게 터무니없는 여러 말로 화살을 쏟으셨다. 그러나 나는 더는 시어머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어머님, 죄송합니다. 안 그럴게요. 해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어머니.” 하고 집을 나서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길 없었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몸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기에 기다시피 하여 아랫집에서 조금 빌리고 꽤 먼 거리에 평소 알고 지내던 경찰 부인이 살고 있었기에 힘들게 기어가는데 누가 보이면 얼른 숨고, 기어가다가 누가 보이면 또 숨으면서 찾아가 돈을 빌렸다. 아쉬운 소리 못 하던 내가 용기를 내어 “내가 지금 병원에 가야 하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그러니 돈이 있으면 좀 빌려주시겠어요? 금방 갚아 드릴게요.” 하고 사정하여 어렵게 빌린 돈을 시어머님께 갖다 드렸다.그런데도 화가 풀리지 않으신 시어머님은 아들 걱정만 하시면서 투덜대고 떠나셨다. 사랑받은 셈 쳐보지만, 여러 가지로 나의 처지가 힘겨워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주체하기 어려운 눈물은 메마르지도 않는가? 행여 남편이 들어오면 아무 일 없는 듯 웃어주어야 했고, 아이들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나날들….

큰딸은 내 곁에서 굳어지는 나를 주물러 주면서, 혹시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러내리면 “엄마, 울지 마.”라고 하면서 따라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울지 않아.” 하고 말했는데, 감추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그럼 이게 뭐야?”라고 했고, 그러면 나는 눈에 티가 들어가서 그렇다고 했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던 딸은 “아니야, 엄마가 너무 아픈데도 아빠가 안 들어오시니까 그렇지? 엄마, 내가 아빠 대신 엄마 안 아프게 해줄게. 울지 마, 응?”라고 하면서 어린 것이 나의 마음을 찡하게 울리곤 했다. 나는 삶이 너무 버거워 죽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이렇게까지 사랑으로 내 곁에서 위로해 주는 천사 같은 딸아이와 어머니 때문에도 죽을 수가 없어 사랑받아 건강하게 회복한 셈 치며 다시 힘내어 잘 살아 보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