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찼으나 공부를 계속 할 수가
없었던 저는 시동생들이라도 제대로 공부시키고 싶어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세 번째 아이 임신 4개월 되었을 때
제 건강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둘째 아이를 업고
일을 하다가 조금의 출혈이 있어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아이가
죽었다며 "지금 자궁이 썩어가고 있으니 수술하자"는
그들의 제의에 저는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하고
단호하게 거절하자, 함께 간 남편에게 "부인 살리고
싶냐? 죽이고 싶냐?"하면서 수술하도록 설득시켜 저를
강제로 수술대 위에 올려 두손 두발을 다 꽁꽁 묶어놓고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고통이 시작된 것이지요.
7일만에 재수술을 하였고, 8일만에 죽어서 전대병원으로
실려가 3일만에 의식만 되찾게 되었는데 13일만에 태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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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저 곳을 전전하면서 병을 고치고자
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려다
병을 얻었으니 아이를 낳아 보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권유로 아주 어렵게 아이를 임신했는데 9개월 초부터 진통이
시작되었지만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 유도분만을 해야 된다는
의사의 말에 "사람이란 시와 때를 가지고 낳는 것인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기다려라" 하시는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죽어 가는 진통을 겪으면서도 울며
지냈던 두 달, 친정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을 찾아가서 "내 딸
좀 살려주시오"하여 지어 온 한약을 먹고 11개월만에
집에서 아이를 분만했는데 얼마나 많은 출혈을 했는지 친정
어머니가 손으로 훔쳐 넣은 피가 요강으로 하나 그리고
세숫대야로 하나였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고 저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지만 시동생들 뒷바라지 해야 되니 닝겔주사 하나도
맞지 못했지요. 국가 공무원인 남편이 그 당시 농촌지소장으로
시골에 근무했기에 우리는 시골에서 살게 되었는데 넷째
아이를 낳은지 2주가 조금 지나 시어머님이 오셔서 쌀을
팔아 달라고 하여 시어머님 말씀을 한 번도 거절해 본 적
없는 저는 시골 정미소를 걸어서 다 돌아다니며 쌀을 팔아
드렸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출혈이 심하여 발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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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통증과 발의 뜨거움으로 계속 밤잠을
설치며 몸부림해야 했고 퉁퉁 부은 발은 가라앉을 줄을
몰라 오랜 시간들을 남 몰래 울며 지냈지요. 아이 낳고
조리 좀 잘해 보자고 한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아이 낳은 지 4개월 만에 개천에서
빨래하다가 셋째아이가 물에 떠내려가 놀란 저는 물 속에
들어가 아이를 건졌는데 그때부터 열이 나고 배에 심한
통증이 시작되어 병원에 가니 급성 맹장염이라고 했습니다.
수술할 여건이 되지 않아 통원 치료를
했으나 "안되겠다"은 의사의 말에 광주 전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검사결과는 '자궁 뼈 골반염', '자궁외
임신', '열병', '맹장염' 이렇게 네 가지로 병명이 나와
의사들도 전전긍긍하다가 서로 미루더니 제가 거의 죽게
되자 그때에야 수술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대변이
마렵다고 하는 저를 그대로 수술실로 데려다가 전신마취를
시켜놓고 15~16명 정도가 죽 둘러서서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일 주일이 다 되어가도 음식을 먹으면 토하고 먹지 못하며
화장실도 걸어서 제대로 가지 못하니 간호사들이 무릎으로
차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무슨 여자가 그리도 엄살이
심하냐고요.
퇴원하고 나서 한 달쯤 되니 고통이
더 심해졌습니다. 수술 후 꿰맨 자리에서 피고름과 함께
어떤 물체가 터져 나와 화장지로 잡아당겼더니 계속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큰 딸 로사는 큰소리로 울면서 "엄마!
창자가 나오잖아! 어떻게 해 응? 엄마, 어떻게 하면 좋아..."
큰딸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말았습니다. 수술후 꺼내야
할 꺼즈를 꺼내지 않고 꿰매어 1달후에야 그것이 수술자리로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골병원을 매일 다녔는데도
겉 봉패만 되었다가 또다시 피고름이 터져 나오기를 3개월,
수술했던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한 결과는 장이 유착이
되었으며 많은 염증이 있어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는데
제가 수술할 수가 없다고 하자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럼
더 견디어 보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그때는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큰 병원에 다녀온 뒤로 겨우 봉패가
되었기에 많이 아플 때만 시골 병원에 다니면서 고통을
참으며 그 와중에도 96세된 시외할머니를 모시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데도 월급날이면 시동생들
뒷바라지하기 위해 돈을 보내느라고 큰 병원에 가서 검진도
못하고 지내던 중 너무 심하여 몇 년간 다니며 치료했던
영암 대성의원에 입원했는데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집에 가서 맛있는 것이나 많이
드십시오."하면서 퇴원을 시켰어요.
그때까지 아무도 제 몸 안에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나간다고 생각지도 않았지요. 암 덩어리는
항문 밖에까지 그리고 발까지 퍼져 나와 의사가 남편에게
보일 려고 하는 것을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안돼요!"하며
제지하였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그 추한 모습을 보이고
사느니 차라리 보이지 않고 죽는 것이 났겠다고 생각하며
감추었습니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저는 퇴원 후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친정 어머니께서 27세에 혼자 되셔서
저 하나를 믿고 사셨는데 그 어머니의 가슴에 무덤이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기에 심혈을 기울여 노력을 다했지만
온갖 합병증으로 설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제
몸이 바닥에 닿는 곳은 다 굳어 버리니 남편과 친정 어머니가
교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는데도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갔고
혈압은 50~40이었으며 심장도 좋지 않으니 식음을 전폐했어도
닝겔주사 하나도 맞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니 그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은
기관장의 부인이 아파 누워 있다고 하여 승용차로 기독교
장로교회에 데리고 갔다가 데려다 주곤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저는 성당에 다니고
싶어 성당 옆에 방을 얻었으나 다닐 수가 없어 누워있을
때 개신교에 다니는 여신자 두 사람이 방문하여 실컷 위로해
주고 나가더니 밖에서 "아이고, 인생이 불쌍하지만,
목숨이 아깝지만 사는 사람들 위해서 죽어 주는 것이 걸림
돌을 치워 주는 것이여!" 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렇구나! 내가 왜 미쳐 그 생각을 못한 것이지?'. 저는
먼저 0.5g만 먹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싸이나라는
약을 구해 놓고 7통의 유서를 썼습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네 아이들, 남편과
다음 부인될 사람에게, 그리고 죽음 준비가 다 끝나 아버지가
계시는 저 세상으로 가야되는 이 처절한 나의 한 생애가
조용히 막을 내리려는 순간, 직장에 나간 남편이 퇴근 시간도
아닌 시간에 갑자기 집에 들어와 "여보! 오늘은 성당엘
좀 갑시다."하여 우린 성당을 찾았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신부님! 하느님이 계시고 신이 계시다면
너무 가혹하십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 했길래 이렇게 쓴
잔 (죽음)을 마셔야만 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 계시지 않는 집안 잘 꾸려보려고,
단 한 분의 어머니를 잘 모셔 보려고 했었고, 힘겹고 고독한
몸부림 속에서도 인내심과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칠전팔기
오뚝이처럼 대항해오며 그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게 잘
살아서 나처럼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와주며, 내가 불편하더라도
상대방이 화평하기 만을 바라며 살아왔었기에.... 우리
집에는 거지들, 장사꾼들이 머물러 가는 집이라고 들 일컫기도
했었는데....
신부님께서는 "아주머니는 지금
몸으로 은혜 받고 계십니다. 저도 그런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믿으십시요"라고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아멘"으로 응답하게 되었는데 얼음장처럼 찬
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온몸에 땀이 주르르 흘러
내렸습니다. "아멘"으로 응답할 때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었지요. 저는 성당에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필요한 성물들을 사서 옷장 위에 성모상을 모시고 장미꽃
한 송이와 촛불을 켜고 서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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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되는 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성경을 가까이
하라, 성경은 바로 살아있는 나의 말이니라" 저는 즉시 성서를 펼쳤는데 루까 8:40절
이하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12년간이나 하혈한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과 신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병이 나았을 때 예수님은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라." 또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너의 딸이 살아 날
것이다."하시어 그가 믿자 그의 딸이 살아나게 된
그 말씀을 저에게 주신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 "아멘"으로
응답하자 온몸으로 펴져있는 암 덩어리와 모든 합병증이
온전히 치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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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같은 당신이 죽게 된 것은
오로지 나 때문이요."하고 울면서 아내를 살려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남편은 가만히 방에 누워만 있으라고까지
했어요. 뛸 듯이, 아니 날을 듯이 가뿐해진 몸으로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미용실을 경영하게 되었고 예비자
때부터 성령운동과 레지오 활동도 하게 되어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철야기도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봉사자 회장님이 "오늘 특별한 은사와 은총을
받으실 분이 있습니다." 할 때 그 말은 꼭 저에게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믿었습니다. 새벽 3시경에
봉사자님이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주님
! 저는 영적으로 성장되고 싶습니다. 영적으로 성장시켜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때 저에게 보여주신 너무나 놀라운 모습들에 의하여 제
몸은 경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받아왔던 여러가지
고통들 즉 어려서부터 외갓집에 맡겨진 내가 소처럼 일하고도
수없이 두들겨 맞은 일들, 밤낮으로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주었는데도
보수를 받아보지 못했던 일, 제가 투자한 사업자금까지
주지 않으려고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고 머리를 깨려고 하고
쇳덩어리에 몸을 마구 찧어대면서 집단폭행을 했던 사람들
등등. 아버지 계시지 않는 설움 속에서 받았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들, 평소 나의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상처받은 저의 과거가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연속 상영이
되어 모두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안배해 주셨음을 깨닫고
통렬하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존재해 있으므로 그들이
저 때문에 잘못을 하게 되었으며 죄를 짓게 된 것에 대하여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제가 없었더라면 그들이
죄를 지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제가 그들 곁에 있었음이
바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내가 가만히
서있었을지라도 돌멩이가 굴러와 내 발을 쳤다면 어찌 그
돌멩이 탓을 하겠는가, 내가 거기에 서 있지 않았다면 다치지
않았을 것을.... 많은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며,
"윤양이 워낙 착하니까 이용당한 것이여!" 라고
하던 말들에 대하여 수긍했던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주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울며 저에게 못할 행동들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 봉헌하며 "주님!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시어요. 제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저를
단련시키기 위한 도구들이었으니 오히려 저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어요"
하면서 저는 세상에 태어나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잘 살아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며 상대방이 나를 통하여 언제나
화평하기만을 바래왔던 것과는 달리 나 때문에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오열을 터뜨리며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주소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계속 이 말 밖에는 더
이상의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뉘우치며 이제까지
받아왔던 수많은 그 고통들이 하느님의 예비하신 사랑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닫고 뉘우치며 회개하고 용서 청할 때 검은
장이 걷히우고 홀연히 하늘의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저에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늘의
문이 열렸다", "하늘의 문이 열렸다", "하늘의
문이 열렸다." 연이어 세 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는데 저는 아주 작은 영혼이 되어
그 밑에서 "주님 제 가슴을 더 열어주십시오",
"더 열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잘못을 한 번도 해보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던 교만은 물러가고 일등 죄인으로 탈바꿈하여
있었습니다.
몸이 굳어져 경직된 제 몸을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서 "주여
제가 이제 죽든지 살든지 당신 뜻에 맡기나이다!"하며
자신을 봉헌하고 있을 때 3일만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딸아!
하느님은 자기 종의 비천함도 사랑하셨고 그처럼 약함을
느끼는 그 마음속에서 함께 작용하셨다. 어서 일어나거라.
부족한 너를 통하여 나를 전하도록 하겠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온 몸을 날으는 듯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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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께서는 3일만에 부활하시더니 나를 통회시키시고
눕히셨다가 3일만에 일어나게 하셨구나. 그래요 주님! 이
몸 온전히 당신의 것이나이다. 당신 뜻대로 사용하소서."
주님께서는 3년동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면 생각만 해도, 머리속에 스치기만 해도 모두 다 이루어
주시므로써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것을 매순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또 병은 어느 정도 진전이 되고 있는 것까지 보여
주시니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못을 박아드리고 그들이 박는 못은
더 깊이 박히고 더 아프다는 것을 알려 주시므로 저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묵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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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당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빨마가지를 던지고 옷가지도
던져드리며 그 위로 지나가시도록 했는데 당나귀가 "오!
우리 주인님을 환영하는구나" 하고 겸손하게 사뿐사뿐
걸어가야 되는데 자기를 환영하는 줄 잘못 알고 좋아 날뛴다면
그 위에 타고 계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되실 것인가?
예수님께서 떨어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그렇다, 주님을 전한다고 하는 자녀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가 한 것처럼 설친다면 바로 우리 예수님을 땅에 떨어뜨리며
오히려 교만으로 주님께 못박아 드리는 것이 되는데 혹시라도
내가 그 자리에 서지 않는다고 그 누가 보장하겠는가'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 동안 성령운동할 때 떼밀려 앞자리에
세워졌기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되었으므로
'이제까지는 잔치상을 차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겸손하게 설거지 하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주님! 그러니 이제 그 모든 것
그만 보여 주셔요. 제가 고통을 받으므로 주님께 못을 박아
드리는 죄인들이 회개만 할 수 있다면 제가 고통을 받겠습니다'
하며 고통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주여! 천하디
천한 이 육신은 끊임없는 병고로 신음할지라도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는 사업에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고통이리까" 하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이 죄인 포함) 고통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극심한 고통을 수없이 받게
되어 3년 후에는 또다시 임종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하여 목요 성시간을 계속
해 오던 저는 공동체 안에서 하고자 광주로 가면서 "가다가
죽어도 주님의 것, 살아도 주님의 것이 오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바치려는 이 몸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하고
성시간에 참여했는데 임종 준비를 하던 제몸의 보속고통을
희생으로 온전히 바칠 때 주님께서는 더불어 덤으로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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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필요하실 때 고통도 허락하시고
건강하게도 해 주셨으며 1985년 6월 30일부터는 모시고
기도하던 성모상을 통하여 눈물과 피눈물, 향유를 흘리시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메시지도 주십니다. 주님은 몸소
음식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오셨건만
많은 자녀들 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제 성체의
변화와 성체를 내려 주시기도 하시니 세상의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메시지를 따라 생활이 개선되어 모두가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타고서 천국 가기를 바라며, 이 죄인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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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자격이 없어서 숨어 살기를 바라며
세상에서 소외받은 이, 알콜중독자, 행려자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며 1984년부터 숨어서 그 일을 해왔는데 그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오줌똥을 다 싸고 쓰러져
있는 환자를 길거리에서 데려다가 장갑도 끼지 않은 채
그 옷을 빨 때가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 몇 명을 돌보며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와 대세를 받도록 하여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지금은 나주군 다시면 신광리에 있는
조그만 대지에 집을 지어 오갈 데 없는 병든 할머니들과
치매 환자들, 고부간의 갈등으로 집 나온 할머니를 몇 분
모시고 있는데 잘 돌보지 못해 주님께 죄송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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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빨리 교회에서 성모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 교회에 다 내어드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부끄러움밖에
없는 이 죄인이 하느님과 주님, 그리고 성모님께 용서를
청하며 남은 한 생애 주님과 성모님을 위하여 주시는 대로
잘 봉헌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홀로
영광 받으소서.
"나의
빛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
사랑이란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나
땀흘려
희생하는
것이요,
잃어주고
먹혀
주어야
되기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순교를
본받아
겨울의
모진
설한풍도
사랑하고
끊임없이
닥쳐오는
고통들을
슬기로써
봉헌하며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
맺음으로
당신의
위로자가
되고자
하나이다."
1997년
9월
부족한
죄인
윤
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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