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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집에 다녀온 후 남편이 너무 달라졌어요. 

우 데레사

율리아 자매님 안녕하십니까?
염려 덕분에 저희 가정이 만족한 하루 하루를 지낸답니다.
율리아 자매님! 자매님을 뵙고 다녀와서 바로 답장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늦었군요.
6월 30일의 감사한 마음 뭐라고 표현을 할지요. 저번에 저희 가족이 다 함께 나주를 다녀와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 저희 남편이 너무 달라졌어요.
자매님 기도 속에 저희 가정에 축복이 내려져서 항상 감사, 감사, 아멘, 아멘 한답니다.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저희 가정에 평화와 감사가 깃들어 있어요. 요번에 저희 본당 성령 세미나가 있었는데 저희 남편이 성령 세미나를 위해서 7월 28일에 있는 여행도 마다 하셨답니다.
예전 같으면 아마 성당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여행을 가신다고 하셨을 거예요. 그러니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어요. 자매님, 저의 남편이 "저희 가정은 성실한 성가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요즈음 저희 남편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자매님의 말씀이 다시 가슴에 와 닿았나 봅니다. 성모님과 자매님을 뵙고 오신 뒤로는 아주 남편이 달라졌어요. 전에는 제가 성모님 말씀, 자매님 말씀을 하면 말씀을 잘 안듣는 편이었는데 요즈음은 오히려 제가 짜증을 낸 적도 있답니다.
요즈음 친구분들 사이에서도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에 대한 말씀을 하신답니다.
자매님, 너무 감사합니다.
며칠 있으면 8월 7일날 성모님과 자매님을 뵈러 갈 거예요.
자매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저희 친정 동생이 저렇게 성당에 안 나가서 걱정이에요. 그래서 요번 기회에 동생을 데리고 갈려고 해요. 성모님을 섬길 수 있게끔 기도좀... 그 동생은 무당을 좋아하는 동생이거든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꼭 마귀를 쫓고 꼭 성모님을 모실 수 있도록 치유 받도록 도와주세요.
자매님, 죄송합니다. 자매님께서 그렇게 무서운 고통을 받고 계시는데 저희들은 어려운 부탁만 드리니 말이예요. 죄송합니다.
저희 친정 어머님도 6월 30일날 나주에 다녀오셔서 한 2년이나 아프셨던 다리가 지금은 "언제 아팠었나?" 하신답니다. 자매님, 며칠만 있으면 뵈러 갈 거예요. 그 때 인사드릴께요. 할 말은 많으나 만나서...
안녕히 계셔요.

 

1993년 7월 30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서인리 13번지
우 데레사 T.675-5608

 

 

성모님 집에서 피비린내를 맡고 자궁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김 소화 데레사 

저는 영세받기 전에 낙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이 했는지 여러분이 아시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저는 낙태한 경험으로 인해서 자궁에 큰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다녔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고 늘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세를 하고 나서 낙태한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를 알고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지난 달 29일부터 자궁이 더 아프기 시작했고, 아이를 낳고 나면 나오는 오혈 같기도 하고 피고름 같기도 한 것이 막 쏟아졌습니다. 아이 날 때보다 더 큰 고통이 시간시간 왔습니다. 그 때부터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낙태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팠었는데 어떤 자매님이 오셔서 나주 성모님께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 전에부터 저는 나주 성모님에 대해서 듣고 있었고, 그래서 저는 지난 8일날 여기 오게 됐습니다. 나주에 와서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장미향기 같기도 하고 백합향기 같은 그런 향기를 3번 맡았습니다. 성모님을 뵙고 돌아 나오는데 향 피우는 냄새가 났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비디오를 보게 되었는데 그 전에 성모님 집안에 사진 전시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촛불에 태아 모습이 있는 사진을 보았는데 다른 사진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태아 모습이 제 눈에 크게 클로우즈업 되어 제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에요. 그리고서 비디오를 보는데 율리아 자매님께서 낙태 고통을 받는 모습과 신앙고백을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갑자기 피비린내 같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도 그런가 하고 옆사람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습니다.
피비린내를 굉장이 많이 맡고, 많이 아프던 자궁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피고름도 완전히 멎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990년 10월 19일 증언
김 소화 데레사
 

 

"성모상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박 안드레아(원호)

"성모상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이 어디 있는가!"
몇몇이 앉아서 이야기 하는데 나도 그들과 똑같이 동감을 했었다. 가까이 살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어느날 성당에서 "저 분이 율리아씨야." 나의 눈길은 이미 하얀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분을 보면서 "저렇게 촌스러울 수가..." 나는 성모상의 눈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관심 밖이었다. 그 때 나는 본당 40대 남자 모임인 대건회 회원이었고, 대건회 회장님이 그분의 장부였는데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었지만 성모님의 눈물과는 완전 별개였다. 그런데 이사를 하신다고 해서 (아파트에서 지금의 성모님 집으로) 내 차가 있으니 이삿짐을 날라 드리는데 그 때에 본 율리아 자매님은 왜 또 그렇게 아양스럽게 보였는지 모른다.
항아리가 움직여도, 물건이 떨어져도, 어머 예수님, 어머 성모님,... 연발하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예수님, 성모님만 찾는 그 모습이 우리에게는 생소하여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1988년 6월초에 요셉 수사님이 대건회원들을 만나러 오셨는데 점심식사 약속을 하고 성모님 집에 잠깐 다녀온다고 해서 내 차로 모셔야 하기에 나와 함께 가서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수사님이 나오지를 않아 가만히 들어가 보니 (이때가 처음이었고 성모상을 바라보지도 않았음) 율리아 자매님이 서울, 부산, 수원 등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 앞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계셨다. 이런 답답할데가 어디있는가? 들락날락 하다가 기다린지 1시간이 넘어서 낮은 목소리로 "이제 빨리 갑시다."하니 눈도 돌리지 않고 "조금만..." 나는 이야기 소리도 듣지 않을려고 밖에서 있다가 잠깐잠깐 들어와서 말했는데 조금은 짜증이 나서 "저 여자가 빨리 끝내지 무슨 말을 저렇게 오래 하고 있지?"하고 생각하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 한마디가 심중을 울리는 소리였다. 이게 바로 회개의 눈물이던가?
거의 한번도 흘려보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며 잘못 살아온 내 과거가 부끄럽기 시작했다. 그렇게 촌스럽게 보이고 아양스럽게 보이던 자매님의 모습은 이미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가 두 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니 회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그러나 내 가슴은 이제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환희로 가득찼다. 수사님이 왜 빨리 일어서지를 못했는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간을 통해서 일을 이루신다는 하느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나를 이런 모습으로 부르셨다. 율리오 형님께 그 동안의 잘못 판단했던 것을 사과드리며, "이제 나도 뭔가 조금은 알 것 같은데 한번만 더 들으면 똑똑히 알 수 있겠으니 기회 있으면 불러주십시요." 했더니 6월 30일이 눈물 흘리신 '3주년 기념일'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기다리던 기념행사에 아내와 함께 참여했는데 장미향기, 백합향기 등...  여러가지 향기가 난다고 여러사람이 말하는데 나는 또 "아이고, 저 사람도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어?"하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진한 장미향기가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내 코에 부어넣는 듯 했다. 아내도 장미향기를 많이 맡았다고 했다. 장미 향기가 무슨 뜻인지 알아 보았더니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이라고 했다. 2부가 시작될 때부터 심중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 가슴은 "쿵"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무언가 가슴 하나 가득 안아주신 것 같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한번도 죄인이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동안의 내 삶이 온통 죄 덩어리였다. 언제나 내 탓이라기보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주님께 성모님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 흘리신 것은 바로 이 죄인 때문이었구나." 여기에 이르자 견딜 수 없는 통회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날 주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내리시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가슴 가득히 채워 주셨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에 젖어 어떤 일을 해도 입에서는 주를 찬미하는 노래소리요, 온갖 사물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수많은 날들을 성당에 다니면서 별의미 없는 발바닥 신자였지만 이제야말로 새롭게 주님을 만난 것이다. 평소에 보기 싫었던 사람들도 다 예쁘게 보이고 우주 만물이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그렇게 즐겨 피우던 담배도 봉헌하고 낚시도, 커피도, 사냥, 화투, 등...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또 교회 다니면서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성모성심을 통하여 온전히 주님께 봉헌될 수 있도록 바치면서 기쁜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젊어지고 예뻐질 수 있느냐고 비결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양스럽게 보였던 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도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말로만 들었던 마귀는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끊어 놓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일을 이루시듯 마귀도 인간을 통하여 온갖 일을 다 꾸미고 있었다. 그것도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그 동안 성당은 오래 다녔지만 이제 하느님 사랑에 눈을 떴기에 마음이 비수로 찌르는 듯 아팠지만 그러나 열심히 성모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내가 신앙으로 새로이 눈을 뜨게 되자 율리아 자매님을 영적 지도자로 아니 영적 어머니로 생각하게 되었다. 시기, 질투로 인한 여러가지 모함으로 생긴 유언비어는 주님의 마음, 성모님의 마음을 더 묵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여린 내 마음은 평소에 그렇게도 존경해오던 모 성직자와 수도자, 수도자 장상, 성모님을 보았다고 하는 분까지도,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합세하여 나 뿐만이 아니라 율리아 자매님께 심지어는 성모님께까지 누를 끼치게 하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가슴이 타는 듯 했다. 그러나 자매님은 늘 사랑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봉헌하며 오히려 감사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 중에서 "네 인성에서 떼어내는 생살 한조각" 또는 "너의 고통을 속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을 되새기면서 -수많은 고통 중에서 그나마 나의 고통까지 합하여 드렸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 되어 주님 앞에서 성모님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 성가를 하는데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유다스의 배반은 어떠했으며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심산이었던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의 아픔을 묵상하면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착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란다. 나는 따지고 싶었다. 정의로써 모든 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그러나 율리아 자매님은 "이 세상의 것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세속과 타협하지 말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고 하셨으며 원수까지도 모두 사랑하여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침묵을 지키라고 하셨기에 봉헌하려고 노력하는데도 나약한 나는 어려웠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도 힘이 들었다. 옆 사람의 권유로 그것도 병원 앞을 지나가다 조선대학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되었다. "죽을려고 작정했오?" "예?" 나의 병은 심근경색, 심근 허혈 등 사망율이 95%인데 5% 남은 수는 사경을 헤매어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 간의 진단이 끝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야 된다고 하며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앞이 캄캄했지만 성모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했다. "죽어도 당신의 것, 살아도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하신 자매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죽어도 살아도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시라고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자 나는 천주교 신자인 주치의 흉부외과 김성준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 잠깐 다녀 오겠다며 사정을 하니 절대로 안된다고 하기에 통사정을 하여 억지로 가퇴원하여 성모님 집으로 갔다.
약을 주었지만 약도 먹지 않고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했다. 심장을 체크해 보기 위하여 한달쯤 후에 병원에 가보니 내가 퇴원한 뒤 병원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담당 과장님은 주치의의 정갱이를 차면서 만약 환자가 죽으면 당신이 책임지라고 하며 목을 내 놓으라고까지 했다 한다. 병원측에서는 깜짝 놀랬다. 지금쯤 죽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환자가 살아서 그것도 치유되어서 병원을 찾으니 너무 놀란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주치의는 당장에 나주에 내려오게 되었고, 철야기도회도 참석했다. 심장병 치유 뿐만 아니라 허리도 척추가 삐뚤어져 살짝 결렸는데 치유되었고, 간도, 신장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시다. 정말이지 나처럼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이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뜻이 있어, 주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하여 치유해 주셨으니, 이 몸이 다하는 날까지 어떤 고통이 와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며 성모성심이 승리하시도록 성모님의 말씀대로 더욱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영웅적으로 충성을 다하여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신 성모님의 손을 잡고 가리라.
나는 나주 성모님의 집에 다니면서 터무니 없는 말을 듣고 울적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을 죽이고 더욱 겸손하게 작은 자의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하여 노력한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오 5:11- 12) 이제 성모님의 말씀따라 신성이 담긴 성서를 가까이 하면서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감사하며 모세는 왕권을 포기하고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포기한 것처럼 부족하지만 내 자신도 온전히 포기하고 봉헌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리라. 초라한 죄인으로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성가를 바친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보지 않겠네."을 부르면서 천주께 영광 돌린다.
찬미와 감사와 영광과 흠숭을 주님 홀로 받으소서. 영원히 아멘.

 

1992년 11월
전주 나주시 교동 107-8
박 안드레아(원호)

 

 

성모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죽어도 당신의 것,
살아도 당신의 것이나이다." 

박연훈(루비노)


저는 현재 성모님 집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박연훈(루비노)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봉사하게 된 동기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1983년 광주대교구 푸른군대 피정에서 봉사할 때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성물들이나 책 등을 판매하며 봉사하는 율리아 자매님에게 햇빛이 뜨겁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매님은 "지금 저는 강론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저는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영혼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기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피정이 다 끝나고, 신자들이 다 돌아간 뒤 하안또니오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님에게 몇마디 하시더니 이마에 손을 얹고 "진짜 봉사자가 나타났네."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때 하 신부님께서는 우리 두 사람을 백경그릴이라는 경양식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가정 봉헌식을 함께 하게 되었고 그 날 밤 우리는 함께 김 베로니카 자매님 댁에서 철야기도를 하게 된 것이 우리가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신안군 도초면 외남리 공소에서 전교회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제 영혼이 영적으로 너무 갈급하여 전국 여러 곳에 피정을 다니게 되었으나 저의 영혼 상태는 늘 채워지지 않은 채,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서 눈물로 주님께 호소하며 간절히 기도했고, 들에서, 바닷가에서 외쳐보기도 했지만 상처로 찢기운 텅빈 마음은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도초공소 주변에는 결핵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음료수와 음식도 함께 먹기도 했는데 그 후 저는 기침을 하면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생활이 곤란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봉사하던 때였기에 공소마당에 마늘을 조금 심어 수확하여 마련한 돈을 아내가 제 손에 쥐어주면서 "육지에 나가서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약을 사서 드세요."하고 권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율리아 자매님을 찾아 갔는데 자매님은 저에게 우선 주님께 기도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3일 밤낮을 자매님과 함께 철야기도까지 하면서 마음의 깊은 상처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되었습니다.
눈물, 콧물은 어디에서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지...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은 많은 고통을 대신 겪으며 기침을 많이 하더니 피까지 넘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뒤에 자매님의 인도로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고 검사를 했을 때 의사 선생님이 "아무 이상도 없는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며 웃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고 뉘우칠 때 사랑의 품안에 안아주시어 우리가 받은 영혼 육신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인간인 의사를 통하지 않고도 치유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픈 곳을 치료하기 위하여 가져온 돈이 쓸 필요가 없게 되어 저를 따뜻하게 대해 준 율리아 자매님 가족들에게 무엇인가 선물하고 싶어서 나주본당 성물판매소에 가서 선물을 사려고 하니 자매님이 극구 반대하기에 저는 사정사정을 하여 겨우 제일 값이 싼 1단 묵주를 사기로 했는데 "아, 성모님이 참 예쁘시다."하는 율리아 자매님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게 되어 얼른 성모상을 사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하고 7,500원을 주고 성모상을 사서 율리아 자매님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상처 속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며 짓밟혔던 나의 슬프고 쓰라린 과거, 지워버리고 싶었던 일들...
그렇게도 영적으로 고갈되어 버렸던 저의 아픈 상처는 사라졌습니다.
어두움과 슬픔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희망과 사랑의 밝은 빛이 왔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만남으로써 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본 큰 사랑과 위로는 메마른 저의 가슴에 사랑의 불로 타올랐고,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평화를 느꼈습니다. 모든 세상은 아름다웠고 새로워졌습니다.
성모상을 선물한 지 1년 후 그러니까 1985년 6월 30일 나주에서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소식을 듣게되어 7월 18일 나주에 가서 성모상에서 눈물 고임을 보았고 7월 20일에는 눈물 흘리심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후에도 나주에 여러 차례 오게 되었는데 어느날은 제가 성모님 집에 도착하자 율리아 자매님이 어디에 가는 도중이었는데 나도 따라가면 안되겠느냐고 하니 가도 된다고 하여서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나주 매일시장 입구에서 멀쩡했던 율리아 자매님의 발이 땅에 붙다시피하여 떨어지지 않기에 깜짝 놀란 저는 "택시를 부를까요?" 했더니 "아니예요. 예수님께서 가신 골고다 언덕을 생각하면서 한 발 한 발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며 가야해요."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봉헌하며 눈물을 감추고 가다가 막걸리 병마개의 동그란 하얀 종이가 땅에 떨어져 발로 밟혀진 것을 불편한 몸으로 주으면서 "이렇게 성체가 많은 이들로부터 짓밟히고 있어요."하고 보이는 대로 다 줍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성가 '영문 밖의 일'을 노래 부르면서 갔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갖은 포악 지셨구나.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한 발짝을 옮기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에 5분 거리를 1시간 30분 걸려서 도착한 곳은 초라한 집이었는데 그 집에는 맹인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저는 그 때 화장실을 가고 싶었는데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화장실을 찾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 돌아와보니 율리아 자매는 벌써 물을 데워서 할아버지 목욕을 다 시켜드린 뒤였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그런데 그때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걸음도 겨우 한 발짝씩 걸어서 왔던 자매님이 성한 몸으로 목욕까지 다 시켜서 옷을 입혀 업어주다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아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어! 진짜 내가 정상이 되었네." 하며 웃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목욕을 시켜드리기 위하여 주님과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고통스럽지만 물을 길어가지고 와서 불을 때서 물을 데울 때 땅에서 주운 성체의 모습 비슷한 하얀 종이를 성체를 모독한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며 불에 태웠고, 모령성체를 하는 이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라고 기도하며 태웠는데 그때부터 몸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체! 그렇다. 믿는 자의 구원인 성체, 내가 공소에 있었기에 성체의 신비에 대하여 잘 깨닫지 못했는데 주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성체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뒤로 저는 바빠서 공소로 갔는데 자매님은 혼자서 할아버지를 성당까지 업고 다니면서 박희동(요한) 신부님의 주례로 안드레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맹인 할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리러 갈 때, 한 영혼이라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마귀는 할아버지에게 가지 못하도록 율리아 자매님을 잘 걷지 못하게 하며 붙들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된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나주에 들렀을 때 또 율리아 자매님은 할아버지 댁에 가기에 따라 갔는데 할아버지를 뵙고 나서 부엌으로 들어간 율리아 자매님은 울다가 통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며 가까이 가보았더니 밥통 속의 밥에 쥐가 들어가 파먹고 들락날락하여 밥은 온통 시커멓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더러운 밥을 할아버지가 모르고 잡수셨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율리아 자매님은 할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기 위하여 기도를 했는데 안되니까 의사를 만드신 주님께 의탁하고 병원에 가서 할아버지의 눈을 보이고 수술을 받으시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눈물 흘리고 계신 성모님 때문에도 '미용실을 해야 되나?, 안 해야되나?' 갈등 속에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기 위하여 미장원을 팔고 이삿짐을 정리도 하지 않고 병원에 가서 눈을 수술해 드렸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눈의 신경을 다쳐서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85세 된 노령이시기에 안된다고 의사가 끝까지 거절하자 자매님은 눈을 뜨지 못해도 좋으니 수술만 해주시라고 하면서 죽은 사람의 사정도 들어준다고 하는데 꼭 좀 부탁한다고 두 손을 싹싹 비니까 의사 선생님은 0.1%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수술을 해 주었는데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매님의 지극한 '심청이의 정성'이라고들 동네에서 말들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병원에서 76세 된 노인의 백내장도 나이가 많아서 수술할 수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복음 말씀 그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매님의 모습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큰 사랑을 보게 되었고 그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날은 자매님과 함께 암환자 방문을 가게 되었는데 가던 중에 자매님 호주머니에 든 우황청심환이 껍질만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아! 우황청심환까지 씻겨져 버렸네. 주님, 그 약이 꼭 필요한 이에게 약효를 주세요."하지 않는가.
저는 자매님께 "소화 데레사에 관한 책 읽어 봤어요?"했더니, "아니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자매님과 함께 할 때 소화 데레사를 연상하게 된다고.
자매님은 성녀 소화 데레사를 본받아 오직 "사랑, 사랑, 오직 사랑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아름다운 작은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영적인 독서를 많이 하였는데 머리 속에는 '영적인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를 자매님을 만나게 되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영적인 독서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기를 "희생벌레", "하느님 사랑에 미친 여자"라고 일컬었습니다.
책이나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 실천이 중요하기에 지식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또 어느날 성모님을 찾아왔을 때 율리아 자매님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영가를 부르는데 저는 녹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 때문에 저는 너무나 많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성서를 자주 보기에 얼른 알 수가 있었는데 바로 그 내용은 시편 29장의 내용인 것 같아서 성서를 펴보았더니, 그 내용이 똑같았는데 마지막 부분 "축복받아 평화를 누리어라."이 "축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하여, '을'자가 들어간 것이 오히려 더 맞는 것인데 번역관계에서 틀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성모님께 간절히 '성모님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기도를 드렸는데 성모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시었구나.'하고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제가 소속된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1987년 6월 23일 나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성모님께서 주신 수많은 증표와 눈물과 피눈물, 이마에서 흐르는 진땀, 향유, 성체, 성모님의 메시지, 수많은 사진들을 접해 오면서 율리아 자매님 곁에서 거의 함께 일해 왔습니다.
성모님께서 나주에서 주셨던 증표는 자연을 초월한 현상으로 현대의 과학으로도 밝혀질 수 없으며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하였으며, 나주 성모님의 은총을 입었던 수십만명의 증인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이 모든 증표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은혜임을 확실하게 믿고 있으며 진실임을 확신합니다.
큰 사랑의 기적을 이루시려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원의에 의심없이 아멘으로 순응하고 응답하여 더욱 겸손하게 작은 자의 영혼으로서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영웅적으로 충성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항간에 떠돌던 유언비어, 그것은 바로 율리아 자매님이 너무 사랑이 많아 불쌍해서 사랑을 베풀어주면, 그 사람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시기와 질투로 터무니 없는 말을 본당 신부님들이나 주교님들께 거짓증언을 하므로써 진실이 왜곡된 말들입니다.
유언비어를 통해서 고통을 겪고 있는 율리아 자매님을 볼 때 율리아 자매님을 잘 아는 우리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러나 율리아 자매님은 그것이 바로 내가 받아야 할 보속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아픔을 기쁘게 봉헌하고 마음의 고통을 아름다운 미소 속에 감출 때,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는 마음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어려서부터도 그랬지만 특히 1982년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숨어서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고 원했는데, 성모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자신이 부족하므로 사제님들과 평신도들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죄를 짓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하며 숨어서 보이지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율리아 자매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너의 수많은 고통들은 인성에서 떼어내는 생살 한조각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자매님은 그 말씀대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시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과 기쁨으로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아름답게 봉헌하며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주님, 죽어도 당신의 것, 살아도 당신의 것입니다."하며, 주님을 따라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율리아 자매님 옆에서 자매님을 계속 지켜보면서 성모님의 충실한 도구로서 최선을 다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율리아 자매님을 도와서 성모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순교하는 마음으로 많은 영혼을 천국가는 길로 인도하고자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박해하고, 모함하고,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주 성모님을 쓰러뜨리려고 해도 주님께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고, 그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고통보다도 율리아 자매님이 인고로 고생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지도록 아픕니다. 그럴 때 주님과 성모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율리아 자매님의 그 지극한 고통을 통해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되고 있으니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성모님을 몰랐던들 이 부족한 죄인이 진정 부족한 줄도 모르는 채 무척이나 영적으로 교만하여 죄인 중의 큰 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에는 두꺼운 기브스를 하고 머리에는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로 분별력 없이 무례한 태도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형제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었을텐데, 자비를 베푸시어 영적인 교만을 꺾어 주시고, 부끄러움 뿐인 죄인 중의 죄인을 부르시어 낮은 자로 주님과 성모님의 일꾼으로 써 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와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남들은 뭐라고 해도, 육신은 지치고 힘이 들어도,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아 순교의 정신으로 작은 자의 사랑의 길을 걸으며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시며 우리를 하늘 항구까지 도달시켜 줄 성모님의 손을 꼭 붙들고 우리 모두 천국 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 성모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 곁에 모여드는 모든 영혼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심 안에 품어주소서. 아멘!

 

1995년 6월 18일
나주시 금계동 수강아파트 302호
박연훈(루비노) T.32-2883

 

 

성모 어머니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제가 어찌..

이앙금(데레사)

안녕하세요?
저는 예락공소 이데레사입니다.
나주 성모님께서 뒤늦게나마 죄인임을 깨우쳐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글 몇자 씁니다. 저는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아서 농사 일에도 미흡하고 역경과 고난으로 생활해오다 나주 성모님을 찾아뵙고부터는 건강도 되찾고 항상 기쁘게 생활하며 매사에 뉘우치는 생활과 기도에 열중합니다. 성모 어머니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제가 어떻게 활동하며 농사일에 열중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나주 성모님 집에 갔을 때 거기에 모인 형제 자매님께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광경들을 보며 마음이 흐뭇하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항상 묵주 기도와 묵상을 하며 "자비로우신 어머니, 죄인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간절한 저의 소원도 들어주소서."하고 눈물로 애원하며 호소하고 또 청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항상 저의 귓전을 울렸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그 말씀들은 저의 가슴을 울렸고 듣고 있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도 그 말씀은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과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도 매우 흐뭇하고 후련했습니다. 항상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될 수 없는 것을 성모님께서는 치유해 주십니다. 이젠 건강도 회복되었으니 제 주위의 불쌍한 영혼들까지도 생각하고 기도하며 생활하렵니다.

 

예락공소 이앙금(데레사) 드림
1993년 2월 8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예락리

 

 

성서에서나 있는 줄 알았던 기적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이소영(글라라)

저는 김제 이글라라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끊임없이 잔병치레를 했으며 남들과 어울려 생활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나주 오기 전에는 심한 두통에 간장, 위장, 심장, 신장이 모두 만성이라 할 상태까지 나빠져 있었습니다. 머리는 아프다 못해 두개골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제 귀에 들릴 정도였고 간장은 약해져 계속 잠만 자는 마면증으로 아침에 눈을 떠도 너무 힘이 없어 의식은 있으나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으며 위장은 만성위장병 상태였고, 심장은 호흡을 해도 허파까지 산소가 들어가지 않고 목까지만 왔다 나가는 것 같아 걸어 다니는데도 힘이 들어 걸을 수 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 새벽쯤 심장마비가 와서 잠을 깨는 순간 의식은 있지만 굉장히 심한 통증과 함께 심장이 멈추고 의식은 점점 사라지며 손도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로 갔다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누가 옆에 있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증세가 밤마다 계속되어 두려웠습니다. 어느날, 심장통증과 마비증세로 아픈 순간, 밤에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이러다 죽으면 그만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죽기 전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전에 아는 교우 집에 갔다가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자를 잠깐 짧은 시간에 보고 왔던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나주 가는 도중에 버스 안에서 심장이 멎으면 죽는 수 밖에 없는데도 메시지를 봤기 때문에 죽기 전 나를 비롯한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서 성모님이 피눈물을 흘리실 수 밖에 없었던 그 아픔을, 나는 앉아 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빌면 성모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인들의 용서를 위해서도 보속이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가짐으로, 제가 할 일은 어서 빨리 성모님께 용서 구하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를 타기도 힘든 상태여서 차 안에서 굉장한 아픔이 왔기 때문에 어떻게 나주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오게 되었습니다. 오직 나주라는 것 하나만 알고 생전 처음으로 성모님 집에 왔던 것이었죠. 성모님을 경당에 모시기 전 아파트에 모셨을 때 일이었습니다. 아파트에 들어가서도 몸이 아파 앉아 있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 한 시간 이상을 누워 있다가 나왔는데 성모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심하게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 냄새가 나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베란다와 여러곳곳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냄새는 성모님의 피눈물 냄새였습니다. 앉기도 힘이 들어 성모님 바로 앞에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성모님이 모셔진 방 중간쯤 위치에서 밤새도록 뜬 눈으로 그냥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었고, 지금도 기도는 잘은 못하지만 그 때는 죽기 전에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리려는 생각으로 오직 그 기도만 하며 성모님방 벽에 기대어 다리는 쭉 펴고 그대로 앉아 날을 새었습니다. 그러나, 밤새 저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침이 되어 그냥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바로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그 많았던 통증은 어느새 모두 사라졌음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두렵기까지 했던 머리, 심장에서 오던 그 심하고 많던 통증이 다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성모님 집에 오기 전 병을 치유해 주시는 성모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기도를 더 많이 했을텐데, 전혀 몰랐었고 기적도 성서에서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런 기도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이 다 사라졌던 것이죠. 계속 성모님 집을 다니던 어느날, 율리아자매님께서 보통 일반 성당에서도 판매하는 스카풀라를 하나 주셨습니다. 성당에서도 판매하는 것이지만 나주 성모님 집에서 받은거라 소중하게 생각이 되어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후로도 율리아 자매님께서 스카풀라를 몇 개 더 주셨습니다. 그 당시 제 가족은 어머니와 6남매가 있었고, 그 중 저만 빼고 모두 개신교 신자였는데 어머니는 그래도 딸이 준거라 좋은 거라고 생각하시고 다른 개신교 신자에게 보이면 판단 받을까봐 감추어서 목에 걸고 계속 개신교에 다니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티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생각나실 때마다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리고, 가끔 확인만 했습니다. 무당집과 절을 심하게 다니시던 어머니가 개신교라도 다니시는 것이 다행이기에 성모님께 가족들을 천주교로 개종시켜 주시라고 기도한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제가 손에 들고 있는 묵주를 저를 따라다니며 달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묵주가 하나밖에 없었고, 묵주를 장식품으로 오해하셔서 달라고 하시나 보다 하고, 묵주는 가톨릭에서 기도하는 것이라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서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그 묵주를 달라고 하시기에 하나밖에 없는 제 묵주를 드렸습니다. 어느날 어머니가 언니집을 다니러 가셨는데, 고속버스 안에서 묵주기도 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묵주를 그냥 돌리면서 가셨고 그곳에서 성당에 나가시게 되어 90년도에 영세 받으시고 92년도에는 견진성사까지 받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묵주기도는 하실 줄 모르니까 신기해서 그냥 달라하셨다가 어디다 넣어 놓으셨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생각할수록 신비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개신교를 다니셔서 마음이 상하실까봐 성당에 가시자고 한마디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성당에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던 중 스카풀라와 묵주는 성모님의 가장 큰 무기라는 율리아님의 말씀이 떠올랐고, 얼마 전 필리핀 신부님이 경당에 오셔서 말씀 중에 성모님의 무기는 스카풀라와 묵주라는 말씀에 강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6남매중 3명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5째 동생은 교리 중이며 3째 동생은 시댁이 모두 개신교 신자라서 하루 아침에 성당으로 오기는 어렵겠지만 3째 동생도 스카풀라를 걸고 다니며, 나주 성모님 집에도 다녀 갔으니 언젠가는 성모님께서 성당으로 불러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또 제가 보았던 신비한 일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1. 87년 9월 15일(성모통고축일)
서울에서 오신 표 요셉피나 자매님과 함께 성모님 앞에 있었는데 성모님께서 눈물을 글썽이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눈물이 고여있는 상태에서 율리아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너무 급하게 들어오시다가 현관에서 신발 한 짝 벗는 도중 갑자기 날아서 현관을 지나 성모님상 앞에 무참하게 떨어지면서 고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아님은 3시간 동안 십자가 고통을 받으셨는데 장정들 몇 명이 방바닥에서 들어올려 보려고 애써도 꼼짝도 하지 않으셨고 얼굴과 몸은 진땀이 흐르고 몸은 차디찼습니다. 성모님이 우신다는 연락을 받고 성모님 방으로 들어오실 때 왼쪽 어깨 (팔)에 불화살을 맞으셨다는 말을 고통이 끝난 후에 듣게 되었습니다. 율리아님이 십자가 고통을 받는 중에 전 본당 주임 박희동 신부님도 오셨고, 비디오 카메라도 도착되었습니다. 2주일동안 거의 식사도 못하신 상태였는데 그 십자가 고통을 받으시고 나서 완전히 건강해지셔서 우리 모두 놀랐습니다.

2. 그 후 어느날 성모님 집에 며칠 묵으며 아파트 302호실 안집에서 율리아님 가족과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그때는 이미 제가 몸이 건강해졌기 때문에 뒷 설거지를 제가 하겠다고 자청하고 율리아님은 순례자들을 만나시도록 했습니다. 율리아님께서 드시다 조금 남긴 밥을 전자밥통에 넣고 설거지를 마무리 하고 성모님 방으로 갔는데 점심때가 되자 율리아님께서 놀란 듯 약간 이상한 눈과 표정으로 저를 보시며 "밥이 어디서 나서 저렇게 많이 부어 놨느냐?"고 물으셨지만 저는 아침에 조금 남은 밥을 넣어 놓은 기억밖에 없었습니다. 율리아님께서 12시쯤 둘째 딸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해서 혼자 먹고 가라고 했는데 1시 쯤에 밥이 조금밖에 없을 것 같아 순례자들에게는 같이 먹자고 이야기도 못하고 가족들만 점심을 먹으러 가서 보니 큰 그릇에 담은 밥을 거꾸로 부어 놓은 것같은 밥덩어리 다섯덩어리가 있더랍니다. 순례자들과 율리아님 식구를 합하면 꽤 많은 숫자였지만 그러나 '밥이 모자라지 않을까?'하면서도 모두 함께 먹자고 불러 밥을 펐는데 순례자와 가족 수대로 딱 맞았고, 밥을 드신 분들도 모자라지 않게 양껏 다 드셨는데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순례자 중에 단식하던 표 요셉피나 자매님이 전자밥통에 부어진 밥을 보더니 "오상 밥이다."하며 "단식중이지만 주님이 주신 오상 밥이니 나도 먹어야지."하면서 같이 드셨습니다. 율리아님께서 처음에 제가 찬밥을 모아 부어 놓은 줄 아시고 '서른 살이나 되는 사람이지만 그동안 살림을 안해보아 그릇에 있는 밥을 거꾸로 부은 채 손질도 않고 두었구나.'하고 생각하셨다가 '찬밥이 집안에 없을텐데... '라고 의아한 마음으로 저에게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율리아님이 남기신 밥이 어디로 갔을까? 저녁 때 둘째 딸에게 물어보니 12시경에 밥을 먹고 갔다고 하자 "그때 밥이 어떻게 있었어?"하고 율리아님이 묻자 "밥이 조금 있어서 먹고 갔는데요."했습니다. 그렇다면 한시간이 지난 1시에 오상밥이 생긴 것입니다. 밥을 먹은 우리 모두는 성서에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은 기적을 생생하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체험 등을 하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차 있던 저는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니 나주를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김제 수류 본당에서 미사 때 오르간 반주를 하던중 밖에서 어떤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듣던 못소리 같은데... " 반주가 끝나고 나서 밖에 나가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그동안 잊고 있던 율리아님의 목소리가 자동차의 카세트에서 들려 나오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율리아님이 전하는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이었습니다. '아차! 내가 나주를 잊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며 며칠이 지나 나주로 왔는데 그날이 바로 첫토요일 철야기도회를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오르간을 치도록 부탁 받았습니다. 너무나 놀랄 일이죠. 나주 성모님께서 부르시는 방법도 여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에서 살려 주셨는데도 눈이 멀고 귀가 멀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다시 이러한 방법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성모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2년 10월 19일
전북 김제시 요촌동 113-21번지
이소영(글라라) T.(0658)547-2732
 

 

성체 사진 앞에서 묵상하시던 신부님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최정자 말가리다

'성체의 중요성을 모든 이에게 전하여라.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한다면 주님은 너희 안에서 생활하시며 항상 거하시리라.'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 중에서)

1993. 6. 27 교황주일에 증표를 보여 주셨던 성작과 오상의 성체 사진을 통하여 체험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무척 많이 복사하여 여러 사제님과 신자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장부의 축일 때 세 분의 사제님께 보였더니 그 중 서품 받으신지 6개월된 신부님께서 미사 중에 똑같이 오상입은 성체를 보셨다고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그 때 나주 기적수를 드렸는데 물에서도 장미 향기가 났고 나주에서 가져온 묵주에서도 메시지 책에서도 장미 향기가 났으며 성작과 성체 사진에서도 장미 향기가 많이 났습니다.
사제님들 모두가 매우 신기하게 느끼셨으며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제가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치유받아 살아났음을 증언했더니 살아있는 증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집 방에는 크게 복사한 성체사진이 모셔져 있는데 어느날 미국에 가신 신부님이 저희 집에 방문차 오셨다가 성체사진을 보시고 약 30분 정도 성체사진 앞에서 묵상하시는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격했습니다.
성체 앞에서 깊이 묵상하신 사제님 얼굴에 나타난 붉은 홍조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 사제님은 나주 성모상에서 피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직접 보셨다고 하시며 지금은 향유가 흐른다는데 한 번 가봐야겠군...  하셨습니다.
또 저의 아들 방에 크게 복사한 성체 사진을 아들 허락없이 모셔놨는데 어느날 아들이 저에게 "엄마, 제가 모령성체를 했는데 차마 고백하지 못했다가 오늘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뛸듯이 마음이 좋아요, 성체 사진을 보면 실제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 듯이 두려움이 와요."하며 사제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홍조를 띈 얼굴을 하고 말하는 아들이 너무나 예뻤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아들 방에 청소를 하려고 들어가 보니 방안이 장미 향기로 가득하여 깜짝 놀랐는데 촛불을 켜고 열심히 기도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너무나 많이 냉담하고 있는데 공부하다가 성체의 신비를 전혀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하루 빨리 성체의 신비를 전하여 그들이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느꼈답니다. 우리 아이가 성체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여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성체 조배와 교리교사에 열심히 봉사하고 장부도 본당에 지속적인 성체 조배 회장직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체 사진을 통하여 매일 미사의 은총을 받아 미사의 뜨거움 속에서 감격스럽게 성체를 영하며 실제로 살아계심을 매순간 느끼며 생활합니다. 저는 성체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예수님을 사모하게 되었고 모든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으며 희생 극기 보속을 성체를 분배하시는 사제들을 위하여 바치며 더욱 큰 신뢰와 존경심을 드리며 하루속히 성체사진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 성체의 중요성을 모든 이가 깨닫고 살아서 오시는 예수님을 깨끗한 영혼으로 모셨으면 합니다. 성체는 살아계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의식하기에 아주 작은 잘못도 내 안에서 그냥 두기가 두렵기 때문에 자주 고백성사를 봅니다. 이 모든 영광을 티없으신 어머니 성심을 통하여 주 예수님께 드리옵니다. 영원토록 찬미 찬양 받으옵소서. 아멘.

 

안성 정자 말가리다
T.(0334)73-9441(집) 675-9441(가게)

 

 

성체의 신비가 내 앞에 펼쳐지다니! 

김영란(스텔라)

성체안에 현존해 계시는 주님 찬미 받으소서!
천상의 어머니 마리아여! 찬미 받으소서.
어머니의 크고 깊은 사랑, 애덕의 어머니, 사랑의 어머니, 자비의 어머니, 어찌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이제야 느꼈는지 불러도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어머니, 진심으로 충심으로 "사랑해요."
제가 받았던 체험과 충격은 너무나 감격스러워 떨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나는 1993년 2월부터 얼굴이 붓기 시작하여 몸에 피곤이 빨리 느껴졌다. 농촌이라 하우스 재배와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에 몸이 아프지 않아야 되는데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나는 나의 본분인 며느리로서의 역할, 아내의 역할, 또 엄마의 역할을 못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날이 갈수록 다른 곳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눈알이 빠질려고 하며 손과 발도 가렵고 저리고 떨렸다. 목포에 있는 병원에는 다 돌아다녀 보고 거의 몇 달을 병원에만 쫓아 다녔다. 나는 정말 '저를 아프게 하시려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만 아프게 해 주세요'라고 성모님께 청원을 하였다. 시어머님은 내가 방에 누워 있으면 가슴에 천불이 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성화로 난 너무 아파서 친정에서 지내다가 일이 걱정스러워 다시 집으로 갔으나 눈이 빨갛게 되어 얼굴이 흉칙스럽게 부어 올라서 응급실로 갔지만 검사결과를 보고 입원을 시킨다고 했는데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병은 심하여 설사와 구토 때문에 기운이 없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전에는 일도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관계는 굉장히 좋았으나 내가 아프니까 어머니는 매일 짜증을 내며 화를 내셨다. 마음이 불안하니까 몸이 더욱 더 아파왔다. 너무 괴로우니까 '빨리 죽었으면', '예수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하며 살고 싶은 욕망이 점점 나에게는 무너져 버렸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나는 정신도 신경성인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다시 친정에 가서 쉬면서 광주 전대병원에서 진찰을 해 봤으나 병명이 나오지 않아 마지막으로 나주 성모님 집에 가서 죽어도 거기서 죽고 병이 나으면 집에 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식구들도 지쳤는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귀찮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운한 마음이 밀려오니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식구들이 미워서 나주 성모님 집에 가면 오지도 않고 살아야겠다고 나쁜 마음이 떠 올랐다. 6월 24일 목요일 기도회에 참석해서 기도 좀 받을까? 하고 왔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들어오실 때는 걸어 나오셨는데 기도를 하신 후에 다리를 절며 부축하여 집으로 들어 가셨다. 정말 나는 기도를 안받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통을 받으실 율리아 자매님을 생각하며 묵주기도 5단을 바쳤다. 몸이 어느 한 구석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이틀 후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께 묵주를 봉헌하고 계셨는데 나는 묵주가 갖고 싶어서 하나만 주시라고 청하였다. 쾌히 승낙 하시면서 율리아 자매님이 묵주를 건네주는 순간 몸이 열과 함께 씻은 듯 가뿐하였는데 그 대신 율리아 자매님은 내가 아픈 것처럼 고통을 받으시며 들어가셨다. 나는 이틀이나 굶었는데도 힘이 솟아났다. 함께 있던 자매님들과 율리아 자매님을 위하여 묵주기도 15단을 바치고 돌아다녀도 거뜬한 것이었다. 함께 있던 자매님도 너무 신비스럽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너무 괴로워 하니까 죽을병이 걸린줄 알았다고 한다. 정말 어머니는 이 비천한 죄인이 당신에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천상의 장미꽃을 정성껏 바치라고 묵주를 주신 것 같았다. 나는 화살기도로 성모님을 자주 찾았지만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았었다. 그런데 타인을 위하여 기도를 할 때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나주에 와서 깨닫게 되었다.
6월 27일, 이날은 교황 주일이라 묵주기도를 교황님을 위하여 마음모아 정성껏 바쳤다. 11시와 3시에는 함께 있던 자매님들과 묵주기도 15단을 교황님, 추기경님, 주교님 및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죄인들의 회개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율리아 자매님과 나주 성모님이 하루 빨리 인준되길 빌며 기도지향을 두기로 했다.
율리아 자매님이 오후 2시 30분 경에 들어 오셔서 성서를 보시고 기도와 묵상을 하셨다. 기도하신 후에 성모님상 앞으로 나아가서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에 성모님상 오른쪽 어깨 약간 밑 뒷판 파란 곳을 자꾸 눌러보고 만져 보셨다. 모두들 의아해 하며 "뒷판이 왜 앞으로 나왔을까?"하고 소근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한 두번 밀면 되는데 왜 저렇게 많이 (열번정도) 눌러 보실까?'하고 있을 때 여러 형제 자매님들이 의아해 하시면서 서로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성모상은 중앙에서 왼쪽으로 약간 움직이셨다.
형제님 한 분이 그 때 성모상이 흔들흔들 하면서 왔다갔다 하여 카메라로 인하여 그랬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때 진짜로 움직이셨나 보다고 했다. 나도 말로만 움직이신다고 들었는데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실감이 났다. 형제, 자매님들도 놀란 듯 신기하게 생각했다. 4시경에 율리아 자매님은 집으로 들어가셨으며 우리는 5시까지 기도를 했다. 오늘 회장님이 율리아 자매님이 받은 교황님에 대한 성모님 메시지 말씀을 읽어 주셨는데 뇌리에 스쳐온다. "어서 성체 안에 계신 주님께 흠숭과 보상의 열렬한 사랑의 불꽃이 되어라."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예수님을 가장 높이 받들고 거룩하게 생각하며 희생과 보속을 통하여 충심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예수님의 성심을 채워 드리는 것일까? 하며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며 떨렸다. 오늘따라 성모님의 향유가 이마에서 유난히 더 많이 흐르는 것이 육안으로 보인다. 향 내음이 백합, 장미, 사과향 등이 어우러져 경당 안을 가득 채웠다.
율리아 자매님이 찍은 사진을 루비노 회장님이 기쁨과 환희에 찬 모습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우리를 부르시며 사진을 보여주셨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사진은 성작과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선명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라 떨리는 마음으로 토마의 불신앙이 생각났다. 나는 머리를 누구한테 세차게 맞은 기분이었으며 내 두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함께 목격한 자매님은 사진을 보며 성체를 함부로 못 모실 것 같다고 했다. 신비로운 성체가 이렇게 내 두 눈 앞에 펼쳐지다니! 언제나 예수님이 계시고 하늘나라가 있다고 한 나였지만 '성체는 예수님이시다.'라고 머리로만 생각했었다.
난 너무 놀라 그날 저녁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성모상 앞에서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주시다니,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그래서 어머니는 피눈물을 흘리셨나 보다 하며 묵상하니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닦았다. 이제는 영성체 하는 것이 두렵다. 내 마음에 조그마한 티 하나라도 있다면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서는 모시지 않아야겠다고 생각된다. 성서와 말씀을 통하여 듣던 성체의 신비가 내 앞에 펼쳐지다니!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은 몹시 떨린다.
그리고 미사 때는 예수님의 피.
그 거룩하고 보배로운 피가 예수님의 늑방에서 뚝! 뚝! 뚝!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 내린다.
그 피는 얼마나 크신 하느님의 사랑인가 "피보다 진한 사랑"을 예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건가?
내가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무거우실까?
교만하게 내뱉는 말이 예수님의 가시관을 더 누르는 것 같다.
남에게 던지는 비수같은 말은 예수님의 늑방을 찌르는 것이었으며 불평불만하는 말이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것이었으리라.
고통을 통하여 불러주신 성모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오상을 더욱 더 묵상하게 만든다.
나의 성실성 없는 신앙생활을 반석 위에 다져놓는 기회였다.
이제 다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 짓누르지 않아야겠다.
오! "성체의 신비여!" 지극히 거룩하신 피, 예수님의 피!
피 한 방울 만이라도 저에게 떨어뜨리면 나의 죄는 다 씻어질까?
그렇지만 두렵지 않다. '너희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진다.'는 성서 말씀과 성모님의 말씀,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사랑과 자비이시기 때문이다. 아직도 뇌리에 스쳐오는 성체의 존엄성을 묵상하는데 평소에 잘 바치지 못했던 묵주기도가 바치고 싶어졌다. 율리아 자매님이 묵주를 건네준 뒤로는 자주 바치게 되어 묵상을 했는데, 웬일인가?
묵주기도는 하면 할수록 무한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단 1분이라도 시간이 아쉽다.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령으로 로사리오의 신비를 가르쳐 주심을 확신한다.
화제를 조금 바꾸어 보자.
우리 미카엘(장부)이 먼저 성당을 다녔지만 묵주기도를 전혀 바치지 않았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성모님의 집에 있는 동안 식구들의 마음이 모두 변하여 사랑에 찬 미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장부 미카엘은 첫 토요일 철야기도 때 참석한 뒤로 자기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고 깊이 회개하며 참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우리 온 가족이 모여 로사리오 기도를 바친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우리 가정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가? 고통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며 저절로 자연 안에 있는 우주 질서를 찬미하게 되었다.
죄인이었던 나를 변화시켜 주신 나주 성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예수님의 성심, 어머니의 성심을 채워드리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 치면서 나의 심장을 때린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숨결이 산 위에 웅장한 나무들과 땅 위에 돋아나는 푸르른 새싹들. 천상의 모든 군대와 천사들과 성령의 바람에 어우러져 빛이신 하느님께 찬미 영광 드리는 것 같다. 하느님의 햇살이 우리 위에 내리고 온 세상에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메시지 말씀이 전파될 때 세계 평화가 오리라고 확신한다. 늘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히 무궁 무진하게 찬미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전남 무안군 일로읍 상 신기리 1구
김영란(스텔라) T.(0613)79-4510

 

 

세상에 그럴 수가... 

홍복순(안나)
 

불교신자였던 저는 수강 아파트 301호실에서 성모님이 우신다고 하여 구경 삼아 가 보았더니 정말 눈물이 조금 흘러 내렸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보고 있는 동안 더 많은 양의 눈물이 양쪽 눈에서 흘러내려 깜짝 놀랐는데 나오려고 하니까 어떤 자매가 성모님의 손을 잡으면서 "어머, 성모님 맥이 뛰어요." 하기에 저도 성모님의 손을 잡으니 진짜 맥이 뛰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의심 없이 그때부터 성당에 다니기로 결심을 하였지만 대 장손 며느리이기에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후 몇년 뒤 그러니까 1988년도인가 8월 26일 성모상이 지금의 경당으로 모셔진 뒤에 한 번 왔는데 너무나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날은 부산, 서울, 대구, 대전, 광주 등 전국의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데 아주 열심히들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촛불들을 켜고 봉헌하고 거의 돌아갔는데 가만히 보니 맨 뒤쪽에 어느 자매님이 목발을 짚고 촛불을 봉헌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 물어 볼까? 생각하는데 그 때 대답이라도 하듯이 율리아 자매님이 그 자매에게 가더니 "자매님 촛불 봉헌하실래요?"하니까 "남편이 밖에 나가서 돈이 없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율리아 자매는 정색을 하며 "돈 필요 없어요."하고 루비노 회장을 불러 촛불을 들게 하고 양쪽에서 부축을 하고 가는데 오른쪽을 부축하던 율리아 자매님은 그 자매님의 목발이 땅으로 떨어지자 발로 휙 차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 또 왼쪽 목발도 떨어지니 루비노 회장이 주우려고 하자 율리아 자매가 줍지 말라는 손짓을 하여 그냥 성모님 제단으로 데리고 가서 촛불을 봉헌하게 하고 두 사람이 다 부축하던 손을 놓고 율리아 자매님이 "걸어내려 오십시요."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모여있던 모두는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은 채 안집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얼마가 지난 뒤 그 자매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 걸어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자매는 그 날 목발을 성모님 집에 놔두고 갔습니다. 모두가 놀라서 "주여!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하고 박수로 환영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이제까지 다니지 못했는데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정말 성당에 다니고 철야 기도회에도 다녀야지.'생각하고 9월 첫 토요일 철야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다른 분들도 다 놀라워 했지만 저는 그날 신앙 체험담을 듣고 더욱 놀랐습니다.
8월 26일 목발을 두고 갔던 그 자매는 송정리에서 온 자매인데 남편과 함께 전주로 식사하러 가다가 차 사고가 나서 안 다친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개인 병원, 대학병원 어느 한군데서도 받아준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아는 병원이 있어 사정사정 하여 열 두시간인가 열 다섯 시간인가 수술을 했답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 12월달까지 땅에 발을 대지 말라고 했는데 8월 15일 사고가 나 8월 26일 날 나주에 너무 오고 싶어 혼자서는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어 남편을 졸라서 나주에 와 앉혀 주었기에 자매님이 전하는 메시지 말씀을 들었는데 그 때 너무 추워하였더니 등이 따뜻해져 '참 이곳은 사랑이 많은 곳이구나! 어떻게 추운 줄 알고 등에다 불을 쪼여 주지?'하고 돌아보니 불을 쪼여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형광등만 위에 몇 개만 있었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남편은 먼저 나가 버리고 자기는 목발을 짚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제대 앞으로 데려갈 때 목발을 발로 차 버리니 "어머, 내 다리!"하며 놀랐으며 이런 식으로 제대까지 갔는데 서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을 혼자 세워 놓고 걸어 내려오라고 하니 앞이 캄캄해서 가만히 서 있었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이 계신데 왜 못 내려가요?"하는 소리에 걸어보니 걸어졌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때 율리아 자매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루비노 회장과 함께 막 웃는 거예요. 그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은 거기에 없었고 안집에 들어갔었는데 박수소리가 우렁차게 나서 '아! 걸어나오나 보다.'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모님이 자신에게 바로 말씀하시면 놀라 넘어질까 봐서 율리아 자매님의 목소리로 성모님이 해주셨다고 성모님이 웃으며 말씀해 주셨대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너무 생생합니다.
제 믿음의 기초가 그 기적이니까요.
제가 성모님을 알고 나서 세례를 안나로 받았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매월 첫 토요일마다 성모님의 집에 다니다 보니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용서가 되고 이제까지 똑똑하게 잘 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말 죽을 죄인이 되어 희생하고 보속하며 이제까지 잘못했던 것들 하나 하나 생각하며 애덕을 베풀고 하늘 천국 갈 때까지 마리아의 구원 방주에서 내리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저를 변화시켜 주신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영암군 금정면 용흥2구 511번지
홍복순(안나) T.(0693)71-1962
 

 

속수무책의 상태였던 엄마는 성모님께서 주신 물로

서유순

죽음의 뒤안길에서 헤매는 친정 어머니가 성모님께서 주신 물로 치유받은데 대하여 감사하며 개신교에 다니셨던 어머니의 대필자로서 기록하는 저는 서유순씨의 차녀 오형임(빅토리아)입니다.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는 밤 11시 30분경에 파란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과속으로 달려오던 봉고차가 미처 멈추지 못하고 어머니를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것뿐, 아무것도 모르고 정신을 잃으셨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중환자실 침대 위에 누워 계셨답니다. 그런데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이 저리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알고보니 오른쪽 흉부 갈비뼈가 바스러져 어혈이 심장을 누르고 있고 척추(요추) 1- 5번의 뼈도 바스러져 수술마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을 하려면 뼈에다 쇠를 걸어서 해야 되는데 뼈가 바스러지고 없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거죠. 거기에다 오른쪽 발목의 뼈까지 금이 갔으니 어느 한 곳도 성하지 않을 정도의 대형사고를 당한 것이지요. 병원에서는 평생 반신불수가 문제가 아니라 심장을 누르고 있는 어혈과 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으니 산소 호흡기를 꽂아 주시며 또 마취도 할 수가 없어, 의학으로도 한계가 있기에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이니 24시간 대기중인 시한부 인생으로서 살아나더라도 식물인간이 되겠다고 하며 두고 보자고만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시자 저는 그때 어머니께 조건 대세를 드리고 나주 우시는 성모님께 어머니를 봉헌하며 이 고통을 통하여 어머니가 회개하고 용서하여 성모님 손잡고 주님 품에 안겨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자 그 동안 엄마에게 더 잘해 드리지 못한 아픈 마음으로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어머니께 30분 간격으로 항생제와 진통제를 투여하였으나 그 고통에는 속수무책인 상태가 되어 버렸으니 그 동안 43세에 홀로 되시어 6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만 해 오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아! 장례 준비까지 다해 놓으셨던 김 라파엘씨 어머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와 성모님 물을 드시고 살아나셨음을 생각하고 나주 성모님께서 주신 물을 가지고 가서 마시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심한 통증과 고통으로 신음하시던 어머니는 아무것도 드시지 못한 채 링겔을 꽂고 계셨는데 나주에서 가져온 물을 드시자 심하시던 고통이 수그러지면서 편안해 지신다며 고통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시던 분이 잠도 주무실 수 있었고,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나주 성모님을 아주 잘 받아들이고 모두 용서하고 주님 앞에 잘못했다며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아들부부 사이가 좋지않아 이혼단계까지 갈 형편이었기에 어머니께서는 그들도 주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속수무책의 상태였던 엄마가 성모님께서 주신 물로 2주만에 치유되어 산소호흡기와 항생제, 진통제를 다 끊고 일반 병실로 옮겨졌으며 일어나 앉으셨는가 했는데 얼마 후 서서히 일어나시더니 2주만에 병동에 병자 방문을 다니시는 것이 아닌가,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병원측에서는 한 달 10일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며 퇴원을 시켰습니다. 사실 2주일 후부터는 항생제와 진통제 하나도 맞지 않고 그냥 병실만 지켰을 뿐입니다. 퇴원을 하시고 나서는 친 손녀를 업어 주시기까지 하시며 아주 건강한 몸으로 생활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큰 딸이 살아날 가망이 없을 정도로 아파 살림조차 할 수 없어서 밑반찬이며 여러가지 음식들까지 무겁게 해서 들고 딸네집에 가서 한달 이상을 아이들 밥 뿐 아니라 살림도 다 해주시고 딸의 병간호까지 해주셨으니 그 모습은 천상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랴! 인간의 생각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것처럼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랴, 서울에 있는 큰 언니는 약 중독으로 밤에는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묽은 흰죽만 먹으면서도 토하기가 일쑤였고 온몸이 전기가 오듯 저려오고 마비증세가 왔으며 형부는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언니가 짜증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 한마디 잘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언니를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를 했으나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언니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까지 했기에 그 언니는 병을 낫기 위하여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결국 강남 성모병원에서 할 수 없이 퇴원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으나 (무당굿) 어떤 결과도 없었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치유받아 살아나신 어머니께서 그 언니를 병 간호하러 가셨었는데 저는 그 때 그 언니를 나주 성모님께 봉헌하며 한 번만 다녀가라고 사정하여서 언니는 성모님 집에 왔다가 오후 4시경에 성모님이 주신 물을 먹고 나서 바로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밥을 빨리 달라고 하여 찹쌀로 압력솥에 4인분 밥을 했는데 그 밥을 혼
자 다 먹고 그 뒤로 건강을 되찾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몇 달간을 밥을 먹지 못한 채 간도 하지 않은 흰죽으로만 겨우 연맹했기에 몸은 삐쩍 말랐는데 그 많은 밥을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뿐더러 그래도 배부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어찌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아들, 며느리가 이혼 직전까지 갔는데 그들도 회개하게 되었고 그들은 딸만 둘이었는데 화해하게 되자 성모님께서 아들까지 주셔서 장남으로서 자식 걱정없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 다 보답하리오. 영원히 찬미와 감사와 영광 받으소서.

 

1995년 4월 17일
나주시 금계동 수강아파트 301호
어머니 서유순 대필자 딸 오 빅토리아
T.32-0203

 

 

솔직히 저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우 데레사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 날씨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저는 안성 구포동 본당 우데레사입니다. 전번에 나주 성모님께 다녀와 너무나 좋은 점과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한 바 생각만 해도 감격의 눈물이 납니다. 말로만, 책으로만 듣고 보던 것보다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럴수가... , 이럴수가...  하고 느꼈습니다.
저는 영세, 견진성사, 남들 하는 것은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아는 바가 없어 성당에를 가거나 반 모임을 가거나 항상 말로만 예수님, 성모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무릎꿇고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한다고 무엇이, 그리고 또 예수님, 성모님이 무슨 은총을 주시겠나."하고 항상 염려를 했던 저였습니다. 그러던 중 막상 나주를 간다고 하고는... , 성모님 이마에서 기름이 나온다고들 하는데 도착하여 성모님을 뵙기 전까지 저는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믿지를 않았습니다. 성모님 이마에 페인트를 발라놓은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눈여겨 본 순간 세상에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일종의 석고에 불과한 (프라스틱을 씌운) 성모님 몸에서 그렇게 좋은 장미향기가 날까?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아닌가 하고...
성모님,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세상에 내가 40평생을 넘게 살아온 것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짓고 살아왔을까? 하고 반문하고 싶더군요.
또 비디오를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저는 두 남매를 둔 어머니이면서도 낙태수술을 두 번씩이나 한 것을 뉘우치며 죄책감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요. 우리가 지은 죄를 율리아 자매님께서 대신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볼 때 저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제 생전에 가장 많이 운 것 같습니다. 저희 부부가 부부싸움을 해도 그렇게 많이 운 것 같지 않아요.
저희 가족 4식구는 세례를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애들은 타 지역에 가서 학교 다닌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고, 저희 남편도 성당에 나가지 않아요. 제 부족한 탓이겠지요. 그래 성당 옆으로 이사를 가면 남편은 열심히 하실까? 하고 성당 옆 아파트로 이사를 하려고 계약을 했답니다. 저희 남편이 성모님을 뵙는 그 날이 하루 속히 오도록 기도 좀 해 주세요. 저도 열심히 기도하거던요. 만약 저희 남편이 성당에만 나가시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모범 남편이 되고 훌륭한 하느님의 일꾼이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어요. 우선 애들이 나갈 것이고 남편도 하루속히 성모님을 찾는 그날이 오도록 기원합니다. 옆집 자매님을 통해 6월 30일 나주 성모님 계신 곳을 우리 두 부부가 함께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저는 시간나는 대로 기도를 한답니다.
저희 남편도 나주 성모님을 뵙고 오시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는 눈이 안좋은 상태이지만 제 눈의 치유보다는 저희 남편이 성당에 나가시면 금방 눈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을 뵙고 온 뒤로는 정말 우리의 힘으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1993년 6월 1일
안성 구포동 본당
우 데레사
T.675-5608

 

 

수년 고생했던 비염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장춘임(소화데레사)
 

저는 올해 25살인 장춘임(소화데레사)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비염으로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아주 심해져서 거의 온종일 코를 풀어야 했습니다. 약도 먹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나은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재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나주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으셔서 가끔씩 기도회에 참석하시고, 집안의 어려운 일들을 청하곤 하셨습니다.
지난 여름 제 비염이 더 심해지자 어머니가 나주 성모님께 낫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던 중 성모님께서 낫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그후로 수 년에 걸쳐 고생하던 비염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감기만 걸리면 특히 심해지는 비염 때문에 겨울마다 무척 고생 했었는데 올겨울에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 아주 건강해졌습니다.
나주 성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4년
부산 범일본당 부산광역시 진구 범천2동 1287 20/4
장춘임(소화데레사) T.644-0874

 

 

신앙의 신비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조 비비안나
 

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1992년 초였다. 그 당시 본당 신부님이시던 윤 다윗 신부님께서 성모님 소책자를 본당에 비치해 놓으셨기에 메시지를 접했지만 내가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었고 또 지리적으로 너무나 생소한 곳이라서 언젠가는 한 번쯤 가보게 되겠지 하고 말았고, 1991년 5월 16일에 있었던 성체의 기적과 성모상에서 흘렸던 눈물 피눈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는 '그 분들 (율리아 자매님과 율리오 형제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신앙을 제대로 실제가 아닌 것을 꾸며서 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별 생각없이 지냈다.
미사와 성체조배가 제일 큰 기도라고 알았기 때문에 친구들 만나는 것 보다는 성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수도성소에 대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레지오나 묵주기도 등 성모님과 함께 하는 신심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삼덕성당에 갔다가 신부님께서 '마리아 발또르다의 책?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성서 다음으로 소중하게 생각되는 책이라고 말씀하시기에 호기심이 생겨 곧바로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부피가 굉장히 두껍고 장장 10권이나 되는 그 책에 흠뻑 빠져 버렸다.
예수님을 낳으신 인간으로서의 어머니라고만 생각했던 '마리아'가 인류 구원을 위한 '공동 구속자'이며 '성령의 짝'이라고 하지 않는가?
작년, 그러니까 94년 4월 4일에는 엠마우스 여행을 친구들과 함께 나주 성모님 집에 오게 되었다. 오는 동안 시집간 딸이 친정엄마의 따뜻한 품으로 쉬러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었는데...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나는 '살아계신 성모님'을 만났던 것이다.
성모님 집에 들어서니 장미향기가 가득했고 눈물, 피눈물을 흘렸다던 자그마한 성모상을 유심히 바라보니 머리 위에서부터 발 끝으로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흐르고 있었는데 안내를 하시던 분이 '향유'라고 설명해 주셨다. "내가 모두를 위해서 온몸을 짜내어 주는 향기와 기름은 하느님의 선물인데 그것은 바로 나의 현존이며 사랑이자 우정이기도 하다." (1993. 4. 8 성모님 메시지 중에서)라는 메시지와 함께.
더 자세히 살펴보니 목덜미가 움푹 패여 있었고 성모상의 모습은 굉장히 지쳐보였다. '아!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구나!' 눈물, 피눈물, 또 온몸을 다 짜내어 향유까지 우리에게 사랑의 표로 내어 놓으시느라 당신의 몸은 그렇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엄마!"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고 성모님의 사랑이 온 몸에 느껴졌다.
그리고 비디오를 보는 순간 전혀 춥지 않은데도 입술이 떨렸다.
'그동안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얼마나 많이 판단해 왔던가!' 죄인 줄도 모르고 저질러왔던 그 죄들, 입으로 지었던 죄를 성모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다.
성모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라고 하시는 분들을 판단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교만하게 살아왔던가! 성모님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내 잣대로 재고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메시지 말씀을 묵상하고 또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께로 가기 위해 노력하면서 시간이 허락하는한 성모님 집을 다니면서 기도하다 보니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어졌고 고해성사도 자주 보게 되었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94년 11월 24일에 다시 성모님 집에 왔더니,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고, 내?외국 신부님들도 몇 분 계셨고, 율리아 자매님, 율리오 형제님, 루비노 형제님이 계시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하늘에서 성체 (큰성체)가 내려왔고, 그 성체를 주위에 모여있던 사람들 모두가 영했다는 것이다.
둘러 보았더니 몇몇 사람은 안면이 있었는데 광주에서 기도하러 다니신다던 목사님 부부도 보였다. 덩치가 크고 낯선 신부님은 교황 대사님이라고 했다. 그 순간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또 나는 감히 그런 소중한 성체를 모실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교차되고 있었다.
조금 후 율리아 자매님께서 장부와 루비노 형제님의 부축 (끌리다시피)을 받아 문 쪽으로 나가시려고 하여 '이제 끝이나서 들어가시는가?' 생각하였다.
그런데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재빠르게 다시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의 손을 잡고 성모님 앞으로 가서 장궤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계시기에 기도하시는가 보다 하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과 머리를 뒤로 젖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가라반달에서 '콘치따'라는 소녀가 (1960년대, 20C 성모님 발현 Video에서 봄) 미카엘 대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시던 모습과 흡사했다.
조금 있으니 교황 대사님께서 손에 조그마하고 하얀 것을 들고 계시기에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성체의 모습인데 이상한 문형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서야 카메라를 들고 가만히 계시던 루비노 형제님이 흥분해서 파 신부님께 "사진 찍어도 됩니까?"라고 여쭤보니 승락을 하셨고 여러 명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본 비디오 주인도, 또 키가 자그만 외국 신부님도 의자 위에 올라서서 찍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이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아마 메시지 내용인 것 같았다.
신자들도 흥분해서 한참을 웅성거렸으며 카메라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진을 찍었고 성모님 옆에 있던 꽃병이 떨어져 깨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옆에 있던 사람들까지 사진에 찍힐 것 같기에 나는 얼른 뒤로 도망 나왔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파 신부님께서 성체를 성합에 모셨고, 뒤 쪽으로 오셔서 키가 아주 큰 외국 신부님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시는데, 서서 가만히 (덤덤하게) 듣고 계시던 그 신부님께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파 신부님의 손에 있던 성합 위에 추 끝을 밑으로 하여 들고 계셨다.
그러자 그 추가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고 그것을 본 그 키 큰 신부님께서는 아주 급히 경건한 표정과 몸집으로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살아있는 남자의 몸일 때 그 추가 오른쪽으로 돈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없이 그냥 밀떡이라면 그 추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역시 신비가 아닐까?
처음 내려왔던 성체를 나누어 영했던 사람들은 감격에 차서 서로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떤 분은 성체를 모실 때 박하향이 났다고 하고, 어떤 분은 장미 향기가 진동을 했다 하고, 어떤 분은 달콤했다고 하고, 또 어떤 분은 눈처럼 스르르 녹았다 하고, 어떤 분은 성체가 입 속에서 회오리 바람처럼 일어 목으로 넘어갔다 하고, 또 어떤 분은 남은 성체가 너무 작아지니까 못 영할까봐 새치기를 해서 갔더니 금방 떼어내고 남은 조각이 다시 불어나고 커져서 영했는데 나오면서 보니까 또 불어나더라고 하고, 어떤 분은 성체를 너주 작게 주신다고 생각하고 영했는데 입안 가득 차고 너무 무거웠다고 하고, 어떤 분은 손으로 받은 성체를 보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귀한 성체를 감히 영할 수 없지. 집에 모셔놓고 봐야지.'하는 순간에 그 성체가 사라져 버렸다 하고, 또 다른 세 사람은 성체를 영하고 나서 온 몸이 뜨거워지더니 영적, 육적으로 치유가 되었는데 성체를 모시지 않은 아이까지 온 몸이 뜨거워지더니 치유가 되었다 하고, 또 한 분은 성체가 목에 걸려 한참을 안 넘어가기에 파 신부님께 여쭤 보았더니 "울분 있어요?"하고 물어 보시더란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통회한 후 조금 있으니 성체가 내려갔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 속상했지만 이 자리에 불러 주신 것만도 감지덕지라고 다시 생각하며 내가 성체를 영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을 해 봤다. 달콤한 맛이었을까? 새콤한 맛이었을까? 하여간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에 또 기적이었다.
플라스틱 '성모상'에서 눈물과 피눈물 또 향유가 나오고, 자그마한 사진과 책에서 장미향기가 나고, 병원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던 환자가 살아나고, 낙태를 했거나 또 많은 죄를 짓고도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이 모든 것은 신비가 아닐까?
'신앙의 신비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그러나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부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회개하고 했지만, 그런 기적들을 늘 보고 다니던 제자들도 누구는 주님을 배반했고, 누구는 주님을 부인했고 또 누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까지도 손으로 만져봐야 믿겠다고 했었기에, 지금 이 시대에 성령을 통해서 이루시는 그분의 신비를 부정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판단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사도는 우리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주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장 많이 주님을 전한 사도 바오로가  되었고, 이단에 빠졌었던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여 이단을 쳐부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주교성인이 되셨지 않는가!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더구나 박해까지 하는 사람들이 언제 어느 때 가장 앞장 서서 성모님을 전하는 사람이 될지 알 수 없다.
눈으로 보고 믿을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다만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나를 위해서는 언제나 겸손하게 해 주십사 기도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용기가 없어 말을 못하기에 편지로나마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1995년 4월 16일 부활절 다음날
경북 칠곡군 왜관읍 534번지
조 비비안나 드림

 

 

쓰러지면서 하얀 것이 손에 꽂히더라구요. 

이인수(마리아)
 

1994년 11월 24일 부산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데 박마지아 신부님이 봉고차를 타고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다섯 사람은 뒤에 쳐져 다른 차로 왔는데 다른 신부님들 보다 먼저 왔어요. 제가 나주에 올 때 너무 힘들어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교황 대사님, 파레몬도 신부님, 율리아 자매님, 그리고 율리오 회장님이 옆에 앉아 계셨는데, 어떤 분들은 울고 계셨고, 뒤에서 보니까 율리아 자매님은 탈혼상태로 들어간 것 같았어요. 저도 너무 힘들어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고 율리아 자매님은 손을 합장하고 있었는데, 쓰러지면서 손에 하얀 것이 꽂히더라구요. 저는 "휴지를 왜 손에 꽂을까? 보기도 흉한데"하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이 서로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한참 하시더니 뭘 꺼내는데 보니까 성체더라구요. 대사님이 성체를 꺼내서 보여 주시는데 제가 대사님하고 눈이 마주쳐서 말은 안 통해서 우리도 성체를 영하게 해 주실 거냐고 제 가슴을 두드리며 손짓으로 물으니까 대사님께서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성체를 영했는데 제 감각으로는 적게 주는 것 같더라구요. 성체를 혀 끝으로 받아 모시면서 '아버지, 너무 적게 주시는데요?' 그랬더니 뭔가 꽉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너무나 무거웠어요. 와! 아버지 콩알 반밖에 안되는데 너무나 무겁네요, 그랬는데 혀 끝에 있는 성체가 휙 날아서 들어갔어요. 혀 끝에서 바로 날아가 가슴에 닿는 것 같았는데 제 기분으로는 옛날에 밀가루 반죽하면 한참 부풀어 오를 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부풀어 올랐어요.
그런데 불덩어리 같은 것이 확 날아 들어가면서 뭔가 튕기는 것 같았어요. 옆으로 위로 번지는데 너무 뜨거워서 그만 벽에 기대어 버렸어요. 그대로 한참 있다가 눈을 떴는데 교황 대사님께서 성체를 계속 떼어 주시는데 성체가 길어 나는걸 유심히 봤어요. 부산 어떤 자매님은 다섯 번이나 성체를 영했답니다. 형제분 한 분하고, 자매님 한 분이 저에게 손을 막 흔들어요.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그분들은 성체를 두 번씩 영했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군요. 그 자매님 말씀이 성체를 영하고 너무 좋아서 묵상에 들어갔는데 누가 등을 두드리면서 대사님이 가지고 계신 성체가 남았다고 더 영하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한 번 더 영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서 대사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에게 손을 얹어 강복을 주셨어요. 율리아 자매님은 문을 열고 나가시려다가 금방 다시 되돌아올 때 세발 정도 해서 제대까지 바람을 일으키며 올라오시는 것 같았고, 율리아 자매님께서 한 손은 대사님, 다른 한 손은 파 신부님을 잡았는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고개를 뒤로 젖히시는 모습을 보았어요. 저는 성체가 혀로 내려오는 것은 보지 못했고, 제가 가까이 갔을 때는 대사님이 성체를 들고 사진을 찍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 가까이 가서 보았는데, 제 눈에 보이는 작은 성체의 모습은 한 쪽에는 위에 줄이 두 줄이 있었고 물고기가 있었어요. 뚜렷하게 물고기가 있었는데 끝에도 글이 있었고, 위에도 라틴어 글 같은 것이 있었어요. 다시 성체를 뒤집어서 보여 주셨는데 거기에는 포도송이가 3송이 있었어요. 잎은 파랗고 포도는 한참 익을랑말랑 했는데 정확하게 색깔도 뚜렷하고 잎 색깔도 너무 너무 뚜렷했어요. 저는 대사님 곁에 바짝 다가서서 보았어요.
그 일을 다 마치고 파 신부님께 성합에 들어 있는 성체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보여 주셨는데 줄만 두 줄 있고 앞뒤로 포도송이고 물고기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신학박사 신부님이 오셔서 성체를 보시고 "이 성체는 살아있는 젊은 남자의 살덩어리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성체를 영하고 난 뒤 내 마음이 항상 무겁고 침울하던 것이 전부 없어져 버렸어요. 그 성체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부풀었던 성체처럼 이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찼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항상 부족한 죄인에게 좋은 체험을 주신 것과 예수님, 성모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1995년 3월 4일
부산 연산 본당
이인수(마리아) T.(051)866-1034

 

 

수년을 냉담했던 남편이 우시는 성모님을 뵙고 냉담을 풀다 

송명숙(로사)
 

윤율리아 자매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안양에 사는 송로사입니다.
지난 1992. 1. 4 첫 토요일을 지키기 위해 장부 베드로씨와 자녀 모니카와 레지오 단장님을 비롯해 아이들까지 19명이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우시는 성모님을 직접 만나보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은총 속에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장부 베드로씨가 수 년을 냉담을 했는데 우시는 성모님을 뵙고나서 고백성사를 보고 냉담을 풀고 성당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을까요.
하느님께 영광! 성모님께 이 기쁨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날 율리아 자매님께서 위장병 고통을 받으신다고 했는데 저는 처녀 때부터 앓아온 위장병이 깨끗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같이 간 에밀리아나 자매님도 위장병이 치유되었다더군요. 정말 주님께 감사드리고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율리아 자매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한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가 끝나고 많은 신자분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우리 일행은 우시는 성모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로 하고 한 사람씩 우시는 성모님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따로 성모님만 두 번을 찍었는데 그 중 한장에는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듯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성체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가 사진에 찍혔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옆으로 비스듬히 보면 십자가까지 찍혀 있습니다. 그냥 성모님만 찍었는데 사진을 현상해보니 이러한 일이 일어나 너무 신기하기도 해서 사진을 율리아 자매님께 보내드립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뜻도 알고 싶고 율리아 자매님의 조언도 듣고 싶고 하느님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 뜻에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좋으실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1992년 1월 20일
경기도 안양시 안양6동 500-9
안양에서 송명숙(로사)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골수암, 척추결핵까지
겹쳐 치료가 되지 않아 죽을려고 약까지 먹었는데... 

이경희(마리아)
 

저는 부산시 영도구 영선1동 139번지에 사는 이경희(마리아)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구멍이 생겨 울지도 못했고, 한 달도 살지 못한다고 병원에서 진단을 내렸는데, 6개월만에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종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3살 때 퇴원하였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을 저버린 채 우상숭배하며 죄악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며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의 몸에 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가서 알아본 결과 심실 중격 결손증. 심장에 다시 구멍이 생겨 점점 더 커져가는 병이었습니다. 다른 심장 전문 병원을 찾았으나 검사 결과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통이 더 심해졌습니다.
가정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지만 부모와 형제의 도움으로 수술하기로 하여 1989년 9월 2일 병원에 입원하여 특수검사를 비롯하여 모든 검사를 마치고 9월 11일에 8시간 30분 걸리는 대수술을 받았는데 눈을 떠보니 저의 왼쪽 팔에 주사바늘이 6개 꽂혀 있었고 오른쪽 팔에도 6개 모두 12개가 꽂혀 있었습니다.
가슴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튀어 올라와 있었고, 배는 구멍을 2개 내어 호스가 꽂혀 있었습니다. 한 달이라는 치료 끝에 저는 퇴원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제 살아서 집으로 가는구나 생각하니 택시 안에서나마 눈물이 나오고,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통원치료를 하였습니다. 두 달이 다 되어도 이상하게 가슴의 통증이 가시질 않았고 알 수 없는 혹이 가슴에 생겨 담당선생님에게 가슴을 보이고 고통을 호소했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점점 더 심해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생각 끝에 다른 병원으로 가서 알아보기로 하고 집 근처 종합병원 흉부외과를 찾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보였더니 깜짝 놀라며 수술하자고 하여 혹이 난 부위를 잘라내니 피고름이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원 치료하였으나, 차도가 없었습니다. 한 달 가량 지나서 의사선생님이 저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으니 입원을 해서 치료를 하자, 그래도 안되면 다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 입원을 하였고, 두 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병명은 골수염으로 가슴뼈가 녹아 뼈를 연결시킨 철사가 떨어져 있었으며, 갈비뼈 3개를 부분적으로 잘라냈습니다. 수술한 지 2개월이 다 되어가는데도 퇴원하라는 말은 없었으며, 가슴의 통증은 여전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억지로 의사 선생님을 졸라 퇴원을 했습니다만 일주일만에 다시 입원을 했고, 세 번째 수술을 받아야만 했는데, 골수염이 전이되어 골수암으로 되었습니다. 또 다시 갈비뼈 5대를 부분적으로 잘라냈습니다. 이 수술은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일 링겔 주사와 혈관주사 25- 28대, 엉덩이 주사 45- 50대가 지독하게 투입되었고, 시간마다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죽을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어 고통에 못이긴 저는 죽으려고 약까지 먹었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자 병원 입구에 서 계시는 성모님상 앞에서 밤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죄 용서하시고 나를 좀 살려주세요.'하고 기도한 지 두 달 정도 되어서 도저히 더는 병원에 있을 수가 없어서 의사 선생님을 졸라 억지로 퇴원하였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에 다녔지만 저의 가슴뼈는 또 다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사마저도 어떻게 할 수 없었기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던 어느날 초량 성당의 기도회에 갔습니다. 거기서 어느 한 자매님을 만났는데, 나주를 아느냐고 하면서 우시는 성모님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그날도 고통이 심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 다음날 연락하여 그 자매의 집으로 갔더니 나주 우시는 성모님의 메시지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주었습니다. 병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밤에 테이프를 보았는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살아 계시구나! 울고 또 울면서 밤새도록 테이프를 보았습니다.
다음날 테이프를 빌려준 자매를 만나 나주에 갈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매님은 자기는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나주에 자주 가는 자매님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자매님은 너무나 많은 은총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나주 성모님에 관한 이야기와 자기의 체험을 말하였고, 나주에 가서 회개하면 영혼과 육신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 집을 찾게 되었는데, 그때 성모님의 소개와 율리아 자매님이 받은 고통 테이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너무 많은 회개와 통회의 눈물을 흘렸고, 정말로 예수님과 성모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남편, 그리고 이웃을 미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했던 모든 죄가 다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저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나 때문이라고, 내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가슴을 치며 한 없이 울었습니다. 성모님께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눈물과 저 분의 고통을 통해서 내가 주님께 올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입니다. 너무나 많은 은혜와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이 지나 나주에 또 가고 싶어서 다른 분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 이후 한 달에 몇 번씩 다녔는데, 저는 많은 은총을 받아 치유를 받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완전히 성모님께 매달리다 보니 그렇게도 저를 괴롭히던 골수암도 어느덧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지독한 항생제와 약, 주사로 인하여 골수암 뿐만 아니라 심장 상태도 좋지 않았는데, 위장, 간장, 신장 등 모든 질병과 합병증은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깨끗이 치유를 받았고, 평생 약을 먹어야만 되는 심장병도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약을 먹지 않아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병으로 인해 이제까지 일곱 번이나 수술해야만 했던 만신창이 죄인의 몸을 주님께서는 눈물로 회개하고 달아들 때 온전히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도 구차하고 어려웠던 가정형편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어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는 저에게 물질 축복까지 주시어 점포를 얻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불쌍하고, 보잘 것 없는 이 죄인을 눈물로 부르시어 주님께 인도해 주셨으니 정녕 우리의 중재자이시나이다. 정말로 살아계신 예수님! 진심으로 이 모든 영광 홀로 세세 영원히 받으시옵소서. 아멘.

 

부산시 영도구 영선1동 139번지 6통 2반
이경희(마리아)
T.255-0465(집) 245-2132(가게)

 

 

십일일간 혼수상태이시던 부친께 생명의 불을 당겨주시다. 

1988년 2월 13일에 아침 식사 도중에 혼수상태가 되신 아버님께서 조대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여 가망없으시다는 진단을 받고 서울 연대 종합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로 옮겨 23일까지도 의식불명이라는 연락을 받고 24일 오후에 나주 성모님을 뵙고 촛불 봉헌과 함께 온 마음을 다하여 간구드리니 거의 그 시간에 성모님께서 지체없이 부친께 생명의 불을 당겨 주셨다는 말씀을 큰 오빠를 통하여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25일 성모 어머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러와서 증언함.

 

1988년 2월 25일
강진군 강진읍 신성리 18-1

 

 

아내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지 비오
 

저는 지 비오입니다.
90년 9월에 아내가 대장암에 걸려서 (대장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서) 나주 성모님 집을 찾게되었습니다.
저는 3대째 구교집안 신자였으나 냉담생활을 계속해서 해 왔고 아내가 애기를 두고 성당활동에 나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욕도 했고 십자가조차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고 "거기다 걸어놔야 주님이 좋아 하신다냐? 방 바란스가 맞아야지."라고 하기도 했었고 묵주로 아내를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니 약은 없고 주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싶어 기도하기 시작했지만 급해지니까 주님을 찾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주님께 의지할 수 밖에요. 그러자 이게 웬일입니까? 이제는 병든 아내가 "어차피 죽을 것 같으니까 약은 안 쓰고 주님만 찾는게 아니냐?"고 하면서 저를 의심 (돈때문에 아까워서) 하기에 이르렀으며 십자가를 놓고 기도는 안하면서 약을 쓰자고 떼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 예전에 누나의 소개로 얘기만 들었던 나주 성모님 집이 생각이 나서 아내를 데리고 왔지요. 그때 율리아 자매님의 "가정성소를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시는 말씀에 제 잘못이 느껴지고 예전에 아내를 사랑으로써 다독거리지 못했음을 후회했지만 아내는 성모님에 대해서 조차 반신반의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항암제를 투여하였기에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그러나 마음은 교만해져서 주님을 멀리하게 되어 기도도 하지 않고 6개월이 지난 후 재검사를 하니 암이 폐까지 퍼졌다고 했습니다.
밤새 울다 91년 5월 17일부터는 아내와 나주 성모님 집에 다시 가서 20일간 기도를 하며 지냈습니다.
"주님, 아내를 살려주세요. 아니, 시간을 주세요. 아내를 완덕의 길 (회개)이라도 이끌어 데려가세요."하고 간절히 묵주기도를 했더니 온몸이 냉장고 같았던 아내가 머리에서 열이나고 조금은 나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니 아내가 자신을 회개하고 저의 모습을 새로 보게 되었고 저 또한 아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때문에 우신다고,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신다고, 그동안 우리는 헛된 기도를 해왔음을 통회했습니다. 늘 말로만 용서하고, 변명하고, 우시는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얼마나 죄를 짓고 살았는지, 율리아 자매님은 아내가 성모님 집에 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대신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기도해 주시는데 아내 대신 휴지가 15뭉치가 되도록 많은 피를 토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정말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았기에 병이 낫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주를 다니며 기도를 하다보니 아내가 저를 "예수님!"하고 부를 정도로 마음이 변했고 몸에서도 악취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병이 오래 계속되자 아들이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아내가 신음할 때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반항적으로 되었고 나주를 간다고 하면 빈정대기도 했으며 기도는 아예 하지를 않았습니다.
임종하기 전 설악산에 가서 조용히 지내자고 하여 가 있으면서 매일 미사도 가고 하다가 신부님께 총고백을 하고 아주 편안하게 고통없이 임종을 했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얼마나 많이 자신의 고통을 대신 받았다는 것을 아내가 깨달았다면 치유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설악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했는데 신부님이 장지까지 따라가서 하관미사까지 해주셨습니다. 장례미사 때 촛불심지가 포도송이로 변했고 장지갈 때에는 장미꽃 송이로 변했고 삼우제를 갈 때는 성심모양으로 변했습니다. 아이들도 이것을 보고 마음이 변해 기뻐했습니다. 아내가 나주에 있을 때 암고통을 항암제를 맞지 않고 성모님께 봉헌했고 또 율리아 자매님이 기도를 해 주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장례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가지 않고 나주로 바로 왔습니다. 성모님께 감사하려고요. 부부로 살았던 짧은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아내를 구타하며 상처를 주었던, 또 여러가지의 제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받고, 사랑을 실천하고, 죽는 순간에 아내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7월 7일
지 비오 증언

 

 

아니! 성체가 또 다시 하늘에서 내려지다니 

이영근(바실리오)
 

저는 파 레몬도 신부님을 나주에서 순천 성가롤로 병원으로 모셔오라는 이 콘체타 수녀님의 부탁을 받고, 오전 9시경, 양 루수, 이 젬마 부부와 함께 승용차로 나주 경당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경이었습니다.
경당에 들어섰을 때 장미향기가 진하게 났는데 우리는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성모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주위를 살피니 교황 대사님, 교황 대사 비서님, 파 레몬도 신부님, 오상철 신부님, 율리아 자매님, 그리고 교우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율리아 자매님이 교황 대사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니 강복을 받고 성모상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며 기도하던 중 갑자기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약간 옆방향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갑작스런 행동에 유심히 자매님을 보았는데 탈혼된 상태로 보였으며 두 손은 합장되어 위로 올려져 있었고, 세 번째 손가락 끝에 성체가 끼어 있음을 보고 저의 눈을 의심하여 몇 번이고 확인하여 보았습니다.
교황 대사님, 파 신부님, 그리고 몇 분이 나아가 확인하셨으며, 비서 신부님이 사진 촬영을 하셨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율리아 자매님의 남편 율리오 형제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일으켜 세우려고 약간 끌어 올렸을 때도 저는 오로지 손 끝에 끼어진 성체의 모습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하며 신비한 기적에 한없이 감탄하였습니다.
이때 저의 주위에서도 놀라운 기도 소리와 동요됨을 보았습니다. 또 다시 교황 대사님, 파 레몬도 신부님 및 몇 분의 신부님과 교우들이 확인하며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으며, 율리아 자매님은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에게 성체를 드렸고, 두 분은 각지에서 모인 신자들 모두에게 성체를 떼어서 나누어 주셨는데, 저는 파 신부님에게서 받아 모셨습니다.
이때 많은 교우들이 다 받아 모시지 못할 것만 같은 조급한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교우들이 빠짐없이 모두 성체를 영했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율리아 자매님은 몹시 지친 모습으로 보였는데 두 분께 양해를 구하면서 저택으로 가려고 나아가려다 뒤돌아 오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좌우 손으로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의 손을 잡고 다시 성모상 앞으로 나오셔서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엄숙하고 정중한 모습에서 자매님이 메시지를 받은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으며 이 때 갑자기 자매님이 고개를 높이 쳐드는 모습을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얼마후 교황대사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이 입으로 받은 작은 성체를 꺼내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아니! 성체가 또 다시 하늘에서 내려지다니...  오! 주님, 비천한 저에게 또 다시 기적을 보여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하며 기도 드렸습니다. 이런 광경을 70여명의 신자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파 신부님께서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 작은 성합에 성체를 모셨습니다. 저는 파 신부님을 모시고 순천으로 향하면서 영광된 기쁨에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1994년 12월 1일
전남 순천시 장천동 15-5
이영근(바실리오) 씀

 

 

아니! 이런 곳이 우리나라에 있었던가. 

신현심(모니카)
 

전주 평화동 천주교회 신 현심 모니카입니다.
저는 1993년 성모님 눈물 흘리신 8주년 기념 철야기도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 집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울 만큼 장미향이 마당에도 가득히 풍기었습니다. 동산의 성모님께 촛불 봉헌하고 묵주신공을 하면서 성모님 집을 한바퀴 도는데 성모상이 계시는 방에서 옆 창문을 통해 진한 장미향이 코를 찔렀습니다. 저는 멍하니 얼떨떨하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 집 안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며 성모상을 바라보는 순간 놀랬습니다. 이마에서 향유를 흘리고 계시는 성모상은 얼굴이 하얗고 별처럼 빛나면서 흐르는게 보였는데 성모상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슴이 메이면서, '아니! 이런 곳이 우리나라에 있었던가? 진작 올 것을... ' 하며 옆의 자매가 들을 정도로 말을 했습니다.
1989년 딸 데레사가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을 가져왔는데 책을 보면서 "아니, 성모님이 왜 피눈물을 흘리셔? 이상하다 얘."하면서 첫머리 한 장을 읽는 둥 마는 둥 버려둔 채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 책은 책장 속에서 4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통곡할 일이었습니다. 어느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때 나는 죄가 없다고 큰소리 치던 제가 나주 성모님 집에 와서야 비로소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떠오르는 지난 죄를 회개했고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하고 기도하면서 그 동안 저는 제가 잘사는 줄 알았는데 성모 어머니 앞에 앉아 있으니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았고 잘못한 모든 것이 모두 떠올랐습니다. 신앙 안에서 교만, 낙태, 남편에게, 자녀에게, 돌아가신 부모님께, 형제에게, 아주 작은 것까지도 잘못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얼마나 죄가 많고 교만했으며 성모님께서는 메시지 책을 주었을 때 이미 나를 불러 주셨는데 그 긴 세월을 한 번도 경배드리지 못하고 어머니 눈에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장본인인지도 모른 채 '왜 피눈물을 흘리실까?'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딸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몸둘 바를 모르고 울었습니다. 자꾸만 뒤로 물러나 앉으면서 진열장 안의 성모님 사진들을 바라보며 울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말로만 성모님 사랑한다고 하면서 묵주신공 하루에 100단 이상을 올리면서 교만하고 이기적인 기도를 했으니 오히려 성모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1부가 끝나도 꼼짝도 않고 앉아서 생각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2부가 시작됐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고통이 너무 심해서 못나오시는데 더운 여름인데도 추워서 이불을 다 덮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조금 뒤에 자매님이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니 치지 말라는 시늉을 하시고 영광을 주님, 성모님께 돌리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얼굴이 많이 부은 것 같았지만 하얗고 아름다웠습니다. 조금 후에 맑은 웃음과 함께 메시지 전달을 하시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박수치지 말라고 하시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세워 놓으셨다고 하시면서 주님 앞에 부끄러움 밖에 드릴 게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며 주님께서 잠시 잠깐 도구로 쓰시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겸손한 말씨와 거침없이 메시지를 전하시는 그 모습은 어디서도 뵙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또 울어야 했습니다. 저런 분을, 어떤 성령 받은 분이 차 안에서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듣고 있을 때 율리아 자매님이 교만이 들었다고 하면서 카세트를 끄라고 했을 때 같이 동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령 받은 분들과 마음이 완고한 자들이 성모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잘못함을 뉘우치며 울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온 몸을 짜내어 향유를 흘리시는 것은 사랑과 우정과 현존을 보여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곳은 영혼의 때를 씻는 목욕탕이라고 하시며 기도, 희생, 보속으로 마음과 행동이 사랑으로, 나를 괴롭히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자매님의 영가가 아름답게 성모님 집 안에 울려 퍼질 때에는 많은 자매들이 울었고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일 걸리는 것은 전주에서 나주는 2- 3시간 거리 밖에 안되는데 8년이란 긴 세월을 눈이 멀고 귀가 멀어 나주에 가자고 저에게 말을 했던 자매와 형제들의 말을 무시한 것을 생각하니 성모님을 몰라 보았던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성모님께 기도했습니다. "눈물과 피눈물은 보지 못했지만 다시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를 드리고 임마누엘과 함께 집으로 올 때는 너무 기쁘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7월달 철야기도에 참석했던 기독교 신자 언니는 천주교로 개종하겠다고 전화가 와서 이리 창안동 성당의 수녀님께 찾아가라고 했는데 찾아가서 교리를 배우고 지금은 영세하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93년 여름에 낙태를 했던 제가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늦게 44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14개월된 아기가 홍역에 걸려 며칠이 가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매일 병원에 다녔으며 할 수 없이 입원도 시키려고 하던 차에 목요 기도 모임이 생각나서 나주에 갈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도 따라 나섰습니다. 작은 딸과 함께 가게 되었는데 남편이 성모님 집에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성모님께서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남편은 폭주를 하고 술주정이 심했으며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 가정에는 너무 소홀한 분이며 저의 마음도 몹시 상해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남편은 좋아했던 여인과 헤어졌기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제가 느끼는 때였습니다. 광주에서 나주 가는 길에 아기는 구토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도착하니 이미 기도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면장에서 씻고 들어가 기도를 마치고 마리아 구원 방주 성가를 부르고 나니 율리아 자매님은 갑자기 배가 불러오고 고통이 왔습니다. 낙태를 했던 이 죄인은 양심이 부끄럽고 이 죄인 대신 고통을 받으시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묵주기도를 앞에서 드리고 있는데 "속이 아픈 사람이 치유를 받나 봐요."하였는데 뒤에서 잠을 자던 아기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은 모으고 눈을 감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옆의 자매가 이야기하는데 그 때에 남편과 딸이 바라보니까 아기가 계속 그 모습 그대로 하고 있으니 옆의 자매가 눕히라고 해서 눕히니 그대로 잠을 잤다고 나중에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기는 그 후로 기침이 멈추었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향기를 맡고, 기도를 함께 한 남편은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저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기도회에 다녀와서도 율리아 자매님을 생각하면서 대성 통곡을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도 돈 때문에 못했고 냉담 속에 방황했던 점, 술 먹는 남편 비위 맞추는 것, 서울로 가서 젊은 여인과 함께 가정을 완전히 떠나 있는 남편, 그로 인하여 딸은 정신이상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런 고통이 아니고서야 어찌 내가 주님과 성모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인가? "고통은 사랑이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국 가기 어렵다, 고통을 통해서만이 승리할 수 있으며 희생을 치르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귓전을 때리며 제 심장을 찢었습니다. 그렇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가 잘 배우고 똑똑하고 잘났고 교만했다면 내가 어찌 성모님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여자 문제로 애태우던 남편, 그 동안에 얼마나 미워했던가,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이었다는 깨달음 앞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남편에게 그 여인과 헤어진 것도 잘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구나!'하고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저에게 잘했더라면 주님의 사랑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거라고 느끼며 감사드리면서 누가 뭐라 해도 기쁘게 살아가렵니다. 찬미 받으소서.


1995년 3월
전주 평화동 천주교회
신현심(모니카) T.(0652)84-5805

 

 

아들을 열 일곱 번이나 칼로 찔러 죽였지만
나주 성모님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박 아가다
 

저는 부산에 온 박 아가다입니다. 스물 두 살짜리 아들이 영업용 차를 가지고 밖에 나가 운전하다가 스물 세 살짜리 차치기한테 열일곱 군데 (17)나 찔려서 죽었습니다. 차치기는 그냥 붙들려 교도소에 있는데 저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증오와 분노가 끓어 올라 그를 죽이고, 저도 죽고만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이웃 형제나 친척들이 위로를 하여도 그들까지 미웠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은 계속되었고 일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어두움이요 모두가 낯설은 이방인들 같았습니다. 운다고 돌아올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밤이나 낮이나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중 어느날 "나주에나 가 봅시다."고 한 자매가 이야기 하는데 "나주는 왜?"하니 "나주에서 성모님이 피눈물을 흘리신대요." 저는 그것도 귀찮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슨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려?"하면서도 어떤 곳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던 제가 반신반의 하면서 울적한 마음이라도 풀어보려고 나주에 따라 갔는데 그날이 바로 철야 기도회였습니다. 기도회 때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부끄러워졌습니다. 자매님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미사도 드려 준다고 하니 나도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저는 "율리아 자매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내 아들을 죽인 그 아이를 나주 성모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하고 성모님 앞에 나아가 관중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산으로 돌아가면 내 아들을 죽이고 교도소에 있는 그 아이를 내 아들처럼 사랑하고 돌보아 주겠습니다. 성모님, 도와주세요!"하면서 절규하며 흘러내리는 눈물은 걷잡을 수 없도록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제 용서하고 나니 어두워졌던 세상이 밝아지고 모두가 사랑스러웠습니다. 이제 어렵더라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는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천주님께 영광드립니다.

 

1989년 6월 30일 부산교구
박 아가다

 

 

아들입니다.

이정란(마르타)

"아들입니다"
마취에서 갓 깨어난 몽롱한 정신속에 들리는 그 한마디. 순간 내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 6년에 걸친 고통의 무게를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나는 남편과 10년 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으나 몇 년을 기다려도 아이가 없자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가 가정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이혼의 위기와 가정에서 겪은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들... .
시험관 아이라도 낳으라는 시아버님의 질책 아닌 사랑,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길, 심지어는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왜 아기도 못 낳냐? 곰보를 낳을래 째보를 낳을래}하면서 삿대질 하며 때리던 어느 여인네의 악담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고, 심한 불면증으로 쇠약해 가던 건강,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아침마다 체온을 재고 한약을 먹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해보았으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이는 생기지 않고 나를 진찰하는 의사와 한의사마다 "임신이 불가능"함을 알리는 절망적인 소식 뿐이었다.
희망이 전혀 없던 나는 죽음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고통 가운데서 주님을 찾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지금은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 어릴적 성당 마당에 모셔진 성모상 앞에 숙연히 고개 숙인 사람들을 보면서, 혹은 소녀 시절 우연히 지금의 남편과 함께 본 "기억의 성모님" 영화를 본 후로부터 성모님은 막연히 나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성당에 나가기가 쉽지 않은 터에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은 우리 부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남편은 눈물과 피눈물 소식을 듣고 성모님의 사랑을 받아 회두한 사람 중의 하나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부부가 처음 성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율리아 자매님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주셨는데 같이 촛불 봉헌을 마치고 성서를 폈을 때 "잃었던 아들" (루가 15장 11절 이하)의 말씀으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뜨겁게 쏟아지던 눈물... .
그 때부터 우리 부부는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심했다. 1987년 9월 12일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자아를 버리고 나에게 돌아온다면 3년 후에 아이를 주겠다." 나는 이 말씀을 믿고 또 믿었다. 그 동안 먹던 약을 중지하고 체온계를 빼 버리고... . "그래, 자아를 버리자." 기도하고, 희생하고 보속하고 봉헌하는 삶을... . 나는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놓치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여, 오늘 하루도 당신과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세수할 때, 걸레질할 때 또 어떤 일을 할 때도 영혼을 닦는 걸레가 되게 해 주시오며 우리 안에 있는 영혼 육신의 추한 때를 씻어 주세요. 이렇게 구체적인 봉헌 행위를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언제인지 모르게 쇠약해져 가던 건강이 모두 치유되었다.
머리, 만성방광염, 위장병, 가슴앓이, 장염 등... . 그런데 성모님께서 말씀하신지 만 3년 후인 1990년 9월 26일 입덧인 줄도 모르고 병원을 찾은 나는 "임신입니다."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병원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하며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 드렸다.
나는 성모님께서 주신 약속을 굳게 믿고 부족하나마 그 말씀 따라 살려고 노력했기에 주님께서 주신 아들 요셉은 지금 8개월이 되었는데 태중에 있을 때 성모님께서 이름까지 지어주신 우량아이다. 아이를 낳을 때 제왕 절개로써 성모님의 사랑이 증거되었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임신 불가능한 상태 즉 난소에 많은 염증이 생겨 완전히 막혀 있고 자궁 근종이 두 개나 있는데도 임신을 할 수 있었으며 유산이 되지 않고 정상아를 낳을 수 있었음을 ... .
성모님께서는 단순하게 순종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을 사랑하시며, 그 노력을 어여삐 여기신다 하셨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결코 거짓말 하지 않으시고 그 약속을 꼭 지키신다. 우리 모두가 자아를 버리고 기도하고 희생하고 보속하고 봉헌된 삶을 삶으로써 극기와 청빈의 마음으로 생활개선하여 성모님께 다가간다면 내적 외적 치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천상의 행복까지도 약속해 주셨으니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신 성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마리아의 구원 방주에 우리 모두 함께 타고 천국으로 갑시다.
이 글을 쓰고 난 후 벽에 걸어 놓은 십자가상과 묵주에서 빛이 강하게 비추어져 어둠 속에서도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주여!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는 감사가 마르지 않게 하소서. 아멘!

 

전남 나주시 금계동 수강아파트 301호
이정란(마르타)

 

 

아멘으로 받아들였더니 통증이 사라지고 음성도 정상이 되었어요.

안봉금(아델라)
 

찬미 예수님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고 또 향유로써 장미향기를 우리 모두에게 그윽하게 풍겨 주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도 참배는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언젠가는 불러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제가 나주 성모님께 가게 되었을 때는 피눈물과 향유도 거두신 후였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반복되는 감기로 목에 통증이 심하고 음성까지 변하여 소리내어 묵주기도나 말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런 차에 나주 성모님께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나 몸이 기력이 없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불러 주심인 줄 알고 용기를 내어 갔습니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향기에 너무 너무 말할 수 없이 눈물겹도록 황홀하여 감사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루비노 형제님이 율리아 자매님께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성모님의 메시지 전달과 치유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목에 통증 치유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갑상선은 아니지만 목의 통증 치유를 "아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통증도 사라지고 음성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반복되었던 감기는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을 안고 성모님의 메시지를 마음에 새겨 열심히 기도하며 살기를 다짐하며 돌아왔습니다.
우리 불쌍한 인간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가 성화되기를 바라시는 성모님의 무한하신 사랑, 현존하심,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고 깨달음의 지혜, 용기, 힘, 위로자이심을 믿게 되었음을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서울 강남구 대치1동아파트 5-503
안봉금(아델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그곳에
찬란한 빛으로 후광을 장식한 성모님이 계시다니...

최기병(요한)
 

솔직히 말해 저의 신앙 생활 20여년 중 성모님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매달려 간구하고 기도하는 습관이 될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때는 성모님은 예수님의 세속적 어머니로만 비칠 때도 있었고 교리 때 배운 우리와 하느님과의 중재자로 또는 막연히 더없이 인자한 분으로만 생각될 때도 있었다.
물론 이제는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성모님을 붙잡고 기도를 통하여 일어서는 진실한 자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좀 더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가 깊은 사랑과 신비로움을 접하게 된 것은 1987년 8월 중순이었다.
그때까지는 가까이 있는 성모님 집에는 별로 찾아가지 못하였다.
김 율리오 회장님과는 같은 직장의 동료로 15년여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지만 수강아파트로 이사한 후로는 성모님 집 소식은 자주 듣지만 이유야 어쨌든 한 번도 방문을 못하였다.
그 해 8월 중순 쯤 김 율리오 회장님께서 성모님 집에 전국에서 순례자가 많이 찾아와 성모님 집을 옮기려 하는데 부지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시외 각 지역을 물색하여 그 결과를 알려 드리려고 성모님 집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성모님 집을 방문하기 때문에 성모님이 어떻게 모셔져 있는지 방안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때인지라 약속은 되어 있지만 현관 앞에 당도하여 보니 무척 서먹서먹 하고 마침 순례자들이 묵주기도하는 소리도 들려와 선뜻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도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림도 지루하고 호기심도 나서 방문객을 확인하는 조그마한 구멍을 무심코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그곳에 찬란한 빛으로 후광을 장식한 성모님이 서 계시지 않는가. 혹시 환상일지도 몰라 다시 한 번 보고 또 보았지만 여전히 성모님이 서 계시지 않는가. 의아해 하면서도 혹시 밖에서 보이는 구멍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성모님은 현관문 바로 앞쪽에 모셔져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 섭리의 몇 백만분의 일도 안되는 과학과 얼마 안되는 짧은 상식으로 무엇이든지 해부하고 이해하려는 관념과 습성이 있듯이 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가 끝나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성모님상이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부터 확인하였지만 모두가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용무를 마치고 밖에 나와서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니 그 때는 성모님은 계시지 않고 흐릿하고 뿌옇게만 보이는 것을 보고서야 현존하시는 성모님을 만나뵌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다음날 또 성모님 집을 방문하여 여러 순례자와 파 레몬도 신부님과 함께 기도 중에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모습을 한시간이 넘게 처음 목격하고 난 후부터는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증언하고 있다.
몇 년전 또 한 번 성모님의 은총으로 위기를 넘기게 되었는데 직장 관계로 날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장을 다니기 때문에 오토바이는 25년여 직장생활 동안 신체의 일부분처럼 이용하고 있다.
1991년 8월 16일 그날도 여느 때처럼 빠른 속도 (약 80km)로 오토바이를 타고 출장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얀 소복차림의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앞바퀴에 펑크라도 나면 어쩔려고 그러느냐. 속도를 줄여라."하고 이르시는 것이 아닌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속도를 줄이고 (60km쯤) 200여m를 달리고 있는데 반반한 포장도로에서 순간적으로 차체가 흔들리더니 중심을 잃고 넘어져 몇 바퀴나 길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우측 갈비뼈와 팔꿈치가 부러지는 중상 (20일 입원)이었지만 성모님의 사랑 가득한 현시가 없었다면 죽기 아니면 더 큰 사고라는 것은 모든 상황으로 봐서 어느 누가 봐도 분명하였다.
오토바이는 폐차 처리하였고 성모님 말씀대로 정말 앞바퀴는 펑크가 나 있었다. 이것은 바로 성모님이 제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랑하셔서 살려주시고자 나타나신 것이 분명하였다.
그날 이후로는 항상 성모님의 사랑과 신비로움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성모님 집에 기도회 때마다 다니고 또 성모님을 보고 싶을 때는 아무 때라도 (나주에, 그것도 몇 백 미터 거리에 집과 직장이 있는 것도 감사하며) 달려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고혈압과 너무나 심했던 당뇨병과 심장질환도 언제 치유가 된 줄도 모르게 깨끗이 치유되어 지금은 아주 건강한 몸으로 성모님께 기도하며 회개하고 감사할 줄 아는 자녀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시몬느 베이유'의 기도처럼 "신이여, 당신을 위하여 갈가리 찢어서 쓰시고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소서."을 되뇌이곤 하면서...
"알렐루야 아멘."

 

1996년 6월 14일
나주시 성북동
최기병(요한) T.(0613)32-2527

 

 

양쪽 폐가 80% 굳어진 자매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박마리아

찬미 예수, 마리아
성모님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많은 영혼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성모님 집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온 사람, 불치병 환자, 고통받는 사람, 정신질환자 등이 많이 오는데 대부분 혼자 와 있기에 건강한 제가 식사 봉사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저지에서 온 안젤라 교포 자매님은 미국 유명 병원에서도 병명조차 모르고 이유도 모르게 양쪽 폐가 80% 굳어져 숨이 가쁘고 열이 심하게 나고 기침도 심하게 하여 옆에서 보는 저희들도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자매님은 마지막으로 한국 나주 성모님만은 자기 병을 치유시켜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왔는데 성모님께서 주신 물을 먹으며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많이 치유받아 가셨습니다.
그때 또 한 분의 할머니는 위암으로 죽만 먹었는데 성모님께서 주신 물을 마시고 밥과 잡채를 먹을 정도로 좋아지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의 친딸은 손에 습진이 심하였는데 제가 가져다준 성모님께서 주신 물을 마시고 바르므로 완전 치유가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그분들의 고통을 자매님께서 대신 받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너무나 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 주님과 성모님께 영광 드리고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인준될 때까지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1995년 6월 8일
경북 옥산 청구타운 102동 807호
박 마리아 T.(053)815-2648

 

 

어둠에서 광명의 빛을 

오형임(모드엔나)

세상의 모든 욕망과 의욕을 상실한 채 죽음만을 생각하며 사는 이 죄인을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불러 주셨기에 이 편지를 성모님께 드립니다.
저는 중2 때 저를 가장 사랑하는 아버님을 잃고 그 충격으로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오직 혼자만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여 생활하면서 무조건 엄마께 반항하며 어두운 학창시절을 보내고 건설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년에 6만원짜리 무허가 흙집에 사글세로 살면서 이자돈을 얻어 조그만 가게를 꾸려가며 큰 아이를 정상으로 분만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다음날부터 눈이 퉁퉁 부어 눈을 뜨지 못하고 누런 물만 줄줄 흘리고 있을 때 '혹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조바심, 엄마만이 겪는 그 고통은 속으로 피흘리는 아픔이었습니다. 2주일만에 눈은 떴지만 아이는 24시간을 잠시 잠깐도 누워 있지 못하고 깜짝깜짝 놀라 숨이 넘어갔는가 하면 또 숨을 쉬면서 계속 울어대며 밤낮을 시달리더니 4개월 쯤 되어서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에 젖을 먹여도 토하고, 물만 먹여도 토하며 하루에도 4- 5번 때로는 10여차례 정도까지 "경끼"을 하며 2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물론 대학 병원, 기독교 병원을 비롯하여 아이에게 해당되는 개인 병원 등을 전부 다니며 모든 검사를 다 해 보았고 치료를 다 해 보아도 소용이 없고 의사들의 공통된 말씀이 개업 이래 처음이라고 했으며, 아이를 본 사람들도 살아 생전에 처음 보는 아이라고들 하였습니다. 가게에서 번 돈은 아이의 병원비로 전부 다 써도 아이가 가망이 없자 결국 장부는 아이를 살려보려고 가게를 팔고 조용한 시골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의 몸은 중2 때부터 심한 위장병과 간장병, 만성신장염, 십이지장궤양 등으로 많이 아파 물만 먹어도 토하고 신장 이식수술 직전까지 간 중증의 몸인데다 아이로 인하여 고통을 겪으니 기진맥진이 되어 아이와 함께 죽고 싶은 심정 뿐이었습니다.
장부는 다시 돈을 얻어 2번 째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으며 또 다시 실패의 쓴잔을 맛보고 많은 빚더미에 올랐습니다. 시댁에서 이 고난의 나날들을 살면서 시부모님의 온갖 냉대와 학대 속에서 아이의 아픔, 장부의 사업 실패로 인한 정신적, 경제적 갈등, 시댁 형제들과 주위의 환경 등에서 오는 고통 등 2년 반을 같이 살면서 서서히 제 육신이 무너져가니, 말이 없어지면서 죽음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겨우 사업이 풀리어 거의 빚을 갚고 다시 사글세 방을 얻어 나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원래 양가 집안의 종교가 불교였던 영향으로 아이의 건강과 장부의 사업을 위하여 저는 천주교 신자의 소개로 옆집에 사는 무당집을 찾아갔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상태였기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듯이 아이의 건강과 남편의 사업을 위하여 많은 푸닥거리를 해가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여 했습니다. 어렵사리 집을 장만하고 다시 열심히 살려는 마음으로 빚까지 얻어 세 번째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또 다시 실패의 잔을 마시면서 삶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장부 모르게 6년동안 무당에게 쏟았던 많은 돈이 밝혀지자 장부는 물질적, 인간적 배신, 정신적 패배만을 안고 좌절된 생활 속에서, 결국은 온 식구가 한 자리에서 약을 먹고 같이 죽자고 하며 죽음을 부러워하며 죽음을 자처하였는데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세 군데의 절과 무당을 끊고 5년 전에 고통 중에 있을 때 조금 교리받은 것을 떠올리며 4일 밤, 낮을 엎드려 주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이 죄인 이제 죽어도 좋으니 당신을 알고 죽게 해 주세요."하며 간청한 제 청이 5일째 되던 날 그러니까 서른 세살  되던 해 5월 20일 성모의 달에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장부를 통해 저와 아이들을 성당으로 불러주셨는데 고통은 그 때부터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아이는 다시 심한 고열로 인한 오한에 시달리며 위가 많이 나빠져 거의 먹지도 못하고 이틀이 멀다 하고 체하며 시름시름 앓으며 말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부는 무면허 중인데 제가 성당에 나간지 한 달만에 교통 사고를 두 번이나 냈고 주위에서는 빚더미에 오른 돈의 독촉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24시간 떠나지 않고 우리 가정을 너무너무 힘들게 한 긴장의 연속이었으나, 주님과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오직 눈뜨면 묵주기도로 하루하루를 살며 잘 때에도 묵주를 손에 들고 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려 아이와 온 식구가 기진맥진할 정도로 시련은 계속되었으나, 오직 주님만 믿고 다시 열심히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이의 아픔은 날로 심하여졌습니다.
날마나 병원과 약국을 다녀도 병명도 모르는 채, 전혀 차도가 없이 의식이 희미해져 가며,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어 2개월 정도 누워 있었는데, 어느날 옆방의 천주교 신자가 성모님 집에 가서 기도하자 하여, 아이를 양쪽에서 부축해 데리고와 성모님께 기도하던 중, 좌골신경통으로 고생하시던 대구 할머니께서 성모님 집에 도착하시자마자 완전히 치유 되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 할머니는 왼쪽 어깨에서 골반 다리에까지 왼쪽 전체가 반신불수처럼 되어 밤마다 심한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남편이 계속하여 밟아주는 생활의 연속이었는데, 그 할머니는 나주 성모님을 뵙고자 너무 많이 오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남편의 반대로 오지 못하고 있을 때, 남편이 잠시 출타 중인 틈을 타 나주 성모님 집에 오셨는데, 완전히 치유되어 눈물을 흘리시며 팔짝팔짝 뛰시고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시는 모습을 본 저는 제 일이 아니었지만 너무 기뻤고 성모님의 현존을 느끼며, 제 아이들도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더욱 깊이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3일간 고통중이어서 걷지도 못하시던 율리아 자매님이 부축받아 나오셔서 함께 기도를 했는데, 걷지도 못하며 부축받고 온 제 아들이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고, 통증이 심하던 모든 곳이 씻은 듯이 사라져 옆에서 보던 모든 분들도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 아이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어 첫 토요일 철야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하신 성모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제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제까지 이 죄인이 얼마나 잘못 살아왔으며 교만했는지 지난 날의 모든 일들을 통회하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어렸을 때부터 부모 형제와 주위 사람들에게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저는 저의 교만과 자만으로 하는 일마다 제일 잘 한다는 칭찬과 완벽하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또한 커서는 건설업체에 근무하면서도 남자와 동등하게 대접 받아가며 열심히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를 지었는지, 또 장부의 사업을 뒷받침하며 완전한 동업자라는 그 교만에 찬 생각이 지옥의 길인 줄도 모르고 악의 세력과 타협하여 예수님께 모든 고통을 드렸습니다.
또 삶의 고통으로 "낙태는 살인이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인 줄도 모르고 두 아이를 낙태시킨 살인 죄인이었음을 나주 성모님 안에서 깨닫고 저의 모든 허물들을 성모님께 온전히 맡겨드리고 가슴 찢기는 아픔으로 통회하며 장부와 아이들, 또 기억나는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이 율리아 자매님 말씀대로 제 탓이라고 생각할 때 모두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주님이 불러주셨기에 감사할 뿐이지요. 왜냐하면 여태까지 살아왔던 일들이 제가 받은 상처만 생각했지, 제가 준 상처는 전혀 생각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부터 장부와 아이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의 갈등 안에서, 먼저 내 탓을 생각할 때 제 마음은 기쁨과 평화를 얻었고, 또 남편과 아이들이 저의 소유물인 줄만 알았던 저에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당신의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었으며, 주님 안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각각 주님 안의 소중한 영혼들임을 깨닫고 이제까지 장부와 아이들에게 교만과 말로 준 상처들, 또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무심했던 일들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가슴을 치고 절규할 때 자비의 성모님은 크신 사랑으로, 제 마음을 열어 평화와 기쁨의 은총을 주시고 용서의 은총도 주셨으며, 주님의 사랑을 이 죄인의 가슴 안에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그 많은 사랑을 받은 제가 어떤 자매에게 현혹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많은 은총을 내려주시는데 그 영혼들을 관리까지 못하니까 나에게 성모님 집에서 은혜받은 사람 관리하라."고 했다기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생활했는데 그들에게서 어딘가 소외감을 느끼며 따돌림을 당하였고 나주 성모님의 열심한 자녀들이라는 그들의 말과 행동 안에서 서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위선과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어 분심 중에 있었으나, 나주 성모님께서는 1991년 성탄 때 장부를 성당으로 불러주시고 92년 6월에 영세를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장부는 과천 영보 수녀원 피정에서 장미향기를 맡으며, 나주 성모님을 체험하게 하시어 92년도 성탄 때 장부와 이 죄인을 나주 성모님 집으로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이나 단절되었던 지하수 사업이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힘이 들어 못할 정도로 계속 넘쳐 남아 돌아갈 정도입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 안에서 착하고 열심히 살려는 의지와는 반대로 고통도 따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으니 부족한 이 죄인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주님만 믿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알고 인간으로부터 오는 어려움, 또 가정성소 안에서 세속에 살면서 오는 갈등 등, 그 고통을 통하여 바로 내 자아를 버리고 나를 내놓으며 주님을 따라 성덕으로 가는 길임을, 또 하느님의 크신 사랑임을 깨달았으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이지만, 이제 남은 제 한 생애를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 전하는 빛과 소금이 되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또 성모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하루의 모든 삶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쁨과 평화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대장손이지만 아들과 딸을 주님께서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시도록 (사제와 수도자) 온전히 봉헌하겠습니다. 그대로 이루어 주소서.
주님, 홀로 찬미와 감사, 찬양과 영광 흠숭 세세에 영원히 받으소서.


1995년 6월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을까?" 했지만 성모님은...

장남순(우술라)

찬미예수 알렐루야!
저는 광주 광역시 상무2동에 살면서 염주동 성당에 다니고 있는 장남순(우술라)라고 합니다.
1994년 정월 초하룻날부터 제 몸에 이상이 왔습니다. 온 몸이 피곤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자주 열이 오르고 오한이 자꾸 들어서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고 감기약을 사다 먹으면 괜찮겠지, 했는데 열은 더욱 심하게 오르고 오한이 더욱 심하게 들어서 그럼 열병인가 보다 생각하고 제가 잘 다니는 개인병원에 가서 진찰해 본 결과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면서 적십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소견서를 써 주시기에 적십자 병원에 가서 피검사와 여러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내일 나오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아침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전대병원에 가서 자세한 진찰을 받아보라고 하여 심상치 않구나 생각하며 저는 그 길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전대병원에 가서 여러가지 검사를 했는데, 백혈구가 나와 그 열이 간을 쳐서 급성 C형 간염이 되었다며 어디서 이런 원인이 나왔는지 검사를 다시 해보고 치료를 하자고 하여 그 때부터 치료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속도로 올라가는 열과 오한, 병원측과 가족들도 최선을 다해서 치료를 해 보려고 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는 가운데 급속도로 퍼져가는 C형 간염 때문에도 가지가지 식이요법에 좋다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온 가족들이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미나리, 민들레, 냉이 등 모든 것을 다 구하여 생즙을 내서 먹으며 다시 조대병원에 입원하여 모든 검사와 MRI 특수촬영까지 했으나 저의 병은 진전이 없었고 결국은 신경 정신과로 병실을 옮기며 이제는 신경성 우울증까지 겹쳤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며, "암"을 고치고 말지 저의 병은 약이 없다면서 계속 입원을 요했고 별다른 효험없이 약을 먹고 잠을 자다 깨어나면 고통스러워 울고, 결국에는 한쪽 수족의 마비증상까지 왔고 온몸이 바늘과 밤송이로 콕콕 찔리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가정 형편상 어찌 할 길이 없어 퇴원을 하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저의 주치의사는 퇴원은 도저히 안된다고 말하여 저는 결국 매일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하며 퇴원했습니다.
퇴원한 저는 한약과 물리치료 등 별 방법을 다 써가며 노력했으나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한 쪽 손발이 점점 굳어가는 통증, 오른손은 떨려서 잡지 못하고, 왼손으로 밥을 떠먹어야 하는 고통 속에서 정말 저에게는 어떤 희망도, 주님을 부르고 그 분께 의탁하는 믿음도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반장님이 오셔서 5월호 빛줄기를 주고 가셨는데 겉표지에는 나주 성모님 집의 밖에 계신 성모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책자를 받는 순간 뭔가 가슴이 뭉클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짜릿한 맛을 느꼈습니다. 마음 속으로 '왜 이러지? 성모님께서 낫게 해주신다는 뜻일까? 그래, 다음 달 첫 토요일에는 꼭 나주 성모님께 가리라. 의사도 내 병은 약이 없다 했으니 모든 것을 성모님께 의탁해 보리라.' 드디어 첫 토요일, 오늘은 병원도 안가는 날, 성모님 집에 가고 싶어서 마음 속으로 기대를 해보는데 그날 따라 아침부터 고통은 더 자주 오고 정신까지 흐렸습니다. 가족들도 이렇게 심하게 고통이 오는데 가서 어떻게 견디려고 하느냐고 다음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성모님께 꼭 여쭈어 보리라 내가 왜 이러는지...  다짐을 하면서 밤 9시경 성모님 집에 도착해 보니 경당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뒷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습니다. 내 옆에는 염주동에 사는 백혈병을 앓는 형제님도 누워 있었습니다. 백혈병을 앓는 그 형제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편안히 누워 있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부가 거의 끝날 무렵 저의 고통은 시작되어 숨을 쉴 수도 없고 머리는 깨어질 것만 같았으며 온 몸은 또 바늘과 밤송이로 찌르는 듯하여 얼마를 뒹굴었을까? 옆에 계시던 자매님들이 붙들고 함께 울며 주물러 주었는데도 차도가 없이 온 몸에 식은 땀이 비오듯 흘려 내렸는데 어느 정도 고통이 수그러지자 미안하여 묵주를 들고 밖으로 나와 밖의 성모님 앞에서 똑바로 서서 성모님을 향하여 한없이 울며 "성모님, 지금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이 제가 겪어야 할 고통인지요, 제 죄 때문인지요, 아니면 조상의 보속인지요, 아니면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인지요." 하면서 "성모 어머니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고, 제 힘으로는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지만, 오늘 저녁 저는 15단의 묵주기도를 봉헌하겠으니 이 기도를 바치는 동안 성모님께서는 저에게 응답을 해주셔요. 제가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요."하고 간절히 원하면서 환희의 신비 5단, 고통의 신비 4단에서 5단으로 넘어가는 도중 제 온 몸은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간신히 버티는데 갑자기 성모님의 두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주시하시더니 온 몸이 사람의 형태로 변하여 서시는 것이 아닌가!
성모님 머리와 온 몸에서 찬바람이 일었었는데 그 바람은 입에서 나온 세찬 바람으로 저에게 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그렇게 아팠던 머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늘로 쑤시는 고통, 그 고통이 어디로 사라지고 온 몸에 힘이 솟구쳤습니다. 성모님께 한없이 감사하다고 묵주기도 72단을 바치고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그 때 안에서 율리아 자매님께서 오늘 저녁 온 몸이 바늘 방석으로 찌르는 고통을 받는 환자가 치유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해서 "성모님, 진정으로 감사합니다."하고 경당 안으로 들어오니 얼마 전까지 옆에 있던 자매님들이 완전히 치유됐다고 성모님께 감사하라고 하면서 이제 빠지지 말고 성모님께 찾아와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바늘이 밤송이로 찌르는 고통도, 또 온 몸이 마비되는 증상도 사라지고 약도 먹지 않으며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이고 성모 어머니의 자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1995년 5월 29일
광주 광역시 상무2동
장남순(우술라) T.(062)371-0370

 

 

엄마 잃은 아이가 엄마 찾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김민자(아뽈로니아)

저는 1992년 10월 19일 성모님의 피눈물 흘리신 6주년 기념일에 처음으로 나주를 방문하였습니다.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니 이렇게 늦게서야 오게 된 것이 후회가 되었고 이제라도 불러 주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진한 장미 향기를 맡을 때는 약간 의심이 가기도 하고 어리둥절 했지만 기도하는 동안에 뭔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고 엄마잃은 아기가 엄마를 만난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 날은 율리아님이 고통 중이라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나오셨는데 그 분을 보는 순간 '주님, 제 눈으로 살아있는 OO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혹시 율리아님이 이 글을 보시고 혼내 주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제 마음 느낀 그대로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영세를 할 때도 성인전을 읽고 스스로 성당을 찾아 갔었고 25년이 지나고 제 나이 50이 되는 지금까지 주님은 책을 통해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 속에서 성인을 많이 만났었지요.
그 이후 메시지 테이프와 책자와 함께 제 나름대로 비밀리에 성모님을 전하다가 때론 비난의 소리도 들었지만 계속 성모님을 전하며 '이 밤을 나와 함께 기도하자꾸나'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첫 토요일 기도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메시지 말씀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4년 11월 24일에는 갑자기 성모님이 보고 싶어 몇몇 교우들과 함께 나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전 10시30분경에 도착해서 보니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여 왜 그러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교황 대사님이 오셨다고 우리 신자들이 와서는 안되는가 보다고 했습니다.
돌아가려고 나섰는데 신발이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다 보니 같이 왔던 교우들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고함을 치고 손을 흔들며 뛰어가도 소용이 없었지요. 제가 안 가는 줄 알고 그랬나 봅니다.
멍하니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이젠 어쩔 수 없으니 기도나 하고 가자.'하고 다시 경당으로 성모님께 돌아오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분위기가 엄숙했습니다. 뒷쪽에서 무릎을 꿇고 쭈그리고 앉아 30여분 동안 묵주기도 5단을 바친 후 고개를 드니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 앞에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위로 손을 힘차게 뻗고 계셨어요. 기도를 하시는 줄 알고 '나도 열심히 기도해야지.'하고 고개를 다시 숙이자마자 옆에 계시던 자매님들이 '어머!' 하기에 순간적으로 무언가 있었구나! 하고 머리를 드니 율리아님의 손에 무언가 있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뚫어져라 쳐다보니 성체 같아서 옆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성체가 내려왔다고 웅성웅성 하는 거였어요.  너무 놀라 바라보고 있으니, 한참 후 성체 (큰 성체)를 받으며 쓰러졌던 율리아님이 일어나셔서 성체를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에게 전하니 그분들은 저희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는데 저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다시 욕심이 생겨 맨 뒤에 나가서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를 모시다니... . 이 못나고 못난 죄인을 이 자리에 불러 주신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하늘에서 성체 (작은 성체)가 또 내려와 율리아님이 입으로 받았습니다. 사람들과 계속해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성체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그날은 새벽 4시까지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성모님을 알고 나서는 기도드릴 때나 길을 갈 때나 미사 중에, 차 속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볼 때, 또 나주 성모님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 중에 장미향기를 많이 맡습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랑의 표이지요. 또 조카들이 아플 때 성모님 피눈물 사진을 대고 진심으로 기도했을 때 나은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부족하나마 제가 받은 사랑을 글로써 돌려 드립니다.

"반 죽는 한이 있어도 나주 성모님을 위해서라면... "

 

반야월 천주교회
대구시 동구 각산2동 921-19번지
김민자(아뽈로니아)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는 그 잘난 자존심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양청자(세실리아)

찬미예수
글로써 성모님의 영광을 찬미드리게 하여 주신 어머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미 받으옵소서.
제가 나주 성모님을 찾아뵈온 것은 88년 10월 7일입니다. 그때는 저의 큰 아이가 고 2학년이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욕실 문 앞에서 픽하고 쓰러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새벽 6시에 학교에 가면 밤 11시 반이 넘어서 집에 오는 학교 생활이 너무나 힘이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면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8시쯤 우리 큰 아이가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엄마, 지금 허리가 너무 많이 아파서 앉아 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요."하고 울면서 전화를 하였습니다. 너무 놀래서 아빠한테 연락을 하여 급히 학교에 가보니 우리 큰아이는 눈이 밤퉁이가 되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큰 아이를 데리고 우선 루까 형제님의 한의원으로 갔습니다. 루까 형제님은 저희 주교님, 또 수녀님도 치료해 주시는 아주 유능한 한의사이시고 저희 아이들 아빠하고는 형, 아우하고 지내시는 분이십니다. 큰 아이의 진찰을 끝내고 나서 저에게 "형수님, 힘들겠는데요. 체중이 너무 과해서 등뼈의 3번과 4번이 물러났습니다. 보세요."하면서 우리 아이의 등뼈를 보여주는데 육안으로도 움푹 들어간 곳이 보였습니다. 결혼도 힘들고 출산 또한 힘들겠다는 솔직한 얘기를 해 주는 것이었어요.
저는 고향이 개성이고 피난을 왔기 때문에 이 곳에는 친척도 없고 또 무남독녀 외딸로 자라서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들이라도 많이 나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더군요. 그런 저한테는 딸이 둘인데 고1짜리 막내는 성소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장이 나빠 계속해서 변을 보니 저더러 똥순이 엄마라고까지 별명이 붙을 지경이었습니다. 큰아이 하나만이라도 결혼을 시켜서 사위 사랑도 해보고 외손주도 안아보고 해야 하는데 이런 엄청난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어찌해야 좋을지 아이 앞에서는 태연한 척 웃었지만 집에 와서 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입니다. 그 이튿날 학교에 가서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교감 선생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면서 편의를 봐 줄 수 있는 한 다 봐 주겠다고 하셨지만 정 힘이 들면 휴학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 2때 이런 학생이 많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고 2때 휴학을 하면 대학은 반은 포기를, 또 휴학을 안하면 체력장 20점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체력장 20점이면 0.1점이 큰 대학 입시에서 얼마나 큰 점수인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래도 큰 아이는 고집을 부려서 새벽 6시에 등교 11시 30분에 하교를 계속하고 저는 애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1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학교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저는 큰 아이를 데리고 수원에서는 제일 크다는 이춘택 정형외과를 찾아갔습니다. X-레이 촬영 결과 우리 아이는 힘줄까지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 나는 여태껏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죄 지은 일도 없는데 왜 이런 엄청난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만 하나?'하며 주님과 성모님을 원망했으며 그때부터 모두가 미워지고 좋은 것이 하나도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노 엘리사벳 자매님이 또 나주에 가자고 왔습니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연결이 안돼서 못 갔었는데 이번에는 꼭 가서 성모님의 피눈물이 정말인지 확인도 해보고 싶고 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싶고, 하여튼 복잡한 심정으로 따라나섰습니다. 제가 그곳에 도착하여 경당에 들어섰을 때 성모님께서는 피눈물 자국 위에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계셨습니다. 어머님의 눈물 방울을 보는 순간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님이 저의 잘못으로 또 제가 잘못 살았기에 저를 대신해서 피눈물을 흘리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쉴 새 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는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아이들 아빠한테도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 그런데 어머님의 눈물 앞에서는 그 잘난 자존심도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그냥 목놓아 울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잘났기 때문에 학교에 가면 어머니 회장이죠,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감이죠, 성모회 감사죠, 레지오 서기, 성가대 총무도 해봤죠. 반장서부터 감투는 있는 대로 다 집어쓰고 잘난 척하고 살았거든요. 잘난 것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인 줄은 모르고 말입니다. 어머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까? 정말이지 잘못한 것 하나 없다고 떳떳이 살아온 시간들인데 성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면서 생각하니 왜 그리도 잘못한 것이 많은지 어머님 앞에 내 놓을 것 하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울고 또 울다 보니 철야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아이한테 "겨라야, 너 성모님 믿지?" "예, 믿어요." "그래, 그러면 지금서부터 엄마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을래?"하고 물었더니 하겠대요. 그래서 저는 이곳 나주에서, 저희 두 딸은 집에서 성모님 앞에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 신앙생활 20년 동안 너무도 잘났기 때문에 성령 세미나 한 번 안 받고 기도회 모임을 싫어할 정도였거든요. 그런 제가 기도를 할 줄 알겠습니까? 그냥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고쳐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겠습니다.'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나같은 죄인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안들어 주실 지도 몰라. 아니야 들어 주실 지도 몰라.'하는 맘이었습니다. 다음날 밤 11시30분 아이들 아빠가 마중을 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니 두 딸은 현관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우리 큰 아이를 앉게 하고 "겨라야, 성모님한테 갔다 온 손이야 너 성모님 믿지? 성모님이 꼭 치유해 주셨을거야."하면서 두팔로 허리를 꼭 끌어앉아 주었습니다. 작은 딸의 배도 만져 주었지요. 그 밤이 새도록 성모님 얘기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 아이는 6시에 학교에 갔습니다. 밤 11시 30분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주니 큰아이는 현관에서 '엄마, 엄마!'하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저는 놀래서 '왜, 왜!' 소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큰 아이가 "엄마, 나 오늘 체육 시간에 운동장 두 바퀴 반이나 돌고 물구나무 서기를 했는데도 허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저는 우리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이 죄인의 기도를 들어 주셨군요. 어머님, 감사합니다. 어머님께 해 드린 것 하나 없고 마음만 상하게 해 드린 이 죄인의 기도까지도 들어주시다니요. 우리는 기쁨에 가득 차 어머님 앞에 촛불을 켜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시는 주님과 어머님 찬미와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멘.

 

수원 화서동 본당
양청자(세실리아) T.(0331)48-3600

 

 

어머니께서는 제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데레사

나주 어머님께
어머니!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이 죄인은 어머님과 주님께 부족한 딸이었고 저의 아이들에게는 모자라는 에미였습니다. 제 부족함으로 생각하면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었습니다.
우리 말에 애간장이 녹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제 부족함으로 저의 딸아이는 신경쇠약으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제가 나주 어머니를 92년 7월 4일 처음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목놓아 울며 어머니께 애원했습니다.
"어머니,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우리 딸아이에게 바른 정신을 주세요."라고 통곡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나주를 다녀온 지 사흘만에 딸애는 입을 열고 자기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성모님 덕분으로 이제 저의 딸애는 많이 나아져서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보다 큰 축복이 있으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1993년 1월 29일
죄인 데레사 올림

 

 

어머니의 향기 장미꽃 내음을 

나순옥(율리엣다)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잘 것 없고 미천한 이 죄인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전해주신 성모님의 많은 메시지 말씀이 통회와 용서를 통하여 저희 본당 많은 신자분들에게 좋은 피정이었답니다.
하느님의 딸인 저 율리엣다는 1984년 교우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저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성당에서 관면혼배로 축복 속에 결혼을 했어요. 바로 교리를 시작해서 성당에 다니는데 아이를 갖게 되자 머리속 깊이는 공부를 못했지만 출석을 열심히 하여 6개월 후에 영세를 하였습니다. 영세받고 하루 뒷날인 1984년 12월 24일날 예쁜 딸을 낳았는데 여러 식구들과 신부님, 수녀님께서 축복해 주셨고 지금도 성가병원 수녀님들의 축가는 예쁜 선물로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 기쁜날 하느님께 찬미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아빠께선 건축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냉담 중이셨어요. 저만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다니면서 같이 다니자는 얘기는 한마디도 못해 봤습니다.
2년, 3년...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냉담 중에 하시는 일이 자꾸 꼬이고 되질 않는 거예요. 저희 본당이 분가해 온 뒤부터 남편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물질적인 것은 하나씩 잃고 영적으로 점점 성화가 되셨어요. 지금은 남편 베드로와 마리엘, 안젤라와 함께 성당에 열심히 다닙니다. 저희 가족은 모든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살자고 하느님 앞에 굳게 맹세했어요.
지금까지 고통이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그때마다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로 귀하게 받아 들였어요 올 여름엔 제가 대모를 서게 되어 영세식을 무사히 마쳤는데 병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궁이 몹시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좋지 않은 얘기를 하시더군요. 수술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고 자주 정신적으로 나약해지는 거예요. 성체 앞에 한번이라도 더 가고 싶어도 주위에 있는 외인들은 물론 신자들도 그 아픈 몸으로 성당에 어떻게 다니느냐며 아프니까 쉬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전 그때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을 의식하게 됐습니다.
아픈 부위가 몹시 부어서 병원과 약국을 다닌 기간이 두 달 반 동안이었어요. 그런데 병원 다닐 적에는 나은 것 같고 괜찮은 것 같아서 집에서 쉬면 다시 아픈 거예요. 성모님 앞에서 열심히 묵주기도를 해도 헛된 기도인지 마찬가지였어요. 어느날 율리아 자매님께서 피정에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도 아프다는 핑계로 남편더러 대신 가라고 했는데 저는 준비기도도 없이 갑자기 가게 되었어요. 율리아 자매님께서는 저보다 더 고통스러운 몸으로 제대 앞으로 나오실 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 율리엣다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듣고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듣는 중 성모님의 향기에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응답을 했지요. 저는 그 동안 너무 교만하고 오만하여 말로만 주님을 찾게 되어 그 큰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저는 두서없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어머니의 향기인 장미꽃 내음을 가득 맡고 있습니다. 저의 기쁜 체험을 우리 가족과 예수님께 알리고 본당 제대 앞에서 자랑을 하고 싶어도 용기가 나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도 율리아 자매가 다녀간 열흘 후에 본당 기도회에 나가서 성령께서 항상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도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신다며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성모님께서 깨끗이 치유해 주셨음을 증거하자 모두 감사하였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을 주님께 '아멘'로 응답하면서 열심히 죄인들의 회개와 사제들을 위한 기도, 낙태당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로 봉헌하며 가정생활을 더욱 성화시켜 화목하게 잘 지내겠습니다. 항상 율리아 자매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기도 많이 드릴께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시어 하루 빨리 세상 일이 주님께서 뜻하신 바 대로 됐으면 합니다.
죄송해요. 두서없는 글이어서요....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어여삐 봐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부천시 상동 본당
나순옥(율리엣다)

 

 

어머님의 죽음직전의 고통으로 가족이 화목해지다.
장례준비까지 다 해 놓았는데...

김 라파엘
 

"나주 좀 다녀옵시다." 공무원인 아내의 전화를 받고 오후 3시에 성모님 집에 갔다. 성모님은 피눈물을 많이 흘리시고 계셨다. 우리 부부는 무릎을 꿇고 엎디어 지금까지의 우리의 잘못과, 지척에 계신데도 무관심했던 죄책감 등으로 긴 시간 펑펑 울었다. 그 후 하루가 멀다하고 퇴근 시간에는 영광에서 나주로, 광주의 집으로 오가면서 식었던 신심이 다시 일어나 성모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가정이 성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90년 10월 19일 우리는 처음으로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듣는 순간 한없는 통회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온전히 나로 인하여 받는 고통은 너무도 크고 무거우셨으리라는 죄책감으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치유 기도 중 내 가슴 왼쪽이 칼로 에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고통스러워 했는데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에 자매님 손이 가슴에 와닿는 순간 뜨겁게 달군 다리미를 대는 것처럼 뜨겁더니 왼쪽 가슴이 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지 않겠는가! 나는 이 일을 이상히 여기며 생각해보니 다음 날까지 가슴 살갗까지 아팠었는데 한숨 자고 나니 기운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서 다음 날 그리고 또 그 다음 체험해보니 30년 동안 앓고 있던 당뇨병이 약으로도 조절이 안되어 혈당이 500이상이 나와 몹시 고통스러웠는데 새털처럼 몸이 가벼워지면서 약을 일체 끊고 흰 쌀밥을 먹어도 오히려 저혈당까지 오게 되어 심지어는 사탕과 초콜렛을 먹어주어야 할 형편에까지 올 정도로 치유된 것이다. 그리고 그뿐이랴! 20년 전부터 왼쪽 무릎에 관절염이 있어서 주사기로 물을 빼내어야 하고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기도회 때는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야 하는데 완전 치유된 것이다. 이상이 나의 체험담이고 어머니의 신앙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91년 10월에 어머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가 3개월 입원후에 치료되어 생활하시던 중 92년 5월 1일 뇌혈관이 막혀 또 쓰러지셨다. 나는 밤에 즉시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으나 운명 직전이니 집에 가서 돌아가시게 하라고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 사정하여 입원하게 되었으나 좋은 주사, 좋은 약을 투여해도 오히려 더 악화되어 완전히 사경에까지 이르러 회생 불가능함을 온 식구가 확인하고 집으로 모셔와서 임종만을 기다리며 기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평소에 어머님께서 그렇게 나주 성모님을 좋아하시고 제주도에서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전파하시며 시간만 나면 제주도에서 나주까지 오셔서 기도드리던 분이시기에 선종하시도록 율리아 자매께 기도 부탁드렸더니 92년 5월 3일 율리아 자매께서 밤 10시에 오셔서 살려 달라고 기도 드리는 것을 본 우리 온 가족은 깜짝 놀랐다. 이미 의식 불명이고 숨만 끊어지면 돌아가실 분을 살려달라 하시니 말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어머님은 눈을 뜨시고 자매님을 쳐다보며 꼬부라졌던 혀가 펴지시며 "성수물"하시고 "용서하소서." 하시지 않겠는가. 이미 두팔과 다리는 마비되어 굳어졌고 혀는 천장에 붙어 있어서 물 한방울도 안들어 갔었다. 자매님의 기도가 너무도 간절하여 25명의 우리 가족들은 통회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는데 자매님은 우리 온 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도 기도해 주셨다. 기도가 끝나고 자매님은 자정을 넘어서 가셨는데 어머님은 차츰 정신을 차리시고 미음을 잡수시고 요플레도 잡수시더니 새벽녘에는 말씀을 똑똑히 하시며 자식들 한사람 한사람 쳐다보시고 알아보셨다. 우리는 얼마나 놀랬는지 숨도 크게 못 쉬었다. 그것 뿐 아니라 더욱 더 놀라운 은혜는 우리 9남매 모두가 결혼하여 잘 살고 있으나 서로가 다른 종교를 갖고 있고, 불신감도 팽배해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로 인하여 우리 온 가족은 특히 형제들은 통절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특히 지금까지의 불신감은 모두 자기 탓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싸안고 서로 용서를 빌며 소리내어 울면서 가정 성화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주님과 성모님께 한없이 감사하였다. 그것은 바로 우리 어머님께서 9남매의 자식들이 갖가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고 불신감마저 팽배해 있는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 가족들 하나하나를 위하여 나주 성모님께 기도로 봉헌하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 묵주기도를 하시던 어머님의 정성과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고 가정 성화의 놀라운 기적을 행해주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은혜임을 입증하는 또다른 기적이었다.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시는 자매님께 기도받은 우리 형제들과 장인, 처형, 모두 다섯사람의 위장염과 관절통, 늑막염 수술 후유증, 일생동안 앓아오던 장염으로 설사 등 불치병이라고 체념했던 병들이 그 자리에서 치유된 것이다. 83세의 장인은 몇십년 장염으로 설사를 해 오던 것이 치유받아 지금은 보신탕 등 어떤 음식도 다 잡수시니 말이다. 이런 엄청난 기적들을 한 눈으로 보게 된 가족들은 모두 나주 성모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모두 성당으로 모이게 되어 며느리, 사위를 막론하고 하느님과 성모님 사랑 안에서 생활이 기도화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천국을 향하여 함께 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영원히 우리 가족을 성화시켜 주시고 영적으로 성장시켜 주신 주님과 성모님께서 영원 세세에 찬미찬송 받으시도록 오늘도 내일도 기도 드린다. 아멘.

 

1992년 5월 20일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 432
김 라파엘

 

 

L.A에서 온 편지 

이마리아와 요셉

찬미 예수
율리아 자매님, 가족 모두 안녕하신지요. 성모님과 자매님은 매일 말씀을 주고 받고 계시겠지요. 율리아 자매님이 이곳을 다녀가시고 난 뒤 변화된 것을 성모님께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1. 우리 본당 신부님께서 새롭게 변화되셨습니다.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본당 신자들이 느끼고 기뻐함)
2. 개신교 신자이신 59세의 부인께서 묵주 신공을 아주 열심히 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3. 주고 가신 묵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레지오 푸른 군대 단원들이 여러가지 체험을 하고 있는데 갖가지로 변화되고, 성체께 대한 흠숭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4. 10년간 냉담한 프란치스꼬라는 청년이 냉담에서 돌아와 자기가 다시 돌아왔다고 연락이 왔는데 율리아 자매님께 알려 드리라고 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변화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당 공동체가 성화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메시지 전파는 입을 통하여 무수히 많이 되고 비디오 필름은 모임마다 계속 돌아가며 어린아이들까지 변화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로 참 감사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자매님 다녀가신 이후로 외인 아이들, 한국에서 온 두 남매가 영세 교리반에 갔고 그외 네 식구가 입교할 약속을 했습니다. 현재 유학생으로 저희 집에 머물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부모와 동생 2명이 성당에 나갈 것을 알려 왔습니다. 묵주기도 (구일기도)를 우리말로 베로니카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마리아와 요셉 드림

 

180도 생활개선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자매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자매님의 기도 덕분에 저의 식구는 잘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율리아 자매님께서 뉴욕의 그레넥 성당에 오셔서 기도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여 좌골신경통이 치유된 당사자입니다. 대단히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또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여러 면으로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자매님! 저희 식구는 세 식구입니다.
저의 이름은 황요셉(경식)입니다.
저의 집사람은 황도미니카(혜선)입니다.
저의 아들은 황다니엘 (3살)입니다.
정말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항상 자매님과 같이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께
율리아 자매님 안녕하셨어요?
저는 도미니카(혜선)이라고 합니다. 서면으로 인사는 처음이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레넥 성당에서 뵈었을 때 말로나 글로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키 어려운 한마디 한마디 달콤한 말씀 모두가 제 마음에 스며들어 주님께 죄송하면서도 황홀한 마음으로 "마음의 고향"을 찾은 듯 했습니다.
치유의 시간에 (내적, 외적) 치유 원하는 이들을 일어서라 하실 때 저는 저의 죄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에 남편은 애기 때문에 밖에 있었고 그래서 제 마음 속으로 주님께 남편의 영육을 봉헌하며 치유를 부탁했어요.
두 번째 외적 치유 시간에 일어서라 할 때 저는 아픈 곳이 없지만, 애기 아빠를 대신하여 제가 일어서서 제 죄를 보지 마시고 남편의 영육의 치유를 부탁하며 기도드렸어요.
그리고 돌아오면서부터 아프던 곳이 괜찮다고 하기에 제가 그러면 마음 속으로 감사드리라고 했고 저도 기도 드렸지요.
그런데 집에 들어서면서 멀쩡하던 제가 걸음도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프며 마치 둥그런 쇠뭉치로 맞은 듯 아픈 것이 사흘 (3일간)이 지나니까 언제 그랬더냐는 듯 깨끗이 나았어요. 아프던 3일간 특히 죄 중에 있는 저이기에 회개를 하며 주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가려 했습니다.
너무나 죄 투성이라 염치 없지만 율리아 자매님의 더 많은 기도와 도움 부탁 드립니다.
저는 "성모님의 메시지"을 여러 날을 밤잠도 안 자며 특별한 느낌 받으며 듣고 또 들으며 전능하신 분의 사랑을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을 통하여 전달받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애기 아빠가 신학공부를 했어도 기도생활 등 모두가 형편 없었는데 주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치유해 주신 후 많이 변화되어 180도 생활개선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모두 감사합니다.
저의 친정 어머니는 저의 지난날의 생활을 항상 염려했어요. 그런 중에 이 소식을 들으시고 무척 기뻐하시고 또한 여러분께도 전하며 어머니의 감사한 마음 전해 달라고 부탁도 하셨어요. (이하 생략)

 

571 HENRY ST. BROOKLYL, N.Y. 11231
황요셉(경식), 황도미니카(혜선)
T.718-852-5272

 

 

여러 형제 자매님들이 함께
성모님의 양손에 든 성체를 보았습니다. 

김명남(아녜스)

찬미 예수
1992년 11월 23일 성모님 집을 한 자매님과 방문을 하고 27일 목요 성시간을 지키기 위하여 또 성모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 성모님께서 왼쪽 머리 스카프 바로 밑 어깨에서 장미 향기 그윽한 향기름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저는 매주 목요일마다 몇몇 자매님과 함께 나주에 가서 성시간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1993년 2월 18일도 여느 때와 같이 자매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목요 성시간에 갔는데 그날은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오늘은 성모님께서 어떤 은총을 주시려고 이렇게 뛰게 하시나?"하시더군요. 기도회가 거의 끝날 무렵 율리아 자매님께서 탈혼에 들어가셨는데 잠시 후 저는 온 몸이 몹시 뜨거워졌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깨어나시어 성모님께서 우리 기도회에 참석한 모두를 어루만져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93년 5월 27일 목요 성시간에 어느 자매님께서 성모님상 오른손에 성체가 있다고 하기에 저도 한참을 보았습니다. 양손에 성체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몇몇 자매와 형제님께서도 함께 목격을 하였습니다. 저는 칠대 장손의 종가집의 큰 며느리인데 딸만 둘을 낳은 뒤에 갑상선을 앓게 되었습니다. 체중 저하증이기 때문에 아기를 더 낳아서는 안된다고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시댁에서 야단이죠, 그러나 저는 아무 걱정없이 성모님께 의지하며 기도회에 다녔습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임상병리 검사를 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의 주치의 선생님께서 완치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모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더 낳아서는 안된다는 아기도 성모님께서 주셨습니다. 35살 그러니까 1994년 9월 6일날 아주 건강한 아들 장 즈가리야를 낳았습니다. 지금도 몇 분의 자매님과 함께 목요 성시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하여 성모님께 달아들어 주님께 전구해 달라고 청합시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렐루야. 아멘!

 

1995년 6월 10일
광주시 서구 화정4동 858-2 럭키아파트 2동 601
김명남(아녜스) T.(062)371-1816
 

 

여보, 당신 지금 울고 있잖아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보고)

테레사 튜칸
 

 다음 편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섬나라인 파푸아 뉴기니아에 사는 한 부인이 이 곳 미국에서 성모님 메시지를 전파하는 기관인 Mary's Touch By Mail (우편을 통한 성모님의 손길)에로 보내온 것입니다. 과달루페의 기적의 성모님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었는데, 그 사진과 더불어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받고서 회개의 은총을 받은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온 것입니다.
  
  Mary's Touch By Mail 귀하
  제가 요청했던 과달루페 성모님 사진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진은 어제 받았습니다. 어제 오후 우체국 사서함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들고 곧 자동차로 가서 사진을 보고 싶은 다급한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습니다. 차 안에는 제 남편과 두 딸이 있었습니다.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자 지켜보고 있던 두 딸이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해서 건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봉투 안에 있던 편지를 펼쳤는데, 뜻밖에도 그 안에는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자마자, 가슴에는 평소에 느낄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갑자기 왔으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확실히는 모르나, 저에게는 분명히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즉시 저는 제가 범한 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성모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느낌이 든 일은 과거에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으나, 제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저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제가 우는 것을 보고서 "여보, 당신 지금 울고 있잖아."라고 했으나,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의 성모님이 살아계신 모습으로 보였으며, 특히 성모님의 눈이 정말 살아 계신 눈으로 보였습니다. 사진을 남편에게도 보여 주었는데, 약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말문이 열려, 어떻게 느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도 똑같이 느꼈지만 딸들에게는 감추고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비로소 두 딸과 집에 있던 아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너희는 신부와 수녀가 되라고 얘기했습니다. 애들도 사진에 대한 큰 애착심을 보이면서, 자기들이 신부, 수녀가 되려면 엄마, 아빠가 많이 기도를 해 주셔야 된다고 했습니다.
  Mary's Touch By Mail (우편을 통한 성모님의 손길)은 정말 실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정말 저희에게 손을 뻗치셔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저희는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방에다 모셔 놓을 생각입니다. 이 사진이 너무나 좋습니다.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을 한 권 부쳐주시기 바랍니다.
성모님 안에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2년 10월 16일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테레사 튜칸T.503-669-8443

 

 

염주로 보이던 묵주가 성모님의 허리끈이 되었어요! 

양순희(임마누엘라)
 

저는 화곡동 본당에 예비자로 나가는 양순희입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서 개신교에 다니시는 분들이나 냉담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또 고통 받으시는 성모님을 위하여 이 글을 씁니다. 이곳에 처음 오게 된 동기는 몇 년 전에 한 직장 직원들이 나주에서 성모님이 피눈물을 흘리신다는데 한 번 가보지 않을래? 하자 저도 모르게 "그래"하고 대답을 하게 되었는데 대답하고 나서 후회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한 호기심으로 가보고도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나주 성모님께서 피눈물 흘리신다는 팜플렛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신기하여 이상스러웠습니다. 그 후 3년이 흘렀습니다. 병원 직원들이 나주에 가보자고 하여 한 번 대답을 했기에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때 12명이 함께 갔습니다. 그 중에 개신교 신자는 저 하나였습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성모상이 보여 저는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경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도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클 줄 알았던 성모상은 아주 작았습니다. 진짜 피눈물일까? 아마 가짜일거야. 제가 생각할 때 가짜로만 느껴졌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저는 개신교의 집사였고 교회 일을 아주 많이 했어요. 30년을 교회에 다니면서 개척교회를 여섯 개나 세운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도 부끄러운 일이고 창피스러운데 빙둘러 앉아 기도할 때 율리아 자매님이 저를 가리키면서 "자매님! 오늘 특별히 성모님께서 자매님을 부르셨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속으로 '흥, 웃기네, 내가 여기를 왜 또와.'하면서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의 말씀이 또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누구에게 오라고 해 본 적이 없는데 자매님을 성모님이 부르시니 이번 첫 토요일날 오셔요."하면서 자매님은 "어머,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내 가족에게도 오라고 해 본 적이 없는데." 하면서 입술에 십자가를 그으셨습니다. 저는 이상하고 창피스러워서 촛불 봉헌하는데도 맨 뒷 자리에 숨어 있었는데 저를 부르셔서 제일 먼저 촛불 봉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성모님을 배척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려서부터 세뇌교육을 받아왔기에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첫 토요일에 참석하라고 하셨는데 "웃기네, 내가 거기를 왜 또가?" 했던 제가 첫 토요일이 되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가보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가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 그런데 저도 모르게 발길은 나주 성모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기도회가 시작이 되고 1부에서는 가톨릭 기도를 잘 모르니 조금 서먹했지만 2부에 들어가서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저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제가 처음 결혼할 때 남편은 개신교 신학생이었기에 믿음 하나 보고 결혼 했었는데 결혼 후 신학교를 그만두고 7년 동안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3일이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일을 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임상병리과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에게는 병마라는 것이 하나씩 저를 방문하여 떠나지를 않으니 많은 병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위장병이 심해서 식사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입에서 썩는 냄새, 심지어 잠자리에 들어서도 냄새가 나니 남편에게 미안해서 등돌리고 자는 그런 실정이었고 시어머니 옆을 지나가면 "아이고 젊은 것이 어쩔거나?"할 정도였기에 얼굴은 항상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었죠. 또한 관절염이 심해서 높은 신발 한 번 신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 말씀대로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 나서 모두 치유가 되었습니다.
3월 2일 첫토요일, 이날은 제가 잊을 수가 없는 날이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행복이라고는 없었는데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 성모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얼마나 많이 통회의 눈물을 흘렸는지요. 그래서 멀게만 느껴졌던 아니 외면까지 했던 성모님이 제 친엄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모님을 엄마라고 부르게 되었고 드디어 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가 변하자 남편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개종에 대한 건의에 찬성하였고 시어머님 이하 온 가족이 박수로 환영하였습니다.
3월 2일 첫토요일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 3월 3일 드디어 온 식구들이 천주교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천주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보통 일주일에 서너번은 부부싸움을 하여 시어머니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이제는 반대로 미웁던 남편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모님께 기도했지요. "성모님, 저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성모님도 사랑해 주셔요."하고요. 그런데 남편도 치유시켜 주셨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예비자 교리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날이면 언제나 좋은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을 찬양한다든지 가톨릭이 역시 좋다든지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50년 이상 된 위장병도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서 깨끗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또 한가지 그동안 저희와 함께 사는 손아래 동서를 그동안 예뻐하지 않았는데 그 때부터 예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아침에 일어나 단장하고 출근하기 바빴는데 이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동서네 아이 똥기저귀까지 빨아놓고 출근하니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말하기를 "30년이나 교회를 다녔지만 당신은 변하지 않았는데 나주 성모인지 누구인지가 당신을 변화시켜 주었구먼."하기도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징표를 주셨는데 15단 짜리 저의 묵주에서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묵주의 9일 기도를 시작했는데 시간만 나면 묵주기도를 하다보니 전에는 염주로 보이던 묵주가 성모님의 허리끈으로 변했어요. 그리고 성모님께 드리던 성모송이 장미꽃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묵주기도를 더 많이 드려 성모님의 손이 많은 장미송이로 흘러 넘칠만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했더니, 잡념이 없어 좋고, 남편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바가지 긁을 이유가 없어서 좋고, 오히려 늦게 들어오면 기도할 시간이 많아서 좋습니다. "성모님, 우리 남편 당신께 맡겨 드리니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면 남편은 그때마다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도 냉담이 풀렸고 시어머님은 옛날에 마리아란 본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는데 잊었던 성모님을 이제야 찾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정 식구들도 하나씩 천주교회로 나오게 되었고 얼마되지 않는 기간에 20여명을 개종시켰으니 이제까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성모님을 외면하고 배척하였던 잘못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불목했던 우리 가족 모두가 이제 성모님 구원 방주에 들어갔으니 30년 동안 믿었던 개신교, 그리고 그동안 개척교회를 여섯개나 세웠고 교회 살림을 하던 제가 개신교를 굿바이하며 우리 가족 모두가 변화되어 기쁨이 충만함을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1년
광주 조선대학 부속병원 임상병리과
양순희(임마누엘라) T.(062)951-8362

 

 

영신적 내적 치유까지 해주신 성모님 

앤 제이 에이슨(부인)
 

예수님께는 찬미를, 성모님께는 하례를 드립니다. 자매님과 자매님 가족분들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쥬리아! 당신은 참으로 저에게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쥬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저의 병을 완전히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단지 육신의 병 뿐 아니라, 영신적, 내적 치유까지를 해주셨습니다.
나주에 가기 전에는 저는 몸이 시원치 않았고 가슴에 통증이 있어서 혈액 검사 등 여러가지 검사들을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여러가지의 약을 아침 저녁으로 복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혈압은 매우 비정상이었습니다.
심장마비의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저의 맥박은 일분에 53~ 58번 정도 밖에 뛰지 않았고, 이 때문에 가슴에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고, 맥박을 빠르고 강하게 하기 위한 약도 먹었습니다.
저의 콜레스테롤도 정상치의 두 배가 되었으며, 신진대사가 원만하지 않은 탓에 소변의 산성치도 꽤 높았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다른 약들도 복용해야 했습니다. 모두 합쳐서 일곱 가지의 약을 30일간 복용하게 되어 있었으며, 또 혈액 검사도 다시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 약들의 복용을 시작한지 6일째였는데 나주에서 성모님과의 만남 후에 저는 훨씬 몸의 상태가 좋아졌으며 사실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느꼈습니다. 귀국하여 집에서 며칠 쉬고난 후, 저는 혈액검사를 받았는데, 혈압을 비롯하여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습니다.
저는 이 치유와 축복의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찬미드립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성당에서의 활동과 이웃을 통하여 당신을 믿고 사랑하고 봉사하며, 그리고 특히 매일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달게 받을 때, 신비스런 기적의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을 만져 주십니다.
아무쪼록 저와 제 가족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고, 또 우리나라의 치유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요. 저는 쥬리아를 멀지 않아 다시 뵙고자 하는 생각으로 들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주를 다시 방문하고 성모님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자그마한 일을 통해서나마 나주 성모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쥬리아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께 성모님을 통해 쥬리아가 하느님의 사도로서 오래토록 활약하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1992년 9월 25일
필리핀 앙고노 리잘에서 앤 제이 에이슨(부인)
T.503-669-8443

 

 

영혼의 목욕탕인 나주 성모님 

선 아녜스
 

저는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나온 지가 3년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에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어보았고 언젠가 한국에 가면 한 번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날 우리 성당 신자들이 저한테 한국 나주에서 쥴리아씨가 온다고 하면서 가자고 하길래 저는 그 미국 분한테 쥴리아씨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분이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 분은 저에게 나주 성모님과 쥴리아씨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어요.
전 호기심에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갔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날 저녁 저는 쥴리아씨가 노래로 기도하는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단번에 반했어요. 저는 그날 많이 울었답니다.
기도가 끝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만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한테는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차를 타러 나오는 바람에 저희 어머니와 저도 그 분하고 악수를 하게 되었는데 악수한 손에서 장미향기가 많이 났어요. 저는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향기를 맡았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도 향기를 맡았는데 그 후에는 나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던 중 우리 부부는 한국에 나오게 되었어요. 친척이 목포에 살고 있기에 2년 전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제 남편이 나주에 한 번 가보자고 그러길래 나주에 들러 성모님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어요. 성모님 집에 도착했을 때 봉사자 두 분을 만났는데 너무도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분들의 친절함과 따스함 속에서 성모님의 사랑을 느꼈어요.
그 후부터 보통 한 달에 한 번, 요즘은 아주 자주 갑니다. 저는 나주에 가깝게 살고 계시는 분들이 부러워요. 근방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 남편은 한국말을 알아 듣지 못해요. 그런데도 시간만 나면 나주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제가 "말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무엇하러 나주에 가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한답니다. 그러한 남편을 볼 때면 제 자신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한 1년 전 제 남편이 어깨 위 목 근방 뼈가 이상이 있었는지 항상 아파서 어떤 때는 목을 제대로 들지 못했어요. 그날도 철야기도가 끝나고 방에서 누워 쉬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양손을 어깨에 대고 아주 천천히 뼈를 맞추는 느낌이 들었대요. 아주 정확하게 양손으로 뼈를 맞추고 있는 듯 하였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얼마 후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대요.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아무 이상이 없고 아픔도 없어졌더래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쥴리아씨가 이런 말씀을 하시죠. "이곳 성모님 집은 우리 영혼의 목욕탕입니다."라고 말이예요. 정말 그래요. 성모님 집에 다녀오면 마음이 가볍고 기쁨 속에 살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너무도 많은 은총 속에 살고 있으니 가끔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할 때가 있어요.
저는 항상 예수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주 성모님께서는 저희들을 항상 불러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시고 계시는 성모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성모님 메시지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

 

Sun. D. Dusik T.(02) 789-9271
PSc 303 Box44
APO AP 96204-0044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김만복(율리오)

 필리핀에서 4박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한국 순례단과 멀씨등 필리핀 순례단) 오제리 신부님의 인솔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루르드, 로마 등 산재되어 있는 성지 순례를 위하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 일행은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공생활하셨던 여러 곳들을 순례하였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예루살렘, 자라시면서 성모님과 요셉성인과 성가정을 이루시던 나자렛, 제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시며 공생활을 하셨던 갈릴리 호수 등등. 너무 소중하고 성경 구절구절들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지만 여기에 그곳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적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돌 하나 풀 한포기도 소중하게 여겨지고 발자취가 살아 숨쉬는 듯하여 예수님과 성모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는 의식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에 의하여 첫 번째 기적인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가나안 혼인잔치를 기념하여 세운 성당에서 율리아와 혼인 갱신식을 했던 일은 일생을 두고 못잊을 일이다. 율리아와 함께 하는 성지 순례는 가는 곳마다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겼다. 공항대합실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성지에서도, 성당에서도, 식당에서도, 율리아가 있는 곳에서는 누군가가 알아보고 기도 부탁, 싸인공세, 포옹, 장미향기, 때로는 많은 치유의 은혜로 순례객 모두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어디에서도 쉴 수 없는 아내의 피곤한 모습을 볼 때 남편으로서 안타깝기만 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해야 하는 우리이기에 도구로 사용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자 한다.

우리 신앙인들 중에는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진복자도 많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믿음이 부족하고 세속과 타협하면서도 머뭇거리고 눈치보고 무언가 강한 느낌을 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주님의 현존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신해 주는 너무나도 큰 사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는 곳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고 편태를 당하시고 자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갖은 모욕을 당하시고 기진하여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직접 내어주신 곳이다. 각처를 지나는 동안 3명씩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고루 아픈 몸을 이끌고 양 쪽에서 부축을 받던 율리아가 십자가를 3처부터 혼자서 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때 수많은 군중이 환호를 하였는데 또 그들은 며칠이 지나자 죽일 죄인이라며 십자가에 못박으라 했고 3번이나 부인했던 가장 가까운 제자 베드로와 배신자 유다스를 생각하며 수많은 편태와 모욕과 모독을 한몸에 지닌 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예수님,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성을 지니셨기에 아픔을 겪어야 했던 예수님과 그것을 보고 계신 성모님의 아픈 마음의 고통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고통을 묵상하며 십자가를 지고 걷기 시작하였다. 이 때 율리아의 상태는 옆에서 부축을 해주어야 될 상태였다. 그러나 율리아는 혼자서 지고 가기를 원했다. 조금이라도 더 힘든 고통을 봉헌하기 위해서다. 3처, 4처, 5처를 지나는 동안 율리아의 땀과 눈물과 통곡이 이어지는 가운데 6처에 이르렀다. 성녀 베로니카가 피땀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렸던 곳이다.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기도하는 동안 율리아의 얼굴에서 땀과 눈물이 너무 많이 흐르므로 옆에 있던 필리핀 자매가 화장지 (티슈)를 주어서 율리아가 얼굴을 닦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붉은 피가 묻어 나오지 않는가? 이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와하며 통곡과 기도소리가 더 높아갔다. 그 때 율리아가 나에게 얼굴을 돌리며 얼굴에 피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율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마에 약간 붉음을 느꼈지만 아무런 상처도, 피 몇방울도 맺히지 않았고 그냥 땀방울과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다시 하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니 그 손수건에서도 피가 묻어 나왔다. "주여, 내 탓입니다.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 저희들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통곡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우리 모두의 얼굴에도 땀과 눈물이 비오듯 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하셨던 현장의 모습을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지금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끊임없이 피흘려 주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율리아는 7처 이후에도 계속 십자가를 지고 갔다. 13처 14처는 성당 안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곳에서 우리의 한없는 눈물은 계속 되었다.

주여! 우리의 약한 믿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의 순례길은 프랑스 루르드를 거쳐 이태리 로마로 향하였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수많은 자녀들을 보시며 율리아를 통하여 메시지를 주셨는데 "수많은 자녀들이 찾아 오지만 나의 호소를 기억하는 자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호소하셨고 로마에서도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예수님께서 메시지를 주셨다.

이탈리아에 있는 란치아노 성당은 로마에서 버스로 3시간 30분 소요되는 곳에 있는 조그마한 고장의 성당인데 이곳이 1천 3백년전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곳이다. 당시 본당 신부님께서는 성체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린 후 미사를 드릴 때 성체 거양시 성체성혈의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 성체와 성혈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당시에 많은 조사와 검사를 했는데 축성된 성체는 사람의 살 심장으로 변했고 포도주는 사람의 피로 변한 것이 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친구하며 기도 드린 후 오제리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를 드렸다. 정성스럽고 엄숙한 미사가 진행되었다. 성체를 영할 때 율리아와 나는 앞자리에 있었기에 먼저 영성체를 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나는 오늘 율리아가 받아 모신 성체에서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으나 성체를 모시고 나서도 한참이 지났지만 조용하기에 오늘은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묵상 중에 있을 때 율리아가 나를 찔벅이며 입을 벌려 보였다. 순간 이게 웬일인가? 혀 가운데 약간 딱딱해 보이는 살덩이 같은 것이 있었고 혀와 볼안 사이에 피가 고여 있지 않은가? 나는 통곡하기 시작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었으며 성당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오제리 신부님도 확인하셨고 그 본당 수사 신부님도 그 모습을 보시고 확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몸을 우리에게 먹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몸소 음식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까? 우리 죄인들이 어찌 감히 당신 살과 피를 받아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서는 자비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내놓으시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 하시려고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그 예식을 행하라고 계약을 맺어 주시면서 성체 성사를 세우시고 실제로는 당신의 사랑하는 대리자인 사제를 통해 미사 중에 밀떡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하게 하시어 우리에게 오시고 계심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을 모시는 영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시다니 주여, 찬미 찬양 받으소서. 영원 무궁토록 받으소서.

미사가 끝난 뒤 율리아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내용과 빛이 비춰졌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성체를 삼켰는데 조금 남았던 성체가 부풀기 시작하면서 딱딱하게 변하고 피비린내가 나 옆에 있던 나에게 알려 주었고 상당기간 (5분 정도) 그대로 있었는데 나는 그 순간 이 성체를 보관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으나 오제리 신부님께서 율리아에게 모시기를 권하였으므로 율리아는 성체를 모셨는데 처음 딱딱하던 것이 말랑말랑 해지며 스르르 녹아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성체 거양시 신부님 뒷쪽에서 빛이 비치더니 그 빛이 율리아에게 다음은 우리 모두에게도 비추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자료가 전시된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 진열된 그림 중에 1천 3백년전 신부님이 성체기적이 일어날 당시 예수님의 늑방에서 빛이 나와 그때 신부님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는 그림을 보고 율리아는 오늘 미사 때 본 모습과 빛의 강도는 그림이 조금 작았지만 똑같았다고 말하였다. 오늘 율리아도 미사 중에 늑방의 통증을 심히 느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였다.

율리아를 통해 보여준 성체의 변화는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3번째가 된다. 처음은 91. 5. 16 오제리 신부님께서 나주에 방문하셔서 나주 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실 때이고 2번째는 이번 성지순례 중 숙소에서 역시 오제리 신부님 미사집전 때이다. 그러나 오늘이 가장 확실하고 진한 것 같았다. 당시 사진과 비디오에 기록된 것이 있으니 언젠가는 공개될 일이다. 나는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많은 체험과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우시는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계신 성모님을 체험하고 있지만 더 많고 더 큰 것을 나는 보고 체험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마음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율리아에게 장부로서 더욱 깊은 사랑을 느끼며 율리아가 받고 있는 고통을 덜어주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때로는 인간적인 고뇌로 그 많은 고통에 어려움도 있지만 성모님께 잘 봉헌하고 오직 성모 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을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 보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묵상해 볼 때 "내가 너희 안에 생활하고 싶으나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들어가 생활할 수가 없노라."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 안타까울 뿐이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과 공생활 3년 하셨던 갈릴래아, 예수님의 발길이 닿았던 이스라엘, 이 곳이야말로 축복된 땅이며 거룩한 땅이기에 전세계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아 속상해 하셨다는 말을 듣고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을 실감했으며 나주 성모님을 생각할때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런 상황에는 동질성을 느낀다. 우리의 성지순례는 교황청에서 교황님께 나주 성모님과 비슷하게 만든 성모님상과 눈물과 피눈물 사진 그리고 메시지 책자를 전해 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비록 부족한 이 글이 그때의 상황과 내 마음을 다 전하지는 못했다고 생각되지만 혼란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무딘 신앙 생활속에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신앙에 대한 믿음에 확신과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끝으로 율리아는 가정에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아내요. 네 아이들의 어머니요. 집안의 맏며느리이며 가장 평범한 평신도이다. 다만 자비하신 예수님과 사랑이 많으신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죽음에서 살려내셨으니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 지소서."하신 성모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며, 그러나 부족하기에 숨어 살기를 바라는 자신이 드러나게 되어 많이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인 나도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라도 율리아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하느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부끄러움 밖에 드릴 것이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율리아가 가장 평범한 평신도 중의 한사람임을 알고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고 오로지 이 모든 영광을 주님 홀로 받으시기 바라며 이만 끝을 맺는다. 아멘.

 

1993년 6월 20일
나주시 교동 107-29
김만복(율리오)

 

 

오! 세상에 하늘에서 성체가 내려오다니! 

김영화(루피나)

저는 나주 천주교회 신자인 김영화 루피나입니다.
본당에서 레지오 주회가 끝난 후에 성모님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둘러 성모님 집으로 왔으며, 집 안으로 들어 갔는데, 은근한 장미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으며 모두 모여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과 신자들이 70여명이 모여 있었는데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그 때 저는 조심스럽게 성모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조용히 저에게 귀뜸해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성체를 율리아 자매님이 손으로 받아서 교황대사님과 파신부님께 드렸고 그 성체를 그곳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쪼개어서 나누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조금 늦게 왔기에 성체를 모시지 못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은 한 손으로는 교황대사님의 손을 잡고 있었고 또 한 손으로는 파신부님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어 성모님 제대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계시는 세 분 곁으로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잠시 후 율리아 자매님이 갑자기 무릎을 펴면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하였습니다. 율리아 자매는 입을 벌렸고 그순간 율리아 자매님의 혀 위에 하얀 성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때에 율리아 자매님 손을 잡고 계시던 교황 대사님이 율리아 자매님 혀 위의 하얀 성체를 손으로 꺼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황 대사님은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잠깐 동안 들고 계시다가 파신부님의 성합에 넣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이 죄인에게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성체 안에 주님이 참으로 계심을 더욱 믿게 되었으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죄 많은 저를 이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그 감동은 영원히 저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모령성체 하는 줄도 모르고 모령성체를 많이 해왔던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으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모령성체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제 마음안에 있는 독을 골라내고 모든 잡초를 캐내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여 주님을 모시는 감실이 되어 이웃을 사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성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영원히 찬미 받으시며 흠숭 받으소서. 아멘!

 

1994년 11월 24일
나주시 금계동 103번지
김영화(루피나) T.(0613)32-2883

 

 

용서되지 않던 아내가 성모님의 사랑으로
용서가 되었습니다. 

김만일(프라친스꼬)

찬미 예수
저는 부산 오륙도 본당 김만일 프라치스꼬라고 합니다. 좋은 아내를 맞아 기뻐 예수님 대하듯 조심스러이 잘 했으나 어느 순간 돈이 최고라는 마음이 들자 아내가 원망이 되고 다시 장가도 못 간다고 아내탓으로만 돌렸습니다. 지나가는 여자란 여자는 다 예뻐 보이고 더 좋아 보이고 돈을 벌기 위해 농장만 더 크게 짓고 하다보니 결혼하면서 잘하던 기도도 안하고 부산에서 양계장을 했는데 일만 크게 벌려 놓고 못하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 사고까지 당해 뇌진탕으로 입원하게 되어 열흘을 의식불명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부인이 옆에 있어도 편치 않아 친정으로 가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같이 한의사를 찾아가 얘기를 하는데 한 번도 말을 않던 아내가 그동안 참았던 남편 욕을 있는 대로 퍼붓는 것이 아닙니까. 한의사가 마음의 병치유가 더 중요하니 사업은 그만두고 아내를 치유하라고 했을때 '웃기지 마라'하고 말하고 싶었는데 병원 문을 나서자 그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아내가 없으면 모든게 그만이고 애들도 셋이나 있는데 어찌하나해서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사업 일은 다 그만두고 꽃동네, 평화의 마을, 작은 예수회를 찾아다니며 하느님께 기도했으나 아내가 용서가 되지 않고 애들만 걱정이 되어 그 영혼들을 위해서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주에 와서 눈물 흘리고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께 애들을 봐서라도 우리 두 사람 화해하게 해 주십사 하고 울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화해했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저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없었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도 주님께만 매달렸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부르시어 깨닫게 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드립니다.

 

1993년 9월 5일
부산 오륙도 본당 김만일(프라친스꼬)

 

 

이날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토마스 페라이라

다음은 미국 하와이 호놀롤루 시에 있는 성 미카엘 대천사의 성모님 센터 책임자인 토마스 페라이라씨께서 보내 주신 증언을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1957년 9월 19일에 홍콩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포르투갈계 싱가포르인이었으며,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19세가 되던 해에, 저는 홍콩의 매괴의 성당 문을 나오면서 성교회를 위하여 일하라는 첫 번째의 부르심을 제 마음 속에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살레시오회 선교사들과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던 탓에 또 다시 가톨릭적인 분위기 속에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제가 31세 되던 해, 메쥬고리에를 방문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성모님 발현들에 관심이 있었기 대문에 사실을 캐보고 싶은 심정에서 그리고 기도도 할 겸 해서 그곳에 갔던 것입니다.
성 제임스 성당을 향해서 들판 길을 걷고 있을 때, 저는 두번째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즉, 하와이로 가서 성모님 센터를 세워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르심에 따르겠다고 약속을 하고 하와이로 가기는 했으나, 사업이 너무 바빠서 더 이상의 실천을 하지 않았습니다.
1993년 10월에 저는 성당을 나오면서 세 번째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즉, 천주교회를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진행을 할지 몰랐으나, 제 사업에 쓰고 있던 창고 하나를 꾸며서 성 미카엘 대천사의 성모님 센터라고 이름지은 가톨릭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이 센터를 통하여 교회 책자들도 전파하고 또 일요일에는 텔레비젼으로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센터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은 하와이에서의 첫 번째 성모님 대회를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대회 준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저는 왜 갑자기 제가 이렇게 시간과 재원을 센터에 투입하고 있는지를 잘 몰랐으며, 아무쪼록 저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했습니다.
센터를 세운 뒤, 저는 포르투갈로 가서 27년 전에 저에게 영세를 주신 신부님과 재회를 했습니다. 성모님의 몽소 승천 축일이었습니다. 저의 영세 때, 살레시오회 선교사들이 성모님을 저의 대모님으로 정해 주셨더랬습니다.
하와이의 첫 번째 성모님 대회는 1994년 10월 28일에서 30일까지 열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한국 나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오래곤 주의 성모님 센터에 있는 이 분도씨를 통해서 조금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계획하지도 않았으나, 율리아씨를 대회에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율리아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10월 29일이었습니다.
율리아씨는 제가 일하고 있던 대회장 부근의 서점으로 와서 "천주님께서 당신에게 강복하시기를."하고 영어로 제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미소로 응답했으며, 갑자기 제 마음 속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율리아씨가 떠난 후에도 서점에서는 장미향기가 많이 났으며, 저는 매우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심도 많고 철저히 짚고 넘어가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저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시며, 선견자들은 아니라고 저 자신에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서점에서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대회장에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10월 30일 오후 3시 30분경 같이 일하던 이들 모두가 율리아씨의 증언을 듣기 위해 대회장으로 가버렸습니다. 저는 혼자 남아서, 율리아씨의 증언을 못듣는 것이 슬펐으나, 주님께 희생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묵주신공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장미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회장은 약 300m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서점으로 돌아온 어떤 자매님에게 향기가 나느냐고 물었더니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들었는데, 그 날 대회장에 있던 거의 모든 이가 그 옥외 대회장에서 향기를 맡았다고 합니다.
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 저는 율리아씨가 모셔 온 성모님 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율리아씨가 그 성모님상을 건네 주시던 순간, 저는 이 성모님 상을 많은 본당들과 환자들에게 모시고 가라는 부르심을 제 마음속에 느꼈습니다.
또 그때 저희 주변 강단 전체에 강한 장미향기가 진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대회 준비와 진행으로 과로상태에 있었고, 저의 심장도 쇠약해져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상을 보는 순간 피로감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다음날 저를 진찰한 의사는 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저의 콜레스테롤 수치도 지난 10년간 230정도에 머물러 있던 것이 170으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회 다음 날인 10월 31일 월요일에 수많은 이들이 전화를 걸어왔으며, 율리아씨께서 하와이에 와 주신데 대해, 그리고 증언을 해주신데 대해 지극한 감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저는 성모님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데 대해, 그리고 율리아씨가 오실 수 있게 해주신데 대해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리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전화는 계속해서 센터로 오고 있었으며, 저는 대회 참석자들에게 율리아씨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셨는가에 대한 감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11월 2일 오전 6시경이었습니다. 이날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율리아씨를 찾아 나서기 보다는, 저는 성 아오스딩 성당에 기도 드리러 갔습니다. 저는 천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감사를 드려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저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제가 거부해 왔던, 당신의 교회에 봉사하라는 당신의 부르심의 그 엄청난 큰 힘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저는 복되신 성체 성사 안에 계신 당신 앞에 부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율리아씨가 떠나기 전에 다시 뵙고 싶은 저의 희망을 주님께서는 아시나이다. 그러나 저는 감실 안에 계신 당신과 함께 있기를 더 원하나이다. 제가 율리아씨와 다시 만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렇게 해 주실 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제 저는 당신을 믿고 당신의 기적을 믿고 당신의 복되신 어머님의 발현을 믿기 위해 과학적인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저에게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침 6시 30분 미사에 참석했으며, 다시 율리아씨가 모셔다 주신 성모님 상이 있는 성 미카엘 센터에 돌아왔습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업무를 보던 중 오전 10시 45분에서 11시 사이에 저는 두 번 회의를 중단시켰습니다. 장미향기가 나는 것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곧 저는 대회에 참석하였던 마르틴 루치아 신부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루치아 신부님은 세계적으로 성체 신심을 전파하는 분입니다. 성 안토니오 성당 내의 소성당에서 미사가 있었으며, 율리아씨, 율리오씨, 저, 그리고 몇 분 해서 모두 8명이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영성체 시간에 루치아 신부님께서는 성체를 성혈에 담갔다가 율리아씨에게 영하여 주셨습니다. 2분이 지나자, 율리오씨는 신부님께 손짓을 하면서 입안을 보아주기를 청하셨습니다. 율리아씨의 혀 위에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하여 계셨습니다. 이를 목격한 참석자들은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믿었습니다.
율리오씨는 사진과 비디오에 이 광경을 담았습니다.
성체 기적이 있은 후, 율리아씨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루치아 신부님께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상이 기쁘게 웃으시는 것을 미사 참석자들이 분명히 보았습니다.

 

1995년 1월 5일
호놀룰루, 하와이 토마스 페라이라

덧붙이는 말:
위의 글을 보내준 하와이의 토마스 페라이라씨는 30대 후반의 사업가인데 1994년도에 성모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와이 섬의 호놀룰루에 성 미카엘 대천사의 성모님 센터를 설립하여 나주 성모님 소식을 전미국에 컴퓨터망과 팩스, 그리고 출판물들을 통하여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괌, 피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태평양 지역들과 미국 본토의 여러 지역들을 나주 성모님 상을 모시고 다니면서, 메시지를 전파하고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을 강조하며,
사제님들을 존경하고 사제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며, 성교회를 사랑하고 순명하고 충실하라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기쁨을 표시하시기 위하여 토마스씨가 가는 거의 모든 모임마다 강한 장미향기를 채워 주신다고 합니다.
모임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나주 성모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며, 고해성사를 보는 이들도 많고, 성처난 가정에 평화를 되찾는 이들도 많으며,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돌아오는 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토마스씨는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굶주리고 있었다는데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토마스씨의 누님인 파티마씨는 일본 오사까에 살고 있는데 이 분도 성모님센터를 설립하여 나주 성모님 소식을 전하겠다고 한답니다.
누가 시켜서나 부탁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과 성모님께의 사랑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전 삶을 바치기로 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토마스씨는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인데도, 협력자들과 함께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며 일을 하는 일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외국의 교우들도 발 벗고 나서서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을 바치고 있으니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이분도 올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지요" 

한태희(스텔라)

저는 개신교 신자였던 한태희(스텔라)입니다.
1966년 조국인 한국을 떠나 지금은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필리핀인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게 된 것은 성모님께서 저희들의 만남을 마련해 주셨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큰 아들 '튜크'의 고등학교 동창인 '제이제이'의 어머니(로리타고르타)께서 1992년 2월 7일 저녁에 전화를 주셨지요.
'내일 토요일 아침에 한국의 율리아라는 자매님이 오시는데 통역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닐라에서 20년을 살다보니 이나라 말도 하고 영어도 할 수 있어서 가끔 통역을 하기도 하지요. 저는 율리아 자매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나 아들의 친한 친구의 어머니의 청이라 응했지요. 토요일 아침에 저를 데리러 온다고 해서 저의 가게로 나가 기다리고 있는데 주최측에서 통역을 구했기 때문에 수고를 안해도 좋겠다는 전화 연락이 왔었습니다. 하지만 같이가고 싶으면 데리러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일행들은 몸이 거구들이라 차는 비좁았으나 저는 끼어서 탔습니다. 율리아씨를 만나뵙기 전이었지만 주최측에서 구했다는 통역자는 저의 근무처인 여행사에서 고참으로 계시는 정지화(마리아)라는 분이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방에서 나오셨고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이분들은 한국 나주 성모님 집에 성지 순례하셨던 분들로 율리아 자매님에 대한 첫 인상은 굉장히 유하시고 밝았으며 항상 아름다운 미소로 대하시며 그 미소가 꽃처럼 피는 듯 하였습니다. 저는 인사를 했습니다. 자매님은 저의 손을 잡으시며 옆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주최측에서는 그 분 옆에는 다른 분들을 앉도록 했으나 저는 그것도 모르는 채 그냥 그 자리에 앉고 말았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리빠라는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2시간 가는 도시로 42년전 성모님께서 장미꽃잎을 하늘에서 내려주셨던 기적의 성당으로 간다고 동승한 여자 로리가 귀뜸해 주었습니다.
그 곳은 율리아 자매님이 맨 처음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할 장소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사에 가는 차를 로리여사와 함께 타려는데 한국 분이 제 손을 끌면서 율리아 자매님이 계신 차를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지화(마리아) 자매님도 권하셨습니다. 그 분은 통역에 도움을 얻기 위해 성모님의 메시지 테이프를 가는 동안에 들어볼 예정이라면서 다른 차를 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율리아 자매님의 바로 옆에 앉게 되었지요.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라고 말씀 하셨을 때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몸이 움츠러들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금 후 저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지요. '우연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시며 '그럼요.'라고 응답하셨기에 저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일행들은 신부님께서 기도하자고 하셔서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저는 가톨릭식으로 하는 기도는 처음이었기에 잘 모르지만 그냥 따라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개신교 신자였으니까요.
그러나 제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아름다운 느낌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며 무척 고민을 하다가 "그럼 저는 천주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한 뒤 두시간이 걸려서 <리빠>시까지 오는 동안에 저는 율리아씨와 그의 일행들과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리빠>시에 도착했을때는 성당이 인산인해였습니다.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고 여기 계시는 성모님은 장미꽃잎을 1948년에 테레싱이라는 수녀에게 보여 주셨다고 하는데 그 일 때문에 그 수녀는 그 수녀원을 쫓겨 나왔고 42년 후인 1991년에 장미꽃잎이 다시 떨어졌고 1992년 2월 14일 율리아 자매님이 마닐라를 떠날 때도 테레싱 자매님의 집 문앞에 꽃잎이 100여개나 떨어져 있었답니다.
<리빠>에서 메시지 전달이 끝난 후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시는 신추기경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초청하는 자리에 우리 일행이 함께 동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율리아 자매님이 저를 자매님의 통역자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말과 천주교로 개종하겠다는 말을 들려 주었을 때 그 즉시 신추기경님께서 세례, 견진뿐 아니라, 혼인성사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도 얼떨떨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저는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저한테 이러한 행운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제 나이 50이 되어서 새로 태어난 아이 같았으니까요! 제 마음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또, 신추기경님께서 저희 부부를 위해 수요일 오후 4시에 추기경관저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올려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기쁨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세상 사람들에게 막 소리쳐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정말로 제 마음을 다 털어 놓고 제가 얼마나 행운녀라는 걸 자랑하고 싶고 또 자주 자랑해도 싫증이 안날 것 같이 느껴지고 있었어요.
먼저 성모님께 감사드리면서 성모님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20년동안을 성모님께서 저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저는 모르고 있었어요. 이 사실을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혼배성사를 올리기 전날에도 밤 늦게 메시지 전달이 끝나고 나서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율리아 자매님을 에워싸고 놔주지 않아 밤1시 경에야 겨우 집에 돌아왔습니다. 5일째 쉴사이 없이 오전, 오후 성당에서 메시지 전달이 있었는데 그외 잠깐의 휴식시간은 라디오 생방송, TV방송 인터뷰, 신문사 인터뷰, 잡지사 인터뷰가 있었기에 너무나 피곤하여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 3시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등에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이제까지 지은 죄가 다 보이는 듯 했습니다.
고려대 영문과를 나와서 남 못할 일 시킨적도 없고 십계명 거스린 일 없이 살아 오면서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살아왔기에 제 잘못은 하나도 바라볼 수 없었으며 제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못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여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과 신앙체험을 통하여 어두웠던 제 눈이 뜨이게 되고 귀가 뚫려 가슴에 받아들이게 되니 모든 것이 제 탓이었습니다. 저는 눈물로 통회하며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빌었습니다.
어찌나 울면서 통곡을 했던지 목이 다 쉬었습니다. 저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동안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했으니 연옥으로 내려가 불에 타지 않으면 저는 천국에 못간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통곡하며 울고 있는 저에게 혼배성사를 하는 좋은 날에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제 죄를 빌어야 했습니다.
남편에게 용서를 청했고, 또 그동안 큰아들 듀크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상처준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그 아이 잘못만 생각하고 그 아이만 나무라고 야단쳤는데 엄마의 잘못을 세 번이나 청하며 오랫만에, 아주 오랫만에 불일치로 인하여 서로 등돌렸던 아들과 엄마가 부등켜 안고 울면서 새로운 부활안에서의 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세속적인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했지만 하느님 안에서 혼배성사를 주시기 위하여 그동안 더러워진 영혼, 육신을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하여 회개의 은총안에서 모든 이와 화해하면서 혼배성사를 주신 이 은총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요.
저희들의 혼배성사가 끝나고 축하식을 신추기경님께서 해주셨는데 메시지 전달이 오후에 있었기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고 우리 일행은 메시지 전달이 있는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날은 통역을 하는데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이었지요. 율리아 자매님의 메시지와 영가를 통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큰소리로 많은 이들의 통곡소리까지 들렸습니다.
그 날, 저의 남편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많은 치유를 받게 되었는데 교통사고로 인하여 다친 다리가 많이 아파 고통스럽던 중 모든 치유가 다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제가 임신한 지 3개월만에 구렁창에 넘어졌는데, 넘어질 때 태아의 왼쪽 폐와 심장을 다쳤을 때 왼손이 눌러져 아이가 성장하면서도 왼손은 아주 작고 또 가슴이 움푹 들어갔는데 심장은 커지니 호흡까지 곤란해졌습니다. 14세 되던 해에 병원에 가서 진찰해보니 갈비뼈가 속으로 휘어서 숨을 못쉬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의사들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듣고 또 율리아 자매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서 숨쉬기도 편하고 또 움푹 들어간 왼쪽 가슴도 많이 나와서 아들은 너무 기뻐하였습니다. 제가 그동안 개신교에 다니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제 인생과 제 가족의 인생이 180도로 전환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은총을 저에게 주신 예수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라는 자매님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기쁨에 넘쳐 있을때 저의 가족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많은 분들이 축제기분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또는 육적으로 많은 분들이 치유를 받고 감격하여 전화로 또는 만나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성체 신심, 성모 신심이 돈독해졌다고 좋아하셨으며 어떤 신부님은 불치병인 암이 치유되었고 많은 신자들도 불치의 병들, 즉 피암, 피부암, 자궁암, 신장파열, 자궁종양, 직장암, 당뇨, 고혈압 등등 조그만 병치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눈 먼 맹인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아이 못 낳는 사람이 아이를 낳게 되니 이것은 바로 인간 율리아 자매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이 모든 일이 놀랍기만 하여 이 글을 씁니다.
주, 성모님, 영원 무궁토록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필리핀에서
한태희(스텔라) T.001-632-911-2077

 

 

육십 평생 그렇게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박순자(마리아)

찬미 예수, 마리아
죄많은 이 영혼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시며 은총과 환희와 즐거움을 가져다 주신 성모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제 체험담을 봉헌합니다.
이 체험담이 많은 영혼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되게 함으로써 제가 과거에 나주 성모님을 불신하고 믿지 않았던 저의 죄를 속죄키 위함입니다.
제가 보고 느끼고 체험했던 모든 일들을 이 지면상에 다 기록하기란 불가능하기에 중요한 몇 가지라도 적고자 합니다.
저는 1994년 9월 3일 나주 성모님 집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나주 성모님 동고상에서 피눈물을 흘리신다는 말은 몇년 전부터 지면과 교우들을 통해서 알았습니다만 믿지를 않았습니다. 마귀 장난일지도 모르는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착실하게 살면서 신자 본분 다하고 열심히 매일 미사 참례하여 성체 영하고 성당 일에 충실하면 되는 거지....지금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는 교만과 오만이었습니다.
제가 여기 온 동기는 성령 기도회의 한 자매 분이 유방암, 골수암 고통 중에 나주 성모님 집에 다니고 부터 치유되었고, 나주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면서 수차 가자고 권했으나 저는 듣지 않았습니다만 권면에 못이겨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대구에서 광주 고속버스로 성모님 집에 들어서니, 장미향기가 나기에 장식해 놓은 장미꽃에서 나려니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 석고상에서 순간 순간 짙은 장미향기가 나옴을 알았습니다. 기도회는 오후 9시부터 1, 2, 3부로 나누어 철야기도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경당안에 꽉 차 발들여 놓을 틈도 없이 되어 속으로 이 많은 사람이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서 올까? 좀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1부 기도 중에 성모님 집과 옆 지붕에 세찬 소나기와 우박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요란스럽게 들려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인가? 하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틀림없이 조금 전만 해도 맑은 날씨였는데... .
1부 기도회가 끝나고 쉬는 시간, 23시 40분-0시 30분간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세찬 소나기와 우박이 떨어졌는데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별들이 총총 떠 있어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 되어 옆 자매들에게 물어 봤더니 못 들었다는데 제 귀에만 들렸던 것입니다.
2부 시간, 율리아 자매님이 나오셨는데 첫 말씀이 오늘 저녁 이곳에 성령이 우박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 말씀하시면서 여기모인 사람 중에서 이 우박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아!, 인자하시고 사랑 깊으신 어머님께서 당신을 부인한 저에게 성령이 내리는 소리를 듣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 저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볼 위에 흘러 내렸습니다. 그 많은 눈물이 어디에 고였다가 나오는지 내 육십 평생 그렇게 울어 보기는 처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인 통회의 눈물인가 봅니다.
나주에서 우시는 성모님, 오기선 신부님과 율리아 자매님의 대담, 20세기 성모님 발현, 성모님의 메시지 테이프 7개를 구입해 가지고 와서 그날 나주 성모님 우시는 비디오를 보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우리 인류의 죄 때문에, 아니 바로 내 죄로 인하여 고통 당하시는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 저는 생각하기를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던 사울(바오로),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 다마스커스에서 그리스도교인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 올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사울이 개종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처럼 저도 나주 성모님 마음을 상해 드렸음을 속죄하는 마음에서 결심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앞장서서 전파하리라고...."
그 다음날 토요일, 자매님과 둘이서 관광버스 3대 (119명)을 인솔해 왔습니다. 그 뒤로도 2번 1대씩 동원을 해 왔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반대하시는데 거역하는 것도 순명 차원에서 어긋난 행위일 것 같아서 방향을 돌려 우리 교우들이 직접 나주에 갈 수는 없지만 형제, 자매에게 비디오, 메시지 책, 테이프를 신부님 몰래 빌려주고 집에 데려와서 보여 주었습니다. 통회, 회개, 기도와 보속으로 천주 성부의 의노를 풀어 드리는데 동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핵심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비디오의 기적)

1994년 11월 12일
안산 큰딸 집에서 피눈물 흘리시는 비디오를 보면서 낳은지 7개월 된 손자(안드레아)가 태열로 온몸에 빨갛게 좁쌀만한 것이 솟아 가려워 칭얼거리는 아이를 제가 안고 재우면서 성모님께 간구했습니다 '성모님, 당신의 징표를 보여주세요. 치유시켜 주세요.' 하는 순간 잠자던 아이가 고개를 휙 돌려 비디오 화면을 뚫어지게 보더니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비디오에서 장미향기가 진동하여 온 가족이 감탄하였습니다. 태열이 사그라지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에 보니 태열은 감쪽같이 없어지고 오히려 그전보다 더 곱고 부드러운 살갗으로 변했습니다.

1995년 4월 11일
태열로 고생하던 손자의 돐이 되어 안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딸이 "어머님, 어머님 기도는 잘 들어주시니 아녜스 (국민학교 3학년)를 비디오 보면서 기도 좀 해 주세요.", 저는 "내 기도로써 낫는 것이 아니라 믿음만 있으면 성모님께서 치유시켜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손녀가 비염으로 손수건과 휴지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코를 푸는데, 비디오를 보면서 아이의 등에 제 손을 대고 기도하면서 '당신이 여기 현존하여 계신다는 징표를 보여주세요.'하는 순간 고약한 탄 냄새가 진동하며 코와 목이 아파 목이 착 가라앉아 말을 할 수가 없어 손짓으로 코를 가리키면서 냄새가 나지 않고 (모기 만한 소리로) "코와 목이 아파요"하더니 비디오 본 이후로 치유되어 아직까지 손수건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안드레아 돐 때, 목사님, 권사님 두 분, 집안 친척, 대학동 천주교 교우들이 함께 비디오를 볼 때 '다 같은 그리스도의 신자면서 종파가 달라 당신을 존중과 사랑하지 않고 부인하는 저분들에게 천주의 모친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끔 당신의 증표를 보여주세요.'라고 마음 속으로 간구했습니다. 그때 성모님 집에서 보다 더 진하게 풍기는 장미향기를 맡고 모두가 신기하다면서 감탄을 하셨습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제 입을 통해서 말씀했으리라 믿습니다. 목사님과 집사님, 권사님도 나주 피눈물 흘리는 10주년 기념행사 때 꼭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산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는 대학동 성당 교우 집에서 교우의 집을 돌면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낙태한 사람에게는 피비린내로써 죄를 뉘우치고 통회하게끔 하고, 많은 냉담자들이 교회로 나와 고해성사를 보고, 열심해지고, 불화한 가정은 성가정으로 성화되고 있습니다. 비디오를 통해서도 당신 메시지가 사실임을 증명하는데 각 교구장님이나 본당 신부님께서 저 같이 고집 부리지 마시고, 단 한 번이라도 나주에 가셔서 보시고 판단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율리아 자매는 옷과 손수건에 장미향수를 뿌리고 다닌다."은 무고한 말들을 할때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율리아 자매님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라 신부님, 수녀님이 성모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릇된 판단을 하여 죄짓게 되는 것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저는 시간만 있으면 나주에 갑니다. 자매님의 무수한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죄, 악행, 병고가 치유됨을 보았기 때문에, 제가 나주에 가는 것은 기적을 보려고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나주를 다님으로 해서 영적 눈이 뜨이고, 생활의 변화가 있기에 더 열심히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그리스도와 성모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길을 따르기 위하여서입니다. 나주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께 감사하면서 메시지 말씀대로 살렵니다.

 

1995년 6월 8일
경북 경산 옥산 청구타운 102동 807호
1936. 4. 6일생 박순자(마리아)

 

 

음식물은 물론 물도 삼키지 못하였는데... 

윤정아(카타리나)
 

저는 부천 삼정동 본당에 다니고 있는 윤 카타리나입니다.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제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여 저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많은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의 고통은 1993년 5월 큰 딸아이를 제왕절개로 낳고, 1994년 7월 작은 딸을 또한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해 12월 맹장수술까지 하였습니다.
1년 사이에 3차례의 수술을 받고 1996년 3월 4일 병원에 입원하여 3월 25일 자궁절개 수술을 받고 4월 1일 퇴원했습니다. 저의 병명은 '골관염 울출혈'로 영기암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수술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 계속되는 이 시련을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심한 우울증까지 겹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불면증까지 겹쳐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약 양도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심장약, 수면제, 진정제, 빈혈약, 항생제 등의 다량 복용으로 결국 3개월만에 약중독증까지 걸리게 되어 음식물은 물론 물도 삼키지 못하여 토하고 두통이 왔으며 몸도 많이 떨렸습니다.
신경정신과에서는 뇌에 이상이 있어서 토하는 것이라며 저에게 'MRI 촬영'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치료비가 들어갔기에 도저히 가족들에게는 이 사실을 이야기 하지도 못하고 자신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의 3남2녀 중 막내며느리로 시부모를 모시게 되고 그로 인한 많은 갈등과 하나뿐인 친정 남동생은 정신박약아, 그리고 제게서 떠나지 않는 병마는 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당에서는 반장과 레지오 부단장을 맡으면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이제 더이상 생을 지탱할 수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본당 수녀님께 말씀드렸더니 수녀님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매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큰 시누이가 저에게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제 마음이 내키는 곳에 가서 그동안 가슴에 쌓인 것을 다 풀고 오라고 하였기에 4년 전부터 나주에 꼭 오고 싶었지만 그동안 마음뿐이지 올 여건이 못되어 오지 못하던 이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는 가족들에게 숨겼던 부끄러운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4년전부터 가슴이 답답할 때에 담배를 피워 왔습니다. 늘 끊어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던 중 우울증을 계기로 더욱 집착이 강해지게 되어 더 많은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달래면서 진정시키곤 했습니다. 나주에 오기 직전 저의 상태는 먹지도 못하는 생활이 오래가니 탈수증으로 인해 링겔을 계속해서 맞아야 하고 약 기운이 떨어지면 심한 두통이 오고 불안감에 쌓이고 몸도 마음도 나락 끝으로 떨어져 마치 미이라 같은 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링겔을 세대씩 꽂고 있다가 왔는데 이곳에 온 지 이틀 동안 계속 약 기운을 빌어 약만 먹고 누워 잠만 청했으며 담배도 계속 피웠습니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싶었고 이곳 협력하시는 분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이틀만에 약을 다 끊고 성모님이 주신 물도 마시며 조금씩이나마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자매님과 봉사자님과 기도하고 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제 몸에 치유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목요일 기도 시간에 마침 그때 싱가폴과 말레이지아에서 오신 신부님과 율리아 자매님께서 기도해 주실 때 제 몸이 붕 떠오름을 느끼고 그때 깊은 성령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새벽 1시가 가까워 졌습니다. 당시 저는 얼마동안 무엇을 먹고 싶다거나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아주 잃고 음식물을 삼키면 토하는게 두려워 성모님이 주신 물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자 갑자기 배고픔을 느끼고 먹을 것을 찾으니 누군가가 사다 놓은 신라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끓여 먹고 나서 제 자신이 놀랐습니다. 위가 헐어서 음식을 삼키지도 못했는데 라면이라니.... 생각해보니 이곳에 와서 한 번도 토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밥을 먹고 계속 성모님이 주신 물을 마시며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하던 중 평화를 얻고 또 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과 기쁨의 생활로 변화되면서 웃음과 활기를 찾을 수 있었으며 용기도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이런 상태를 보며 기뻐했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자신이 밉고 가련하고 성모님께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이곳에서 협력하는 자매님께 이 사실들을 말씀드리고 우시는 성모님상 앞에 담배와 라이터를 내놓고 열심히 기도하며 담배 끊기를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또한 이런 사실들을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며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저는 담배마저도 완전히 끊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고 오직 그동안 찌들은 저의 영혼을 씻어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만 했습니다. 이제 나주 성모님은 이 미천한 죄인에게 약도 담배도 끊게 해주시고 불면증도 치유해 주시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주셨으며, 제 영혼을 새로 나게 하여 주시고 이제 당신 발 앞에 바쳐진 작은 영혼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게 내려 주신 은혜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성모님은 정말 하늘 멀리서 2000년 전 아득한 옛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형식적으로만이 아닌 우리의 어머니시고, 우리 곁에 살아계시며 은총의 분배자로서 오늘도 눈물을 흘리시며 저 같은 죄인이 회개하길 원하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용감히 알릴 것입니다.
저와 같은 고통 속에서 나락의 끝으로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용기를 잃고 실망한, 그래서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리고, 영혼도, 육신도 만신창이가 되어 허덕이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어머님의 사랑 안에 치유받고 기쁜 삶, 봉헌된 작은 자의 삶으로 변화되어 어머니 메시지를 실천하는 분들이 되어 이제는 눈물을 닦아드릴 조그만 수건 같은 사랑이라도 드려서 정말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면 합니다.
이제 우리의 작은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하며, 이 글을 성모님 발 아래 바칩니다.

 

1996년 6월 16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44번지 성산연립 1동 106호
윤정아(카타리나) T.(032)683-9558

 

 

의심했던 남편이 철야기도회에
한 번 참석하고는 70평생 헛살았다며 100%로 받아들였다. 

이길자(카나리나)
 

저는 목포 북교동에 사는 이길자 카타리나입니다.
남편이 사업하다 부도나자 애들과 저만 남기고 전화연락도 없이 행방을 감추어 뒷수습 할일 생각에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부도처리 등 사는 데만 신경을 쓰다 보니 신앙생활도 소홀하고 주일미사도 겨우 했는데 어느날 대모님이 나주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께 가보자고 하셨을 때 귀가 번쩍 트였습니다. 그때 저는 부도처리 등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왼쪽 머리에 병이 생겼는데 병원에서도 병명을 몰랐습니다. 부도 뒤처리를 겨우 정리하고 나서 남편이 돌아왔는데 그때는 이미 몸에 이상이 온 것입니다.
어느날 나주 성모님 집 문을 들어서는 순간 무지개 빛과 열을 화끈하게 받았습니다. 그때 율리아 자매님이 무지개빛을 받은 사람 손드시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열을 받고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시원하면서 전기가 찌릿하게 오는 듯 했습니다. 왼쪽으로는 잠도 자지 못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왼쪽으로 잠을 자도 어지럽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어지러워서 주사도 못맞았었는데 뇌암인지 뇌빈혈인지 의사도 모르는 병이 싸악 치유가 됐습니다. 진정 아버지 사랑을, 성모 어머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음에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성모님께 봉헌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저의 장부는 제가 나주에 다닌다고 저에게 항상 종교적으로 너무 지나치다고 하며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피곤하다고 아내의 마음과 정신까지 의심하며 나주 성모님만 성모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는데 지난 3월 첫 토요일에 장부와 함께 철야기도회에 다녀왔는데 다음날인 일요일에 장부는 성모님의 메시지 테이프를 듣고 하루 종일 울면서 70평생을 헛살았답니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한 주먹에 KO 당하듯 첫 토요일 철야기도회에서 100%로 성모님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였습니다. 나주에 다녀오신 후 율리아 자매님 한마디 한마디가 어느 신학박사나 교수의 강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훨씬 좋아 말씀 하나도 빼놓을 수가 없다고 하시며 어느 신부님이 그렇게 조리있게 강론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도 틀린 데가 없이 분명하신 말씀이다."라고 장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제는 장부가 첫 토요일은 물론이고 매주 목요일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한 기도회에 나가시는데 가시는 날에는 목욕도 깨끗이 하고 저보다 먼저 서둘러 가셔서 제자리도 방석 깔아놓고 기다리십니다.
기도회가 저녁 9시인데 5시만 되면 나주로 가셔버리는 거예요. 또 나주에서 가져온 묵주를 항상 가슴 속에 넣고 다니시며 가끔 꺼내어 저에게 장미향기를 맡아보라고 하시는데 정말 장미향기가 진동했습니다. 메시지 말씀도 100%로 받아들이셨는데 어느날 일본어로 번역한 메시지를 읽으시다가 저에게 빨리 와 보라고 하여 갔는데 "장미향기가 나지?" 하는 순간 정말 느닷없이 향기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장부는 신부님이든 수녀님이든 얼마든지 성모 어머니의 메시지 말씀에 관하여 이야기 해 드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장부와 저는 이제 오직 예수님, 성모님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제일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욕심없이 세속을 떠나 오로지 성모 어머니 메시지 전파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첫 토요일과 목요 성시간을 지키려고 성모님 집에 들어오면 성모님은 밝게 웃으시며 반겨주시는데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성모님께 의탁하고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3년 전보다는 확실히 많이 변했어, 전에는 조그만 일에도 화를 잘 내던 당신이 지금은 잘 참고 양보하는 모습을 볼 수있거든." 이렇게 우리 가정은 이제 성가정으로 바뀌었고 이 세상 어떤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은 천상의 복을 얻었으니 이제는 묵주기도를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남편과 함께 열심히 바치고 있습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5년 4월 20일
목포시 북교동 북교동 천주교회
이길자(카나리나) T.(0631)42-5678,44-4557

 

 

의처증을 치료해 주신 나주 성모님! 

진 엘리사벳

결혼 후 남편의 의처증으로 저는 계속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의처증! 안겪어 본 사람은 정말 모릅니다.
우리 부부는 8월 첫 토요일에 나주 성모님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나주에 오기 전날 남편은 고통이 심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한테 기도 좀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영혼을 구해 주십시요. 당신께 맡깁니다." 그리고 구마경을 외웠습니다.
실뱀이 공처럼 뭉쳐져서 남편의 배 위에서 뒹구는 모양이 보였습니다. 어쩌다 저는 잠이 들었고 남편은 밤새 고생을 한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아파서 나주에 못 가실 줄 알고 "다녀올께요."하니까 남편은 "죽어도 나주에 가서 죽어야겠다."하면서 "내가 이 마귀를 이겨내야지."하고 일어나 같이 내려 왔습니다.
밤새 화장실을 다니며 아팠던 남편이, 또 여자 셋만 있는 자리도 못가는 남편이 철야기도 중에 회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성모님과의 만남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기를 세 번 한다 싶었는데 나중에 저보고 "나 같은 사람 곁에서 도망가지 않고 살아 주어서 고맙다, 세상에 당신 말고 누가 그렇게 해주었겠느냐"고 하면서 제 손을 꼬옥 잡는 것이었습니다.
자존심 때문인지 저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성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남편은 제가 나주에 내려간다고 하면 "나도 따라 갈래."합니다.
제가 "회사는 어떻게 하구요?" 하면 "회사에는 시골갔다 올 일 있다고 하면 돼."하면서 저 보다도 나주를 좋아합니다.
남편은 나주에서 철야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먹을 것을 이것 저것 사서 차 2대에 나눠 실어주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남편의 의처증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장사를 하는 관계로 방학 때 나주에 오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남편이 못오셨습니다.
"엊그제 그 일 아니면 나도 갈텐데"하면서 잘 갔다 오라고 차비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일로는 한 푼도 안주는 남편이 나주 피정 간다면 두말 안하고 줍니다.
남편 말은 "세상 사람들 다 이기는데 하느님께는 진다."면서 항상 감사드리며 삽니다.
때로는 남편이 애기처럼 행동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으로 받아주면서 내버려 둡니다.
"성모님께서도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 다 하셨는데 나는 남편을 위해 그 까짓것 못하랴!" "내 인생을 다 바치자."하고 해드리니 집안이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이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4년 8월 6일 토요일
화곡2동 본당
진 엘리사벳

 

 

우리가 무엇이길래 

박덕수(유스티나)
 

"엄마, 약 가지고 가셔요?"
외출할 때마다 의례적으로 던지는 아이들의 말이다. '87년 이후 엄마로서 한 가정의 주부로서 늘 약에 의존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게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치료되지도 않고 잠시라도 약을 거르게 되면 심한 통증이 따르곤 하는 병으로 인해 주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음을 생각하니 그 고통은 오히려 은총이 되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나주 성모님 집을 찾게 되었으나 삶에 찌든 나의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성모님의 집을 찾는 것을 딸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약 중독에 얼굴이 부은 어느 날, "머리 아프신 분은 치유받을 것입니다."라는 율리아 자매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늘 무겁던 제 머리가 참으로 맑아졌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었던 나의 병들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내게서마저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은총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 나의 변화에 놀라워 하는 이웃들에게 성모님의 비디오 테이프와 메시지가 담긴 테이프를 빌려주었을 때, 냉담했던 부부가 다시 주님을 찾게 되었고, 치유되신 분이 있는가 하면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곳에 가야만이 신앙심이 두터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라며 비판의 눈길로 성모님의 집을 따라 나선 딸 아이가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들으며 두 눈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광주시 동구 용산동 17통 2반 434번지
박덕수(유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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