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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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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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2.gif 나주를 통해 변화된 삶 - 이진숙 베로니까

cross2.gif 마이 리 씨의  편지 - Mr. Mai Le

cross2.gif 요세피나 자매님의 증언 - 성 요세피나

cross2.gif 나주 성모님의 크신 사랑 - 김미희  라파엘라

cross2.gif 나주 '기적' 취재기 - 우종창 기자

cross2.gif 내가 본 나주 - 이진엽 비오

cross2.gif 로살레스 자매님의 편지 -  Mrs.  Yongsu Rosales

cross2.gif 나주 성모님을 알고 낙태할 아이를 순산한 은총 - 임 모니카

cross2.gif 오! 주여 찬미 받으소서.- 임군자 모니카

cross2.gif 축구하다가 다친 발이 감쪽같이 - 이 베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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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2.gif 이단으로 바라본 나주 성모님께 받은 은혜 - 손민두 프란치스코

cross2.gif 기적수로 아픈 목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 한세시리아

cross2.gif 나의 나주 성모님 사랑 이야기 - 서경원

cross2.gif 그 날을 기다리며  - 한경애 로사리아

cross2.gif 천 시몬 형제의 편지 - 천 시몬

cross2.gif 폴 형제의 증언 - ROCK PAUL

cross2.gif 저는 교만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 김학자 루시아

cross2.gif 미얀마(버마)의 라쇼에서의 기적들 - 릴리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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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를 통해 변화된 삶

나주를 통해서 변화된 저에 대해 진실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말씀드립니다. 이제 7개월째 첫 토요일을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영세를 받은 지 18년이 되었고 철저한 유교 집안의 종가집 딸이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도 모른 채 내가 잘난 줄 알고 죄라는 죄는 다 지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영세는 받았으나 전혀 믿음이 없었으며 믿으려고 애쓰는 그 의지 뿐이었기에 미사를 열심히 드리고 신앙 서적을 열심히 읽었지만 그것은 지식을 심어주었을 뿐 제게 뜨거운 믿음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미사는 아무리 정신을 차려 일치하려고 애썼지만 늘 분심중에 드렸고 강론이나 복음 말씀을 필기까지 해 가면서 들었어도 크게 내 마음속까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묵주기도는 억지로 5단 정도만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것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고 손만 묵주를 돌리는 지경이었습니다. 성서는 너무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읽을 엄두도 못내었고 숙제처럼 억지로 읽으려면 잠이 왔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정말 계실까? 하느님이 정말 세상을 만드셨을까? 모든 것은 진화론에 의해 생겨난게 아닐까?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지 못하였고 믿으려고 너무 너무 애만 쓴 것입니다. 감실 안에 계신 주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신 주님에 대해 믿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그러한 내가 나주를 오게 되었습니다. 믿기 위해 늘 갈망해 왔기에 레지오 단원의 소개로 호기심도 어느 정도 가진 채 왔습니다.

난생 처음 뜬 눈으로 밤을 세워 기도했음에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부르심을 받은 율리아 자매는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대속으로 낙태보속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배가 만삭이 된 모습과 고통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쉬며 힘들어하는 모습, 걸음도 못 걷는 모습을... 그러한 고통을 초인적으로 참고 봉헌하며 우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시며, 훌륭한 내용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만삭이었던 자매님의 배가 보통 사람처럼 되어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피로에 쌓여 잠을 잤지만 저는 잠이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눈물, 콧물을 흘리며 하느님을 알지 못한 채 어리석기만 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보고 비로소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을 체험한 것입니다.

저의 감동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며 저 아름다운 산, 그래 하느님이 만드셨구나. 저 햇빛, 하느님이 만드셨구나. 너무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갖가지 지은 죄가 생각나서 울고,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상처를 만져보게 하신 주님께서 믿지 못하던 나를 불러 이렇게 당신 권능 보여주심에 감사하여 또 울며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성당의 감실에 앉으니, 신성을 감추신 채 인성마저 숨기신 주님께서 빵의 모습으로 저 속에 갇혀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미사가 감동의 시간으로 느껴지고 성가나 강론이나 기도나 복음 말씀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느끼며 자주 눈물짓습니다. 무지의 늪에서 헤쳐 나와 빛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눈을 비비면서부터 주님을 찾고, 대소변을 볼 때도 주님께 감사하고, 틈만나면 기도하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목요성시간을 지키며, 가장 가난한 자, 가장 낮은 자의 길을 걸으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겸손하게 그 길을 따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경제난국에 저희 가정도 그 동안 알뜰히 저축했던 재산의 2/3가 없어져 버렸지만 그저 주님을 알게 해주시고, 천상의 어머니께서 제 어머니 되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변한 모습에 친정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도 이번에 교리 반에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 어떤 신앙 서적이나 훌륭한 강론도 저에게 하느님을 직접 가르쳐주지는 못했습니다. 저와 같은 많은 사람들,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길을 막은 공지문에 대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오늘도 성모님과 함께 밤새워 기도할 것입니다. 나주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봉헌하나이다.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그리하여 사제들을 비롯한 우리 모두 성령안에서 일치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몸소 이곳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이 땅의 모든 신부님들이 믿고 인정하게 하소서.


1998년 3월 7일
대구수성구 신매동 599번지. TEL: 793-8269
이진숙 베로니까

 

 

마이 리 씨의  편지

욜란다 씨 귀하,

저 역시 나주 성모님께로부터 많은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 은총 중의 첫 번 째는 기도의 은사입니다. 동행하셨던 폼피 몬시뇰께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데 대하여 특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번에 몬시뇰을 만나게 되고, 욜란다 씨 및 순례자 모두를 만날 수 있게 안배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심장병 때문에 이번 순례를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모님께 갈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대단히 열심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광주 대주교님의 공지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성모님께서 받으신 상처를 보속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번 째 선물은 순례에 다녀온 이후로 저의 심장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저를 치유해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 6월에는 겨우 20분 동안을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분 이상 다리가 아프거나 가슴이 답답함이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증상들이 없어졌습니다.  항상 졸립고 목이 마른 증상도 없어졌으며, 한 시간 이상 무슨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증상도 없어졌습니다.  계단을 오르거나 운전할 때 가슴이 아픈 증상도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포도주도 조금씩 마실 수 있습니다.  즉 혈관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던 것도 정상적으로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을 받을 약속이 9월이므로, 그 때 모든 것이 확인될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저는 파 신부님께 저에게 부탁하시는 어떤 타이핑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손으로 쓰신 183페이지의 불어로 된 서류를 보내주셨고, 저는 한 번에 세 시간 씩 피로를 느끼지 않고 타이프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세 번 째 선물은 저의 누이 동생이 서울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졌었지만, 아무런 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과 꼭 같이 건강합니다.  얼굴이 많이 찌그러진 헝 씨도 치유가 되지는 않았지만,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그는 10월에 아내와 세 살 짜리 딸을 데리고 나주에 다시 가겠다고 합니다.  환 씨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순례 중에 찍은 비디오를 편집하느라고 며칠 간을 수고했습니다.  도중에 밧떼리가 다되어서 6월 30일의 철야 기도 광경을 하나도 찍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저는 제가 나가는 기도회 모임에서 이번 순례 비디오와 작년 6월과 8월의 성체 기적 비디오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같이 묵주 신공을 바쳤습니다.  

저는 때때로 광주 대주교님께 대하여 답답함과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내기보다는 그분의 마음이 변하시기를 바라며 성모송을 바칩니다.  대주교님께서 당신의 오류를 깨달으시고 이를 공적으로 인정하실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도와주시도록 우리 모두가 하루에 한 가지씩 희생을 바치도록 결심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율리아가 모든 것을 순교자의 정신으로 기쁜 마음으로 잘 인내할 수 있기 위하여.  이번에 몬시뇰께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작은 영혼들의 도움으로 승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은 영혼들이란 바로 우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욜란다 씨!  나주에서 그리고 나주 및 율리아와 연관된 다른 곳들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 큰 기적이 있으리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 편지를 이번 순례에 참여했던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시고  모두에게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Mr. Mai Le
P.O. Box 32254, San Jose, CA  95152, U.S. A.
1998년 7월 20일

(마이 리 씨는 월남의 육군 장교였으나, 월남 공산화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금 캘리포니아 산 호세 시에서 살고 계십니다.  지금 연세는 70대이시며, 심장병으로 고생하셨으나, 이번 순례 후에 많이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마이 리 씨는 주님과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매우 깊으시며, 또 영어에 능통하시기 때문에, 수 년 전에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월남어로 번역하여 책으로 출판하셔서 미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월남인들에게 나주 성모님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요세피나 자매님의 증언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내가 주님을 느끼고, 주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었음을 나 자신이 확실하게 압니다.  육신의 병이 사라졌고, 영적 기도 생활을 열망하는 자세로 바뀌어진 것은 오직 나주 성모님을 방문한 후에 였습니다.

십수년간 성당을 매일 다니다시피 했어도, 간절한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무지"를 나주의 성모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어 통회하는 마음과 남을 사랑하는 자세로 변화되고 있음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나주 성모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변화와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일반 신자들이 늘 원하고 바라던 일이며 성당에서 늘 가르치는 일 아닌가요?

저는 1998년 6월에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했는데 율리아 자매님은 만나뵙지 못했지만, 성모님을 통해서 영적, 육적 치유를 받았습니다.  저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주에 갔다온 후 꿈에 성모님께서 오셔서 나의 위를 손으로 쓸어주셨으며, 그 이후로 위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미국인인 저의 남편도 이번에 나주에 가서 산으로부터 성모님 물을 나르는 일을 열심히 도왔는데  그날 밤 과로로 쓰러졌으며 새벽 녘에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위급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성모님 물을 갖다 주어서 남편이 마시자 곧 기운을 차리고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저희는 가구점을 하고 있는데, 나주에 다녀온 후로는 성모님께서 도와주셔서 그 동안 어렵던 사업도 회복되어 지금은 잘 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지방에는 나주 성모님께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분도 선생님, 보내주신 우편물 감사히 받았습니다.  하시는 일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번창해져서 가슴 벅차게 기쁜 이 마음을 세상 사람들이 많이 알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10월에 나주 가신다니 저희 가족도 기억해주십시오.  저는 나주에 너무나도 또 가고 싶습니다.  마음 같아선 이곳의 모든 것을 팔고 나주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합니다.  

 
성 요세피나 드림
미국 캔자스 주 오벌랜드 파크 시
1998년 8월

 

 

나주 성모님의 크신 사랑

 † 찬미 예수님

냉담자인 나에게 나주 성모님은 나를 당신 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나주 성모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 어느 자매님을 통해서 나주 성모님을 방문하였고 철야 기도에도 두세번 참석 했습니다. 그뒤로 저는 나주 성모님을 잊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적으로 살다가 어느날 부턴가 주일을 지키지 않다가 3년 동안 냉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주 성모님 상본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그 상본을 보는 순간 성모님께서 "라파엘라야 이젠 그만 방황하고 나의 품으로 돌아 오너라" 하고 다정스럽게 말씀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주 성모님 상본을 대하기 전의 제 마음은 타성에 젖어 있었으며 무감각하고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고 굳어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었으며 만사가 불만과 미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나주 성모님 상본을 본 순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모든 것을 통회하고 회개 했으며 그 즉시 고해성사를 보고 성당에 다시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을 뵙고 싶은 열망에 6년만에 나주 성모님을 방문했으며 늘 겸손하고 온유하시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고통을 기쁨으로 잘 참아 받으시는 율리아 자매님의 모습을 보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고통을 원망하며 살아온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어떤 역경과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먼저 제 마음에선 감사가 흘러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주 성모님의 뜨거운 사랑과 율리아 자매님의 희생의 대가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의 크신 사랑은 저의 가족과 친척 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나주 성모님 집에 초대해 주셔서 냉담자에겐 열심한 믿음을 주셨으며 하느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게 해 주셨으며 삶의 용기와 희망을 잃고 좌절과 고통속에 살아가는 영혼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셨으며 병들고 상처받은 영혼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분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저는 나주 성모님께 율리아 자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8년 3월 14일  김미희  라파엘라
대전 광역시 중구 대흥 2동 308-17번지

 

 

나주 '기적' 취재기

나주 성모의 집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나주로 내려갈 때 솔직한 저의 심정은 '지방에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려 준 사람은 수십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문외한이므로 설사 제 눈으로 본다고 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사로 작성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에 앉아서 궁시렁거리기보다는 현장을 둘러보고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주로 내려갔습니다.

교회당과 경당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취재에 임했습니다. 성모의 집 도착 후, 대충의 설명을 들은 다음 혼자서 경당 안을 살폈습니다. 웨하스 과자보다 더 얇다는, 밀떡으로 만든 성체가 떨어져 내렸다는 천정은 높이가 5m 가량 되었습니다. 저 높이라면 종이도 흩날릴 텐데 입에 삼키는 조그만 성체가 꼿꼿이 떨어졌다는 것은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7년간은 눈물과 피눈물을 그 다음 2년 동안은 향유를 흘렸다는 성모상은 평범한 성물(聖勿)이었습니다. 괜히 취재하러 먼데까지 왔다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체가 떨어졌다는 바닥에 코를 대 본 순간, 참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아주 독특한 향기가 스며나오는데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이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눈치 못 채게 경당 안에 꽂아놓은 꽃의 냄새도 맡아보고 여기저기 코를 대 보았지만 비슷한 냄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기자가 취재하러 온다니까 일부러 향수를 뿌려놓지 않았을까 의심하며 내일 다시 올 것을 기약했습니다.

현장에 대한 기본적인 취재를 대강 끝낸 그날 밤, 나주 성모의 집 기적 여부를 조사한 신부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 3자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의 집에서 일어난 기적을 부인했던 조사위원 신부들이 저의 인터뷰 요청에 이런저런 점에서 기적이 아니라고 밝혔더라면 저도 납득했을 것인데, 인터뷰 자체를 거절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다음 날 광주교구를 찾아가 취재 목적을 말하고 반나절을 기다렸지만 취재에 응하는 신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신부님이 기자가 묵고 있는 여관 근처까지 찾아와“기적을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했을 때, 그리고 기적의 물이 솟아나오는 현장에서 유독 그 물 위에만 벌떼들이 모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제서야 공개하지 못할 사연이 교회 내부에 있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 사연은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취재를 끝내고 나주를 떠나면서 기적의 주인공 율리아 씨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남았습니다. 대신 율리아 씨가 직접 녹음했다는 테이프를 들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제 집사람이 운전하는 승용차 안에서 저는 율리아 씨의 테이프를 틀어주고 들어 본 느낌을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한참 듣고 난 집사람은“사람의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낭송하는 내용도 그렇지만 너무나 맑은 그 음색에 저 역시 놀랐습니다. 오랜 기간 미용사 생활을 했다는, 팔자가 드센 여자의 목소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실제의 기적이 저에게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나주를 갔다온지 한참 지난 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울 마포에 있는 제 오피스텔 입구에서 나주에서 맡았던 그 향기를 다시 맡았던 것입니다. 제 오피스텔은 13층에 있는데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그 향기가 스며나왔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재빨리 바깥을 살폈습니다. 오피스텔 안에서 나오는 향기는 분명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는 두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중이었습니다. 저도 급히 올라탔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는 염치 불구하고 두 여자의 냄새를 주의깊게 맡았습니다. 그 여자들의 머리칼과 몸에서도 향수 냄새가 났지만 나주에서 맡았던 그 향기와는 정녕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주에서 맡았던 똑같은 향기를 어떻게 해서 서울에서  맡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의문을 지금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종창 기자.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현재 <월간조선> 차장대우) 

 

 

내가 본 나주

나주에 관한 소식을 내가 처음 접하기는 90년대 초로 기억된다. 그 당시 우연히 서울 대교구의 한 신심 깊은 자매님(李아녜스)으로부터 나주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처음에는 '뭐 그럴수도 있겠지' 하는 정도로 곧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1996년 4월 경 그 분의 인도에 이끌려 차량 봉사를 하며 처음 따라가게 되었다. 나주 성모 경당에 도착했을 때 또 한번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각 교구의 수많은 순례객들이(1000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첫토요일 성모 신심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당 안팎을 가득 메우고 있어 놀랬으며 군중을 비집고 간신히 출입구 부근에서 센드위치처럼 끼여 나도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미 몇 해 전에 피눈물과 향유가 흘러내리는 현상이 끝났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은 목격할 수 없었지만, 그토록 소문으로만 듣던 윤율리아 자매님이 이끌어가는 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어 마음이 설레였다.

기도회 끝무렵에는 이곳을 다녀간 후 내적, 외적 치유를 받은 각 교구의 신자들과 LA의 한 교포가 증언을 했다.  특히 그 날따라 홍콩에서 온 신부님과 30여 명의 외국 순례객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성모 경당 안에는 사람에 따라 진한 백합, 또는 장미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향기를 전혀 맡을 수 없었고, 새벽 4시까지 인파에 시달리다가 귀가했다.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나주는 내 기억 속에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었을 뿐, 단조로운 일상과 세속적 삶이 반복되었다.

아내가 금년 7월 4일 첫토요일 나주 기도모임에 다녀온 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7월 5일 일요일 아침 아내에게서 대구에 무사히 도착하여 지금 집 부근의 성당에 와 있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나는 그 곳까지 나가 함께 아침 미사를 보고 귀가했다. 그런데 미사 때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내 왼쪽 눈 주위가 오전 11시경 갑자기 통증과 함께 심하게 부어 오르며 실눈처럼 흉하게 변해 있었다. 눈꺼풀을 이리저리 들추어보니 눈물샘 부근에 약간의 화농이 형성되어 빨갛게 부풀어 있었고 그곳이 바로 통증의 진원지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어서 약국이나 병원에도 갈 수도 없었고,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아내가 나주에서 가져온 기적수를 눈에 한 번 넣어 보자고 제의하여 반신 반의하며 그대로 시행했다.  그 후 20분쯤 지나자 통증이 사라졌고, 두어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부위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빠졌다. 이 정도의 부위라면 화농을 제거하고 최소한 3-4일은 가야 정상으로 돌아올 텐데 참으로 이상했다. 많은 생각을 거듭한 후 나는 이번 8월 1일 첫토요일에 다락방 기도회원들과 함께 나주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 속은 아직도 남아있는 의심의 찌꺼기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끝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두 번째 순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당 안팎을 가득 메운 것을 보고 내심으론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지난 번과는 달리 광주대교구장의 공지문으로 인해 이곳의 공식적 집회가 금지되었는 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만나기 위해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율리아 자매님은 그 자리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경당 바로 옆에 위치한 가정집에 유폐되다시피하여 그 곳에서 외롭게 기도 모임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작은 창문밖으로 전등 불빛이 비치는 율리아 자매님의 집을 보며 문득 측은한 마음과 함께 여러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쨌던 나는 그 동안 의심이 가던 경당 안 맨 앞쪽 '천상의 성체'가 떨어진 곳으로 가보았다. 그 곳에는 투명한 유리로 덮여 있는 가로 40센티, 세로 25센티 정도의 나무상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안으로 코를 들여댔을 때 진한 향기가 난다고 했다. 아내도 경당 안에 장미 향기가 은은히 풍기고, 성체가 떨어진 곳에서는 향기가 진하게 난다고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아무런 향기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은 안 될거야!' 라는 넋두리를 잠시 속으로 해 보았다. 줄곧 마음이 착잡하여 다시 30여 분 후 사람들의 긴 행렬에 끼여 재차 시도를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혹을 떼려고 시도하다가 더 큰 혹을 달게 된 혹부리 영감처럼.   

이러던 와중에 순례객들 중 몇분의 인도로 본격적으로 기도가 시작되었다.  로사리오 기도와 찬양이 계속되었지만 마음은 가볍지 못했다. 이윽고 새벽 3시경 통성기도 시간이 되었다.  각자 예수님과 성모님의 처절한 고통을 묵상하며 자유롭게 기도했다. 기도를 이끌어가는 분이 흐느끼면서 "우리는 저 아름다운 성모님의 모습만 늘 보았지, 저 분의 마음 속에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있음을 누가 알고 있었는가?"라고 되뇌자 내 눈에서는 한 동안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매님들이 주변에 많이 앉아 있어서 다소 부끄럽기도 하여 눈물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때였다. 문득 백합 비슷한 진한 식물 냄새가 꽉 막힌 코 안으로 두어 차례 풍겨옴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도모임이 끝나고 막 경당 밖으로 나설 즈음 이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로운 장미 향기가 진하게 콧속으로 두번 풍겨왔다. 그래서 황급하게 다시 경당 쪽으로 몸을 돌려보니 아주 은은한 장미 향기가 그 곳에서도 역시 풍겨왔다. 마음은 상기되었고 너무나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도 이제까지 무겁던 마음이 내내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 가득참을 느꼈다. 성모님께서 끝없는 의심과 거짓 지식에 빠져 있던 한 죄인에게 처음부터가 아니라, 힘겨운 고생 끝에 작은 하나를 깨닫게 해 준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후 9월 첫 토요일날 세 번째 나주를 순례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경당에 들르기 전에 기적수가 일곱 번이나 솟아올랐다는 성모님의 산으로 올라가 촛불 봉헌도 하고 침수의 은총도 받게 되었다. 아내는 침수 도중 진한 장미 향기를 맡았다고 했다. 필자는 97년 여름 해외 성지 순례시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침수를 한 경험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도 성모님과 관계된 기적수가 흐르는 성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이 기뻤다.

침수가 끝나자 일행과 더불어 경당으로 내려와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새벽 3시경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많이 울었다. 예수님과 천상 어머니의 속을 썩혀 드린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때마다 가슴은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쓰라렸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내가 언제 성모님 때문에 이렇게 운적이 있었던가? 그 날은 지난 방문 때와는 달리 경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또는 진하게 계속 풍겨왔다.

특히 내가 놀란 것은 기도회가 끝나고 대구에 도착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일행과 함께 전세 관광 버스를 타고 대구에 도착, 내 승용차로 갈아타기 위해 차문을 여는 순간, 그 차 안에서 온통 진한 장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럴 수도 있을까! 나는 그 당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월요일날 학교로 출근하여 문학 수업을 하는 도중, 은은한 장미 향기가 두어 차례 순간적으로 코끝을 스쳐감을 분명히 느꼈다. 언제나 세상의 지식과 논리에 깊이 빠져있는 이 죄인에게 성모님께서 자주 어떤 징표를 보여 주시며 현존하심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였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렇다, 잘 살아야 한다. 영적으로 항상 깨어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 처녀들처럼......  

그러므로 필자는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고린토 후서4:13) 라는 성서의 구절처럼 감각 기관을 통하여 몇 가지 현상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주의 성모님과 관계된 초자연적 현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점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앙관 또는 실존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선택 뒤에는 자신의 영혼에 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할 것이다.  

통찰력 깊은 율법 교사 가믈리엘은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 만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사도행전 5:35-5:39)라고 충고한 점을 조용히 묵상해 보아야 한다.


1998년 9월 28일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 보성아파트 261동 1206호
전화:자택 (053)791-0439  직장:(053)854-8015
이 진엽 비오

 

 

로살레스 자매님의 편지

Mary's Touch By Mail 귀하,

참으로 오랫 동안 제가 할 일을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텍사스에 사는 로살레스예요.  
지난 5월에 나주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저의 두 올케와 큰 언니와 조카 그리고 저의 아들과 며느리 이렇게 일곱 사람이 다녀왔습니다.  저의 조카는 그 곳에 가면서도 이모 때문에 간다고 하더니 그 곳에서 돌아온 날 밤에 자는 식구들을 깨워 묵주 신공을 드렸답니다.  저의 큰 올케는 신부님이 믿지 말라고 하셨다며 망설이시더니 내가 먼 곳에서 와서 나 때문에 간다고 하시더니 나주에 다녀와서는 이 일을 이웃에 꼭 전하겠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어요.

Mary's Touch By Mail을 알게되어 주님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저는 죄 속에 싸여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제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 하던, 튼튼하게 여기던 벽이 무너져버렸어요.  제 사진을 눈여겨 보면 볼수록 텅텅 빈 껍질 뿐이어서 오히려 두려움과 고독이 얼마간은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었어요.  겁이 나서지요.  나주에 다녀온 후로 여러 가지 비디오를 본 후로 내 자신이 교만스럽게 나를 믿었던 것이 죄악이며 또한 여러 가지 죄악을 피하려 노력하며 열심히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전하는데 노력하고 있어요.  벽에 부딛칠 때 특히 제가 들어줄 사람이라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냉냉한 소리를 들었을 때 조금 기운을 잃었었지만 성모님 말씀대로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며 부지런히 어머니 말씀을 전하면 항상 저와 같이 계시겠다고 하신 그 다정하신 약속을 저는 믿어요.  이제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는거지요.  용기도 조금 나구요.  남편과 딸과 사위가 제 편을 많이 들어주어서 고맙지요.  제가 근간에 절실히 체험한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다 내주어야지만 진실한 사랑의 평화가 지속된다는 거였어요.  남의 잘못을 탓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요.  

10월에 남편, 딸, 사위 그리고 한 살된 손자와 함께 나주를 가겠으니 곧 연락드릴께요.  
저의 딸이, "엄마, 나주 성모님 메시지 전하는 일을 우리 온 가족이 함께 해요,"라고 했으니, 저희들 위해 기도해주세요.

Mrs.  Yongsu Rosales
1117 Lesa Lane, Garland, TX  75042,  U. S. A.
1998년 7월 24일

 

 

나주 성모님을 알고 낙태할 아이를 순산한 은총

 1997년 5월 1일

우리집 막내 성훈(안토니오)이가 태어났다.(엄마나이: 39세) 몸무게는 3. 97Kg으로 순산이었다.
1년전 나는 병원에서 아기의 잉태 순간을 확인하고 기쁨보다는 절망의 늪으로 빠졌었다.
주변의 자매님, 가족들의 말씀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2시 낙태 수술하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고, 빨리 내일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남편과 병원에서 약속이 3시로 미루어지면서 순간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머리에 번득이며 떠올랐다.   '아! 내가 살인을 하려는구나, 안되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흔들리는 마음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성모님과 성령님께서 저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저희 가족에게 우리 성훈이를 안겨주셨으니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은 큰딸 승민 안젤라(10세), 큰아들 성원 안젤로(6세), 막내 성훈 안토니오(2세) 이렇게 5식구입니다.


1998년 6월 17일
수원시 팔달구 매탄 4동 삼성 1차 아파트 7동 306호
Tel) 213-3865     임 모니카

 

 

오! 주여 찬미 받으소서.

나 같은 죄인을 나주에 불러주신 은혜에 먼저 감사 드립니다.

주님은 죄짓는 자들을 조금씩 고쳐주시고 그들이 죄지은 것을 일깨워 주시며 타이르시어 그들로 하여금 악에서 벗어나 주님을 믿게 하신다는 말씀(지혜서 12. 2)이 저에게 이루어 졌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지은 죄를 용기가 나지 않아 고백성사를 못본 상태에서 모령성체인줄도 모르고 모셔왔는데 나주에 갈 적마다 하나 하나 깨우쳐 주시어 성사를 볼수 있게 용기를 주셨어요. 지금은 조그마한 죄라고 생각해도 성사를 자주 보게 된답니다. 성사를 보고 나면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정말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었는데 나주 성모님 집 첫토요일 철야기도회에 갔을 때 세 번만 기적수로 씻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주셔서 대야에 받아서 씻을 때 너무 시원했어요. 그런데 어느 자매가 "어머 그건 물 대면 큰일나는 병인데…" 하고 놀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저도 모르게 "그렇다면 더 좋지요. 병원에서 못낳는 병이라면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고쳐주실텐데요 무슨 걱정이예요"하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성모님께서 주신 물을 집에 가져와서 계속 씻은 뒤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허리에 좁쌀 같은 것이 나서 무척 가려웠습니다. 그때 성모님 물이 생각나서 계속 기도하면서 "예수님 성혈로…"하며 주신 물을 발랐더니 장부가 "그것만 바르다가 번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걱정했어요. 저는 다 나았다고 하면서 계속바르고 기도했어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약은 바르지 않을거야" 했는데 그날저녁부터 지금까지 가려움은 없습니다. (95년) 가을에 우리 형님께서(벨라뎃다) 나주 이야기를 듣고 가자고하여 갔으나 아무 의미도 모르고 다녀왔습니다. (96년) 봄 또 가자고 하였는데 마침 이웃 자매님이 세상을 떠나서 가야될지 몰라서 차표를 사지 않고 있었더니 우리 형님이 서울에서 차표를 사 가지고 오셨다면서 가자고 하기에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는 성서 말씀이 생각이 나서 기차를 탔습니다. 얼마쯤 갔는데 창을 바라보니 해가 둘로 보였어요. "형님 해가 둘로 보여요" 했더니 "창에 비쳐서 그런거지" 그래서 이쪽을 보니 해가 셋으로 보였어요. 해 둘레에 보인 또다른 모양이 성체인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97년 8월 첫토요일 외인인 여동생하고 열세 분이 좁은 차에 타고 가게되었어요. 옆에 자매가 해좀 보라고 해서 보니 해가 거울 모양의 성체로 보이면서 움직이고 파랑, 빵강, 초록, 보라색등으로 포도알처럼 엉켜서 이리, 저리 여러모양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우리 여동생도 너무 신비하고 아름다워 해가 안보일 때까지 보았다고 했어요.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일깨워 주시는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 찬미. 찬양 드립니다.

제가 포진이란 병을 않은지 25년이 되었습니다. 성모님 집에 다닌지 1년 6개월 되었어요. 매달 아니 피곤하면 주기적으로 고통을 받고 한 번 시작되면 보름씩가던 것이 연옥영혼들의 고통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 아빠께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봉헌하면서 기도하면 그날로 아니면 하루, 이틀에 없어지곤해요. 앞으로 깨끗이 치유되리라 믿고 진심으로 하느님 아빠와 나주 성모님, 율리아 자매님, 그리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998년 3월
충남 논산시 부창동 209-4 대림아파트 105-1801
Tel. 0461-736-4840
임군자 모니카

 

 

축구하다가 다친 발이 감쪽같이

저는 지속적으로 여덟 번째 나주에 가는날 아들(초등5학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주에 다녀온 후 그 아이가 학교에서 축구를 하다가 발이 삐어 절면서 귀가했습니다. 많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벌겋게 부어 있었습니다. 손이 살짝만 닿아도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병원은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런 경황 속에서 저녁을 먹고 아들은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잠깐이면 된다고하며 신발도 제대로 신을수 없어서 슬리퍼로 끌고 간신히 계단의 난간을 잡고 3층에서 1층 마당으로 내려 갔다합니다.

마당에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그곳에 나주의 성모님이 지붕 꼭대기에 계시더랍니다.(1998년 4월 23일) 그 순간에 발이 전혀 아프지가 않았답니다. 아픈 발을 움직여도보고 뛰어봐도 아프지가 않아서 계단을 뛰어 올라와 저에게 큰소리로 "어머니 기적이예요!" 하면서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이 신비, 저희는 하느님의 권능과 두려움에 떨면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 머리속이 텅텅 빈 것 같아요.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거예요. 말하지 마세요"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저희를 보호해 주시는 저희의 참 어머니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998.  4.  29
이 베로니카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 599번지 301호

 

 

이단으로 바라본 나주 성모님께 받은 은혜

저는 올해로 결혼 10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3자녀를 둔 가장입니다. 또 저는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새마을호 열차 운전을 주로 담당하는 기관사 직을 수행하고 있는 공무원이며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지 7년이 된 신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한국의 작은 도시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발현과 관련된 이 같은 기적이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또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것인가에 대해 제가 경험했던 일들과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깨닫게 된 정황을 세상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저의 소개를 통해서 저의 이제까지의 삶을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인류가 이루어낸 과학문명에 자부심을 느끼며 과학문명의 신봉자였으며, 명색이 가톨릭 신자이기는 하였으나 성서속의 하느님 말씀을 문학인의 창작으로 여기고 또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도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더 신봉하며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20세기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신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무신론자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주일 1시간의 미사시간도 아까워하며, 그 시간에 가족들과 밖에 나가 여가 즐기기를 더 원하였으며, 가난한 이웃의 아픔이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고, 저의 주변에서 이른바 세속적으로 잘 나간다는 교수, 의사, 사장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얕은 지식으로 인간의 삶과 신앙을 논하고 세상일을 적당히 비판해 가면서 교양인인 것처럼 행동해왔던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제가 나주의 성모님의 기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저와 저의 가정을 위해 항상 주님께 기도해왔던 저의 사랑하는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본당 구역장으로 계시는 자매님으로부터 나주 성모님의 기적을 알게된 아내는 나주 기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나주 경당에 매우 가고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99년 4월 23일 아내와 함께 나주 경당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꽤 진지하게 모든 것을 둘러보며 관심을 가졌지만 저는 왠지 경당 왼쪽 벽에 크게 모셔진 피흘리는 성모 상본이 섬?하게 느껴졌으며 기적을 징표한 전시된 사진들도 징그럽고 이상해서 눈길이 가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의 아내는 계속 관심을 가지며 나주 성모님께 자주 가고싶다고 하여 "그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종교에 너무 심취하게 되면 남편과 아이들을 팽개치고 이단으로 치달아 광신도처럼 될 수도 있고, 특히 교구의 인준도 받지않은 나주의 기적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겨서야 되겠느냐며 심히 나무랐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의 아내는 저보다는 열심이었지만 그다지 열심한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주를 다녀온 후 아내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기도생활, 특히 촛불을 켜고 묵주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의 모습이 몹시 못마땅하였습니다. 가정주부는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는 것이 주된 일일텐데 어찌하여 몸과 마음을 종교에 빼앗겨 신당을 차려놓고 빌고있는 무당처럼 기도만 하고 있을까? 누구보다도 가정적이고 자녀들보다도 아내밖에 모르고 살아왔건만 도대체 마음 한구석에 무엇이 비어 있어서 저렇게 기도에 열중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심한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내의 기도를 막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제가 보는데서는 일체의 기도도 못하게 하고 나주에서 가져온 성모님의 메시지나 피흘리는 성모상본 등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기도책도 다 집에서 없애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성모님상까지도 밖에 던져버려 산산조각이 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불에 태우면서 얼핏 읽어보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세상이 썩어있다. 너희들이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징벌이 내릴 것이다. 어서 회개하여 자아를 버리고 나의 품에 안겨라"하는 문구를 보고 '아 여기도 이단이구나! 그러니까 교구에서 인준을 내주지 않고 있지 요즘 일부 개신교에서 종말론으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데 바로 나주의 성모님 집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이단이 틀림없다. 세속에 사는 사람이 자아를 끊어버리면 그게 인간이야 바보지. 틀림없이 율리아라는 사람은 성모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어떤 기적이 행사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무당의 신내림 같은 것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혹세무민으로 광신도들을 끌어모아 이상한 교회를 만들어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생각으로 성모님의 메시지를 보니 모든 것이 다 이상하게만 느껴지고 가슴에 와 닿기는커녕 어떤 큰 마귀의 역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중에 "내 아들 예수는 너희를 사랑하여 칠성사를 베풀어 주었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저는 이 칠성사를 칠성당으로 잘못 읽기도 하였습니다. 칠성사를 칠성당으로 잘못 읽으면서 '율리아 자매가 만들려고 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는 우리 고유의 무속신앙을 토대로 하면서 겉으로만 성모님을 내세우고 있구나' 하는 터무니없는 오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알고 보면 참으로 오해가 무서운 것이고, 일부 교회의 몰지각한 행태들이 진실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렇게도 장애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시 율리아 자매에 대한 생각이나 나주 경당의 성모님의 기적을 이토록 오해하고 있었던 저는 저의 삶이 갑자기 초라해지고 한없이 근심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고통을 모르고 순탄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저는 아내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우리 가정이 파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가정이 파탄된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저의 걱정은 어디에 비할 데 없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우리 가정이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나주를 못 다니게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아내를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주위의 나주 신봉자들로부터 아내를 철저히 격리하고,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저의 아내의 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내가 종교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아내를 감시하며 열심히 다니고 또 시간을 내어 피정 행사도 아내와 함께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나주 경당에서 도대체 어떤 형태로 기도모임을 하는가 한번 보고싶어 여러 차례 첫 토요일 철야기도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아내를 감시할 목적으로 다니기는 하였으나 나주 경당에 자주 다니다보니 차츰 율리아 자매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도 풀리며 이 절박한 시대에 왜 성모님께서 피눈물로 호소하시는가에 대해서도 적게나마 머리로는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비하면 저로서는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성모님의 말씀이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가령 자기 자신을 끊어버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느님 무서운 줄만 알고 살면 되지 이유도 없이 무슨 희생과 보속, 고통을 달게 받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저의 마음은 그야말로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 나주 경당에 함께 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일 제쳐놓고 나주를 찾는 아내가 몹시 못 마땅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르게 살려고만 한다면 세상이 바로 설 것인즉 나부터 바르게 마음먹고 살면 됐지 어떻게 그릇된 남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내가 희생과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며 그 고통을 달게 받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저의 마음을 알게된 아내는 성모님 메시지를 전처럼 건성으로 읽지 말고 진지하게 읽어보라고 저에게 여러 차례 당부하였습니다. 수없이 거절하는 저에게 간곡히 권유하는 아내의 정성에 못 이겨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사람의 소원도 못 들어주랴"하는 심정으로 성모님 메시지를 아주 진지하게 읽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15일 동안 무려 8차례를 읽어보고서야 세상 자녀들에게 피눈물로 호소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의 의미가 조금씩 제 가슴속에 와 닿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지극히 혼탁한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목에서 저의 머리는 무엇으로 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믿음은 저 높은 산을 들어 올릴 수 있지만 깊은 사랑은 세상을 들어 올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제가 그 동안 고통이라면 고통이었을 아내와 율리아 자매에 대한 오해의 터널에서 막 빠져 나오자마자 저에게 참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는 커다란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류와 혼탁에 빠져 지옥의 길을 가고 있는 세상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자녀들에게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과 나눔으로 사랑을 실천하게하여 이 세상을 악의 위협으로부터 건져 올려 천국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세계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것이 사랑이 부족하여 일어나는 병리현상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감히 짧은 신앙과 지식으로 세계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선언합니다!

성모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이러한 세상의 모든 오류를 그대로 따른다면 하느님의 징벌이전에 인간 스스로 자멸할 것이라고, 또한 성모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다수의 종교인에게도 당부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참된 진리의 교과서라면 성모마리아께서는 스승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모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달라고 말입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우리 성모님은 바로 나주에서처럼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발현을 통하여 신앙인의 교과서인 성서 말씀에 의하여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참스승의 도리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큰 스승으로 모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선택받고 축복 받은 자녀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큰 고통을 겪지 아니하고도 이처럼 성모님의 말씀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제자신의 생활 개선을 하게 되었고, 감히 세계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저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죄많은 저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모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은총은 제가 교만하고 하느님 말씀을 의심했을 때 거두어 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상을 정복하기보다는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총은 받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은총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서는 더 낮아지는 겸손을 실천하여 주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동안 저의 아내는 기도를 열심히 한 덕분에 만성피로, 치질 등의 질병이 나았고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13층에 사시는 어떤 자매님은 성모님의 집에서 떠온 기적수로 얼굴에 가득했던 기미가 거의 벗겨졌습니다. 또한 율리아 자매께서는 교구의 방침에 순종하시느라 일체 공식석상에 자리를 피하시어 그 동안 수없이 나주 경당을 방문하였지만 율리아 자매를 한번도 직접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9. 12. 20
손민두 프란치스코
전남 목포시 산정 3동 중앙하이츠 8동 107호 전화) 0631-276-9196

 

 

기적수로 아픈 목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한세시리아 (영희)

미국 버지니아에 삽니다.
99년 11월 6일 철야에 와서 기적수를 떠갔습니다.
11월 12일 밤이었습니다.
목이 너무 아파서 나주 기적수를 한컵을 따라 간절히 기도하고 마셨습니다.
그즉시 그렇게 아픈 목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1999년 11월 15일
3455 Annan dale RD (rd)
Fallr church  V. A 22042   U. S. A

 

나의 나주 성모님 사랑 이야기

안녕하세요? 서 경원 베드로 입니다.

저는 종교가 없었던 사람인데 ,1991년 아주 우연히 나주를 방문한 이후 성모님을 알게 되었고 깊은 사랑에 매료되어 베드로 라는 제 2 의 이름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미국 하와이 St.Michale center 에서 나주 성모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계시는 형제님으로부터 온 내용입니다. 나주성모님의 최근 메시지와 금년 부활절에 발표하신 제주 김창렬 주교님의 글을 편지및 이 메일을 통하여 20,000 부를 송부하였다 합니다.

얼굴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며 문화관습도 다른 한국과 먼 나라에서 살면서 나주성모님을 위해 봉사하는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냈으면 합니다.형제,자매님들의 많은 기도와 성원 부탁 드립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   서 경원 베드로 올림.

 

율리아 자매 !!!

나는 1999년 3월 그룹리더인 Judy 와 3번째 나주를 방문하였습니다.

물론, 그때에는 당신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나주에 머무르는 동안 룸메이트인 Mike 와 저는 매일 새벽 2 시에 일어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저희는 주님께 당신이 저희를 위해 받으시는 고통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또한 부디 당신을 데려가지 말라고 애원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희 같은 작고 불쌍한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97년, 나의 첫번째 나주방문에서 저는 주님께서 어떻게 당신에게 응답 해주시는지 경험 했습니다.
나주방문이후 친구인 신부님에게 부탁하여 당신을 위한 미사를 LA에서 여려번 드렸습니다.

지난 1999년 5월 저는 약 2주일정으로 스페인 가라반달에 다녀 왔습니다. 저는 성물방이 딸린 작은 여관에 투숙했고 성모님이 발현하신 산으로 가는 길에 나주의 묵주, 메시지책, 소식지, 비디오테잎, 상본등을 품안에 안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주에서 있었던 성모님의 일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들이 필요하다면 나주의 성물들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호텔에 와서는 호텔 로비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주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말을 하는 것은 당신이 우리들을 위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을 감내하는지 알고 있으며 우리는 나주 성모님을 너무 사랑하여 한시도 잊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루르드에도 가보았습니다. 물론 거기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다녔고 그것은 나주 성모님께서 저를 안아주셨고, 때문에 저는 나주성모님을 위해 무었이든 할것입니다.

나는 또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주에서 고통받고 있는 용감하고 사랑스런 모든 영혼들에 대해서도 설명 했으며 우리의 주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라는 것을 그들과 함께 공감하고 돌아 왔습니다.

(저는 1997년 6월 성모님과 약속하였습니다. 나주성모님의 메시지 전달이 나의 그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이일을 하겠노라고... , 그후 저는 정확히 단 1일 만 쉬었을 뿐 계속 출근하고 있습니다) : 나주방문 및 성지순례등은 제외. 언젠가, 우리의 교황성하에의해 당신(율리아)의 이름이 성 베드로성당 광장 에서 수천번 읽혀 질것을 확신 합니다.


1999년 7월 22일
미국시간 17:38 팩스송신, Dave.   FAX : (818) 951-2819

 

 

그 날을 기다리며  

태평양 건너 이 먼 곳에서 내가 나주에 오신 성모님을 듣고 믿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내가 안고 있었던 가장 큰 과제가 성모님과 나 사이에 있는 두터운 유리벽을 없애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손을 내밀어주시고 두 팔을 벌려 안아주시려 하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벽을 넘지 못해 다가가지 못하고 외롭게 혼자 서 있곤 하다보니 내겐 성모님은 오직 주님의 어머니일 뿐이고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무염시태를 믿는 교리적인 존경심만으로는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내 어머니를 부를 때와 같은 가슴의 울림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성모신심이 두텁지 못하니 자연 그분의 모습을 닮는 것도, 그분처럼 살아가야 하는 일도 힘겨울 뿐만 아니라 진전이 되지도 않았다.  그 안타까움의 눈물 방울을 세듯 묵주알을 세며 정성껏 로사리오를 바쳐도 내 심정의 변화는 늘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했고 신심의 깊이는 바닥을 드러낼 뿐이었다.

내가 10여년 전 성지순례를 하던 곳의 성당에서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해괴하다는 느낌외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기에 그후로 까마득이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율리아 자매의 비디오 테잎을 보게 되었는데 믿어지지도 않았지만 다시 이 사건을 듣게 되던 날 한 편으로는 호기심에서 또 한 편으로는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나의 판단력을 스스로 점검해보고싶은 단순한 생각에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었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에도 어떤 역경 앞에서든 점쟁이나 미신 따위에는 단 한 번도 의지해본 적이 없었을만큼 강한 자아를 지닌 나였으니 이제 와서 이 사건을 무조건 믿게 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자꾸 궁금해졌고 몹시 기다려졌다.  드디어 비디오 테잎과 두 권의 책("은총은 강물처럼"과 "메시지집")을 받아들었을 때는 설레임까지 느끼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영상을 통해서지만 고집불통의 나에게 성체의 실체를 보여주기 시작했을 때 가슴이 조여드는 아픔과 함께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타성에 젖어 모령성체를 했었으면 저리도 처참한 모습으로 한 여인의 작은 입 속에서 호소를 하고 계시는 걸까!"하는 뉘우침이 나의 두 볼 위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율리아 자매가 그 피비린내를 감수하며 계속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이래도 너는 나의 성체가 한 개의 밀떡으로만 보이느냐?"하고 예수께서 다그치시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그 처절한 모습이 떠오르기만 하면 때를 가리지 않고 금방 눈앞이 흐려지곤 한다.

그리고 증언집(은총은 강물처럼)을 읽으면서도, 얼핏 생각하면 마치 병을 치유받는 것이 주목적인양 오해할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남들이 그렇게 잘못 해석하게 될까봐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아마도 예전의 나라면 분명히 그 점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비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가장 다급한 것을 먼저 해결해주고 싶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법이 그분을 증거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난 그렇게 믿는다.

문학성이 있는 작품도 아니고 다듬어진 글들도 아닌데 지루함도 느끼지 못한채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가 않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욱 깊은 가슴 속에서 내 영혼이 흐느껴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긴 울음을 울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활자가 한 줄 한 줄 내 눈을 스쳐가듯 눈물이 주룩주룩 빗줄기처럼 흘러내릴 때마다 나를 괴롭히던 그 유리벽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성모님의 따뜻한 피가 내 혈관을 타고 깊이 깊이 흘러들어가는 강한 전율을 느끼게 되었고 내 어머니가 보고싶듯 성모님이 보고싶어졌다.  바로 전날 허리를 다쳐 꼼짝없이 누워서 책을 읽던 나는 극심한 허리의 통증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내 방에 모시고 있던 성모님을 껴안고 "어머니! 저 때문에 그렇게 피눈물이 나오도록 울고 계셨군요! 용서해주세요!"라고 외치며 통곡을 했다.  똑바로 앉지도 못하는 나는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깊이 엎드렸다.  그리곤 성모님께서 메시지마다 애원하신 그분의 사랑받는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겐, 생각날 때마다 늘 마음이 불편한 사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제의 성화(聖化)를 위하여 항상 기도를 하면서 그 사제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다가도 바늘끝만한 자극에 부딪히면 또 다시 분노가 용암처럼 분출되곤 했다.  내 신앙 생활의 가장 큰 장애요소가 되는 이 고통을 성모님께 하소연했다.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시고도 먼저 성령을 보내시어 화해를 청하신 예수님처럼,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가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나와는 정반대인, 하느님의 방법을 이해하게 해달라고, 어릴 때 내 어머니에게 그렇게 했듯이, 성모님 치마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이 내가 성화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이 나를 괴롭히는 주범이지 이웃 사람이 아니다."  수없는 깨우침이 내 가슴문을 마구 두들겨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나"를 알아보았다.  벌레만도 못한 내가 거기 엎드려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어제까지 보아온 "나"는 나의 허상에 불과했다.

이렇게 돌같은 마음도 움직이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무슨 일을 못하시겠는가! 인간을 얼마나 존중하시면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복되다,"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신앙을 기대하셨겠는가!  반면에 그분의 기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시력(視力)의 한계에 맞는 이변(異變)까지 마련하시어 나주에서 자신과 성모님의 실체를 보여주신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기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로 자라나 꽃이 피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고, 호수에 떠있는 백조는 물론, 숨쉬고 먹고 생각할 수 있는 우리 인체의 모든 신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궁무진한 기적을 오직 습관적으로 무감각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으로 표현하시기엔 오히려 어떤 물상(物象)을 통해 피눈물을 흘리게 하심은 훨씬 단순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초등학생에게는 톨스토이의 인생론보다는 안델센의 동화가 삶을 이해하는데 더 빠른 지름길이 되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어느 시대건 못믿는 이와 믿는 이는 항상 공존하게 마련이다.  겸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착하게 어리숙하지도 못한 내가 나주 성모님을 의심없이 믿게 된 것은 "호기심"이라는 명목일망정, 마음을 조금 열어놓은 것을 기특하게 여기신 하느님의 은혜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와같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면서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오만의 두꺼운 껍질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나주 성모님을 통해 내가 체험한 기적은 나의 이 두꺼운 껍질을 깨뜨려주시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주신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것도 상상해보았다.  내가 만일 율리아였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단 하루도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없애고 모든 생활을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예수님의 오상의 고통을 증거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불가능한 형극일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받아야 할 비웃음과 수모에 아마도 즉시 돌아서고야 말았을 것이다.  얼마나 신중히 얼마나 열심히 그와 같은 영혼을 찾으셨을까?  아무리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허영심 하나를 메꾸기 위해 자기를 완전히 버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 못하신다는 하느님의 절대의 명령 앞에 거역할 만한 배짱이 있는 신자가 있을까?  어찌보면 만인이 우러러 보는 사람에게 발현하셨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명성 하나로 모든 것을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 그들이 평생을 바쳐 얻은 모든 가치와 바꾸어야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 험한 길에 동반자로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부끄럽게 하실 때가 많았다.  우리가 헤아리는 서열과 그분의 질서는 많이 달랐다. 루르드, 과달루페, 파티마 등등 세상 곳곳에 성모님께서는 가련하고 조촐한 영혼을 찾아오셨다. 우리나라라고 왜 안 오시겠는가?  나는 율리아 자매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 자매라고 왜 택함을 받을 수 없겠는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현세를 어찌 간과하시고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셨겠는가?

내 가슴의 유리벽을 허물어주시고, 믿지 않는 교우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신 내 어머니 마리아께 이렇게 위로드리고 싶다.

"어머니! 지치지 마세요. 저와 같은 죄인도 어머니 말씀을 알아듣는데 다른 이들이야 더 잘 알게 될 겁니다.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꼭 이루어지잖아요? 저도 도와드리겠어요."


한 경애 로사리아
캐나다 토론토 시
1999년 9월 25일

 

 

천 시몬 형제의 편지

 + 나주 성모님께 찬미

주님 안에서 윤 율리아 자매님께
윤 율리아 자매님!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안녕하십니까?
저는나주 성모님 메시지 보급회에서 나온  '은총은 강물처럼' 이라는 책자를 보고 율리아 자매님을 알게 된 청주교도소 수용자 53세의 천기화 시몬입니다. 저는 사회에서의 한 순간 큰 잘못으로 장기수의 몸이 되었고 9년이 넘도록 이곳 생활을 하였으며 앞으로도 약 3년여의 이곳 생활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구속될 당시 죽겠다는 심정으로 치사량 이상의 극약을 마셨는데 병원 응급실을 거쳐 사흘만에 깨어났고 작은 후유증 조차도 없어서 그후에 수감 생활을 하면서 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으로 저를 살려주신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생활해 왔습니다. 평소에 묵주기도를 특별히 많이하여 하루에 100단 이상씩을 하였었지요.

그런데 약 2개월 전 어느 형제가 가지고 있던 '은총은 강물처럼'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가 마침 성체 성혈 대축일을 몇일 앞둔 시기였기에 책의 내용과 사진 설명속에 성체가 성혈로 변화되는 율리아님의 사진을 보면서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와 함께 성모님으로부터 치유의 기적들을 받으신 사연들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상본이 없었기 때문에 '은총은 강물처럼'의 표지에 있는 성모님 모습을 앞에 놓고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쳤습니다. 기도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하루 100단이 넘던 양을 50단으로 줄이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먼저 저의 건강을 돌봐 주십사고, 저도 장미 향기를 맡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비몽사몽간에 짙은 장미향기를 맡고 그 이튿날 저와 다른 형제들이 쓰고 있는 스킨, 로숀들을 가져다 냄새를 확인해 보아도 장미 향기와 다르기 때문에 더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몇일후에는 제 왼손에 통증이 없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70년도에 월남전에서 왼팔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신경이 절단되어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왼손가락들은 완전 치유가되지 않아 그로인하여 전상 제대를 하였으며 다친 그날부터 최근까지 왼손바닥 전체가 바늘 수백개로 찌르는듯한 통증과 저림 속에  살아왔었는데 그 통증과 저림 현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주 성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눈에 보이는 치유의 기적도 하나 주세요 하고 애원하며 제 오른쪽 눈 밑에 아주 오래된 사마귀같고 티눈 같은 것을 없애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바늘 끝으로 파내도 않되고 점빼는 약을 발라도 다시 나오는 어쩔수 없는 작은 사마귀 종류였지요. 그래서 제가 묵주 기도드릴 때마다 책 표지의 성모님 얼굴 턱에 맺힌 눈물 방울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다시 눈밑에 그 손가락을 갖다대고 기도를 하곤 하였지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후 기도시간에 그 사마귀가 가려워서 긁었는데 그냥 빠져 나왔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성모님 정말 감사드립니다하고 기도한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성모님 한가지만 더 떼를 쓸께요. 제가 더워서 땀이 나면 돋보기 쓰고 책 읽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냥 읽을 수 있도록 좀 해주세요. 하면서 성모님 턱에 눈물을 찍어다 제 양 눈두덩을 누르고 책을 들어서 눈을 감고 성모님 턱에 고인 눈물을 제 양눈에 번갈아 몇 초씩 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성서, 은총은 강물처럼, 신문 등을 돋보기없이 맨눈으로 그냥 읽습니다.  중간에 돋수를 높여 7년간이나 쓰던 돋보기를 벗고 읽을 수 있는 기적을 주셨습니다.

그외에도 두세가지 기적이 또 있는데 지면 관계로 다 적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기적, 치유의 은혜는 제가 성모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약 2개월 전에 많이 상심되는 일로 인해 냉담까지 하려 한 적이 있었지요. 그 당시에 이 책을 보면서 성모님께 애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도록 저에게도 보여 주셔서 지금의 제 마음을 구원해 주십사고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중에는 아직 뵙지도 못한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시면 상본과 메시지 책자, 그리고 묵주도 좀 보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곳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제는 이곳 천주교 미사가 끝나고 생각도 못했는데 수녀님이 200여 형제들과 20여 자매님들 앞에서 신앙 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라고 하셔서 그러지 않아도 신부님과 수녀님께 신앙 상담을 하려고 했었는데 바로 성모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편지에 드린 사연과, 또 다른 치유의 기적까지 말씀을 드려서 감동과 박수갈채를 받았고 나주 성모님을 마음껏 자랑하였습니다. 정말 예수님과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율리아 자매님!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안녕히 계십시오.
    다달이 발행되는 소식지가 있으면 좀 보내주십시오. 저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나주 성모님을 홍보 하는 보람으로 기쁨속에 살아갑니다. 그럼 율리아 자매님과 율리오 형제님 그리고 그곳에서 봉사하시는 모든 분들의 안녕을 위해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도와 전구 드리며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9년 7월 8일
청주에서 천 시몬 올림
청주우체국 사서함 144-885호

 

폴 형제의 증언

 저의 이름은 폴 록(Paul Rock)입니다. 인디아 태생의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부족하지만 나주 성모님의 사도로서 그리고 여러분들의 형제로서 나주 성모님의 사랑을 베트남, 프랑스 그리고 인도에 전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지금 핵 분쟁의 위험에 처해 있는 파키스탄에도 나주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인도는 미국처럼 여러 개의 주가 모여서 이루어진 연방 국가입니다. 사용되는 언어는 50가지가 넘지만 그중 주요한 카밀어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번역되어 전파되고 있고 또한 다른 언어로도 현재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번역작업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동남 아시아에서도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활발히 전파되고 있으며, 특히 베트남 형제 자매님들의 나주 성모님에 대한 사랑은 유별납니다. 아마 7월 중순경에는 약 150명 정도의 미주지역 베트남 신자들이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할 계획으로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가톨릭 인구비율이 7-8 %인 공산국가입니다. 국가의 모든 종교에 대해서 공산당 정부가 장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제 서품이나 주교님들의 서품이후에도 정부에서 인정을 하지 않으면 거의 모든 종교적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따라서 가톨릭의 신앙전파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베트남에서의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아주 잘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나주 성모님의 사랑을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주 성모님에 관한  여러가지 소식들을 전하러 베트남에 가기 위해 성모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약 3개월 전 베트남에 갈수 있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상과 비디오 테이프, 메시지 책을 가방에 넣고 갔는데 무척 걱정이 많이 되었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제 가방에서 나주 성모님의 성모상, 책, 비디오 테이프등을 보았다면 잘못된 사상을 유포시킨 죄로 저를 감옥에 구금시키거나, 비행기를 태워 추방하거나 하는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관 신고대 앞에 검사를 하러 갔을때, 세관 직원이 제 가방을 검사를 하고, X-Ray 투과기를 거치고 나서도 아무런 제재없이 통과를 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도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성모님께서 그 세관 직원들의 눈을 가리워 주신 것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 상은 지금 사이공 남부에 있는 '풀롬'이라는 도시의 큰 성당에 지금 모셔져 있습니다. 그곳 본당 신부님께서는 공식적으로 많은 신자들 앞에서 "이 성모님 상은 나주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주 성모님과 똑같은 성모님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신부님께서는 나주 성모님 상을 성체가 모셔진 감실이 마주 보이는 정문 위에 아치모양으로 예쁘게 꾸며진 작은 집에 나주 성모님 상을 모셔 놓으셨습니다. 신부님은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으시는 한국 나주의 율리아 자매님은 세상의 죄인을 위해 고통을 많이 받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특별히 미사가 끝나고 나가실 때 성모님을 보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성모송을 꼭 한번씩만이라도 바치고 나가십시요"라고 미사 때 말씀하셨으며, 그날 성모님상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 나주에 오기 바로 전에 신부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든 신자 분들이 미사가 끝나거나 시작 되기전에 성당 문위에 모셔진 나주 성모님 상을 보며, 세상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성모송을 꼭 바친다고 합니다.

제가 베트남 세관의 통과가 무척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베트남 입국시 나주 성모님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를 많은 복사가 가능한 마스터(Master Tape) 테이프 하나만을 가져갔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비디오 테이프를 다른 이들에게 복사해서 나누어 주려해도 복사할 기계도 없었고, 또 그 일을 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받을 탄압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하려는 분들을 찾기가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관해 나주 성모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그 일을 기꺼이 하겠다는 신심 깊은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지금 나주 성모님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트남을 길이로 보면 남북의 길이가 2,500Km인 무척 긴 나라입니다. 제가 갔던 "풀룸" 지역은 베트남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이점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곳에서 신심 깊고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정말로 목말라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 나주 성모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였으며, 지금 나주 성모님의 사랑은 여러 가지 위험 속에서도 굽힐줄 모르는 신심과 사랑의 마음속에 많은 분들의 입과 손과 발을 통해 퍼져 나가고 있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어로 번역된 나주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도 복사를 해서 전파되고 있습니다. 직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기적처럼 일이 잘 추진되는 것을 보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임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성모님의 사랑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지켜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작년 나주 성모님 집에 왔었을 때 제가 부탁 드렸던 기도를 열심히 해주신 모든 형제 자매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또 한가지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 일은 인도 북부를 통해 파키스탄에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입니다.
파키스탄은 많은 편파적인 회교 율법이 있기에 잘못하면 돌을 던져서 죽이는 국법이 지금도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회교 율법가운데 가톨릭 신자에게 가장 위험한 내용은 이슬람 신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슬람 성직자가 와서 가톨릭 신자에게 말을 해서 만약 그 신자가 이슬람 유일신인 알라를 거부거나 그들의 선지자인 모하멧에 대한 존경심을 안 가진다면 감옥에 가야하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파키스탄에 제가 나주 성모님의 사랑과 현존이 흘러 들어가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위대하신 현존을 이슬람 교도들에게 알리려고 하며, 그곳의 열심한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고자 합니다. 지금 인도에서는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거의 모든 지방에 전해져 있고 어떤 신학교에서는 영성 교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인도의 북부를 통해 직접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파키스탄을 찾아가 용감한 신자들에게 나주 성모님의 훌륭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또 한가지는 지금 스리랑카 내에서도 많은 내전이 발발하고 있습니다. 소수지만 열심한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며,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이 많이 발생하는 그곳에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마른땅에 단비와도 같습니다. 특히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도회의 수녀님들을 통해서 스리랑카의 그 수도회에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잘 들어가 전파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머지않아 스리랑카에도 전쟁이 없어지리라 확신합니다.

파키스탄에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길 다시한번 부탁 드립니다. 모든 일이 성공리에 잘 된다면 저는 내년에 살아서 이곳 나주 성모님 집에 다시 올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9년 6월 5일 첫토요일에
ROCK PAUL
S, RUE GRACIEUSE, 75005 PARIS (FRANCE)
TEL. (33-1) 45-35-43-35

 

 

저는 교만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 찬미 예수님, 성모님

저는 그런대로 신세대이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계몽주의, 합리주의, 르네상스를 많은 의의가 있는 사상 및 사건이라고 배워 왔으며, 지금은 공학도로서 정보통신분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저에게 종교라는 것은 저의 삶을 규제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그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경을 설화나 감동적인 이야기처럼 생각해왔던 때문이고, 하나는 살아오면서 저도 모르게 습득된 합리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근 20여 년 동안의 저의 신앙생활은 그저 주일에 가서 미사 드리고 때되면 허겁지겁 고백성사를 보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근래에 저는 나주 성모님 홈페이지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눈물,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사진,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 입에서 살덩어리로 바뀌는 성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저의 신앙체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교리가 인간들이 그냥 만들어놓은 교리가 아니라 정말로 천상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그리고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해 계신 예수님을, 성모님은 피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성체가 하늘에서 내려오시는걸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진만으로도 저는 변화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성모님의 눈물은, 신앙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했던 굳은 마음을 가진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성경말씀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말씀임을 깨닫자, 성서의 여러 사건은 2000년의 갭(gap)을 뛰어넘어 지금 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이셨고, 참으로 인간이셨고, 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주님수난주일에 수난복음을 들으면서, 저는 난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만과 이기심으로 굳을 대로 굳어진 저는 20년 동안 예수님을 계속 못박아 왔던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나중에는 울음을 참느라 목구멍이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제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약하고 죄 많은 인간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구절구절 감명을 받습니다.

저는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타고난 교만 때문에 스스로를 잘난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똑똑하신 분들 앞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시 효자3동 754-17 2/4
김학자 루시아


미얀마(버마)의 라쇼에서의 기적들

릴리 우 자매의 증언         

(번역자 주:  릴리 우 자매님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앤젤레스에 살고 계시며, 작년 1998년 10월에 다른 미국인 순례자들과 함께 나주를 다녀왔습니다.  나주에서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자기 고향인 버마에 가서 약 3개월간 머물면서 거의 매일 저녁 가정집에서 또는 성당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주 성모님에 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시다싶이 버마는 전통적인 불교 국가로서 인구의 90%가 불교 신자이며 가톨릭 신자는 겨우 1% 그리고 개신교인 침례교 신자는 3%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서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에 대한 소식에 접한 많은 버마인들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받아들였으며, 또 성모님께서도 기쁨의 징표로서 많은 치유와 향기 등의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수년 전에 교황 성하께서는 바티칸을 방문하신 한국 주교님들께 (나주에서의) 이렇게 훌륭한 은총을 모든 아시아 사람들과 나누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우리는 나주 성모님의 소식이 아시아 대륙 및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로 힘차게 전파되도록 다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1998년 10월 16일 야마스 신부님과 쥬디 나바레떼 자매님이 인솔하시는 33명의 순례단에 참가하여 로스 앤젤레스를 떠나 나주로 갔습니다.  10월 19일은 성모님께서 나주에서 처음으로 피눈물을 흘리신 12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나주에서의 1주일 간의 순례를 마치고 저는 저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하여 버마로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부인 저의 오빠에게 드리려고 눈물흘리신 나주 성모님 상과 꼭같은 성모님 상을 모시고 갔습니다.

10월 25일, 저는 저의 고향이며 버마의 북부 샨 주의 수도인 라쇼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성모님 상을 저의 오빠인 놀만 요셉 우 신부님께 드렸습니다.  신부님은 휴가 중이라 가족을 방문하러 와계셨습니다.  이틀 후에 저는 저의 친구 집을 방문하였으며 나주 성모님의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딸 디디에게 성모님의 사진이 들어있는 메달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는 또 그 집에 갔는데, 디디는 자기 친구에게 나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메달을 비비면서 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들 주위에서 장미 향기가 풍겼으며, 메달을 만지고 있던 디디의 손가락들에서도 향기가 났습니다.

며칠 후에 저는 성당 별관에서 열린 가톨릭 부모 협회의 월례 모임에 가서 나주 성모님께 대해 얘기했습니다.  저는 성모님 상을 모시고 갔고 50장의 사진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사진들을 네 장의 큰 마분지에 붙여서 전시를 했습니다.  저는 약 50명 되는 이들에게 사진 설명도 하고 메시지들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부님들도 여러 분 계셨는데, 많은 이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주 성모님의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신부님들, 수녀님들, 평신도들, 그리고 신자 아닌 사람들까지 저희 집으로 와서 더 많은 소식을 듣고저 했고, 사진들, 묵주, 메달, 그리고 기적수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다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매우 아쉬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진관에서 사진들을 더 많이 현상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진을 많이 만들어 와도 부족했습니다.  천 장 정도의 사진을 나누어주었으며, 한 가정에 한 장 씩만 주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나주 성모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가를 보고서 저는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주일이 되어 저는 처음으로 성당 밖 마당에서 나주 성모님의 사진들을 전시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캐롤린 바 틴이라는 학교 여선생이 딸, 폴린과 함께 성모님 사진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폴린은 결핵성 부종으로 목 주위가 부어서 많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부종들은 이미 여러 해 되었기 ‹š문에 큰 혹들처럼 목 주위에 끔찍하게 나있었습니다.  캐롤린은 성모님께서 피눈물 흘리시는 사진과 성체 기적의 사진을 딸의 목에 거듭 거듭 대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폴린의 부종과 통증이 깨끗이 없어졌습니다.  폴린을 진찰한 의사는 대단히 놀랐으며, 그 치유에 대해 의학적으로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가정집들에 모여서 저를 초청하여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š로는 성당에서 모이기도 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저는 성모님 상과 사진들을 가져갔으며, 성모님 상을 그 집에 하루 밤 모셔놓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집에서 철야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라쇼에 3개월 간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저녁 기도회가 열렸으며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1998년 11월 15일 밤에 성모님 상에서 상쾌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줄곧 계속되었습니다.  때로는 향기가 매우 강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좀 약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묵주 등 성물을 성모님 상에 대면 그 성물들에서도 향기가 났습니다.  

그런데 성모님 상을 모셨던 가정들 거의 모두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 집에서는 불교 제단 위에 있는 꽃들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어떤 집들에서는 집 전체에 장미 향기, 백합 향기 또는 향불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한 개신교 신자 자매님은 성모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성모님 상으로부터 세 번 나오시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앓고 있던 무릎병이 나아서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모님 상으로부터 찬란한 빛이 비쳐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부인은 손녀와 같이 자다가 새벽녘에 강한 장미 향기에 잠이 깼는데, 조용한 여인의 목소리로 "일어나서 묵주 신공을 드리라" 하는 말을 듣고서 가족들을 깨워 묵주 신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제들을 위하여 묵주 신공을 바칠 때 장미 향기가 더욱 강하게 났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회개와 치유의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남자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성모님 상의 성모님께서 고개를 움직여 숙이시고 그를 바라보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동시에 강한 장미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과 평화에 가득차게 되었다고 나중에 증언을 했습니다.

한 부인은 알콜 중독자였는데, 자기 집에서 기도회가 열릴 것을 청하여 그 집에서 성모님 상을 모시고 약 30분간 묵주 신공을 드렸습니다.  바로 그날 밤 그 부인은 또 술을 마셨는데 금방 토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한 처녀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늘 가톨릭을 비난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나주 성모님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지금은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하여 교리반에 다니고 있습니다.  

또 한 명의 개신교에 나가던 소년도 교리반에 다니게 되었는데 신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묵주 신공을 바치다가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보았을 때 장미향기를 맡았다고 합니다.

간호사로 일하다가 은퇴한 개신교 신자는 당뇨로 인해서 실명을 했습니다.  그 부인의 딸들이 어머니를 저희 집으로 모시고 와서 성모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다음 날 그 부인은 조금씩 보기 시작했으며, 몇 주가 지나서 진찰을 해보니까 당뇨가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생후 5개월 된 애기가 있었는데 날 때부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사를 자주 했으며 특히 밤에 기침을 하고 울어대었습니다.  애기 어머니와 할머니는 교대로 잠을 자지 않고 아이를 돌보면서 수없이 의사를 찾아 갔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였으나, 철야 기도가 있는 집으로 가서 나주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 그 사내 애기는 정상적인 아이가 되어 기침도 안하고 울지도 않고 설사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모님 덕분에 그 아이는 이제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성모님께 순금으로 된 왕관을 선물드렸습니다.  1999년 1월 16일에 저는 신부님 한 분과 몇 분의 수녀님들과 저희 기도회 회원들을 초청하여 나주 성모님의 대관식을 가졌습니다.  

나주 순례 중에 로스 앤젤레스에 사는 이 로사 자매님께서 나주의 율리아 자매님께로부터 받은 묵주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묵주를 저의 오빠 신부님께 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성모님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오빠 신부님은 휴가가 끝나서 소속 교구로 돌아가시면서 성모님 상은 그냥 집에 모셔두고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셨기 ‹š문입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향기는 신부님을 따라가셨습니다.  신부님께서 버스에 타서 기도하려고 묵주를 꺼내셨을 때 버스 안이 온통 장미 향기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빠 신부님의 친구이신 폴 신부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빠 신부님께서 방문하여 기도하시는 집마다 장미 향기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나주에서 온 그 묵주로 접촉하는 성물마다 향기가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기적의 징표들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성모님의 메시지와 경고를 주의깊게 들을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힘껏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시급히 그리고 용기있게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파하십시다. 우리의 삶 전체를 성모님께 바쳐드리십시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우리를 쓰셔서 인류를 하느님께로 다시 불러오시도록 도와드리십시다.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사랑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우리의 성모님을 위로하여 드리십시다.  


릴리 우
캘리포니아, 로스 앤젤레스
1999년 3월 11일
(번역:  Mary's Touch By 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