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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 테잎을 통하여 자궁암을 치유시켜 주시고,
    이단에서까지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박숙자(레지나)


저는 성모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몸과 마음을 치유 받은 부산 중앙 본당, 박숙자(레지나)입니다.
저는 남편의 도움을 받지 못할 형편에 있을 때라 계란장사를 하던중 자궁암에 걸렸는데도 수술할 비용이 없을 뿐더러 할 처지가 못되었으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장애인 남편의 시중을 들면서 근근히 살아 가던중 나주 율리아씨가 받은 고통 테이프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고치고 싶어도 고치지 못했던 자궁암이 성모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사랑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뒤 성모님을 잊은채 이상한 이단교(증거 장막 성전교) 에 빠졌는데 거기에는 유명하신 분들도 많고, 환속한 신부님도 계셨는데 환속한 신부님이 "내가 왜 천주교를 버리고 이곳에 왔겠느냐." 하시는 말에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왔습니다.
거기에서는 "성경 말씀으로만 무장하면 천국에 가는 길이다."하여 저도 그 교리에 빠져서 성경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 백독 이상을 하여 말씀으로 무장하였다고 생각하며 저는 이단교에 빠져서 도저히 희망이 없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중앙 본당 임안젤라 자매님의 권유로 나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미 향기가 난다고 하여 저는 '장미향기가 아니고 향수를 뿌렸겠지!' 생각하고 판단하여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그 뒤 안젤라 자매님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나주에 갔는데 장미향기를 또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미향기가 바뀌어서 소독냄새와 한약냄새등 여러가지 내음이 풍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갑자기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성모님상 앞에 서서 "성모님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나는가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3일간 성모님 집에서 기도하면 많은 은총을 받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고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더니 몸이 풀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리어카 행상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몸이 불편하여 제가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그 말씀에 따라 3일간 나주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때 인천에서 온 정신병에 시달리는 자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손가락을 흔들면서 제 뒤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했는데 나주 성모님 집에서 정신병이 완전히 치유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는 동안 나주 성모님을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또 다시 회개의 은총을 받은 것은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기 위해서 빨마가지와 옷가지를 던져주며 환호하니 예수님이 타고 간 당나귀가 자기를 환영하는 줄 알고 좋아 어쩔 줄 몰라하며 껑충껑충 뛰어 버린다면 예수님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고 하시는 그 이야기는 당나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드려야 되는데 우리가 봉사하면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자기가 하는 것인 양 한다면 바로 당나귀가 뛰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일한다면 예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부끄러워 얼마나 많이 울고 회개했던가?
우리 모두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일한다면 예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감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말씀으로만 무장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성서를 여러번 봉독하였는데 교만했던 마음이 예수님을 떨어뜨리지나 않았나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회개의 눈물이 쏟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이단에서 나오게 한 그 은총은 하해(河海) 와 같습니다. 안젤라 자매님 희생으로 말미암아 저는 새롭게 탄생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주님의 많은 은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주 성모님께 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영혼과 육신의 치유)  지금 성모님의 은혜에 한없이 감사합니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인준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며 나주 경당에 성체 조배실이 생기게 되기를 바라며 제 여동생도 천주교 신자였는데 여호와의 증인 방문을 받고, 그 교리에 빠져서 침례식 하기 전에 나주에 불림을 받아서 다시 천주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가정 성화를 이루며 잘 살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은혜로, 두 가정이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드립니다.

 1995년 1월 23일
부산시 중구 부평1가 18번지 3통 1반 귀부인 옷가게
부산 중앙성당 박숙자(레지나) T.248-4191

 

 

고혈압을 치유하여 주시고 마음까지도 바꿔 주신 나주 성모님 

김영창(요한)

 

찬미예수
대천에서 온 김영창 요한입니다. 먼저 저를 불러 주신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작년 5월부터 어지럽고 몸이 많이 아프고 하더니 고혈압까지 생겨 병원에 가 진찰한 결과 '혈압이 170- 210까지 올라가 위험하니 약을 먹고 병원치료를 하시오.'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가 치료도 받고 한의원에 가 침도 맞고 약을 매일 먹었으나 혈압은 전과 같이 높았고 여전히 낮아지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민 중일 때 어머님께서 나주에 성모님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저보고 거기 한번 가보라고 여러차례 말씀하시기에 작년 8월 첫토요일에 나주에 와 성모님께 밤새도록 철야 기도를 하고 성령을 받고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를 받고 돌아왔으나 9월은 나주에 못 왔습니다.


그리고 10월 첫 토요일에 나주에 또 왔습니다.
그날밤도 나주 성모님 집에서 철야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지내니 혈압이 낮아졌습니다. 매일 먹던 약도 그 후로 지금까지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주 성모상에서 장미 향기를 2번이나 맡았습니다.
또한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와 강론을 듣고 제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제가 앞에 나아가 말을 하여야 하오나 저는 몸이 약하여 어디 앞에 나가 말할 주변도 없고 앞에 서면 음성과 몸이 자꾸 떨려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은혜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6년 10월
대천성당 김영창(요한)

 

 

교황 대사님과 함께 한 성체기적 

김선양(율리안나)

 

오늘은 눈물 흘리신 성모상에서 향유를 흘려 주신지 2주년이 되는 날이며 죠반니 교황 대사님이 이곳 나주 성모님을 방문하신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나는 인천에서 교황 대사님보다 조금 일찍 나주 성모님 집에 도착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얼마 후 대사님과 비서신부님, 파레몬도 신부님, 그리고 춘천 교구 오상철 신부님이 오셨고 속초, 서울, 인천, 부산, 대구, 전주, 광주, 순천 등 여러 곳에서 온 순례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율리아 자매한테서 한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성모님 집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을 때 율리아 자매님이 파 레몬도 신부님과 잠시 이야기 나누더니 파신부님과 함께 기도 중에 계시는 교황 대사님께 다가가 대사님께서 성모님께 왕관을 씌워드리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던 것이다. 대사님은 쾌히 승낙하시고 왕관을 가져오도록 하시었다.
대사님은 준비된 왕관을 성모님 머리 위에 씌워 드렸다.
율리아 자매님은 성모님 제단 앞에서 묵상 중에 계시는 파 신부님께 "신부님, 십자가에서 빛이 내려오고 있어요" 하시자 파 신부님은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조금 후에 율리아 자매님은 파 신부님과 조용하게 어떤 이야기를 나누더니 교황대사님과 파 신부님에게 다가가 자신의 손에 강복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때 파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님으로부터 2년 전에 받았던 성모상에서 흘리셨던 향유를 대사님께 드리니 대사님은 그 향유를 찍어 율리아 자매님의 손에 발라 강복해 주셨고 파 신부님도 강복해 주셨다. 그 후 율리아 자매님은 성모상 앞에 꿇어 앉아 한참 기도를 드리더니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급히 달려가 보니 율리아 자매님은 심한 고통으로 몸을 떨고 있었고 손에는 사제들이 사용하시는 큰 성체의 반쪽이 오른손 중지 사이에 끼어 있었고 다른 성체의 반은 율리아 자매님의 왼쪽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은 반쪽의 성체를 대사님께, 다른 반쪽은 파신부님께 드렸다.
성체의 문양은
A,W가 선명하게 이러한 A+W 모습으로 보였는데, 1993. 6. 27. 사진에 나타난 성체 문형과 똑같은 것이었다. 두 분은 성체를 조금씩 떼어 먼저 대사님과 신부님이 영하시고 그 다음에는 율리아 자매님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분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은 조각들은 파 신부님이 작은 성합에 모셨다.
성체는 미카엘 대천사가 가져온 것이라기에 모령성체하는 사람에게서 가져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모령성체한 적이 없었는가? 하며 반성할때 두려움에 떨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 성체를 교황 대사님과 파신부님이 70여명의 신자들 모두에게 영해 주셨다.
 성체를 받아 모신 소감은 입 안에 모신 성체가 눈처럼 부드럽게 녹아 스며드는 것이었다. 순천의 어떤 형제님은 성체가 목에 걸렸는데 생각해 보니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분노가 가시지 않아 죄 중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파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교황 대사님을 위시한 모두가 하느님의 놀라운 성체 기적을 보고 한편은 크게 놀라고 또 한편은 너무나 감격해 소리내어 울부짖기도 하였다.
율리아 자매님은 지금 몹시 추우니 자신의 방에 가서 금방 받은 메시지를 적어 오겠다고 하면서 "성모님께서 대사님을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이 곳에 감실을 만들어 모시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율리아 자매님은 경당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되돌아섰고(급히 부르시는 성모님 음성을 들으셨다고 함)  "쥬리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귀염둥이 사제 죠반니와 너의 영적 지도자의 손을 잡고 나에게 오너라."하신 성모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 중이시던 대사님과 파신부님의 손을 양쪽으로 잡고 성모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 눈을 감고 잠시 기도하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갑자기 장궤를 하며 고개는 하늘로 향하더니 그 순간 위에서 작은 성체 하나가 율리아 자매님 혀 위에 내려왔다.
대사님이 성체를 혀에서 꺼내어 교우들에게 보여 주시고 성체는 파신부님이 작은 성합에 모셨다.
교황 대사님은 교황님을 대리하여 우리에게 강복해 주시고 성모님 집을 떠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대사님이 나주에 오신 것은 개인 순례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교황청 대표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모님께서 대사님을 특별히 부르셨음을 모두가 알고 기뻐하며 감사했다. 이 날 나주 성모님의 집에 오신 분들은 사제 일곱분과 70여명의 교우들이었다.
또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아일랜드에서 오신 신부님은 추로써 살았는지, 죽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있다고 하며 남자는 오른쪽으로 돌고 여자는 왼쪽으로 돌며 중성은 왔다갔다 하고 죽은 사람은 멈춘다고 했는데 추로 성체를 측정하다가 오른쪽으로 도는 모습을 보고 "살아 있는 남자다."하더니 재빨리 무릎을 꿇어 장궤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신부님의 모습은 너무도 진지하였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번 나주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 향유를 흘리심과 성체의 기적들, 또 장미향기, 그리고 여러가지 병나음의 기적들 즉 암과 여러가지 불치병, 장님이 눈뜨는 것까지도 보아 온 나였지만 이번의 이 기적이야말로, 성모님께서는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 즉 성체께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지은 잘못에 대하여 더욱 뉘우치고 회개하며 새로운 삶을 다짐해 본다.

 *성모님께서 교황 대사님의 이름을 죠반니라고 부르셨다. 율리아 자매는 "교황 대사님이 죠반니예요?"하며 어떤 사제님에게 물었다 한다. 그 사제님도 몰라서 가톨릭 주소록을 보고 알았다 한다.

 1994년 11월 25일
인천시 남구 용현2동 571-3
김선양(율리안나) T.(032)887-3222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고 20년된 축농증이 치유 되었습니다.

임세실리아

 

저는 나주 본당 임세실리아 입니다.
성모님께 받은 은혜는 너무 많아 다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성모님의 영광을 위해 몇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처음 눈물 흘리신다는 소리를 듣고 와 보고 싶었지만 와 보지 못했고 또 피눈물을 흘리실 때도 듣기만 하고 와 보지 못했습니다.
자식과 며느리들이 못 가게 해서 철야 기도회에 오고 싶어도 못 오고, 병이 치유된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오고만 싶었습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다니고 싶어서 나주로 방을 얻어 혼자 나와 살면서 철야 기도를 다닌 지 2년 5개월(94년 7월 현재) 이 되었습니다.
성모님 집에 오기 전에 신경통으로 다리가 많이 아파서 병원이라는 병원에는 다 다녀보고 약이라는 약은 다 먹어봐도 낫지 않았고 동생이 25만원짜리 약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먹으면 낫는다 해서 사 먹어도 낫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먹어도 낫지 않고 저것을 먹어도 낫지 않아서 이러다가는 내가 병신으로 살런지 모르겠다 하고 약을 끊고 성당과 성모님 집에만 다녔습니다. 25만원짜리 그 돈을 하느님께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느님께 인색하고 성당에는 주일날 봉헌금 천원 갖고 나갔는데 그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약을 다 끊고 그 몫의 돈으로 연옥 영혼을 위해 미사드리고 가정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대모님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또 경당에 다니면서 기도했습니다.
처음 4개월은 죄가 많아서 이 세상에서 지옥벌을 받아야 할 이 죄인이 주님의 보혈로 영세 성사를 받아 죄 사함을 얻었사오니 이제 회개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철야기도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철야 기도회에 다닌 지 4개월 만에 번개 불빛이 내려와 나의 온몸이 뜨거워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령의 빛이었습니다.
철야 기도회가 끝나고 메시지 테이프를 가져다 듣는데 아픈 다리가 화끈거리더니 다리가 치유되었습니다. 다리가 치유되는 순간 뱀이 발에 밟혀 동강나 죽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20년 된 축농증이 나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몸이 건강해지자 봉사를 다녔습니다.
한번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고 정신도 온전하지 못하신 할아버지의 병간호와 시중을 했는데 대, 소변을 묻혀 놓은 옷을 버리지 않고 빨면서 구린내가 심하게 났지만 주님과 성모님께 이런 빨래를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올렸더니 그 순간 구린내는 어디 가고 성모님의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인 이름으로 성모님께 봉헌을 하고 났더니 그 다음날부터 정신이 온전해져서 식사도 잘 하시고 대, 소변도 뒷처리까지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올해 64세인데 척추가 굽어서 무거운 것을 들지도 못하고 걱정만 했는데 지난 사순절에 나주 성모님의 집에 와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매일 바쳤더니 40일이 다 되어갈 때 쯤 몸이 떨리고 어깨도 허리도 아프고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못 바치겠다 싶었지만 예수님 십자가를 생각하며 부활절까지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십자가의 길을 꼬박 바쳤더니 허리가 펴졌습니다.
 주님과 성모 어머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1994년 7월 3일
나주 본당 임세실리아 T.(0613)32-3077

 

 

귀머거리, 눈먼 봉사, 반 벙어리였던 이 죄인 

 이용기(아델라)

'누구든지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과 생각과 정신 속에서 살아 계시는 성모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자녀문제 가정 안에서의 어려움들이 아픔과 상처가 되어 증오심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내 마음 속의 허전함은 주님과 성모님을 찾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성령 세미나를 통해 성모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나는 나주 성모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은 마음, 나를 부르시는 것 같은 마음을 느끼며 92년 7월 첫 토요일 철야 기도회에 갔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의 메시지 전달과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회개의 물결이 내 마음을 씻어내듯 파도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살아왔던 아픔과 미움 증오심들을 오, 주여, 용서하소서! 나에게 주신 고통은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수없이 기쁨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고 성모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계시며 생활 속에 풍랑이 일고 비바람칠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고 도와주시며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품에 안기듯 따뜻하게 감싸주시고 안아주시는 동안 주님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넘치는 듯했습니다.
 나의 작은 마음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고 우리가 다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여 주시는 사랑의 주님과 함께 계시는 어머니! 사랑의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생활속에 사랑 실천을 원하시는 어머니, 나의 허물을 덮어주시며 감싸주시고 걱정하시며 애태우시는 모성적 사랑의 성모님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수 없이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동안 나는 귀머거리, 눈먼 봉사, 반 벙어리였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이 몸을 당신께 드립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주관하시며 어머니 성심의 사랑안에 의탁하오니 온전히 받아주소서.
 또 어머니의 메시지를 들으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강한 믿음으로 다가와 위로와 희망이 되어 내마음 설레입니다.
 어머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 자녀들과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
 지금 이 시간까지 지내온 날들이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 천주의 모친 우리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를 보호하심을 믿나이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삼청3동 287번
이용기(아델라) T.(0545)973-9647

 

 

귀와 눈이 멀어 방향감각까지 잃고 있던
불쌍한 죄인을 이단에서 꺼내시고자 

임안젤라

'우리를 끝없이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성모님!'
이 죄인을 그렇게도 사랑하셨습니까?
성모님께서 이 죄인에게 내려주신 사랑은 그렇게도 컸지만 잠깐 눈이 멀어 하마터면 이단으로 끌려 들어갈 뻔 했었고, 그 길에서도 눈이 멀고 귀가 멀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고통을 허락하셔서라도 이 죄인을 구하시고 치유해 주신 은혜 감사 드리며 이글을 성모님께 올립니다.
평소 제가 사랑했던 서면 본당 레지나 자매님이 어느날 저에게 찾아와 성경 공부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너무 좋아 응답을 했는데 100일간 하루도 빠짐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일을 해야 되니 나주에 있는 목요 기도회는 커녕 첫 토요일 철야 기도회까지도 가지 못하고 성경 공부를 했는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성서 공부는 좋지만 처음부터 배가 몹시 아프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설사를 줄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주 율리아 자매님과 연락이 되었는데 기도하면 되니 어서 오라고 하였지만 그때 어둠에 싸여있던 저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섭섭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딸이 아파 있으면 좀 와서 기도해 주시면 안 되나?'
그런 마음으로 나주에 가지 않고 성서를 배웠는데 이단에서 성서풀이 하는 것도 전혀 모르면서 공부했기에 중앙 성당에서 임안젤라와 이마리아는 알곡 중에 알곡이라고 하면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며 칭찬하는 말이 좋다 보니 교만이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려 이성을 잃었으면서도 정상인처럼 행세하며 살았으니 마귀가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율리아 자매님의 연락에도 불구하고, 응하지 않았던 제가 이젠 말씀도 좋지만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어 그동안 약도 사먹고 병원에도 다녀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아! 성모님이 어둠에서 살고 있는 나를 구해 내시고자 율리아 자매님과 연락을 하게 하셨는데 성서 공부한답시고 성모님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나를 부르시는 신호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골수암, 또 심장에 구멍이 뚫린 병, 골수 결핵에 걸려 병원에서도 사경을 헤매다가 나주에 와서 완전히 치유받은 대녀 마리아가 함께 성경 공부를 했는데 마리아도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엄마요. 우리 첫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나주에 안 가서 그랬심니더. 병원 가도 소용 없고 약 먹어도 소용 없으니 나주 성모님께 가면 깨끗이 나을낍니더. 틀림 없소."
그래서 나는 "이 몸으로 어찌 가겠노?" 하자 마리아는 "걱정하지 말고 가입시다." 하며 몇 사람의 부축을 받아 저는 기저귀를 차고 완전히 파김치가 다 되어 나주에 도착하니 성모님 집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비좁아 식당도, 2층 비디오실도 가득차 저는 순례자용 작은 방으로 들어갔지만 거기에도 사람이 하나 가득 있었지만 너무나 허기지고 기진 맥진하여 고통 중에 있던 나는 염치 불구하고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누워 있는 사람 위로 누워 있었는데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던지 은총과 축복받을려고 그랬던지 그 사람도 아픈 사람인데도 가만히 있어서 그 위에서 또 몸부림쳤습니다.
힘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는 나는 성모님과의 만남 시간에도 나가지 못했는데, 대절해온 부산 차가 떠날 시간이 되어 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이 설사병이 완전히 치유가 되었고 통증도 사라졌을 뿐더러 원기까지 회복시켜 주셔서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었는데 나중에 성서 공부 시킨 곳이 바로 환속 신부님들과 박사님들과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많이 모이는 완전히 이단교였음을 알았을 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습니다.
성모님은 불쌍한 이 죄인을 그렇게도 사랑하셔서 율리아씨를 통하여 암흑에서 구해내시고자 귀가 멀고 눈이 멀었기에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여 길을 잃고 방향 감각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우셔서 사랑으로 설사병까지 주셔서 스릴있게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불러 주셨나이까.
"알렐루야, 주찬미, 알렐루야, 주 성모님."하며 "이 죄인이... "라는 찬미가를 부르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
 제가 다시 회개의 삶을 시작하였을 때에야 더 큰 깨달음을 주셨는데 아무리 열심한 영혼이라도 한순간에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멀어 이성을 잃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고통을 통해서만이 승리하며 영광에 다다를 수 있다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이 새삼 실감이 났기에 흐르는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고 이 고통을 허락하셔서 불러주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새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후 어느날 밤에 딸 미경이(막달레나)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새우처럼 등이 오그라져 너무 아파 엉엉 울면서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동아대학 부속병원에 가서 진찰하니 콩팥에 돌이 두 개 들어가 있어서 급성으로 그렇게 아프니 당장에 수술해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술하지 말고 나주 성모님 집으로 가서 성모님께 의탁해 보자."고 했더니 딸 아이가 싫다고 하여 저는 나주 성모님께 갔고 딸아이는 부산 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저는 나주에 오면서 율리아 자매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루가복음 8장 40절 이하의 말씀 중에서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너의 딸이 살아날 것이다." 하시는 말씀에 확신을 가졌기에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나주로 달려 갔습니다.
그 당시 얼마간의 돈을 봉헌하려고 했다가 그것이 아까워서 조금의 돈을 봉헌하고 기도 하는데 기도가 잘 되지 않아 방에서 누워 있는데 "너는 어찌 그리도 인색하냐?" 하는 소리가 귓전을 스쳐가는 것 같아 즉시 일어나 주님! 잘못했어요. 하며 당초 마음먹었던 돈 뿐만 아니라 차비를 제외하고 조금 남아 있던 돈까지 모두 봉헌하고 깊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경에 "네 딸의 돌은 나갔다."은 성모님의 음성이 귓전을 울리는 듯 들려왔기에 새벽인데도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장부 미카엘씨에게 "미경이 신장에 있는 돌이 나갔데요. 그러니 빨리 다시 검사해 보세요."했더니 장부도 "아멘"하며 믿었습니다.
부산 가는 첫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부산 대학병원에서의 검사 결과 신기하게도 두 개의 돌이 없어져 버렸다는데 더 신기한 것은 성모님께서 "네 딸의 돌은 나갔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간인 새벽 5시에 통증이 완전히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 미경이도 나주 성모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성모님의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또 한가지 저의 대모님의 손녀가 국민학교 다니는데도 밤마다 오줌을 싸게 되니 그 엄마는 딸과의 사이가 너무 멀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오줌싸는 딸을 때리기도 하고 미워하게 되어 저는 너무 안타까워 나주에 데리고 가서 기도좀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귀띔을 했더니 "그래 볼까?"하고, 대모님과 며느리와 손녀가 모두 왔었습니다.
엄마는 딸아이가 밤에 오줌을 싸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려 했는데 그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여 통곡하며 울기 시작하더니 많이 미워했던 딸을 부둥켜 안고 딸에게 용서 청하는 모습을 보고, 옆에서 지켜 보던 저 자신도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딸을 위해 기도하러 왔지만 성모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부르셔서 회개하게 해 주셨고, 그 뒤 딸은 밤에 오줌을 한 번도 싸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리며 끝으로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와 성직자 수도자들의 성화와 나주 성모님 메시지 인준과 성모님 집에 감실이 하루 빨리 마련되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아멘.
 

 199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부산시 중구 부평동1가 18번지 3/1반
임안젤라 드림 T.(051)254-2486(자택), 527-5444(가게)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조호현(율리아노)


"주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소서."라는 글씨를 경당 안 십자가 뒤에 내가 붙였습니다. 나는 과수원을 2만 여평 정도 하는데 지하수 개발업자 여러명에게 지하수 개발 부탁을 했지만 물이 별로 나오지를 않아 가뭄이 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습니다. 재작년에도 많은 돈을 투자해서 여러차례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였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내 글라라가 발을 삐어 퉁퉁 부었기에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기브스를 해야 된다고 하면서 3개월간 입원하여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 많은 농장 일을 하여야 하는데 3개월이나 기브스를 하고 쉬라니...,  암담했습니다.
기브스도 하지 않고 입원도 하지 않은 채 발을 절뚝거리면서 성모님 집에서 매주 목요일에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고 나서부터 그렇게도 쑤시고 아프던 다리가 말끔히 치유되어 껑충껑충 뛰어 보기도 걷기도 하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주님께 찬미 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과수원을 하다 보니 무거운 배를 옮기다 허리를 다쳐 꼼짝 못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또다시 성모님 집으로 가서 기도하고 멀쩡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목요일 기도회 때 무심코 십자가를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내가 그 글자를 붙였으면서도 까마득히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야 그 글을 읽으면서 "주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소서."하고 기도 드리면서 '그럼 우리 집에도 물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집에 갔는데 그 이튿날 갑자기 모르는 지하수 개발 하시는 분이 와서 물을 찾아 준다기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한번 해 보라고 맡겼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몇 년을 두고 많은 사람이 물을 팠어도 나오지 않았는데 700톤이라는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 곳에는 그 많은 물이 나올 곳이 못되었기에 모든 사람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도 하겠지만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8장 48절)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이 고비고비 많았던가.
그렇지만 고통을 통해서만이 영광에 다다를 수 있다는 율리아 자매님 말씀이 실감이 갑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흙집 단칸방에서도 살아 보았지만 그 고통들이 이제는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 삶으로 바뀌었으니 주님께, 성모님께 감사 드립니다.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1995년 3월 25일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
나주시 금계동조호현(율리아노)
T.(0613)32-6158, (062)511-6013 (자택)
(0693)72-4437 (농장)

 

 

악무도한 이 죄인도 한곳에 마음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데레사, 요사팟

 

찬미예수
율리오 형제님, 율리아 자매님께 드립니다.
먼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요사팟을 용서하십시요. 항상 마음은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께 있으면서도 몇 자 올리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었습니다.
 여긴 지금부터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벌써 눈태풍이 한차례 지나갔어요.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저희가 영적으로 얻은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저희들, 특히 죄인 요사팟은 성모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것을 저에게 주고 가셨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들은 정말 항상 자매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일하다가 다쳐서 너무 많이 아팠는데 지난번에 데레사와 전화하셨을 때 저의 허리가 아프다는 말을 데레사가 전하는 그날부터 통증이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명히 저는 자매님이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다는 것을 믿어요. 자매님이 하와이에 머무르고 계셨을 때는 저의 일터에서 장미향기를 맡았던 일, 그 다음에는 시장에서 초를 사려고 만지고 있는데 갑자기 천상 향기를 크게 맡고 너무너무 놀랐으니 이것이 다 성모님께서 자매님을 통하여 저에게 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괴로울 때, 기쁠 때는 나주 성모님 곁으로 가는 버릇이 완전히 생겼습니다. 극악 무도한 이 죄인도 한 곳에 마음돌릴 줄 아는 인간이 되었으니 자매님도 기뻐하여 주십시오.
자매님 어제 저녁에는 저의 집에서 구역 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일하는 시간이라 참석치 못했기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 회사에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집에 돌아와 성모님 근처에 섰을 때 그윽한 향기로 저를 맞아 주셨습니다. 천상의 향기가 저의 집에서 떠나갈까봐 걱정이 됩니다. 자매님 기도해 주세요. 성모님이 저희들을 떠나지 말도록 말입니다. 여기 저희들은 자매님이 항상 겸손하고 온화하여 성모님께서 항상 자매님과 함께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그만 쓰겠습니다. 다음 소식드릴 때까지 두 분 안녕히 계십시요.
 

 카나다에서 성탄절에
데레사, 요사팟 드림.
BOO WON KIM
14GOA CRT
TORONTO ONT
CANADA M 8W 4Y2

 

 

기도를 통하여 받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증언

대니 귈라스

 저의 이름은 대니 귈라스이며 노르디 피 디플로마 변호사 댁에서 그분의 저택과 소성당의 확장 공사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 쯤부터 신장이 좋지 않았으며, 특히 2년 전부터는 심해졌습니다. 양쪽 신장이 다 작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생활의 곤란도 겪었으나 하느님을 원망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디플로마 변호사께서 소성당의 공사를 맡기셨을 때, 저는 이제 가족도 부양하고 약값도 낼 수 있겠다 하여 매우 기뻤습니다. 그분이 친절하게 지불해 주시는 돈으로 약들을 살 수 있었으나 이 약들도 병을 치료해 주지는 못하고 그저 일시적으로 통증을 덜어 줄 뿐이었습니다.
 양쪽 팔의 신경이 무디어졌고, 몸 전체가 아팠으며, 몸의 뼈마디가 전부 부어 있었습니다. 지난 2년간 줄곧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디플로마 변호사께서 한국을 다녀오시면서 성모님을 보시는 율리아 자매님께서 오실 것이며, 그분은 치유 은사를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별로 신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치유되고 싶은 마음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이 참석하게 될 주일미사와 피정에 저도 참석해서 기도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던 날이 되기는 했는데, 저는 대단히 피로를 느꼈으며 전신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미사에는 가야겠기에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아내와 같이 미사에 참석했으며, 보통 주일 미사와 별 다름이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고 디플로마 변호사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소개시켜 주실 때에는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자매님의 말을 하나도 알아 듣지는 못했으나 아주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통역해 주시는 분의 말보다 더 경청을 했습니다. 자매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눈을 감으라고 하셔서 감았으나 어떤 일이 생길것인가에 대한 예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록 눈은 감고 있었으나 율리아 자매님의 목소리는 알 수 있었으며 통역하시는 분의 목소리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기도하는 목소리는 세 분의 여인들 목소리였습니다. 이상해서 눈을 떠보았는데 두사람 밖에는 안보였습니다. 제 3의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저는 저의 등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으며 온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저는 쓰러질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제 아내를 꼭 잡았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저는 견디기가 힘들어 아내에게 곧장 집으로 차를 몰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좀 쉬고 나서 오후 5시까지는 의사에게 가서 진통제 주사를 맞을 생각이었습니다.
 오후 4시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저는 여전히 심한 피로를 느꼈습니다. 진통제 주사를 맞으러 가야 되기 때문에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순간 저의 코에서는 피가 막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급히 차로 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때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라도 진통제 주사를 맞으려고 하는데 주사 바늘이 제 몸으로 아예 들어가지를 않아 이젠 마지막인가? 하다가 생각해 보니 오늘 미사 때 생긴 일도 있고 해서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을 먹고 난 후였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갑자기 장미향기를 맡았습니다. 아내에게 물어 보았으나 나지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아내는 그날 아침 미사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 향기를 맡았다고 했습니다. 저녁 9시쯤 아내가 무슨 생각을 자꾸 하는 것 같아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도 저와 똑같이 그 시간에 찬바람이 등에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좀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느 날 밤보다 소변을 자주 보았습니다.
 새벽 3시쯤 잠을 다 자고 일어나는데 너무나 놀랍고 대단한 일이 저에게 일어난 것을 깨달았습니다. 등의 통증, 아프고 부어있던 뼈 마디들, 가슴의 통증, 이 모두가 다 가시고 없었습니다. 혹시나 통증이 되돌아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몸을 움직이기가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2년 이상을 쩔뚝거리면서 다녔으므로, 디플로마 변호사 댁에서 일하거나 살고 있는 분들이 다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빨리 걷는 일이라고는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2킬로미터나 뛰었습니다. 3 ~ 4년 전과 같이 말입니다. 카귀아오 판사의 아들도 저의 병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본래 신앙심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이제는 기적을 믿습니다. 저는 제가 치유된 것을 압니다. 그날 주일 미사 때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저에게 뻗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주님을 찬양합니다. 율리아 자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1992년 10월 11일
토목기사 대니 귈라스 필리핀에서
T.(503)669-8443

 

 

기적이예요! 언니는 지금 100% 치유되었어요. 

유 베네딕또

마닐라의 노르디 피 디플로마 변호사님께
저와 저의 아내 밀라는 변호사님께서 올해(1994년)  1월 26일에 자매님을 모시고 치유 기도회를 열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날 많은 환자들, 특히 저희 딸 암파리또를 위해 기도해 주신데 대해 율리아 자매님께 감사의 뜻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맏딸인 암파리또는 사위 페르난도와 같이 카나다 온타리오의 스카보로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2일에 암파리또는 열이 나고 목구멍이 아픈 증상이 있어서 의사는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인 14일에는 구토와 설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5일에는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였고 16일에는 호흡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위는 매우 놀라서 911번 구급 전화번호를 돌렸으며, 딸은 곧 도착한 앰블란스에 실려 집에서 멀지 않은 센티너리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5시간 동안 응급실에 있으면서 피검사의 결과를 기다렸는데, 혈구 숫자는 35,000에 이르렀고, 딸은 곧 중환자실로 옮겨져 산소호흡기에 연결되었습니다.
이 때가 필리핀 시간으로는 17일 밤이었는데, 둘째딸이 카나다로부터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 밀라는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곧 나도 같이 묵주 신공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나의 어머님은 수도자인 이모님께 전화를 걸었으며, 전화 연락을 받은 친척들은 여러 기도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맏딸에 대한 여러가지 추가 검사들이 있었으며, 호흡기 전문의가 초청되어 왔습니다. 검사와 진찰의 결론은 폐속에 물이 고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전화로 암파리또와 얘기를 했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딸 얘기로는 의사들이 염증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며 혹시 필리핀에 이와 비슷한 증상으로 앓는 이들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매일 묵주 신공을 바쳤고, 아내만 가던 매일 미사에 저도 참석했습니다. 의사들은 암파리또의 등에 주사기를 꽂아 폐에서 액체를 빼내기 시작했는데, 첫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옆구리의 통증도 덜해졌습니다. 그러나 검사 결과 폐에 아직 액체가 고여 있음이 밝혀졌고, 물 빼는 작업을 또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열은 계속되었으며 항생제도 듣지 않았습니다. 필리핀 시간으로 1월 25일 자정에, 둘째 딸 카니가 거는 전화로 우리는 잠이 깼습니다. 카니와 암파리또는 둘 다 울고 있었으며, 폐에서 물 빼는 두번째 작업이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너무나 당황하여, 암파리또의 등에 생긴 구멍을 막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급히 방을 나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암파리또는 폐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절망적인 느낌이었습니다. 아픈 딸을 멀리 두고 어떻게 해야할 바를 몰랐으며, 토론토에 재진찰을 부탁할만한 의사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폐속의 액체를 빼낼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액체가 응고하였기 때문인 것 같았고 우리는 딸이 폐가 열려 수술을 받는 광경이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기도였으며, 한밤중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묵주 신공을 바쳤습니다.
다음날 아침 카니가 다시 전화를 해서 언니가 이미 수술실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저녁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 오른쪽 폐에 튜브가 삽입되었다고 했으며 언니는 평온히 잠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왼쪽 폐에 같은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바쳤으며, 암파리또의 완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밀라는 친척들과 기도회들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1월 26일에 밀라는 배로 2시간 걸리는 파네이 섬의 일로일로시에 갈 일이 있었고, 저는 바콜로드 시의 북쪽으로 35킬로 떨어진 곳에서의 회의에 가야했습니다. 오후 4시 30분경 바콜로드시에 도착했을 때, 저는 율리아 자매님이 빌라몬테 체육관에서의 치유 기도회에 오신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치유 기도회라고는 가 본 일도 없었으나, 호기심도 있고 하여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몬테에 도착했을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차할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기도회에 갈 운이 없나보다.'하고 차를 돌려 가려는데 갑자기 주차할 수 있는 곳이 눈에 띄었으며 급히 주차를 했습니다. 체육관은 빽빽하게 차 있었으며, 옆문을 통하여 겨우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직 공동 집전 미사가 끝나지 않고 있었으며,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도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밀라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가지 말고 곧바로 이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체육관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되어, 친구 하나가 저를 포옹하며, "저분들이 암파리또를 위해 기도하고 있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딸의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고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으며 또 반가웠습니다.
한참 있다가 밀라가 도착했으며, 율리아 자매님이 뒤에 서 있는 분들은 앞자리로 나오라고 하시는 바람에 맨 앞자리에 가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율리아 자매님께 암파리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매님은 통역하시는 분을 통해 말하시기를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를 대리인으로서 부탁할 수 있다고 하셔서, 저와 아내, 그리고 제 딸의 상태를 아는 친구들이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는데 친구 한 명이 와서 자기는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율리아 자매님의 손을 잡을 수 있었는데 자기 손에서 장미향기가 난다고 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많은 이들도 장미향기를 맡았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성령이 자기들 몸 속에 들어오시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체육관에 처음에 들어갈 때 만났던 친구가 다시 와서 저를 포옹하며, "걱정말게. 암파리또는 치유되었네."라고 했습니다. 저는 고맙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향기를 맡지도 못했고 아무런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기도가 들어질 것인지 자신이 없었으나, 아마도 다른 이들이 바쳐준 기도는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하는 희망은 있었습니다.
다음날, 1월 27일 아침 카니의 전화가 왔습니다. 카니의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습니다. "기적이예요! 언니는 지금 100% 치유되었어요!" 의사들이 말하기를, 폐속의 액체가 없어졌으므로, 왼쪽 폐의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카니에게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회에 가겠다는 얘기를 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는 또 하나의 증표라고 생각됩니다.
의사들은 아직까지도 암파리또의 병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리아 자매님께서 기도해 주신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매님의 기도가 정말 응답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 친척, 친구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들, 수도자님들, 기도회 회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테오도로 유 베네딕또 올림(변호사)

 

 

끝없는 통회의 눈물로 가슴을 치며 죄인으로 돌아오다. 

이 세실리아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수도자에 대한 꿈을 키워 오다가 59년도에 광주 까리따스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건강했던 나는 예비수녀 시절부터 위장병에 시달리다가 수련수녀가 되었을 때는 거의 공동생활을 못하게 될 만큼 위독하여 나로 하여금 수도복을 벗게 하였고 결국 목포 골롬반 병원에 입원하고야 말았다. 1년 이상 병상에 누워 있을 당시는 조금 치료가 되어 다시 포항 예수 성심 수녀회에 입회하여 예비수녀 생활을 2년여 반복하였다. 위장병이 재발되어 또 병원에 입원하였고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4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임종준비를 하던 중 '아루미나겔'의 복용이 효험이 있었던지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성모님을 알기 전까지 그 약을 복용하였다.
 또한 나는 개구장이 6세때는 2층에서 아스팔트 길위로 뛰어내려 왼쪽 다리가 여러 조각으로 부러져 1년 내내 기부스하였고 침술로 결국 불구자만은 면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는 날이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밟고 주물러 주어야 잠을 잘 정도로 심한 통증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25년여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어깨를 많이 쓰게 되어 아리고 쑤셔서 침을 맞고 약을 복용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양팔 묵주기도를 하면 팔이 잘리는 듯이 고통스럽지만 봉헌하는 마음으로 5단을 겨우 끝내는 실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무용을 전공한다고 심하게 허리를 사용하였기에 척추병 환자가 되어 오래 누워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내 이 50이 넘다보니 이런 것들이 고질병이 되어 날이 궂을려고 하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1990년 9월 우연히 피눈물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에 대한 팜플렛을 보게 되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동을 받아 즉시 그곳으로 가 보았다. 수도생활을 했고 자식을 신학교에 보낸 어미로서 신앙생활을 독실히 한다고 자부하는 착각과 만사에 있어서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또 착한 일을 많이 했고 못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교만함은 하늘을 찌르는 독이 되어 수많은 영혼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를 짓게하여 그 길이 바로 지옥의 길인 줄도 모르는 채 마귀들과 합세하고 있을때 성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나주 성모님을 찾는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나를 죄인중의 죄인으로 일깨워 주신 것이다.
 내가 처음 뵙는 성모님은 눈물과 피눈물로 나를 반겨주셨고 자비로운 손길로 안아주시어 내 마음의 문까지도 활짝 열게하여 주시었다. 끝없는 통회의 눈물로 가슴을 치며 티끌보다 더 작은 자신을 발견했을 때 부끄러운 눈물은 길에서나 버스에서나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그로부터 매월 첫 토요일 철야기도회나 목요성시간을 지키기 위해 성모님 집에 갔으며 자나 깨나 성모님 생각으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은 위장병, 팔다리 쑤시는 병, 허리 결림병도 사라지고 없어져 율리아 자매님의 강론을 장시간 듣고 있어도, 직장에서 고된 업무를 수행하며 종종 걸음을 걸어도 팔, 다리, 허리 등 모든 곳이 건강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 하려고 노력했고 육적인 치유보다는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회개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 모습을 가련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덤으로 육신의 치유까지를 완전히 해주신 것이며 영적인 선물로 가정 성화와 하늘을 날을듯한 기쁨과 사랑과 평화 그리고 굳센 믿음을 주셔서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매순간 순간 천국을 느끼게 하신다.
 우리 주 그리스도와 함께 성모님께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 드리며 주신 은혜를 내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세실리아

 

 

길잃은 어린양의 길잡이가 되셨고 상처받은
영혼의 치료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간영길

알렐루야!
지금 시계의 초침소리는 자정을 알리며 각 가정마다 전등스윗치 하나, 둘 꺼져갈때 갑자기 불현듯 그 무엇엔가 이끌리어 조심스럽게 안부 여쭙니다. 마지막 늦가을의 쓸쓸함을 알리듯 나뭇잎 하나 떨구어질때 아! 가을도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가 보다하고 느낄때 또다른 동장군의 위엄은 오가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하는 고즈녁한 이밤!
혼탁한 세상의 죄악으로 인하여 성모님께서 피눈물로 절규하시는 모습에 더욱 수척해지셨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시던 율리아님을 생각할 때 "저는 죄인 이로소이다."하는 회개의 기도가 마음에 메아리쳐 옵니다. 율리아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혹시 지금 이시각에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고통받고 계시지는 않으시는지.
율리아님!
여기 한 작고 보잘것 없는 나약한 인간이, 작은 목소리로 주님께 간구드립니다. 삼중고의 고통으로부터 신음하던 헬렌켈러 여사가 설리반 선생님을 만남으로 세계적 문학가가 되었듯이 제가 율리아님을 만남으로 전 또다른 저자신은 물론 수천수억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아니 얻을 수 없는 원죄없으신 동정녀 성모 마리아님을 만나게 되었고 나주성모님께서는 길잃은 어린양의 길잡이가 되셨고 자칫하면 삶을 자포자기 할뻔한 상처받은 영혼의 치료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그동안 아내 죽음이후에 찾아오는 육신의 공허함 때문에 많은 시간과 거리를 방황했었습니다.
이러한때 뵙게 된 율리아님! 제자신을 뒤돌아 볼수 있는 회개와 새로이 충전할 수 있는 엄청난 자아의 변화!
나태한 신앙생활과 중단했던 기도생활, 저로 인한 눈물의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주님께 노크해 봅니다.
쇠는 달구면 달굴수록 더욱더 강해진다는 진리안에서 강한 제자신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경당에서 수고하시는 회장님의 안부와 근황을 여쭙니다. 이곳 서울의 영길이, 율리아님의 귀중하고 값진 봉헌으로 인한 어머님의 전구로 말미암은 놀라운 섭리에 지금은 80%의 자유인으로서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쓸까... 한참 망설이던 손끝은 두서없는 글월로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88년 12월 9일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11동 726-8호
간영길 올림

 

 

나는 분명히 보았노라 성체의 기적을! 

백영두(요셉)


나주 성모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엄청난 기적을 보여 주셨고, 저의 신앙생활에 더욱 힘을 주신 나주 성모님을 뵙기까지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증언하려 한다. 나는 나주 성모님을 확신하는 바이다. 그래서 내가 입교에서부터 나주 성모님을 뵙기까지의 과정을 간단간단하게 증언한다.

1. 세상에 한 생명이 태어나다.
나는 지금부터 59년전 그야말로 유교사상이 가문을 이끌어 가는 하나의 법도요 가훈인 행세 꽤나 한다는 가문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무당 할멈에게 양자로 팔아야 명이 길다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무당 집에서 수양 할멈을 정해 주었다 한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앓기 시작하여 잔병이 떠나지 않자 출생신고도 하지 않고 있다가 3년 후에야 출생신고를 하였다니 얼마나 잔병이 많았으면 그랬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내가 자라는 동안 잔병을 얼마나 많이 앓았던지 매일 무당 할멈이 집에 와서 살다시피 하고 집안 구석구석에는 떡을 해놓고 비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2. 불교에 입교는 하였지만
국민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어 군산에서 사범학교를 다닐 때였다. 마침 하숙집 아주머니가 개신교 집사였다. 그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에 가자고 성화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끌려나가기도 했으나 어쩐지 신앙에 대한 애착이나 위로의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기회만 있으면 회피하였다. 그러다가 3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만 20세에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위치가 되었을 때 나도 무엇인가 의탁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불교에 입교하게 되었으며 해마다 초파일이 되면 절에 등을 달곤 하였으나 그 곳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마치 허허벌판을 헤매는 방랑자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내자도 같이 다니고 해서 몇 년을 절에 다녔으며, 내가 살고 있던 마을은 집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대성사라는 절(암자) 이 있고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성당이 있는 대천 시내의 변두리였다.

3. 천주교에 입교하다.
이제 교사생활로 공직에 들어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 몫을 하면서 직장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한다는 평도 받고 직장 생활에 자부심을 가지고 지낼 때였다. 이제 정년 퇴임을 하고 쉬고 계시는 이훈이라는 장학사 한 분이 대천 교육청에 오시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저녁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종교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는데 이훈 장학사가 이야기 중에 "자기는 천주교에 나가고 있는데 기회가 있으면 나가 보라."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관심을 가지고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요일이었다. 할 일도 없고해서 낮잠이나 자려고 누워서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보니 밑에 내려다 보이는 성당 종각의 종이 땡그렁 땡그렁 울리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신발을 신고 종소리가 나는 성당에 들어서게 되었다. 가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나와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하나 나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도로 성당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검정 수단을 입고 내가 있는쪽으로 오기에 그 분에게 물었다. 이 곳에 구경와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이었다. 이웃 마을에서 사는데 구경 좀 왔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따라 들어갈 수도 없고 해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저쪽에서 아는 분이 하나 오고 있었다. 한전에 다니는 전기료 수금원이었다. 그 분이 와서 어찌 왔느냐기에 구경하러 왔다고 했더니 반갑게 손을 잡고 들어오라면서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해 주면서 미사 시간이 되었으니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니 성당 안이었다. 난 생전 처음 들어가 보는 곳이었으며 그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는 무척 엄숙하였으며 앞을 보니 십자가가 보이고 제대가 놓여 있었는데 무척 다정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분의 안내에 따라서 의자에 앉았더니 어떤 의식이 무척 장엄하게 진행되는데 무엇을 하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호기심 속에 1시간 가량 지나 모든 의식 행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12시가 좀 못된 시간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분은 당시 본당 회장을 맞고 있는 조시연 마르코씨였으며 그 분은 지금 외아들을 가톨릭 신학교에 보내고 있는 훌륭한 분이시다. 그 뒤 다음 주부터 교리반에 나와 보라는 신부님의 말씀이 계셨다.

4. 영세를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다
나는 그 다음 주부터 교리반에 나가게 되었는데 나가서 보니 저번에 뵙던 신부님이 아니었다. 알고보니 인사발령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가시고 새로 오신 신부님이시라고 하였다. 가신 신부님은 이 계창 신부님이었고 새로 오신 신부님은 이 종대 요셉 신부님이셨다. 그 뒤로 나는 매주 빠지지 않고 교리 공부를 하였으나 모두가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였다. 우스운 이야기로 오랜 시간 애써 말씀하신 신부님의 말씀(강의) 을 듣고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그저 계시다고 믿어 보라는 말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말씀이었다. 그렇다! 무조건 계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믿을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하여 6개월간의 교리를 받고 27년전 영세를 받게 되었는데 본명을 무엇으로 하겠느냐고 사무장님(김명기 씨) 이 묻기에 아무렇게나 지어 달랬더니 생일을 묻기에 호적상에 3월 19일이라고 하니 요셉이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5. 교만했던 신앙생활
나는 나름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견진도 받고 꾸르실료도 받고 가정성화를 위해서 ME 교육도 받다보니 교회에서 한다는 재교육은 거의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대천 본당의 교육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본당 울뜨레아 간사를 10여년째 맡고 있으니 남들이 볼 때 제법 올바른 신앙인으로 비치게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국민학교 교장이라도 하니 밖에 나가면 교장선생님이라 남들이 불러주니 나름대로 우쭐할 수 밖에 없었다. 성당에 나가 영성체를 하여도 형식이나 절차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모령성체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없었다. 당연히 성당에 나가면 성체는 필연적으로 영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으며 성사는 성탄이나 부활 때에나 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본당의 모든 일이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하는 그야말로 교만에 빠져들기 시작한 3년 전 어느날이었다. 마리아가 성당에 나갔다 오더니 하는 이야기가 나주에 계시는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시는데 그것도 매일 흘리시고 게다가 피눈물까지 흘리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가 있느냐 석고로 만든 성모상에서 무슨 눈물이 나오고 피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이냐 했더니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장미 향기가 나는 향유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리신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오히려 거부감마저 들기도 했는데 자기도 한 번 가보아야겠다기에 가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는데 하루는 나주에 간다기에 다녀 오라고 했더니 다음날 와서 한다는 이야기는 먼저 말 그대로였다.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또 나주에 간다고 다녀와서는 묵주를 내 코에 갖다대면서 장미향기가 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 묵주에서 짙은 장미향기가 코를 찌를 듯하였다. 그래서 나는 왜 묵주에 향수를 뿌렸느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고 성모님께서 흘리시는 향유가 그 묵주에 묻어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이제는 나에게도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방학 때가 되면 꼭 한번 가 보리라 생각하고 결심하였다. 그러던 1995년 1월 7일 첫 토요일이었다. 나는 마리아에게 나도 가보겠다고 했더니 그 순간 마리아의 얼굴빛이 천사처럼 변했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불안하였다. 급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마음이어서 꼭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1월 6일 출근하면서 마리아에게 준비는 하되 믿지는 말라고 했더니 마리아는 역전에 나가서 기차표를 예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이 잘 풀려 시간의 여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두는 나 자신에게 교만심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6. 1월 7일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을 뵈오러가다.
이제 나주 성모님을 뵈오러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려고 하니 눈이 감기지 않는다. 처음 가보는 장거리 운전에다 지리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밤새도록 관광지도를 가지고 길을 익히는데 종이에다가 큰 글씨로 경과 지역 도로번호와 거리를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하면서 익히다 보니 밤 12시가 훨씬 넘었다. 깜짝 놀라 불을 끄고 잠을 자야 먼 거리 운전을 할 것 같아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공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일까? 또 내가 운전을 잘하고 찾아갈 수 있을까? 하면서 공상을 하다보니 잠이 들지 않아 다시 불을 켜고 지도를 펴 들고 보다가 그대로 엎드린 채 깜박 잠이 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가 막 나주를 향해서 떠나려고 하는데 파란색 망또 비슷한 옷으로 차려입은 아주 어여쁘게 생긴 여자 둘이서 나타나더니 다른 곳에 놀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주 성모님을 뵈오러 가야된다고 했더니 그까짓 곳에 무엇하러 가느냐 재미있는 곳에 놀러가자고 팔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주에 가겠다는데 왜 그러느냐고 화를 냈더니 그 여인 둘이서 '에잇!'하면서 화를 내고는 밖으로 나가더니 내가 타고 갈 승용차 앞바퀴를 쑥 빼놓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30분이었다. 그 뒤 매우 기분이 불쾌하고 그러면서도 공포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밖에 나가 차에 가 보니 차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나주에 갈까 말까 망설이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갈까 말까 하다가 남자가 한 번 간다고 하고 가지 않을 수는 없고 또 내가 승용차를 가지고 가기로 해서 기차표 예매한 것도 되물린 상태이기에 가기로 다시 결심하고 6시 30분경에 차를 끌고 세차장에 가서 세차를 했다. 기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서 성수를 뿌리면서 무사히 다녀 올 수 있게 하여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10시에 노인 두 분을 태우고 4명이 출발하여 고창까지 가서 고창 석정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 나주를 향해 떠나 오후 4시 30분경에 나주 성모님집 앞에 무사히 차를 댈 수 있었다. 나는 주차를 한 다음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더니 마리아가 수고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밤의 꿈 이야기는 이때까지 하지 않았다. 혹시 걱정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으며 그날 밤 철야기도후 체험발표 시간에 용감히 나가서 이야기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이러한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7.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다.
불안한 가운데 무사히 주차시키고 나서 성모님집 문 앞에 들어서니 벌써 짙은 장미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나는 경당 밖에 모셔진 성모님 앞에 가서 무사히 올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고 경당에 들어서니 장미향기는 더 짙게 풍기고 있었으며 경당 안에 모셔진 조그마한 성모님이 손짓을 하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나서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사실 그대로였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손을 꼭 잡고 잘 왔다고 하자 마리아가 이제는 믿겠느냐고 하는 말에 슬그머니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신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고 나같이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저 보여주고 쥐어주는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다. 오후 6시경 마리아가 식사를 하자기에 밥을 먹고는 제일 앞에 자리를 잡고 앉기로 했으나 어떻게 밤새워 기도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성모님께서 주관하여 주시리라 믿고 차분하면서도 흥분된 마음으로 9시를 기다리게 되었다. 밤 9시가 되자 찬미 봉사자의 찬미가 시작되고 루비노 형제가 나와서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도회는 1, 2, 3부로 나누어 1부는 찬미와 기도, 2부는 메시지 전달, 3부는 체험담 발표, 만남의 시간으로 기도회가 진행된다는 안내가 있었으나 조금 후에 율리아 자매의 장부이며 나주 본당 회장이라는 분이 나와서 나주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시고 피눈물을 흘리시며 향유를 흘려주신 과정을 설명하여 주시고 나서 오늘밤 2부에 율리아씨가 나와서 메시지 전달을 해야 될텐데 현재 엄청난 고통 중에서 병원에 입원 중인데 나올 수 있을는지 우리에게 많은 기도를 청한다는 말씀이 계셨다. 그때 나는 실망감이 들었다. 율리아씨를 만나고 메시지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왔는데 하필이면 오늘 밤에 나오시지 못하다니 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기도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 메시지 전달하는 2부가 시작이 되자 경당내는 숙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들었다. 모두가 율리아를 기다리는 절실한 심정들이었다. 그때 율리아씨가 장부의 부축을 받으며 경당에 들어서자 모두들 환호성과 아울러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그순간 나도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성녀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인자하면서도 온화한 성모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율리아씨는 고통 중에도 열심히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으며 그때 마다 나의 가슴은 뭉클하고 짜릿짜릿하였다. 마치 메시지 한 가지 한 가지가 나에 대한 말씀같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깊이 깨닫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삶은 좀더 새롭게 살겠다고, 이제 메시지 전달이 끝나고 체험담 발표가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나의 신앙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용기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뛰어나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서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5~6년전부터 견비통으로 밤이면 잠을 자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 오는 중이었는데 기도 중에 모든 병을 치유하여 주시리라는 기도가 계셨다. 그 중에 모든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이 내리셨다는 말씀이 계셨고 나에게도 기도를 하여 주셨는데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 어찌된 일인가 그렇게 고통스럽던 견비통이 언제 치유가 되었는지 정말로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나 견비통이 언제 나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성모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데 이상할게 무어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모님의 은총을 율리아씨를 통하여 듬뿍 받은 것이었다.

8. 나에게 보여주신 엄청난 기적
6월 30일
이 날은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신지 만 10주년이 되는 날이라 한다. 그래서 6월 30일에도 해마다 있었던 철야 기도회(눈물 흘리신지 10주년) 가 있을 예정이라는 말씀을 5월에 전해 듣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하려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공직에 매인 몸이라 걱정을 하고 있는데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예능 경연 대회가 하필이면 6월 30일 금요일에 개최가 된다는 공문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날은 금요일이라서 이틀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일이 더 복잡하여진 것이다. 그래서 박마리아(내자) 에게 걱정을 했더니 그러면 마리아는 기차로 먼저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웁고 착잡하였다. 어린 아이처럼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날은 성모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실 것 같은 예감이 들고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 박마리아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가겠으니 같이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해 놓고 출근을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하여 1시경에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집에 전화해서 빨리 준비를 하도록 하고 있는데 마음이 무척 조마조마하였으나 늦게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행사가 잘 진행되어 12시 30분경 끝나고 그 결과 우리 학교가 금상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아마 성모님을 뵙고 싶어 애태우는 이 부족한 요셉에게 크나큰 은총을 내려 주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1시에 나주를 향해 달렸다. 어찌 마음이 급해지는 것 같고 빨리 나주에 도착되어야 한다는 중압감마저 들어 나주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4시간 후인 오후 5시에 성모님 집에 도착하였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경당에 들어서니 로사리오 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성모님께 제가 왔다고 말씀드리고 다른 교우들과 묵주의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데 어떤 자매님이 들어와서 지금 하늘에는 태양의 기적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마리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 나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때의 시간은 5시경으로 하늘은 금방이라도 소낙비가 쏟아질 듯 검은 소나기 구름이 하늘에 꽉 차 있고 햇빛이라곤 구경도 못할 형편인데 서쪽 하늘 나주 성모님상 뒤쪽으로 둥근 해가 솟아난 것이다.
 아니 해가 아니라 큰 성체가 나타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환호와 아울러 신비의 기적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때 태양이 그렇게 떠 있다면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 없을 텐데, 강하게 발하는 광채에도 불구하고 눈이 하나도 부시지 않아서 육안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태양의 기적은 성체의 형태가 태양과 같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오색 무지개가 나타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보랏빛으로 보이기도 하였는데 분명한 사실은 태양 전체가 성체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마치 불그스레한 색깔에 실핏줄이 엉켜 있는 듯 하였으며 틀림없이 심장의 박동에 의해서 수축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표현하면 오물오물하는 모양으로 보였으며 육안으로 볼 때 성체의 둘레가 희미하게 보였는데 마침 가지고 있던 쌍안경을 가지고 보았더니 성체의 둘레가 동그랗게 윤곽이 선명했으며 움직이는 모양도 뚜렷하여 옆에 있던 마리아에게도 보라고 쌍안경을 주고 그 옆에 있던 몇 사람도 쌍안경으로 보고는 신기해 하였다. 더욱이 분명한 사실은 만일 하늘에 나타난 그 물체가 성체가 아닌 태양이었다면 그 간단한 쌍안경으로 쉽게 가까이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쌍안경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가까이 초점을 잡을 수 있었고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그 물체가 태양이었다면 광학렌즈를 통해서 들어오는 광선으로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장의 박동처럼 수축작용도 일어 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기적이었다. 끝까지 바라보았다. 무려 8시경까지 그러한 현상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그 기적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있다. 그 물체는 분명 살아 숨쉬는 생물체였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게 그 신비함과 황홀함이 오히려 두려움으로 느껴지기까지 할 때 마리아가 본당 미사에 가자기에 내가 피곤해서 조금 쉬겠다고 했더니 혼자서 미사에 간다고 떠난 뒤 나는 차안에서 조금 쉬고 있다가 경당에 들어갔더니 마리아가 미사에 다녀와서 또 기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율리아 자매님이 영한성체가 성혈(피) 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사에 참여했던 많은 교우들이 목격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밤에도 성모님과 주님께서는 무엇인가 기적의 징표를 또 보여 주실 것만 같았다. 이윽고 9시, 이제 철야 기도 1부가 시작되는 시간이었으나 공식적인 행사는 없으니 각자 기도를 하자는 안내였다. 그래서 모두는 로사리오 기도 환희의 신비부터 시작하여 15단을 바치기로 하고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 제대 위에는 외국에서 온(캐나다, 필리핀, 괌, 하와이, 벨지움, 일본등)  교포와 외국인이 있었고, 외국 신부님 일곱분이 같이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또 제대에는 율리아씨께서 낙태 보속 고통이 시작되었다. 배가 부풀어오르고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수 신부님께서 우리 모두 손을 올리고 율리아씨를 위해서 고통을 같이 나누자며 기도를 하자고 해서 우리 모두는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자 12시가 다 되어 이제 조금 쉬었다 기도를 하자는 안내가 있었고 우리는 간식도 먹고 용변도 보며 좀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의 화재는 낮에 보여 주셨던 태양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로 무르익어갔다. 1부가 끝나고 12시경 쉬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그때 율리아씨께서 말하였다. 새벽 2시경이나 3시경에 어떠한 기적의 징표를 보여 주실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간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었다. 그때 나는 깜박 눈을 감았을 때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율리아씨가 성모님 상 앞으로 벌떡 일어나 나가더니 두 손을 er 펼치는 순간 후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 하얀 물체가 떨어지는 듯했는데 우리 모두는 함성을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환호하였다. 그것은 누가 통제한 것도 아니오, 구령을 부른 것도 아니오, 지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순간 나는 제대 위에 모셔진 성모님상이 넘어지시나 했는데 환호성은 그치고 제대 위에 계시던 신부님들께서 무척 당황해 하시는 것 같았고 무엇인가 놀란 표정들이었으며 숙연하여진 분위기에 적막감이 맴돌았다. 분명 무슨 기적이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가운데 10여분이 지났을 때 율리오씨가 동그래진 눈으로 일어서더니 지금 성체가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흥분하지 말고 절제하면서 경배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기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성체에 대하여 다시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생각했던 성체의 신비를 느끼게 되었다. 그후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체를 제대 위에 올라가 경건한 마음으로 조배드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에 제대 위에 올라가 경배드리면서도 그 신비스러운 기적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성체는 성모님상 앞에 다섯 개가 연결 고리처럼 겹쳐 있었고, 2개는 따로 놓여 있었다.
 앞에서 똑똑히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당 성모님상 위에 모셔진 고상의 예수님 심장과 자관, 오상에서 피가 흐르더니 성체로 변해서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우리 모두는 "이럴수가, 이럴수가"하면서 두려워 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신비의 기적에 대해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체를 모신 가운데 철야 기도를 할 수 있는 영광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모든 기적들에 놀라움과 신비로움의 경지를 맛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의 나의 잘못된 신앙과 자만에 빠졌던 신앙, 주님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성체를 영했던 모령성체에 대해서 성모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 말씀과도 같이 많은 죄를 짓고 있음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주님, 저에게 눈을 뜨게 하여 주시고 귀가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성모님의 애절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일상 생활에서 짓는 많은 죄를 깨닫게하여 주시고 이웃과 화해하여 사랑할 수 있게하여 주소서...
나는 6월 30일에 보여 주신 사건들의 오묘한 기적을 내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그 황홀한 경지를 잊지 않으리라.

9. 아기 예수님처럼 성모님의 망또 자락에 매달려 살리라
저는 주님과 성모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경지를 똑똑히 보았노라. 나의 모든 희, 노, 애, 락 모두를 주님과 성모님께 봉헌하며 살리라. 성체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찬양하며 살리라. 주여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살게하여 주소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모님의 망또 자락에 매달려 살리라.
나주의 성모님께서 이루시는 수 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눈을 뜨게하여 주시고 귀가 열리게 하여 주셔서 하루빨리 모두가 나주 성모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메시지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모든 형제 자매가 떳떳한 마음으로 나주 성모님을 경배할 수 있는 세계 제일의 성지로 가꾸어져서 성모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성체를 모시고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대성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든 형제 자매들의 기도가 있어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형편이 되면 기도를 드리며 매주 형식적으로 영하는 모령성체를 아무런 부담없이 행해 왔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하면서 나주 성모님을 알고부터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반성을 하고 생활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광주 교구에 조사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현재 조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니 다행한 일이기는 하나 이 죄인도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의 명예를 걸고 증언하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어쨌든 나는 나주 성모님을 알고부터 영성체에 대한 참 의미와 신비를 알게 되었고 아침, 저녁 기도는 물론 이제는 자기 전에 마리아와 같이 앉아서 묵주의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나는 믿는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나는 기도 중에 나주 성모님이 하루 속히 인준을 받고 성지로 가꾸어질 수 있기를 이 죄인의 작은 마음을 쏟아 기도드린다.
주여, 주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으신 일들도 귀엽고 죄 많은 자녀들을 위하여 깨우쳐 주시고 기다리시는 성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낍니다.
저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시기를 기원하면서...

 

1995년 7월 5일
충남 보령시 동대동 728-16
T.(0452-32-4735(직장)
32-8585(자택)
백영두(요셉)

 

 

나에게 주신 성모님의 사랑과 증표
주용해(다미아노), 이순우(마리아)

 

저는 용현본당에 다니는 이 마리아입니다.
제 남편이 영세받은 지는 2년 됐지만 1년이 넘도록 냉담을 하고 있고 직장 관계로 집안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장인이었고 일요일에 미사에만 참례하는 그런 신자임에 불과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남편에게나 저에게 진실한 믿음을 얻기 위해 저는 철야기도회에 몇 번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월 둘째 주에는 율리아 자매님께서 오신 기도회였습니다. 그 날은 너무 사람이 많아 안에는 들어가볼 생각도 못하고 3층 복도에 서 있다가 집으로 다시 갈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율리아 자매님의 좋은 말씀을 듣자고 모두 이렇게 모여 있는데 '나만 갈 수 없지.'라는 생각에 마음을 돌려 휴식 시간이 끝날 무렵에 아래로 내려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많은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되어 다행히도 성모상 가까이에 앉아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듣고 있던 중 새벽 2시 반쯤 됐을 때 남편이 성모상을 바라보더니 성모님의 입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눈이 의심스러워 눈을 계속 비비면서 이쪽저쪽 고개를 돌리면서 보아도 움직이더랍니다. 계속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 있노라니 성모 어머니께서 "네 눈이 의심스럽느냐?" 하시며 성모상이 두 번을 움직이시면서 남편을 확인시켜 주셨답니다. 성모님은 자매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계속 입을 움직이셨고 하얀 치아까지도 보이게 하셨다고 남편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확실히 느낀 것은 무엇인가 꿈이 아니라는 뜻으로 남편의 옆구리를 세 번을 쳐서 깜짝 놀라게 했었다고 남편이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저에게 성모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 당신도 보라."고 남편이 말하여 저는 성모상을 바라보는 순간 놀랐습니다. 정말로 성모상의 입이 자매님 말씀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저도 눈이 의심스러워 계속 눈을 비비며 보고 있노라니 성모님께서 "나를 의심하느냐?" 하시며 성모님이 입에서 입김을 확 내뿜으시어 저의 눈을 확인시키시고 계속 입을 움직이셨습니다.
 이런 신비스런 영광을 제 남편과 저는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지 몰랐습니다. 그 크신 은혜를 우리 부부에게 주셨구나 하며 감사를 드리고 그 날 우리 부부는 이제까지 잘못 살아온 나날들을 생각하며 끝없는 회개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릅니다. 정말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며, 느낀 것은 열심히 기도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 그리고 자매님의 입을 빌려 성모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았던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만 간직할 수 없어 모두 함께 사랑을 나누고자 하며 늘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성모님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자고 다짐하면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영광 드립니다.

 1992년 2월 9일
인천직할시 남구 용현4동 92-4 6/2
주용해(다미아노), 이순우(마리아) T.82-1765

 

 

나에게 주어진 엄청난 고통이라는 크나큰 선물은?

전말녀(아가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신 것처럼 저도 아기를 안을 수 있고 키울 수 있도록 주님께 전구해 주신 나주 성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서른 한살에 둘째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낳은 그 날부터 제몸이 계속 아프기 시작하여 1년 후에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선천적으로 희귀한 병에 속하는 담낭과 담도가 벌어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암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혈액형도 RH-O형이라 수술도 겨우 받게 되었는데 연결 부분이 아물지 않은 관계로 두 달 동안 누워서 기계장치를 통해 뱃속에 고이는 쓸개즙을 뽑아 내었습니다.
겨우 퇴원을 하였지만 아기 낳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통증은 끊임없이 1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유명한 대학 병원에서 죽을 고통을 무릅쓰고 재검사를 해 본 결과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을 해야만 하는데 그동안 간 기능이 너무나 저하되었고 작은 창자도 이미 잘라내어 사용했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눈물을 머금고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죽과 호박 삶은 것을 조금씩 겨우 먹으며 연명을 해 나갔지만 그것조차도 먹으면 통증이 오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주 두려운 상태였습니다. 몸무게가 38.5kg로 내려 갔습니다. 아기는 마음씨 착한 둘째 올캐언니가 키우고 있었는데 제가 죽을 것 같으니까 호적을 정리해주면 자기 아이로 잘 키우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정말 살고 싶어서, 죽을 죄인이지만 어린 것을 두명이나 두고 죽을 수가 없었기에 우리 주님께 매달리면서 철야기도회, 피정, 심지어는 피정중에 엠브란스에 실려 오면서까지 주님께 간절히 살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8월 16일 용인 영보 수녀원 피정에 참석하였는데 나주 율리아 자매님이 치유기도하실 때 짙은 장미향기를 맡으면서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어머니!"라고 목메이게 부르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님, 당신이 아기 예수님 안고 계신 것과 같이 저도 제 아기를 안을 수 있고 키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그 때 나주 율리아 자매님 계신 곳으로부터 전류 같은 것이 제 귓속을 두 세번 지나갔습니다. 너무나도 큰 기쁨이 가슴을 채우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춤을 추며 찬미했습니다.

그 후 저의 몸은 좋아져 밥도 먹고 아기도 데려와 저의 애틋한 사랑으로 잘 키우고 있으며 몸무게는 45kg가 되었습니다. 피정 중에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테이프를 구하여 냉담자, 신심이 깊지 않은 자,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들려 주었는데 냉담자는 냉담을 풀고, 믿지 않는 자는 성당에 나가게 되었으며, 신심이 깊지 않던 자는 열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뵈올 수 있도록 9일 기도를 드렸더니 1993년 1월 2일 새해 첫 토요일에 저희 부부를 초대해 주셔서 성모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많은 체험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남편의 믿음도 한 단계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하느님을 믿지 않던 동안 세속에서 온갖 죄악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정말 영과 육이 죽어야만 할 대 죄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엄청난 고통"이라는 크나 큰 선물을 주시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되게 해 주시고 기쁨, 사랑, 평화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바칩니다.

 

경기도 남양주군 진정읍 장현 삼신APT 105/414
전말녀(아가다) T.(0346)65-4711

 

 

나 이제 길 잃은 양이 되지 않을래요. 

김 프란체스카(민정)


작년 영국에서 대학 졸업반일 때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엄마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는데도 마음의 문이 닫혀져있던 나는 성모님이 나를 포함하여 많은 자녀들 때문에 눈물 흘리심을 몰랐었다. 올 9월 대학원에 진학을 앞두고 잠시 한국에 나와 있던 중 6월 6일 철야기도에 엄마와 외갓집 가족과 참석하였는데 성모님은 그윽하고 아름다운 장미향기를 성모님 집과 마당까지 가득 메우시어 우리 가족을 반겨 주셨다. 이 날 우리 가족은 많은 은총을 받았는데 외할머니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외할머니는 올해 87세이신데 서울에서 나주에 모시고 오실 때까지 몇 달 전 허리를 다치신 상태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셔서 온 가족이 부축해 모셔왔는데 이 날 따라 귀도 몹시 아파하셨다. 철야기도 전반기에 잠시 잠이 드셨는데 깨어나 하시는 말씀이 어떤 손이 나타나 당신께 무엇인가 하얀 것을 먹여 주셨는데 귀가 나으셨다 한다. 서울에 올라 오실 때에는 몸도 가벼워지셨다 하시며 4층이나 되는 높은 계단을 가족들의 부축도 받으시지 않고 난간도 붙드시지 않은채 가뿐히 홀로 올라가셨다.
며칠 뒤 외할머니께서 가족들에게 '너희들도 그날 기도 중에 큰 불과 활동사진 보았지?' 하시는 물음에 어리둥절하여 자세히 여쭈어 보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듣게 되었다. 철야기도중 율리아님께서 성모님 메시지 말씀을 시작하실 때였는지 너무나도 큰 불이 성모님 오른편에서 밝히어지더니 가운데로 이동해 오기 시작했다 하신다. 성모님도 보았는데 움막같은 형태의 초가집 안에 계셨고 앞에는 조금 돌아다니실 정도의 마당이 있었고 집 뒤로는 산이 있고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성모님은 색이 바랜듯한 파란망또를 걸치고 계셨는데 걷지는 않으시고 어떤 사람들이 발밑을 미는듯이 모시고 다니시더라 하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이날 성모님을 왜 저렇게도 가난하게 모셨을까 저 허름한 초가집에 비가 들면 어쩌려고 저리 모셨을까 하시며 성모님이 너무나도 불쌍하여 몹시 우셨다 한다. 큰 불은 율리아님께서 메시지를 전하시는 동안에도 계속 머물러 있었는데 어찌나 크던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본 줄 아셨다 한다.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에 앞에 나가서는 나주 성모님을 뵈니 이 때는 지금 계신대로 잘 모셔져 있었기에 할머니께서는 "그러면 그렇지 잘 모셔야지." 하시며 "옛날 가난했을 시절의 상황을 활동사진으로 보여준 것이구나."라고 생각하셨다 한다. 우리 할머니는 지금도 안경을 안끼시고 바늘귀까지 끼우실 정도로 눈이 밝으신 분이다. 할머니께서는 이 날 베들레헴 마굿간에 계신 마리아님을 뵌 것이라 생각된다.
 철야기도 이후 건강이 날로 좋아지시고 귀도 밝아지셨으며 바느질도 하시고 카페트도 세탁하시고 기쁨이 넘치셔서 지금도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앞에 두고 기도하신다. 이상은 외할머니의 체험이고 나의 체험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철야기도에 다녀온 뒤로 성모님의 장미향기가 생각이 나서 나주에 갔는데 목요 성시간에 참석하게 되었다. 목요 성시간이 있다는 것은 이날 처음 알게 되었다. 성모님은 장미향기를 많이 풍겨 주셨고 재가 타는 냄새도 주셨다. 나는 이 모든 향기를 가슴으로 길게 잔뜩 들이마셨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는데 대학 시절 불규칙한 식사와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얻었던 쓰리던 위가 치유되었다. 나주 성모님을 알게된 후로 나는 마음의 평온을 얻었고 성모님과 함께 하니 모든것이 두렵지 않다. 전에는 멀게 느껴졌던 성서의 말씀도 이젠 마음속에 가까이 다가온다. 부모님과 함께 택했던 과목이 맘에 들지않아 불만스러워 심지어는 원망까지 하며 공부도 잘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공부도 잘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모두는 주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 삶에 있었던 고통에 감사드린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알고 성모님의 품에 안기기 위함이었다. 나와 우리가족을 사랑하시어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주님, 그리고 성모님, 마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젠 길 잃은 양이 되지 않을께요.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삼호APT 10-102
김 프란체스카(민정) T.(02)537-8296

 

 

나주 성모님 기적수 세방울로... 

조희인(마리아)
 

저는 원미동 성당에 다니는 조 마리아 입니다. 기적수로 기적을 일으키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이렇게 펜을 듭니다. 또한 윤율리아 자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9월 30일 나주에서 오신 윤율리아 자매의 피정에 참석한 후 받아온 '나주의 성모님과 성체(2)' 책자를 남편한테 읽어보라고 했더니 읽기를 거절하더군요. 10월 1일 새벽에 제가 아침 기도를 하는중에 남편이 책을 보자고 해서 보여주는데 책을 보려고 책을 만지다가 갑자기 등과 허리 여러곳이 만질수도 없이 아프다고 하며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방을 뒹굴었습니다. 세차례에 걸쳐서 통증을 호소하더니 내가 기도하고 있는 성모님 앞으로 기어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남편도 성당에 다니지만 평소에는 제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하느님께서 저에게 담대함을 주셔서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남편한테 '회개하고 반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성모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더군요
제가 기적수를 세방울 입에 떨어뜨려 주고 기도를 했더니 아픈곳이 가라 앉고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시간이 새벽 3시 30분 부터 5시 30분까지였습니다. 그후로는 아프다는 말씀을 안 하십니다.
너무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 저의 아들이 왔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하길래 기도를 하고 기적수를 아픈곳에 바르고 세방울을 입에 떨어뜨려 주었더니 나았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부족한 저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원미동 성당에 오셔서 수고하심을 뒤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원미동 성당 조 마리아 올림
부천시 원미구 원미2동 184-21
조희인(마리아) T.(032)664-1178

 

 

나주 성모님 상본으로 동생 골수암이 치유되었어요 

박 엘리사벳
 

남동생과 1.4 후퇴 조금 지나서 이북에서 넘어와 살다보니 금전적으로 고통받게 되어 동생은 인도네시아로 가서 16년동안 돈을 많이 벌어서 돌아온지 5년 되었습니다.
목욕탕을 시작해서 살고 있습니다.
동생은 성당에도 잘 안나갔고 주일 미사 어쩌다 한번씩 가는 정도였답니다. 하루는 속이 답답하다고 하여 한 3 ~ 4개월 앓다가 내시경을 찍어보니 별로 나타나지 않았고 한번은 몸에 피가 묻어서 지하실 계단을 오르내리다 다쳤는가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보니까 온몸에 피가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즉시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해보니 골수암이라는 병명이 나왔습니다. 저는 동생에게 "너 성당에 안나가고 기도도 안하면서 {하느님이 왜 선악과는 만들어 가지고 고통 주시느냐}고 하다가 하느님께 되게 맞는거다."고 말한 적이 있어 죽을병 걸린 동생이라서 야단치지도 못하고 나주에서 가져온 나주 성모님 상본과 스카풀라와 1단 묵주를 잘싸서 동생 베개밑에 넣어두고 병실을 나오면서 "예수님! 죽은 나자로도 살리신 주님이신데, 이까짓 불치병이야 당신 손길 한번만 닿기만 해도 나을 수 있으니 치유하여 이 세상에서 착한 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아니면 회개하여 당신 앞에 나갈 수 있게 해주시고 나쁜 생각 안들어 가도록 도와 주십시요. 5살때 엄마 잃고 남매가 살아 왔습니다. 불쌍한 것을 데려 가시면 나는 어떡합니까?" 하면서 아들 보고 기도 부탁하니까 친구들도 하루 15단 묵주기도를 바쳐 드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족 모두에게 나주 성모님께 기도하면 걱정할 것 없다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자고 했습니다. 동생 나자로는 그뒤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하게 됐습니다.
퇴원 후에 검사를 한번 더 받으라고 해서 병원에 다시 갔었는데 의사가 깜짝 놀라면서 골수암의 균이 하나도 없이 깨끗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감사 미사 드리고, 찬미 영광 드립니다.
남동생과 저는 나주 성모님 상본을 간직하고 고통스러울 때 기도 드립니다.
(베개 밑에 넣어 두고 온 나주 성모님 상본은 동생이 보고서 자기 머리 밑에 잘 모셔 두었다는 것을 동생댁이 알려줘서 뒤에 알았다)
주님과 성모님께 믿고 의지하며 깨달았으니 이제 당신한테 갈 때까지 당신 일을 하다가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그애는 돈만 번다고 애썼으니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성모님 감사드립니다.

 

1994년 9월 3일 첫토요일
하남동 본당 박 엘리사벳

 

 

나주 성모님 성시간에 참여하여 자궁암이 깨끗해지다.

오지연(레지나)


제 나이는 스물 세살입니다.
광주 전대 병원에서 자궁암이라고 진단이 나왔습니다. 작년 8월 어느 목요일 성시간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주에 오는데 차 속에서 장미향이 엄청나게 났었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뒤 검사를 해보니 깨끗해 졌다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1993년 9월 5일
목포 삼학도 본당 오지연(레지나)

 

 

나주 성모님으로 인하여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었지요 

윤인자(안나)
 

저는 임진각 성당 윤 인자(안나)입니다.
영세 받은지는 4년 되었는데 91년 8월에 나주를 처음 방문했었습니다. 대전에 사는 딸네 집에 갔다가 옆집 사람의 권유로 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철야기도 날이었는데 얼마나 복잡하던지 그 인파속을 뚫고 성모님 집안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향기도 많이 맡았는데 사람들이 성모님의 사랑의 향기라 하더군요.
이 향기는 밖에서부터 나기 시작했고 율리아 자매님이 나오시자 더 많이 났었습니다. 기도회가 끝이나자 메시지 테이프를 두 개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밤낮으로 들으며 울며 불며 잘못 살아 온 제 삶을 통회했습니다. 영세 받기 전에 저는 성당가자고 전교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XX 년 너나 믿어라."하며 점치러만 다니고 부처님 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80만원을 주고 굿을 하려고 하는데 저를 성당으로 인도했던 자매들이 찾아왔습니다. 성당에 다니자고요. 그래서 굿해서 조상들 좋은 곳에 다 보내고 믿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그 돈으로 맛있는 것이나 사먹고 하느님께 기도하면 조상들도 좋은 곳에 갈 수 있고 당신 병(당시 나는 많이 아팠다) 도 나을 수 있다고 하며 묵주를 보여 주는 거였어요. 그 말에 솔깃하여 영세도 받기 전에 묵주기도를 배웠죠.
제 삶이 기구해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고생하며 또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다보니 16살부터 집을 떠나 객지를 전전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춤, 노래(육자배기) 등 세속적인 것은 못하는 것이 없어 결혼 후에도 팔도를 놀러 다니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랬던 제 삶이 나주 성모님으로 인하여 반성하고 부끄러워져 회개하게 되었지요. 남편은 얼마나 망나니였는지 저를 많이 때리고 싸우고 했었습니다. 저도 질세라 남편이 "야 XX  년아."하면 "야, 이 XX 놈아."하며 싸웠고 또 두들겨 맞아 코피에다가 귀까지 아프게 되었는데, 제가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되고 성모님을 알게 되고서는 겉으로는 참고 도망만 다녔었지요. 그러다 남편도 나주 성모님 집을 한번 다녀가고는 변해서 "개 같은 X"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세는 안 받았지만 기도도 열심히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성모님 덕입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4년 6월 30일 임진각 성당
윤인자(안나)

 

 

나주 성모님은 장산도에 공소를 세우게 해 주셨어요. 

김마리아
 

저는 낙도 신안군 하의면 공소에 레지오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마리아 입니다. 남편은 공소회장으로 있구요. 목포에 있는 경동 성당 소속의 장산도 공소는 11년전에는 그곳에 공소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주교님과 본당 신부님의 명으로 그곳에 공소를 마련하러 갔지만 개신교 교회가 7개나 있었고 "우상이나 숭배하는 교회"라고 박해를 받아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나주 성모님 집 철야기도회에 비장(?)한 결심을 하고 갔지요. '그곳에 공소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십사'하고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의 손을 꽉 붙들고 계속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제게 힘을 주십시오.'
주교님은 몇번 말씀하셨지요. 장산도에만 공소가 없으니 공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장산도에 공소를 세우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는데 나주 성모님은 장산도에 공소를 세우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는 장산공소를 위해 열심히 전교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마초리에 계신 할머니 한 분이 허리가 90도 이상 구부러져 있었는데 나주 성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허리가 펴졌습니다.
얼마 후, 또 그 할머니가 눈이 쓰리고 아파서 안보였는데 병원에 가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려고 아들 4형제에게 얘기해서 그때 돈 700만원을 모아놓고 있었지요.
기다려 보시라고, 내가 다시 나주에 한번 갔다와서 기도해 보고 안되면 수술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주에 다시 한번 갔다 와서 사흘을 기도했더니 쓰리고 아파 안보이던 눈이 깨끗이 나았지요.
이 할머니가 '영자 어머니'라고 하는 분이었는데 이 치유소식이 섬에 퍼져 '하느님이란 분이 틀림없이 계시는구나.'하고 53명이 한꺼번에 영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고 저희로서는 지식도 부족했기에 그 사람들을 잘 이끌어갈 자신이 없었는데, 성모님께서 율리아 자매의 장부 김율리오 형제를 그 섬으로 발령이 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더더구나 율리오 형제님은 예전부터 진도나 도초 공소로 같이 봉사도 다니고 잘 알던 분이었으니 얼마나 기뻤던지요.
자매님이었다면 끌어안고 울었을텐데 남자라 그렇게도 못하고 너무 좋아서 혼자서 울었습니다.
율리오 형제님이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매주 목요일에 공소에서 교리를 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께 오래오래 있게 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과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공소 활성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또 한번은 100일 갓 지난 어떤 아기가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몸에 혹이 나서 수술을 하면 또 다른 부위에 혹이 생기고 수술하면 또 다른 부위에 혹이 생기고 이렇게 계속 7번이나 혹이 생기기에 율리아 자매님에게 '이런 환자가 있으니 내가 가서 기도하도록 나에게 기도좀 해주라.'해서 기도를 받고 다시 그 곳에 가서 하루 저녁 기도를 했더니 싹 나았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목포 경동 성당
신안군 낙도 하의면 공소
김마리아

 

 

가장 큰 십자가가 은총으로 바뀔줄이야 

 박미지대 벨라뎃다

찬미 예수님
율리아 자매님! 성모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저희들에게 공동체 기도회를 마련해 주셨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집 순례 덕분에 공동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어딜 가나 같은 성모님이신데 구태여 나주까지 와서 기도 드려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순례를 거듭한 덕분으로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 향유, 성체의 기적까지 직접 뵙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는 공동체 기도회를 통하여 성모성심이 승리할 수 있도록 생활기도로 봉헌된 삶과 회개의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 대부분은 호기심에 찬 구경꾼이었고 더러는 예수 마리아 성심의 승리도 이해 못한 채 제각기 필요한 은총만 많이 받아 가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 인준이 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무관심 했고, 심지어는 사탄의 짓으로까지 몰아 붙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했던 저희들도 안타까운 심정인데 성모 성심의 뜻을 헤아리시는 율리아 자매님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만일 인준된 후 나주 성모님 집에 순례 오려고 마음먹었더라면 진정한 회개도 알지 못한 채 저희가 이미 죽고 없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진복자다"라는 복음 말씀에 의존해서 제 생각만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선행만을 골라서 봉헌 했겠지요.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얼마전 저는 슬기롭지 못하여 헤어나기 어려운 법적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가족들이 검찰청에 불려갔고 가정은 거의 파경 위기에 놓여 제가 형무소 생활까지 각오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너무 힘이 들어 아무런 희망도 없이 허망한 마음으로 무조건 사정이 닿는대로 나주 첫토요일 철야 기도회인 공동체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회개의 삶이 무엇이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한 공동체 기도 덕분에 은총을 입기 시작한 것입니다. 난생 가장 힘든 고통을 저에게 안겨준 사람의 가정을 위하여 화해를 위한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분들이 아니었던들 제가 어찌 성모님 집에서의 큰 기적들을 볼 수 있었겠으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까지의 제 삶 동안 가장 큰 십자가라고 생각했던 고통들이 은총으로 바뀔 줄이야 제가 어찌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빛나는 영광에로 다다를 수 있다는 말씀을 이제 와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하는 철야 기도의 힘으로 미움을 용서로, 용서를 감사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10년이 넘도록 눈물과 피눈물과 향유를 흘려주시고 성체의 기적을 보여 주시면서까지 회개의 삶을 촉구하셨건만 공동체의 기도회를 통해서 이제 겨우 '교만병에 찌들어 있었구나'하고 저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매월 행하는 첫 토요일 기도회에서 받은 은총으로 회개와 용서는 물론 겸손의 덕을 주신 은총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토요일 기도회를 마련해 주신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정을 파경의 위기까지 가도록 했던 그분들 행방은 모르지만 그들도 가톨릭 신자이므로 거짓 약속이 되어버린 죄는 기워 갚아야 하기에 나주 성모님께 돌아와 그리스도의 성체를 통해서 일치되기를 기원하며 만나는 날까지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주 성모님 은혜로 그분들을 주님과 나주 성모님께 기쁘게 봉헌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일이 마련되어 파산될 가정이 기적적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매월 첫토요일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사람이 많을 때는 마음과 귀만 성모님께 향하고 밖에서 기도하다가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도 갖지 못하고 돌아갈 때는 처음에는 섭섭하고 허전했는데 지금은 예수 마리아 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크게 봉헌하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성모님, 오늘 사람이 많아 밖에서 기도 드리다 돌아갑니다. 공동체 기도 소리에 '아멘'으로 작은 저의 몫도 합칠 수 있었으니 성모 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써 주십시오. 제가 받은 이 기쁨이 다음 기도회 날까지 활력소가 되도록 도와주셔요"하고 성모님 집을 떠난답니다.

대구시 용계동 139-1
박미지대 벨라뎃다 T.(053)962-0509

 

 

감실 안에 주님의 현존을 더욱 확신을 갖고 깊이 느꼈다. 

김정열(루시아)

찬미 예수
안녕하세요. 저는 심곡 본당에 다니고 있는 김 정열 루시아입니다.
저는 나주에 갈 계획이 없었는데 세바스티아노 형제님의 권유로 1994년 11월 24일 나주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주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분 경이었습니다. 평상시 온몸이 아팠는데 밤차를 타고 내려와 극도로 피로하여 온몸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잠을 자다가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교황 대사님과 파신부님 일행께서 오시고 곧이어 율리아 자매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쑥스러워 하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다함께 묵주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께서 교황 대사님과 파신부님께 강복을 달라고 하시는 것 같았는데 기도하는 도중 율리아 자매님께서 용수철이 퉁기듯이 일어나 손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곳에 성체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으며 그 순간 나는 온 몸이 뜨거워지며 그렇게 눈물이 흐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 예수님,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만큼 모령성체를 하고 입으로 죄를 지었는지 예수님과 성모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두조각난 성체를 하나는 교황 대사님께, 하나는 파 신부님께 드렸고 교황 대사님께서 그곳에 모인 신자들에게 성체를 조금씩 떼어 영하게 하였는데 성체가 그곳에 모인 신자들이 다 영하고도 남았습니다.(약 70명 가량)
성서에 씌어진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 머리에 스쳐 가면서 "오, 예수님!"하면서 찬미를 드렸습니다. 이윽고 율리아 자매님께서 밖으로 나가시려다가 급히 되돌아오시더니 교황 대사님과 파 신부님의 손을 잡고 성모님상 앞으로 나가셨고 두분의 손을 잡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자매님께서 일어나셨는데 자매님의 혀에 빵의 형상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오직 찬미와 감사와 찬탄밖에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모령성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되었고 감실 안에 주님이 참으로 현존하시는구나 하고 더욱 더 확신을 갖고 믿게 되어 미사를 할 때나 감실 앞을 지날 때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자 하는 것을 깨닫고 더욱 더 성모님을 닮아 성모님의 메시지를 실천하고 내 가족과 이웃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어 기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 기운 내세요.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에 한국을 선택하셨고 그중 나주 땅을 선택하시고 율리아 자매님을 선택하셔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현존을 알리시고 성모님을 통하여 당신께 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을 가지며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나의 어머니 성모여, 영원히 엄마 품에 안겨 살겠나이다.

1995년 6월 18일
부천시 소사구 심곡 본당 786-3
김정열(루시아) T.664-4774

 

 

고통은 결코 형벌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사랑이었다. 

이미순(안나)

찬미예수
나주 성모님께 드리나이다.
제가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처음 보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10년 전으로 기억됩니다. 평화동 본당미사에 왔다가 누군가가 갖다 놓은 나주 성모님께 대한 첫번째 메시지 소책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눈물과 피눈물로 호소하고 계시는 한국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보고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으며 메시지를 읽는 동안에 한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제 신앙으로는 정말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더욱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각오가 새로워졌습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나주 성모님을 방문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혹시라도 누가 나주에 가면 함께 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봤지만 제 주위에는 나주에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록 찾아뵙지는 못했어도 나주 성모님께서는 저의 신앙을 변화시켜 주셨고, 소극적인 신앙에서 보다 더 적극적인 신앙으로 자라나게 했습니다. 십자가가 무겁고 슬퍼질 때 나주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을 생각하고 메시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읽었으며 생활 말씀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삶은 여전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십자가의 연속이었으며 남편을 통하여 주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정말 죽고 싶은 충동을 한 두번 겪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고통의 무게에 짓눌리어 좌절과 눈물로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쳐보아도 저의 고통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들은 저를 더욱 주님께로 성모님께로만 가까이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이 안계셨다면 정말로 저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살아야 할 가치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성령 세미나, 피정, 기도회, 제가 갈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면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피정에서 나주 성모님 메시지 테잎 3개 짜리를 구입했습니다. 그때까지 소책자만 읽었던 저는 메시지를 듣는 순간 아! 정말로 성모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주에 간적도 없었고 율리아님을 뵈온 적도 없기 때문에 어떤 성우가 저토록 아름답고, 고운, 감미로운 목소리로 녹음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즈음 저는 저 자신의 성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테잎을 들어 왔는데 그때부터 괴롭고 마음의 평화가 깨질 때 늘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위로와 힘을 받아 용기와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지금부터 약 5년전 어느 가을 들녘에 오곡백과가 황금 물결치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저는 저와 잘 아는 언니의 차를 타고 그렇게도 그리던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첫토요일 기도회에 꾸준히 참석했고 때로는 박해도 주어졌지만 목요일 성시간도 가끔씩 참여했습니다.
저의 십자가는 남편의 술주정과 온갖 구타, 외도와 가난이었습니다. 율리아님의 신앙체험 말씀 중에 어려서부터 많은 매를 맞으면서 자라났다는 그 말씀이 저의 생활과 많이 비슷하다고 느꼈으며 그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고통은 결코 형벌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코 십자가와 희생이 따르지 않고는 그 누구도 구원의 길을 찾을 수도 없고 다다를 수는 더욱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모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영혼이 성숙됨을 느꼈고 진실로 복음을 실천하며 살고 싶었고 왼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뺨도 대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주님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모님 눈물과 피눈물을 닦아 드리기 위하여 저 자신과 싸우며 성찰하고 또 메시지를 들으면 들을수록 주님과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감을 느낍니다. 이제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바치며 사는 것이 저의 기쁨이며 보람입니다.
행여나 소죄라도 지으면 저의 영혼을 더럽힐까 봐서 고백성사를 자주 보고 성체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더욱더 흠숭하며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전에도 여러 차례 남편의 외도가 있었지만 약 2년전 남편은 자신보다 11살이나 연하인 여인과 살림까지 차렸고 그때 가난과 싸워가며 모아둔 돈  900만원을 받아 가지고 집에는 한푼도 주지않고 그 여인과 놀아났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하여 성모님께 애원하며 "어머니! 이혼은 안 할께요. 그러나 별거라도 몇 개월 해야만 그 사람이 정신을 차릴 것 같아요."하고 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의 철야기도는 저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모든 자매들의 신앙체험은 남편 외도 때문에 겪은 고통과 나주 성모님을 통해서 사랑으로 승리의 기적을 이룬 이야기들 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자매님의 손을 잡고 "제가 지금 그 고통을 겪는 중인데 별거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자매는 저에게 "자매님! 자녀들의 곁을 한 발짝도 떠나시면 안돼요. 끝까지 사랑으로 승리하세요!"하고 제게 단호하게 말했을 때, 저는 다시 "정말로 안 돼나요?"하고 몇 차례나 말했지만 그 자매님의 말은 똑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 기도하면서 한없이 울었고 "성모님! 15년을 넘게 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해왔지만 변함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아요. 주님!"하고 묵상하던 중에 어떤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라!" 저는 생각해 보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주님! 그가 원하는 것은 돈이예요." "그래, 그것을 해 주어라."
그 뒤로 저는 난생 처음 음식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어떤 고통도 굳세게 참고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요? 제가 직장에서 일한지 채 1개월도 되지 않은 어느날 그 여자와 헤어져야겠다고 남편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여자와 무척이나 헤어지려고 노력하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저는 나주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이것이 바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이신 "사랑 앞에서는 어떤 마귀도 굴복한다."고 하신 그 사랑의 기적이구나!하고 체험을 했습니다.
정말로 억울해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나주 성모님 뜻에 따라 순명했기에 주어진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가 냉담을 했고 자꾸만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사업만을 고집했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어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주어라."했기에 무조건 순종하며 사랑으로 따랐고, 그 결과 단칸방에 5식구가 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어언 2년을 살아왔어도 모든 고통을 기쁘게 성모님께 봉헌하며 또 온전히 맡겨드리면서 살아 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편은 회개하여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나주에 가서 천막이라도 치고 살지 그러느냐? 라고 핍박을 일삼던 남편은 처음에는 제 간청에 못이겨 나주 성모님께 오게 되었으나 그 뒤로는 5- 6회 정도 나주에 더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나주에 가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이 성모님께 자주 가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할 정도로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주님! 저희 부부가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사랑을 더욱 깊이 나누는 부부가 되게 해 주소서!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주님, 성모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가난이라는 십자가를 사랑의 끈으로 남겨두신 주님!
그것으로 인하여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들도 기꺼이 기쁨으로 봉헌합니다.
사랑하올 주님! 성모님! 위로 받으시고 찬미, 영광 받으소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가 영원히 계속될지라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인내와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어 참된 진리의 길로 저희 가족을 이끌어 주신 어머니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저희 가정은 진작 풍비박산이 나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질 뻔 했습니다.
위험 중에서 저희 가정을 지켜 주신 나주 성모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편지를 나주 성모님 옥좌 앞에 올립니다.

 

 1997월 3월 24일 사순절 성주간 오후 3시경
평화동 천주교회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319-3
이미순(안나) T.85-6978

 

 

    나주 성모님을 만나고 와서 

     류석인(베드로)

      "사랑하는 나의 작은 영혼들아!
       태양은 빛이다.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하늘을 열어
       빛을 내리신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징표는 구원의 신비이며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는 것이고
       너희를 축복하는 것이며 이땅을 축복하는 것이다."
       -
     1991년 12월 5일 나주 성모님 메시지중에서

내가 나주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95년 2월 4일이었다.
우리의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지내고 음력으로 정월 초닷새.
이 날은 또한 만 55세가 되는 나의 생일날이었다. 예년이면 아내(데레사)의 정성어린 음식장만과 가족들의 방문으로 떠들썩하며 생일 축하에 여념이 없을 날에 친척들에게 일일이 오지 말라는 설명을 하며 착잡한 심정으로 칠순의 처형님과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나주 성모님의 집 방문길에 나섰다. 나의 병세로 인천에서 나주까지의 여행은 무리라고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나주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경이었다. 학교 교실만한 경당안에는 이미 7,8백여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서 있었고 겨우 맨뒤쪽에 들어섰으나 앉을 수가 없었으며 그대로 뛰쳐 나갔으면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율리오 회장님의 인사 말씀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들이 고요히 잠을 청하는 이 시간!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 비좁은 경당 안에서 밤을 새워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확장성 심장 경색증" 이라는 병명을 진단받고 3개월 간의 투병생활 끝에 찾은 마지막 길이었다. 심장의 기능이 20% 미만으로 심장이식 수술을 받지 않고서는 생명이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청천병력 같은 의사의 말에 아내와 가족들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서야 아내의 고백으로 심상치 않은 병을 알게된 나는 그동안 가족들이 이식수술을 받게 하기 위해 너무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 것을 알고는 가족들을 내가 설득하여 병원 생활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끊임없는 기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혼배성사후 10년간의 냉담생활과 방황, 사업 실패의 파란만장 했던 시절을 어이 이 지면을 통하여 통회할 수 있단 말인가? 통회를 해도 끝이 없고 한이 없으며 이렇게 죄 많은 생활을 하여 온 나를 주님은 과연 용서하여 주실까?
 왼쪽 가슴 밑으로 축 늘어진 심장 때문에 거동은 물론 앉을 수도 누울수도 없으니 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어쩌다 잠을 잘 때는 호흡장애로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다. 음식도 먹을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80kg의 당당한 체격은 70kg로 감소 되었으며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올 즈음 본당 신부님의 병자 성사를 받았으며 가족친지들의 방문과 레지오 단원들의 방문기도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첫 번째 나주에서의 밤은 심장의 통증으로 인하여 한마디로 고통스런 밤이었다. 나의 심한 통증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아내가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말에 일어섰으나 나올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순간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한 마디라도 못들을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주저 앉아 경청하였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돌아왔다. 맨 뒤에 앉았기에 차례가 왔을때는 아침 7시가 되었다. 성모님이 모셔져 있는 제단 위에 올라섰을 때 나는 짙은 장미 향기를 맡을수 있었지만 어디서 나는지 몰랐다.
성모님께 경배를 드리고 나서 옆에 앉은 인자로운 모습으로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하는 율리아 자매님을 보는 순간 어머님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은 충동에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나도 고달픈 삶을 살아 왔기에...
너무나도 육신의 통증이 있었기에...
잠시 율리아 자매님의 손을 잡고 있는데 뒤에 있던 아내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렸다. "자매님, 저희 남편은 심장이식을 하여야만 사는 위중한 병입니다. 멀리 인천에서 왔어요." 어느새 율리아 자매님의 손이 나의 심장부위를 쓰다듬고 계셨다. 이것으로 나주에서의 철야기도는 끝나고 귀향길에 올랐다.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단잠을 자고 일어 났을 때 차창으로 천안삼거리 휴게소가 보였다. "이상하다. 아니! 통증이 없다." 너무나도 흥분이 되어 버스안에서 자고있는 아내와 처형을 깨워 일어서서 심장을 눌러보고 몸을 비틀어 보아도 통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알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 나주 성모님과의 첫 만남에 이처럼 귀중한 생일 선물로 치유케하여 주셨으니 하늘에서 내려주는 징표는 구원의 신비라고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가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이제는 이식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의사를 생각하며 주님의 능력이 첨단 의술을 능가함을 절실히 느끼며 새삶을 살도록 불러주신 주님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인천시 남구 주안6동 980-6 진흥연립 가동 102호
인천교구 주안 성당 류석인(베드로)

 

 

나주 성모님을 신이나게 전했는데 악성 비염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김 소피아


찬미예수
저는 김소피아라고 합니다.
나주의 성모님께서 눈물 흘리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한점의 의심도 없이 믿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주 성모님 집을 방문했었지만 지금은 자주 오지는 못하고 가끔씩 옵니다. 그런데 한번씩 올 때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악성 비염을 앓고 있었는데 아침에 자고나면 늘 휴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곤 했었어요. 피고름까지 묻어 나오고 머리도 아팠지만 이상하게 병원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저희 집안이 구교인지라 친정 어머니께서는 아주 열심히 묵주기도도 하고 성모님을 사랑하시는데 나주 성모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해하지 못하셔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는 친정 식구들이 저희 집에 왔기에 동생과 어머니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나주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 신이 나서 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너무나 고통이 심해서, '날이 새면 병원에 가 봐야지.' 생각하고 뒤척였습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식사준비를 해서 식구들을 보내고 설거지 하는 동안에 제 코가 아픈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10시 미사를 가려고 하다가 생각이 난 거예요.
어제 밤에 고통은 너무나 심했지만 휴지를 한 번도 안썼다는 것이...
그동안 심하게 앓아왔던 악성 비염이 깨끗이 나아 버렸습니다.
그 후로 동생과 어머니를 설득시킬 수가 있었구요. 성모님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제 얼굴에서는 빛이 난대요.

 

 1995년 1월 7일
전주 서산동 본당
김 소피아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받은 어머님의 사랑과 은총 

 박창봉(요아킴)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제게 베푸신 모든 사랑과 축복에 대하여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께 감사와 찬미를 올리며 성모님으로 부터 받은 체험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91. 8. 3.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하였다.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은 성모님 상에 피눈물이 흘러 내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많았다. 방문하여 보니 성모님께서 그날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율리아 자매님을 보는 순간 여성으로서 단정하고 인자한 인상을 느꼈으며 율리아 자매님이 한 사람씩 손을 잡아주었고 시간이 없는 관계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출발하였다.
성모님 집에서 느낀 것은 저의 집에 모신 성모님과 같은 생각 밖에는 느끼지 못하였다. 올 때 봉사자 자매님께 부탁하여 비디오 테이프 4개를 구해 가지고 왔다. 집에 도착하니 22:00시 경이었다. 집에와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의 고통, 나의 죄를 대신하여 보속하는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죄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율리아 자매님의 십자가 고통, 낙태보속 고통, 연옥의 고통, 김대건 신부님의 참수 고통 그리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고통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싫어 하시는 것만 찾아서 하지 않았나? 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비디오를 보지 못할 정도였으며 너무나 울어서 막내딸이 비디오를 끄라고까지 하였다. 나는 율리아 자매님 같지는 못할지라도 남을 위해서 보속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하느님 아버지의 복음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남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해 주어야지.'하는 생각이 계속적으로 떠올라 결심을 하여본다. '하느님 아버지 복음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영혼과 육신이 깨끗하여야지.'하고 9일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9일기도의 지향은 천상에 내 영의 기록카드를 보고 고해성사를 보게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13일이 되던날 천상에 기록카드는 보여주지 않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보아라.'하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참으로 이상하다.' 하고 하루일과를 마치고 퇴근하였다. 다음날 일요일이 되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성찰한 죄를 기록하여 가지고 성당으로 갔다. 준비기도를 하고 고백실에 들어갔다. '아버지, 고백합니다.'하고 고백을 하였다. 고백이 끝난 다음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 이 시간까지 지은 죄는 모두 용서를 받았고 앞으로 생각나는 죄도 전부 용서 받았습니다.' 말씀하시는 순간 큰 소리로 '아버지 감사합니다.'하고 얼마나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고해성사를 본 후에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보아라.'하는 영감이 떠올라 성서를 찾아 보았다.
요한 복음 8장 이었다. 11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죄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오묘한 방법으로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체험을 하였다. 나는 성모님과 같이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92. 3. 7. 나주 성모님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철야 기도회 끝날무렵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 앞에 섰을 때 짙은 장미향기가 나더니 성모님께서 나를 꼭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나는 '엄마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계속 나오는 것이었다.
그때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잠기었다.
천상 어머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은총내려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올리며 한평생 이 죄인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시고 도와주신 천상의 어머님께 지금에 와서야 눈물을 흘리며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나는 집으로 와서 성체조배 하면서 '하느님 아버지! 어떻게 하여 딸 같은 율리아 자매(율리아) 앞에서 '엄마 사랑합니다.' 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그 자매를 통하여 천상 어머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는 사랑을 받았다."하는 영감이 계속해서 떠 올랐다. 앞으로 그 자매를 통하여 천상 어머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여 보았다. 그러나 나는 항상 기쁘고 즐겁고 행복감에 잠겨 있다.
92. 3. 22 인천 주안 3동 성당에서 피정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92. 6. 6.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하였을 때도 같은 일이 생기었다. 이것이 천상 어머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시는 사랑의 은총이라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 후부터는 어떤 사람을 보아도 미운 사람이 없고 조건없는 사랑을 하여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모든 것을 보면 신비스럽고 즐겁기만 하다. 이것이 지상의 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세상 명예, 재물, 자존심 무엇이 중요한가?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님으로 부터 사랑받는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것을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머님을 생후 9개월만에 생 이별하여 고아가 되어 한 평생을 어머님의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는 자입니다. 35년간 냉담했던 큰 죄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상의 성모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더욱더 행복합니다. 무한한 사랑을 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님 품안에서 영원토록 사랑하게 기도 드립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성모님 사랑을 받게 하여 주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율리아 자매님, 성모 어머님의 메시지를 용기를 가지고 전하십시요. 항상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받으시길 바라면서 제가 체험한 것을 끝냅니다.


 1995년 6월 12일
인천시 남구 주안7동 1432번지 2/1
박창봉(요아킴)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고 새로운 사람이 되다 

장 가브리엘라
 

나는 이 체험담을 나주의 성모님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하여 알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안양엘 갔는데 파신부님이 성모님께서 피눈물 흘리시는 것을 보기 위하여 가는 것 보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보고 새로워져야 하고 생활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때문에 변화된 영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나주의 성모님을 알게 된 것은 87년 성모님 집을 짓기 전 푸른군대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다가 저도 무엇인가 착한 일을 해볼 결심이 생겨서 어느 불쌍한 영혼을 그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소녀 데레사는 17세 소녀로서 학교는 중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제멋대로 놀아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는 술담배는 물론 부탄까스 본드 등 쾌락적인 것은 무엇이나 안가려 환각증세가 심하여 눈까지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룸싸롱 등 윤락가를 다니며 엄청난 죄를 짓고 다녔기에 그 부모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심장이 찢기는 아픔을 당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피하고 더럽다고 버려진 아이 데레사를 주님처럼 성모님처럼 생각하여 내 집에 받아 들였습니다.
나주에 다녀온 후 그 소녀는 나와 함께 메시지를 읽던 중 "모령성체"(88년 6월 5일자) 에 대한 성모님의 말씀을 읽고는 모령성체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밤을 새워 성찰을 시키니 그 소녀는 자기가 부끄러워서 죄를 다 고백하지 못하고 모령성체를 하였다고 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후 매일 메시지를 읽고 또 읽곤 하면서 자주 고백성사를 봅니다. 전에는 묵주기도를 하자고 하면 묵주를 발 밑에 밟기만 하던 소녀가 이제는 매일 성모님께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15단씩 바치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콩나물 자라듯 메시지를 통하여 매일 매일 새로워져서 모든 일들이 180도로 새로워지고 달라졌다고 합니다.
물건을 훔치다가 감옥에 갈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닌 데레사가 돈을 주면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록 새로워졌으며 그렇게 좋아하던 비디오, TV등을 한번도 보지 않는데 주님께 성모님께 안 보겠다고 약속을 드렸답니다. 성모님께 희생, 극기, 보속의 생활을 하여 아름다운 장미송이를 바치고 있습니다. 자기는 그 누구보다도 죄가 많다고 성모님께 희생, 보속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며 성모님의 메시지를 실천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도 죄를 짓고도 죄인줄 모르는 채 윤락가를 맴도는 10대들을 위하여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며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에게 달려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장 가브리엘라

 

 

나주 성모님의 비디오 테잎을 보면서 깨끗해진 태열기와 터진 손과 발 

조 베로니카

1995년에는 나주 성모님의 모든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소서.
저는 조베로니카입니다. 저의 오라버니는 몇해전 미국 뉴저지로 온 가족이 이민을 하여 그곳에 계시는데 94년 추석때 한국에 계신 어머님과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자 9월 20일 아침에 오라버니와 올케가 한국에 오셨습니다.
저는 10일만에 오라버니 내외와 친정 어머님 그리고 형제들을 저희 집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TV앞에 모여서 거기에 정신을 팔고 있을때 저는 얼른 나주 성모님 피눈물 흘리시는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드리며 또 나주 소식지를 묶은 철을 가지고 나와서 저의 체험을 기록한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TV 앞에 가까이 앉아 열심히 설명하면서 1시간이 넘도록 조용히 나주 성모님 피눈물의 호소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내 동생 아들 9살짜리 조카 병현이가 "고모!"하고 부르더니 나주 성모님을 가리키면서 "저 아줌마가 성모마리아야?" "응, 그래. 예수님을 낳으신 엄마야." "그런데 왜 예수님의 엄마가 피눈물을 저렇게 많이 흘려?"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응.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착하게 못 살고 죄를 많이 짓고 사니까, 성모 마리아가 마음이 아프셔서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거야."하고 대답하면서 조카 병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병현이는 "고모, 그런데 왜 나도 이렇게 힘이 들어?"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며 그 어린것이 마음이 예쁘고 기특하여 얼른 일어나서 조카한테 가까이 가서 보니 조카는 자리에 앉아서 TV를 보지도 못하고 선 채로 보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아이의 머리에서부터 얼굴과 목으로 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른들은 자리에 편히 앉아서 또 소파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가면서 보고 있는데 어린 조카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땀을 그렇게 흘리며 저도 힘이 든다고 했나! 그 마음이 너무도 제 가슴을 뭉클하게 했으며, 또 예뻤습니다.
저는 화장실로 데리고 가면서 "나주 성모님, 우리 병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온 몸에 태열기가 붉은 홍역처럼 이렇게 되어서 피부가 거칠고 지금은 국민학교 2학년인데 손과 발가락, 발뒤꿈치가 모두 갈라져서 피가 흐르고 글씨를 쓰려고 해도 손가락이 아파서 글씨를 쓰지 못하고 공놀이 할 때 또 밖에서 뛰고 놀 때에도 언제나 아파하고 있어요. 잘생긴 얼굴이 겨울에 터서 거칠은 것처럼 얼굴도 그렇고 또한 그런 몸이 가려워서 몸을 잘 긁어댑니다. 나주 성모님의 손길로 다 어루만져 주셔서 치유시켜 주셔요." 하면서 저는 세수를 하게 하고 수건으로 땀과 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친정집 식구는 모두 개신교에 다닙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그 아이는 어리기에 성모 마리아라는 소리조차 들어 보지도 못했기에 아줌마라고 표현을 했으며 예수님의 엄마라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1개월이 더 지나서 친정집에 갔습니다.
우리 조카 병현이 얼굴이 윤기가 났고 손가락이 정상적이어서 엄마가 무슨 약을 해 주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조카도 올케도 아무런 약을 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괜찮아졌어?" 하고 올케에게 물었더니 "한 달이 좀 넘었을 거예요." 하고 대답하기에 저는 얼른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제 마음도 나주로 향하여 성모님 앞에 앉아 있는 듯 경당에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친정 식구들도 모두 개종했으면 하는 마음을 나주 성모님께 드립니다. 병현이는 나주 성모님 비디오를 보면서 그때 깨끗이 치유가 된 것입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께서 향유를 흘리시는 사진을 앞에 모시고 바라보면서 기도할때에 나주 성모님이 모셔진 경당에 내가 앉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좋아서 언제나 손쉽게 바라보면서 그 사진에다 "성모님 사랑합니다."라고 입맞춤 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를 잘 따르는 송안젤라 자매가 저의 집에 놀러왔다가 "언니, 저 사진을 내가 가지면 안돼?"하며 가지고 싶어 하기에 내가 아끼고 귀하게 여겼지만 가지라고 주었습니다.
그 안젤라는 40이 약간 넘은 처녀인데 나와 헤어진지 2개월이 됐을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언니 잘 있어?"하며 안부를 묻고는  "언니, 나는 매인 몸이라서 나주에 갈 수 없으니까 나주에 가면 언니가 나 대신 꼭 증언해 줘."하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유방이 너무 많이 아파서 참고 봉헌하며 기도를 해도 계속 통증이 그치질 않았지만 그 동안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병원에 가보지 못했는데 너무 아파 오랫만에 '병원에 가 진찰을 해봐야지.'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참 나주 성모님 향유 흘리신 사진을 가슴에 안고 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을 가슴에 안고 잤는데 깨어보니 유방의 통증이 모두 없어졌다고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나에게 증언해 줄 것을 확답받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나주 성모님께 바라고 의지하며 믿을 때 또한 축복해주심을 확실히 믿으며 다시 나주 성모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다하지 못한 것을 글로써 하고 싶어 이글을 씁니다.
저의 기억으로는 7년전쯤 이라고 생각됩니다.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 비디오 테이프를 수원에서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저의집 안성에 오는데 눈이 부어서 정말 고개를 들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저지른 수많은 낙태죄와 잘못 살아온 온갖 죄 때문에 그토록 많이 울어본 적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도 안성에서 나주 성모님 비디오 테이프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봉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남은 한 생애 주님과 성모님께 온전히 맡기며 마리아 구원방주에서 내리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95년 1월 8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봉산동 23-2 한양연립 203호
조 베로니카 T.(0334)73-2002

 

 

나주 성모님의 사랑이 아니었던들 

안주안

율리아 자매님!
안녕하신지요?
저를 잘 기억 못하시겠지만 저는 율리아 자매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통역을 맡은 스텔라씨에게 만일 율리아씨가 필리핀에 오신다면 꼭 연락을 해 달라고 해서 지난해 필리핀에 오셨을 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안주안이고 저의 본명은 수잔입니다.
제 나이 50이 다되지만 한 살이나 두 살된 어린아이처럼 저의 믿음이 작지만 성모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 그 당시 저는 자궁암에 걸려있었는데도 암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암이 있다는 것을 어머님께 차마 알려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직업은 관광 가이드이기 때문에 장시간을 계속해서 일해야 되는데 한번 씨부시에 갔다오면 언제든지 남모르게 피를 토하곤 했습니다. 스텔라씨는 저와 제일 친한 친구이기에 한번은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큰 애들은 대학까지 나왔으니 내가 죽더라도 네가 맡아서 키워달라고까지 부탁을 했었지요. 그러던 중 율리아씨가 오셨다고해서 스텔라씨에게 졸라서 율리아씨가 메시지 전하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각 도시로 다니는데 부산과 같은 도시인 씨부시에 갔을 때 저는 갑자기 설사가 나서 다시 마닐라에 가겠다고 스텔라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설사가 너무 심해서 식사는 커녕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 힘들어서 율리아씨를 따라 다닐 수가 없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스텔라씨가 표를 감추어 놓고 못가게 하여 그냥 있었는데 율리아씨도 저에게 성모님께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아파도 여기에 있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말에 저는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제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설사에 피도 섞여 나오고 몸속에서 무엇인가 몽땅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하룻밤을 자고 나서 아침이 되니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다 나았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가이드 일을 하면서 멀리 갔다오면 언제나 피를 토했었는데 성모님을 통하여 치유받은 뒤 지금까지 이렇게 몸 건강하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건강 축복을 해주셨으니 이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다 하여도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성모님의 사랑 속에 살아가던중 지난번 교황님의 기도를 한국말로 스텔라씨와 함께 통역을 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과 성모님의 따뜻한 손길이 아니었던들 제가 어떻게 그런 행복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저의 하루 하루를 성모님께 조그마한 즐거움이라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1148 STRADA ST SINGALORY
MANILA
안주안 T.(632)59-2237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아픈 발에도 감싸고 기도했더니 

드니즈 사이프 부인

Mary's Touch By Mail 에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가장 친애하는 친구들께.

저는 성모님의 중재하심에 의해 기적적인 치유를 받은데 대해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2月 12日, 이곳(미국 동부의 버지니아州) 에는 진눈깨비가 많이 쏟아지는 험한 날씨였습니다. 그날 오후 3시 30분쯤, 저는 새들에게 모이를 주려고 집밖으로 나갔다가 계단이 미끄러워서 아주 심하게 넘어졌습니다. 어찌나 힘껏 넘어졌는지, 왼쪽 발이 몸 밑에 깔리면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왼쪽 다리 전체에 심한 통증이 시작되었으며, 저는 겨우 몸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두 군데의 기도회 모임에 전화를 걸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소파에 누워서 묵주신공을 여러차례 바쳤습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에 잠을 깼을때에 왼쪽 발이 붓지는 않았는데 심한 통증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오후 계속 저는 소파에 누워 있으면서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아픈 발에다 감싸고 묵주신공을 열심히 바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마치고 일어섰을때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일어설 수 있었고, 마치 넘어져서 발을 다쳤던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천주님의 어머님, 귀하신 마리아께서 이 치유의 기적을 얻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 저를 치유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겸허한 마음으로 간절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천주님께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1993년 2월 28일
미국 버지니아주6, 화이트 포스트市
드니즈 사이프 부인

 

 

나주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다시 찾은 예수님 

민 그리스비나(현숙)

어머니! 당신은 눈물과 피눈물로써 이 보잘것 없는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하게 하시어 아름다운 향기로 영혼 육신을 어루만져 치유하여 주셨으며, 이렇듯 충만한 기쁨과 사랑과 희망을 주셨으니, 두손 모아 감사와 사랑을 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나주 성모님과의 만남이 분명 저의 삶속에서 가장 큰 사건이며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삼 돌이켜 생각하니 그동안 성모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죄인을 향하여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라고 얼마나 애타게 외쳐 부르셨으며, 얼마나 안타까이 저를 향해 눈물 흘리셨을까! 이제야 알아들은 저의 미련함과 죄인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나 아닌 남의 탓만 하면서 살아온 시간들과 교만과 나태, 온갖 불만과 이기심 이런 모든 것들이 너무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어 이 죄인의 부끄러움을 어루만져 주셨고 "너희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돌아올 때 너희의 과거를 묻지 않고 너희에게 축복의 잔을 내리리라."은 말씀으로 희망을 주셨습니다. 제가 성모님의 집에 처음 온 것은 92년 6월 첫 토요일이었습니다. 이미 몇년전에 나주 성모님의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때는 마음의 문이 열리리 않았던지 그냥 성모님께서 기적을 나타내시는구나 하는 정도로 지나쳤는데 5월말경 나주 친구로부터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고 뭔지 모를 강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저는 유아영세를 받았지만 결혼한 이후 냉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집안에 예수 믿는 자가 있으면 집안이 조용하지 못하다는 시어머님의 말씀에 눈치를 봐야했으며, 성당에 가겠다는 말만 나오면 화를 내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차라리 불교를 믿어보려고 애를 써 보기도 했습니다. 연속되는 남편의 사업실패와 시집 형제들의 불목으로 마음은 불만으로 황폐해지고 기댈데 없는 마음은 외롭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6월 철야기도로 밤을 지낸 저의 영혼은 성모님의 사랑으로 다시금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날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인간을 통해서도 벌을 내리신다."은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며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하며 비로소 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실은 내가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모두 내 자신으로 인한 내 자신의 책임이었음을 통감할 수 있었고, 그것이 곧 나에게 준 주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공복으로 인한 통증을 주님께 봉헌하며 가정성화를 이루어 주시라고 기도했을 때, 예수님과 성모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음 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남편이 그렇게 하라고 뜻밖에도 선선히 허락을 해줄 때 너무도 놀랐으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새벽이면 위의 통증으로 어김없이 잠이 깨곤하던 저였는데 어느덧 저도 모르는 사이에 통증이 그쳤습니다. 아침에 편안하게 잠을 깨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육신의 치유는 청하지도 아니하였건만 회개의 눈물로 고개숙여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 아픔까지도 어루만져 주신 것입니다.

 나주 성모님께 받은 은혜가 또 있습니다. 지난 7월 3일 나주 성모님집으로 함께 성시간을 다녔던 9세된 제 아들이 학원에 갔다오던 중에 차도를 뛰어 건너 오려다가 4.5톤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아무 상처없이 안전하게 받아주셔서 살아났습니다. 하루에도 수백건씩의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치거나 재산피해를 입고 있는 무질서한 교통홍수 속에서 너무나 아찔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날마다 제 곁에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있습니다. 기도 할 줄 아는 어린이! 그것 또한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매월 첫 토요일 철야기도와 목요일 성시간에 참석하여 기도하는 중에 저에게 일어난 변화는 또 있습니다. 솔직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지옥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계명을 지켰습니다. 모령성체가 그토록 큰 죄가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젠 감사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으로 바뀌었으며 늘 가까이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느낍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도,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길을 걷다가도 언뜻언뜻 성모님의 향기를 느낍니다. 이렇듯 자비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을 다시 찾게하여 주신 성모 어머님, 그리고 우리에게 복된 믿음을 주신 주여,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이러한 성모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온 몸으로 고통 받으시면서도 즐겨 헌신하시는 율리아 자매님에게 감사드리며, 언제까지나 용기 잃지 않으시고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자매님께 더욱 경건한 힘을 주시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광주 월산3동 284 덕림제일파크 101동 807호
민 그리스비나(현숙) T.(062)363-0257

 

 

나주 성모님의 향유천으로 혼수상태에 있던 나를... 

디플로마(MERCEDES DIPLOMA)

11월 8일 친구집에 방문하였을 때였습니다.
11월 9일 새벽 1시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고, 너무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죽어가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즉시 심장협심증과 고혈압(240-130) 에, 설상가상으로 또 폐에 물이 찼다고 판결을 내리고 나를 곧 I.C.U(intenciue care unit) 에 넣었습니다.
나는 심장마비까지 있어 거의 4일이 지나도록 죽음에서 헤매며 혼수상태에 있었으므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내 몸에는 산소가 없었으므로 내 목을 따고 수술하여 튜브를 달아서 산소를 넣기로 되었는데, 그때 내아들 노디 디프로마가 "잠깐만"하며 가 가져온 향유천을 나에게 주며 5분만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그때 기적같이 혈압이 140-80으로 내려가며 정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술할 필요가 없어졌고 경과는 점점 좋아져서 퇴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얼마나 지났는 지 눈을 떠보니 내가 병원 응급실에 있는 것이 었습니다. 내가 퇴원할때 Julia가 준 향유천을 그들의 부주의로 잃어버렸는데 그 후에는 혼수상태라 나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 향유천이 없으니 Julia가 왔을때 기도받은 아들 노디의 손수건을 얹은후에 의식을 회복하여 손수건의 여기저기를 만졌는데 혈압이 내려가고 정상인이 되어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여 지금은 병원에 가기전보다 훨씬 더 건강합니다.
감사합니다.

 1994년 11월 14일
T.889-232 F.819-3789
MERCEDES DIPLOMA

 

 

"낙태는 살인이다."라고 하셨기에 두 아이를 더 낳았다. 

이은숙(카타리나)

저는 신부님 세분과 여러 수녀님들을 배출한 구교우 집안에 시집 와서 살고 있는 6학년과 5학년, 6살과 5살의 유치원생을 두고 있는 2녀 2남의 아이들 엄마입니다.
현재 부천시 소사3동 천주교회를 나가고 있으며 늘 주님의 은총 가운데 살고 있음을 감사드리며 작으나마 체험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90년, 지금 5학년 된 둘째 딸이 7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에 한가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내 생활을 해보겠다고 수영에다 쇼핑, 그리고 운전연습 등 세속적인 눈으로 온갖 좋은 것들을 찾아 즐기고 있을 무렵, 국민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는 큰 딸의 담임선생님께서 우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아시고 나주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메시지가 담긴 책 한 권과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과 오상을 받고 계신 윤율리아 자매님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잎 4개를 보내주셔서 밤을 새워 읽고 보고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보고 읽으면서 그토록 심한 고통을 참고 견디어 내시는 율리아 자매님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저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습니다.
제 영혼의 상태를 돌이켜 생각해 보기도 하고, 우리가 예사롭게 여기며 저지르고 있는 죄악 때문에 예수님의 가슴에 못을 박아 드리고 피눈물 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죄책감과 성모님의 그 간절하게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많은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지스러울 만큼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시고 나주의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고, 직접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계신 예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번째 아이가 임신된 것을 알고 고민했습니다. 늦게 배불러서 다닌다는 수치심과 세속적인 어지러운 생각들 때문에 주신 아이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세속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그러고도 남들 앞에 가톨릭 신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그 때 저는 그토록 고통스러워 하시는 나주의 성모님 말씀을 떠올렸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0개월이 지나 일요일 미사 시간에 3번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우리 집안에 주셔서 감사하고 순산한 것에 감사한다고.
그런데 "내가 아이를 하나 더 준대도 감사하며 낳겠느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주님께 무릎 꿇고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것을 회개했습니다.
아이가 6개월이 되었을때 저는 원인 모르게 배가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해서 내과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산부인과 치료를 받아보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산부인과에 갔다가 소변검사를 하게 되었고 임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그럴리가 없다고 다시 한번 의사의 정확한 진단을 요구했을 때 똑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녀 포대기에 세째를 등에 업고간 저는 한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하느님이 야속했고 없어질 아이의 영혼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간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아줌마, 애가 셋이라면서 또 낳을 것도 아니고 수술할 돈 5만원이 없어서 그래요?"하고.
아무런 대꾸없이 집에 돌아온 저는 일주일간을 세째 아이와 함께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이유 모를 통증으로 괴로워 하면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낳을 수도 없고 병원에 갈 수도 없는 기로에 빠져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때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면서 내일 아침 병원에 가자고 했고, 그렇게 하자고 하고 잠을 잤는데, 성모님께서 다급하셨던지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사내아이인 것과 꼭 낳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이 두려웠습니다.
그 후로 마음을 고쳐먹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미리미리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통해 준비시키고 쓰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그동안에 잘못 살아왔던 모든 것을 보속하는 맘으로 이 아이를 잘 기르겠노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들을 낳았으며 인간적인 욕심 없이 하느님 자식을 낳을 수 있었음을 지금은 아주 감사하고 있으며, 늘 우리 가정에 웃음을 주고 저희 가정을 즐겁게 해 준답니다.
남들은 놀라며 말합니다. 젊은 엄마가 웬 자식 욕심이 그렇게 많으냐고.
그러면 제가 속으로 대답합니다.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1995년 6월 20일
부천시 소사구 소사3동 3-19 청구아파트 101동 302호
이은숙(카타리나) T.344-2306

 

 

나주에 가서 메시지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에 나주로 오게 되었다. 

최운묵(대건 안드레아)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 몇 번이나 죽음을 택했던가. 그러나 모진 목숨 죽지 못하여 이제까지 견디고 살아 오면서 세상 끝까지 왔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생소했고 어떤 고통을 받아도 위로해 주거나 걱정해주는 이 없는 삶을 살아오던 어느 날 친구 집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도 어느 한 사람 만져주는 이 없는 외롭고 고독한 길을 살아 왔습니다.
편애 속에서 늘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짓밟히며 언제나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 온 삶이 너무 견디기 어려워 죽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세상으로 뛰쳐 나왔지요.
'내가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성을 갈아 버리겠다."고까지 하면서 방황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호텔 빠찡고에서 돈벌며 허황된 삶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방탕한 삶을 사는 이상한 현상들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옷도 최고급에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메이커 아니면 내 것이 아니었지요. 그러던 중 허리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을 나와 현리 작은 예수회에서 봉사도 해보고 돈도 벌어 보기도 했습니다. 또 여러 곳을 찾아 다녀도 보았지요. 그러나 내 깊고 깊은 상처는 아물지 못했고 결국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결과는 신장에 피가 섞여 나오는데 조직 검사를 하자고 하더군요. 병원에서도 도저히 낫지 못하고 결국 돈이 없어서 병원을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인천의 서 카타리나 자매님이 저에게 "안드레아야, 너는 나주에 가서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치유받아야 되겠다." 그래서 저는 병의 치유는 생각지도 못한 채 나주에 가게 되었고 마침 그날이 첫 토요일 철야기도회였는데 그 때 저는 뒤에 앉아 얼마나 많이 회개하고 울었는지요. 그런데 철야기도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아팠던 허리가 말짱하고 신장도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서울에서 목포로 발령이 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전라도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목포로 가면 나주 성모님 집에서 있는 목요 성시간에도 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목포로 내려가서 나주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말도 더듬었는데 그것도 사라지고 오른쪽 어깨가 많이 아팠는데 치유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주님은 저를 사랑하시는데 저도 무엇인가 하고 싶어 율리아 자매님이 불쌍한 사람들을 모시고 살려고 집을 짓는데 그 일을 도와주면서 봉사도 했습니다.
 지금은 멀리 있지만 언제나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고 받은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며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전시 오류동 삼성 아파트 3동 106호 최기복씨댁
최운묵(대건 안드레아) T.526-0278

 

 

나주에서만 향기를 주시는 줄 알았더니... 

 로마노, 로마나
 

나의 사랑이신 천상의 어머니여 찬미와 감사 받으소서.
내 어찌 나주 성모님의 그 크신 사랑의 은총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으오리까?
오직 성모님께 향하는 나의 마음 전부를 드립니다.
나주 성모님께서는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죄많은 영혼을 3년에 걸쳐 눈물과 피눈물로써 애타게 불러주셨고, 그 크신 사랑으로 인간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오묘한 방법으로 계속 불러 주셨건만 무딘 나의 마음은 등을 돌리며 얼마나 배은 망덕 하였던가요. '오! 천주의 성모여 날 용서하소서.' 나주에 갈 때마다 특별한 생각없이 나의 죄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우리 성모님 많이 슬프신가 봐." 하는 가벼운, 아니 바보같은 생각으로 들락거리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요 성시간에 경당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그 향기, 그 향기는 날 완전히 매료시켰으며 기도회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두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감출 수가 없었고 창피하여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습니다.
이 죽어 마땅한 죄인, 여러 차례 낙태를 했었고 마음 속에는 증오심으로 불타있던, 죄인 중에서 제일 큰 죄인을 그 큰 사랑으로 당신의 품 안으로 불러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몰라 "예수님, 성모님 날 용서하소서!"하고 통회하였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 난 얼마나 오류에 물들어 속물로서 살아왔던가! 그런 나를 성당으로, 나주 성모님 집으로 불러 주셨던 '오! 성모 어머니 찬미 받으소서. 당신께서 날 살리셨도다.' 아멘.
성모님께 다녀온 뒤 점점 나 자신도 모르게 변해 갔으며 용서하는 마음도 생겼고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었고 나주 성모 어머니의 그 크신 사랑으로 남편과 아이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성가정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메마른 우리 가정에 물이 되어 오시니 그 물로 영원히 숨쉬며 살겠나이다.
최근 어느 날 오전에는 나주 성모님 집에 전화를 해서 율리아 자매님과 통화를 하는 동안에 방안 가득히 성모님의 향기가 찼었고 그 날 미사 중에 신부님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하는 동시에 나주 성모님의 진한 장미향기를 복음 강론 말씀이 끝날 때까지 우리 가족과 조카들까지 맡았으니 성모님께서는 여기(뉴질랜드) 서도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작년 94년 7월 7일에 온 가족이 뉴질랜드로 출발하는 그 순간 광주 공항에서 짐을 내리던 택시 배기통에서 나주 성모님의 장미 향기가 났었습니다. '그 향기로운 성모님의 향기가 어떻게 저 배기통에서 나온단 말인가.'하고 생각만 하면서 뉴질랜드로 출발을 했었죠. 여기에 살기 시작한지 두 달째 쯤 커위의 본당 톰 신부님께서 불시에 저희 집을 찾아 오셨는데, 한 달 전에 인사를 드리고 주소만 적어 드렸는데 집까지 찾아오신 것입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 같아 너무 너무 기뻐 3시간 동안이나 나주 성모님의 이야기를 하고 책자와 사진, 향유천 등을 드렸고 집에 모셔놓은 나주 성모상과 같은 성모님상 앞에 가서 신부님께서도 향기를 맡고 '정말이다.'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또 한 달에 한 번 있는 아시아 사람들만 참례하는 '아시안 미사'에 톰 신부님께서 나주 성모님의 비디오 테이프와 메시지책을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가지고 갔더니 신부님께서 수녀님과 함께 모두에게 보여 주시며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며 열심히 성모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주 성모님께서 직접 주관하셔서 저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이국 만리에도 전하시는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그 이후 2주쯤 지났을까요. 오클랜드 한인 천주교회 미사 때 그 톰 신부님께서 집전하셨는데 복음강론 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다....
한국의 율리아가 예수님께 '나에게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는 그 마음은 사랑 자체이다. 율리아가 청하는 그 고통은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치닫고 있기에 그 사랑의 힘으로 영혼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며 주님의 응답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율리아 자매처럼 고통을 달라고 하지 못할망정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라고 통역하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또 저희 집에 방문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사제관에서 신부님을 방문한 손님께 아무런 말씀없이 서랍에 있던 향유천을 꺼내는 순간 방안에 가득히 진한 장미 향기가 나더랍니다. 그 손님께 이 하얀 천이 나주 성모님의 향유천이라고 설명도 하기 전이었답니다. 그렇게 나주 성모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시며 율리아 자매님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곳에서 나주 성모님을 모르는 많은 교민들이 성모님의 비디오와 메시지 책자를 돌려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은총을 얻어 생활의 변화가 일고 있으며 저희 집에서 예수 성심께서 당하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하여 성모님과 함께 첫 토요일과 매주 목요일 성시간을 한국 시간에 맞추어서 하고 있습니다.
주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1995년 6월 19일
25 SAINSBURY R.D
S.T LUKES
Asuckland NEW ZEALAND
로마노, 로마나 드림
T.011-649-620-1517
 

 

나주의 성모상을 모시게 하고 나주 샘물과 향유천을 주었더니 

카르멘 히달고

(다음은 필리핀, 마닐라의 카르멘 히달고 부인이 보낸 편지입니다.)

1993년 8월 20일
사랑하는 율리아씨 그리고 율리오씨
안녕하세요? 칼라상즈 콘셉시온 부인을 통하여 지난 6월 나주에서 당신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보내 드립니다. 요사이는 어떠세요? 저는 여러분들 모두를 위하여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나주에서 모셔온 성모님 상을 통하여, 제 친구인 테리 고메즈 씨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는 폐암을 앓고 있었는데 그의 오른쪽 폐는 수술을 통하여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6월 20일에 우리는 필리핀에 돌아 왔는데, 그 다음날 성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성모님상은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첨례날까지 그 분의 병실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저는 또 나주의 샘물을 약간 그에게 주었고, 향유천도 한 조각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재 그는 건강이 매우 양호해졌으며 그의 사무실에서 한나절씩 근무도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너무나 좋으십니다.
저는 칼라상즈 부인에게 성모님상 두 개와 영어메시지 책 두권을 구입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성모님상이 파손되지 않도록 잘 포장을 해주시도록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제가 너무 많은 부탁을 드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모님 상 두개 중 하나는 고메즈씨에게 갈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자매님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으며, 마닐라를 다시 방문해주실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나주에 계신 모든 우리의 친구들께 인사드리며,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강복해주시고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해 주시기를 빕니다.
 다시 감사드리며,


카르멘 히달고 드림

 

 

나태해진 마음을 회개의 삶으로 

서 데레사

저는 광주 교구의 목포 삼학동 본당 서데레사입니다.
이 죄인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 죄인중의 죄인이 늦게나마 주님과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듣고 보고 깨달은 것에 대하여 모든 영광을 주님과 성모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성모님께서 85년도 율리아 자매님댁에서 우실 때 근무중에도 친구들과 몇 차례 방문하여 묵주의 기도를 드리곤 했었습니다. 그때 율리아 자매님은 여러가지 상본들을 저에게 건네주시면서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건만, 그 당시에는 그대로 보내고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성모님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는 채 외면했던 지난날의 과거를 반성합니다. 얼마나 애가 타고 안타까우시면 눈물과 피눈물, 코피와 진땀을 흘리시며 회개하라고 외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 또한 향유를 흘리시고 성체까지 내려주시니?
시어머님께서도 병환 중에 계실 때 나주의 성모님 집에서 몇분의 신부님과 자매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으시고 지난날 잘못 살아 오셨음을 눈물로써 뉘우치고 통회하며 회개하시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셨는데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대세를 받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우리들의 나태해진 마음을 회개의 삶으로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깨우쳐 주는 지름길의 역할을 해주시는 하느님과 성모님의 대변자로서 희망을 주는 분입니다.
이제는 율리아 자매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도록 청합시다.
딸 안나와 아들 시몬은 나주 성모님 집에 오는데 멀리서부터 은혜를 받았어요.
어느날 우리 일행은 봉고차로 나주에 와서 기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사람을 피하려다 사고가 나 세번이나 굴렀는데 성모님께서 지켜 주시니 한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6월 30일 눈물 흘리신 지 10주년 기념일인데 며칠간 배와 다리가 무척 아파 웬일일까? 왜 그러지? 하면서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배를 움츠리면서 유혹을 물리치고 성모님 집에 왔습니다. 그 때 율리아 자매님 배가 불러 고통 당하시는 모습을 보고 울며불며 통곡하고 마음과 심장을 찢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깨달으니까 율리아 자매님이 정상으로 되셨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수신부님이 "낙태보속 고통을 받고 있는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하자"고 하여 모두 합심하여 기도하였음.)
그 당시 저는 신경성 위장병이 있어서 근육이 뭉쳐 트림을 자주 하였으나 다 치유되었고 아픈 배, 아픈 다리까지도 모두 다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 1일 새벽에 일곱개의 성체가 우박이 내리듯 우두둑하며 떨어짐을 목격했지요. 그 다음날 나주 성모님 집으로 성모님의 발아래 모셔진 성체를 경배하러 갔지만 성체는 보이지 않고 피묻은 하얀 손수건이 발 아래 있어 너무 놀라 물어 보았더니 본당신부님께 순명하기 위하여 성체를 모셨는데 마지막으로 모신 성체가 피와 살로 변하여 수신부님께서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성혈을 손수건에 묻혀서 성모님 발아래 모셔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그렇게도 많이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성체 성혈을 보여 주시나요.
1년뒤 6월 첫주가 되어가자 또다시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너무 배가 아파 일도 못했는데 은총을 받으려고 하니 유혹이구나 생각하며 그 유혹을 물리치고 나주 성모님께 나아가 웅크리고 앉아서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저의 손을 잡는 순간 장미 향기가 나면서 아팠던 배가 치유되었습니다.
나주에서 모셔간 성모상에서 몇 개월동안 장미 향기가 계속나 손님들도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럴때면 피눈물 흘리신 나주 성모님을 알리고 묵주도 주면서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국민학교 3학년인 딸 안나에게 첫 영성체를 할 때에 소원을 이야기하면 잘들어 주신다고 이야기 했더니 "나주 성모님이 온 세계에 전파될 수 있도록" 기도 했더니 장미 향기가 진동했대요. 마음이 무딘 언니도 나주 성모님의 물을 먹고 진동하는 장미향기를 맡으며 몇차례 나주에 다녀와 회개를 하니 그 주위의 형제 자매들도 여러차례 다녀 왔습니다.
 이 모든 영광 주님과 성모님께 돌려 드립니다.

 

 전남 목포시 창평동 8-2 4/1
서 데레사 T.(0631)245-0321

 

내일 내일 미루며 살아온 40년 세월이... 

양승판(안드레아)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은 간경화, 당뇨, 위궤양이며 나의 하루하루 생활은 약 먹고 검사하고 차를 타고 다니며 사냥이나 하고 다니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92년 3월 28일경 놀러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하여 급체라고 생각하고 친구들이 사다 주는 약을 먹고 어렵게 집에 돌아와서 방에도 미처 못들어 가고 현관에서 사정없이 피를 토하고 논산 B병원 중환자실에서 출혈과 수혈, 의사의 지혈 작업이 동시에 연속되는 긴급한 사정이 계속되었다. 결국 지혈이 되어 우선 죽음 만은 면할 수가 있었고 3일 후 월요일 대전 S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계속하면서 중환자실에서 지내다 입원실로 옮겨지고 피를 토한 원인은 간경화증에 의한 합병증으로 식도정맥류에 의한 출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병 하나가 더 생긴 셈이고 나의 병은 수술도 할 수 없으며 내시경으로 식도를 때우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주일 후 때우기로 정하고 그 날만을 초조하게 기다려 마침내 약속된 날 내시경실로 옮겨 작업이 시작되더니 웬일인가? 의사는 목구멍에서 내시경을 그냥 빼내고 내 처를 불렀다. 다음날 안 일이지만 식도가 너무 엉망이어서 손을 댈 수 없으니 집에 가서 약으로 치료하라고 하였다. 때우는 방법 밖에 없다는 사람들이 이제 집으로 가서 약으로 치료하라니? 그 후부터 매일 퇴원하라고 성화이다.
그러니 내 심정인들 어떠하겠는가! 별 방법이 없으니 집에 가서 죽는 날이나 기다리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삶과 죽음, 천당과 지옥의 갈등 속에서 무서운 공포증에 사로 잡히며 "오! 하느님 아버지, 나를 살려주세요."하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죽음 지옥을 연상하게 되어 '아! 이젠 내 영혼도 구하지 못하고 죽는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니 세상만사가 다 필요없고 오직 기도밖에 할 것이 없는데 막상 기도를 하려니 고작 아는 기도래야 주의기도 밖에 모르니 과연 나의 신앙생활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천당, 지옥, 조물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등을 한 번도 부정 해본 적은 없다. 다만 내일부터 내일부터 하다가 영세한지 40여년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10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것뿐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부터는 기도를 배워가며 시간만 있으면 묵주기도를 올리며 '하느님 아버지 저에게 영혼을 구할 시간을 주세요!'하고 눈물로 기도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순서나 방법이 틀린 곳도 많고 외우지 못하니 기도서를 많이 참고했다. 나에게는 지극히 열심이신 두분의 신자 누님이 계신다. 동생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셔서 나주 성모님 집을 권하여, 나는 나주를 갔다 오다 죽을지도 모르니 어떻게 가겠느냐고 다음으로 미루니,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이지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강력히 권하여 가기로 약속하고 더욱 더 기도를 하였다.
마침내 9월 장미향기 그윽히 풍기는 나주 성모 어머님집 문을 열고 철야기도를 한번도 졸지 않고 열심히 하며 "어머니 저에게 자비하신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간절한 저의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하며 눈물로 호소하였고 또 청했다.
그런데 그 때 자매님께서 하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귓전을 울렸다. 아니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볼 수 없었던 그 말씀들은 나의 가슴을 울렸고 듣고 있던 모든 형제 자매에게도 그 말씀들은 가슴속 깊이 파고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과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로 매우 기분이 좋아 마음이 후련하고 당장 나의 병이 다 나은듯한 기분이었다. 그후부터 식도 정맥류에 의한 출혈, 또 위궤양에 의한 설사가 한번도 없었다.
92년 11월 24일 대전 S병원의 내시경 검사 결과 엉망이라 손을 댈 수 없어 사형 선고를 내린 식도정맥류도, 또 3년이나 계속 치료를 하였지만 '어떤 인간적인 방법이나 의술도 고치지 못한 내 육신의 병이 내 영혼을 위해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가' 생각하며 내 주위의 불쌍한 영혼들까지 생각하며 기도하며 살아가리라.

 

 1993년 1월 7일
충남 논산읍 반월동 42-1
매월 첫토요일이 기다려지는 양승판(안드레아)
T.(0461)32-4939

 

 

'난생 처음 많이 울었습니다' 

최정자(말가리다)

찬미 예수님
나주 성모님께 드립니다. 천상의 모후이신 어머니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추하고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살면서도 형식적인 고백성사와 미사, 영성체로써 또한 많은 기도로써 누구나 나를 보면 열심히 한다는 칭찬에 마음속으로는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한 척했던 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모님 감사합니다.
저는 1975년도에 영세를 받았고 나름대로 봉사생활과 희생을 드렸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 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를 완전히 알몸으로 드러내시어 죄인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주에는 벌써 두 차례 다녀왔었고 또다시 한번 다녀오자고 인솔자와 약속했습니다. 6월 1일 약속은 했지만 갖가지 유혹으로 그냥 포기하려 했습니다. 저는 자궁에 혹이 생겨서 93년 1월부터 가끔씩 출혈이 있었고 4월부터는 심한 출혈이 있었으며 또 유방암은 83년도에 1차 수술을 받았고 재발하여 88년도 3월에 2차 수술을 받았습니다. 금년 93년 1월부터 또 다시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또 심한 두통으로 머리는 탈수기로 짜듯이 아팠고 목 또한 아파서 묵주의 기도를 바쳐도 2단만 소리를 내어서 바치면 가래가 끼어서 답답하고 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심한 열로 얼굴은 언제나 술 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되었고 피부는 알레르기성 피부처럼 전신이 가렵고 부풀어 올랐습니다. 6월 1일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 자궁 수술 날짜가 잡혀 있었는데 어떤 수녀님이 이제는 나주에서 은혜를 거둬갔다고 하시면서 병원에가서 수술 받으라고 하시고 또 다른 많은 유혹으로 나주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런데 인솔자가 밤 11시에 '내일 아침 7시에 만나자.'고 나주에 가는 재확인 전화를 했을 때에 유혹을 물리치고 수술도 다 뒤로 미루고 다시 나주에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가면서 내 병을 치유받기를 원하면서 기도 했지만 성모님 집에 들어서면서 성모님을 뵙는 순간 영적 치유를 주십사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 비디오를 보게 됐습니다. 그것은 연옥불의 고통, 태아가 받는 고통, 지옥불의 고통 등이었는데 그 비디오를 보면서 얼마나 놀랍고 마음이 아팠는지 많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1976년도에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 남자와 또 임신 6개월된 처녀에게 가정을 파괴시키면 안된다고 그들을 설득하여 조산원에 알선해 주어 낙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정을 구했다는 기쁨에 가득 찼었습니다. 그런데 고통 비디오를 통하여 나는 살인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두 사람의 아가씨는 낙태시키려 하지 않았지만 제가 강요해서 이루어졌기에 두 가정을 구했다고만 생각했지 나주 성모님이 아니었던들 제가 어찌 살인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치명자 고통을 통하여서는, 10년전 저는 어떤 신부님께 저의 생각과 저의 주장을 고집하면서 가볍게 생각했던 문제였는데 신부님은 분노했습니다. 저는 용서를 청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을 가지고 분노하는 신부님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신부님께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주셔서 집에 와서 수소문 끝에 신부님 계신 곳을 알아내어서 전화로 잘못을 용서 청했더니 나(신부님)를 통해서 많은 고통과 보속으로 '진주'같은 은혜받았음을 감사하라고 감싸 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 약속드린 예물 봉헌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처신한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판매 봉사하면서 받은 돈을 건네주어야 했는데 10년 전후의 일이라서 기억조차 없었고 금액도 얼마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께서는 말씀중에 회개하라 하시고 회개의 기도를 해 주실때 그 당시 함께 봉사하던 그 봉사 단체장님을 만나기를 청하면서 회개와 함께 기도했는데 오묘하시게도 나주 성모님 집에서 만나게 해 주셨고 금액도 알게 해주셔서 그것까지도 진심으로 보속과 참회의 통회를 했습니다. 또한 10년 전에 어떤 자매가 견진성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자매가 저를 모함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그 자매를 충고하고 가르치고 했는데 그 자매는 견진성사 준비를 다 끝내고서 나의 충고에 상처를 입고 견진성사를 받지 못했던 지난일도 기억나게 깨우쳐 주심으로 곧 바로 그 자매의 용서를 받기위해서 주소를 수소문하여 용서를 청했습니다. 한 마디의 말 때문에 이렇게 큰 오류를 범하게 됨을 뉘우치며 예수님이 받으신 극도의 고통을 또다시 묵상했습니다. 또 성모님 손에 나타난 성체 비디오를 볼 때 성당이 코앞에 있어도 바쁘다고, 아니면 잠에 취해서 평일미사에도 자주 못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릴 때 공포에 떨던 나의 영혼안에 포근한 빛이 들어옴을 느꼈습니다.
 6월 1일 처음으로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게 해주셨고 특별한 기도를 통하여 회개의 은총을 받아 난생 처음으로 그토록 많이 울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죽게하지 않고 회개하고 용서받게 해주시는 성모님, 당신의 그 큰 은혜를 어찌 다 보답하오리까. 나의 작은 죄까지도 볼 수 있는 눈과 깨달음의 은총을 주셔서 감사가 흘러 넘쳤습니다. 제가 그냥 그대로 죽었더라면 그 엄청난 지옥불을 어찌 감당하리까.
나주를 떠나오면서 차 안에서 사소한 나의 잘못까지도 회개할 수 있도록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가듯이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그 순간 온몸은 불덩어리가 되었고 집에 도착해서 가족에게 나주의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은 신학교에 가 신부가 되겠다며 저에게 서울대학 가라고 유혹하지 말라고 하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뒤 그냥 쓰러지면서 그 모든 고통을 감사드리며 보속할 수 있는 시간을 하느님께 청하며 '성모님! 제가 이 숙제를 다 풀 때까지만이라도 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십시오.'하고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깨었을 때는 5시 10분이었는데 나주에서 주시는 성모님의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습니다. 내 몸은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고 하혈과 두통, 유방의 통증, 두드러기가 다 없어졌음을 알았습니다. 다시 감사드리며 저는 잠에 취하여 아침 9시까지 그냥 잤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한 것은 이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인솔자에게 기뻐서 다 이야기 했더니 나주 성모님께 직접 편지를 써서 감사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순간 이상하게도 공연히 이야기했나보다, 나주에다 편지를 하게되면 내가 지은 잘못한 죄가 다 드러나서 얼마나 창피해, 하고 후회했더니 좀 시간이 지난 후부터 다시 하혈을 먼저보다 더 많이 하고 유방에 통증과 두통, 목 모두 다시 고통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왜 이럴까? 3~ 4일간 고통은 계속 되었습니다. 성모님 저는 피정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저의 죄가 드러날까봐 성모님께 감사하며 편지 드린다고 했다가 다시 후회하며 당신께 편지를 드리지 않기로 하면서부터 다시 고통이 시작된 것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께 큰 영광을 드려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감추려 했음을 용서해 주소서. 무심코하는 한마디의 말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를 통해서 절실히 느끼고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내가 숨쉬고 있을때까지 그 영혼을 봉헌하겠습니다. 나주에 도착하여 성모님을 처음 뵈옵는 순간 자비의 손길로 포근히 안아 주셨습니다. 어머니! 저는 그동안 진흙속에서 헤매다 이렇게 고향에 온 기분입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을 뜨거운 분으로 표현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무디고 냉랭한 마음을 뜨거움으로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그때는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나주에 갔지만 육신의 병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제 영혼의 회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나주 성모님은 저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나주에 다녀와서 세차례나 고백성사를 보았고 오늘 17일까지 어머니께서 주신 숙제를 모두 다 풀었습니다. 이제까지의 내 영혼을 돌아다 보았을 때 한없는 부끄러움에 오열을 금치 못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남의 눈의 티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신의 티는 볼 수 없었으니 이 죄인이 예수님 성모님 심장에 화살을 얼마나 가혹하게 꽂아 드렸는지 사진처럼 보았습니다. 그 어떤 장애물이 나의 영흔을 가려 남편이 진흙속에 묻힌 진주임을 보지 못한것을 성모님께서 보여주셨으니 그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성모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실천하면 그대로 이루어짐을 몸소 실감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자학하는 아픔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 사랑하고 성모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파하고 통회하고 보속할 것을 나주 성모님께 약속드리며 제 자신을 발가벗겨 완전히 드리겠습니다. 다시금 저에게 육신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봉헌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저의 생활이 변화되고 있음을 어머니께 알려드립니다. 저는 이제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실천하고 널리널리 전파하면서 장미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하길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통회함으로써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죄인임을 자신이 인정하고 고백하고 용서 청함을 곧바로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실천하고 또 전파하기로 성모님께 마음으로 다짐합니다. 성모님을 모르고 성모님의 메시지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 사람을 통하여 악의 세력이 하는 것임을?
성모님 모든 이들이 그러한 악의 세력에서 빨리 어머님께 돌아오도록 기도드립니다.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병원비 또한 걱정이었으나 이토록 모든것 해결해 주시고 새 삶을 주신 성모 어머님께 감사드리면서 제 영혼이 푸르름이 있는 창공을 날면서 이 모든 영광 성모성심을 통하여 예수 주님께 드립니다.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구포리 66번지
최정자(말가리다) T.73-9441(자택)
(상가)675-9441(한복 바늘집)


*추신 : 나주에 다녀와서 모든 것 치유되고 수녀님께 전화로 은혜받은 모든 것 말씀드리며 감사 드렸는데 수녀님도 성모님께서 나주의 율리아 자매로부터 모든 은혜 거두어 갔다는 말 잘못했다고 용서 청하시면서 함께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남편과 불목하여 별거중이던 수양어머니의 변화

이 엘리사벳

찬미예수 마리아께 영광
 안녕하세요. 율리오 형제님, 율리아 자매님,
 오레곤에 사시는 형제님이 여러가지 도움을 주셔서 특히 영어로 번역한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외국인들에게 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본이 모자라서 조금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작은 상본들은 테이프 속에 한 장씩 넣어서 비매품으로 테잎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테잎 1500개가 로테이션으로 들어와서 계속 복사하고 있고 300셋트 정도 나갔습니다.
 책보다 전파가 더 잘되고 있고 돈을 조금씩 받으면 되겠지만 왠지 주님의 뜻이 아닌 것 같고 내마음이 불편해서 현재 비매품으로 주고 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 육성 녹음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저도 들어 보았는데 참 감명 깊었고, 울면서 메시지 말씀 전하실 때는 다른 많은 자매님들도 함께 울며 듣고 많은 통회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보다는 테잎을 많이 보급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지난번 주신 비디오 테이프에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 특히 태아 고통을 보고 많은 이가 회개하고 지옥 고통 및 오상 받으신 십자 고통, 여러가지의 내용이 참 정리가 잘된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반응이 있고, 메시지 전파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너무나 고마우신 자매님!
 시간이 갈수록 참으로 더욱 고맙게 느껴집니다. 이번 보내주신 테잎을 보고 오랫동안 남편과 불목하며 별거 중인 저의 수양 어머니의 변화됨을 잠깐 몇 자 적어 볼께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가정에 소홀히 하여 별거 중인데다 아들이 바다낚시 갔다가 시체도 못 찾고 물에 떠내려 갔답니다. 그래서, 남편을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며 살고 있는데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옥 고통 및 여러가지의 테잎을 보고 나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남편을 용서하겠다며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 재결합하겠다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편이 계시는 뉴욕으로 1월 10일경에 떠난답니다.
 이분의 변화된 모습을 보며 저는 깜짝 놀랐고, 저희 부부도 참으로 주님의 현존과 성모님의 도우심에 감사드리며 좋은 소식이기에 몇 자 적어 보냅니다. 처음에는 나주 성모님을 전할 때 조금 두렵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주님께 기도하며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봉헌하고나니 두려움은 없어졌는데 저를 주춤하게 하려고 사탄이 그러는 것 같아요. 자매님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항상 기도해 주시겠지만 말이죠.
 제가 이것저것 부탁한 것은 성모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하여 욕심부린 것이니 예쁘게 생각하시고 무례하게 굴었다면 용서하시고 부족하고 잘못하는 것이 있는 것 같으면 충고해 주세요. 우리는 주님 안에서 거듭거듭 새로나야 하기에 무엇이든지 책망받을때 자신을 바라보며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저에게 강복 주신 신부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성모님께 많이 많이 빌어 주세요.
 성가정 축일을 맞이 하면서...

 1992년 12월 29일
미국 LA에서 이 엘리사벳 드림

 

 

남편은 피눈물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을 보고 더 이상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예수님을 박해할 수 없었다.

조 카타리나

저희 하정렬(비오), 조정기(카타리나) 부부는 미국온지 29년이 되고 지금 위스칸신 주 밀워키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엔 부럽지 않은 의사 부부 가정입니다. 아이들도 장성했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리가 잡힌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가정은 불행했었고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치 않은 영적으로 메마른 생활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언제면 남편과 같이 교회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다녔던 감리 교회를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다니던 즈음부터 같이 다녔고 제딴에는 신앙 생활을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남편은 대학 시절 때 세례, 견진도 받은 가톨릭 신자였었는데 완전히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에 온 다음부턴 한 번도 성당에 간 적도 없을 뿐더러 저희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무척 반대하였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 그리고 여러 신자의 기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이의 마음은 늘 분노와 미움으로 차 있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옥이었습니다. 1991년도에 우연히 우리 병원에서 일하게 된 김문자 마리아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을 비롯해서 착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메쥬고리에도 다녀왔었습니다.
하루는 그녀의 부모님인 씨애틀에 계신 김갑인 요셉 회장님께서 보내 주신 나주 성모님의 비디오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는 1992년 정월이었고 남편도 같이 있었습니다. 비디오 내용은 마침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에 대해서였습니다. 메시지는 "다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 오라."하시는 것이었는데 그 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저희들은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유난히도 조용하게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성당에 처음으로 나가시는 것을 보고 물어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남편은 "피눈물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상을 보았을 때 무한히 속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더 이상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고집하고 예수님을 박해할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받으시고 매주 성당 미사에 나가시고 묵주 기도도 하시는 것을 보면 기적 같습니다.
옛날에 제가 감리교에 나갈 때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저의 남편은 교회에 갈 사람이 아니라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차차 부드러워지셨습니다. 그 해 5월에는 저도 가톨릭 신자로 영세를 받았습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였습니다.
그 다음해 1993년 5월에 저희들은 나주에 가서 성모님상도 보고 율리아 자매님도 만났습니다. 짙은 장미꽃 향기, 성모님상에서 나오는 향기름, 그리고 성모님 상의 맥을 짚었을 때 뛰는 맥박, 이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목격하였고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에 참여해서 영적 치유도 받았습니다.
그 해 8월 20일에 성당에서 우리 부부는 혼배 성사를 받았습니다. 저희들의 가정 생활이 처음으로 평화로워지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회심한 때인 1992년 1월부터였습니다. 나주에 다녀온 후로 우리들은 많이 변했으며 계속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나주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은사인줄 깊이 믿사오며 저희 죄를 대신해서 고통받으시는 성모님, 율리아 자매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그 후에도 저희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수고해 주신 씨애틀에 계신 마리아 자매의 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1995년 1월 22일
미국 위스칸신 주 밀워키시
조 카타리나
 

 

남편의 간암과 내눈의 녹내장을 나주 성모님이 치유해 주시다. 

어네스트 펄 미카엘

저의 남편(어네스트 미카엘) 은 1993년 3월에 간경화와 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달(1993년 4월) 에는 뇌졸증에 걸려서 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런 지 몇 달이 지난 후, 제리 오르보스 신부님께서 한국으로의 순례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초대를 하셨습니다. 저의 남편과 저는 기적의 성모님상이 모셔져 있는 나주의 성모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샘물이 있는 산에도 갔습니다. 미사를 드리기 전과 드린 후에 율리아 자매님께서 저의 남편을 위하여 기도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샘물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율리아 자매님은 노래로써 기도를 바쳐주셨습니다.
필리핀의 씨부() 에 돌아온 후에 저의 남편은 보통 때처럼 진찰을 받았는데, 간경화와 간암이 없어지고 간이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수 개월이 지난 후 마닐라의 성루까 병원에서 또 다시 진찰을 받았는데, 역시 간경화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혈액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사실은 저도 1985년에 녹내장 진단을 받았으며, 남편이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를 받을 때 저도 기도를 받았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또 샘물을 저의 두 눈에다 넣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안약을 더이상 눈에다 넣지 않기로 했습니다. 씨부에 돌아와서 저도 여느 때처럼 눈 검사를 받았는데, 그 때 저는 의사에게 율리아 씨가 저의 눈에 물을 넣어준 이후로 약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진찰이 다 끝나자, 의사는 계속해서 약을 눈에다 넣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여러 차례 눈 진찰을 받았는데, 매번 더 이상 약을 눈에 넣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눈의 압력도 늘 정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천주님께 감사합니다.

 

 1997년 4월 29일
한국 나주에서 어네스트 펄 미카엘
증인:그리스도왕 신학교 제리 오르보스 신부

 

 

남편의 신심이 깊어진 것에 매우 기쁘다 

김정희(율리안나)

저는 2남 1녀를 둔 율리안나입니다. 친정 어머니의 권유로 5년전 영세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하느님을 멀리하고 냉담하고 있다가 친구의 소개로 개신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런 나의 방황으로 중3년생인 큰 아이도 개신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이후 별 의미없이 살고 있는데 갑자기 고교 3년생인 큰 딸아이가 몸이 아프다하여 병원에 갔더니 청천병력과도 같은 무서운 병의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계속 병고에 시달리게 되고 나는 또 열심한 개신교 신자인 여동생의 기도를 받으며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딸 아이는 차도가 없을 뿐더러 병원약도 소용없어 가정은 온통 불안과 고민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고 나는 눈물로 어떤 방도를 찾아야만 했었다. 나는 생각하길 무슨 짓이라도 해서 딸아이의 병만 낫는다면 못할 것이 없겠다 싶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를 전교하였던 친정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너는 성당으로 돌아와야 앞으로의 생활이 편할 것이며, 성모님이 보살펴 주시지."라고 가슴아파 하시다가 작년 10월에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병원에서도 죽을 준비하라고 했는데 나주 성모님을 전하며 사랑하시던 친정어머니가 하룻만에 깨어나시며 기도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아! 이럴수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아 성당에 가지 못한 채 또 그렇게 지나치고 말았다. 친정 어머니는 지난 5월초에 또 쓰러지셨는데 공교롭게도 우리집에 다니러 오셨을 때였다. 즉시 병원으로 모셨으나 의사가 입원을 거부하고 바로 집으로 모셔 임종 준비나 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자식된 도리로 그럴 수가 없어 또 다른 병원에 가서 사정을 하여 뇌사진을 찍어본 결과 속으로 출혈이 심해 머리 반은 새까맣게 되었다. 좋은 주사를 써보려고 해도 주사는 이미 들어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즉시 영광 친정집으로 모셔 우리 9남매 부부들이 모두 모여서 임종 준비를 하면서 음식은 물론 장례 치를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 가시려고 하는 어머니를 보고 우리는 한달 만이라도 사시다가 돌아가셨으면, 아니면 말 한마디라도 해보시고 돌아가셨으면 하고 울고 있었다. 그 때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을 우리집에 오도록 하셔서 자매님을 통한 기도로 어머니께서는 죽음 직전에 눈을 뜨고 '용서하소서'라는 혀가 굳은 말씀을 시작으로 '성수'하며 달라는 시늉을 하시는게 아닌가! 그리고 완전히 깨어나시어 며칠 후 온몸의 허물이 벗겨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살아나셨다. 나는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집에 오셨을 때 쓰러지셨고 종교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남편을 전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 구원계획의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고 우리 앞에서 어머니를 살려 주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으니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잘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특히 우리 형제간의 우의가 별로 두텁지 못했는데 서로 부둥켜 안고 모두가 내 탓이라고 하며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오빠와 올케가 바로 깨우쳐 주시면서 "회개하고 통회하면 동생 영혼의 치유만이 아니라 딸아이의 병까지도 치유 받을 것이다."라고 하실 때 그렇다, 이제라도 통회하고 다시 성당에 나가 고백성사를 보자. 나의 모든 죄가 말끔히 용서되지 않겠지만 일단 성총지위에서 하느님께 나아가 용서를 빌고 회개하여 나 뿐만이 아니라 남편, 아이들까지도 하느님의 자손이 되어야만 우리가정에 다시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렇게도 교회와는 거리가 멀던 남편이 "우리도 나주 성모님께 가서 용서를 비세." 하였다. 나는 너무도 고맙고 기뻐서 "그럽시다." "우리 애들 모두 데리고 매주 목요일 성시간에 참석하여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기도하는 기도회에 동참하여 인간적인 욕심이지만 딸 아이의 병이라도 낫게 합시다."했다.

그래서 우리는 '92. 7. 16 목요 성시간에 참석하기 위해서 순천에서 나주 성모님의 집에 처음으로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의 마음에 조금씩 어떤 확신이 생겼다. 매주 목요 성시간 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은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첫 토요일과 성시간에 식구가 성시간을 마치고 순천집에 가면 밤중 2시가 되지만 피로하기는 커녕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이렇게 경건하게 성시간에 참석하여 성모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남편의 모습에서도 나는 더욱 강한 신심과 사랑이 솟아 오르고 율리아 자매님이 보고싶어 일주일을 못내 애타게 기다리는 내 딸아이의 신심으로 우리 가정은 평화를 얻은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내 딸아이의 병도 치유되어 지금까지 병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딸아이의 병치유도 말할 수 없이 기쁘지만 교회라면 고개를 휘젓던 남편의 신심이 두터워진 것이 매우 기쁘고 남편을 통해서 우리 가정이 모두 성모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기쁘다. 남편이 나주 성모님을 거부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주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하며 성모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계신 오빠와 올케 언니의 정성의 댓가를 성모님께서 치러 주셨다 생각하니 오빠와 올케 언니에게도 감사를 드리며 백발이 성성하신 80이 넘으신 어머님도 살아나신 이후 나주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매월 첫 토요일 기도회와 성시간에 빠짐없이 다니시는 모습은 참 아름답기만 하다.

이제 우리 가정에 평화가 다시 깃들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성모님의 보살핌이 이렇듯 큰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아멘.

 

 순천시 금오동
김정희(율리안나) T.(0661)52-8530

 

 

남편의 지긋지긋한 잔소리가 사랑의 멜로디로 들리고

유현순(마리아)

저는 결혼한지 13년이 되었고 남편과 함께 아들, 딸을 둔 가장입니다. 가장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남편은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는 저를 믿고 7년 전 무턱대고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놀고 먹으며 불만만 가득한 잔소리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저는 늘 불화와 잦은 다툼으로 싫어하며 한지붕 두가족같이 살아왔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느님, 왜 저한테 저런 무능력한 짝을 주셨습니까?'하는 원망도 하고 지방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면 교통사고를 당하라고 저주할 정도로 남편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가정, 매일 욕만 먹고 사는 아이들, 급기야는 이혼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아 영세를 받고도 시간이 있을 때만 성당에 가는 발바닥 신자로서 제멋대로 살고 있던 저는 늘 외로움 속에 지내던 어느날 10년 전부터 나주에서 우리를 위하여 울고 계신다, 피눈물을 흘리신다, 향유를 주신다, 향기를 주신다, 가정 성화를 위하여 그곳에 가면 가정의 화목함을 얻을 수 있다는 언니의 인도에 따라 바쁜 시간을 짬내어 나주의 성모님 집에 도착했을 때 온 경당이 향기로 가득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인도자 말씀이 오늘 밤 우리의 영혼 치유를 받기 위해 성모님께 왔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고통이 심해서 계속 나올 수 없다고 하시며 더욱 더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하시는데 갑자기 저의 가슴과 입을 통하여 '어머니 모두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저의 죄 때문에 남편이 무능력해지고 남편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기도하려고 했으나, 통회는 큰 소리로 저의 가슴과 입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을 통한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은 모두 다 저 때문입니다.
엄마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당신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인 자식들을 잘 키우며 착한 딸이 될께요.
그 후 생각만 해도 싫었던 남편의 아침마다 하는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가 사랑의 멜로디로 들리고.
이제 남편은 아이들을 자상히 보살펴 주는 아빠, 어떤 가정교사보다 훌륭한 아빠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저는 지금도 자주는 못가지만 첫째 토요일이면 바쁜 시간 때문에 저녁 비행기 편에 내려가 기도회에 참석하고 새벽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오며 성모님의 진실한 사랑과 율리아 자매님의 따뜻한 품을 맛보며 신앙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엄마! 엄마! 이제는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뚱뚱한 외모지만 장미향기 나는 가슴을 늘 지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1995년 6월 19일
서울 양천구 목3동 621-15
유현순(마리아)

 

 

남편이 외인이었는데 저보다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어요. 

구 베로니카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금호동에 사는 구 베로니카 입니다. 제가 그곳을 찾기 시작한 것은 87년도 늦은 봄이었어요.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7~ 8번 정도 성모님 집을 방문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조그만 경당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도 거기에 있었는데 제 코에 농약 냄새가 그렇게도 많이 날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서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팠어요. 그 아픔은 5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농약 냄새도 마찬가지였어요. 율리아 자매님 살아오신 삶이 제 가슴을 그렇게도 찌를수가 없었어요.
그 날 거기 계신 많은 분들이 울지 않는 분이 없었고 성모님 집을 나올 때 차 시간이 없어서 저는 막 뛰었는데 한참 뛰다가 머리 아팠던 생각이 나서 머리를 만지니 그때는 벌써 농약냄새도, 머리 아픈 고통도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그날 이후 5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머리 아픈 것, 감기 등 모든 질병이 제게서 다 떠나고 한가지 장만 좋지 않아서 설사를 했는데, 나주 성모님 집에 왔다 갔다 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도 밝아져서 어떤 것이 죄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고 제 남편이 외인이었는데 저보다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저뿐만이 아니라 저희 남편에게도 똑같이 건강을 주셨어요.
저는 그동안 너무나 가고 싶어도 (모든 것이 핑계일 수 밖에 없지만)  가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제 아이가 졸라서 만 2년만에 다시 찾았고 1992년 8월 25일 한번도 직접 뵈옵지 못한 율리아 자매님의 가슴에 꼭 안기기도 했구요. 또 다시 그 이튿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침미사를 갔었는데(8월 26일) 제게 또 기적을 주셨어요. 성체를 모시는데 제 입안 가득히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이제까지 무지한 저를 깨우쳐 주신 예수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멀리서 구 베로니카 드림
 

 

내가 의심했던 장미 향기는... 

이용수(미카엘라)

저는 대구 대교구 경산 성당에 교적을 둔 이용수 미카엘라입니다.
1997년 6월 6일 오전 눈물 흘리신 성모님 앞에서 묵주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께서 협력자의 부축을 받으며 성모님 앞으로 나가 묵주, 스카풀라, 열쇠고리, 뺏지, 기적의 패, 분도패 등 모든 성물들을 우시는 성모님의 발, 손, 가슴, 입술 순으로 일일이 갖다가 대며 진지하게 봉헌하셨습니다.
봉헌하시면서 너무 힘들어하시는 자매님의 모습을 뵙고 저는 그 순간에 성물에서 나는 장미향기가 향수를 뿌린 것이 아니고 나주 성모님께서 사랑의 징표로 우리 모두에게 풍겨주시는 향기임을 가슴깊이 받아들이며 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자매님께서 더 많은 고통을 받으시는 것 같아 괴로웠습니다. '성모님 잘못했어요. 율리아 자매님이 제 용서 청함을 받아 줄 수 있게 해 주셔요.'라고 기도하며 자매님께 다가가 울면서 "저는 오늘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인 장미향기를 향수 뿌린 것으로 착각하고 판단하여 잘못을 저질렀습니다."하고 자매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괜찮아요, 자매님은 오늘 은총을 많이 받으셨네요."라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위로의 말을 건네셨습니다. 저는 제자리로 돌아와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 울면서 기도했으며 나주 성모님의 현존하심을 주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1997년 6월 6일
경북 경산시 옥산 2지구 신화아파트 201-100
이용수(미카엘라) T.(053)8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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