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체험록(3)
내적 치유가 됨과 동시에 사고로 아팠던 팔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임루치아
저는 너무나 부족한 대죄인이었습니다. 5년전 나주에 처음
오던날 광주에서 버스 사고가 나는 바람에 팔을 다쳐 많이 아팠지만 차마 집으로 되돌아 갈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주 성모님 집에 도착해보니
수녀님들이 많이 와 계셨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저는 제단에 올라가서 성모님을 자세히 뵙는 순간 회개의 눈물이 너무너무 쏟아졌습니다. "나주
성모님!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신다고 해서 몹시 뵙고 싶고 궁금하여 왔습니다." 그 때에 난생 처음 맡아보는 향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가 제 코를 진동시켰습니다. 향기에 취해 가지고 무릎을 꿇고 울고 있을 때 저의 잘못과 또 잘못 살아온 지난날의 그 모든 것이 제
마음 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모 어머니께 용서를 빌며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또 앞으로는 바르고 착하게 살것을 약속
드리면서-그 순간 내적 치유가 됨과 동시에 사고로 아팠던 팔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생각해보니 저는 기도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성모님의 사랑이 뭔지 몰랐고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성모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난 뒤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1994년 7월 3일 첫토요일 증언 부산 석포본당 임루치아
내 영혼을
기쁘고 풍요롭게 가꾸어 주신 나주 성모님!
김동명(알비노)
찬미 예수님 인천교구 주안3동 본당 김동명
알비노입니다. 저는 91년 성탄 때 주안 3동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 12명이
모여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의 한분인 남종삼 요한 성인을 본받아 92. 1. 25. "남 종삼 요한회(약칭 종삼회) "란 부부공동 신심단체를
본당 신부님이신 이 준희 마르꼬 신부님의 허락하에 창립하여 본당 봉사활동과 회원들 서로의 신앙을 키우고 다져 나갔습니다. 92. 8. 종삼회
월례회의시 신심단체 성지순례를 나주 성모님의 집으로 결정하였고 92. 10. 3. 첫 토요일날 종삼회 회원 8쌍 16명과 자녀 5명 총 21명이
나주 성모님을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 참석한 첫 토요일 철야기도 중 특별히 느껴지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기도회 3부
순서인 "성모님과의 만남"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을 직접 대면하였을 때 향긋하면서도 상쾌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같이 동행한 종삼회원 모두가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회원 16명(형제 8명, 자매 8명) 중 그 향기가 성모님의 향기임을 의심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회원은 2~3명 정도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완고하고 정확한 성격의 이영진 사도요한 종삼회 부회장님께서는 "향수를 뿌렸으니 냄새가 나지 어떻게 사람 몸에서 그냥 향기가 날 수
있느냐?"며 강하게 부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부회장님의 그 강하던 부정은 곧 긍정과 순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회장님은
좌골신경통이라는 고질병으로 오랫동안 심한 고생을 하였는데 "나주 성모님의 집 첫 토요일 철야기도를 다녀온 다음 날부터 좌골신경통을 치유받아
괜찮아졌다."며 92. 10. 10. 종삼회 10월 월례회의에서 증언하였으며 그후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위에 있는 형제,
친지들에게 예수님과 성모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본인의 동의하에 92. 12. 6. 첫 토요일 철야기도회에
2번째 참석하여 증언하였으며 그 증언을 함으로써 나주 성모님께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은총으로는 92. 12. 6. 첫
토요일에 참석하기 위하여 영등포에서 가족(13명) 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왔는데 기차에서 낮잠을 잔게 잘못되었는지 목이 겹질려 기도회가
진행될수록 목과 몸을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아팠지만 증언대에서 증언한 후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언제 나았는지도 모르게 다 나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날 아픈 목을 치유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과 성모님 현존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우리에 대한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게 되었고, 성서에 씌어진 모든 일들과 나주 성모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어느
것 하나 진실하지 않는 것 없음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끝없는 자비와 사랑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절망하기 보다는
고백성사와 영성체를 통해 우리의 원수인 사탄을 쳐부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어 내 영혼을 기쁘고 풍요롭게 가꾸어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죄에 굴복하여 비참과 한탄속에서 사탄에게 끌려다니며 삶을 가치없게 허비하기보다는 사랑이신 어머니 마리아께 남은 제 삶을 오롯이 봉헌하여 예수님과
성모님께 조그만 기쁨이라도 되기를 원합니다. 제 영혼 육신을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신 나주의 성모여 찬미와 찬양 받으소서. 또한 죄
많은 당신의 종 알비노를 위하여 빌으소서.
95년 6월 30일 김동명(알비노)
드림 T.(0525) 22-4221(집), 32-6505(직)
내 영혼을
바른 길로 인도하신 나주 성모님께
김 프란체스카(민정)
1992년 7월 4일 우리가족은 모두 철야기도에
참석하였다. 언니 엘리사벳은 평소 기관지가 나빠 자주 기침을 해왔고 작년 가을초부터 생긴 원인불명의 악성빈혈로 몹시 시달려온 상태였었다.
온갖 좋다는 약은 다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 날 엘리사벳은 처음 철야기도에 참석한 것이고 1부 묵주기도 중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날의 죄를 반성하고 성모님 품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을 불쌍히 여기셨는지 자비를 베푸셨다. 치유기도 때 언니는
가슴이 뻐근하다고 하더니 한 움큼의 바람을 토해내었는데 이 뒤로 검사 결과 기관지도 좋아졌고 악성빈혈도 깨끗이 나았다. 이날 이후 아빠께서도
건강이 좋아지시어 항상 무겁고, 짓누르는 듯 하던 양 어깨가 가벼워지셨고 눈도 맑아지셨다. 엄마와 나는 지난 6월 부터 철야기도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성당에도 안 다니셨던 엄마께서 6월 철야기도 이후 미사는 물론이고 목요 성시간에도 참여하시는데 나주 성모님 뵈올 생각만 하면 기쁨이
가득차신다 한다.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엄마와 나는 모두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그동안 고통으로 시달렸던 모든 것이 이제는 얼음이 녹듯 사라져
가고 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내 마음에 오시고자 항상 문을 두드리셨는데도 나는 깨닫지 못한 채 문전박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내 영혼은 바른 길로 접어들었고 이로 인하여 나의 삶은 밝게 변화하고 있다. 지난 날의 내 신앙태도를 생각해보니 몹시 부끄럽기만
하다. 고통이 있을때도 '아멘!'로 감사히 받아들이기보다는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하여 심적으로 괴로워 내 자신을 학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젠
고통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고통이 있었던 것은 성모님 품속에 안기어 내 영혼이 구원받기 위함이었고 앞으로의
고통이 있다해도 그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당신일에 부족한 나를 선택하시어 동참시켜 주신 것이리라 생각하니 두렵지 않다. 나주 성모님을 뵈올 때마다
내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주님과 성모님의 크신 사랑에 보답하여 드릴 것은 세속에 때묻은 내 영혼밖엔 없지만은 부족한 마음일지언정
온전히 열어 영접하고자 한다. 이제는 항상 죄인이 되어 성모님 발아래 엎드려 인간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바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어머니의 메시지를 실천하며 살고자 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영혼을 구해주신 주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세세에 무궁한 영광
받으소서.
1992년 7월 31일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삼호APT 10동 102호 김
프란체스카(민정) T.(02)537-8296
뇌속에 있던
공백이 사라졌어요.
프란시스 이아무리
친애하는 쥴리아 김 New Jersey의 Medford市에
자매님께서 오셨을때, 저는 머무시던 집의 주인인 Angie Salicondro에게 저의 질녀 Ellen을 집으로 데려가도 좋겠느냐고
물었었습니다. 자매님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Ellen은 임신중에 태아에 대한 검사를 받았는데 태아의 뇌 속에 빈틈이 생겨서 액체가
고여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첫 애기도 같은 문제로 태어나서 장애아인데 셋째 아기가 또 그러하여 Ellen은 대단히 절망에 빠져 있었으며,
그래서 제가 자매님께 기도를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Ellen이 Angie의 집에 들어서자, 자매님께서는 아기의 뇌종양 때문에 고통을
받으신다고 하시며, 일단 집으로 갔다가 저녁에 성당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은총이 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Ellen 과
남편 Bob은 그날 저녁에 다른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성당으로 오기 힘들었으나, 저는 꼭 오도록 Ellen에게 타일렀습니다. 그들은 성당에
왔으며, 집회 후에 자매님께서 Ellen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후로 Ellen은 또 한 차례의 진단을 받았는데, 예수님과 성모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태아의 뇌속에 있던 공백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율리아씨, 예수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려 주시고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을
말씀드려 주십시오. 물론 우리도 그렇게 기도 드렸지만요. 3월에 아기를 낳으면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예수님,
성모님을 위한 당신의 모든 일 그리고 고통에 대해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다시 감사드리며,
1994년 2월 3일 Francis Iamurri 프란시스 이아무리
뇌 출혈로
쓰러진 나를 나주 성모님이...
김미강자(헬레나)
저는 두딸을 가진 엄마로서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네 식구의
가장인 김 미강자(헬레나)입니다. 이 죄인은 어렸을적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5살때부터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고, 소화가 잘
안되어서 배를 주무르고, 소금을 한 주먹씩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늘 토하고 있었으며 그 뒤 온갖 합병증이 와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사는 여자가 30대에도 임신한 사람처럼 늘 구토를 하니까 혹시 임신하지 않았나? 하며 주위 사람들이 오해 할 정도였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찾기전까지 저의 온몸과 수족은 늘 싸늘하고 차가왔으며 너무 아파 견디기 어려웠고 추울 때면 손발이 경직되고 마비 되어 많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고 또 온몸이 쑤시고 신경통까지 와서 생활하는데 너무나 고달팠습니다. 1989년 어느날 나주 성모님 집을 찾아 갔는데 순례자들이 너무
많아 경당안에는 들어 가지도 못하고 비디오를 설치해 놓은 식당방에서, 우리는 기도하며 비디오를 통해 나주 성모님 메시지 말씀과 율리아 자매님의
증언을 듣고 이제까지 잘못 살아온 죄를 회개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하고 있을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은
"지금 배가 몹시 아픈 분이 치유되고 있습니다." 하며 기도하시는데 어쩌면 저를 두고 하는 말인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위장이 극도로 나빠져서
미음(죽) 을 가지고 다녔는데 마침 배가 몹시 아파 토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얼마쯤 지났을까? 몹시 고통스러웠던 머리의 통증이 사라졌고,
배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그후 쪼그리고 앉아서 밤 12시나 1시 2시가 되어 밥을 먹고 바로 자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던 저의 병을 주님께서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완전히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 때부터 나주에서 있는 첫 토요일 기도회에는 될 수
있는대로 빠지지 않고 계속 다니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부터 성모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생활의 기도가 시작되었어요. 나주에 다니면서 듣고 배운대로 얼굴 씻으면서도 "주님, 저는 육의 얼굴을 씻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추한
영혼의 때를 씻어 주십시오."하고 화장실에서는 배속에서 필요없는 소변 대변을 볼 때에도 "주님, 우리 영혼에 필요 없는 모든 것 다 내
보내주시어 영이 깨끗하게 해 주세요." 등등 말씀을 들으면, 한마디라도 빠질세라 늘 기도중에 기억하며, 생활이 기도화 되라고 외치시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며,생활고에 찌들리면서도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네식구의 가장인 저는 8년간을 리어카를
끌며 노점상으로 생활을 근근이 이어갔는데 어떤 때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휘말리기도 하죠. 시장 바닥 생활이 너무나 거칠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수 많은 욕설과 구타를 수없이 당하며, 몸이 허약한 저는 노점상을 하기도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나주
우시는 성모님 얼굴이 나타났는데, 성모님 얼굴에 눈물 방울이 맺혀 있는 사진이 액자에 들어 있었고, 그 모습이 계속 내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떠도, 감아도, 계속 함께 해 주셨는데 저는 꿈을 깨고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인가. '병원 침상에 내가 누워 있다니... ' 몇몇
자매님들이 제곁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꿈을 꾸며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8일 전에 집에서 쓰러져 뇌출혈로
다죽어 있는 것을 옆집의 언니가 메리놀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모님을 보면서 편히 잠을 자고 일어난줄 알았는데 8일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오른쪽 동맥파열 파상, 뇌혈증, 의식부전이라는 병명을 가지고,
병원측과 모든 분들이 내가 죽을 줄만 알았는데 다시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자 조그만 희망을 가지고 지금이라도 수술을 해 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문의하였으나 수술을 하려면 돈이 2-3천만원이나 있어야 되는데 돈이 없어 하루 하루를 네식구가 겨우 연명해 나가기도 힘든 형편에 어떻게 수술을
하겠는가. '살아서 돈 때문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모님 품에 영원히 잠들어 육신이 땅에 묻혀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 기쁘게 살고 있던 임안젤라 자매님이 오셔서 "수술을 안하려거든 빨리 나주 성모님께로 도망가!" 나주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라고 말해 주었어요. 모든 것이 암담했는데 희망이 샘솟듯 제 가슴은 두 방망이질 했습니다. 그 때 의사는 제가 하느님과 성모님
이야기 하니까 "대화하기도 싫어." 하고 저를 피했습니다. 입원비만도 걱정이 되었는데 중환자실의 많은 금액을 임 안젤라 자매님이 모아주었고 나주
성모님께 희망을 걸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제가 뇌출혈로 머리가 이상해져 어떻게 된줄로 착각까지 했습니다. 퇴원하고 바로 이튿날이
목요일이었는데, 너무나 아픈 머리를 싸매고 나주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임 안젤라 자매님과 일치하는 마음으로 큰딸을 데리고 나주에 갔습니다.
바로 그날이 목요일이어서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는 기도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은 어제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의식을
잃었다면서 저에게 어디가 아팠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나 놀랐습니다. 제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는 죽는다고 말들을 했지만 죽지않고
나주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동안 율리아 자매님이 대신 나의 고통을 받아 주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성모님, 제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까? 죄많은 인생 주님 대전에 잘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죽음에서 살려 주시나요, 제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있을 때 액자 속의
성모님은 꿈 속의 성모님이 아니라 나주에 현존해 계시는 어머님의 참된 눈물로써 이 죄인을 구하여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뜨거운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는데 머리 속은 많이 개운해졌고 음식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가 1992년 12월 3일이었습니다. 1993년 1월 첫토요일 또
다시 기도회에 참석하여 저를 살려주신 나주 우시는 성모님상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제까지 까마득히 잊어
버렸던 지난 과거들이 떠올라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별로 잘못했던 일이라고 생각지도 못하고 넘겼던 일들이 떠올라
제 가슴과 심중을 울렸습니다. 회개 중에 떠 올랐던 일 중에 가슴 아픈 일은 제가 20세가 되었을때 첫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 남자는 산속에서
자살해 버렸어도 이제까지 별로 저의 잘못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지만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중에서 "내가 가만히 서 있는데 돌멩이가 굴러와 내 발이
다쳐도 내가 그곳에 있었기에 내발을 다쳤으니 그것까지도 내 탓"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저는 온전히 제탓으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남편과의
관계는 성당에서 혼배 추진한 관계로 인하여 시부모님은 계획적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우리를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선거관계로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자기 부모님의 명에 따라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애들이 둘이나 되는데도 호적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야 이 기막힌 사실을
알고 제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렇게까지 골탕을 먹인 남편과 살 희망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저는 십자가를 질줄 모르고 남편을 버렸습니다.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그가 데려갔고 딸은 제가 빼앗다시피 데려왔습니다. 그 뒤 이혼을 한 고등학교 교사였던 분과 재혼을 하여 딸 하나를
낳게 되었는데, 그 뒤 그분은 전처하고 합의하여 함께 살기로 하고 제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나주 성모님께서 진땀을 흘리시고 코피까지 쏟으시며
향유를 흘려 주시며 저를 회개시켜 주님품으로 가까이 가게 해 주셨고 또한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을 통해서도 저를 치유해 주시니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저는 기쁨과 사랑과 평화, 바로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으며 무엇이 무서울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 성모님!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 지옥의 길에서 건져주신 은혜 무어라 감사 표현을 하오리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주
성모님은 너무나 포근하며 더 더욱 기적이 풍성합니다. 성모님의 대전에 앉아 있으면 천국을 느끼게 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영혼들의 회개를
위하여 대신 고통 받으시는 율리아 자매님을 바로 주님과 성모님께서 선택하셨으니 빨리 나주에 인준이 나서 이렇듯 풍성하게 은총을 내려 주시는
성모님이 승리하기를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1994년 10월 12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1가 40 7/3 애리아파트
203 김미강자(헬레나)
다리에 추를 달아
침대에 묶어 놓고 소변, 대변을 받아내야 되었던 내가
유 베로니카
저는 부산 하단본당 유 베로니카 입니다. 나주 성모님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디스크에 걸려서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네번째 왔는데 두번째 왔을 때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에 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채 율리아 자매에게 허리를 디밀면서 기도를 받았는데 그때 허리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저는
허리를 전혀 못썼습니다. 너댓 번 척추에 이상이 왔는데 수술을 할 수 없었고 허리가 아픈지 일주일만에 다리로 내려와서 오른쪽 다리까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한달동안 입원해서 아프지 않은 다리까지 24시간 다리에 추를 달아 침대에 묶어놓고 소변, 대변 다 받아내야
되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여기 나주 성모님께 와서 허리가 다 낳았습니다. 오늘은 특히 성모님께서 저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미워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듣고나니 시어머니를 속상하게 해드린 잘못과 여러가지의 잘못을 회개하고 어찌나 죄송스런 생각이
드는지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부터는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드리겠습니다. 성모님 감사드립니다. 찬미 받으옵소서!
1994년 9월 부산 하단본강 유
베로니카
당신이었나이까
김 라파엘
'산은 높되 교만하지 않음은 당신이 거기 계심이요, 들이 넓어
넉넉하되 사치스럽지 않음은 당신이 거기 계심이며 계곡이 깊어 물이 강을 지나 바다로 흐르되 비굴하지 않음은 당신이 또한 거기 계심이기
때문이옵니다.' 이제 초 여름의 신록은 무성하고 바람도 불어 대나무 숲이 몹시도 흔들리고 있었다. 때로는 속삭이는 듯 잔잔히 소리를내며
어떤 때는 고함치듯 쇄쇄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성모님의 목소리가 거기 계시는 듯, 부르는 듯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 허둥지둥 "나주
성모님의 집"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6년째 울고 계시는 그분을 위로해 드려야 할터인데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회개하고 통회하여 진정으로 죄인이
되었을때 그분께서는 위로받으실 거라고 하지만 이런것만으로 그분의 눈물을 닦아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찾아 뵙고 고개숙여 죄
닦음이라도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성모님의 집" 앞을 흐르는 개울에는 어린 아이들이 저희들 손가락 만한 미꾸라지 몇마리씩을 잡아
조그맣고 찌그러진 깡통 그룻에 담아 놓았다. 자유를 빼앗긴 미꾸라지들은 답답한 듯 그 좁은 틈새를 맴돌며 버둥거렸다. 개울물은 간밤에 내린 비로
약간은 불어나 찰찰 소리내며 한결 맑게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머리통 만한 돌멩이로 물을 냅다 내리쳐서 그 충격에 놀라 어리둥절한 미꾸라지를
잡아 내었다. 그들의 물놀이로 인하여 애잔한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놀이는 계속 되고 있었다. 하늘은 참으로
맑고 푸르렀다. 율리아 자매는 "성모님의 집" 뜰에 모셔 놓은 성모님상 앞에서 기도하러 온 형제 자매 40여명에게 성체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체를 형식적으로나 습관적으로 모시는데, 성체를 모신다 함은 살아계신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하기 때문에 그분과의
일치함을 뜻하며, 성사를 자주 보아 영혼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여 항상 주님이 우리 안에서 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 때 최 요셉
베드로 형제는 율리아 자매에게 와서 "해 좀 보십시오."하자 순례객들과 함께 태양을 바라보니 태양은 이미 성체 모습으로 되어 눈부시지 않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빙글 빙글 돌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성체 모양의 태양빛은 오색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십자가 모습도
보였고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안으신 모습도 보였는데 붉은 기운이 뭉클 뭉클 엉기어 마치 핏방울이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순례객들이 보고
놀라 소리쳤으며 또한 파랑, 빨강, 황금색,보라색 등 여러가지 색깔을 보여 주었다. 그 때 시간은 오후 4시경 이었는데 성체 모양의 태양은
성모님의 집을 향하여 내려왔다. "성체가 성모님의 집을 향해 내려오다니!" 형제 자매들은 웅성거리며 탄성을 올렸다. 이때 햇살이 형제 자매들의
머리위에 쏟아 붓는 형국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햇빛이 가득히 넘실 거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태양은 지붕위 용마루로 내려 오고 있었다.
지붕위로 점점 내려와 처마에 머물렀다. 나 보라는 듯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형제 자매들은 꿈에서 깨어난 듯
아쉬워하며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라했다. '주여! 당신이었나이까?'
김 라파엘
당신이 지금
여기 계시옵니까
김
라파엘
도시를 날으는 새들도 동우리를 찾을 시간. 우리는 성탄 준비로
꽤나 바빠 있었다. 날씨는 겨울 답지 않게 초가을 마냥 산들거리는 바람이 앙상한 나무가지를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누추한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이 와서 머무르시도록 깨끗한 둥지를 마련해야 하니 이제 더욱 분주해 지는 것이었다. 율리아 자매님은 시간이 되어 나주 집으로 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자매님의 배가 불러왔다. 고무풍선이 커지듯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배는 항아리처럼 둥실 둥실하게 되었다.
자매님의 낙태보속 고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이리 저리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몇 명이 자매님을
들어서 침대에 눕혔지만 애기가 배에서 위아래로 노는 고통이 차마 옆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했으며 나중에는 화장실에서 문 손잡이를 잡고 힘을
쓰는데 난산중의 난산인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몸부림으로 허우적 거리자 가재도구가 와장창 박살이 날 지경이었다. 얼굴을 닦았던
손수건이 땀으로 흥건히 적셔졌다. 그런데 그 손수건에서는 땀 냄새가 아닌 장미향기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럴수가! 땀에서 장미
향기가 나다니! 아니, 자매님의 온몸은 이미 장미향기로 젖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고통은 계속 되고 있었다. 이제 배는 남산만 해져서 입은
치마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경황중에서도 율리아 자매님은 "아마 나주에서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신부님께서는 즉시
나주 성모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 누가 와 있는가 확인 하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미모의 20대 아가씨가 기도한다기에 우리 모두는
놀랐다. 그 아가씨는 세속의 고통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하고 한때 자살까지 하려다가 나주 성모님을 뵙고 회심하게 되었고 율리아 자매가 고통을 받는
그 시간인 밤 8시부터 성모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가씨는 너무나 기뻐했으며, 자기를 치유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그녀의 순진한 모습은 마치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어린애와 같이 순진한 모습이었다. 긴 머리와 짙은 화장으로 치장했던 그 아가씨는
이제 화장도 하지 않고 소녀같은 본래의 순수했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성모님의 부르심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나 자신을 죄악의 진흙탕으로 짓뭉개 왔으며 이로 인하여 이웃들에게 지은 죄를 무엇으로 보속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통탄스럽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 낙태한 여자들의 죄값으로 율리아 자매님이 대신 받는 보속의 고통, 이것은 어디서, 왜, 무엇때문에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가까운 사이를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한다. 그러나 형제중에서도 더욱 가까운 형제는 쌍둥이 형제이리라. 쌍둥이는 하나가 아프면 다른
하나가 아플 정도로 한 몸일 것이다. 같은 태에서 함께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이다. 세상이라는 같은 태에서 함께
태어났으니 말이다. 미모의 그 서울 아가씨가 회개의 눈물을 흘려 주님의 참 자녀가 되었으므로 율리아 자매님으로 하여금 보속의 고통을 받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난다 함은 누군가(어머니)의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누구나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또 다른 형제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는가 보다. 그녀가 회개의 눈물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 났을때 율리아 자매님을 잠깐 부축했던 우리들은
힘이 쑥 빠져 기운이 없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 났는지, 언제 고통을 받았는가 싶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여!-영광과 찬미를-'노래하며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모습을 보여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깜짝 놀라게 하였다. '주여! 당신이 지금 여기 계시옵니까?' 우리들은 모두 뛸듯이
기뻐하며 감사를 드렸다.
김 라파엘
마닐라에서
온 편지
라몬 페르난데스
나의 사랑하는 율리아 자매님 나의 증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제게 베푸신 모든 사랑과 축복에 대해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율리아 자매님을 1992년
2월 13일에 아얄라에 있는 "그린벨트" 성당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저녁 미사가 끝난 다음에 자매님의 신앙체험들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아니 치유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성모님께 저의 당뇨병과 관절염에 대해서 기도
드렸습니다. 정말로 저는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지요. 저의 의사님들은 나의 무릎이 휘청거리는 것과 관절염이 모두 당뇨병 때문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나려면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고 더구나 걸아다니기에는 더욱 지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주차장에 가는데 (약간 먼 곳임) 저의 무릎이 보통때보다 훨씬 더 편한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저의 부인한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먼저 제 무릎이 정말로 좋아졌는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지요. "아마 내가 심적으로 튼튼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했습니다. 마카티포베 자매님이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 마련한 저녁 만찬에 참석한 자리에서 저는 저의 아내에게 말했지요. "나는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로 치유를 받은 것 같다." 너무 기뻐서 우리 둘이는 특별히 성모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리아 자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제 옆에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통역자인 스텔라
자매에게 이야기해서 율리아 자매님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제게 일어난 일을 말씀드렸더니 자매님께서 또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고 저의 손까지 잡아
주시면서 성가로 찬미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굉장히 뜨거움을 느꼈고 너무나 감동되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여
그 심한 당뇨병과 관절염이 치유되도록 해 주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신 묵주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주 성모님께 바쳤던
묵주를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저는 그 묵주로 언제든지 기도하며 잘 간직하겠습니다. 저는 가끔 아픈 친구가 있으면 그 묵주를 빌려 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분들의 병을 치유시켜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모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원해서입니다. 저도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저도
율리아 자매님처럼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재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얼마나 멀리하고 있는가를 쉽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님이 하시는 성모님의 일이 현재는 어렵겠지만 나중에는
성모님께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기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매님처럼 남을 위해서 기도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성스러운
일을 하시는데 용기를 잃지 마시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시고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언제나 주님의 은총을
받으세요.
올레단 빌딩 아얄라 아븐유,
마카티.메트로 마닐라 변호사 라몬 페르난데스 T.810-0763(사무실) 818-3367(집)
말로만 듣던
기적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다니!
김오재(미카엘)
"내 말을 잘 받아들이는 영혼들에게는 내가 주는 메시지가 영혼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자비의 눈물로 우리를 부르시는 나주 성모님! 제 아내(말가리다)가 나주성모님께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았음을
진실되이 고백코자 합니다. 이 고백은 성모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만분의 일의 보답이기도 하오며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사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병이 시작되었던 지난 83년 7월초로 기억됩니다. 아내 말가리다는 목포 성 골롬반 병원에서 1차 조직 검사를
받았습니다. (병명은 악성 유방 종양) 저는 그 당시 목포 용당동 본당 사무장으로 근무 중이었고 당시 주임 신부님은 (현재 95년 1월-)
나주 본당에서 사목중이신 김무웅(율리오)신부님이셨습니다. 1차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4-5년 지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병원을 찾으라는 당부의 말씀도 계셨구요. 많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저는 84년 3월 본당 사무장 근무를 사임하고 이상한 인연으로 부산에 가게 되었는데 "부산 푸른 군대 한국본부" 지도 신부님이신
하안또니오 신부님 곁에서 마리아 영성에 관해-그리고 "파티마 메시지" 전파에 대하여 영적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목포에 있었으며
헤어져 생활해야 했습니다. 약 2개월 정도 지내는 동안 돌아가길 권하셨습니다. 저는 부산에서의 인연을 아쉬워하며 신부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쓰시고자 하신 일이 따로 있으리라 생각하며 목포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불과 2, 3개월 사이에 많은 생활의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저는 목포에 도착 즉시 고향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84년 6월초 목포를 떠나 성남시 세곡동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약 1년간의 방황이 또 시작되었습니다. 삶의 어려운 질곡 속에서 지내던 어느날 사랑하는 아내는 어려움 중에서도 노잣돈을 준비하여 나에게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전주에서 봉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주 봉사자들의 주선으로 어느 자매님 가정에 숙소를 정하고 "파티마 성모
순례상"을 모시고 파티마 메시지 전파를 위한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매일 미사 두 대를 봉헌하였고 특별히 청원의 기도 9일과 감사의
기도 9일을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제 기도의 지향은 성모님께 대한 나의 탄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 제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 갈길을 밝혀 주십시오'라고... 전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활동과 기도로 일정 기간 끝나게 되었습니다. 긴 방황의 시간이 끝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약 2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85년 6월 15일 당시 수원교구 소속 죽산성당에 전교 회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시골에 있는 장평 공소에 파견 근무를
하였지요. 이 곳에서 생활한지도 약 2년이 지난 후 아내 말가리다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87년 4월경인데 유방암이
재발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는 제대로 수술하여 치료받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너무도 고통이 컸기 때문입니다. 결단을 내리고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하여 진찰을 받은 결과 유방암을 판정 받았고 아울러 내일 낮 12시에 수술을 하신다고 입원 절차를 밟으라 하셨습니다. 당시
담당 선생님은 이희대 박사이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제 주머니 사정은 약 8만원 정도밖에 없었고 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실대로 박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번에 온 것은 진찰을 받기 위한 것이지 수술을 할 수 있는 준비를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오늘 내려갔다가
수술비용을 준비해 가지고 다시 오겠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의사 선생님께서는 지금 상태는 시간을 다투는 일이니 도와 주겠다고 하시며 입원 수속 절차를
밟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다운 정을 맛보게 해주신 분이셨습니다. 침대에 누워 오히려 저와 가족들을 걱정하는
아내의 힘없는 미소를 뒤로 한 채 시골로 (용인군 외사면 장평리) 내려 와야 했습니다. 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강남 터미날에
도착하여야 되는데 제가 탄 택시와 버스가 충돌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불과 병원을 떠난 지 3, 4분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택시는 앞
부위가 망가지게 되었고 천행으로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깨어나 정신을 차려 보니 두 기사분께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었고 저는 그 순간 두
사람을 화해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차 밖으로 나왔습니다. 두 기사분을 설득하여 화해시켜 악수를 하게 하고 인명 피해가 없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제 심정을 두 분은 모를 것입니다. 바로 조금 전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내일 낮 12시에 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겠느냐고, 두 사람 모두에게 화해하라고..., 이리하여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마치는 순간 제 아내
말가리다의 다음날 수술에 대하여 사랑하올 어머니의 손길이 (성모님의 손길) 있으시리라는 그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느꼈습니다. 또한 잘 다녀오라는
아내의 모습이 평화로운 모습임이 떠올랐습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반 모임 저녁 기도를 잘 마치고 (저녁 8시 30분-10시) 숙소에
도착하니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그리고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평안히 잠든
3남매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의탁드리오며 잠자리를 청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믿음의 형제를 만나
도움을 청하여 입원 비용과 수술 비용을 준비하여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수술 5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 말가리다는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아내가 수술실에 실려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 2차 수술이 끝났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있은지 약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1992년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참고 견디어 내는 데에도 인간적 한계가 있는가 봅니다. 아내는 고통을 호소하였고 나름대로
영혼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저와 아내는 또다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전에 수술을 집도하셨던 이희대
박사님은 미국으로 연수차 떠나셨고 다른 의사 선생님의 진찰을 받았습니다. 저는 의사 선생님께 대한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방사선 촬영과
기타 검사 등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 집사람에게 고통이었고 병원비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저와 말가리다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로의 눈빛을 통하여 병원문을 떠나와야 했습니다.(92년 4월경) 1993년 6월 1일. 아내와 저는 수원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에 가기로
했는데 3차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내는 또한 자궁에 혹이 생겨 하혈을 약 2개월 동안 하였으며 병이 재발되어 온 몸이 합병증으로 어디를
먼저 손을 써야 할 지 암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저는 6월 1일 집으로 (안성) 전화를 세 번이나 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서울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나눔의 집에서 봉사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나주에 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6월 2일 오전 10시쯤 되어서야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실은 나주에 가서 자신의 병이 깨끗이 치유되었노라고,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내의 전화 내용을 접하고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그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놀라운 사실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일정을 뒤로 미루고 (학사님께 맡기고)6월 4일 안성 집으로 내려 왔습니다. 아내의 얼굴은, 아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가득 했는데 깨끗이 치유되어 있었고 얼굴색은 환한 미소띤 얼굴이었습니다. 평소의 어둡고 무거워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의 온몸을 만져 보고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왼쪽 젖가슴 부위에 있어야 할 달걀 크기의 혹 덩어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며 그
주변을 살펴보아도 아무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 말가리다는 나주에 다녀온 걸 저에게 크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몹시
흥분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과 체험과 그리고 육체적 변화에 대해서 말하였고 저는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내가 영적 치유까지
받았다는 걸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자신의 지난 날의 삶에 대하여 진정한 회개의 눈물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치유와 회개! 저는 제 믿음 안에서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살펴 보아도 전혀 다른 모습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으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발견하였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온
가족이 기쁨이 있는 가운데 치유받은 지 4개월후, 아내를 앞장 세우고 수술 집도를 하셨던 영동 세브란스 병원 이희대 박사님께 종합 진찰을 받고
특히 특수 초음파 진단을 하여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서를 병원측으로부터 받아서 2통을 나주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자궁의 물혹까지도
다 치유가 되었고 하혈병까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아내는 육체적 치유보다 영적 치유를 더 많이 받아 매일 매일을 회개의 삶과 미사 생활로써
충만된 삶을 살며 자녀들의 신앙 지도에 저보다도 더 엄격히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가정의 기쁨 안에서 나주 성모님의 은혜로움과,
수많은 치유자들이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잘 실천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희 가정은 아내의 건강 (육적, 영적)을 계기로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고자 양심과 믿음이 허락하는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올 나주 성모님. 은혜로운 나주 성모님! 언제
어디서나 당신께 찬미와 찬양을 드리게 하옵시며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모님 대전에 감히 이 글을
올립니다.
1995년 1월 16일 안성에서 김오재(미카엘)
T.(0334)674-1421
들어간
갈비뼈 나오는 소리가 "뚝"하고 들리더니...
한 스텔라(태희) 나주 성모님 전 1995년 4월
25일 마닐라에서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김대건 신부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26세의 어린 나이로 천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셨음을 읽고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김신부님께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제가 너무나 보잘것 없는 신자라는 데 대해서 나온 눈물이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필리핀에 오시게 되어 저는 통역을 하게 되었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지요."으로 인연이 되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3년밖에 안되는 저를 지난 1월에 교황님이 오셨을 때 통역을
하라고 했을 때 저는 고마움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주 성모님께서 부족한 저를 이렇게 사랑해 주셔서 그렇구나"하고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렇게도 많이 사랑해 주신 성모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봉사를 해야지 하는데도 마음뿐 그냥 아무것도 못하는 형편없는 신자,
수치스러운 신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지금도 필리핀에서는 율리아 자매님의 덕분으로 한국의 나주 성모님께 의탁하는 신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나주 성모님께 기도를 정성들여 하면 영육의 병이 다 치유되는 것으로 믿고 있을 정도입니다. 눈을 뜬 봉사도 있고 암이
치유된 사람들도 너무 너무 많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될 저의 둘째아들 가슴속에 휘어져 들어가 심장을 눌렀던 갈비뼈가 율리아 자매님이
필리핀에 오실 때마다 주님과 성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신 덕분에 갈비뼈 나오는 소리가 "뚝"하고 들렸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성모님 특히 나주 성모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성모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장미향기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나이 벌써 오십 사세가 다 되지만 성모님의 은총으로 매일매일 기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알고 있어요. 이제 남은
여생을 성모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청하며 성모님께 감사의 글 올립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한 스텔라(태희) 올림 T.(632)911-2077
말못하는
손녀가 말을 잘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강좌 본당 박수산나입니다. 저는 작년에 4살된 손녀가
말도 못하고 귀도 감각이 없이 차가 빵빵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손녀를 나주 성모님 집에 업고 왔었습니다. 그런데 나주를
다녀와서 1, 2, 3, 4, ... 숫자도 잘 세고 '할머니' 등 말도 잘 합니다. 성모님께 감사합니다.
1991년 7월 7일 경기도 강좌본당 박
수산나
말로만 듣던
기적이 나에게도 오다니.
임영숙(벨라뎃다)
1988년 7월 6일 12시 나주 성모님 계시는 집에 도착하여
기도 드리는 중 왜그런지 마음 속으로부터 저에게 은혜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약 6개월 전에 자극을 받아 후각이 마비되어
이비인후과를 매일 다니며 치료해도 완치되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전주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이 할 수 없이 큰 지장은 없으니까 그냥
지내라는 말을 듣고 후각이 마비된 채로 살아 왔었는데 오늘 기도중에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핸드백 속에 있는 화장품을 꺼내 냄새를 맡았더니
웬일입니까? 정말 저에게 기적이 왔습니다. 5가지 화장품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 냄새가 났습니다. "기적, 기적" 말로만 듣던 기적이 저에게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성모님, 그리고 주님 감사합니다.
전주시 금암2동 1582-31 22통
4반 김종대(엘리사벳) T.3-2366 경기도 과천시 부림동 주공아파트 901동 506호 임영숙(벨라뎃다),
데레사
매우
아름답고 거룩한 장소
마르타 맥쿨럭
저는 성모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나주를 찾아왔습니다. 성모님께서
계시는 나주가 매우 아름답고 거룩한 장소임을 저는 목격하였습니다. 오늘 성 목요일에 당신의 거룩한 사제들에 대하여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찬미드립니다. 이제부터 저는 미국 본토와 에집트의 카이로, 하와이 등 성모님께서 보내시는 어느 곳에서라도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저의 남편은 육군 장교입니다. 저는 제가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저의 남편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저희가 부모의 직분을 이행하고 희생을 바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을 반영할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있는 성모신심 단체와 저의 가족과 친구들 특히 최근에 세상을 떠난 친구 빌 코크란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기도 드립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이 나주와 한국 백성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내리시기를 간구합니다.
1993년 4월 8일 마르타 맥쿨럭 5402
에스카파르도웨이 콜로라도 스프링스. 콜로라도 80917 U.S.A.
돗자리 깔고
누워서 성모님 집에 갔는데 회개로 얻은 치유로 걸어서 오다
조금자(베로니카)
나주 성모님께 드립니다. 천주의 모친이시며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우리를 그토록 많이 사랑하여 눈물과 피눈물로 얼룩진 당신의 모습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소문 만으로는 믿기지 않아서 얼마나 많이 가고 싶어하고 보고싶어 했는지요. 어리석고 죄많은 저 베로니카를 통하여 이곳에 많은
엄마와 자녀들을 데리고 오도록 부르셨기에 어렵게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당신께 갈 수 있었습니다.
1987년 12월로
기억됩니다. 성모님의 집에 들어서면서 멀리 계시는 엄마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당안에 형광등을 켜 놓았기에 엄마의
눈물이 불빛에 반사되어 성모님의 집에 들어서면서 부터 알았습니다. 순간 저는 온 전신에 전율을 느끼며 두렵고 또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때 당신의 도우심으로 회개 시켜주심을 알고 믿습니다마는 어리석게도 그 당시에는 왜 눈물이 쏟아지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면서 부터 짙은 장미 향기가 코를 찔렀습니다. 50여명이 함께 갔는데 여기 저기에서 훌쩍 훌쩍 울기 시작하더니 금새
성모님의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하였습니다. 방바닥을 치며 콧물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울었습니다. 저 또한 몸부림을 치면서 뒹굴고 울고 싶었지만
너무 소란스럽고 50여명을 인솔한 저이기에 조금은 절제를 하고 기도와 성가를 했지만 우느라고 잘 주관을 하지 못했습니다. 점심도 준비를
해가지고 갔지만 교우들이 식사도 잘 못했습니다. 너무 엄청난 죄인이기에 밥이 넘어 가지를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두사람씩 짝지어 경배드리고 오후에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 뵈옵게 되었습니다. 말씀 구절구절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음을 찢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심장을 찢고 골수를 쪼개는
회개의 말씀이었습니다. 몇 번인지 조차 횟수를 기억하지 못하게 많이 낙태수술을 한 살인자였기에 내 마음을 찢고 또 찢었습니다. 내가 편히 잘
살려고 또 잘먹고 장수하려고 했던 마음이 완전히 녹아 들어갔습니다. 왕복 10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이기에 그곳 성모님 집을 빨리 떠나와야 하는데
자매님들은 아예 일어설 줄도 모르고 율리아 자매님 말씀과 체험담에 넋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꾸리아 임원으로 일하던 저는 꾸리아 행사를
핑계삼아 나주에 다녀올 것을 신부님께 허락을 받아 2개 꾸리아 간부만 살짝 데려오는데도 100여명이 되어서 대형버스 두대로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침미사에 어떤 지도자님께서 그런곳만 찾아다니고 철새처럼 몰려다닌다고 역정을 내시어서 우리는 어렵게 나주에 갔는데 많은 자매들이 갖가지 내적,
외적 병이 치유되고 기쁨과 감사에 넘쳤습니다. 즉 다리관절염, 허리, 머리, 속병, 위장병, 신경통 등등... 아침에 그 지도자님은 "가다
사고나 나라." 하면서 화를 냈는데 오히려 그 분은 모친이 계신 곳에 가시다가 어제 새로 검사맞고 나온 자가용의 라지에타가 터져서 발등에 뜨거운
물이 쏟아져 살이 익을 정도가 되도록 화상을 입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화상으로 4개월 동안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그분은 "내가 벌 받았어."
라고 하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축복해 주어야 되고 악담이나 저주는 절대로 안해야 되며 서로 사랑의 마음으로 일치해야 된다는
것을 또 한번 절실히 묵상하며 배우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도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내적, 외적으로 치유되고 변화되어
영적으로도 치유됨을 느끼고 보았습니다. 그 후 10여차례를 더 다녀왔는데 어떤 때에는 허리가 아파서 걷지도 잘 못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차안의 통로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갔는데 올 때에는 자기가 혼자서 걸어 나왔고 5시간씩이나 차의자에 앉아서 왔으며 또 어떤 자매는
부부 동반하여 유럽 성지순례를 잘 하고와서 남편과 이혼하려고 별거하면서 땅도 집도 다 복덕방에 내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나주에 갈 때 갑자기 그를 전화로 불러서 모시고 갔었는데 억지로 끌려 갔었다고 합니다. 그 자매는 재산이 정리 되는 대로 합의 이혼을
하려고 대서소에 이혼장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며 재산 정리만 되면 나누어 갖기로 했었다는데 나주에 다녀와서 남편에게 찾아가 울면서 용서를 청하며
대화했었고 출가한 딸과 사위를 찾아 가서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울며 애원했는데 오랫동안 냉담중이던 딸이 엄마와 함께 같이 붙들고 울면서
화해하고 그 딸도 다시금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암으로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집에가서 쉬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며 지내시라고 했던 60여세가 조금 안되는 분이었는데 배에 복수가 차서 임신 8개월 정도 되는 임산부의 배와 같이 불렀습니다. 얼굴도
부어오르고 소변도 잘 못보며 죽음을 기다리던 자매인데 나주에 갔다가 안성에 도착하여 성당까지 왔는데 배가 푹 꺼지면서 소변이 줄줄 흐르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편히 쉴 수 있었고 2-3일 동안에 온 몸에서 부기도 다 빠지고 3개월도 못넘길 사람이었는데 지금 4년 정도가 넘었는데도 아주
건강하여 레지오 단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또 91년도 8월에는 그날따라 심한 고통중에 있는 환자가 유난히
많았는데 중풍환자, 무슨 병인지도 모르게 까뭇 까뭇한 점이 생겨서 커지더니 그냥 깜둥이 얼굴이 되고 머리는 빠져서 훤히 머리속이 들여다 보이고
손도 팔도 정말 보기 흉하게 허물이 벗어지면서 흑인처럼 되어서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처녀인 예비자, 또 어떤 중풍환자는 혼자서 절대로 걷지도
못하고 양쪽에서 부축해서 끌어줘야 했고, 고열이 나는 환자 등등... 고통이 되었는데 중간 지점에서 차가 고장이 나서 더욱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늦게 나주에 도착하여 짤막한 메시지 말씀을 듣고 우리는 성모님께 조배드리고 다시 떠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율리아 자매님이 악수해 주시고 포옹하며 무사히 잘 도착하길 기도해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그렇게 큰 유혹을 물리치고 찾아온 당신의 딸들에게 더
많은 사랑의 표시로 강한 장미향을 수 없이 퍼 부어 주시는듯 했습니다. 우리에게 큰 은혜가 내려지려고 할 때 악의 세력은 더 강하게 우리를
유혹으로 쓰러뜨린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중풍으로 양쪽에서 부축해서 끌어주어야 걷던 자매님이 그냥 혼자 일어서더니 성모님의 집을 혼자서
걸어 나왔습니다.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 환희의 눈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떠나오기가 그토록 아쉬운 성모님의 집을
떠나오면서 감사와 찬미가 솟구쳐 두둥실 떠올라 허공을 걷는것 같았습니다. 흑인처럼 새까만 처녀 예비자도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치유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전능하신 주께서 당신 어머니를 통하여 큰 일을 하시게 하시고 죄인을 새롭게 해주시니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모두
받으소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집에 오는 동안까지 울고 불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찬미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또 어떤
지도자는 그렇게도 나주 성모님의 집에 가는 것을 숨어서 막았는데 한번은 그분이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주를 다녀오면서 버스안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나주를 못가게 막은 것에 대하여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오늘 정말 잘왔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 너무 감사하고 1년에
한 두번씩 꼭 와서 피정받고 가야 할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성모님의 도움 없이 어떻게 이루어졌겠습니까?
그 외에도 받은
은총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만 손이 아파서 힘이 들고 또 기억이 잘 안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려고 할 때부터 계속 강하게 그리고
약하게 장미향기로 당신을 느끼게 해주고 함께 계셨음을 믿고 감사합니다. 성모 어머니 보잘것 없고 배움도 부족한 이 딸이 애원하나이다. 당신께
기쁨을 드리는 매순간이 되게 하시고 이 몸과 마음 모두 받으소서.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 내가 가진 모든것이
다 당신의 것이옵니다.
1992년 12월 31일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 맞이하여 매순간마다 새로워지고 싶은 조금자(베로니카)가 드립니다.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봉산동 23-2(한영연립
203호)
두 발을 잘라야 된다고 했는데 오늘은 자동차를 운전하고
왔어요.
박흥식
저는 현재 전주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박흥식 입니다. 저희
학교는 개신교 재단인데 제가 얼마나 종교를 부정했는지 술자리에 가면 "무슨 하느님이 있느냐?" "아직 내가 젊은데 내젊음을 믿고 사는 것이지
어떻게 하느님 믿고 살수가 있느냐? 그것은 이상적인 삶이지 현실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항상 부정을 했었는데 막상 제가 아프니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젊은 사람이 다리를 절단한다면 죽은거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버거지병, 쉽게 말해서 근육암으로 군대있을때 발이 썩었어요.
그래서 육군병원에서 발을 자른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저를 데려가셨어요. 그래서 여수병원에 입원했는데 여수병원에서도 결론적으로 두 발 다
잘라야 한다고 했어요-이 부분은 옆에 자매님이 증언하신 내용 참조) 그런데 어머님의 반대와 그 절단이라는 판결이 너무나 저에게 큰 충격이 됐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광주에 여러번 기도를 받으러 왔었고 또 우연찮게 나주 경당에 오게 되었는데 처음에 여기 올 때는 걷지도 못해서 목발을 짚고
왔습니다. 2월 1일 첫토요일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부터 '아!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이제는 내가 죽어도, 다리를 자른다해도 하느님 계시는
곳에 내가 있으니까 설마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시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미숙하지만 매일 묵주기도 15단씩 바치고 내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어디다 보상해야 하는가 해서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월 첫 토요일에도 계속 여기를 오고 싶더라구요. 날짜는 다가 오는데 올 방법은
없었고 그때는 목발을 짚을 때니까 가긴가야 되는데 마음속으로 기도했죠. "성모님 나 오늘 나주에 가고 싶은데 저좀 불러 주세요." 옆에서
걱정하시는 어머니한테 "성모님이 나를 원하시고 또 나를 어떤 도구로 쓰시려고 하신다면 제가 갈 방법이 없더라도 어떻게 불러 주시겠지요, 뭘
걱정하십니까?" 그랬더니 정말 오게 되었습니다. 3월 첫 토요일 그러니까 이곳에 두번째 오게 된것이지요 이날은 맨앞자리에 앉아 기도중에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이 "정말 학생은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 감사할 줄 알아야 해."하고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정말 은혜를 제가 많이 받고 있는지, 또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받은걸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 보답하게 되는 건지 어리둥절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번째 첫토요일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다 나았아요. 오늘은 자동차로 운전하고 왔어요. 성모님 은혜 너무나
감사드리고 젊기 때문에 뭔가 할 수 있다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어느곳이든지 찾아 실천하기로 이곳 성모님 앞에서 약속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4월 6일 전주대학생 박흥식
예비자
머리카락 하나없는 상태에서 임종준비 하느라고 옷 한벌도
남기지 않았는데
문마리아(혜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죄인이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으로 새생명을
얻었기에 고통에 시달리고 괴로워 하고 있는 모든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성모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고통에 짓눌려 병원을
전전하다가 무슨 병인지도 확실히 모르면서 수술을 했는데 수술결과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었습니다. 함께 입원해 있던 옆의
자매님이 임파선 암이었는데 임파선 암은 칼을 대었다하면 한달 이내로 죽는 병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그 병이라니.... 그 무서운 임파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남편과 함께 울어 보았지만 죽을 날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죽을 바에야 퇴원이라도 하여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가족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고통스런 항암제 투약과 척추에서 물을 빼내는 고통은 나날이 계속되어 안정제,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견디어내기 힘들었습니다.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나의 모습은 험해 볼 수가 없을 정도였고 온몸이 너무 부어 움직이는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니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형식적이며 의무적으로만 기도하였을 뿐 병원생활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어졌고 다시는 남에게 억눌려 살지는 않겠노라며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하며 환상에 사로잡혀 매일 악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4개월후 퇴원하기 위해 X선 촬영을 했는데 코에 또 혹이 생겨
조직검사와 수술을 하자고 하여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에 못이겨 나는 세상을 원망했고 주님까지 원망하며 '이제는 끝이구나.'하고 죽는 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많은 분의 권고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수술 후 나의 모습이 너무 험하여 걷잡을 수 없이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간호사님이
"아줌마, 기도하세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세요." 하기에 그때부터 묵주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조금은 마음을 안정할 수 있었습니다. 또다시
검사결과 재수술을 해야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땅을 치며 통곡했지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죽어도 좋으니 퇴원하겠다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끝까지
병원에 매달려 보자하며 3차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수술한 지 6개월 되었을 때 당뇨까지 높아져 과일 하나도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간까지 나빠져 수술한 지 6개월만에 퇴원을 하였으나 나의 생명은 1개월, 많아야 6개월 이라고 옆에서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내 생애가 한달밖에 더 살 수 없을지 몰라 텅빈 마음을 성모님께 매달리며 3개월만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십시요. 그러면 그동안 정리할 것을 다 정리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한없이 흐느껴 울며 집으로 돌아와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옷 한벌
남기지 않고 남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는데 가까운 사람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내 아이들이 엄마 죽은 후에 행여라도 엄마 옷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날까 봐서죠.
나는 어느날 퉁퉁 부은 몸과 머리카락은 다 빠져 흉한 모습을 하고
잠깐 밖으로 나왔었는데 머리는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이 아팠습니다. 머리털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되어 스카프를 둘러 썼지요. 또 폐에 바람이
들어가면 안되니까 방을 옮길 때에도 마스크를 써야되는 실정이고 스카프는 항상 목에 두르고 다녀야 했으며 그때 치아도 전부 앞으로 번져가고 있다고
했으며 손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형제님의 권유로 머리카락도 없이 퉁퉁 부은 험한 모습으로 나주 성모님 집에서 첫 토요일
철야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성모님을 찾는 그 순간부터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자매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고 내가 잘못한 것을 정통으로 찔러주는 비수가 되어 비좁은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가? 성모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바로 나 때문이었구나.'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무엇엔가 꽉 짓눌려 죽음을
기다리던 나의 마음은 서서히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했지요. 이제 죽어도 살아도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이런
기도가 나오게 되었고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 온전히 네 탓이라고 생각하며 원망했던 지난 과거가 부끄러워 이제 온전히 내 탓이라고 가슴을 치며
엄마 용서하세요. 이 못난 죄인 탓입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엄마 아빠 지금 이 순간부터 엄마 말씀 그대로 믿고 살겠습니다. 하면서 한
없는 절규로 엄마를 부르짖으며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철야기도회를 끝 마치고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이제
어두웠던 세상이 환하게 밝아져 왔습니다. 평소에 미웠던 사람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첫 토요일 밤을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시는
성모님의 원의에 따라 매월 첫 토요일 철야 기도회와 매주 목요일 성시간에 참여하며 먹던 약도, 주사도, 항암제도 다 끊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보속하기 위해 나주 성모님께 다니던 중 다 빠져 버린 머리도 새롭게 나게 되었고 온 몸이 다 치유받게 되었습니다.
11월 달이면 어느덧 3년이 됩니다. 3개월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라고 애원했던 지난날을 되돌아 볼 때 나주 성모님 사랑에 감읍할 뿐입니다. 이제는 목요일 성시간을 기다리는 일주일이 너무 지루할 정도이고
성모님은 죄인이라 회개하는 부족한 우리를 붙드셔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월 첫토요일과 목요일에 불쌍한 이 죄인을 불러주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과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리면서 우리를 위해 사랑의 기적을 행하여 주신 주님으로부터
무한하신 축복 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여!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992년 6월 13일 전남 목포시 남교동 119번지 7/3 문마리아(혜자)
T.44-9545
남편은
피눈물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을 보고 더 이상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예수님을 박해할 수 없었다.
조 카타리나
저희 하정렬(비오), 조정기(카타리나) 부부는 미국온지
29년이 되고 지금 위스칸신 주 밀워키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엔 부럽지 않은 의사 부부 가정입니다. 아이들도 장성했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리가 잡힌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가정은 불행했었고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치 않은 영적으로 메마른 생활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언제면 남편과 같이 교회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다녔던 감리 교회를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다니던
즈음부터 같이 다녔고 제딴에는 신앙 생활을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남편은 대학 시절 때 세례, 견진도 받은 가톨릭 신자였었는데 완전히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에 온 다음부턴 한 번도 성당에 간 적도 없을 뿐더러 저희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무척 반대하였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 그리고 여러 신자의 기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이의 마음은 늘 분노와 미움으로 차 있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옥이었습니다. 1991년도에 우연히 우리 병원에서 일하게 된 김문자 마리아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을 비롯해서 착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메쥬고리에도 다녀왔었습니다. 하루는 그녀의 부모님인 씨애틀에 계신 김갑인 요셉 회장님께서 보내 주신 나주 성모님의 비디오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는 1992년 정월이었고 남편도 같이 있었습니다. 비디오 내용은 마침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에 대해서였습니다. 메시지는
"다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 오라."하시는 것이었는데 그 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저희들은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유난히도 조용하게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성당에 처음으로 나가시는 것을 보고 물어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남편은 "피눈물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상을 보았을 때 무한히 속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더 이상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고집하고 예수님을 박해할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받으시고 매주 성당 미사에 나가시고 묵주 기도도 하시는 것을 보면 기적 같습니다. 옛날에 제가 감리교에
나갈 때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저의 남편은 교회에 갈 사람이 아니라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차차 부드러워지셨습니다. 그 해
5월에는 저도 가톨릭 신자로 영세를 받았습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였습니다. 그 다음해 1993년 5월에 저희들은 나주에 가서
성모님상도 보고 율리아 자매님도 만났습니다. 짙은 장미꽃 향기, 성모님상에서 나오는 향기름, 그리고 성모님 상의 맥을 짚었을 때 뛰는 맥박, 이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목격하였고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에 참여해서 영적 치유도 받았습니다. 그 해 8월 20일에 성당에서 우리
부부는 혼배 성사를 받았습니다. 저희들의 가정 생활이 처음으로 평화로워지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회심한 때인 1992년 1월부터였습니다. 나주에
다녀온 후로 우리들은 많이 변했으며 계속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나주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은사인줄 깊이 믿사오며 저희
죄를 대신해서 고통받으시는 성모님, 율리아 자매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그 후에도 저희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수고해 주신 씨애틀에 계신
마리아 자매의 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1995년 1월 22일 미국 위스칸신 주 밀워키시 조 카타리나
메시지
책자를 받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로스타인, 오레
Mary's Touch By Mail에 계신 친애하는 교우들께.
저는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을 받고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저희 본당 신부님께
드렸으므로, 또 한 권과 나주 성모님 사진들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기도회 회원들에게도 책과 소식지를 보여 드렸는데, 소식지에 실린
금년 2월 6일의 메시지에 특별한 관심들을 보였습니다. 그 메시지에는 첫 토요일 신심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안 그래도 약 1-2주 전에 첫
토요일 신심에 대한 얘기들을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시골이라 호프 신부님께서 聖 카타리나 성당과 聖 비오10세 성당 두 군데를
돌보시기 때문에 마치 공소 같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첫 금요일 신심은 지키고 있었으나 첫 토요일 행사는 하지않고 있었는데, 이제 첫 토요일
신심도 시작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낙태의 중단과 평화를 위하여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1993년 3월 31일 로스타인. 오레, 매리.
반디(부인)
메시지
테잎을 듣고나서 딸아이가 먼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젬마
나주 성모님 소식을 들었지만 올 수가 없어서 여기 내려오는 분에게
부탁하여 메시지 테잎을 구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인 딸 아이가 그 메시지 테잎을 듣고 나서 먼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특히 묵주기도를 하면 장미꽃 송이가 천국에 쌓이는지 묻기에 "그렇단다."하고 대답해 줬는데 그 후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복사를 하고 있는
아이인데 매일미사도 한 번도 안빠지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가 나주 간다고 하니까 나주 성모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남편이
외인이다 보니 지금은 거부하지만 성모님께서 가까운 시일 내로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번에도 나주에 어찌나 가고 싶은지 9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나주 오는 날 남편이 지방 출장 가야 되니까 옷을 챙겨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딸아이는 혼자 잠을
자야 합니다. 딸아이는 안쓰러워 하는 저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면서 나주 성모님께 갔다오라 합니다. 기침까지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 와서 마음
아팠는데 지나고 나니 공연한 걱정이었습니다. 성모님 집에 와서는 남편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제 아픔은 말씀드릴 생각도
못하고....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보니 딸아이의 심하던 기침이 멈추었고 (그렇게 자주하던 기침을 그후 지금까지 한번도 안했습니다.) 말도
못하게 아프던 저의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에 종양 수술 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고 잠결에도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를 정도였습니다. 종양
수술한 사람은 암이 오기 쉽다고 해서 재수술을 했습니다. 6개월 만에 두번 수술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주 성모님 집에 다녀온 뒤 회복이 빨라서
금방 움직일 수 있었고 병실에서 온갖 심부름 다하고 청소까지 하니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나주 성모님 은혜가 이토록 큽니다. 그후
아무 이상없이 건강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4년 9월 3일 서울 상계동 이 젬마
메시지
테잎을 듣고 30년만에 회개의 눈물을...
서길석(안드레아)
찬미예수 안녕하세요. 저는 1964년 충남 장항성당에서
영세 받은 45세의 신자입니다. 지금은 인천 서구 석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93년 1월 17일 나주 율리아 자매님을 뵙고 그 인자하시고
어지신 모습이 어쩌면 성모님 모습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레 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저는 그 동안 냉담을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직장 관계로 해외 취업 관계로 또는 악의 소굴에서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냉담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직업이 운전이라 지방 출장이
많은데 91년과 92년 연속해서 대형사고가 났지요. 저는 두번에 걸친 큰 사고에서도 요행히 목숨만은 건졌지요. 그런데 92년 10월 23일 저의
처(정 아녜스)의 대녀가 이웃집에서 빌려다 준 5천여 만원을 가지고 집을 나갔지요. 그 대녀가 돈을 가지고 행방을 감췄는지, 아니면 다 쓰고
행방을 감췄는지는 그 대녀가 오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지요. 그런 시련 속에도 행방을 감춘 그 대녀가 처음에는 미웁더니 나중에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다 용서했지요. 그것은 저의 처(정 아녜스)가 나주에 다니면서 저에 대한 기도와 나주 어머님 은총으로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성당에 나가
냉담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으며 나주 율리아 자매님에게 주신 성모 어머님 메시지 테잎을 선물받고 12월 22일 새벽 04:30경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20분쯤 가다가 성모 어머님 메시지 테잎 1집을 틀었습니다. 테잎을 들은 5분쯤 후에, 영세하고 30년만에 처음으로 통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더군요. 첫 번째 시흥에서, 두 번째 안양 삼거리, 세 번째 동수원에서, 네 번째 경부 고속도로 망향휴게소 앞에서 통회의 눈물이
쏟아지고 조금 후에, 반대쪽 상행선 차선에서 지나가는 차량들의 라이트 불빛이 하늘로 하늘로 곧게 연결되고 앞에 가는 차 후미등 (빨간 색)도
하늘로 모두 올라갔습니다. 그때 시간은 5시 30분 경이었는데 그 하얀 불기둥, 그 빨간 불기둥의 현란함과 웅장함은 사진기가 있으면 찍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날은 안개도 없는 쾌청한 날씨였습니다. 그때도 성모 어머님 메시지는 계속 울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후 30분쯤 더 가서
제2집을 듣는데 또 다시 다섯 번째 통회의 눈물이 쏟아지면서 이번에는 양쪽 하얀 차선 페인트 칠한 곳에서 또 다시 불빛이 약 1분간 계속 쏟아져
나오더군요. 그 불빛 터널 속을 지나오는 느낌은 그렇게 오묘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굉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 때문인가 생각했습니다만
불빛이 하나도 옆으로 번지지도 않고 하늘까지 곧장 치솟고 두 번째는 양쪽 차선에서 불빛이 나왔으니 의심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
같았습니다. 23일날 또 다시 새벽5시 20분경에 용인자연농원 고개 정상 영동고속도로 자연농원 입구 수은등이 또 다시 하늘로 비추고 (그
수은등은 원래 땅을 비추는 것임) 24일 날은 새벽 5시 40분 경에 경기도 고양군 장흥면에서 나주 성모님 메시지 테잎을 듣는데 테이프에서
이상한 언어가 나오고 그후에는 성모 어머님의 메시지로 인하여 눈물 속에서 살다가, 요즈음은 기도하느라고 시간이 아까워서 TV나 신문 볼 시간도
없이 오직 기도에 전념하면서 지금까지 쌓인 저의 죄 보속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알면서도 냉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성모 어머님께서 2천년 동안 흘리신 눈물로 지금도 울고 계시건만, 이 죄인들은 지금도 죄를 곳곳에서 짓고
있으니 성모 어머님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요. 또한 율리아 자매님께서 받는 고통은 얼마나 심할까요? 열심히 기도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도
율리아 자매님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 드려요. 안녕! 율리아 자매님께서 성모님의 은총으로 건강하시길 오늘도, 내일도 묵주기도
드립니다.
1993년 1월 23일 인천시 서구 석남1동
504-10 서길석(안드레아) T.(032)572-8528
메시지
테잎을 듣고 회개하여 세례받고 새사람이 되다
유 베드로
저는 미국 뉴욕에 이민와서 사는 유 베드로입니다. 사냥을 너무
좋아하기에 곰을 잡으려고 한번 나가면 1-6개월이 되어도 곰을 잡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이민 생활을 안해 보신 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한번 나가서 집에 안들어 오면 제 아내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당시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1990년
6~7월쯤 되었는데 저는 그때 또 사냥을 가기 위하여 차에 시동을 걸고 있을 때 아내가 갑자기 저에게 다가와 "여보, 혹시 이 테이프 들을 수
있을때 한번 들어 보셔요."하는 말을 뒤로하고 차를 몰고 가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아내가 주었던 테이프가 아무 글씨가 없는 아주 허술한
테이프여서 들을 생각을 안했는데 차츰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또 궁금해 지기까지 해서 "무슨 테이프인지 한번 들어보자."하고 녹음기에 테이프를
넣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참 듣다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내가 그동안 잘못 살아온 줄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내가 너무 잘못 살아왔구나."하고 생각하니 나중에는 통곡으로 바뀌게 되어 도저히 곰을 잡으려고 산에 있을 수가 없어서 저는 하룻만에 집으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라 "아니 여보! 곰을 잡지 못하면 내려오지도 않던 당신이 곰도 잡지 않았는데 웬일이세요?"하자 저는 그
대답할 사이도 없이 "당신이 준 그 테이프 무슨 테이프지?"하자 아내는 너무 놀라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하며 안색까지 변해진 아내에게 제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더니 그제야 안심이 된 아내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한국 나주에서 성모님이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주신 성모님의
메시지 테이프예요." 그때까지 하느님을 전혀 몰랐던 저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주에 가볼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그래, 부지런히 성당에 다녀서 세례를 받고 나주에 내려가 보자."하고 그때부터 부지런히 성당에 다니면서 교리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범생으로 1990년 성탄 때 세례를 받고, 1991년 1월 1일날 한국 나주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나주에 와서 있었던 일들을 잠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주에 와서 며칠이 지난 뒤 골수암이 나았다는 부산 이마리아외 9명이 기도가 끝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타고 있을
때 율리아 자매님은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촛불 봉헌,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약 2시간 가량을 기도해 주셨다.
율리아 자매님은 참으로 천사와도 같다. 걸음조차 걷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기도를 해주고 있다. 이틀전 7시간 동안 밤을 새웠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힘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는데, 오늘은 얼굴이 퉁퉁 부어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데 그녀는 성모님께서 좋아하시겠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심장이 터지고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울다가, 웃다가, 웃다가, 울다가 기쁘고 즐겁고 환희에 차고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잠시후 누가 "태양을 봐라."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황급히 경당을 나와 태양을 바라보니 옆에 있는 형제가 눈을 깜빡깜빡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보니..., 아-, 태양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장관을 어떻게 써야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 까. 나는
그냥 어린아이가 돼 버렸다. 엉-엉 울었다. "저기 봐! 태양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내 앞으로 오고 있어. 저기 담위까지 왔어."하고 나는
소리쳤다. 꿇어 앉기도 했다가, 서성거리기도 했다가, 성호를 긋기도 하며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 성체 모양의 태양은 담위에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어떤 형제님은 "저기, 성모님 봐." 어떤 자매님은 "십자가 봐."하며 모두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한 마음으로 태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성체가 태양을 가리웠기 때문에 눈으로 그냥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체와 태양의 크기는 똑같았다. 그러나 성체가 약간 옆으로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태양빛이 발하고 있었다. 동그란 것이 돌면 저것이
도는 것인지 안도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성체를 약간 옆으로 놓이게 하셨다. 성체는 주황색이 되기도 하고 영롱한 비취색이 되기도
하고 색채가 바뀌어지며, 또 그 성체 안에 십자가가 있었다. 십자가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졌다 생겼다 반복되었고 태양은
계속 돌고 있었다. 태양밖으로 오렌지 색깔의 빛을 분수에서 물을 뿜듯이 뿜어대고 있었다. 태양 주위를 넓게 차지한 피 색깔의 파도가 내 앞으로
밀려오기도 하고 검은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보라색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이때 나는 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내가 성모님 집에 와서 회개하며
흘린 눈물은 아마 내가 태어나서 이제까지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이 흘렸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외로웠고 고독했고, 소외감 속에서 어렵게 살아오면서
나만의 고통에 짓눌려 괴로워했는데 '성모님은 이 죄인을 그렇게도 사랑하셔서 이렇게 많은 증표를 보여 주시는가.' 생각하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황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어제 사진기가 찍히지 않아 '본 비디오' 가게에서 내 카메라를 점검하니 밧데리가 약해서 못쓴다고 하였다.
새것으로 바꿔 끼우려고 하다가 비싼 느낌이 들어, "뉴욕에 가서 갈아 끼워야지.'하고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기적을 보고 있는 이 순간
불현듯 주님께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여 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어 필름을 넣고 찍기 시작했는데 믿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나는 얼마전 태양의
기적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며 "메주고리에"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에 태양의 기적은 어떠하다는 것을 생각으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유고슬라비아"에 가서 꼭 확인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주님께서는 나주에서 그 기적을 보여 주셨다. 태양의 기적은 약 1시간 계속되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점심을 준비하여 주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율리아 자매님의 다락방에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온통 장미향기로 꽉 차
있다. 모두가 기적들 뿐이다. 성모님께서 우실 때 눈물을 찍어 보관해 두고 있는데 솜뭉치가 비닐봉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꺼내 보여 주셨다.
처음 볼 때는 뽀송뽀송 말라 있었는데 금새 물기가 꽉차 버린다. 그 솜뭉치를 조금 떼어서 나에게 주었다. 그때 시원하면서 짙은 장미 향기가 싹
지나갔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기적을 보고 체험해 보았지만 그냥 좋기만 했다. 그러나 오늘 이순간 시원하고 짙은 장미 향기가 지나가는 이때
비로소 성모님은 살아계신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후 살아 현존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해지며 다시 회개하기 시작했다. 성모상,
묵주, 사진, 책, 여러가지를 선물로 받아 가지고 경당으로 내려왔다.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으니 이제 집으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전에서 네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TV에서는 전쟁에 대한 뉴스가 귀를 때렸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뉴스에 숨을 죽여가며 시청하고
있기에 "나는 TV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지."하며 세계평화를 위하여 애절하게 기도를 바쳤는데 졸음이 와서, 그 졸음을 쫓기 위하여 일어서서
기도를 했다. "오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 묵주기도 15단을 다 바치고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앉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앉아야 될 자리에 성모님이 계신 것이 아닌가. 긴의자에는 오직 나뿐이었고 몇몇
사람들은 추우니까 난로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앉을 사람들이 있었다면 누가 밀기라도 했을텐데 아무도 오지 않았고 나는 분명히 졸음을 쫓기 위하여
일어서서 기도했는데....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율리아 자매님이 선물한 성모님께서 스스로 옮겨 오신 것이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성모상을 나에게
주실때 가끔 조금씩 움직이시기도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조금이 아니라 70cm 정도를 움직이신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사랑하는 율리아 자매님, 자매님께 보내기 위하여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 계속 짙은 장미향기를 보내 주고 계십니다. 율리아 자매님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어머니를 만나게 하여주신 율리아 자매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율리아 자매님 고요한 사랑, 잔잔한 사랑, 그리고 하이얀 사랑,
하느님의 평화를 느끼는 사랑. 어머니, 기도할께요.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쉼없이 항구히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기도할때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겠지요. 어머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세세에 영원히 무궁토록
받으소서. 그리고 찬란한 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1991년 1월 25일 Meyong Sup
Yu 142-07 38 ave Fushing N.Y 11354 U.S.A 뉴욕에서 유 베드로
모든 것이
제 탓이고 미웠던 남편이 예뻐지기 시작했어요.
아녜스
저희 부부는 20년 동안 냉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된 지 5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저에게 고생을 많이 시켰기에 너무 미워했습니다. 원망도 무척 많이 하고
남 보기에는 사랑스럽게 잘 한다고 했지만 제 마음에는 사랑이 전혀 없었습니다. 20년을 냉담을 하다가 남편이 그렇게 되니까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형제들은 다 제 곁을 떠나서 너무 외롭고, 슬프고, 고독했어요. 그래서 저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고 냉담을 풀었어요. 청량리
본당에서 우리 부부로 인해 냉담했던 14명이 다시 영혼 구원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어떤 형제님이 나주에 가면 기적이 있다고 성모님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벌어서 먹고살아야 되고 남편은 수저질도 못하고 전부 먹여 줘야 되는 형편이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저는 너무나 나주
성모님을 사모하여 올여름부터 지도를 펴고 나주가 어딘가 하고 보았는데 굉장히 멀었어요. 오고 싶었지만 못 왔어요. 그런데 나주에 올 기회가 있어
왔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모든 것이 제 탓이었어요. 저 때문에 우리 남편이 사고를 당해 고생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짧은
시간이지만 생활의 변화도 많이 일어났어요. 미웠던 남편이 예뻐보이기 시작했고 남편은 숟가락질도 하고 걷기도 한답니다. 아직 저의 남편은
배변이 안되지만 저희 부부의 믿음을 보시고 완전히 치유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1년 12월 7일 서울 청량리 아녜스
못 견디게
가려웠는데 성모님은 가려움 까지도...
조 도미니카
저는 지난달 철야 기도회에 오기 전에, 몸이 많이 가려워서 병원에
가 보았더니 물 사마귀라고 했고 그것을 핀셋으로 짰더니 뭔가가 하얗게 나왔습니다. 원래 심장 협심증이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지 못하는
상태라 바르는 약만 주고는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병원에 다시 가기 전에 나주 성모님 집에 오게 되었는데 철야 기도를 하는
중에 다른 사람들 보기에 창피할 정도로 많이 긁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께 "온몸이 가려워서 정말 못
견디겠어요."라고 하니까 자매님께서 물을 좀 가져가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무슨 물인지도 모르고 한 병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에 가서 기도하고 옷을
벗어 손 닿는 곳만 바르고 닿지 않는 곳은 남편에게 발라 달라고 했습니다. 일주일을 발랐더니 씻은 듯이 곱게 나았지 뭡니까. 또 두 돌이
지난 손자가 '알레르기성 피부 질환'로 병원에 다닌다고 해서 성모님 집에서 가져온 물을 저녁에 발라주고 그 이튿날 새벽에도 가려워서 긁기에 또
발라 주었더니 다시는 긁지 않고 잘 잤습니다. 물을 두 번 바르고 손자의 피부병도 깨끗이 치유가 된 것입니다.
1995년 4월 경북 동명 본당 조
도미니카 T.(0545)972-6265
묘지까지 준비했는데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저 막달레나는 나주 성모님을 믿으며 나주 성모님의 은혜로 많은 기적을 보았으므로 성모님이 살아 계심을 증언합니다.
본인은 부산 남천 성당에 다니는 교우로서 제 아들 송 요한 이는 위암에 걸려 7년 전 4월 2일에 서울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위를 완전히
제거하고 3년 이상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의사들이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성모님의 은혜로 하느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셔서 직장에 다닐 수
있었는데 1994년 9월경에 인공적으로 만든 위가 아파서 음식물은 물론 물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몸은 혈색이 없어졌고 이제는
영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항암 주사와 약을 먹을 것을 권했지만 “이제는 항암 주사도 맞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이대로 죽겠다.”고
하더군요.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울다가 부산으로 내려와서 우리 부부는 아들이 사고를 대비하여 묘지를 보러 다니던 중 이상하게도 2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나주가 생각이 났지만 마음만 간절할 뿐 가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신부님께서 나주 성모님의 눈물 흘리신 상본을 주시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촛불을 봉헌하고 성모님 상본을 모시고 묵주기도를 시작했는데 8일 만에 아들의 부기가 완전히 빠졌고 나주
성모님집에 다녀간 지 3일 만에 완전히 치유가 됐습니다. 이 모든 일을 나주 성모님의 은혜로 생각하며 우리가 믿고 구할 때 반드시 치유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확실히 믿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1994년 12월 첫 토요일에 나주 성모님 앞에서 철야기도 중에 약 20분간 아름다운 향기를 실내에서
짙게 맡았고 1995년 1월부터 2, 3, 4, 5, 6월에 걸쳐 첫 토요일 철야기도마다 나주 성모님 앞에서 기도 중에 본인 정 막달레나는 양
손바닥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기 시작하여 약 2시간 내지 3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주변에 앉아 있는 교우에게 냄새를 맡아보게 하니 그 사람들이
놀라서 기뻐하며, “당신만이 성모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 같다.”고 말하며 기뻐한 사실이 있음을 증언하는 바입니다. 본인 정 막달레나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나주 성모님을 모시기로 성모님 앞에 맹세하였습니다.
본인 정 막달레나는 나주 성모님의 기적의 징표를 믿으며 증언하는 바입니다.
1995년
6월 15일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
570-10번지 정 달막(막달레나) T.(051)
759-2469
무한 하오신
나주 성모님의 사랑
부산시 사하구 괴정4동
저는 5년전부터 당뇨병으로 혈당 조절과 하루도 거르지 않는
투약으로 생활하던중 저의 어머니께서 금년 2월에 14주의 교통사고를 당하시어 온 가족이 간병하던 중 저도 2개월 여만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여
일주일 정도면 치료가 끝나 다시 어머니의 간병을 도울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오히려 어머니는 퇴원시키고 전 계속 남아 치료받던 중 뜻밖에
대장암이라는 소견과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해야만 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병원 관계자들의 말씀을 듣고는 생의 마감, 절망감에 멍한
모습을 주위의 분들도 안타까워 해 주셨습니다. 전 고1때 영세하여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 결혼생활, 가정생활에서 상처받은 모든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주님을 모시지 못하는 냉담생활을 20여년 동안 해왔습니다. 너무나 큰 죄인임을 늘 아파하면서도 항상 성모님께만은
매달렸습니다. 전 간절한 소망으로 죄속에 산 삶을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우리 주님 성모님께서 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자매님을 제게
보내 주셨습니다. 나주 성모님 묵주와 사진, 메시지 책자를 건너주면서 자기 자신도 나주 어머니로부터 치유받았다면서 크나큰 병의 진단서를
보여주며 기도해 주실 때 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전 병원 원목 신부님께 통회와 고해성사를 마치고 수술일자를 잡으려고 얼마간의 여유를
허가받아 잠시 퇴원하였고 그동안 33년만에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하루 하루 병원에 재입원을 기다리던 중 미사 기도회에 가는 차 안에서
이마리아 자매님이 나주 성모님께 가서 가져온 물이라며 마시라고 하여 처음엔 그냥 성수처럼 한모금 마셨는데 조금 있으니까 물병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길래 화장품 냄새 아니면 장미꽃 향이 난다며 자매님께 돌려 주었습니다. 전 이때 얼마나 많은 회개와 통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우리는
돌려가며 성모님께 찬미드리면서 한모금씩 나누어 마시고 집에 가져왔을 때 더욱더 짙은 너무나 향긋한 향기에 취해 버렸습니다. 며칠 후 집에서
많은 통증으로 꼬박 밤을 새우고 고통 중에 있을때 마리아 자매님은 나주 성모님께 가야 된다며 일자를 잡아주어 저는 식구들과 함께 왔습니다. 목요
성시간 기도회에서 너무나 큰 통증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을 때 율리아 자매님께서 참석하여 기도해 주셨습니다. 전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으로
보였습니다. "살려주세요."하며 매달렸습니다. 그 인자하시고 포근하오신 자매님의 모습을 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렇게 무서웠던 통증이 깨끗이 사라지고 장이 완전히 막혀 고통 중이었던 제가 스스로 배변이 이루어지고 간헐적으로 배출되는 암덩이를
보았으며 병원에서 수술도 하지 않고 약도 쓰지 않았는데도 정상인의 삶을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크나큰 은총 우리 주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고 성모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 영광을 저만이 간직할 수 없사옵기에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온몸으로 주님께 성모님께 바치오며 성모님께 고통을
봉헌하며 사랑을 베푸시는 율리아 자매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1996년 9월 5일 부산시 사하구 괴정4동 1100의
3
미지근한
신자들에게 활력소가 되어주신 나주 성모님
홍 수산나
저는 나주 성모님을 알기 전에는 미지근하고 믿음이 없는 주일
신자였습니다. 냉담자나 다름없이 살다가 나주에 와서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뵙고 율리아 자매님이 고통받으시는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나서
밤이 새도록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미지근하고 냉담하고 죄 짓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아니 나를 대신해서 율리아 자매님이 저렇게 대신
고통을 봉헌해 주셨구나, 그러니 성모님 가슴은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그때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고 그 분의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죄가 많은 나를 기쁘게 불러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리면서 저처럼 미지근한 신자들에게 뜨거운 신앙생활로
나아가도록 복음 전파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후에 피부 미용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장소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산실이 되게 해
주시라고 봉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7년째 냉담 중이었던 미용사가 회두하여 3년 뒤에 수녀원에 입회하기도 했구요. 외인이었던 제 남편은
공직에 있으면서 상처를 많이 받고 그로 인해 술을 많이 마시고 유혹에 빠진 생활을 하며 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는데 나주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회개하여 세례 받은 지가 2년이 되었습니다. 아직 나주 성모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율리아 자매님과 또 모든
이들을 위해서 성모님께 로사리오를 바치고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회개하여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은 모두 나주 성모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1995년 5월 6일 진주 봉곡 본당 홍
수산나
믿지 않았던
남편이 여행을 떠난 줄 알았는데 철야기도회에 참석하다니
조금자(베로니카)
저는 나주에 가서 성모님의 눈물을 목격하고 또 율리아님이 전하는
메시지 말씀과 신앙 체험을 듣고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나주에 다녀온 후부터
저는 작은자로 "생활의 기도화"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나주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하여도 믿지 않았고
"병신같은 여편네야, 그것은 성모상 밑에 무슨 장치를 해놓고 사람들이 오면 눈물,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거라구, 향기도 향수를 뿌리는
거야."하면서 "적당히 믿어야 되는데 저렇게 꼴까닥 빠져서 미친 사람처럼 믿고 있다."고 하여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한 채 "성모님! 남편이
나주에 한번 만이라도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하며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후 제가 나주에 간다고 했더니 남편은
휴가를 얻어 제가 출발하기 전에 대자들과 함께 여행한다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주에 와서 울며 기도하고 있을때 누군가
어깨를 툭치며 "저기 용백이 아빠가 왔어."하는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뒤를 돌아다 보니 대자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던 남편이 대자들과 함께
나주에 와서 철야 기도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 당시 눈물을 흘리지 않으시던 성모님이 그날 다시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것을 목격하고 메시지
말씀을 듣고 철야기도까지 하고 기도를 받고 간 남편이 이제는 나주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유방암으로 고생하여 수술 예약한
자매님에게 전화로 나주에 다녀 오자고 했더니 수술을 하지않고 나주에 가서 그날 치유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 부르시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부족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신 나주 성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994년 3월 5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봉산동
23-2 한양연립 203호 조금자(베로니카)
바로
이거다. 쪼개고 또 쪼개어도 성체는 남아 있었다.
김옥희(루시아)
저는 염주동 본당 김옥희(루시아)입니다. 저는 육신의 병고로
2년정도 정말 인간이 참아 내기 어려운 어떤 이름 모를 병에 시달려 전남대 병원과 서울대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해보았으나 병명이 나오지 않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1991년 1월 임동성당에 다니고 있을 때인데 옆집 자매님께서 첫토요일 나주에 있는 철야기도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하여 장부에게 말씀드리니 "그럼 내가 데려다 줄께." 하시기에 그때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성모님 집에 방문하기 전에는 제 나름대로 잘 살아 왔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성모님 앞에 앉아 그 동안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밤새 통곡을 하며 완전히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후 틈만
나면 성모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향유 흘리시는 모습도 목격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또는 육적으로 주위에 고통을 겪고 있는 자매님이 계시면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성모님 집에 가도록 마음을 설득하여 그곳에 모시고 갔습니다. 지난 93년 5월 27일 성모님 집에 예수님의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해 드리는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에는 몇 분의 자매님과 함께 성모님 양손에 성체를 들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후 94년
11월 24일에는 교황대사님께서 성모님 집을 방문하셨을 때 하늘에서 내려 주신 성체도 목격했으며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은혜까지도 주셔서 감히
모셨습니다. 그때 저는 죄인이었기에 맨 뒤에서 용기 없이 머뭇거리고만 있었는데 교황대사님께서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때 67명
정도 모시고 나머지 다섯명 정도 남았을 때 저는 마음속으로 불안했습니다. 성체는 자꾸만 작아지고 내 몫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번
망설였는데 쪼개고 쪼개어도 그 성체가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바로 이거다.'하고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이 이곳 어머니 집에서 일어나고 있구나!'하고 말입니다. 이밖에도 저는 첫토요일과 매주 성시간을 통해서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큰 기적은 저의 장부가 변화된 점입니다. 예전의 남편이 아니라 성모 성심안에서 180도로 변화된 성모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다시 태어나 시간나는
대로 성모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노력하십니다. 이렇게 변화된 남편의 모습을 볼 때면 그전의 상처들까지도 모두 치유되어 남편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기쁘고 즐겁기만 하여 감사가 마를 수가 없어요. 제가 이곳 나주를 찾는 것은 기적을 보기 위해서 성모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이 모든 기적을 증거하기 위해 증인으로 부르셨고 예비하신 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죄인이지만 어떠한 고통이라도 성모님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고통이 없으면 우리의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게 되며 주님께 진정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깨닫게 되었고 성모님께서는 저에게 희망을 안겨주셨지요. 어떠한 고통도
온전히 봉헌하며 기도할 때 힘과 지혜, 용기, 모두를 체험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렇게 좋은 회개의 약을
주셨나'하고 이제는 늘 감사가 마르지 않고 기도를 한답니다. 그리고 또한 작은 자의 길을 걸어 작은 영혼으로 살아갈 것을 주님과 성모님께
다짐하며 의탁합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감히 주님과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가 회개의 은총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약한 인간이기에
넘어졌을 때 금방 어머니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 모두는 이제 뒤돌아 보지 말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성모성심 안에서 우리의 생활 전체가 기도화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위로해 드리는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1996년 3월 25일 광주 상무2종 시영 아파트
103동 1302호 김옥희(루시아) T.372-8785
"바로
이거야! 그 날밤 맡았던 향기가! (커피잔에 들어간 향유천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의 장미향기가)"
쉐릴 죤슨
(1985년부터
한국의 작은 도시 나주에서 주시는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증표들과 관련하여,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많은 회개와 화해 그리고 육신의
치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오래곤 주, 포틀랜드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쉐릴죤슨 부인의 체험담입니다. 자신의 체험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죤슨 부인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분의 증언이 많은 분들께 희망과 격려가 되었으면
합니다.)
MARY'S TOUCH By Mail 귀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작년 11월 율리아 씨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성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제 친구의 격려도 있고 하여 저의 체험을 글로 써서
보내드리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울러 저의 여동생의 손이 치유된 것과 마약 중독에서 해방된 것이 성모님께서 주신 기적임을 증언하며, 또 이는
율리아 자매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율리아 자매께서 만약 주님과 성모님께 "예!"하고 응답하지 않았더라면, 저와 저희 (인디언)
부족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죄인들의 회개를 바라신다는 성모님의 메시지, 그 중에서도 특히 낙태를 행한 사람들의 회개를 원하신다는 말씀이 저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감히 성교회에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조차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책감과 공포 때문에 도저히 제 스스로
돌아올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오는 7월에 있을 저희 인디언 부족의 성모 성심 봉헌식에 율리아씨와
가족도 함께 하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희가 속한 성 요아킴성당은 사실 너무 가난하여 초청 비용을 감당할 능력도 없습니다
(월부로 지불할 수 있다면 몰라도) 저희는 단지 율리아씨께서 우리가 율리아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항상 율리아씨를
위해서 기도 드리겠습니다. 다시 주님과 성모님께 "예!"하고 응답하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희 부족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뻗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포틀랜드에 다녀 가시고 나서 그 동안 어떤 열매들이 맺혔나 하는 것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으며 저희 부족원들 (모두 25,000명 정도)에게 메시지를 전파해 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적 회개가 일어나고 있으며, 또 저의 여동생은
손의 상처와 마약 중독이 치유되었습니다. 더 많은 회개와 치유가 일어나도록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율리아 자매께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1994년 5월 16일 오래곤 주, 포틀랜드에서 쉐릴
죤슨
(다음은 쉐릴 죤슨 부인의 증언입니다.) 주님 대전에 선 저 자신의 과거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등은 주님께로부터 돌리고
있었으며, 얼굴은 수치 때문에 숙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로 태어나 자랐으나, 무서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느님께와 성교회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근 20년간이나 가책 속에서 살았으나, 도저히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느님께서는 천사의 역할을 할 두 사람을 저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이 두 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맺어진 자매들입니다. 그들은 성모님을 뵙는 한국 나주의 율리아씨를 가서 뵙고 증언을 듣자고
했습니다. 율리아씨는 아직 주교님의 공식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분의 방문이 정식으로 광고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임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밤 제가 보고 듣고 한 것은 저에게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리아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제가 지니고 있던 공포와 수치심을 꿰뚫고 들어왔으며, 저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주님께
등을 돌리고 서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향하여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아직 수치심으로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제가
지은 죄들을 통회하고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주님께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이유가 바로 제가 낙태를 했었기 때문이었는데, 율리아씨를 통하여
주시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특별히 낙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율리아씨는 성모님께서 죄인들의
회개, 특히 낙태를 범한 사람들의 회개를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마음에 동요를 느꼈으며, 정말 오랜만에 처음으로 저의 생활이 변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놀라운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앙이 매우 강하신 분인데, 그날 율리아 자매의 얘기를 듣고 또 장미 향기를 맡으면서 자꾸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함께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율리아씨의 증언을 들으러 가자고 권했던 천사 같은 친구들은 성혈을 흘리시는 성체의 모습이
있는 나주 성모님상의 사진을 제게 주었고, 또 성모님상에서 흐르는 향유가 묻은 작은 천 조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책도 몇 권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사진과 향유천을 책갈피에다 넣고 책을 가방 속에 넣었습니다. 향유천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율리아씨는 증언을 마치자 여러
사람들과 악수를 했으며 또 사람들의 묵주에 친구를 해 주었습니다. 저도 그녀를 보려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율리아씨를 감싸고 있는 장미
향기를 맡고서 매우 놀랐습니다. 저는 알레르기 증상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율리아를 보러 갔을 때 그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그날 밤의 느낌을
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1993년 11월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저는 워싱턴 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 친구들이 빌려준 메시지책들도 가지고 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볼 생각이었습니다. 집에서 책을 펴고 사진과 향유천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여동생 미키에게 율리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향유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동생 앞에서
소리쳤습니다. "바로 이거야! 그 날 밤 맡았던 향기가! 율리아는 이 향기를 항상 지니고 있어!" 저는 어머니와 동생도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신데 대해 성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다음 번 집에 갔을 때, 저는 어머니가 나가시는 기도회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기도회에 모이는
부인들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그 분들이 같이 모여 기도는 하는데 묵주 신공은 바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제가 읽고 있던
메시지 책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고 또 제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율리아에 대해서도 얘기했으며, 크리스마스 때 있었던 일도
알려 주었습니다. 나주 성모님 사진과 향유천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향유천에서는 또다시 향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조그마한 향유천을
셋으로 잘라서 하나는 암에 걸리신 이모 헤이즐에게, 또 하나는 유방암을 앓고 있는 바이올렛 힐레이어에게, 그리고 하나는 3년전에 위암으로 진단
받은 제 남동생 베른 죤슨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묵주신공을 같이 바쳤으며, 일요일에 함께 모여 미사에 가자고 약속했습니다. 주일미사 후에
우리들은 율리아의 나주 성모님상과 항유천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너무나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그들과 같이 모여 주님과 성모님의 실존을 느끼는 것은
가슴이 복받쳐 오르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예수께서는 우리들 모두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안에 붙여 주셨던 불을 그들
모두들 안에도 붙여주셨습니다. 이모 헤이즐의 암은 둔부에 있었기 때문에 미사에 가실 수 없었으나, 토요일 저녁에 전화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모님은 작은 향유천을 작은 주머니에다 넣어서 목에 걸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취침 전에는 벗어서 침대 옆에 테이블 위에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주머니를 테이블 위의 커피잔 안에다 빠뜨려 넣고는 다음 날 아침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향유천을 잔에서
꺼냈을 때 너무나 강한 장미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향기가 어찌나 강하던지, 이모님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향유천이 든 주머니를
가방에다 넣었습니다. 이모님은 그후로도 종종 향기가 되돌아 왔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포틀랜드에 돌아온 후 저는 친구들에게 위의 일들에
대해 알려 주었으며, 그들도 거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 후 몇 주 지나서 저는 친구들에게 제 집이 있는 지방으로
같이 가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워싱턴주 서북쪽 씨애틀 북쪽, 카나다 국경 남쪽의 해안에 살고 있는 러미족에 속하는 아메리칸 인디언입니다.
친구들과 같이 가면, 신심을 위한 여행이 될 뿐만 아니라, 인디언 문화와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을 택해서 같이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러미에 이르러 부인들과 가져간 메시지책들과 비디오 등을 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나주에서 온 향유천을
저의 부모님 집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깜빡 잊었다고 하여, 우리는 같이 가서 가져왔습니다. 가져오는 차안에서 친구 하나가 얘기했습니다.
"포틀랜드를 떠날 때에는 향유천에서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어. 우리가 같이 맡아보았었지?" 그런데 차안에서 향유천을 꺼냈을때 향기가 났습니다.
친구는 환성을 질렀습니다. 이모 헤이즐 집에 도착하자, 거기 있던 부인들이 다들 향기를 맡아보고는 매우 흥분했으며, 또 비디오 등에 관해서
얘기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디언 부락 안에서 책들과 비디오를 돌려가며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이 얘기 나누는 동안 갑자기 장미 향기가
불어 왔습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누구나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성모님 메시지를 제가 속한 부락에 전하도록 사명을
받았다고 얘기했으며, 저도 이를 이날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기적들과 기쁨에 가득찬 주말이었습니다. 그 후 나주 성모님의
향유천이 없을 때에도 장미 향기가 자주 났습니다. 회개와 치유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저의 막내 여동생 캐롤은 넘어져서 손을 많이 다쳤습니다.
처음에는 의사들도 잘 몰랐는데, 손목과 혈관이 찌그러져서 손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손이 독수리 발톱처럼 오그라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어느 정도라도 다시 손을 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올라갔던 주말에도 동생은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향유천으로 몇 번 상처 위를 문질렀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손에 이상한 느낌이 온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손이 심하게 부어
있었고 색깔도 붉은색이었는데 성수와 향유천을 문지르고 난 뒤에는 손이 정상으로 되었습니다. 단지 손가락 마디에 아직 붉은 점이 두 개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동생이 의사들에게 갔을 때, 그들은 손에다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동생이 치료를 받아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의사들은 이 놀라운 치유를 보고 손이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동생의 손은 98%정도 쓸 수가 있으며, 지금도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 동생은 오랫동안 마약과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치료를 받았었고, 술은 끊을 수 있었으나, 마약 (마리화나)은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손이 낫던 그날 동생은 마약으로 끌리는
욕망이 없어졌으며 마약을 끊고 나서도 후유증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동생은 마약에 전혀 손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날 향유천으로 동생의 손목을
문지를 때, 장미 향기가 코를 찌르도록 강하게 났었습니다. 그렇게도 자그마한 향유천 조각에서 말입니다. 저희 가족은 제 동생의 이 치유가
성모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고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1994년 5월이 되었습니다. 러미의 인디언 부락에서는 정식으로 복음화 사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방금 성 요아킴성당의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러미의 인디언 부락 전체를 티없으신 성모성심께 봉헌하는데 대한 허락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봉헌을 할 것입니다. 봉헌은 갈멜의 성모님 축일인 1994년 7월 16일 토요일에 있을 예정입니다. 저의
회개 경험 이후, 저는 화해, 보속, 기도, 금식 그리고 성체안에 참으로 계시는 주님께의 신심을 저희 부족에게 전하는 사명을 느끼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러미 부족 안의 많은 부인들 또한 주님과 성모님의 손과 발이 되고 있습니다
병이 낫는
것보다도 더 큰 은총은 여지껏 제대로 몰랐던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버지니아 임마꿀라따
사랑하는 나주 성모님 감사드립니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율리아 자매님과 나주에서 봉사하는 모든 형제 자매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 살고 있는
임마꿀라따입니다. 저는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 뵙고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 주님과 성모님께 영광
돌립니다. 저희 가정은 남편과 저 그리고 딸, 아들 네 식구입니다. 남편은 어릴 적에 영세를 받았으나 냉담을 했고 저는 시집가서 첫 딸을
낳고 영세를 받았지만 주일만 지키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에서 나주 우시는 성모님을 모시는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난 다음 저희 가족 전체가 열심히 성당에 나가며 전에는 묵주 기도도 못하던 남편이 가족과 함께 9일 기도도 드리고 차를
타거나 시간만 나면 묵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성모님 메시지 말씀 테이프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너무 안타까워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푸른 군대에 열심히 나가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율리아 자매님을 뵙고 난 뒤 예수님, 성모님이 계신다고 정말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히 묵주 기도도 하고 언제나 무슨 일이든 기도로써 준비를 할 때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성모님께서 저희 가정에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와 영광
드립니다. 저희 가정이 이렇게 성가정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은혜가 많았습니다. 저는 위장병과 신장병 두드러기 등 여러 군데가
아팠습니다. 처음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서 서로 인사하며 저의 손을 잡으시던 날 율리아 자매님께서 제 몸에 두드러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예"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순간 율리아 자매님은 몸을 긁기 시작하셨습니다. 자매님은 "지금 내 몸에 두드러기가 전부 났는데 이것을
전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바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위장, 신장, 두드러기 전부를 다 치유 받았습니다. 그 후 저에게는 한번도
두드러기가 다시 생기지 않았습니다. 치유 받기 전 저의 두드러기 증세가 심할 때는 사람들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메릴랜드 성당에서 3시간 이상의 강론 끝에 치유의 기도를 하실 때 35년된 신장, 당뇨, 등등 여러가지 병이 치유된다고 하셨는데 많은 분들이
치유를 받으셔서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의 남편이 몸이 아프다면서
3일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어떻게 아프냐고 하니까 칼로 배를 째듯이 아프다면서 온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율리아 자매님이 전화로 기도를 해
주셨는데 갑자기 대변이 마려워서 화장실로 갔는데 이상한 대변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후 남편은 한번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놀랍기만 합니다. 그 뒤 저는 율리아 자매님의 낙태보속 고통을 한번 옆에서 본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놀랍기만 합니다. 어느 자매님의 집에서 많은 분들이 모여 율리아 자매님이 나주 우시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실 때
임신과 낙태 이야기를 하시던 중 건너편에 계시는 어느 자매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옆에 계시는 자매님께 "저기 계시는 자매님 언제 낙태를
했느냐?"고 물어 보라고 하셨는데 7개월때 낙태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율리아 자매님께서 10시간 이상 낙태보속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저는 곁에서 그대로 다 지켜 볼 수가 있었는데 배는 점점 불러올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의심을 할 때 어떻게
아셨는지 율리아 자매님께서 한번 만져 보라고 하셨는데 배는 임신한 배와 똑같았습니다. 진통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율리아 자매님은
"우리 기도해요."하는 그 순간 조금 전까지만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제가 갑자기 회개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저도 그전에 몇 번의 낙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큰 잘못인지 모르고 살던 제가 뒤늦게 회개를 했습니다. 왜 우리가 지은 죄를 율리아
자매님이 대신 겪으셔야 하나? 정말 저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 눈을 떠보니 율리아 자매님은 조금 전과 달리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배는 정상으로 되고 고통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개신교 여자 한 분이 뱃속에 혹이
있어 임신이 안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율리아 자매님과 전화로 기도한 뒤 그 달에 임신이 되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뒤 아들 1명을 더
낳았지요. 지난 93년 겨울 저는 눈에 미끄러져서 척추를 많이 다쳤습니다. 병원에도 가고 물리치료도 받았으나 매일 아파서 매사가 귀찮고
제대로 구부릴 수도 없었는데, 그후 율리아 자매님이 뉴져지 성당에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려고 오셨을 때 그때 여러 사람들과 같이 기도
중에 율리아 자매님께서 누가 허리가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픕니다."했더니 저를 안고 기도하신 그 후로 저는 완전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항상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까지도 겁내지 않으시고 열심히 나주 성모님을 각 나라마다 알리시고 고통을 받으시는 율리아
자매님,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님! 성모님! 율리아 자매님 같으신 정말 착하신 분을 저희에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분을 통해서
냉담자가 성당으로 오고 파괴된 가정이 성가정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서 병이 낫고 그런 것보다는
그 분을 통해서 여태껏 모르던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많은 메시지를 주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속히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옛 모든
성인들도 그 당시에는 인정을 못 받으셨으나 먼 훗날 정말 기적이라는 것이 인정되었지요.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 말씀을 전하실 때 장미 향기가
취할 정도로 나고, 성모님께서 바로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먼 훗날 파티마나 루르드 같은 다른 나라의 성지처럼
나주도 성지가 되어 많은 순례자가 주님과 성모님을 뵈올 수 있는 큰 성전을 하루 속히 이루어 주시길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 드립니다. 이
모든 것 주님과 성모님께 영광과 찬미 드립니다.
Kim S Dress Design 800 N.
Fairfax street Alexandria VA 22314 U.S.A 버지니아 임마꿀라따 드림 T.703-684-9188,
703-916-9006
성모님을
알기 전에는 네 탓이었으나 이제는 내 탓입니다.
조숙희(헬레나)
천주님께 감사, 성모님께 감사 저는 제주도 광양에 사는
조숙희(헬레나)입니다. 4년전 자궁내막염과 방광염으로 300만원의 치료비가 드는 수술을 해야 했으나 보험도 안되고 돈은 없고 남편과 이혼할
처지까지 되었으나 이혼은 못하고 제주도로 도피를 했었습니다. 2년이 지나자 병이 없어진 것 같았으나 자꾸 의심이 갔는데 본당 신부님께서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냥 믿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냄새가 많이 나서 옷을 매일 갈아입었지만 아이들이 목욕을 자주 가라고까지
했습니다. 매일 왜 그럴까? 하다가 지지난달 철야기도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광주를 거쳐 나주로 오다보니 성모님 집에서 마침 철야 기도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철야기도 중에 굉장히 고통스럽고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만큼 아팠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팠는데 이튿날 일어나서 소변을
보고나니 너무 시원했으며 그날은 소변을 하루에 8번을 보았습니다. (나주에 가기전에는 자기 전과 자고나서 두번밖에 소변을 볼 수 없어 악취가 얼마나 많이 났는지
몰라요.) 전에는 목욕을 가서도 너무 아파 배를 문지르지 못했는데
성모님 집에 다녀와서는 문질러도 아프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아서 산부인과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깨끗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은 모든
것이 남의 탓이었으나 성모님께 다녀오고 나서 회개를 하니 모두가 좋아보이고 내 탓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2년 12월 6일 제주도 광양 조숙희(헬레나)
병든 가정을
치유하여 주신 성모님
임말자(안젤라)
부산에 사는 임안젤라입니다. 저는 18년동안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 둘을 키우면서 남모르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속으로 피눈물 흘리는 저의 아픔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이를 악물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복수하는 길은 돈 잘 벌어서 아이들 잘 키우는 길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아픈 몸을 이끌고 소처럼 일했습니다. 그런 마음 속에는
항상 울분과 용서하지 못해 생긴 미움이 가슴 속에 이글거리고 있었고 언제나 내 마음은 세상을 원망하고 하느님까지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주에 가게 되었는데 나주 성모님의 집 축성식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매님의 말씀 중에 "천주성부의 의노가
가득찼다. 남을 비판하지 말고 또 판단하지도 말고 회개하여라.... 가정이 병들어 있다. 서로 사랑하여 가정성화를 이루어라. 모든 것을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 영혼에게는 내가 주는 사랑의 메시지가 그 영혼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등의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과 자매님의 신앙체험을 들으며 땅을 치고 통곡하였습니다. 제 자신을 떳떳하게 생각했으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 탓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네 탓이라고만 생각하여 분노에 찼던 과거의 생활을 되돌아 볼 때 주님께 성모님께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가슴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동요되어 가슴을 치며 통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하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때 주위에서 시끄러워 분심이 생긴다하여, 기다시피 밖으로 나가 화장실 계단 청소를 했습니다.
영혼을 닦아주는 걸레가 되자고 하신 말씀을 실천해 보려고 깨끗이 씻었습니다. "영혼 육신이 병든 남편을 닦아주는 걸레가 되자." 신발장을
정리하고 내 안에 더러워진 모든 것을 씻어내기 위해서 수도꼭지를 입에 넣어 틀어서 뱃속에 든 것까지 토하여 깨끗이 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 때 자매님이 제 죄를 대신해서 속죄양이 되셨으니 저도 같은 세대의 사람이 된 것을 얼마나 감사했는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을 찾아가 보니 남편은 병들어 누워서 혼자 있었는데 거기에다 빚까지 많이 지고 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남편이 한편으로는
밉기도 했지만 너무 불쌍했습니다. 좋으신 나주 성모님께서는 원수로 생각하던 남편을 불쌍하게 볼 수 있도록 하여 병든 남편을 집으로 데려다가
정상회복을 시켜 주었습니다. 18년만에 잃어버렸던 짝을 성모님의 사랑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라, 자녀들아! 원수까지 사랑하라. 주님계명
따라 살면 구원 받으리." 자매님을 통해서 들려 주신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는 약이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저의 짝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부족함을 볼 때에도 바로 나의 부족함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무지했던 저의 마음을
성모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시니 이제 저의 짝은 요셉성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때 저는 제가 받은 은총을 혼자 지니기엔 너무
아까워 많은 사람들에게 나주 성모님 사랑을 받도록 권유했습니다. 어느날 대형버스로 나주에 가기로 되었는데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주위에 은혜
받으신 분들께 주선하도록 말씀드렸습니다. 내일 떠나야 하기에 알아보니 7명 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포기했는데 남편은 안가면 어떻게 되느냐며
차량비 36만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7명을 태우고라도 갈려고 나오니 이게 웬일입니까? 한 명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아 그 돈을 남편에게 돌려
주었지만 이미 그는 하늘 보물창고에 재물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남편은 이제 어쩌다 제가 나주에 안갈려고 하면 나주 어머니가 기다린다며
저를 나주에 보내 놓고서 사업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기에 자기는 촛불켜고 제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이제 저의 주위에
가족들, 친척들, 이웃들이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수십명이 됩니다. 스님과 목사님 가족들까지도 나주 성모님께 가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함께 기도도 하고 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으면 나주 성모님께 달려갑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정신적인 병이나 육체적 병이나 어려움을 헤아리고 계시기에 완전히 믿고 달려 올 때 가족들까지도 어루만져 주심을 수십번 체험했습니다.
병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여러가지 병들도 주님은 성모님을 통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저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부족한 제가 남편을 볼
때면 요셉성인을 보는 듯하고 그를 섬김이 얼마나 따사롭고 화평스러운지. 바로 이렇게 변화된 마음이 나주 성모님 아니면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령 세미나, 피정, 단식기도, 철야기도를 해 보았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는데 나주 성모님께서 저의
완악한 마음을 회개시키시어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적인 병보다, 영혼을 치유시켜 주심을 무한히 감사드리며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면 나주 성모님의 무한한 사랑을 함께 나누고자 부족하지만 이 글을 씁니다. 고통을 통해서만이 영광에 다다를 수
있다는 진리를 나주 성모님은 자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지나온 과거의 고통을 여기에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혼전부터 다시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의 수많은 고통은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크신 주님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며 주님과 성모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병든
가정이 치유받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작은 교회가 되게 하소서. 아멘.
부산직할시 중구 부평동 1가 18(3통
1반) 임말자(안젤라)
빨갛게 솟아
올랐던 상처가 즉시 깨끗해지다니...
글라라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소사 본당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인 저는
93년 7월 심한 기침으로 세종 병원에 입원중인 김 미카엘(모수국교 2년)이라는 소년의 소식을 듣고 나주 성모님 물을 가지고 방문을 갔습니다.
그런데 기침은 심하지 않으나 아기때부터 앓고 있던 이름모를 피부질환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긁어서 빨갛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며
저는 속으로 기도하면서 아이와 얘기를 했습니다. 성당에 잘 가지 않는다는 그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너를 얼마나 기다리며 보고 싶어 하시는지
아니?" "'예수님! 잘못했어요' 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렴!" 하고 말했더니 정말 천진하고 귀엽게도 "예수님! 잘못했어요."하며 어리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성모님 물을 그 아이의 피부 상처에 바르고 손을 얹은 후 간절히 기도했고 기도를 마친후 손을 들어보니
빨갛게 솟아 올랐던 상처가 즉시 가라앉고 깨끗해진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옆에 앉아 지켜 보시던 할머니는 외인인지라 더욱더 신비스러워하고
놀라워하셨습니다. 그 이후 오늘까지도 아이의 피부는 깨끗하고 가렵지도 않답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여, 감사합니다. 나의
예수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1993년 8월 20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2동
96-7 4/8 글라라 드림
보이지 않던
저의 눈이 보이다니요.
엘리사이손
다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은총이신 복되신
성모님께 중개를 청하며 바치신 당신의 기도를 통하여 저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기까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저의 증언입니다. 자매님과 가족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이름은 엘리 사이손이며, 거주지는 필리핀, 결혼하여 일곱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나이는 45세, 현 주소는 마닐라 시내,
파라나꿰의 이그제큐티브 하이츠, 헴룩가 19930번지입니다. 저는 지난 35년간을 기타와 피아노를 쳐온 전문적인 음악가입니다. 현재는 마닐라
가든의 니꼬 호텔 콩코스에서 음악 책임자이며 피아니스트 및 성악가로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의 그 동안의 생애는 비록 굴곡은 있었다고 하겠지만
큰 사고없이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9월 6일,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오른 팔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오른쪽 다리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 발로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왼 손으로 차를 갑자기 틀어서 전봇대에 갖다 대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저를 도와서 마카티 종합병원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네 명의 의사가 처음에는 심장마비인 줄로 생각했었으나, 아홉 차례의 심장검진
후에도 아무런 심장의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쟈모라 의사와 그의 동료 의사 한 사람이 뇌 검진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네 차례의 뇌
검진 끝에 뇌종양이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의사들은 당장에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12시간의 뇌 수술끝에 달걀 만큼이나 큰 혹이 저의 왼쪽
뇌로부터 떼어졌습니다. 그것은 악성 뇌종양이었습니다. 그 후 3개월 간의 요양 후에 저는 오른쪽 팔을 쓸 수 있었으며, 오른쪽 다리는 아직 다
낫지를 않아서 걸을 때에는 절뚝거렸습니다. 피아니스트와 성악가로서의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꿈이 상실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992년 성주간 동안, 특히 성 금요일에 저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는 비운을 또 맞았습니다.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른쪽 눈만 제대로
작동을 했습니다. 왼쪽 눈이 안 보이게 된 것과 오른쪽 다리가 약한 것은 이미 제거된 악성 뇌종양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노르디 피 디플로마 변호사에게 알려드렸습니다. 그 분에게 저는 솔직히 악성 종양의 재발 가능성이 두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종양이 완전히
제거가 된 것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디플로마 변호사는 저의 믿음과 신뢰를 하느님께 두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는 또 저를 1992년 5월
12일 그린벨트 스토니노데 파즈 성당에서 있을 치유 미사에 참석하라고 초대를 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윤 율리아 자매님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율리아 자매님께서 기도하시고 묵상하시는 동안, 저는 성당 안을 가득 채운 달콤한 장미향기를 맡았습니다. 그린벨트 성당에
모였던 모든 분들이 그 향기를 맡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퀘존 시티의 카티푸난 거리에 있는 성당에서 또 치유 미사가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율리아 자매님께서는 기도하고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모인 이들 모두에게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던 도중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시면서, 참석자들 중에 누군가가 뇌종양이 치유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사와 기도가 끝난 후, 저는
상당히 상태가 좋아졌으며, 디플로마 변호사 저택으로 갔습니다. 그 때 변호사의 이모와 누이가 저에게서 달콤한 장미향기가 난다고 했습니다. 제가
두 시간 후 집에 갔을 때에도 제 아이들이 꼭 같은 얘기를 저에게 했습니다. 그 다음날 디플로마 변호사와 저는 율리아 자매님을 초대한
멀-씨 투아존 부인 댁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율리아 자매님은 왼쪽 눈과 머리에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다리가 절뚝거리는 것도
느끼셨습니다. 자매님은 방으로 가셔서 휴식을 취하셨으며, 잠시 후에 나오셔서 여러 사람들에게 기도해 주시고, 또 저에게 오셔서 저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 귀 사이를 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한국말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전신에 추운 느낌을 느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디플로마
변호사는 나가자고 했으나, 저는 좀 더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의 시력이 밝아짐을 느꼈습니다.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을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천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저의 왼쪽 눈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내려주신 이 치유에 대해 천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 디플로마 변호사와 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 지나서 저는 저의
안과 의사들에게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잘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기적일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적이라는데 대해 저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제 가슴 깊이 저는 이것이 단순히 저의 뇌종양을 치유한 것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저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능력과 성악가로서의 목소리까지 다시 돌려주셔서 다른 이들에게 더 잘 봉사할 수 있게 하신 것이라
느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착하심과 자비하심에 영광을 드리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1993년 1월 7일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엘리사이손
드림. 증인:프란치스꼬 엔 로드리게즈, 멜린다 에프 모랄레스
33년의
조당을 풀어주신 나주 성모님
우 바울리나
저는 심장 수술을 받을 때 피 돌아가는 역할을 하는 쇳덩어리를 몸
속에 지녔기에 여행하기엔 매우 불편했습니다. 어디 다니다가 심장마비라도 오게되면 속수무책이므로 의사에게 보일 수 없을 경우 긴급하게 사용할
비상약도 필요하기에 몇 달 전부터 분주하게 준비하여 작년 3월 미국에서 17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친지 방문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친지 방문
후 꿈에도 그리던 나주 성모님 집에 언니 우 데레사와 함께 가게되어 성모님 앞에서 묵상한 후 저는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고자 여러분께 간청을
했습니다. 기도를 들어 주셨음인지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미사를 하게 되었는데 성체를 모시고 제 옆에 앉으셔서 제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
주셨는데 포근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듯 했습니다. 우리는 기쁨에 차서 성모님 집에서 돌아와 사진 촬영도 하고 기도도 했는데 율리아 자매님은
고통을 받으셔서 어느 자매님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봉사자님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여 '혹시 율리아 자매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다렸는데 성모님의 사진, 신문,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체험', '나주 성모님과 성체' 등을 받아 가지고 나오니 운전사와
데레사 언니는 기쁘게 나를 반겨 맞았습니다. 언니는 "봉사자님이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다가 차 사고 날 뻔했다."라고 말하자 저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니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기사님이 타이어 펑크 난 것을 발견하여 가까운 곳에 가서 고쳐 오셨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분의 섭리하심은 놀랍기만 하여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그분의 위력과 자비하심을 체험케 해 주시고 또한 나주 성모님의 그 자상한
모성애의 깊은 자애를 더욱 깨달아 "성모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하고 외쳤습니다. 저는 6월에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하루하루가 은총의
날이었습니다. 약도 먹지 않았습니다. 기쁘고 즐겁고,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이고 거울에 제 얼굴을 볼 때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는 율리아 자매님의 훌륭한 기도에 힘입어 아픔이 제 몸에서 떠나버린 것 같이 가벼웠습니다. 저는 5년동안 살았던
몬테레이 한인 천주교회에 나주 성모님 테이프를 보내려고 하던 중 사목 회장님의 아드님 결혼식이 있다고 전화가 왔기에 결혼식에도 가고 나주
성모님도 전하고자 몬테레이 공동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시는 분마다 예뻐진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회장님 댁에서 10일간 묵고
있는 동안 많은 분들이 나주 성모님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회개하고 은혜들을 풍성히 받아 큰 경사가 났어요. 한국에서부터 잠꾸러기라고 소문난
저는 나주 성모님 테이프 보여주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전화 벨이 울리고 일어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와서 벌써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많은 자매님들의 초대로 식당엘 갔는데 주인이 신자라서 나주 성모님 상본을 하나 주면서 나주
성모님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 손님들이 수없이 들이닥쳐도 넋을 잃고 고맙다는 인사를 수 없이 하였습니다. 30년 된 친구가 그
동네에서 살고 있었는데 헤어진지 3년만에 만난 저를 보더니 "한국에 가서 성형수술하고 왔느냐?"고 물어 아니라고 했더니 "전에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예뻐졌는데 그 무슨 비결이라도 있느냐?"하여 저는 나주에 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며 "그래서 난 이렇게 기쁘고 즐겁다."고
말하니 나주 테이프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회장님 댁에서의 10일간, 이른 새벽부터 밤이 늦은 시각까지 오시는 분들을 맞이하여
대접하시는 모습을 볼 때 귀찮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랑이 가득하신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통하여 큰일을 하게 하시고 죄인들을 새롭게 받아주시기 위하여 율리아 자매님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하늘나라의 길을 떠나오면서 많은 선물까지 받았는데 이는 바로 성모님을 전하니까 성모님이 풍성하게 기쁨으로 채워주심이라고 확신이
갔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다시 만난 우리의 우정은 틀림없이 하늘 나라의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후 저는 많은
분들로부터 고맙다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입으로만 사랑하고 입으로만 믿어왔던 신앙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많이 울고 열심히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으며
또 감사의 편지도 몇통이나 왔었습니다. 저 역시 나주 성모님 테이프와 메시지 책을 읽는 순간 성모님 메시지가 잠든 저의 영혼을 깨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모르는 자녀들에게 열성을 가지고 전하여 배은망덕한 무수한 영혼들에게는 나의 사랑과 합하여 너희의 피나는
희생의 댓가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자꾸나' 성모님의 메시지가 제 잘못을 반성하게 하고 무딘 양심을 깨우고 죄를 다듬고 또 다듬어서
30년도 넘게 성체를 모시지 못한 이 죄인의 굳은 마음을 눈녹이듯이 녹이시어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조당을 풀고 혼배하여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열망으로 서둘러 면담을 했는데 신부님께서는 쾌히 승낙을 하셨지만 남편이 반대하여 "혼배를 그만둡시다."하고 애통한 마음이 갑절이 되어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집안은 울음 바다로 변했는데 그때서야 남편이 놀라서 용서 청하며 필요한 서류를 수일 내로 해다 주겠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튿날부터 서류를 준비하여 시부모님 서명까지 모두 받느라고 3개월만에 서류가 완성되었습니다. 톰신부님께서 혼배 날짜를 잡으라고 하시던 날 기쁨과
두려움에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많은 신부님들과 면담을 했지만 매번 어렵게만 말씀하시고 다른 신부님한테
풀으라고 했기에 그럴 때마다 애간장이 타고 고통 중에 있을 때 돌보아주시는 영원한 도움의 나주 성모님께서 이 죄인의 갈등도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두 번째의 결혼이었기에 조당을 풀기가 너무 어려웠지만 나주 성모님께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다 물리치시고 33년만에 조당을 풀도록
해 주셨습니다. 33년만에 그토록 그립고 그립던 성체를 모시는 그 순간은 너무 은혜로워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
하느님의 사랑이며 나주 성모님의 도우심입니다. 왕복 30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를 멀다 아니하시고 몬테레이에서 혼배식에 축하해 주려고 오신 회장님
부부와 프란치스코 부부와 구역장님 두분을 떠나 보내면서 너무 복에 넘친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저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먼길을
어떻게 오셨겠는가?'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나주에 데려가 주신 데레사 언니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3월달에 한국에
나가 나주 성모님을 방문할 예정인데 한국 여행을 앞두고 여러날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전하시고 마리아의 영광을
빛내시고자 하는 율리아 자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주 성모님 테이프가 준 감격이 제 영혼을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세계로 승화시켜 준
추진력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남은 생애는 기쁨과 사랑을 나누어주고 남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돌덩이 같은 제 마음을 눈 녹이 듯이 마음을 움직이게 해 주신 나주
성모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만나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1997년 3월 4일 Paulina
Peacock Hc 34 Box 34050 Ely Nevada 89301 우 바울리나
T.(702)238-5288
성모님께서
움직이셔서 생긴 빈자리에 성작과 성체가 있었다.
최의순(골롬바)
일치와 평화를 위하여! 1993년 6월 27일 교황주일에
2시 10분경 나는 나주 성모님 집에 갔습니다. 그때 머리 가운데 부분에서 이마와 몸 가운데 부분으로 향유가 흐르고 짙은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서울집에 갔다가 9일만에 돌아온 나를 성모님께서 미소로 반겨주신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약 2시 30분경 율리아 자매님이
메시지를 받았다며 들어오셨습니다. 루비노 회장님과 다른 한분의 형제님도 들어오셨고 율리아 자매님은 잠시 기도한 후 성경을 읽은 뒤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자매님이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고 율리아 자매님이 나와 성모님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사진을 찍다가
"성모님이 움직이셔요." 하기에 깜짝 놀라 앞에 가보니 가운데 놓여있던 성모상이 우리가 바라보는 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너무도 신기하였습니다. 그때 율리아 자매님과 여섯 형제 자매님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뒤 나는 내자리로
돌아와서 (성모상에서 약 4m의 거리) 고개숙인채 기도했습니다. 6월 29일 오후, 27일 찍은 사진에 대해 전화로
연락받았습니다. 30일 성모님께서 우시던 8주년 기념일에 철야기도를 위해 나주에 가서 사진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성모님께서
움직이셔서 생긴 빈자리에 성작과 성체가 있었습니다. 성체안의 십자가상 피흘리시는 예수님, 그 발아래 흘러내리는 성혈, 알파와 오메가가
십자가 양쪽에 새겨진 성체, 그리고 아름다운 성작이 나타났습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슬픔과 기쁨이 엇갈린 흥분된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엎디어 절하나이다. 숨어계신 천주성이여!" 1988년 6월 5일 그리스도 성체성혈 대축일에 예수께서 율리아 자매님에게
'나의 모습을 보아라' 하셔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처참하리만치 참혹하게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이 계셨답니다. 그리고 그 피가
떨어지는데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쁜 성작과 성반에 떨어져 성체 성혈로 사제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며 그 옆에 우리의 중재자 성모님께서
함께 계셨답니다. 바로 그 모습이 이번 사진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1989년 2월 23일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통해 "...악마가
쏘는 불 화살을 막을 수 있도록 경당에서 미사를 하게 해다오. 내아들 예수가 피를 흘리고 있다... 경당에 감실을 마련하여 내아들 예수와
함께 기도하게 해다오."하셨고 또 1989년 11월 27일 "체면과 이목 때문에 나 어머니를 모르는 체 해서는 안된다... 미사를 통해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행하고자 한다. 미사를 할 수 있게 해다오. 나와 함께 드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직자들의 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성모님께서 성체의 기적을 사진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할 때 4월 14일부터 몇번이나 사진을 찍을 시간이면, 부족한 죄인인 저를
그 현장에 있게 하심으로써 엄청난 증언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신 이 놀라운 은총에 어떻게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요? 수많은
기적을 통해서, 또 기적 속에 기적을 보여주셔서 저희들을 타이르시는 어머님의 뜨거운 사랑, 메시지 말씀을 통해 미사를 성모님의 집에서 드리게
해달라는 어머님의 애타는 호소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머님의 성심에 저희 모두 봉헌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1993년 7월 4일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
선수촌아파트 318-103 최의순(골롬바)
새로운
부활로 이끌어 주신 나주 성모님
하미덕(도미니카)
찬미 예수님 저는 대구에서 사는
하미덕(도미니카)입니다. 성모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눈이 멀고 귀가 멀은 불쌍한 이 죄인을 불러주신 주님과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저는 1974년도에 성당에서 십팔금 혼배반지 반돈과 한복 한벌 정도로 아주 검소하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현역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갈 수 없어서 신혼이었지만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야 되었는데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제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님은 점상을 차려놓고 사주팔자를 봐주시는 분이었는데 저는 시어머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하루에도 20여명 정도 사주팔자 보러온 사람들에게 국수와 커피를 대접해야 하는 것은 저에게 크나큰 고역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도 꽤
많이들 왔는데, 시어머님 몰래 저는 그들에게 "왜 이런 곳을 찾아 오십니까?" 하면서 별로 교리지식도 없었지만 천주교에 대해 말씀 드리곤
했지요. 남편이 불쌍하게 자랐다는 것을 알고 결혼했지만 시어머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 되다보니
결혼을 잘못했다고 몇번이고 생각이 되었지만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했으니 남편과도 아이를 낳으면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리라고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일단 남편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시어머님은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서도 결혼할때 10만원 들었으니 갚으라고 하여 그 당시
남편월급이 팔만천원이었기에 1년간 매달 만원씩을 시어머님께 보내면서 월세 방에서 근근히 살다가 첫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예수쟁이하고 살지 말고 다른 사람하고 결혼해야 된다고 하였고, 남편도 자기 어머니와 한편이 되어 부부가 헤어지는 부적까지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남자로서의 못된 짓을 다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 아이들이 셋이나 되었지만 18년동안 월급봉투 한번 받아보지
못한 고통 뿐만이 아니라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지옥같은 암담한 긴긴날을 보내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시어머님과 남편이 저를 업신여기고 상처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더욱 죽이고 싶도록 미워 용서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오래 지속되니까 유방암이란 병이 저에게 왔는데, 수술을 한 1년 후에는 척추암으로 퍼져 갔습니다. 항암치료를
너무 많이 해서 간수치가 25가 정상인데 300이 나갔고 당뇨수치가 300이 나갔으며 적혈구, 백혈구가 다 떨어져 하혈도 많이 했는데 그때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머리에까지 암이 올라왔다고 하면서 한달 정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척추암은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이 드는 병인데다 온갖 합병증이 다왔기 때문에 제몸과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아픔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데 저 아이들을
놔두고 먼저 가야 하다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애간장이 녹아 내리는 듯 했습니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있지요. 그동안 몇 번이고
이혼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아빠이니 울분을 참고 견디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영세, 견진도 받게 했는데 나쁜 짓 안하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다고 하더니 건강하던 남편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지 20일만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 때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먼저 간다던 저는 이렇게 살아있고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울 때 남편은 제 곁을 떠나간
것입니다. 아이들은 한창 공부를 해야 될 때였지요. 큰 아이가 고3, 둘째가 중3, 세째가 중2. 물질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 잘못 만나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 너무도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는데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아픈 마음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미움과 증오와 분노와 불안, 이렇게 한맺힌 생활을 하면서 영혼과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을 기다리던 어느날 나주 성모님의
부르심으로 1993년 6월 30일 나주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세받은 지 오래 되었어도 고통에 짓눌려 형식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주님과
성모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그런 느낌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뿐더러 불만과 증오로 가득찬 사랑없는 생활을 해 왔기에 저 혼자만 가장 큰
십자가를 지고 살아왔다고 생각만 했지 주님과 성모님께 상처를 드렸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장미향기가 저를 반겨주었고 성모님 앞에 가서 보니 성모님은 향유를 흘리시며 "왜 이제야 오느냐."하시는 성모님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성모님의 성체사진을 루비노 회장님께서 현상해 오셨는데 이제까지 성체의 중요성을 몰랐었지만 그 사진을 보고야
너무 놀라 참으로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묵상하면서 그때서야 주님과 성모님께서 얼머나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느끼며 기쁨과 환희가
가슴벅차 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진작 오지 못했을까?..." 그때서야 지나간 날들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1987년도에 대녀가
나주 성모님의 피눈물 사진을 건네주면서 구체적인 설명도 없었지만 제 생각에 무엇인가 가르쳐 줄 것만 같았어요.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의 사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저희 집에 모셔진 성모상 옆에 모시고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성모님께서 피눈물 흘리신 뜻을 깊이 묵상하며 "성모님!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성모님을 찾아뵙고 싶어도 차비가 없어서 찾아뵙지 못해 용서를 청합니다." 하며 저는 생활고에
찌들리고 고통중에 있었기에 감히 나주 성모님을 찾지 못하고 기도만 했었어요.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성모님을 찾아뵈오니 너무나 좋았고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뒤 나주 성모님이 너무 좋아서 첫토요일 기도회 때마다 나주에 가게 되었는데 나주에 다닌지 6개월만에 저는 처음으로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나주 성모님께 다니면서도 제가 잘못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남을 미워했고 증오하며 용서하지
못했던 그 모두가 내 탓이 아니고 그들이 저에게 잘못했기에 응당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리아 자매의 말씀
중에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의사에게는 성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자가 필요하듯이
예수님께서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녀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인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회개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회개야 말로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약입니다..." 또 "내가 가만히 있어도 상대방이 나
때문에 죄를 짓는다면 그것까지도 내 탓이라고 생각해야 된다."은 이 말들을 듣는 순간 제 잘못이 무엇인지 전혀 알길이 없어 주님과 성모님께
물었습니다. '저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싶습니다. 제 잘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요.'하고 묵상하자 '너는 가장 가까운 네 남편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 못하지 않느냐?...' 이 말씀에 머리를 얻어 맞은 양 깜짝 놀랐습니다. 나의 모든 교만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지요. 그동안 나의
잘못이 있었다거나 나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 받았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는데 지난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제 잘못을 생각지도 못하고 네 탓이라고만 했던 저를 용서하세요. 저에게 주셨던 사랑은 생각지도 못하고 원망만 하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셔서 그렇게도 많은 피눈물을 흘리셨나요..." 한맺힌 저의 과거의 아픔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는데 원망만 하고 있었으니 가슴은
메어질 듯이 아파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 중에 "인간과 인간이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마귀 (사탄)와 싸워서 이겨야 된다."은 말씀대로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셨기에 마귀들이 시샘하여 나를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철저하게 괴롭혀 왔다고 생각하니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저를 조소하고 비웃고 상처를 준 모든 이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사이엔가 제 영혼이 치유되고 있었고 의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했던 저의 불치병이 치유되어 저는 지금 하마터면 고아가 될뻔한 세 아이들을 돌봐주며
뒷바라지 해주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께서는 저의 영혼 육신만 치유시켜 주신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은총을 내리시어 큰
아이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셋째 아들 바오로는 장학금도 타게 해 주셨으며 둘째는 수도 성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 병든 우리
가정에 오시어 주님의 빛 안에서 기쁨과 사랑과 평화 속에서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 봉헌한 묵주를 가지고 열심히 기도를
하면 더 많은 향기를 주십니다. 특히 수도 성소를 가진 둘째 아이의 묵주에서 더 짙게 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짙은
장미향기가 나고 있는데 우리 가정에 새 빛을 주신 주님, 성모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미 죽었어야 될 이 죄인이 살아서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비록 내집없이 셋방을 살면서 화장품
하나없고 이만원짜리 옷하나 사서 입어 본 적이 없으며 계란 한판 사보지 못했고 저축 한 번 못해봤지만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얻었으니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제 나이 지금 마흔 여섯이지만 저는 어디에서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나주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형제 자매 여러분! 어느 곳에서든 나주 성모님 말씀을 들었다면 곧장 나주 성모님을 찾아오세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 남은 제 한생애 성모님 말씀 실천하고 살도록 굳게굳게 결심하며 또 약속을 드리며 당신의 사랑받는 딸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성모님,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1994년 8월 17일 새벽 4시경까지 씀 대구시
수성구 만촌3동 초원APT A동 502호 하미덕(도미니카) T.(053)56-8569
선천성
심장병인 셋째 아이가 정상 아이가 되었어요.
정은옥(가브리엘라)
찬미 예수 저는 나주에 사는 정은옥(가브리엘라)입니다. 저는
원래 불교신자라서 1985년 6월 30일부터 성모상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지만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7월 20일 사진관을 하던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보았는데 정말 성모상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의심이 많은 남편은 500W로 찍어도 될 비디오를 2000W로
연속 찍었습니다. "1000W 두개로 번갈아 가면서 2~3시간을 계속 대고 찍으면 말라버리겠지."하는 생각으로 계속 찍었는데도 흘러
내려오다가 마르고 또 다시 눈물이 고여 다시 내려오다 너무 뜨거운 열 때문에 마르고 또 눈에 고여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함께 기도 하시던
신부님께서 "다른 데도 좀 찍어요."할 때까지 계속 찍었는데 우리가 의심했던 것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일 피일 시간이 지나 갔는데 1986년 10월 19일부터 25일까지 계속 피눈물을 흘리실 때 다시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피눈물이 계속
흘러 내리는 것을 보고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눈물과 피눈물, 향유, 율리아 자매님이 받으시는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목격한 우리들이 더 많이 매달리고 믿어야 되는데 세속에 너무 많이 물들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신앙 생활을
하니 집안에 우환이 끊일 줄 모르고 계속 되었습니다. 장부는 머리를 다쳐 병원을 나주, 광주 두군데를 다니면서 입원을 했어야 했고 셋째
아이 베드로는 선천성 심장병으로 서울대 어린이 병동에서 T.O.P 수술을 (1994년) 받았는데 회복이 되지 않아 중환자실에서 제가 우시는 나주
성모님 집 율리아 자매님에게 전화를 걸으니까 저의 가정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 주셨고 심장에 고통을 많이 받고 계신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후로 베드로는 정상 아이가 되었고 이 큰 은혜를 받고 저는 성모님을 멀리 할 수가 없었지요. 우시는 성모님은 진한 장미
향기를 맡게 해 주시며 저에게 건강한 (3.8kg) 사내아이를 얻게 해주셨습니다. 본명은 비오입니다. 저의 가정은 웃음이 활짝 핀 화목한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더욱 더 열심히 봉헌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5년 6월 10일 전남 나주시
중앙동 정은옥(가브리엘라) T.(0613)32-5949
섬광이 스쳐
지나가듯 문득 제 몸의 가벼움을 느끼게 된 것은...
김 아니따
저는 나주 성모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몇자 적고자
합니다. 93년 6월 제 어머님께서 성모님을 찾으셨습니다. 나이 드시고 아프시던 중이라 냉담 중에 있던 제 오빠가 모시고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분이 나주에 가게 된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오랜 냉담 중에 있던 제 오빠에게 성모님의 은총이 함께 해 주시길 바랐고 또 믿었습니다.
그 결과 오빠는 철야기도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간다는 연락과 함께 아침 미사에 갈 수 있도록 가족들을 준비시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고 성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후로도 오빠는 매일매일 묵주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겸손해 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 저는 제 남편과 함께 성모님께 오게 되었습니다. 오랜 열망 끝에 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1년전에 셋째 아이를 낳고
연년생을 키우느라 몸조리가 잘 안되어 늘 고통중에 있었는데 성모님께서는 그런 저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기도회 다녀간 지 하루가 되도록
저는 제 몸의 변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볼일을 보러 집을 나와 잘 알지도 못하는 집을 찾아 후덥지근한 8월 땡볕 아래를
1시간 30분간 5세된 딸 아이와 함께 걸어다녔습니다. 그런 후 시장보러 다니고 돌아와서는 앉을 새도 없이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면서 섬광이 스쳐지나는 듯 문득 제몸의 가벼움을 느낀 것입니다. 평소에는 집안 청소만 해도, 가까운 시장에만 다녀와도
허리가 몸둘 바를 모르게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세수만 하려고 허리에 힘이 들어가도 제대로 펴지를 못했던 제가 오늘 일어난 일들은
기적이었습니다. 방 걸레질을 하고서 일어나도 이제는 허리가 펴지고 온몸의 쑤시는 듯한 통증들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변화를 남편이
보고는 귀찮고, 힘들어 하던 묵주기도를 그날 이후로는 우리 세 꼬마들과 함께 매일 드리게 되었고, 10월에는 견진성사까지 받는 열심한 신앙인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이 모든 것을 성모님의 은혜라 믿으며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참 좋으신 어머니, 사랑의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1993년 11월 6일 김
아니따
백문이 불여
일견
조정희(세실리아)
오늘 여기에 참례하여 기적의 성모님 상을 뵙고 그윽한 향기를
영감의 표시로 받아 우리 모두는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쥬리아님을 통하여 표시되는 성모님의 계시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전해 듣고
있었지만 현지에 와서 여러분들의 따뜻한 안내를 받으며 직접 기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백문이 불여 일견이란 말씀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나
순례자 모두에게 있어서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뜻을 실천하여 우리들의 구원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참된 평화가 하루라도 더 빨리 찾아 올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일 것을 굳은 결의를 갖고 다짐합니다. 향유가 성모님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린 것을 보고 모두 (40인) 놀랐습니다.
1994년 3월 27일 일행을 대표하여 사제
프란치스코 사비엘 잊을 수 없다. 조정희(세실리아) 동경도 항구남
1-6-32-401 T.03-3452-0367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에 병이 나았습니다.
고 안젤라
저는 부산 중앙 본당 고 안젤라입니다. 콩팥과 간이 오래 전부터
나쁘고 아팠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에 입원도 못하고 있었더니 옆에서 지켜보시던 영감님이 집을 팔아서라도 병원에를 가자고 해서 제가 "영감이
성당에 가면 내 병이 나을거유"라고 했더니 좋다고 따라나왔습니다. 그런데 계속 다니면서도 제 몸은 계속 아팠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감추려고
참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자매님의 소개로 나주에 오게 되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제 병이 나을 것만 같았습니다. 철야기도회
때 성모님과의 만남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율리아 자매님을 안고 해서 너무 힘이 들 것 같아 저는 옷자락만 만질려고 했더니 뒤에 오시던 어떤
자매님이 "많이, 아니 한번 안아주시라고 부탁해 보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리아 자매님이 저를 안아주시고 나서 저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계속 나주에 다니다가 남편이 병환이라 1년을 못오는 중에 성당에서 단체로 성지 순례를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주로
왔습니다. 남편이 아픈데 혼자만 병 고치러 나주에 간다고 욕할까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않고 몰래 왔습니다. 저는 40년 이상
잠무력증이라는 병으로 잠을 세시간 이상을 자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주를 다녀가서는 4~5시간을 자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원래 많이
자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시험해 보려고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자봐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원래 1~2시간 자고 기도하고 또 조금 자고 기도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주위에서 남편은 아픈데 혼자 병 고치러 갔다 왔다고 할까봐 혼자만 알고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7월 3일 부산 중앙 본당 고 안젤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말따
찬미 예수, 마리아. 자연은 하느님 창조사업에 절대 순명하여
제철따라 신록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자매님이 다녀가신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동안에 저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남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하게 되었고 내자신을 들여다 보게 되면서 성모님의 말씀이 뼈속 깊이 사무칩니다. 기적을 보고 좇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보고, 실천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여 저 자신부터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사진책과 메시지책을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피츠버그에서 자매님의 증언을 듣고 집에 돌아와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자매님을 만난 후에는 성모님의 얼굴이 눈같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손은 좀 얼룩이 졌는데 미천한 이 죄인의 생각으로는 제가 조금밖에 회개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외에도 내적으로
변화가 많이들 일어나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한번 읽을 때보다 두번 읽을 때 더 많이, 세번 읽으면 더 많이 이렇게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 말씀이 현 세상 죄악을 아파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저도 같이 동참하고 싶은 생각도 간절합니다. 그래서
한사람이라도 죄에 떨어지지 않게 막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그책을 구하기 위해 하찮은 이 죄인이 이 글을 씁니다. 드릴 말씀은 무척 많은데
어찌 글로 다 쓰오리까.
1990년 6월 1일 뉴욕에서 한 말따
드림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이을분(막달레나)
저는 나주 본당 이을분 막달레나입니다. 94년 가을에
자전거를 타고 미사를 가던 중 큰 도로에서 넘어져 앞 웃니 두개가 거의 다 빠졌고 그 옆의 이는 완전히 빠져서 덜렁거리며 잇몸살에 살짝 붙어
있었습니다. 생 이가 빠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의 물을 바르면서 꼭 눌러 박으며 "죽은 나자로도 살리신 주님이 어루만지셔서
새롭게 해 주시어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해 주세요."했는데 그 이는 그 즉시 들어가 단단하게 되었습니다. 앞니 두개는 조금 덜 빠졌기에 기도를
조금 덜 했답니다. 그런데 두개 다 빠져서 덜렁거려 병원에 가서 치료해도 안되고 이는 새까맣게 죽어 갔습니다. 포기했었지만 또 다시 성모님이
주신 물을 바르며 기도한 결과 완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아들 토마스는 엉덩이와 아랫도리에 너무 심한 피부병이 생겨서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고 병원을 다녀도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다른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몇 번이고 팬티를 갈아입어도 팬티에 진물과 고름이
묻어서 옷을 갈아 입을 때마다 옷에 붙어 소독약으로 옷을 적셔서 떼어내곤 했는데 예수님께서 주신물을 발랐더니 금새 진물이 마르고 딱지도 지며
아물고 두번 바르니 딱지가 떨어지면서 나았으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세번 발랐습니다. 예수님, 성모님이 주신 기적수로
첫번째 피부병을 치유해 주신 주님, 감사와 찬미 영광 받으소서. 그런데 저는 예수님이 주신 물로 너무나 신기하고 이상한 모습을 보았기에
함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루는 우리 여럿이서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식사하려고 식탁에 앉아 있다가 어떤 일에 놀라 율리아 자매님이
턱이 빠져 턱을 부퉁켜 안고 방바닥에 구르다시피 누워 계시자 병원에 가서 뼈를 맞추든가 수술을 해야 된다고들 하면서 서로 울상이 되었습니다.
너무 아프고 말도 못하니 가엾기도 하여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하여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빅토리아 자매가 성모님
물로 씻고, 마사지를 하였더니 30분만에 깨끗이 치유되어 제대로 식사할 수 있어 우리 모두 주님께 찬미 영광 드렸습니다. 예수님, 성모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기적수까지 주셔서 이제는 모든 것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뜨거운 것은 커녕 따뜻한 음식도 먹으면 입안이
다 헐어 버리는데 이 물을 먹고 나서 부터는 뜨겁거나 차거나 무엇이든지 잘 먹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주신 기적수, 이 기적수는 영혼과
육신을 치유시키시는 사랑과 현존이시며, 예수님이 강복해 주시고 성모님이 안아 주시어 죄인들이 회개하며 내적, 외적으로 치유되어 기쁘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이 딸 손을 잡으시어 감사하며 살도록 나를 안아 주소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는
어머니에게 은혜받고도 반대하며 떨어져 나간 그 불쌍한 영혼들이 하루 빨리 회개하여 엄마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 드릴께요. 어머니 우리 율리아
자매님께 건강주시고 힘과 용기 주소서. 남들은 자매님을 부러워하지만 불쌍한 우리 자매님! 내 한 생애 희생 바쳐서라도 자매님 건강주시고 만방에
메시지 전파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영웅적으로 일하게 해 주소서. 의지할 곳 없고, 부족하고, 보잘것 없는 이 죄인을 사랑해 주신 주님, 이
한몸 드리오니 받아주시고 율리아 자매님 건강 주시어 성모 성심이 승리하게 하소서. 성모 성심이 승리하는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 빨리 어머니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엄마의 눈물과 피눈물을 닦아드리는 손수건이 될께요. 감사합니다. 주여!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1994년 12월 8일 나주시 과원동 31번지 이을분(막달레나)
T.34-7303
성모님으로부터 얻은 평화
윤 안젤라
결혼 3년째,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런대로 원만한
가정생활을 해가던 어느날 남편은 직장일로 인해 대인관계 속에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어느날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출장갔던 내 남편이
이혼절차가 끝났으니 이혼승낙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게 웬일인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 말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었다. 남편이
가정에서 점점 멀어져감을 느끼긴 했지만 직장일 때문이라고 믿었는데 그이는 이미 다방에 근무하는 다른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남편은 그렇게 악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남편이 미웠으나
아이들의 장래 때문에도 이혼까지는 밀고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편은 다른 여자와 따로 살림을 차렸고 나는 매달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씩 보내주는 생활비로 지내면서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아이들이 비디오 사기를 너무 원했기에 남편에게 말했더니 돈이 없다며
전혀 응하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둘이 사는 집에 가보니 비디오며 여러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너무너무 속이 상하고
괴로웠다. 그러다가 생활비도 줄어지고 나의 무자격과 경제적인 문제까지 나를 덮쳤고 그리하여 7년만에 아이 둘을 남편에게 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홀로 괴로움만 일삼는 삶 속에서 살았다. 오직 신앙에 의탁해 보려고 했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많은 유혹이 스칠땐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내
모습은 타락과 자포자기 상태였지만 그런 중에도 여러 곳의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유혹에서 버틸 수 있는 조그만 힘을 얻었지만
남편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 여자에 대한 미움은 내게서 사라지질 않았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가 꽃동네에서 봉사도 해봤고 일도 해
봤는데 내 마음은 도저히 달랠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본당 신자 몇분과의 대화속에서 나주 성모님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되었고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89년 10월 그들과 함께 나주에 갔었는데 그때 성모님께서는 많은 피눈물을 흘리시고 계셨다. 향기 그윽한 경당안에 발을
디뎠을때 그때의 평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지난날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피정을 다녔지만 깊은 회개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던 나는 처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언제나 네 탓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을 미워했고 둘이 사는 집에 가서 물건들까지 던지고
소동을 일으켰던 나는 나주 성모님께 다니는 동안 내 자신의 소홀함으로 주님께로부터 멀어졌던 남편에게 그 당시 더 잘하지 못한 것과 남편에게
향했던 미움과 분노와 원망이 완전히 바뀌어져 남편이 불쌍하고 그와 함께 살고있는 여자에 대한 동정심이 나를 더 회개에 이르도록 하였다. 성모님의
역사하심과 크나 큰 사랑을 체험한 지금의 안젤라는 마음을 이렇게 다짐했다. 남편과 아이들 장래, 또한 내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주님, 성모님
품에 봉헌드리며 남편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며 오로지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고통을 아름답게 바치며 그 여자의
회개를 위해서도 간구해 본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기쁨과 사랑과 참 평화를 나주 성모님께서는 나에게 주셨기에 이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 부끄러운 나의 체험이지만 나주를 방문한 모든 형제 자매님과 함께 성모님 닮아가길 원하며 내 자신의 성화를 촉구해 주시고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시고 기쁨과 참 평화를 주신 주님께, 성모님께 무한히 감사드리며 오로지 주 하느님께 영광 돌린다. 아멘.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흥문리 29 윤 안젤라
30여군데나
침범해 버린 간디스토마를 성모님의 물로 온전히 치유해 주시고 고질병까지도 치유해주시다
김 빅토리노
저는 김광근의 형 빅토리노입니다. 제 동생이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얼굴이 노랗고 열이 심하여 춥고 더우며 또 설사를 줄줄 하기 때문에 거의 먹지도 못하여 집에서 여러 방법으로 치료하고 약도 20일 넘게
먹었으나 아무 효험이 없이 몸은 황달, 얼굴은 흑달까지 와서 뼈만 앙상하게 되었습니다. 급히 광주의 개인 병원으로 데리고 갔더니 의사의
말이 간암 말기이니 어서 기독교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여 기독교병원으로 갔습니다. 가족 모두는 눈앞이 캄캄했고 본인은 병원 입구에서 쓰러져
버렸습니다. 병원에서 진찰을 하고 병실이 없어 입원을 못하여 병원 응급실에 있었으나 검사 때문에 약도 주지 않고 링겔과 간에 해당한
영양제만 주었습니다. 열로 입술은 갈라지고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토해 배가 심하게 뒤틀리며 열은 40도를 오르내리고 설사를 줄줄 하며 거의 잠도
자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제 처가 토요일 점심 때부터 저녁 무렵까지 있는 동안 물을 반컵 정도 밖에 먹지를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11시 경에 저는 나주 성모님의 물을 가지고 병원으로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12시부터 급식이라 물도 전혀 먹지
못하게 하였는데 동생은 물을 보더니 물을 달라고 하여 한 컵을 다 마셨습니다. 검사 중이라 전혀 치료는 없고 간에 해당된 예방약과 링겔만 맞으며
토요일, 일요일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그날 동생은 3되의 물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점심 때 밥을 가져오자 전에는 거의 먹지도 못했는데 밥을
반공기 먹고 과일, 김밥 등을 먹으며 열도 내리고 배와 설사도 거의 완쾌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온몸의 황달이 거의 없어지고 얼굴은 화색이
돌아왔습니다. 그 이튿날부터는 돼지고기 삼겹살, 낙지, 돈까스, 육개장, 과일 등 모든 음식을 거의 다 먹을 정도였습니다. 결과는
간디스토마였는데 간디스토마를 수술하려면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몸안에 호스를 넣고 충을 빼내는 그 수술이 굉장히 고통스럽다고 고모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동생은 약 30여군데나 충이 간을 먹어버려 구멍이 뚫렸는데 다행히 성모님 물로 인해 충이 다 죽어 몸 밖으로 녹아 나오고 뿌리만
조금 남아 있어 간단한 수술로 끝났습니다. 동생은 성모님의 물로 몸안의 충이 다 죽고 녹아 몸 밖으로 나와 살았다고 그 물 덕분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동생은 덤으로 총각 때부터 고질병으로 머리가 굉장히 많이 아파 '사리돈'을 한꺼번에 3-4알씩 먹고 살다시피 하였으며 가끔
목에서 피가 넘어오곤 하였는데 그것까지 다 치유하여 주셔서 지금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비록 외인이지만 그 물을
통하여 동생을 살려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외인인 동생까지 살려
주시나요. 감사드립니다. 주님과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 받으소서. 아멘.
1995년 5월 10일 전남 나주시 금계동 수강아파트
301호 김 빅토리노 T.(0613)32-0203
성모님을
체험한 뒤 신혼의 기분이라며 행복해 하는 남편
정효남(아녜스)
저는 나주 성모님께 찾아온지 만 1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은혜를 입었지요. 첫째는 우리 막내아들인 3수생 안드레아가 대학에 합격과 동시에 하느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남편도 직장에서 진급하여 높은
위치에 계시며 둘째는 친정 동생이 술 때문에 부모형제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여 나주 성모님 집에 다녀 오게 하였는데, 성모님 집에 다녀온 후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않아 친정 부모형제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성모님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지만 모두 필요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는 남편과의 사랑 나누기 이야기입니다. 우리 부부는 남편의 참을성 없는 과격한 성격 때문에
젊었을 때는 시끄러울 정도로 많이 싸웠고 가족들은 늘 괴로워하며 항상 불안하였으며 두 아들도 아버지가 오늘 좀 늦겠다고 전화를 하면 "와"하고
좋아하였을 정도로 남편은 독재였죠. 한마디로 우리 가정은 평화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약 20년전부터 저는 항상 남편을 위하여 기도
드렸으며, 우리 가정에 평화를 주십사하고 매달렸죠. 믿음이 깊어갈수록 이런 남편을 만나게 하심도 하느님 뜻이란 것을 알면서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약 4-5개월 전에 율리아씨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사랑의 표현과 말을 참
잘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표현과 말에 너무 인색하다고 합니다. 남편과도 죽도록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고 하였을 때
흔하게 듣는 말인데도 그날 따라 성령과 나주 어머님이 제마음을 나누기 캠페인을 벌렸죠. 첫째 우리 부부가 먼저 실천을 해야겠다 싶어서
어느날 술에 만취되어 들어오시는 남편에게 화가나서 신경질을 부리려고 하다가 침을 꿀꺽 한 번 삼키며 참고,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하였죠. 그랬더니 남편은 너무나 좋아서 잠을 설칠 정도였고 눈을 뜨자 술냄새 때문에 또 좀 속이
상했지만 참고 '아침 인사를 해야지.'하고 "나는 우리 영감님을 죽도록 사랑합니다."하면서 인사하니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나주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사랑의 인사나누기를 하면 하느님의 축복이 그 가정에 함께 한다고 하여 나는 남편에게 우리도 기쁘게 인사 나누기를
한다면 기적과 같은 은혜가 비오듯이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이 사랑의 인사 나누기를 해보시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전날밤에 너무나
좋으셨든지 쾌히 승낙을 하셨지요. 아침에 기쁘게 출근하시는 남편의 등뒤가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죠. 점심때에는 회사에 전화를 해서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하고 말하니 "나는 우리 아녜스를 영원히 사랑합니다."하고 응답을 해 같이 웃었죠. 그때부터 저녁에는 빨리 집에
돌아오셨고 정말 오랜만에 부부간에 행복함을 맛보았으며 남편은 우리가 요즘 신혼의 기분이 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어려움이 한
번도 없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성모님, 도와주세요."하며 잠깐 화살 기도를 하고 조금의 자존심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다시
사랑의 인사를 하려고 노력하니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남편이 가끔 제가 잊고 있을 때마다 "인사 안하나?"하고 깨우쳐 주면서
"아침에는 뭐라고 했지?"하며 "아! 아침에는 죽도록 사랑하고, 점심에는 영원히 사랑하고, 저녁에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시며 출장을 갔을
때는 "우리 오늘 것 한꺼번에 다하자."고 하시며 인사말을 읊었죠. 우리 부부가 처음에는 말로만 인사를 나누었는데 지금은 가슴 깊숙한
사랑으로 하게 되었으며 또한 기적 같은 변화는 남편의 어떤 점도 밉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남편도 가끔은 "당신도 장점이 참 많은
여자인데 미처 몰랐다."고 하며 천사같은 여자라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대구직할시 남구 봉덕동 삼양빌라 109동
201호 정효남(아녜스) T.(053)471-3800
성모님이
누구인가? 천주 성부의 딸이시니 천상 왕국의 공주 마마이시며 천주 성령의 짝이시니 중전
마마이시다.
이분도
주님과 성모님께부터 받은 은총에 대한 증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미루어 왔었다. 자칫하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 같아 주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으신 주님과 자애로우신 성모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흠많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는가 하는 것을 얘기 나눔으로써 서로에게 격려도 되고 또 주님과 성모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으로 믿고, 용기를 내었다. 성모님께서는 특히 지난 10년간 나주에서 수많은 놀라운 증표들과 사랑의 메시지들을
주셨지만, 결국 이러한 증표들과 메시지가 지향하는 목적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의 변화라는 열매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사랑의 눈물, 피눈물과
장미향기, 치유 등 수많은 지금까지의 기적들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증표요 선물이라면, 우리의 생활개선과 봉헌은 바로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께 드릴 수 있는 조그마한 사랑의 표시이며 선물일 것이며.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선물들이 무척 보잘 것 없고 흠이 많은 것이지만, 그러나
주님과 성모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으로 믿는다. 내가 나주를 처음 찾아온 것은 1991년 10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출장나와 있던 때였다.
그때부터의 일들을 쓰기전에 그 이전의 일들에 대해 약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본래 나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다. 단지 어릴 때 대구에서 살 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성당과 수도원으로부터 매일 들려오던 맑은 삼종소리, 탱자 나무와 벽돌 담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옆으로 지나다니던 일, 그리고, 길에서 가끔 한국 수녀님들과 서양 수녀님들이 다니는 것을 본 것 정도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천주교에 대한 추억들이다. 아버님은 청소년 복지 사업을 하시는 장로교 목사님이셨고, 형님께서도 지금 미국에서 신학 교수 및 목사님으로
계신다. 천주교를 처음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개신교에 대해 회의를 느껴본 적도 없었고,
또 앞으로 천주교로 개종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개신교에서 내가 가끔 느끼는 신앙상, 윤리상의 의문 점들을 다 시원스럽게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은 각자의 노력과 기도 등으로 키워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또 기존 개신교 안에서의 가르침들에 대해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아직 거의 지식이 없었고, 단지 예배당에서 가끔 들어온 대로 천주교는 잘못 믿고 있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 루터, 칼빈 등은 우리를 천주교의 오류로부터 구해준 위인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약간의 세계사도 배우고, 책, 영화 등을
통해서도 과거의 역사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하였다. 예배당에서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끝내시고 승천하신 후 초대 교회 시대까지는 신앙이 좋았는데 얼마 안 가서 오류와 부패에 빠지게 되었고, 루터시대에 와서 비로소
그리스도교의 참된 모습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때로부터 루터까지는 장장 1,500년이란 오랜 기간인데, 그 기간 동안 참된
그리스도교가 없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암흑의 권세가 당신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지 않으셨던가? 뿐만 아니라 미술
시간에 배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등은 우상 숭배용으로 그림과 조각들을 제작했다는 말인가? 음악 시간에 배운 모짜르트,
슈베르트 등 많은 음악의 거장들이 어째서 미사곡들을 작곡했고,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을까? 또 중학교 때 비엔나 소년 합창단에 관한 영화
'들장미'를 보고 매우 감명을 받았는데, 그 역시 가톨릭 배경의 영화였다. 그 밖에도 로마 시대와 중세기에 관한 영화도 많이 보았고, '사운드
오브 뮤직'등 현대 영화들을 보면서, 가톨릭이 듣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인가 내가 아직 모르는 내용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고등학교 때 '왕 중 왕'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안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께도 상당히 친근감을 느꼈다. 예배당에서
그리도 기피하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사랑과 신뢰로써 의지하시던 당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영화 안에서나마 똑똑히 본 것이다. 그러나,
신구교의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의문은 태산 같았고, 또 나의 사고 방식은 18년 동안의 생활 환경과
교육을 통하여 개신교적 틀 안에 깊이 박혀 있었다. 결국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식으로 천주교와 부닥쳐서 그 속을 파헤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주교로 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서도 천주교의 내용을 어느 정도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천주교가 옳으냐, 옳지 않으냐."하는 문제를 뒤로 미루고서라도
천주교는 종교 개혁 때까지 1,500년동안 서양 역사를 이끌어온 종교였다. 그런데, 거기에 관해서 배우기를 기피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주일마다 아침에 성당에 가서 맨 뒤에 앉아 미사 구경을 하고, 그 다음에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보고 오곤 했으며, 또 천주교 서점을 찾아 가서 교리책, 성인전,...등 천주교 서적들을 사다가 읽기 시작했다. 성인들
중에서도 성 프란치스꼬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일이 있었으므로 그 분의 전기를 맨 처음 집어들었으며, 그 다음에는 예배당에서 생전 듣지도 못하던
성인들에 대해서 읽어 보았다. 소화 데레사 자서전, 젬마 갈가니, 도미니꼬 사비오, 마리아 고레띠, 요한 비안네, 돈 보스꼬, 비오 10세,
이냐시오 로욜라, 방지거 사베리오, 대 데레사, 분도 원장, 분도 라브르,... 등 성인들의 전기였으며, 그 밖에 루르드와 파티마에 대한 책들과
"교부들의 신앙", 윤형중 신부님께서 쓰신 "천주교 교리 상설"등 교리에 대한 책들도 읽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내가 받은 영향은
마치 지진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들을 통하여, 지금까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놀라운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 천주교에 대해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은 참 내용에 대해 깜깜하게 모르기 때문이며, 안다고 하더라도 왜곡된 남의 얘기들을 들어서 판단이
흐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점점 확실해졌다. 몇 번은, 목사님들과 신부님들을 찾아가서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신부님들은 아직 남아있던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 명확하고 시원스런 설명을 해 주셨다. 그리하여 천주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오해와 의문을 푸는데 약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들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예비자 교리반에 다니고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성세를 받았다.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세워주신 교회에
속하게 되었고, 그 안의 성사들과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틀릴 수 없는 진리들을 알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느낀 명확한 사실은 '교회란 하느님이시며 인간으로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세워주신 것이며, 따라서 이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수 인도하시고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교회를 허물거나 갈라낼 수도 없고, 인간의 힘으로
그러한 교회를 새로 세울 수도 없다.'라는 것이다. 또 교회는 단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교회를 통하여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현존과 활동을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하나로 일치된 그리고,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존재하고 활동하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 물론 교회의 구성원들은 아직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부족한 인간들이므로 잘못이 있을 수 있다. 마치 추수 전의 밀밭에 잡초가 있음과도 같다. 그러나, 잡초가 있다고 해서 밀밭이 밀밭이 아닐 수
없음과 같이, 구성원들의 부족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교회이기를 그치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12종도들도 특히 성신 강림
이전까지는 부족함이 많았으며 그 중의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까지 하지 않았던가. 부족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안에서 그 중심과 머리는
예수님이시며, 그 생명력과 성화의 힘은 성령이시다. 이 교회를 통하여, 특히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성사들과 사제직을 통하여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들의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하여 씻어주시고 성체 성사를 통하여 영혼을 양육하여 주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성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성인 성녀들을 배출했던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시성된 성인만도 수천 명에 이르고 있다. 그 어느 인간이
감히 이러한 하느님께서 직접 세워주신 교회를 마다하고 더 나은 교회를 세우겠다고 나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또 하나의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수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성교회 밖에 있으니,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고, 사랑과 인내와
기도로써 그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도와줄 수 밖에 없다. 교회 서적들과 씨름하던 1년 반 동안에 학교 성적은 좀 떨어졌으며, 가족들은 다소
염려를 하셨으나 비교적 잘 이해해 주시는 편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부모님께 원망과 비판적인 언급을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 때 나는
천주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 너무 기뻐서 신학교에 들어갈 생각도 했으나, 신학교에 들어가려면 영세 받은 지 3년이 지나야 된다고 했고, 또
아버님께서 병석에 누우셔서 어머님께서 혼자 간호를 하고 계셨으며, 형님, 누님은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또 평신도로서도 성화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신부님의 말씀도 계시고 하여, 신학교 대신 서강 대학에 들어가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 당시 서강 대학은 아직 조그마한 규모의
학교로서 교수님들, 특히 미국 예수회 교수 신부님들과 학생들 사이가 매우 가까웠고, 같이 피정도 하고 등산도 같이 다니며, 정말 꿈같은
시절이었다. 1970년초 나의 군 복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아버님께서는 병석에 계신지 7년째 되는 때에 방지거라는 본명으로 종부성사를 받으시고
세상을 떠나셨으며, 1972년에 어머님이 먼저 도미하시고 나도 곧 이어 도미하여 노트르담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일리노이 주에서 대학교수로 몇 년 지냈으며, 그 기간 동안 어머님께서 1978년에 결혼한 아내와 함께 장로교에서 개종하여 1980년 시카고의
한국인 성당에서 성세를 받으셨다. 나로서는 기쁘고 감사한 날이었다. 1983년에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오레곤주의 은행에 들어가서 경제연구 및
무역 업무를 보았으며, 1987년에 다른 회사에 들어가 한국 무역부를 새로 만들어 새 사업들을 개발하는 일에 몇 년간 종사하였다. 새 사업들을
개발하는 것이 애로가 많은 일이나 좋은 경험도 되었다. 1991년 초에는 완전히 독립하여, 작은 가족 소유의 회사를 세우고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 해 8월의 독일 출장 중 불란서의 루르드를 처음 순례 방문하는 감명스런 일이 있었다. 그 때 방학 중이던 11살 난 아들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그 해 10월에는 비지네스차 서울에 나갈 일이 있었다. 나주에 대해서는 비디오와 신문을 통하여 약간 알고 있었으므로,
주말을 이용하여 잠시 내려가서 성모님 상을 잠시라도 사진이나 몇 장 찍어올 생각을 했다. 그런데, 주말에는 고속도로가 복잡하여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데, 여행사를 몇 군데 다녀보아도 토요일 차표가 매진이라고 했다. 그래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나주 행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거래 회사
사장과 토요일에 민속촌을 다녀오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날 무역 박람회에서 쫓아다니느라고 피곤했기 때문에 누님 집에서 초저녁부터 잠을 청하며
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력한 느낌이 마음 속에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주 가는 일을 왜 포기하려고 하는가? 기차표가 없으면
다른 방법, 심지어는 뛰어서라도 가야 될 것 아닌가? 하는 열망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속촌 행은 취소하고, 토요일 오전 강남의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로 내려가는데, 교통사정이 예상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호남 지방에의 여행은 처음이었으므로, 산천과 도시 등 모든 것을
유심히 보았다. 버스가 나주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반 경이었다. 나주에서 성모님 상 모신 곳이 어딘지 몰랐으므로 우선 나주 성당을
찾아가서 물었는데, 그 곳이 별로 멀지 않다고 하였다. 골목길을 걸어가서 다리 건너 푸른 기와집이라고 하여 찾아갔는데, 엉뚱한 푸른 기와집 앞에
가서 서성대느라고 근 1시간을 소비하였다. 결국 경당, 즉 성모님 집을 바로 찾았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경당
안에 들어갔는데,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기도 드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성모님 상 앞으로 다가갔는데, 성모님 왼쪽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진을
여러장 찍고 앉아서 기도도 드리고 사무실에 들어가서 메시지 책자들과 카세트 등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날이 10월 19일
성모님 피눈물 흘리신 지 5주년 되는 날이어서 철야기도가 있다고 했다. 기도회에 참석하면, 여관을 구하지 않아도 되겠기에 그 점도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율리아 자매님이 경당 안으로 오셨는데,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맞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사를 나누었다.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매우 친절하고 사랑에 찬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율리아씨가 자주 세상의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받으신다는 것을 듣고 왔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곧 다들 본당의 미사에 간다기에 나도 가서 참석하고 왔는데, 다시
경당에 들어올 때 처음으로 강한 향기를 맡았다. 어디서 아주 좋은 냄새가 이렇게 나는가? 처음에는 무심코 맡았다. 그러나, 곧 성인전에서 장미
향기에 대해 읽은 것이 기억났고, '바로 이것이 그것이구나!'하고 짐작했다. 기도회가 계속되는 밤새껏 경당은 향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다음날
서울에 올라와서도 내가 입은 양복에서 계속 향기가 났다. 경당 안의 향기가 어찌나 강한지 처음에는 '혹시 누가 파이프를 통해서 향기를 뿜어넣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나서 두리번거리기까지 하였다. 경당 안을 꽉 채우고 앉은 교우들은 이미 향기를 여러 번 맡아본 이들 같아서 놀라워
하는 기색 보다는 그저 행복감에 차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장미향기는 성모님의 현존을 뜻하며, 성모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우정을
뜻한다는데, 그때는 그것을 잘 몰랐다. 기도회 도중 쉬는 시간에 경당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율리아씨의 부군 율리오씨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성모님께서 루르드, 파티마 등에도 오셨는데, 이렇게 한국에도 찾아오시어 메시지와 증표들을 주신다는데 대해 무척 기쁘게 느꼈고,
거기 와 있는 이들도 모두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주님께서 우리들의 순교 선열들을 보셨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나주에 대해 이미 기본적인 내용은 꽤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기도회 중
율리아 자매님의 증언은 매우 깊고 힘이 있었으며, 다른 이들의 증언도 좋았다. 준비되어 있는 출판물 중 영어로 된 소책자가 있었는데 내용이 좀
빈약한 것 같아서, 율리오씨께 미국에 돌아가면 영어로 나주 소개 책자를 마련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른 아침이 되어 기도회도 끝나고,
율리아 자매에게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떠나려고 했는데, 좀 기다리라고 하셨다. 여러 교우들과의 인사로 너무 지체되는 것 같아서 자매님께 또
다가가서 작별인사를 드리려니까 "사흘동안 더 있다가 가시라는대요."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뜻밖이라 깜짝 놀라서 "누가요?"하고
물으니까, 왜 못 알아듣느냐는 듯이 "그분이요."라고 하셨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화요일 저녁 비행기로
미국에 들어가야 하는데, 일, 월, 화, 꼭 사흘 밖에 안남았는데, 월요일과 화요일에 서울서 여러 회사 사람들과 만날 약속이 있었다. 이
약속들을 다 포기하고 사흘간 꼬박 나주에 있으라는 부탁이시다. 나는 안된다고 했다. "안 되면 할 수 없지요."라고 율리아 자매가 대답하셨다.
그러나, 나는 미국 가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파하겠다고 했다. 율리아 자매는 더 기다리라고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한참 후에 전갈이 와서
율리아씨 댁으로 들어가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월하는 경험들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또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또 그 후에도 자주
나는 율리아씨를 통한 그 성모님의 부탁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성모님께서 나의 바쁜 일정을 모르셨을 리가 없는데 왜 무리한 부탁을 하셨을까?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상담한 것들은 성과가 없는 것들 뿐이었다.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요청을 감히 거절하고 내 볼일을 보겠다고 고집한 것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주에는 잠깐 가보려고 갔던 것 뿐이었는데 성모님께서 당신을 도와달라고 부르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미국에 돌아와서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나주에 갔다 온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하여 메시지들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무역사업을 하면서 메시지 전파를 열심히 하려고 생각했다. 메시지 전파를 위해 드는
자금은 회사 쪽에서 계속 조달해 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메시지 책을 내고 기타 출판물을 내고 하는데 작으나마 개인회사의 체계가 잡혀
있었기에 출발시킬 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곧 성모님 메시지 사업을 위하여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여 정부와 교회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미국 신부님을 지도 신부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1992년 중에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이 출판되었으며,
곧이어 신문들과 비디오들이 계속 출판되었다. 메시지 책 출판 전에 번역문을 율리아씨의 지도 신부님인 파 레몬드 신부님께 허가해 주십사 하고
우편으로 보내드렸을 때 그 우편물에서 강한 장미향기가 우체국에서부터 풍겼다고 신부님께서 기뻐하시며 전화를 걸어 주시기도 하였다. 나주의
율리아씨, 율리오씨, 한국의 여러 신부님께서도 눈물겹도록 친절하게 지지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다. 1993년 가을과 1994년 가을에는 율리아씨가
율리오씨와 함께 도미 하셔서 여러 도시의 성당에서 메시지 전달을 하셨다. 많은 미국 신부님들이 오셔서 공동 집전으로 미사를 드려주시고 신자들이
성당 안을 꽉꽉 메우는 것을 보고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메시지 전달을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카나다의 토론토에서는 주교님께서도
집회가 끝날 무렵 나와 주셨고, 또 다른 주교의 누이동생의 암이 치유되는 기적도 일어났다. 이 주교님들께서는 앞으로 나주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셨다. 하와이에서는 율리아 자매의 입 안에서 성체가 성혈로 변하는 기적도 일어났으며, 그 밖의 수많은 이들이 회개와 육신치유의 은총을 받았다.
오레곤의 포틀랜드에서는 낙태를 하고 19년간이나 성교회를 떠나있던 부인이 율리아씨 증언을 듣고 깊이 회개하여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이와
비슷한 일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필라델피아에서는 태아의 뇌속에 종양이 생겼는데 율리아 자매가 집회 중에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린 후 며칠
지나서 다시 진단을 받았더니 깨끗이 종양이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태아도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셔서 병을 고쳐 주시니 이는 또한 낙태를
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성모님의 호소이시기도 하였다. 그 동안 메시지 전파를 위한 출판물들을 제작하고 전미주 및 유럽, 호주 및 아시아,
아프리카의 영어 사용국들에 배부하는 일이 계속되어 오고 있는데 출판물들의 일부는 가톨릭서점과 우편을 통하여 판매되고 일부는 무료로 배부된다.
특히 세계의 가난한 많은 나라들에 앞으로 더 많은 출판물을 보낼 수 있어야겠다. 자료를 받은 이들의 반응은 지금까지 매우 좋고 강한 편이다.
받은 책이나 신문, 사진 등에서 장미 향기가 난다는 일도 종종 있으며, 이보다 더 감명스러운 일들은 메시지와 신문, 비디오 등에 접하고는
성모님의 깊은 사랑과 부르심을 느끼고 주위 사람들에게 또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나주 성모님 메시지와 비디오를 보고 약
20년간의 가정불화를 해소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목하며 함께 기도하는 가정을 이루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자주 신부님들, 수도자들, 그리고 간혹
주교님들께서 격려해 주시며 연락을 주신 때에는 더욱 기쁘게 생각된다. 일의 양이 증가됨에 따라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하던 사업은 점점
소홀히 하게 되었고 지금은 전적으로 메시지 전파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데 그래도 매일 시간이 모자란다. 따라서 생활은 전보다 어려워졌으나
가족들이 잘 이해해 주고 협조해 주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주에 처음 갔을 때 성모님께서 남은 사흘을 다 바치라고
요청을 하신 뜻을 알 것 같다. 그 뜻은 그 때 꼭 나주에 사흘 더 있다 가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생활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하신 뜻으로 알아듣고
있다. 사실 특히 초기에는 때때로 '내가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러나 어차피 성모님께서 부르셔서 하는
일이니 일의 방향이나 성패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성모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힘든다고 이 일을 포기하거나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성모님이 누구이신가? 천주성부의 거룩한 딸이시니 천상 왕국의 공주마마이시며 천주성자의 평생 동정이신 모친이시니 대비마마시며
천주성령의 지극히 조촐한 짝이시니 중전마마이시다. 일개 지상의 왕국에 있는 공주나 중전이나 대비마마의 명을 받드는 것이 지고한 임무일진데 하물며
하늘왕국에 대해서랴. 그리고, 성모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오로지 천주 성삼위의 뜻을 받들어 인류를 하느님께로 이끌고 교회를 활성화 하며
우리 각자를 사랑과 겸손한 봉헌된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아직 이기심과 불신과 소심 등으로 많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성모님의 일을 하도록 초대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들 중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숨어 사는 한 할머니가 정성과 사랑으로 바치시는 묵주신공 한 번이 다른 그 어느 활동 보다도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1995년 6월 15일 미국 오레곤주 그레샴시 이분도
성모님,
이제 눈물은 당신 찬미를 위해 남겨두고 싶습니다.
전금자(젤뚜르다)
찬미 예수 마리아 저는 전주에 사는 전금자(젤뚜르따)입니다.
남편과 제가 받은 많은 은혜를 성모님께 감사의 사연으로 바칩니다. 저희는 영세한 지가 꽤 되었지만 열심히 살지 않고 신앙과 세속을 반반씩
타협해서 살았었습니다. 성모님께도 다녀와서 눈물, 피눈물도 보았지만 잊고서 말이예요. 그러다 작년 4월에 남편이 임파암에
걸렸습니다. "신문과 잡지에서나 보던 것이 나에게도 닥쳤구나!"하고 눈 앞이 캄캄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주에 다녀왔고 6개월만에 오른쪽
코에 생겼던 암이 없어졌는데도 마음이 불안하고 눈물이 자꾸만 나왔습니다. 감사기도를 하면서 지냈지만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했었는데 1년이
지난 금년 4월에 다시 왼쪽 코에 암이 생겼습니다. 너무나 절망 상태여서 기도도 잘 되지 않았으나 항암 치료를 하면서 다시 나주를 다니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가 92년 6월 30일 성모님께서 눈물 흘리신지 7주년이 되는 날이었죠. 정말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암제 치료
주사 맞는 날과 겹쳐도 나주 성모님께 철야기도를 먼저 오고 약과 주사를 뒤로 미루면서 기도하였지만 진전 (호전)이 안보여 저도 실망하였고 남편도
삶을 정리하면서 성모님께는 계속 다니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귀까지 이상이 오자, "주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 당신의 뜻대로 살려고
뒤늦게 나마 노력을 했는데 한번만 만져 주시면 나을 것 같은데 왜 안 만져 주십니까? 당신 뜻대로 하시되, 어긋나지 않는다면 저희 가정을 지켜
주십시요."라고 울며 남편과 기도를 하다가 "성모님, 이제 눈물은 당신 찬미를 위해 남겨두고 싶습니다."하고 맡기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었나?'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항암제 치료를 6번 했으나, 이제는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치료를
받으면 두가지 부작용이 있다(1. 침이 평생 마른다, 2.가르쳐 주지 않음)고 해서 다시 서울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차 속에서 성모님께서 함께 하심이 느껴졌습니다. 진료를 하는데 바로 앞 환자가 남편과 동일한 증세였는데 시티
촬영 결과 절망적 상태라고 하여 불안했지만 주님과 성모님께 의지하며 남편의 결과를 보니 '염증 같다.'고 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다고 하자
조직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검사일자를 가까이 잡아 주시어 다시 일주일을 지나고 병원에 가보니 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2년 12월 6일 전주에서 전금자(젤뚜르다)
드림
성모님
메시지 테잎을 통하여 냉담을 풀게 하시고...
최 말가리다
자비의 눈물로 우리를 부르시는 나주 성모님! 1995. 3.
22. 저는 결혼 20주년을 맞았습니다. 기념의 날 우리 부부는 화살기도를 통해 나주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주 성모님이 굉장히
뵙고 싶어 메시지 테이프를 틀어놓고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본당 한 자매님이 서울 병원에 다녀 오시면서 제 가게에 들르셨습니다. 그 자매님의
얼굴색은 아주 까맣고 많이 아파 보였습니다. 한참동안 메시지를 듣고 있던 자매님이 하시는 말씀이 "가슴이 콱 막혔던게 확 풀리는 것
같아요. 아이 시원해!"하며 제게 저런 좋은 말씀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주 성모님 메시지라고 말해드렸고
나주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분이 나주를 잘 모르시기에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3월 25일 새벽 2시에
그 환자와 더불어 두 분의 자매님과 함께 나주에 갔었지요. 나주에 도착하여 경당안에 들어서자 장미 향기가 코를 찌를 듯이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픈 환자분을 모시고 성모님 앞으로 나가 자매님 손을 잡고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환자분 (카타리나)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저는 테이프 목소리의 주인공이 율리아 자매님이라고 카타리나 자매님께 말씀드렸는데 율리아 자매님은
아침 8시가 다 되어도 고통 중이어서 나오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카타리나 자매님을 경당안에 있는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상을 안고 있는
사진 앞으로 가서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고통 중이기 때문에 못 나오시니까 우리 사진만 보고 갑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사진속의 율리아 자매님 입에서 막 태어난 아주 작은 거미가 나왔습니다. 그 작은 거미는 한바퀴 쭉 돌고 있었고, 그리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순간 거미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고 다만 율리아 자매님이 작은 영혼이란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린 율리아 자매님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아주 서운한 마음으로 마지막 마침 기도를 성모님께 드리고 있는데 카타리나 자매님이 성모상 앞으로
나가 또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그리고 나서 우린 11시쯤 나주에서 출발하여 선채로 계속해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도 카타리나 자매님은 다리가 아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그 자매님께서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이고 아프지 않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집에와서 계속 메시지 테이프를 들었는데 몸과 마음이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3월 28일 아침에 나주 성모님께서
그 자매님을 영적, 육적으로 치유시켜 주시어 냉담을 풀게 하여 주시고 레지오에까지 입단하게 해주셨기에 나주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왜
나주에서 율리아 자매님 입에서 거미가 나왔을까?' 하고 취침 묵상을 하고 있는 중에 언젠가 TV에서 교육방송 프로에서 거미에 대해서 자세하게 본
적이 있었는데 아기 거미는 어미 거미의 몸체를 다 먹고 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 입에서 나온 거미가
얼마나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를 알게 해 주었는지.... 저는 그때 그것을 알고 나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꽤 길게 울었습니다. 우리가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지 못했던 시간에 율리아 자매님은 주님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한 생명이 부활했음을 거미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카타리나 자매님은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어둡던 영혼과 육신이 부활을 맞았습니다. 고통 중에 계시던 율리아 자매님의 모습은 한 거미를 탄생시키기 위한 어미 거미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고통스런 모습을 의미하고 있음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나주에서 율리아 자매님께서
고통 중이라 그분을 직접 뵙지 못했지만 카타리나 자매님을 통하여 육적 영적으로 성모님이 직접 치유해 주셨음을 알았으며 성모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성모님의 통로로 생각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모든 영광을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통하여 주 예수님께
드립니다.
1995년 4월 1일 안성에서 최 말가리다
T.(0334)675-9441
두 봉지의 약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은 치유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천 중안 본당 유베드로입니다.
저는 확장성 심장, 심근 경색증 이라는 일반인들에게도 생소한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큰 병원마다 다 다녀 보았지만 심장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심장이식
수술이 잘 되는 줄 알고 있었으나 사실과는 달리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망막한 상황에서 걷기조차 힘든 저는 집사람과
70이 넘으신 처형에게 몸을 부축 받으며 나주에 오게 되었습니다.
철야기도 내내 제대로 앉을 수도 다리를 뻗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기도회 3부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되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은 그냥 손만 잡아 주고 가시더군요. 인천에서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이대로 떠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는 한 봉지에 이 만원씩이나 한약을 먹고 있었기에
아내가 제 시간에 저에게 약을 먹일 생각으로 준비해온 두 봉지의 약이 모두 감쪽같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걱정하는 한편 그
돈이 아까워 안타까워하더군요. 그래서 저 때문에 모두들 마음을 졸이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인천에 도착 할 무렵 아프던 곳이
모두 없어져 버린 거예요. "어! 이상하다" 그때서야 아내는 "나주 성모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치유시켜 주시고자 더 이상 약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예요"하더군요. 정말 아내의 말대로 나주 성모님께서는 저를 완전히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시고 성모님 찬미
받으소서.
1995년 4월 인천교구 주안본당
유베드로 Tel. 032-439-2950
백배로 증가된 성체신심
오전 10시에 미사에 참례하고 성모님 집에 와보니 루비노 회장님이
제주 주교님과 광주교구 안당신부님을 모시고 성모님상 앞으로 가서 제대의 작은 촛불들을 치우고 성모님상 앞의 유리를 열고 설명하고 계셨다.
조금후에 율리아 자매님이 경당에 나왔다. 나는 왼쪽 옆의 중간지점
벽에 앉아 성모님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교님과 신부님, 율리아 자매님과 루비노 회장님은 성모님상 앞에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두분은 의자에
앉으시고 율리아 자매님과 루비노 회장님은 무릎을 꿇고 성모님에 관한 이야기와 성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계셨다. 나는 성모님상 앞 제대 바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수첩과 볼펜을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고 내옆에는 안당신부님과 함께 온 자매가 앉아있었다. 말소리가 작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율리아 자매님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안당 신부님이 함께온 자매님한테 몇시에 출발하느냐고 물으시니 그 자매는
12시에 간다고 하였고, 율리아 자매님이 십자가쪽을 향하여 바라보고 계실 때 안당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에게 기도를 청하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아 자매님은 두분 보고 앉으시라고 하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율리아 자매님은 '아!' 하고 소리 지르며
성모님상쪽으로 손을 뻗쳤다. 그 순간 주교님이 먼저 일어나셨고 신부님도 일어나셨다. 루비노 회장님은 큰소리로 "오 성체가 내려왔다. 성체!"
하고 소리 질렀으며 주교님인지 신부님인지 "오! 살아계신 예수님" 이라고 하셨다. 나는 즉시 수첩에 기록했다. 나는 너무나 놀랬다. 어떻게 저런
작은 성체가 '쿵' 하는 큰소리를 내면서 내려오시는지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는 즉시 시간을 보니 11시 40분이었다. 나는 제단 위로 올라가
성체를 보았다.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체를 처음으로 보는 영광을 얻었다. 나는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이 나왔고 마치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보는 것 같은 어떤 이상한 그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꽉 메워 통곡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울면서 마음으로 당신이 보고 싶다고
고백하며 울었다. "오! 나의 예수님, 오! 나의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진정 이 목숨 다 바쳐 사랑합니다." 하며 기도했는데 함께 목격한
10여명의 신자들도 대부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후 본당 신부님이 오셔서 사무실에서 제주 주교님과 율리아 자매 모두가 모여 대화를
나누시다가 사무실에서 나오시면서 안당 신부님이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야"하셨고 본당신부님은 주교님께 "교황님도 보셨어요"를 두 번이나
말씀하셨으며 성체를 본당으로 모셔갔다.
그 뒤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체를 직접 목격했기에 성체에 대한
신심이 백배로 증가 되었으며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체가 너무나 보고싶어 안타까운 내 마음은 슬프기까지
했으나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봉헌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1997. 6. 12 충남 당진군 석문면 삼봉
1리. Tel. 0457) 53-0019 한 분민 임마꿀라따
최선 엘리사벳 자매의 증언
+ 찬미 예수
저는 어느날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접하게 되어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책을 읽어보니 제가 그동안 궁금해 했던 내용과 의문점이었던 모든 것이 이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셈이지요.
저는 메시지를 전해야 된다는 강한 느낌을 받고 Mary's Touych By Mail 이라는 소식통을 통하여 메시지가 담긴 잡지를 구입하여
가까운 미국 성당에 배포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신부님도 계셨습니다. 비디오 테이프도 구입하여 가까운 천주교인들과 서로
돌려가면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전해 듣고 또한 그 기적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뒤 유언비어들이
떠돌았지만 그런 유언비어들이 제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메시지 책을 읽으면서 저는 진짜라고 믿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모든 잡음들이
없어지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이 아닌 외국인들이 더욱 열심히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전하며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점입니다.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자기 고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지만 타
고장에서는 환영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주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율리아 자매님이 L.A 에 오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자매님께서 오실 장소와 시간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97년 11월
8일 L.A Long Beach에 있는 큰 강당을 빌려서 대회를 치렀는데 L.A 외에도 미국 여러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곳에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성모님을 대신하여 율리아 자매님의 애타는 목소리로 널리 퍼졌습니다. 전에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열성적으로 전하지 못하였지만 이제부터라도 열성으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희망사항이 있다면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물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빠른 시일내에 나주도 방문하고 싶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1997년 11월 8일 최선 엘리사벳 Sun
Kladden 17611 Wind Ward Ter, Bellflower, CA 90706, U. S. A
괌, 사이판에서 나주 성모님을 전할 때
997년 1월 10일부터 19일까지 괌/사이판의 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초청을 받아 윤율리아 자매님과 한국의 평신도 몇 명이 함께 사이판의 주교좌 성당인 카멜 대성당에서 개최되는 성모 대회에 참석하였다.
괌은 인구 약10만 명에 한국 교민은 8500여명이 살고 있는 카톨릭 국가로써 성 프란시스 성당, 산 디마스 성당, 성 안토니 성당, 산타
바바라 성당에서 율리아 자매가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전달을 하였는데 평일에는 대부분 30-40여명 밖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성당에 매번 약
2000여명 이상 성당에 모였고 성 프란시스 성당에서는 율리아 자매님께서 자비의 빛이 성당 안으로 내려진다고 하였을 때 실제로 그 빛이 사진에
촬영되었다.
산디마스 성당에서는 미사 집전 도중(1월12일)에 거양성체 때에
하늘에서 성체 모습으로 빛이 내려왔고 제대 위에는 한국에서 모시고 간 나주 성모님의 성상이 있었는데 그 성상에서 빛이 비추어졌고 자매님께서
메시지 전달 도중에 참석한 신자들을 위한 낙태 보속 고통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증거로써 내적 외적으로
많은 치유를 주셨지만 그중 한 자매의 치유의 기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여인은 다리가 뒤틀리어 14년간을 잘 걷지 못하여서 휠체어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가난하여 휠체어를 구입할 수 없었고, 목발로만 의지하며 부축을 받아 힘겹게 걸어왔다. 또한 7년
동안이나 목에 종양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였고, 신장이 하나밖에 없는 상태로서 당뇨병을 포함한 많은 합병증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치유를 통하여 그
여인은 나주 성모님께 너무나 감사하여 증거를 하게 되었는데 증거를 한 이후로 완치되어 정상적으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목격한 신부님들과
많은 신자들은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에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또한 사이판의 주교좌 성당인 카멜 대성당에서 제1회 사이판
성모대회(1월18일)를 개최하였고 강사로서는 토마스루코스키(미국), 프란시스 수신부님(말레지아), 토마스페러리(하와이), 윤율리아(한국),
찬미자 데이빗파크(아일랜드)의 5명이 초청강연을 하였다.
한국의 율리아 자매님의 메시지 전달 내용중 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가는 메시지 말씀을 전달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교님이 집전하시는 미사 중 영성체
후에 탈혼 상태에 들어가면서 환시를 보게되었는데 그때 환시중에 마귀들이 나타나서 율리아 자매님을 괴롭혔으나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가슴에서 빛을 비추어 마귀들을 물리치시고 메시지를 주셨는데 토마스 가마초 주교님이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올라 타셨음을 알려 주셨고, 틀림없이
천상에 올라 월계관을 받게 되리라고 하셨다. 또한 철사 줄처럼 얽힌 곳에 수많은 자물통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천사들이 내려와 자물통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그 중에 몇 개의 자물통은 잠긴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환시 중에 빛을 내려주실 때 오상의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그 흔적이 나타났다.
그런 후, 주교님과 그곳에 참석한 모든 신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마리아의 구원방주를 우리말로 노래하면서 성모님을 통한 구원 방주에 올라 탔음을 기뻐들 하였다.
그 다음날(1월19일) 카멜 대성당에서 9시 주일미사 때에 율리아
자매님께서 병원이나 가정에서 참석하지 못한 환자들과 가족들을 위하여 위로하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사이판
전역에 TV로 생방송 되는 미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이판의 성모대회가 대성황리에 마쳐져 그곳에 사는 현지 주민은 물론 한국 교민들에게도 큰
위안과 긍지를 심어 주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이 은총을 저 혼자 간직하기에 너무나 아쉬워 글로써 여러분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나주 성모님 사랑해요.......
1997년 2월 1일 첫토요일에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2동 82-4호 권영준(세바스티아노) Tel. 032)34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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