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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병이 나에게!
그러나 성모님께 의탁하는 동안 뚫린 구멍은 메꾸어졌다. 

진을수(안젤로)
 

찬미 예수
저는 나주 천주교회에 다니는 진 안젤로라고 합니다.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미약한 글이지만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건강하게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직장 생활의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받으며 현실에만 온 힘을 쓰던 중 가슴이 답답하고 통증을 자주 느끼게 되었는데 왼쪽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습니다. 통증은 있었지만 '별일 없겠지'하고 그냥 지나치게 되었는데 어느날 심한 통증 때문에 바르게 서 있지도, 엎드리지도, 앉지도 못했습니다. 너무나 큰 통증이었기에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 극심한 통증과 아픔이 가라앉지 않아서 저는 다음날 병원을 찾아가 X-Ray를 찍어 본 결과 의사 말이 입원을 하고 직장생활도 당장 휴가 처리하고 쉬라고만 했습니다. 왼쪽 가슴 (늑막 부위) 윗부분에 두 개의 구멍이 생겨 당장이라도 입원해서 상황을 보고 좋아지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병이 악화되면 늑막 부위의 윗부분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는데 내부에서 물방울 만한게 하나씩 터질 때마다 통증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심하여 물방울 같은게 터지다 보면 혈관에 꼬임이 생겨 생명까지 위독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별로 아프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런 병이 나에게 있다니!' 하며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차를 타고 제 옆자리에 앉아서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하던 남편이 이렇게까지 되자 아내는 자기 잘못이라고 너무나 슬프게 울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이성을 차리고 오로지 주님과 성모님께 의탁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검사 받고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나주 성모님 집 첫 토요일 철야기도회가 있었는데 저희 부부는 오로지 주님과 성모님께 봉헌하며 철야기도를 온전히 바쳤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제껏 잘못 살아온 생활을 회개하며 눈물로써 주님께, 성모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첫 토요일이 지나고 3일 후 저는 재검사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중간검사 결과를 보시더니 늑막 윗부분에 있던 구멍이 다 메꾸어졌다고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런 증상은 몇 달을 병원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는데 말한 지 며칠이 안되어 완쾌가 되어 버린 것에 놀라울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너무나 기뻐 주님과 성모님께 눈물로 감사드렸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과 성모님께....

 

1995년 4월
나주시 송월동 1087-13번지
진을수(안젤로)

 

 

이렇게 내 인생은 끝나는 건가! 젊은 나이에 죽어야 되다니 

김기준(니꼴라오)
 

찬미 예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전주교구 동산 본당 김기준 니꼴라오 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받은 어머니의 은총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몇 해 전에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신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또 직접 보고 왔다는 소리를 듣고도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핀잔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엄청난 죄를 지은거죠. "무슨 이야기야?" "무슨 성모상에서 피눈물을 흘린다니 별 일들이야." "믿기지도 않는 소릴 하고 있어. 뭐 병자들이 병이 낫고, 마술에서나 볼 수 있는 초 없는 촛대에서 불이 켜진다고?" 이런식으로 저는 나주 성모님을 빈정댔습니다. 저의 생활은 그저 일요일이 되면 성당에 다녀와서 애들과 함께 별미를 찾아 시식하러 다니고, 또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 놀이 있지요? 죽어도 "고"하는 고스톱, 밤이 새도록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티격 태격.... 아내가 속이 상하든 말든, 가정에 평화가 깨지든 말든 나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저의 고스톱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감기 몸살처럼 느꼈는데, 나중에는 두통과 코막힘. 두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병원 다니기를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한달, 두달 저의 아픔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 하루 하루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이비인후과 선생님은 소견서를 써 주며 큰 병원으로 가서 자세히 정밀검사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전주 예수병원에 조직검사를 의뢰했습니다. 검사결과 조직에 이상이 있으니 재검사를 해야겠다는 박사님 말씀에 따라 재검사를 했습니다. 설마 하면서 저의 마음은 몹시도 불안했습니다.
1주일 후에 2차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저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를 부르셨습니다. 진찰실을 나온 아내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감추려고 애쓰는 얼굴!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는 아찔했습니다. 1차 검사 때에 종양같다는 박사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이 깜깜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 아내의 얼굴이 차례로 제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은 끝나는 건가!'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이 젊은 나이에 죽어야 된다니....
이 때는 정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젊은 날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허황된 삶속에 내 인생은 벌써 종착역에 도달한 거구나.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보니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순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흘러가는 구름도 예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저의 두 눈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잡초는 잡초대로, 꽃은 꽃대로 공중의 새는 새 나름대로 그 삶 자체가 아름답고 고귀해 보였습니다. 왜 진작 느끼지 못했을까. 안타깝고 아쉬웠습니다. 삶을 정리해야 하는 이 시간에 와서야 느끼는 이 감정, 이 느낌, 서서히 삶을 포기하는 저에게 아내는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가슴은 또 저며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하다니 하느님께선 저와는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포기하고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아빠의 모습과 육성을 남겨주자 하여 무비 카메라를 장만하여 저의 모습과 육성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자매님이 나주 성모님의 근황을 설명하며 찾아 뵙기를 저에게 권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불치병인 임파암. 이런 저에게 나주 성모님께서 치유의 은총이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고는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맘에 들게 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저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언젠가 지나쳐 버린 성모님의 피눈물을 다시금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달렸습니다. 어쩝니까? 죽음의 벼랑에 선 저로서는 매달릴 수 밖에.... 어머님께서는 근심스런 모습으로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방탕한 생활과 쾌락속에서 어머니를 슬프게 한 이 망아지가 왔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하며 눈물로 잘못을 빌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이제 남은 시간 어머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봉헌하고 돌아가는 저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매달 올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집 가는 것처럼 저의 가슴은 환희에 벅차고 설레었습니다. 나주에 오면 올수록 저의 몸은 시드는 것이 아니라 생기가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항암제를 맞으면 구토와 고통이 일주일 이상 간다던데 저는 며칠만에 회복이 되고 이틀 전에 맞고도 전주에서 나주까지 운전을 하고 와 철야기도를 하고 돌아가도 몸의 상태는 아주 건강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힘이었겠습니까? 저는 그때 가장 강한 항암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몸의 이상은 느끼지 못했어도 콧속의 암덩이는 저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부작용 또한 엄청났습니다. 평생 침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에 또 한 번 절망했습니다. 살 수만 있다면 방사선 치료를 해야지요. 어차피 방사선 치료를 할 바에야 큰 병원으로 가서 하자 하며 그동안 치료받은 기록을 복사하여 사진을 들고 서울대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콧 속에 혹이 있으니 조직 검사부터 다시 합시다." 박사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해서 사전예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저는 간절하게 어머니께 기도드렸습니다. "죽어도 아버지의 것, 살아도 아버지의 것이오니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어머니께서 저의 코를 한 번만 어루만져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밤이면 둘이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 앞에서 우리의 삶을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기 전날 콧속이 시원해짐을 느꼈습니다. 박사님은 저의 콧속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혹이 없어졌네."하며 조직을 뗄 자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없다니요. 일주일 전만해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없다니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저의 두 눈에서는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통을 봉헌한 저의 아내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여러 형제 자매님! 정말 온전히 맡기고 봉헌된 삶을 살 때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고 또 그렇게 살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전라북도 전주시 동산동 574-33
김기준(니꼴라오)

 

 

이제 남의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어요.

레메디오스 알마잔
 

제 이름은 레메디오스 알마잔입니다. 저는 필리핀 태생이며 나이는 만 32세, 지금은 괌도의 데데도 시, 라아가 232번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나주에서 오신 율리아 자매님을 도구로 쓰신 천주 성령께 의하여 저의 병이 완치되었습니다.
저의 병은 11년 전 필리핀에서 살고 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오른쪽 발이 부어 올랐고 붉은 점이 생겼습니다. 그 부위에 열이 났으며 통증이 왔습니다. 점차로 이 증상이 무릎까지 퍼져 올라왔습니다. 통증을 줄여 보려고 코코넛 기름을 발라보기도 했습니다. 또 1990년에는 갑상선이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2년 후에 의사를 찾아갔는데, 갑상선 수술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겁이 났고 또 수술을 위한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단지 증상의 악화를 좀 늦출 수 있는 약만 받아왔습니다.
1994년 9월 14일에 저의 남편 호세 알마잔과 저는 괌도로 이사왔습니다. 저희는 삼촌 댁에서 살게 되었고, 저는 직장을 얻어서 거의 1년간 일을 했습니다. 저의 오른쪽 다리와 왼쪽 둔부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저는 괌에 온 후에도 몇 번이나 의사들을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진통제를 처방해 주기는 했으나, 밤이 되면 저는 너무 고통이 심하여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직장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의 올케가 "사랑의 메시지"라는 제목의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을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열심히 철저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 나주의 율리아 자매님을 한 번 뵈었으면 하는 열망이 솟아 올랐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나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율리아 자매님께 편지를 써서 저의 현재의 건강 상태를 설명해 드리고 주님과 성모님께 저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사 하고 청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드렸고 묵주신공도 바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율리아 자매님과 그 일행이 괌도를 찾아오시게 되었습니다. 지난 1월 10일 올케네와 저희 부부는 괌의 요나 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미사와 치유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많은 이들이 제대 쪽에 있던 율리아 자매님과 그를 도우는 분들 쪽으로 가기 위하여 줄을 섰습니다. 저는 목발을 짚고서도 일어서거나 걷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저의 남편이 저를 부축하였습니다. 우리 차례가 아직 오기 전이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잠시 휴식을 취하셔야 된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대에 모셔진 성모님상에 친구하기 위하여 다가갔습니다.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뜻밖에 뒤돌아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통스럽게 쩔뚝거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때 제 눈에는 율리아 자매님이 푸른 옷을 입은 대단히 아름다운 부인으로 보였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저에게로 와서 저는 자매님을 포옹했으며, 저의 남편은 율리아 자매님과 통역을 하던 송 라파엘 형제님에게 제가 악성 갑상선염을 앓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와 왼쪽 둔부에 심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과 라파엘 형제님은 저의 아픈 곳을 만져 주셨으며, 저에게 열심히 기도할 것, 마음의 문을 열 것, 그리고 저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이들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매우 편안함을 느꼈고, 또 전보다 좀 더 잘 걸을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천주 성령과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의 손길이 와닿는 특별한 경험을 한 데 대한 기쁨이 가슴에 가득찼습니다. 저는 그 날 하루 종일 성모님의 메시지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저는 무릎과 다리의 염증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 혼자서 일어서 보기도 하고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약도 먹지를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다시 요나의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들었으며, 또 치유 기도회에 참례했습니다.
그 다음날, 1월 12일에는 교통편이 없어서 메리조에서의 집회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월 13일에는 타무닝의 성 안토니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와 치유 기도회 참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많이 울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의 도움이나 목발 없이도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올케와 함께 주님과 성모님께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께 저의 치유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감사를 드리려고 다가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저에게 걸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쉽게 걸었습니다. 모두들 기쁨과 찬미의 노래를 불렀고 환성을 질렀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저에게 성모님상 (번역자 주:또는 사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을 가져다 주었고 또 율리아 자매님이 기쁨의 미소를 띠면서 저를 포옹해 주셨는데 저는 너무 기뻐서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바로 그 때 천주 성령께서 율리아 자매님의 부드럽고 사랑에 찬 손길을 통하여 저의 갑상선염을 치유하여 주셨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린 후, 기쁨과 축하의 시간을 가졌고 기념 사진들도 찍었습니다. 저는 율리아 자매님의 무릎 위에 마치 작은 어린 아이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건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아무런 통증도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1월 14일에 저는 다시 데데도의 성녀 바바라 성당에서의 미사와 치유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치유 기도 시간에 누군가가 저를 알아보고 율리아 자매님이 계시던 제대 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모두들 제가 정상적으로 걷고 있는 것을 보고서, 기쁨에찬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주님과 성모님을 찬미합니다. 저는 모든 분들을 사랑합니다.

 

1997년 1월
불쌍한 죄인
레메디오스 알마잔

 

 

이웃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도 치유되고 나도 치유를 받다. 

김춘임(에밀리아)
 

불쌍한 이 죄인을 불러주시고 은혜 주신데 대하여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경북 문경에 살고 있는 가장주부 김 에밀리아 입니다.
저는 우리 마을에 계시는 빈 야고버씨, 김 엘리사벳씨 두 내외분께서 92년 4월 첫째 토요일 철야기도회 때 나주 성모님 집에 다녀 오셔서 율리아 자매님께서 말씀하시는 테이프와 우시는 성모님의 비디오 테이프를 주셔서 보고 또 보고 이웃에게도 보여 주고 했답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그토록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저희들은 6월 30일날 성모님 우신 지 7주년 때 나주 성모님 집에 갔습니다. 제가 빈혈이 걸린 지가 1976년도부터였는데 차츰차츰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몇년 후에는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앞이 캄캄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대단히 어지럽고 자주 배가 고프면서 허기가 지곤 했습니다.
6월 30일 저녁 나주 성모님 집 철야기도회 때 새벽에 율리아 자매님께서 지금 대단히 심한 빈혈이 치유된다고 하시면서 고통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 시간이 지나고 부터 어지러운 빈혈과 허기짐이 없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 나주 성모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철야기도회 때 저를 위해서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다리 관절로 고생하는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 자매님은 관절이 심해서 수술을 했는데 잘못되어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화장실이라도 다닐 수 있게 도와 주십사 하고 성모 어머님께 기도를 했는데, 저의 빈혈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전에는 너무나 어지러워서 영양제 혈관 주사를 한 달에 한 병씩, 몇달이 지나니까 한 달에 두 병씩 주사를 맞곤 했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빈혈을 치유받고 나서 아직까지 약도 먹지 않고, 영양제 주사 한 병도 맞지 않고 열심히 잘 살고 있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은혜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예수님 복음 말씀과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열심히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주 성모님!
언제나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항상 우리 주 예수님께 빌어주셔요. 아멘.

 

1992년 12월 20일
경북 문경군 마성면 외어4리 853번지
김춘임(에밀리아)

 

 

22년간이나 고통과 갈등 속에서 헤매던
저의 가정을 나주 성모님이 구출해 주셨다. 

마르샤 엠 자르네키
 

사랑하는 율리아,
카나다의 토론토에 오셔서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전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날 저녁 저는 많은 은총을 받았으며, 그 후로도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 영어판을 읽으면서 그리고 나주에 관한 비디오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거룩한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가장 큰 기적은 저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은총과 또 하느님의 그 정의만을 원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총입니다.
나주에서 자매님이 받으신 메시지들을 듣기 전에는 저와 저의 남편과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저에게 청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기 보다는 제 자신의 뜻을 따르며 제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은 특별히 저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 나약함과 죄 중에서 몹시 실망에 빠져 있는 이들을 위하여 주시는 메시지들인 것 같습니다.
"사랑의 눈물"이라는 나주 관련 영어 비디오에서 나오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사랑을 못하면서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때 저는 저 자신이 죄인임을 그리고 저의 실패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저의 남편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중하고 그에게 충실함으로써 가정안의 일치를 이루라고 요청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마치 빛이 저의 어두운 마음 속을 꿰뚫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꼈고 저의 굳어진 심장을 녹여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또 성모님께서 제가 저의 영적 지도 신부님께 순명하며, 저 자신과 저의 모든 이기적인 욕심들을 버리고, 고통들을 불평함 없이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하여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바칠것을 청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신부님들과 주교님들 그리고 교황 성하를 위하여 기도하며 특별히 성체 안에 참으로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확고한 믿음을 가질 것을 부탁하시는 성모님의 원의를 깨달았습니다.
자매님을 통하여 전해진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저의 가정은 22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말할 수 없이 큰 고통과 갈등들을 극복하고 구출되었습니다. 저의 남편도 그런 남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함께 기도 드리며 또 기쁨들과 어려움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1994년 10월 25일, 자매님께서 토론토 대학교의 강당으로 걸어 들어 오실 때 아름다운 향기가 강당 안에 가득하여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느꼈습니다.
자매님께서는 1994년 9월 24일 일어났던 성체 기적 때 보셨던 환시, 즉 바다에서 큰 배들이 항해하고 있는 것을 보신 데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바로 저 자신이 성체안의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교황 성하께서 타고 계신 배를 떠나서 저의 세속적인 행복에 대한 욕심들을 채워 줄 수 있는 배로 건너가려고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매님의 증언이 끝날 무렵 자매님께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의 손길이 우리들 마음에 와 닿으시도록 치유를 위한 기도를 큰 소리로 해 주셨는데 그때 저는 울음을 떠뜨렸으며 제 주위의 많은 이들도 울고 있었습니다.
자매님께서 강당 문을 걸어 나가실 때, 저는 큰 희망과 예수님과 성모님만을 따르겠다는 새로운 용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증언이 끝나고 자매님께서는 강당의 아래 층 대기실로 내려가셨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자매님께서는 저를 만나 보시겠다고 불러 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토론토로 떠나기 전에 저의 지도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었습니다. 저는 자매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은총을 받으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자매님 앞에 가기가 대단히 두렵다고, 그리고 저는 너무나 죄가 많았기 때문에 분명히 자매님께서 그날 저녁 저 같은 사람은 강당 밖으로 나가 달라고 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자매님이 저를 내쫓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개인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고 또 저를 포옹하고 친구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자매님을 만나려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자매님께서는 제게로 가까이 와 미소지으면서 저의 두 손을 잡으시고 저를 안으시고 친구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나 심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저를 아직도 참으로 사랑하신다고 그리고 사랑과 힘으로써 제가 다시 일어나서 새출발을 하도록 도와주고 계시다는 것을 자매님을 통하여 저에게 말씀해 주심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진실된 고해를 하고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은혜가 자매님께서 불쌍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고통받으시고 기도해 주시는 덕분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습니다.
저는 복되신 성모님의 강력한 전구와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자비로우신 사랑을 느낍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성체 안에 계신 당신의 아드님께로 저를 항상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심을 느낍니다.
저는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참으로 계시다는 것을 늘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이라는 영어 비디오를 본 후에 그리고 자매님께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곱 번의 성체 기적들에 대해 듣고나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심이 백 배로 증가하였습니다.
율리아씨, 쥬리아!
자매님께서 복되신 성모님의 가장 겸허하고 순명하는 종이 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저와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들이 걸어나가기를 원하시는 좁은 길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며, 언젠가는 천국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1995년 1월 14
마르샤 엠 자르네키
(Mrs. Marcia M. Czarneki) 919 Charles St.
Mechanicsburg, Pennsylvania 17055 U.S.A

 

 

이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박인환(루까)

찬미 예수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왜일까? 궁금했으나 성모님 집 앞을 지나면서도 선뜻 문안으로 들어 서지지가 않았었다.
그러던중 93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마리아 잉태 대축일 본당 미사에 참례코자 아내인 안나와 같이 성당으로 가던 중 갑자기 성모님 집에 가 보고 싶었다.
누구의 권유 한 번도 받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사 참례 후 성모님 집에 갔다. 마당 앞에 모셔진 성모상 밑에는 촛불이 놓여 있고 저마다 촛불을 켜서 봉헌하였다. 마침 이 날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축일로 특별 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도 다른 신자들과 함께 경당 안으로 들어갔을때 성모님 향기가 우리의 온 몸을 감싸듯 안아주시는 듯 했다.
나는 앞에 모셔진 성모상을 바라보니 성모상에는 향유가 좌측 망또를 타고 발밑으로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왠지 가슴이 뭉클하고 답답함을 느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 스치는 향기는 웬일일까?
그 당시 우리 집안은 유산상속 문제로 형제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로를 원망하며 나날을 보낼 때였다. 전에는 남들이 상속 문제로 싸움을 한다 하였을 때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고 우리 집안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현실이 당장 내 앞에 떨어졌으니 정말 세상 살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해 6월 13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나 자신을 많이 억제할 수 있었으나 정녕 마음 한구석에서는 원망과 미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고 코피를 쏟으시는 사진을 보고 또 메시지 말씀을 접하였을 때 나는 내 마음 속에 가시지 않는 미움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았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고 살아가기에 그 안타까움을 직접 우리 눈으로 확인시키시고자 온 몸을 짜내어 피눈물을 흘리셨으며 또 향유를 흘리시어 우리에게 어서 빨리 회개하고 당신 품안으로 달려와 메시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시는가....
성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성모님을 알고 메시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지금 이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남들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박인환이가 목에 기브스를 한 인상을 보면 거부감이 들 정도로 무섭다고 하며 가까이 하기가 두려워 슬슬 피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성모님과 함께 하는 지금은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며 온화하고 다정스럽고 항상 미소를 띤 그 얼굴은 천사 같은 얼굴이기에 누구 하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말한다. '정말일까? 노력은 했지만 내가 그렇게 달라졌는가?' 생각해 보니 사실인 것도 같다. 주님과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생각하니 화가 날 때도 봉헌하는 마음으로 웃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전에는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었기에 아내를 봐도 사사건건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너무 많이 화가 날 때는 손찌검까지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한발짝 물러서고 양보하면서 주님과 성모님을 생각하니 미운 짓을 한다 해도 모든 것을 봉헌하며, 성모님 메시지 말씀을 생각하면 오히려 아름답게 보여져 사랑스럽기만 하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성모님의 도우심이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신 성모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어려울 때 참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자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1995년 6월 11일
나주천주교회 박인환(루까)

 

 

'이제 끝장이구나'하며 삶을 포기했는데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신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 마리아 성심을 사랑해 드리기 위하여 나주 성모님께 받은 모든 은혜를 쓴다는 사실이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감사를 드립니다.
진작부터 제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지만, 저의 생활에 관한 약간의 두려움 대문에 망설여 왔는데 이제야 성모님의 배려하심으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과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고백합니다.
조금은 서툴고 미약한 글이지만 성모님께 바치고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저희집은 옛날부터 정통적으로 내려오는 불교토속신앙이 결합된 가정이었습니다. 성당은 멀리 있었고, 교회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에 사촌오빠로부터 강간을 당하게 되어 참기 힘든 수치심에 친구들하고 학교수업도 빼먹고 미팅에다 영화관 출입, 때로는 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이렇게 학창시절을 순수하게 보내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떨어진 저는 서울로 올라가서 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방황 속에서 죄악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집에서는 그런대로 부모님 관심과 사랑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는데 막상 서울로 와보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학원은 졸업했지만, 최직을 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식당 서빙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힘들고 고된 일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모든 사람이 다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식당에 많은 남자들이 와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특히 술을 사다 달라고 할 때 저는 그 자리에서 싫다고 냉정하게 하면 주인 아줌마는 너 때문에 장사가 잘 안된다고 많은 야단을 치곤 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성행위가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술집에도 가려고 마음도 먹었었지요. 거기에서 석달 가량 일하고 나오게 되었는데 돈 한푼 받지 못하고 나왔어요. 아니 차비 만원 받은 것과 식당에서 일할 때 화장품 두가지 사준 것 외엔 빈가방을 들고 나왔는데, 그 뒤 취직한 곳이 외과병원이었지요.
이곳에서도 오래있지 못하였는데 저는 간호원으로 원장님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또 학원 다니면서 다니던 교회에 있는 남자를 또 사귀게 되어 원장님과 이 남자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무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남자 친구와도 관계를 가지게 되어 남자 친구와 같이 살려고 마음 먹었는데 부모님과 형제들이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원 원장님을 다시 만나 술도 마시고 드라이브와 많은 만남을 가졌는데, 오빠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남자 친구하고도 일년 정도 교제하고 헤어졌는데 이때 진실하게 "하느님께 기도했죠. 하느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진짜 하느님을 잘 섬기게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가보니까 거긴 가톨릭 신자가 원장으로 있는 산부인과였습니다.
 (저의 머리속에는 진짜 이단이 천주교라는 전도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에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성모상을 바라볼 때마다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고 싫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권유와 저의 호기심으로 교리를 받게 되었는데 마음이 끌렸습니다. 89년도 "성모 승천 대축일"날 영세를 받게 되었는데 받고난 후로도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병원에 오는 많은 환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종교문제가 나오는데 개신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저를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며 다시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 교회에도 나가고, 그리고 유산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등 매일의 삶이 저에게는 지겨울 뿐이었습니다. 이곳 병원에서도 저희 원장님과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원장님이 대모님이기는 하지만 저를 너무도 슬프게 했던 것 같아요. 원장님 딸도 저를 너무나 많이 모욕하고 눈물로 지샜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월급도 제대로 한 번 못받고, 밖에 한 번 제대로 못나가면서 일했습니다.
이때 저는 간염을 앓고 있었는데 아마 옛날부터 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사실로 저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었고 대모님(원장님)의 꾸중을 항상 들어야 했습니다. 대모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에게 대하여 아무렇게나 이야기 해 버리기에 저 자신이 저 낭떠러지 밑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 이곳에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남자를 만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관계를 갖게 되었고 또 한 남자를 만나 아무런 거리낌없이 관계를 가졌습니다. 괴롭고 힘들 때마다 관계를 갖고 싶더니, 이제 이러한 일들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만나면 술마시며 놀았지만,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늘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하고 사귀었는데 결혼을 교회에서 하지 않으면 안하겠다고 하여 성당 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이사람하고 결혼을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 사람은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성체도 못 모시고 제 방에 있던 성모상도 한쪽 구석에다 쳐박아 놓고 항상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 한 남자하고도 헤어지고 이젠 유부남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천주교 신자였는데 저랑 만나서 술 마시고 잠자리도 같이 했는데 이젠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정말 공허하고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언젠가 나주 성모님의 피눈물 나는 모습과 율리아 자매님의 십자가 고통받는 테이프를 본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에 한 번쯤 가보고 싶어졌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3년 동안의 병원생활과 모든 것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꽃동네에 들렀지만 무겁고 힘든 마음은 여전히 가라앉질 않았습니다. 저는 이리에 있는 친구 집에 있었는데 저에게는 이제 희망이 없기에 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죽음 준비를 하고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나주에나 한 번 갔다와서 죽어야지...." 생각하고 나서 나주로 출발했습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 큰 성모상이 있었는데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우시는 성모상 앞으로 들어가기가 두렵고 무서워 떨고 있다가 다시 되돌아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왜 그러고 있느냐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기에 두렵기도 했지만 그러나 끌리다시피 따라 들어갔지요.
성모님 앞에 왔는데 장미꽃 향기가 진동했으며 성모님 상을 바라보니 피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흘리시는 피눈물을 보자마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모님은 저를 감싸주시는 듯 했고 힘든 저의 생활과 외로움과 고통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율리아 자매님과 다른 자매님도 함께 철야기도를 했지요.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의 영가소리는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소리로 들려왔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기에 매달리셔서 목이 타는 듯한 괴로움과 여러가지 고통 받으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 속삭이는 듯한 이상한 언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아름다웠는데 한참 듣고 있노라니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단다. 너의 무거운 모든 짐을 나에게 내려놓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밤새도록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태까지 많은 기도원을 다니고 돌아다녔지만 저에게 위로는 커녕 힘들기만 했기에 이제 제 생의 마지막으로 알고 찾아왔던 성모님 집에서 제 마음이 바뀌어 "이제 시작이다"라는 희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성모님상의 두 눈에서 흘렀던 피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철야기도를 하고 나서 아침에 보니까 깨끗해진 아름다운 얼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니 저럴 수가..." 정말 놀랍고 신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보름 동안 성모님 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갔습니다.
제 자신을 너무 믿고 그동안 많은 남자를 상대했기 때문에, 이제는 남자하고 관계를 맺고 싶던 욕구들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회사에 취직을 한다고 한 것이 화장품 회사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저는 또다시 세상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있는 대로 화장을 하고 그리고 이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두 남자를 사귀었는데 한 남자는 친구 작은 아버지인 유부남이었습니다.
나는 옛날 남자들이 생각나고 성적인 욕구가 생겼습니다. 저는 또 어느 사이에 자포자기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모든 남자들로부터 버림받고 하느님께 버림받은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이 되자 "이젠 정말 끝장이구나." 저는 모든이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나주 성모님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다시 한 번 나주 성모님께 매달리고 싶어져 나주로 갔는데 처음에는 거기에서도 몰래몰래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러나 그 뒤 집으로 돌아와 자주 나주에 다니면서 담배, 술 그리고 성적욕구를 끊게 되었습니다.
12월 24일이 되기 일주일 전부터 성당에 가고 싶었는데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셨듯이 이 성탄축일에 이 영혼 또한 순결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성모님께 기도했는데 정말 율리아 자매님이 배가 부르고 산고를 겪는 고통과 엄청난 여러가지 고통으로 이날 저의 영혼뿐 아니라 여러가지 앓고 있던 육신의 병까지도 다 치유를 받게 되었는데 몇 년 동안 앓고 있던 간염도 검사해본 결과 아무이상이 없이 완치되었습니다.
이미 죽었어야 될 죄인을 주님과 성모님께서 다시 살려내시어 새 생명을 허락하셨고 한 달 후에는 결혼하는 축복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저의 남편과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바로 죄악, 즉 지옥의 수렁에서 건져내어 살려주신 성모님 앞이었죠.
그때 저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고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하마터면 지옥불을 면치 못할 이 죄인이 회개하여 그것도 남편과 함께 이 거룩한 자리에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나주 성모님을 찾은 것은 저를 불러 살려주신 1주년 때였습니다. 결혼 하자마자 걱정했던 아이까지 주시는 축복을 주셔서 감사드리려고 왔는데 성모님은 우리를 너무 기쁘게 맞아 주시는 듯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율리아님은 "내가 입덧하는 고통을 받나봐, 허리가 아프고 환도가 아픈 게 누가 아이를 임신했나봐?"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당시 귤이 별로 없었는데 "아, 귤이 먹고싶다."하는데 저는 웃음도 나오고 눈물도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귤만 먹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주에 올 때 너무 허리가 아프고 환도가 너무 아파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걸음도 어정어정 걷는다고 옆에서 안타까워 했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제 고통을, 그것도 입덧의 고통까지도 대신 받아주셔서 저는 깨끗하게 모두 치유를 받고 돌아왔는데 지금 제 남편도 건강하고, 저 또한 내적, 외적 치유로 건강합니다.
어렸을 적에 사촌 오빠의 강간이, 가장 큰 수치심이었는데, 성모님을 알고 난 지금은 이러한 기억마저 깨끗해져서 감사드립니다.
모든 삶 원망하고 미워했던 제 삶을 이제 용서하고 내 탓이오! 라는 회개가 절로 나옵니다. 더욱 더욱 충실한 삶으로 성모님께 더 많은 의탁을 하면서 기쁨으로 살아 간답니다. 감사합니다.

 

1992년 4월 13일
성모님의 사랑받는 딸 마리아 막달레나 드림

 

 

이 죄인이 걸어온 길을 나주 성모님께서 밝혀주시다! 

천운희(마르코)
 

저는 원래 무신론자였고 아내된 사람은 신앙심이 깊은 천주교 신자였는데 마음씨도 착하고 인정도 많고 얼굴도 예쁘고 자기 자신의 간이라도 빼어달라면 빼어줄 사람이었습니다. 전 결혼할 목적으로 성당에 다니기로 약속을 하고 전북 김제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받고 이리 주현동 성당에서 교리를 배워 영세를 하였습니다. 영세를 받고 나서 밖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이젠 저도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마음은 기쁘고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리 국제 전광사 목공부에 근무하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8년전에 사직을 하여 퇴직금을 타 가지고 저희 부모님을 조금 도와 드리고 남은 돈 15만원을 가지고 전주로 나왔습니다. 저는 10만원을 가지고 사글세 방을 얻어 목공소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집주인들이 집세를 너무나도 올려서 일년에 한 번씩 5년 동안 다섯 번을 쫓겨다니니까 제마음은 몹시 아프고 가구는 다 망가져서 버리는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아기를 등에 업고 보따리는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는 들고서 오는 것을 보니 제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목공소를 인력으로 하고 있던 남편이 안타까웠는지 아내는 일 년동안 그 일을 계속 하면서 티끌 모아 번 돈으로 목공 대패기계를 사 가지고 와서 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 후로 저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중병이 났습니다. 아내는 친정 동생 돈을 남에게 빌려 주어 떼어버리고 남들 보증을 서 물어주는 등 계속 반복되는 생활을 하다가 친정이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저희집 옆으로 이사시켜 놓고서 16년간 친정 일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저하고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전 세상살이가 싫다보니 하느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후로 냉담은 계속되어 못된 짓만 골라가면서 했는데 아내가 처녀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제가 집에서 밤중에 공소에까지 가려면 공동묘지를 지나가야 되는데도 무섭지 않았고 공소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피아노도 배우지 않았지만 그 당시는 저절로 쳤었고 성탄절에는 연극도 꾸며서 했으며 또 공소 일을 다 맡아서 하다보니 천사 같이 훨훨 날아가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 후 서울에 가서 식모살이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강 다리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양친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치마를 머리 위로 올려 한강에 몸을 던졌어요. 한 번 가라앉자 다시 솟고 두 번째 가라앉자 다시 솟아올라왔는데 세 번째는 이번만 가라앉으면 나는 죽는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그 후 눈을 떠보니 별이 보이고 저는 물 위에 둥둥 떠 있어서 손으로 물소리를 내니까 야경꾼이 와서 건져 주어 살아 나왔어요." 하며 자기 과거 이야기를 들려 주더군요.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말을 잊은 채 냉담은 계속되었고 나중에는 악마로 둔갑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평불만과 전쟁 을(싸음)을 계속하다 보니 자식도 미워지고 아내는 물론이고 부모, 형제, 친척 남들까지도 다 미워지다 보니 전 병이 들어서 머리가 무겁고 뒷골은 쑤시고 눈은 모래알 들어간 것처럼 쑤시고 항상 피로가 쌓이다보니 갈수록 성질만 나빠지고 못된 짓만 골라 하며 살아오다가 어느날 제 얼굴을 거울에다 비쳐보니까 악마의 얼굴로 변했더군요.
저는 거울을 쳐다보면서 신나게 웃는데도 보통 사람이 약간 인상쓰는 얼굴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면 제 얼굴을 보고 피해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집에 들어와 두살짜리가 운다고 들어 올려 이불에다 던져 버리니 더욱 큰소리로 울기에 머리를 발로 밟은 일도 있었습니다. 아내하고 칼을 들고 "너 죽고 나도 죽자."하고 전쟁도 많이 하였지요. 그동안 살림살이는 수도없이 많이 부수어 버렸습니다. 이 전쟁이 16년 동안 계속 반복되었고 제가 물건을 던져 조금 부서지면 아내는 도가 터 가지고 쫓아가서 그 물건을 발로 밟아서 완전히 작살내는 묘기대행진까지도 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전쟁이 끝나면 고치려고 하였는데 완전히 작살내면 어떻게 고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앞뒤가 없고 전쟁이 끝나면 그 물건들을 다시 주워다가 고치는 성격이었습니다. 또 어느날은 전쟁을 하는 도중에 제 성질을 못 이겨서 주먹으로 방 유리창을 쳐가지고 손을 다쳐 병원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맨 적도 있었는데 제가 장사 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 셋은 무서워서 다 도망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제가 저희집에 오는 사람 꼴을 보지 못하니까 아내는 저에게 머리를 삭발하고 절에 가서 중이나 되어 혼자 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를 골탕먹이려고 장사하다 말고 소식도 없이 9일간 집을 나간 일도 있었고 어떻게 생각하면 재미있고 어떻게 생각하면 안쓰런 마음이 들면서도 계속 못된 짓만 골라서 해가며 살았으니까요. 아내 친구들도 제가 인상만 쓰면 들어 오다가도 도망가는 일이 많았고 또 어느 날 시골에 계시는 장인께서 해소천식 기침으로 몇 십년 간을 고생하면서도 사위와 딸 생각으로 어깨에 보따리를 메고 집에 오시는 것을 보고도 저는 마중 나가서 받아 오기는 커녕 오시는 꼴이 미워서 집안에 들어가 숨는 일도 있었고 저희 양친 부모님께서 오셨을 때도 방 가운데 앉아 뱀이 또아리 틀고 앉아 있듯이 인상을 푹 쓰고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쉬지도 못하시고 그냥 가신일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장모님과 저희 모친을 이간질하여 전쟁을 시켜 놓고 저는 밖에서 웃고 다닌 일도 있었고 제 동생들도 제가 인상만 쓰고 있으면 놀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간 일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매제하고 시골에 전자 제품을 고치러 다니면서 저는 확성기로 방송하고 매제는 고치고 그 일을 얼마간 하다가 돈벌이가 얼마 되지 못하니까 매제 혼자 다니면서 고친다고 하자 저는 화가 나서 옆집 제 친구 전파사를 끌어들여 앞질러 다 고치고 다니자 매제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다른 데로 쫓겨난 일도 있습니다. 아이들이나 아내가 돈을 요구하면 먼저 저는 욕을 하고 나서 한참 뜸을 들여 생각 끝에 돈을 바닥에다 던져준 일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와이프가 10만원 중에서 만원을 아이들 감기약 사주기 위하여 저 몰래 꺼내가서 저는 홧김에 9만원을 와이프 보는 앞에서 다 찢어버린 일도 있고 매제를 다른데로 쫓아버렸다고 제 여동생한테 전화왔기에 통화하면서 대판걸이 전쟁을 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몇몇이 모여 웃는 것을 보면 저는 속으로 비웃었고 거지가 저희집에 와도 한 번도 도와 준 일이 없습니다. 어느 날 처갓집 식구하고 2차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이 끝난 다음 생각 끝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처갓집 식구들도 다 죽여 버리고 집도 불질러 버리고 우리집 식구도 다 죽이고 불질러 버리고 나도 죽으면 끝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간직하면서 살아 오다가 와이프가 마귀가 들어서 그런다고 하며 어느 성당에서 피정을 하니까 가서 안수받아 보라고 하여 피정에 참석했는데 신부님 입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 들려와서 전 몹시 불안하였습니다. 내 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알고 말씀하셨을까? 하면서 집에 돌아와 그날 밤 11시부터 성서를 펴 놓고서 머리에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간에 계속 읽다 보니까 뜬 눈으로 날을 새고 예수님 십자고상 및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묵주의 기도 30단을 양팔 기도하면서 끈기와 인내로 이겨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매달리다 보니 제 머리와 눈은 언제 아팠는가 할 정도로 다 나았습니다. 전 용기와 힘을 얻어 항구히 기도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이 때 와이프가 나주 성모님 메시지 테이프를 하나 주어서 들어 보았는데 "왜 이렇게 눈이 멀고 귀가 멀어 나를 따르지 않는단 말이냐, 자녀들아 도와다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16년동안 냉담하면서 눈이 멀고 귀가 멀어 못된 짓만 골라하면서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니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저는 한 달 동안 성모님 메시지 말씀을 들으면서 성모님과 같이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머릿속에 생각이 "나 혼자서만 회개하며 울 것이 아니라 성모님 말씀이 너무나 좋으니까 다른 사람도 눈물로써 회개하도록 해 봐야지" 하고 녹음기를 사고 공테이프를 사다가 계속 녹음을 하여 이 성당 저 성당 미사 다니면서 나누어 주고 길거리에서 신자들 만나면 주고 신자 집에 찾아가서 주고 피정에 가서 주고 성물 파는 데도 주고 대부 대자 형제회에 참석하여 주고 수녀님도 주고 하다 보니 신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얻어 기쁨 속에서 잃어버렸던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님을 다시 찾았다는 생각을 하니 제 몸과 마음은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신자는 돈을 주기에 그냥 들으라고 주고, 어떤 신자는 고개를 휙 돌리며 외면하고, 어떤 신자는 신부님께 고자질하여 새벽 미사 나갔다가 혼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녹음하여 일 년간 돌리다보니 녹음기가 병이 나서 성모님 메시지 테이프는 중단되었습니다. 16년 간 냉담할 때는 십계명이 아니라 백계명도 어겼던 이 죄인이 그 당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하느님 아버지를 다시 찾고 보니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견디질 못하였습니다. 이 죄인은 16년 동안 냉담한 주일미사를 채우기 위하여 또 믿음을 하느님께로부터 약속받기 위하여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있고 더욱 더 열심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묵주 기도를 하면서 이 죄인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시고 돌기둥에 묶여서 매를 맞으시고 빌라도에게 잡혀가시어 가시관을 쓰시고 이 죄인의 죄까지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시다가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세 시간동안 매달리셨다가 죽으신 것을 묵상하며 묵주의 기도 한단  한단 기도하면서 또 묵상하고 제가 못된 짓만 골라가면서 하느님께 불효한 것을 기도 중에 회개하며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시키면서 지금도 가끔 울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 죄인을 불러서 하느님께서 매를 드시고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어 주신 아버지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저의 와이프가 나주에 가기 위해 24인승 차를 불렀는데 인원이 초과되어 우리 식구가 못 가게 되자 당신도 함께 가자고 하여 저는 운전면허증 받은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고속도로는 처음 운행했지만 하느님 빽만 믿고 달려와 나주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성모님 집에 들어오니까 장미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제가 신앙생활한 지는 이제 겨우 4년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모님 집에 다녀올 때 메시지 테이프와 책자를 양심껏 돈을 넣고 가져와 성모님 메시지 전달을 하니 마음은 너무나 기쁘고 훨훨 날아가는 심정이었습니다.
94년 2월 3일 메시지도 문방구에 가서 300매를 복사하여 전달하였고 93년부터 지금까지 첫 토요일을 지키려 빠지지 않고 참석하니까 저희에게 작은 기쁨과 평화가 왔습니다. 어느 날 이 죄인이 부모님 댁을 찾아가서 천주교가 옳은 진리라고 성서를 펴 놓고 전도하였더니 부친은 유교 40년간 믿었었고 모친은 개신교 신자였으며 제 막동이 남동생과 출가한 여동생은 무신론자였는데 제가 새사람이 된 것을 보고 모두가 천주교로 돌아와 영세를 하였기에 저는 너무나도 기뻤고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분이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제 하루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밥 짓고 학생들 도시락 싸고 나서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집에 와 설거지 하고 아침기도와 여러 가지 기도를 하고 로사리오 15단을 한 뒤 장사다니면서는 화살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와 빨래하고 찌개는 성모님과 같이 끓이고 나서 오후에는 로사리오 5-10단 봉헌하고 성서 말씀과 성모님 메시지 묵상하고 저녁기도 하고 예수 성심 성월 기도하면서 하루 정해진 기도를 끝맺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에 걸칠까? 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주신다고 하셨으니 아버지께 맡겨 드리고 세상 것을 멀리하고 천상 것을 추구하다 보니 T.V 보지 않으니까 좋고 집안이 조용하니까 좋고 눈이 피로하지 않으니까 좋고 학생들 공부하는데 지장 없어 좋고, 우상숭배 하지 않으니까 좋고 기도시간 많아져서 좋고 여러모로 참 좋더군요.
이 죄인은 93년도 사순절 동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40일간 아침 단식 봉헌하였고 한 번 정해진 기도는 몸이 아무리 아파도, 싸움을 했을지라도 다 끝내고 잠을 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금년 같은 찜통 더위에도 기도할 때는 예수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비록 땀으로 목욕을 할지라도 인내심을 기르며 선풍기는 틀지 않았습니다. 이 죄인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하루하루를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년에 제 큰 처남이 교통사고로 저희 돈 3천만원을 합의금과 치료비로 썼어도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에는 저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장남으로서 양친 부모님이 저 몰래 논을 전부 팔아서 세째 아들에게 사업자금으로 대 주다가 동생이 실패하여 부모님 재산을 모두 날렸어도 전 사랑으로 부모님과 동생을 위로하여 드리고 부모님 생활비는 이 죄인이 가끔 찾아 뵙고 대어드리고 있습니다. 저희 재산이라고는 천 이백만원 임대 아파트 하나이지만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믿으니까 저희가 사는 것 다 해결해 주십니다.
루가복음 18:8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신 말씀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면서 지금도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2년 동안 계속 다니다 보니 저희 집은 성가정이 이루어졌습니다. 16년 냉담하면서 100계명을 어긴 이 죄인이 하느님께 매를 맞고 정신이 들어서 나주 성모님 도움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 형제, 자매님, 욥이 온갖 시련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끈기와 믿음으로 하느님과 씨름하여 성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끈기와 믿음과 사랑으로 내 육신과 싸워 세상 것을 멀리하고 천상 것을 구하면서 성모성심 안에 들어가 다 같이 삽시다.

 

1994년 10월 1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1가 307
송원아파트 202동 105호
천운희(마르코)
T.(0652)409-5529

 

 

자궁암 4기인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이 아가다
 

이 아가다입니다.
작년 말에 제 딸이 아파서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했더니 자궁암 4기로 의사들이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부모로서 눈물만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고 수술조차 못한다니 어찌 할 수도 없었죠.
그러다가 나주 성모님 집을 찾게 되어 기도생활을 하면서 약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건강해져서 검사를 했더니, 오늘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해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떻게 성모님 은혜에 보답해야 할지 감사의 눈물 밖에는 아무것도 드리지 못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1년 7월 7일
이 아가다

 

 

입만 열면 합의 이혼해 줄래? 아니면 재판할래? 

차영민(마르타)

찬미 예수
주님 은총이 나주 성모님과 관계된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인천교구 주안8동 성당에 다니는 차영민(마르타)라고 합니다.
저는 올 1월에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을 뵈러 갔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영혼과 육신은 완전히 고사상태로 자살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는데도 저는 그 은혜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교통사고에서도 살아났는데 그것조차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줄 모르고 교만한 제게 주님은 참회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뵙자마자 저는 회개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 날 제가 살아오는 동안 지은 모든 죄가 떠올라서 완전히 제 영혼의  때를 다 벗겨 주었습니다. 당뇨가 혈당 220을 넘었고,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서 영혼, 육신이 그야말로 엉망이었는데 그곳에서 받은 참회의 은사로 치유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올 4월까지 2번 다녀오는 동안 저는 몸과 영혼이 깨끗이 다 나았습니다.
저는 모든 잘못을 다 남편에게 돌렸던 미망에서 깨어나 오로지 내 탓이라고, 저 자신의 내부에 변화를 일으켜 작년 한해동안 남편과 입만 열면 "합의 이혼 해 줄래? 아니면 재판 할래?" 하고 싸웠는데 올해는 그 소리가 쏙 들어가고 남편에게 잘 해 주니까 그 사람도 변해서 요즘은 저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해 줍니다.
이 모든 은총을 주신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5년 4월 12일
인천에서 차영민(마르타)

 

 

혼 수속까지 끝낸 부부가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새로운 삶으로! 

강로렌죠, 윤글라라
 

윤 율리아 자매님 내외분께.
찬미 예수 마리아!
안녕하세요
윤 글라라의 장부 강 로렌죠입니다. 직접 뵙지는 못하였으나 화면을 통하여 많은 날을 뵈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시 저의 집사람이 각별하신 두 분의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무엇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듣고 느낀 바가 큽니다. 뿐만 아니라 저도 그 귀하신 뜻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답니다.
죄 많은 죄인이 감히 이런 말씀 올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나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힘입어 새로운 각오를 해 봅니다. 두 손 꼬옥 잡아주시면서 또 귀한 보물보다 더한 선물들을 주신 그 깊은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말씀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성모님께 기쁨 드리도록 힘쓰겠습니다.
저의 장모님께서 집에 오시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주 성모님의 눈물 비디오 테이프를 보십니다. 그러면 아프시다고 하시던 머리도 씻은 듯이 나아져서 온전히 그 안에 빠져드신답니다.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당뇨병까지 나으시고 몸살만 나도 "율리아씨 테이프" 할 정도입니다.
비디오에 자매님의 모습이 나올 때면 "저 귀하신 분이 우리 글라라의 손을 잡아 주셨구나"하고 생각하니 정말로 오누이의 정을 가슴에 안게 됩니다.
글라라가 미국으로 돌아올 때 무거운 짐이 다섯 개나 되었는데 휴스턴 공항에서 혼자 짐을 가지고 나오기가 힘든 상태에 있을 때 어느 미국의 모르는 분이 자기 짐을 등에 짊어지고 양손에 짐을 각각 들고 그것도 부족한 듯 글라라의 핸드백까지 달라고 하면서 "당신은 편안히 내 뒤만 따라오시오."해서 사양해도 소용 없이 두 손을 합장하면서 도와주고 싶다고 하면서 공항입구까지 짐을 운반해준 그분께 마중나간 저의막내가 "하느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고 고마운 인사를 했는데 이것이 어찌 우연일 수가 있겠습니까? 다섯 개나 되는 짐을 우리 세 사람이 너무 무거워 힘들게 운반했거든요. '자매님' 이렇게 성모님은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일치와 사랑을 주셨고 나주 성모님 테이프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미국인 어느 부부는 이혼하려고 준비를 다 했는데 아들이 나주 비디오와 메시지를 통역하여 들려 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며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들 (저도 포함)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매일 묵주신공을 바치겠습니다.
윤 율리아 자매님 내외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지면을 통하여 우선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건강하셔서 하늘의 종으로서 일 많이 하시길....

 

1990년 7월 2일
미국 휴스턴에서 강로렌죠, 윤글라라 올립니다.
Lawwrenjo J kang
1510 spillers Lane
Houston TX 77043
U.S.A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주 요한
 

나는 만 6년 전에 우측 폐 하단에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폐하단 부위와 등쪽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지냈다.
금년 3월 10일경 갑자기 체중이 4kg이나 줄어 병원에 가서 C.T 촬영을 하여보니 폐 좌우에 혹이 3개나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에 입원하여 15일간 치료와 검사를 받았는데 주치의께서는 100% 암이니 좌측 폐부터 수술을 하자고 하였으나 생각을 좀 해 보겠다고 하다가 거절하였다. 체중이 4kg이나 줄더니 1kg 더 줄어 '이번에는 독종암에 걸렸구나' 생각이 들었다. 수술 거절 이유는 지난 번에 조금 절제했어도 피로가 오고 살아가는 데 지장이 많았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1개월-6개월내에 죽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었다. 처제의 알선으로 나주 성모님 집에 6월 3일 오후 5시 30분 도착하였는데 밤 9시부터 기도를 시작하였다. 오늘은 율리아 자매께서 몹시 고통이 심하니 고통이 심하면 많은 병자가 치유된다고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 드렸는데 6시 10분쯤에야 율리아 자매께서 경당에 들어오는데 몸의 중심을 잃고 약간 흔들거리니 부군께서는 넘어질까봐 어린이 보호하듯이 같이 들어서고 있었다. 기도를 간단히 끝마치고 율리아 자매님은 의자에 앉아서 양 손을 잡고 방긋이 웃는다.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두 손을 잡고 방긋이 웃는데 마음에 무언가가 와 닿은 느낌을 받았다. 7시가 되었다. 처제가 기다리고 있다가 식사하자고 옆방으로 갔다. 밥을 세숟가락 정도 넣고 옆에 드러 누웠다. 몹시 피로하고 허리가 아팠다. 나주 성당에 8시 미사가 있다고 하기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나는 몹시 피로해서 거북이 걸음으로 가며 성체를 내 안에 모셔야 산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있는 힘을 다하여 성당에 도착하니 미사는 진행 중이었다. 성가를 부르려고 하는데 숨이 차며 소리가 나지 않으며 두 다리는 쓰러지려고 하여 양손으로 책 얹어 놓은 데에 버티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와 나무 그늘에 40분간 앉아 있었다. 기적이다. 그 뒤 몸이 회복되어 걸을 수가 있었다. 동서 차로 광주에 도착하여 잠을 깨어 보니 45분간 잤다. 그때부터 기쁘고 즐거웠다. 몸도 거뜬했다. 양 다리가 뻣뻣하여 매일 조석으로 안마기로 안마를 하여야 걸을 수가 있었는데 뻣뻣한 기가 없어졌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음날도 이어졌다. 나는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성가를 부르고 기도도 하였다. 기도 맨 끝에 {주님, 저는 내일 죽어도 이 세상에 미련이 없고 후회도 없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면 이런 말이 나왔겠는가! 이 세상에는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다음날 12시가 되니 기쁨, 즐거움이 사라졌다. 그래서 6월 15일 나주 성모님 집을 또 찾았다.
율리아 자매께 첫날 와서 다리가 나았다고 말씀 드렸더니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분이 나은 것처럼 덥석 안으신다. 사실은 내 몸에 폐암이 생겨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내가 출타 중에 성모님상만 뵙고 가서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신 분이 있다고 하시며 성경 한 구절을 말씀해 주셨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하시고 자주 오라며 기적수를 갖다 먹으라고 하셨다. 정말 마음이 편안했다. 서울에 도착하여 기침약 한 알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가볍다. 심한 기침과 젊어서부터 가래를 심하게 뱉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하였다. 그 심하던 가래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으며 기침도 멈추었다. 2번째 은총을 받았다.
6월 22일 3번째 나주 성모님 집을 찾았다. 그때는 폐암이 치유 되었는지 피부로 느낄 수는 없었다. 4번째 6월 30일 10주년 행사 날이었다. 행사는 못하고 나주 성당 7시 30분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성사 끝날 무렵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율리아 자매께서 성체를 영한 것이 피로 변하였고 살로 변하였다. 성당 안이 온통 장미향으로 가득했는데 성당 바깥도 장미향이 코를 찌를듯이 향기로웠다. 율리아 자매는 업혀서 성당을 떠났다. 다음날 새벽 2시에 나주 성모님 집에 도착하였더니 사람들이 바깥 가득히 모였다. 나는 밖에 서서 창문 사이로 성모님상 모신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3시 45분경에 빛이 일직선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니 성체가 7개 떨어져 모두 보았다.
치유된 병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1. 기관지 치유 2. 폐암 치유 3. 다리가 뻣뻣한 기 치유 4. 허리 아픔 치유 5. 왼쪽 앞 발바닥 통증 치유 6. 기력(氣力)도 받음. 7. 기쁨과 즐거움도 받음.
율리아 자매님께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령으로 치유하여 주십시오."하는 기도는 참으로 명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은혜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는 율리아 자매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본당
주 요한

 

 

장미꽃잎을 떨어뜨려주신 나주 성모님 

시메온 시와모토

한국 나주에 내가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성지순례가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율리아 자매가 필리핀 그린벨트 성당에서 메시지를 전한 직후 "성모님이 나타나셨습니다."하는 자매님의 말씀이 끝나자 성모님께서 나에게 장미 꽃잎을 떨어뜨려 주시고 빛을 비추어 주신 지 6개월이 된 점이고,
둘째는, 성모님 발현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는데 그것이 오늘 이루어진 점입니다.
나는 장미꽃잎을 받은 후부터 줄곧 주님과 성모님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는 강한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 부르심은 크리스챤 형제들에게 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내가 사제성소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빛과 성모님의 도우심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1993년 6월 18일
주님의 사랑과 함께 시메온 시와모토
필리핀 마닐라 655-1202

  

 

자매님의 불렀던 배가 풍선에 바람 빠지듯 꺼져가는 것은...

유연숙(릿다)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 7남매의 맏며느리며 장부와 시어머님을 모시고 1남 1녀와 살고 있는 주부입니다.
십 년 전인가 동아일보의 기사에서 사진과 더불어 나주에서 성모님상이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부터 성모님이 울고 계신다는 나주를 가고 싶었습니다.
또한 푸른군대 신부이신 하부님과 서 요셉 신부님을 통해서 나주에서 우시는 성모님의 사진과 촛불 속에서 낙태된 태아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서 신부님께서는 나주 성모님께서 우리들의 죄 때문에 눈물과 피눈물로 호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낙태를 많이 했기 때문에 저의 죄책감은 더욱 심했습니다.
1991년 제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나주를 장부와 더불어 친구들 가족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들어서는 순간에 장미향기가 코를 찔렀고, 성모님께서는 우시고 계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하는데 저희 일행은 다음 스케줄 때문에 모두 밖으로 나가고 저는 맨 끝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왕 이곳에 왔으니, 성모님 메시지를 받으신다는 율리아 자매님을 뵙고 싶어서 서성이고 있는데 경당 옆집 쪽에서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난 것 같아 바라보니 금방 뵌 나주 성모님인가 했는데 제 앞에 서 계시는 분은 윤 율리아 자매님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자매님, 자매님" 하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그 날 자매님의 인자하시고 환한 웃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의 모습이 그럴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후 저희 가족은 여름방학이 되면 피서를 변산 반도, 완도, 땅끝, 목포, 함평을 돌면서 전라도의 따뜻한 인심과 순박함을 맛보면서, 나주 성모님 집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성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더불어 80세가 다 된 노모를 모시고 함께 가족의 사랑을 더욱 나눌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1992년 3월 22일. 인천 주안3동에 율리아 자매님을 피정의 강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인천에서 제일 큰 성당을 지으면서 신자들이 너무 영적으로 메말라 있기에, 교육부장을 통해서 주임 신부이신 이준희 마르코 신부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나주와 인천이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하루 전 (피정) 21일, 저희 집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께서 제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오시는 순간 장미향은 온 집안에 가득하고 율리아 자매님은 지난 번 제가 뵈었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임산부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점점 불러오고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러기를 서너 시간이 지나서 자매님은 장부와 저를 안아주시고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하염없이 울면서 마음으로 통회했습니다. 가정 성가도 불러 주셨습니다. 더욱 신기한 일은 저희 장부(아오스딩)에게 "낙태한 것 성사 보았느냐?"고 물으시고 "보지 않으셨으면 꼭 성사를 보라."고 당부하신 다음 장부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는 순간에 아까 만져 보았던 자매님의 배가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이 꺼져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때에 제 배가 요동을 치는 것 같이 진통이 오는 것 같으면서 편안해졌습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다시는 낙태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이웃에게도 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날 저녁 자매님이 가시는 방마다 장미향 때문에 저희 아파트 전체는 장미향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1993년 3월 어느 날, 저는 자매님 일행과 함께 산에 갔었습니다.
하늘에는 태양이 해무리로 변해져 있었고 오색 무지개도 떠 있었습니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산 가운데 성모님이 주신 물을 저는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만성 위염으로 고생을 하면서 소화도 잘 안되고 입에서는 말할 수 없이 악취가 났었습니다. 또한 저는 보통 때도 찬물을 먹으면 한기가 들고 오한이 나고 떨려서 항상 더운물만 마셨습니다. 그런데 오한도 나지 않고, 입 안에서 나던 악취도 지금까지 한 번도 나지 않았습니다. 만성 위염도 깨끗이 나았습니다.
저의 장부가 강남 가톨릭 성모병원에서 부정맥 (다리 핏줄 튀어나와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한 당일 1시간도 안돼서 병실에 와서 물이 먹고 싶다고 애원하길래 나주에서 가져온 물 10 리터 정도를 계속 먹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간호원이 와서 수술한 환자에게 물을 주면 큰일 난다고 하며 파상풍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물을 먹고 난 후 빨리 회복되어 대기업 간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밖에 제 쌍동이 동생 (다리아)은 6년 전부터 집에서 놀면서 구타하고 아이들까지 괴롭히고 하는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다가 나주에 가서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성모님께서 병든 가정, 이혼하는 가정 때문에 더욱 마음 아프시고 가정 성화를 원하심을 깨닫고 동생 다리아는 자기 자신을 봉헌하면서 남편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은총으로 이제는 남편이 15년만에 처음으로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말을 들으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머니, 성모님 당신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이의 위로자이십니다.
악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나주에 계시는 당신은 우리들의 피난처요, 안식처요, 영혼의 목욕탕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1995년 6월 성신 강림 대축일에
인천시 관교동 13-11 동부아파트 103동 202호
유연숙(릿다) T.(032)438-9480

 

 

저는 10년간 겪어온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본 산 증인입니다.

최갑주(로렌죠)
 

1. 경위
처음부터 현재까지 제가 10년 동안 보고, 듣고 확인한 사실에 대하여 증언코자 졸필을 올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자기소개
저는 나주시 교동 107-7번지 (전화 32-4442)에 거주하는 최갑주로 (로렌죠) 당 72세이며 1936년  (13살) 당시 하롤드 헨리 본당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1937년에 견진 성사, 1947년 최덕홍 신부님으로부터 혼배성사를 받았으며 1955-1960년대까지 교구 전교회장으로서 담양 성당에서 봉직하고 그 후 신병으로 인하여 귀향 레지오 활동을 하다가 꾸리아 단장, 본당 회장, 사도회장,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성 빈첸시오 나주협의회회장, 사목회 복지부장으로 봉사 중이고 지금은 나주시의회 의장으로 재임 중입니다.

3. 증언 개요
제가 율리아 자매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80년인가 봅니다. 예비 교우였을 때부터 열심이었고 수줍어하며 온순해 보였으며 보통 우리보다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 뒤 교구 차원의 성령 세미나 봉사자로 활동하셨고 전국 성령 세미나에도 몇 년 같이 가기도 했습니다. 자매님은 개신교에 다니시다가 개종한 분인데 이렇게 좋은 분이 성당에 오셔서 큰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성모상 눈물 목격
어느날 저는 미용실 안방에 모신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신다는 소식을 듣고 알아보니 율리아 자매님 부부가 꽃동네를 다녀와서 감사기도를 드리던 중에 성모상에서 눈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며칠후 본당 교우들에게 알려져 본당 신부님과 우리도 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방안의 습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눈물이 계속 흐르고 그런 현상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이웃 본당에도 알려지고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자 인산인해를 이루어서 통제를 해도 많은 사람의 운집으로 기도 장소가 좁아 도저히 그곳에서는 더 이상 성모님을 모실 수가 없게 되어 아파트로 이사가셨고 그 뒤 사제관으로 옮겨 모셨다가 성당 옆에 성체조배실을 만들어 성체와 성모상을 옮겨 모셔다가 본당 교우들로 하여금 성체조배케 하였습니다. 당시 나주 본당 주임 신부님은 박희동(요한) 신부님이셨는데 본당에서는 눈물을 한 번도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1987년 2월 2일 다시 율리아 자매님댁으로 옮겨 모신 뒤로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2)피눈물 목격
1987년 12월 8일 우시는 성모상을 현재의 위치인 교동 107번지 신축 건물로 옮겨 모신 후로부터 1992년 1월 14일까지 눈물과 다량의 피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여러 신자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고위 성직자 (지학순 주교님)도 일주일간 체류하시며 눈물을 목격하고 확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3)향유 흘리심 목격
1992년 11월 24일부터 1994년 10월 23일까지 성모상의 머리에서부터 향유가 흐르며 향내가 진동하여 어떤때는 100m 이상 거리까지 향기가 퍼졌으며, 그 기간은 무려 700일간 계속되었고 향유가 머리에서 발 아래까지 흐르는 것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목격하였으며 그동안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함께 목격하였습니다.

(4)율리아 자매의 십자가 고통 목격
율리아 자매의 고통에 대해서도 저는 본당 신부님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이 아니고 조작된 것은 더욱 아니며 분명히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신부님도 믿으셨습니다. 자매님은 메시지 받기 전에 먼저 고통 받고 나서 그치면 실신 상태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 탈혼 상태의 모습입니다. 또 십자가 고통을 3시간 동안 받는데 고통시에 양 손과 두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온 몸을 굴리고 그렇게 몸을 굴려도 손과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십자가 고통을 받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깨어난 후 자매님을 보니 양 손, 발, 옆구리까지 오상받은 것을 확인했고 피흘린 흔적도 보았습니다.
자매님 학력은 농촌 중학교 정도로 생각됩니다만 메시지 쓴 것을 보면 구절 구절이 성경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오래된 교우도 아니고 영세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자매님의 그 해박한 교리지식은 언제 배웠는지 저희가 깜짝 놀랄 정도로 틀림없습니다. 이는 성령의 감도로 인해서 이분이 직접 예수님, 성모님과 대화하시면서 받은 말씀이라고 의심 없이 믿었고 지금도 믿습니다.
그런데 더러 밖에서 의심을 하기도 한 모양인데 우리 교우들은 거의 남이 잘되면 질투심에서 말하는 것 같아 귀에 담지도 않습니다. 저는 제가 지켜봤기에 이 사실을 확실히 하느님께로부터 온 일이라 믿습니다. 1990년 10월 15일 한국 주교님들이 교황님과 만나셨을 때 대화 중에 주교단 의장 김남수 주교님께서 한국 윤대주교님의 교구 내 나주에서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교황님께서 여러가지 예를들어 말씀하신 후 "여러분들은 사적 계시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으니 지혜롭게 처신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것이 기억됩니다.

(5)지옥 고통 목격
저는 또 지옥 고통 받았을 때도 목격했습니다. 고통받기 전에 성모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지옥 고통을 받겠느냐?"라고 물으셨답니다. 등만 땅에 대고 손도 발도 쳐들고 빙빙 돌며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듯한 손짓을 계속하였습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들어 보니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한 것처럼 무슨 끈이 위에서 내려와 잡아보려고 했으나 잡히지 않았고, 바닥이 뜨거워서 바닥에 발을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랬다고 합니다. 지옥을 다녀온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통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도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고통이 끝난 뒤에 보니 건강이 아주 좋아졌으며 몸을 보니 화상 자리가 여러 곳에 남아 있는 모습을 여럿이 함께 목격했습니다.

(6)낙태 보속 고통 목격
또 낙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마음을 많이 상해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뱃속의 태아도 엄연히 생명인 것입니다. 자매님이 낙태 보속 고통을 받을 때는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옵니다. 고통 뒤에는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 바로 꺼집니다. 기적이 아니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자매님은 낙태 당하는 태아의 고통과 낙태시킨 부모들의 죄의 보속과 그들의 회개를 위해서 낙태 보속 고통을 수 없이 받으신 것입니다. 비디오에서 보면 태아가 살려달라고 엄마에게 호소하는 소리를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의사가 아이를 제거하려고 기구를 대면 태아들은 그 기구를 피해다닙니다. 안죽을려고 피해 다니다가 생명이 끊어지면 절규하는 소리가 난 다음 실신 상태가 되고난 후 메시지를 받으셨습니다. 성당 미사 중에도 갑자기 배가 불러오고 하는데 그것은 자매님을 통하여 회개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모님이 우리에게 간곡히 애원하며 사정하십니다. 이 세상에 범죄가 만연하여 성부의 의노가 가득차서 무서운 벌을 내리실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보통 칠팝십년 삽니다. 영혼 준비를 잘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영혼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고 독신으로 극기하며 사시는 수도자 성직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살아야 된다고 성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지옥에 열백 번 가야될 죄를 범하고도 뉘우치고 회개할 줄 모르고 사는 우리는 습관적인 고해성사로 주님 마음을 상해드리고 있습니다. 진실한 통회는 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상해 드린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성모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영혼 준비 잘하고 죄 그만 짓고 열심히 살라는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성령을 통해서 또 모세의 십계판 등은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신 것이고 현 시대의 루르드나 파티마, 나주 등 세계 여러 곳에서는 성모님을 통해서 사적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지요. 그러나 천국이나, 연옥, 지옥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지 않으니 냉담하게 되고 무당을 찾게 되기도하지요. 그러나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지옥이나 천국을 확인했습니다.

(7)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순교 고통 목격
김대건(안드레아)신부님의 순교 모습을 보았습니다. 망나니가 칼로 목을 쉽게 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주고 칼을 맞고 나서도 또 목을 쳐들어 주기를 다시 계속했는데 4번째부터는 힘이 없어 쓰러지고 그때부터는 고통 소리를 내지 않을려고 애쓰다가 8번째 칼을 맞고 순교하신 모습의 고통을 목격하였는데 시종 두 손은 허리 뒤에 묶여 있는 자세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것을 나주 성모님과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셔서 저는 의심없이 확고히 믿게 되었습니다. 영원과 세상을 비교한다면 영원이라는 것은 끝이 없고, 이 세상은 번개불이 번쩍이듯이 한순간인데 세상에서 육신을 편히 하려고 죄를 지으면 죽어서 영원한 지옥 고통을 받게 되겠지요. 나주 성모님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편의 사정은 모르면서 하느님을 모독한다면 하느님의 심판 때 어떤 벌을 받게 되겠습니까? 경솔히 판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도 침묵하며 계속 지켜보고 있으며, 행사때는  (철야, 목요기도회 등) 매번 참여하는데 특별히 여행 중이 아니면 계속 참여하고 있습니다.
죄악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정신 차리라고 나주 성모님께서 율리아를 통해 여러가지를 보여주시는데 이것까지도 이러쿵 저러쿵 함부로 말을 하며 하느님을 모독하면 심판 때 무어라고 답변할까 두렵습니다. 먼 곳에서도 철야 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들은 더욱 더 풍성한 은혜 얻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다 같이 영원한 복락누릴 수 있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하십시다.
이곳 나주의 성모님 집은 그냥 병이나 나으려고 오시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한 번 지옥가면 영원히 죽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옥에는 안가야 합니다. 천국가려면 회개하라고 율리아 자매님은 늘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분은 율리아 자매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그러니까 자기 병도 못낫는구나 하고 오해하실지 모르겠는데 그 고통은 우리들을 위해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고통 받으신 것처럼 율리아 자매도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성체에 대한 여러 가지 기적이 있었으나 생략합니다. 저는 율리아 자매가 10년간 겪어온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산 증인입니다. 저는 이번에 기초 의회 출마를 포기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뜻을 받들어 소외 계층의 고통받는 이와 같이 여생을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주 초대 본당 현 하롤드 신부님은 우리 본당의 주보로 로사리오의 성모님을 택하셨고, 주교 승격때 주교님 문장도 "성모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라고 하셨습니다. 나주의 성모님은 우리 초대 본당 하롤드 헨리신부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주는 병인 박해때 세 분이 순교하신 성지로서 그 후손인 우리에게 더욱 열심을 촉구하는 뜻으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1995년 6월 26일
죄인 최갑주(로렌죠) T.(0613)32-4442

 

 

저는 우시는 성모님을 확실히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마자엘라
 

제 집은 성모님 집에서 1분 거리 밖에 되지 않고 또 고향도 나주입니다.
원래 살레이시오 여중을 나왔지만 영세하지 않았고 지금은 나주에서 교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영세는 안했지만 성모님 집에 한 번 씩 들르면 장미향기를 많이 맡기도 했지요. 또 한번은 퇴근 후 들렀더니 성모님 방에서 목발을 짚고 서 있던 사람이 율리아 자매님이 걸어나오라고 하니까 목발을 탁 놓고 걸어 나오는 모습도 봤고 또 한 번은 사이가 안 좋았던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도 보고 또 여러 가지 모습을 보았지만 제가 직접 치유받거나 체험한 것이 없으니 확실히 믿을 수가 없어 "우연의 일치겠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월급날이었어요. 핸드백에 현금이랑, 가계수표, 또 증권까지 120만원 정도 넣고 광주시내 중심가 광주 우체국 앞에 있는 궁전 제과점에 아이들 빵을 사러 갔다가 그 돈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몇천원어치 빵을 사다가 그 많은 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조금 정신을 차리고 장미꽃 두 송이를 사서 나주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늦은 밤이었지만 성모님 집으로 발길을 향했어요. 마침 루비노 형제님이 기도를 하고 계셨고 적은 꽃이지만 저는 장미 두 송이를 성모님께 바치고 "이 돈이 비행 청소년들의 손에 가서 쓰이지 말고 정말 돈이 필요한 사람, 책이나 납부금이 없는 사람들에게 쓰여지기 바랍니다." 하고 1시간을 울며 기도했더니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출근해서 2교시 수업하는 동안 마음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교시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니 책상 위에 '광주 삼양백화점 사장실로 전화요망'이란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즉시 전화를 해보니 현금과 가계수표 등이 있으니 가져 가라구요. 그럴리가 없다고 빈 월급봉투만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수업 끝나기를 기다리다 조급해 조퇴를 하고 광주 삼양백화점 사장님께 갔더니 그 사장님이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천주교 (영세는 안했지만) 신자라고 했더니 자기는 개신교 신자인데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광주 우체국 앞은 사람이 너무 많아 우다방이라고 하는 곳이고 또 조직 소매치기들도 그렇게 많은 곳인데 현금과 다름없는 돈이 그것도 월급봉투에 들어 있는 것이 어떻게 청소하는 아줌마가 주워서 나한테 갖고 올 수가 있지요?"라고 하더군요. 고맙다는 말만 던지고 허둥지둥 나주로 내려와 그래도 제 마음에 욕심이 생겨 20만원만 수녀님께 드려 좋은 데 써 달라고 했지만 나중에 율리아 자매님으로부터 봉헌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깨달아 봉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제가 영세를 하자마자 입덧을 하고 둘째 아기를 가졌는데 첫 아이를 32살에 낳으면서 머리가 너무 커서 난산을 했고 의사가 기적이라고까지 했던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 성모님께 계속 기도를 했지요.
그런데 8개월이 되었을 때 지나가던 어떤 할머니가 제 배를 보더니 "아들이구먼. 그런데 뒤 끝이 안좋아, 위치도 안 좋고, 자네 아기 낳다가 죽겠어, 재산도 다 날려, 그런데 집에 혹시 떨어진 런닝이나 팬티 있으면 태우고 이 부적 사서 지니면 괜찮을 거야!" 하는 소리에 저는 얼른 묵주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세 전에 사주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 했고 또 볼 줄도 알아서 남들에게 봐 주기도 했었습니다. 사실은 큰 애도 아들이라 했는데 딸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또 동료들에게 얘기했더니 죄가 안되니 속옷을 태우라고 성화였습니다. 그래서 또 성모님 집에 와서 율리아 자매님께 여쭤보니 마귀를 통해 난산을 알려 주실 수도 있으니 성모님께 묵주신공을 열심히 바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출산시 병원에서도 힘들겠다고 했지만 제왕절개로 무사히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저는 우시는 나주 성모님을 확실히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1년 6월 30일
나주본당 마리아 마자엘라

 

 

저는 이겼습니다. 

김희자
 

율리아님 성모님의 능력은 하느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몇번이고 저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잘못된 제 영혼을 불사르고 독을 씹었던 뱀의 혀를 잘라내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같이 당신은 저에게 온전한 사랑의 능력을 안겨 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을 비웃지 말자. 저의 사랑하는 이를 속이고 질투의 불꽃으로 저를 죽이고, 더렵혀 버리고 싶어했지만 저는 이제 마리아님의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수차례의 몰매를 당해 사지육신에 든 푸른 멍자욱도 지워졌습니다. 율리아님, 당신의 아픈 고통의 결과가 오늘의 월계관이듯 저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꼭 안겨 주셨습니다. 율리아님, 우리 서로 웃기로 약속해요. 당신이 나에게 마리아님의 은혜를 안겨주셨습니다. 저도 당신께 드려야할 모든 걸 커다란 수레에 담고 있답니다. 제가 다시 사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맥박을 당신을 통하여 마리아님이 주셨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분이 당신에게 수레에 가득히 보화와 선물을 전해 드릴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스러우신 율리아님 기도해 주십시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상가 APT332
김희자 드림

 

 

저의 누이는 암을 치유받았고 제 딸은 천식이 나았습니다. 

코라존 길라노

(다음은 필리핀 씨부시의 코라존 길라노씨가 보낸 편지입니다.)

친애하는 제리 신부님께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편지를 율리아 자매님께 전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저의 누이 마리나는 암을 치유 받았으며, 제 딸 에밀리는 천식이 나았습니다.
저는 율리아 자매님의 주소가 없습니다.
율리아씨께 기도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율리아씨가 오셨을 때 마닐라의 씨부 국제공항의 VIP 대합실에서 제가 율리아씨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신부님께, 율리아씨께 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1994년 3월 18일
그리스도안에서 코라존 길라노 드림

 

 

정말 고통스럽던 통증도 사라졌을 뿐 아니라
육적. 내적인 상처도 치유 받았습니다. 

베드로, 글라라 부부

저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사는 베드로입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 드리며, 이 글을 띄웁니다.
저희 부부가 처음 나주 성모님을 찾아간 것은 회사 근무관계로 광주에서 살았던 89년 1월 9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상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구경삼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의 생활은 교회에 매 주일 미사 참례와 레지오 단원으로 있었고 하여 그런대로 신자생활과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을 하였지요. 또 남들이 보더라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스톱 화투를 좋아하여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고, 그로 인하여 가정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텔레비젼 보는 것을 좋아하여 하루 3편의 비디오를 볼 정도였고, 양심도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주 성모님을 뵈옵고도 저는 회개의 생활을 이루는 계기가 되지 못하였지만, 글라라 (처)는 큰 감명을 받아 많은 회개의 눈물과 고해성사를 통해서 주님과 성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메시지 실천에 노력하였습니다.
그 후 서울로 이사하여 우리 부부는 인간관계와 금전적인 고통을 어렵게 겪어 오던 중, 90년 10월 19일 피눈물 흘리신 4주기에 글라라와 함께 철야 기도회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 자신의 삶에 대한 크나큰 회개의 은총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간의 생활에 대해 통회의 눈물을 크게 흘렸습니다.
그해 11월 3일 (첫 토요일)에 다시 나주 성모님을 뵙고자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중에 저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어려운 고통들을 저의 보속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보속으로 모두 봉헌하는 마음과 통회의 깊은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남의 시간 때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제 생의 갈림길이 되는 뜻하지 않은 은총을 받았지요.
율리아 자매께서 저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며 연거푸 트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응어리가 많이 있네요."하시고는 다시 손을 배 근처에서 멈추시더니 "허리도 아프지요?" 하고 묻길래 "예" 대답했지요. "그럼 허리도 나아야지요." 하시고 한동안 기도해 주시니 정말 고통스럽던 허리 통증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육적, 내적인 상처를 치유를 받았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한 성모님의 그 큰 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15년전부터 허리가 무척 아팠고, 선채로 몸을 굽혀 손이 땅에 닿지 않는 상태로 병원에도 여러 차례 다니며 치료한 적도 있었지요.
그후 "응어리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고 오랜 시일이 경과되어서야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응어리는 모든 일에 참기만 하여 남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의 무서운 덩어리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간 글라라도 병명도 모르는 병으로 고통을 받아 왔었는데 나주에 다니면서 자신도 모르게 치유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후부터 가정 기도를 함께 하게 되었으며, 전처럼 글라라가 기도할 때면 옆에서 텔레비젼 보는 일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지요. 또한 남는 시간은 기도와 영적 독서시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치유받은 그해 12월에 일본 동경으로 전근하게 되어 그곳에서 생활하는 첫 토요일에는 나주의 기도회를 생각하며 뜻을 같이하는 교우들과 함께 모여 기도로 밤을 보냈지요.
동경에 거주하면서도 매일 아침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은 성모님께서 주신 은총의 결과였고 그 결과로 친숙해진 동경 미카시마 성당에 에미 주임신부님을 포함해서 매일 미사에 나오는 일본 신자들에게 나주 성모님에 대한 인쇄물과 사진을 전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도 성모님의 메시지는 전파되어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한동안 메시지 전하는 일이 침체되어 있던 중 한국에 가서 나주에 다녀오시는 신자분들에게서 새로 나온 메시지를 받아 읽던 중 "너희가 메시지 전하는데 소홀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단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에 큰 반성과 감격으로 짧은 일본어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전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갖고 파 신부님과 함께 일하시는 아녜스 자매님으로 부터 입수한 일본어 메시지 (임시분)를 수십 권 만들어 이곳 저곳으로 전하게 되었고 특히 동경 카데도라 성당 (한국의 명동성당에 해당)에서 매월 첫 토요일에 나오는 일본인 신자들에게 전하여 그 신자들을 통해서 첫 토요일을 주관하시는 시무라 신부님에게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시무라 신부님은 현재 연세가 92세가 되시지만 성모 신심이 대단하신 분이며, 성모님에 대한 인쇄물과 사진을 드렸더니 대단히 감탄해 하시며 좋아 하셨고,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더 많은 인쇄물을 원하셨고 그 분을 통해서 나주 성모님은 더욱 더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시무라 신부님은 나주 성모님을 뵙기를 원하여 94년 3월 말에 일본에서 순례단 40여명과 함께 나주를 오게된 것을 보게 되어 성모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보고 저희도 일본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기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올해 5월 초에는 일본인 신자 (남1, 여2)가 첫 목요일에 나주를 순례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 눈물로써 기도를 열심히 바치게 되었고,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 기쁨을 나누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얼마 후 편지가 왔습니다.
신장염으로 고생하던 일본 자매님 하따마까상이 치유되었고 자기 딸 오야마 데레사가 5년전부터 정신병으로 고통 중에 있었는데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하여 말하는 것과 표정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으며, 또한 다른 자매님 오야마상으로부터도 연락이 왔는데 류마치스와 신경통으로 무릎과 손가락 마디의 고통으로 괴로워했는데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처 글라라는 율리아 자매님의 미소를 통하여 괴로움 중에 평온함을 얻고, 남편과 모든 이들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자신도 그렇게 변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여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를 잘 알면서도 실천을 제대로 행치 못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이 모든 것을 주신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오며 이 글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더욱 성모님과 가까워질 수 있고 메시지가 더 전파되어 모두가 자녀로서 어머니, 아버지께 공경과 찬미를 드리기를 바라오며...

 

95년 6월 17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3동 785 현대아파트 103-102
베드로, 글라라 부부 T.831-2716

 

 

정밀한 검진 후의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마리노 아달렘

 

저는 율리아 자매가 함께하는 기도 모임을 통해 깊은 감명과 경외심을 느낍니다.
성모님의 현존과 능력이 이곳 경당에 가득함을 느끼며 저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작년 1991년 5월에 미국의 한 전문의로부터 검사를 받았는데 CT촬영 결과 간경변 증상으로 인해 간암에 걸릴 확률이 있다는 결과였습니다.
저의 부인과 딸은 한국의 율리아 자매님을 방문해서 이 사실을 이야기했었고, 율리아 자매님은 저의 부인과 딸 앞에서 저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딸에게 집에 도착하거든 딸의 손을 저의 간 부분에 대고 기도를 하라고 이야기 했고, 저의 딸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저의 건강진단을 위해 미국에 다시 갔었습니다. 정밀한 검진 후의 결과는 저는 전혀 아픈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CT촬영과 MRI에서 본 것은 두꺼운 혈관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검사를 받는 동안 제가 염원했던 결과였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Marino P.Adalem
Teresifa Adalem
(Daughter) Melanie
Quezon City, Philippines 

 

1992년6월25일
마리노아달렘
테레시 파아다렘
 (딸)멜라니
필리핀

 

 

 

제가 상상하며 의심했던 성모님은?... 

김성호(도마)
 

찬미 예수
먼저 이 글을 쓰는 저는 나주 성모님께 대하여 제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쓸 것을 맹세합니다.
벌써 50개월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 같이 생생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나주 성모님에 대한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청주 봉명동 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을 때인데 정의의 모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할 때입니다.
1987년 2월로 기억되는데 단장님께서 전남 나주에서는 성모님상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기적이 일어난다는데 언제 우리 날짜를 정하고 "이 보자"하고 제의하여 모두가 O.K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날짜를 정하기 전에 본당 신부님께서 요즈음 나주 성모상이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공연히 들뜨지 말고 본연의 신앙에 열심들 하라고 하셔서 우리 단원들 어느 누구도 감히 재론하지 않았고 그 일은 흐지부지 잊혀졌습니다.
그 후 저는 1989년 9월 말경에 임자도에서 집에 가다가 문득 나주 성모님 생각이 나서 나주에서 중간 하차하여 택시  기사의 안내로 나주 성모님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상상하며 의심했던 나주 성모님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나주를 지날 때마다 성모님 집에 들러 기도를 하고 다니던 중 1989년 10월 14일 오후 5시경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성모님 집에 들어서는데 '본 비디오' 자매님이 지금 피눈물을 흘리신다고 귓속말로 전해 주어 저는 성모님 앞에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피눈물이 양쪽 볼을 타고 가슴 밑까지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아내 데레사는 제가 나주에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해주면 직접 보지 않고는 못믿겠다고 하며 저를 이상하게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피눈물을 보고 너무 놀란 저는 즉시 밖에 나가 청주 집에 전화를 하여 나주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니 청주에서 동네 자매님들을 모시고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얼른 오라고 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께 죄송하지만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의심을 버릴 때가 왔다는 데에 통감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날 해남 산이면에 급한 약속이 있어서 성모님과 함께 밤을 지새우지 못하고 그 이튿날 대강 일을 마치고 급히 성모님 집에 와 보니 12시 30분쯤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때 성모님 발 아래 깔았던 보가 흥건히 적셔져 있었는데 거의 손바닥만큼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파 신부님, 몸이 크신 외국 신부님, 외국 수녀님, 한국 수녀님 두 분 그리고 형제 자매님 몇 분이 계셨는데, 그때 율리아 자매님께서 창백한 얼굴로 성모님을 조용히 바라보실 때 성모님 이마에서는 아주 잔잔한 구슬 땀이 송송 맺혀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율리아 자매님께 "자매님, 성모님 이마 좀 보셔요. 구슬땀 좀 보셔요." 하는데도 별 반응이 없이 바라보시기에 피눈물 흘리실때는 늘 이런 현상이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신비하고 신기한 것은 성모님상에서 피눈물 흘리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이 크시면 이마에 땀까지 맺히시는가? 하고 깊은 감회에 빠졌습니다.
그 후 묵주 기도 고통의 신비 중간 쯤 바쳤을 때 율리아 자매님은 쓰러져 고통을 받으시는데 눈물이 메마른 저도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근 1시간 정도 고통을 받으시고 파 신부님의 강복을 받은 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들 것에 실려 집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직접 본 저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은 죄의 회개를 위하여 흘리시는 성모님의 피눈물 그리고 이마에는 분무기로 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작디 작은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는 성모님의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 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성모님의 도구가 되어 고통 받으시는 율리아 자매님,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계획이 아니시면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현실, 이 광경들을 보고 저의 텅빈 가슴은 아픔으로 채워지고 메워지는 듯 했습니다.
그 뒤 1989년 초겨울 오후 4시경 또 다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성모님 집에 들렀습니다. 성모님 방에 막 들어서는 데 어느 자매님 한 분이 마구 뒹굴며 아버지를 찾다 어머니를 찾으며 큰 소리치며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그럴께요" 하며 방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하여 성모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같이 온 듯한 자매님이 "형제님, 같이 좀 도와주셔요." 그 자매님과 저는 소리치며 뒹굴던 30대의 젊은 그 자매님을 끌다시피 방으로 옮겼습니다. 처음 제 느낌으로는 심한 마귀에 사로잡힌 정신 질환자로 보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허리가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혼수상태에서 뒹굴었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자매님, 걱정하지 마시고 확신을 가지셔요.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는 나자로도 명령 한마디로 살리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으며 심하고 심한 나병 환자도 깨끗하여져라 하시는 말씀으로 깨끗하여졌는데 주님께서는 허리 아픈 것보다 더한 병도 꼭 낫게 하여 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만 가지고 기도하시면 성모님의 집에까지 오셨으니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모님의 도움과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될 것을 믿고 우리 세 사람은 묵주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픈 자매님은 누워서 기도를 했지요.
그 때 생각지도 않았던 율리아 자매님이 미소 띤 얼굴로 우리를 향하여 "오셨어요?"하고 반가워 하시며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중이시던 율리아 자매님은 그 아픈 자매님을 끌어안고 기도를 하시자 율리아 자매님 얼굴은 열기로 달아올랐습니다. 힘이 드셨겠지요. 그런데 아파 신음하던 자매님은 손도 땅에 대지 않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지켜보던 저와 함께 기도하던 자매님은 너무 놀랐습니다. 성한 사람도 누운 채 손을 땅에 대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 자매님은 강시처럼 일어나서 경당으로 나가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인제 정말 괜찮아요." 하며 줄넘기 선수가 줄넘기하는 식으로 뛰다가 손을 천장을 향해 올렸다 내렸다 하고 발은 깡충깡충 뛰어 다녔습니다.
그 자매님은 너무 좋아 울면서 우리에게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몇 년전에 허리가 너무 많이 아파 병원엘 갔는데 너무 늦어 수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으나 수술비를 마련하면 더 급한 데가 있어 쓰게 되는 것이 두 번이나 반복되자 하느님을 미워하기 시작했답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신다면 나같은 어려운 사람에게 이렇게 난치병을 주셨겠으며 수술비만 마련되면 더 급한 곳이 생겨 수술비를 빼앗길 수가 있겠는가 하고 하느님을 미워하며 등돌리고 냉담을 했답니다. 밥도 못 짓고 아무 일도 못하게 되자 같이 오신 자매님이 나주 성모님 집에 가 보자고 몇 번 권고했으나 냉대했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포기하지 않고 자꾸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 집에서 치유됐으니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가자고 하여 오늘 성모님 집을 찾아 왔는데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치유의 은사 말만 들었지 처음 보는 일이었기에 놀랍기만 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친한 친구 선후배 또는 우리 구역 반 모임 때 가끔 이야기했지만 혹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판단할까 봐 아무데서나 차마 말을 못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그 때 일어난 사실들에 대하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기록했다는 것을 믿으시고 주님과 성모님의 위로자들이 되도록 주님과 성모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늘 부족한 저희들에게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성모님 찬미 영광 받으소서!

 

1995년 2월 19일
청주시 운천동 진양 APT3-303
김성호(도마) 올림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사랑하셔서 살려주셨나요 

오 빅토리아

제가 받은 은총이 너무 크고 많아 모두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주신 물로 치유받은 은총에 대하여 주님께 영광을 성모님께 감사드리기 위하여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제가 가장 사랑받았고 가장 사랑했던 아버님이 돌아가신 충격으로 만성 위장병과 다른 여러가지 속병으로 고생하며 물만 먹어도 토하고 밥도, 도시락도 없이 10여년의 세월을 지탱해오다 결혼을 하고나서 조금 나아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여러가지 고질병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어찌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남 모르게 구토를 일삼으며 음식을 거의 멀리하고 사는 이 죄인을, 그리고 죽음 직전의 이 죄인을 나주 성모님께서 당신 품으로 불러 주심은 어둠에 사는 이 죄인에게 광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너무나 많은 영적, 외적 은총을 받았지만 고질병은 고치지 못했는데 하루는 여러 형제 자매님들과 예수님이 주신 샘터에 가서 물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 물을 먹으면서 이단처럼 아니, 마리아 점쟁이처럼 교만한 그들도 회개하길 바라며 그들을 죄짓게 한 제 탓을 생각하며 그들이 불쌍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성혈로, 예수님의 성혈로 우리 모든 영혼 육신 치유하소서. 아멘." 하고 먹었던 물을 세어보니 컵도 아닌 대접으로 24그릇이나 먹었어도 배가 부르는 줄도 모르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산에서 전 부치는 냄새가 고소하게 났습니다. 저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율리아 자매님이 "예전에 어려서부터 먹지 못했던 것 모두 채워주시나 보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버님을 여의고 그 충격으로 거의 먹지 못하고 물 마저도 토하면서 살아왔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 말에 대하여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시간 이후로 악성 위장, 십이지장궤양, 간, 그뿐만이 아니라 신장 이식 수술까지 해야될 직전이기에 위험하니 결혼하면 아이까지도 낳으면 안된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고 또 페인트 스프레이가 쓰레기 더미 속에 들어 있는 걸 모르고 쓰레기를 태웠는데 스프레이가 폭발하여 머리와 얼굴 전체가 다 타버렸는데도 입원할 형편도 못되었고, 병원도 가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거쳐 낫기는 했지만 머리가 다시 나와도 노란색이며 부시시하고 얼굴은 험상er었고 입술도 죽은 색이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물을 먹고 부족한 이 죄인은 이 모든 것 하나도 빠짐없이 깨끗이 치유되어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얼굴도 화장한 얼굴처럼 피부색이 돌아왔으며, 입술도 입술라인을 그려 립스틱 바른 정도로 변했으니 이 모든 것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이 아니고 또 무엇입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온 몸에 두드러기인지, 풀독인지, 피부병인지 온 몸에 좁쌀처럼 돋아나 여러가지 약도 발라보며 병원도 가 봤지만 낫기는 커녕 더 심해만 갔습니다. 너무 가렵고, 뜨겁고 아파 울기까지 했는데 하루는 율리아 자매님이 오라고 하여 기도하고 성모님 물을 발라주니 깨끗하게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딸은 나면서부터 별로 예쁜 행동은 하지 않고 커가면서도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기억력도 없고 너무 느리며 미운 행동만 골라하니 청개구리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아빠도 예뻐하지 않으니 딸은 "아빠, 진짜 우리 아빠야?" 할 정도였습니다. 건망증이 너무 심하여 공책과 학용품을 사줘도 학교에서 잃어버리고 전혀 모르면 또 사주고, 공부에 전혀 의욕도 없었는데 1993. 5. 5. 성모님 산으로 데리고 갔는데 성모님이 주신 물을 먹은 뒤 성모님 산에서 뛰어 놀더니 그때부터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지금은 아빠를 너무 사랑하고 아빠도 딸을 사랑하니 서로 농담도 잘하고 너무너무 기쁘게 생활하며 이제 초등학생인데도 엄마의 일도 도와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면서 엄마 아빠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스승의 날이면 선생님께 묵주를 선물로 드리고, 친구들을 데리고 성모님 집에 와서 설명해 주며 전교도 하고 자랑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렇게 하기 싫은 공부, 듣고 뒤 돌아서면 모두 잊어버리던 아이, 그러나 성모님의 손길로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 나주 성모님께서 하루 빨리 인준이 되어 많은 사람이 영적, 육적으로 치유받아 성모 성심이 승리하시길 빌며 영광 받으시기 바랍니다.

 

1995년 6월 9일
 

 

 

주님을 배반했던 이 중범자를 성체의 기적을 통하여 불러주시다니

노희영(베드로)
 

* 이 편지는 율리아 자매가 하와이 성모님 대회에 참석하였던 전후에 있었던 내용들을 기록하여 보내준 미국 교포 노 베드로 형제의 글이다.

어릴 때의 나
저는 8살 때 어머님을 따라 천주 교회에 입교하여 다음 해 성탄절 때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 후 어린 시절 시골 고향에 있을때는 주일마다 어머님과 같이 같은 마을의 주일 공소에 나갔으며 성당에 행사가 있을 때는 왕복 24km를 걸어서 다녀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학업 차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와 생활할 때는 처음에는 주일에 성당에 나가다가 나중에는 점차 열의가 식어 마음에 내키면 이따금 한번씩 다녀오곤 하였습니다.

미국의 이민 생활과 신앙 생활
그 후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위로받을 곳을 찾지 못한 이민 생활에서 다시금 성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생활과 가정 문제는 그 때부터 사탄의 꼬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신앙 생활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되니 교회를 비판하고, 사제님을 저울질하게 되었으며 또한 같은 교우들과도 충돌하며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사탄의 장난은 더욱 기승을 부리어 저의 가정에까지 뛰어들어 불신과 불화의 소굴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한인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가끔씩 미국 성당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저의 마음엔 언제나 의심과 부정 속에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식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의식이며 상징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하느님의 존재가 의심스러웠으며 창조론을 거의 부정하며 진화론을 인정하는 마음이 제 마음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저는 완전히 성당 다니기를 그만 둔 지가 10여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의 피맺힌 유언
저의 어머님과 하와이에 살고 있는 저의 여동생은 언제나 저의 영혼을 걱정하며, 제가 다시 주님 앞에 서도록 저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LA의 동생 집에 사시다가 지난 8월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는 제가 성당에 다시 나가기를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LA 성 바실본당 김의철**** 신부님께서는 특별히 저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노베드로가 성당에 나오지 않으므로 어머니께서 항상 괴로워하셨으며 마지막 피눈물로 호소하시며 기도하셨다."고 장례식 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머님의 장례와 제반 사항에 LA 성 바실성당의 연령회 회원과 교우들의 정성어린 위로와 봉사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저의 마음에 생생합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신앙의 힘만이 행할 수 있는 참된 마음의 봉사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와이 동생으로부터 받은 율리아 자매의 소식
그 뒤 하와이에 사는 동생 안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주의 율리아 자매가 성모님 대회의 연사로 초청되시어 이곳에 오게 되니 꼭 참석을 하여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동안 나주 성모님의 기적에 대한 많은 비디오 테잎과 책자를 동생한테서 우편으로 받았지만 별로 믿지를 않았고, 그렇게 되니 그 우편물들을 책상 한 구석에 쌓아두고서 보지도 읽지도 듣지도 않고 다시 보내는 일이 많았기에 이번의 하와이 초청은 마음에 전혀 없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동생의 열망을 그냥 저버릴 수는 없어서 10일 전에 직장의 상사에게 1주일의 휴가를 신청하였더니 워낙 바쁜 때라 휴가는 완전 불가능하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동생의 부탁에 대한 의무는 실행에 옮겨봤으므로 불참에 대한 나의 책임은 없다고 저 스스로가 자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비행기 좌석
그런데 율리아 자매께서 하와이에 도착하기 하루전인 10월 27일 뜻밖에 직장상사로부터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1주일간의 휴가를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연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퇴근시간이 임박한 때라 부랴부랴 항공사에 연락을 해보니 하루 전 임박한 예약이기에 항공료는 1280달러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애틀에서 하와이까지의 항공사는 다 연락을 해 보니 다 한결같았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저에게는 그 액수가 적은 액수가 아니었으므로 부담이 커서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불현듯 하와이 항공사에 전화하는 걸 잊고 있었음을 생각하고 전화를 해 보니 단 하나의 좌석이 남아 있는데 387달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는지... 급히 예약을 하고 부랴부랴 여행사 문을 두드렸을 땐 직원들이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극적으로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다음날 아침 일찍 여행사가 문을 열기 이전에 비행기가 출발하기에 극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비행기가 이륙한 뒤 안내원에게 좌석이 얼마나 빈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308석 중 빈 좌석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율리아 자매 하와이에 도착하다"
제가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동생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오빠를 이렇게 보내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제가 이번 성모님 대회에 참석하고 또 성당에 나가게 해주시라고 9일의 단식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날 늦게 우리는 공항으로 율리아 자매의 영접을 나갔습니다. 처음 보는 자매의 모습은 보통 사람인 우리와 별다름이 없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상하며 차별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와 소박하고 자애로운 미소는 누구에게나 안정과 평화와 신의를 주고 있었습니다.

동생에게 준 자매의 성모님상
자매는 동생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주의 성모님상과 똑같이 만든 상이었습니다. 자매는 호텔에 계시고, 동생과 같이 집에 돌아와 포장된 성모님상의 상자를 열었을 때 풍기는 장미꽃 향기로 온 집안은 가득하였습니다. 그 향기는 짙은 장미꽃 향기로서 어쩌면 아름다운 장미꽃의 향기보다도 더욱 향기로웠습니다.

꿈 속에 보여주신 성모님상과 향기
그날 밤 동생은 그 성모님상을 제가 자는 방 침대의 머리맡에 모셔 주었습니다. 새벽 1시에야 잠자리에 든 저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성모님상이 저를 내려다보고 계시고 그 옆에는 율리아 자매가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상의 모습은 뭔가 깊이 생각하시며 저를 측은히 바라보시고 계셨고 율리아 자매도 같은 표정이셨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장미꽃 향기가 저에게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향기는 어찌나 짙고 향기로웠던지 저는 그만 잠을 깨고야 말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습니다. 그러니까 겨우 1시간 잠을 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 속에서 맡았던 그 향기는 전연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이상함에 놀라서 천주경, 성모경, 그리고 영광송을 바치고 기도를 드린 후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시애틀에서 하와이까지 약 6시간에 걸친 여행과 3시간의 시차 등으로 몸은 몹시 피곤해 있었으므로 다시 깊은 잠이 들었을 때 또 처음과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성모님상과 율리아 자매, 그리고 짙은 장미꽃 향기가 갑자기 코에 밀려 왔으므로 불현듯 잠이 깨었습니다. 잠을 깨어보니 정말 꿈 속에서 맡았던 장미꽃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정말 그 짙은 향기는 수백, 수천의 장미꽃 송이들에서 풍기는 향기처럼 온 방안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잠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신기롭고 이상한지 몰랐습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두 번이나 저의 꿈 속에 나타나셨고 그리고 그토록 아름다운 향기를 주시고 계실까?

하늘의 문이 사진에 찍히다.
그날 10월 29일 토요일 오전 9시 반에 노천 WAIKIKI SHALL(야외 음악당) 성모님 대회가 열리고 있는 곳에서 아침미사가 있었습니다. 날씨는 아주 화창하게 맑았고 춥지도 더웁지도 않은 날씨는 모든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된 미사가 끝나고 율리아 자매가 자리를 일어섰을 때 많은 분들이 자매를 알아 보고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 어떤 젊은 외국인 하나가 율리아 자매 앞에 나타나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 대회장 미사에 참석할 때 이상하게도 태양의 사진을 찍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더니 이렇게 나왔노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그 사진들은 즉석 사진기로 찍은 4장의 사진이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황금색으로 된 아취형의 찬란한 빛으로 빛나는 큰 문이었고, 그 안에 태양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야기는 하도 이상하여 2번째 사진을 찍었더니 똑같은 모습이고, 세번째도 똑같은 형상이었으며 4번째 사진은 그냥 태양만 나왔고, 다섯 번째도 그냥 태양만 찍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의 이야기는 예전부터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GATE OF HEAVEN (천국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천둥 소리와 장미꽃 향기가 나다
다음날 10월 30일 일요일
이 날은 3일간 계속된 성모님 대회 마지막날이며 이 날 마지막 시간인 3시 15분에 율리아 자매의 증언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계획엔 3시 15분부터 4시 15분까지 1시간이 배정되어 있었습니다. 언제나 하와이 날씨가 그러하듯이 오전에 시원하고 오후엔 무척이나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89。F(29。C)의 날씨였습니다.
3일 동안의 성모님 대회를 치른 많은 신자들은 모두 지쳐있었으며 주말이 끝나는 늦은 오후인데다 날씨마저 너무 강하였기에 많은 청중들이 참석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수많은 청중들이 율리아 자매를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율리아 자매의 증언 강연은 처음부터 열기에 차 있었으며 약 2천여명에 가까운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의 증언 중 장미꽃 향기가 갑자기 제 코 앞에 닿는 것이었습니다. 그 짙은 향기는 은은히 나는 향기도 아니고 마치 선풍기로 짙은 장미꽃 향기를 제 얼굴에 쏘아대는 듯한 강렬한 향기였습니다. 더우기 놀라운 것은 그 향기가 저의 얼굴에 닿기 전 하와이의 강한 열풍이 제 등 뒤에서 불어 연단 자매님이 서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짙은 장미향기는 바람이 향하는 정반대 쪽에서 저의 얼굴에 계속 밀어닥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옆자리의 외국인에게 "무슨 향기가 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분의 말이 "예, 강한 장미꽃 향기입니다."하고 감격하는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청중들이 숨들을 모두 들이쉬며 그 향기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장미꽃 향기는 성모님의 메시지에 "내가 특별히 너희와 함께 하고 있는 증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그 향기는 WAIKIKI SHALL에 모인 모든 청중들이 다 맡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매의 메시지 전달 중에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습니다."하고 말했을 때 청천 맑은 하늘에서 천둥치는 소리와 우박이 내리는 듯한 소리를 모두 들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의 폭음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율리아 자매의 증언은 당초 할애된 1시간을 훨씬 넘어 2시간 1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회개의 울음바다가 된 대회장, 많은 메시지 전달 중 지금 이 세상은 주님께서 일찌기 예언하셨던 "불의 심판의 날"이 머지 않았으므로 종말을 예고하는 여러가지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각종 천재지변, 재해와 범죄와 악들이 들끓고 있는 것은 마귀들이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발악하고 있으며 특히 악의 원천인 가정파탄과 마약, 살인, 낙태, 교회와 사제 비방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파괴하고 있다고 성모님의 말씀을 전달하셨습니다.

마지막 자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기도 중 모든 사람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WAIKIKI SHALL (와이키키 야외음악당) 전체가 다 통곡의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속으로 통회하며 울다가 나중에는 모두들 통곡을 하며 회개하고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습니다. 자매의 마지막 기도가 끝났을 때 시간은 5시 3분으로 할애된 시간 1시간을 훨씬 초과한 2시간 15분이나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장님이 나타나다
자매의 증언이 끝나고 음악당 뒤 연단으로 내려 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자매를 가까이 보기를 원했으며 손을 잡아보려고들 하였습니다. 손을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매의 한복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들 하였습니다. 자매는 군중에 둘러싸인채 그들에게 밀려 출구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한국말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어- 어디에 있어, 응. 어디에 있어?" 모두들 영어로만 이야기하는 장내에 한국말이, 그것도 절규에 가까운 그 음성은 너무도 제 귀에 또렷이 들렸습니다.
언뜻 뒤를 돌아보니 백발에 가까운 깡마른 한국 할머니 한 분이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방향감각을 잃은 채 절규하며 율리아 자매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한국분이기에 더욱 반갑고 또 가엾게 생각이 되어 그분의 오른손을 꼭 잡으며 "저기에 있어요. 저를 따라 오십시오." 하며, 그분의 손을 끌며 군중을 헤치고 율리아 자매 곁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매님! 이분이 장님인데요!" 하자 자매는 동작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두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할머니의 두 눈을 눌러주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묵주를 들고와서 자매가 만져주기를 원했습니다. 누구의 소유든지 자매가 만져주는 묵주나 성물은 짙은 장미향기를 내뿜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매의 손목과 옷자락을 잡아 보기를 원하고 묵주와 성물들을 만져주기를 원했던지 연단은 내려갈 수가 없어 결국은 경비가 와서 그의 보호 아래 그곳을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PARTY(잔치)를 준비하다
다음날 오후 5시에 WAIKIKI SHALL 정반대쪽 20여km 떨어진 곳 KAILUA에 사는 동생 안나의 집에서 율리아 자매의 하와이 성모님대회 참석을 환영하는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집이 협소하여 많은 사람들을 초청할 수가 없어 알리지 않은 관계로 50~60명 정도가 참석할거라고 동생은 말했습니다. 실내는 협소하므로 마당 잔디밭에 식탁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음식은 POT LUCK (한가지씩 준비하여 오는 음식)으로 하고 Table설치와 전기시설, 그리고 마이크 장치는 친구인 JOHN.K KAMANU씨가 맡아 해주었습니다.
MR. KAMANU는 저와는 절친한 친구로 20여년 전인 1975년에 저를 훈련생으로 초청받게 해 준 저의 은인으로서 형님 두분이 목사였으며 조카들 셋이 목사인 아주 충실한 기독교 신자이십니다. 이 분이 제반사항을 준비하며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밤 비가 내린다고 일기예보 방송을 들었으며 마이크는 장치하되 오후 8시가 넘어서는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법과 시법에 오후 8시가 넘어서는 절대로 이웃이나 상대방에게 방해되는 어떠한 행위나 소음내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후가 되자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먹구름이 끼고 있어 걱정을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5시 가까이 되자 많은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실내에 준비한 의자가 28개, 실외 잔디밭에 준비한 것이 72개 등 모두 100개의 의자가 모두 들어찼고, 빈 의자가 없어 다른 물건들을 의자삼아 앉아있고 서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두들 빈손으로 오지않고 각기 다른 음식을 한가지씩 들고 왔으므로 음식의 양과 숫자는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음식과 가지수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미국생활에서 처음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장님이 뜬 눈으로 PARTY에 나타나다
마침내 PARTY를 시작할 5시가 다가왔습니다. 이번 잔치의 주인공인 율리아 자매의 기도가 있은 뒤에 시작되는게 예의로 되어 있어 자매가 나타나기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는데 자매가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반시간이 지난 뒤에야 율리오씨 (율리아 자매의 부군)가 나와서 말하길 지금 율리아는 고통 중에 있어 나오지를 못하나 고통이 끝나면 곧 나올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6시가 지나도 자매는 나오지를 않아 모인 신자들은 모두 묵주신공을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묵주신공이 끝나고 7시가 되어도 자매는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자매를 도와주고 있던 마리아씨가 나타나서 일러주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는 지금 오른쪽 어깨와 허리, 엉치에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어느 30대 초반의 젊은 여자 한 분이 마이크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저는 5년 전부터 오른쪽 허리를 다쳐 그곳이 악화된 후 다리와 어깨까지 쓰지를 못하고 이곳에도 간신히 왔는데 갑자기 조금전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고 오른쪽 허리와 엉치, 그리고 다리가 화끈거리기 시작하더니만 지금은 그 통증을 느낄 수 없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여자 분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어느 할머니 한 분이 마이크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어제 성모님 대회장에서 뵈었던 그 장님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분은 장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자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백내장으로 앞을 보지를 못하고 고통을 받던 장님이었는데 어제 성모님대회때 율리아 자매를 찾아가 보려고 하였으나 앞이 보이지를 않아 찾지를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 내 손을 꼭 잡고 율리아 자매한테로 인도하여 '이분이 장님인데요' 하고 말하자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나의 두 눈을 꼭 눌러주시며 기도해 주신 후 두 눈을 뜨게 된 기적을 주님께서 저한테 주시어서 나는 이렇게 성한 두 눈을 가지고 이렇게 여기를 찾아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모두들 그 사실에 놀래었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오래도록 장님이었던 그분이 이제는 장님이 아닌 정상적인 두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적입니다. 이분의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놀람과 동시에 주님의 전능하신 치유의 기적을 율리아 자매를 통해서 이 할머님께 주셨음에 감사, 눈물로써 기도를 드렸습니다.

율리아 자매가 드디어 나타나다
밤 9시경이 되어서야 자매가 두 분의 축복을 받으며 간신히 나타났습니다. 자매의 얼굴은 몹시도 창백하고 지쳐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엾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고서 갓 일어난 환자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자매는 일어서 있을 수가 없어 부축받아 앉은 채로 기도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나주 성모님 상에서 일어난 기적들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의 음성으로 몹시도 힘겨운 목소리였으나 점차 그 음성은 또렷해지고 힘차고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통역하는 분이 없었으므로 미국인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전연 알아듣지 못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들 하였습니다.
자매의 이야기 중 짙은 장미향기가 풍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만이 향기를 맡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그 향기에 놀라고들 있었습니다. 자매의 성모님과 주님께 바치는 마지막 기도 때엔 모두들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지막 기도가 끝났을 때의 시간은 0시 30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9시경에 시작된 자매의 메시지 전달은 장장 3시간 반 가량이 걸렸지만 그동안 물도 한모금 마시지 않고 잠시의 쉼도 없이 지속된 그 힘찬 음성과 모습은 우리들에겐 마치 20분과도 같은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MR. KAMANU씨 5가지 기적을 체험하다
다음날 JOHN KAMANU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어제 저녁에 너무도 놀라운 5가지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첫째, Party가 끝난후 집에 돌아와 보니 비가 많이 내려있었는데 불과 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파티장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KAILUA 전 지역에 모두 비가 내렸는데 그 파티장 주위 일대만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율리아 자매의 이야기 중 갑자기 장미꽃 향기가 나길래 이상하다 싶어 몰래 그곳을 빠져나와 집주위 이곳 저곳을 다녀보니 어디를 가나 장미꽃 향기가 가득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경찰이 나타나서 율리아 자매의 증언을 제지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밤 8시 이후에는 절대로 소음을 낼 수 없으며 전축을 소리높여 듣는다거나 또는 부부싸움만 하여도 여지없이 경찰이 나타나는 곳이 이곳인데 자정이 넘도록 마이크를 사용하였는데도 주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치 않은 것은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진정시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율리아 자매가 한참 열변을 토할 때 율리아 자매가 성모님처럼 보였으며, 자기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성모 마리아처럼 보이는 율리아 자매의 표정과 억양에서 감정이 통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자매의 기도와 증언은 무려 3시간 반 이상이나 지속되었는데도 모두들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경청하였고 그 중 몇 사람은 선 자세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듣고 있었으며, 그 중 자기가 아는 사람 하나는 허리를 다쳐 고통을 참지 못해 한 곳에 2분 이상을 앉아있지 못하고 자리를 바꿔야 하는 형편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바위처럼 앉아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기독교인에게 보여주신 성모님
미국인 JOHN KAMANU씨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나는 두 형님을 목사로 두었으며 조카 셋을 목사로 두고 있는 전형적인 기독교인이다. 나는 모태의 신자이며 우리는 천주교에서 모시는 성모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부인하여 왔으며, 우리 집안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이번 보고 느낀 기적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개신교에서도 성모 마리아를 의식하여야 되며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엄숙히 말했습니다.

성체학자이신 세계적인 신부님께서 찾아오시다
11월 2일 오늘은 화창하고 아주 좋은 날씨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율리아 자매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 보시길 원하시던 MARTIN LUCIA신부님께서 MR. BRIEN(이번 성모님대회를 주관하신 분)씨를 대동하시고 동생 안나의 집으로 오전 10시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성체학을 연구하시며 성체의 신성함과 중요성을 세계에 다니시며 역설하시는 TEXAS에 적을 두신 신부님으로서 전세계에 500교구 이상을 다니시며 연설하신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분이시며 이번 하와이 성모님대회에 초청연사로 특별히 이곳에 오신 신부님이십니다.
율리아 자매와 서로 자리를 함께 하신 신부님의 그 인자하심과 쾌활하신 성품을 금방 알 수 있었으며,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심이 신부님의 인품에 넘쳐 흘렀습니다. 자리를 마주하신 신부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로부터 무엇인가 알고 싶어하시는 호기심과 의혹으로 가득차 계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체신심에 대해서 주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듯 차근차근 꼬치꼬치 캐 물으셨습니다. 수많은 질문의 답변을 듣던 신부님께서는 Wonderful ! 을 몇 번이나 연발하시고 감탄하시었습니다. 장장 2시간 이상 질문을 하시고 답을 들으신 후 자매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스스로 성체를 연구하시며 장차 교회에서 성체신심의 중요성을 역설할 전도자를 육성하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미국인 15명, 오스트레일리아인 2명, 한국인 2명, 필리핀인 2명, 프랑스인 2명, 폴랜드인 2명으로서 25명을 제자로 육성하고 계시는데 그분들에게 더욱 용기를 북돋울 수 있도록 편지 한 장을 써달라고 하셨습니다. 편지를 받아 쥐신 신부님께서는 무척이나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으며 두 눈은 활활 타는 용광로처럼 광채를 발하고 계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갑자기 율리아 자매에게 "지금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율리아 자매가 "신부님의 뜻이라면 좋다."고 말씀드리자 이번에는 동생 안나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이 집에서 미사를 드려도 좋겠느냐."고 물으시자 동생은 "큰 영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그 성체의 기적
신부님께서는 MR. BRIEN에게 미사 준비를 해달라고 말씀하시자 그분께서는 MICHAEL CENTER(HONOLULU에 있음)에 연락을 하겠다고 하며 전화기를 들 때, 율리아 자매가 신부님께 건의하였습니다.
"가능하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게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리자 신부님께서는 이곳 하와이 지역을 잘 모르시므로 MR. BRIEN에게 "가까운 성당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2km정도 떨어진 곳에 성 안토니오 성당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율리아 자매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이시어 그곳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MR. BRIEN 씨는 2km 정도쯤 떨어져 있는 MICHAEL CENTER에 전화를 걸어 미사 준비를 부탁했습니다.
그후 신부님과 율리아 자매, 그리고 우리들은 마당 잔디밭으로 나와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향하였습니다. 성당에 도착하여 조금 있자 MICHAEL CENTER의 MR. THOMAS PERREIRA씨가 성모님상 (이 성모님상은 율리아 자매가 특별히 마이클 센타에 기증하신 상임)을 모시고 도착하였고, 우리들은 소성당에서 미사준비를 하는 동안 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MR. BRIEN, THOMAS, 율리아 자매, 부군 율리오씨, 동생과 부군 RICHARD NAKAMURA, 한국에서 오신 율리안나씨와 저 모두 8명이 참석한 소성당의 분위기는 너무도 조용하며 엄숙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예감이 이상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꼭 보여주실 것만 같았습니다.
이윽고 오후 2시경에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성체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축성하실 때 그 성체가 번쩍 빛나며 광채를 발하였습니다. 모두 성체를 영한 후 자리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있었을 때 바로 저의 왼쪽자리에 앉아있던 율리아 자매가 부르르 한번 떠시었습니다.
그러자 성작을 닦고 계시던 신부님께서 급히 내려오셔서 율리아 자매의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저는 급히 일어나 율리아 자매를 보았습니다. 눈을 감고 엄숙하게 앉아있는 자매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나 조금은 근심어린 표정과도 같았습니다.
이윽고 자매가 입을 열었을 때 성체는 거의 다 녹아 있었고 녹다 남은 한 조각의 성체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 조각이 살색깔로 변하면서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부풀어 오른 성체는 붉은 살덩이로 변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잠시 후 그 살덩이는 검붉은 핏덩이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그 핏덩이는 녹아 새빨간 피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MARTIN LUCIA 신부님께서는 율리아 자매의 손을 잡으시고 엄숙히 기도하시고 계셨습니다. 얼마후 율리아 자매에게 성체를 삼켜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너무도 엄청난 성체의 기적에 그저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성체의 봉헌은 그저 교회의 의식에 불과하며 상징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미천한 생각과 성체를 모독한 이 중범자에게 왜 주님께서는 이런 기적을 보여주셨을까?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은 통곡으로 변했고 눈물은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교회를 떠난 자!
그리고 어머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자, 이 불효자!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품으로 나를 안아 주시지 않았는가!
그저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드렸습니다.

신부님께 내리신 주님의 메시지
율리아 자매께서는 돌아온 탕자인 저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 루치아 신부님께 주님의 메시지를 전해드렸습니다. 성체의 기적이 일어나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체의 중요성과 신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필리핀 오제리 신부를 통해서 성체의 기적을 보여주었고 이번 너에게 나의 기적을 보인다. 앞으로 오제리 신부와 사랑의 고리로 단단하게 손을 맞잡고 성체의 거룩함을 온천하에 전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새로 받으신 메시지 말씀을 신부님께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를 전해 들은 마틴 루치아 신부님께서 뛸 듯이 기뻐하시며 감격해 하셨습니다. 이제껏 평생을 성체연구에 바치시고 그 성체사업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에 평생을 바쳐오신 신부님께 이보다 더 큰 주님의 선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부님께서는 몹시도 흥분해 하시고 이 벅찬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 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두 눈은 첩첩 산맥 천리라도 꿰뚫으실 듯 보였으며 활활 타는 용광로처럼 빛나고 계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 기적!
그 누가 주님을 부인하랴!

미소 지으신 성모님상
신부님께서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율리아 자매를 통해서 전달 받으신 후 기념촬영에 응해 주셨습니다.
그 때 소성당 제대안에 모셔 두었던 성모님상이 크게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양 입가에 주름이 잡히실 정도로 웃고 계셨습니다.
그 웃는 모습은 너무도 온화하시고 다정해 보이셨습니다. 모두들 놀라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성모님상을 이곳으로 모시고 온 THOMAS PERREIRA씨가 말했습니다. 미사를 준비해 달라는 전화를 받기 전에 갑자기 이 성모님상에서 장미꽃 향기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때 THOMAS는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장미꽃 향기가 나길래 이상하다 싶어 사무실로 들어와 보니 그 향기는 바로 성모님상에서 풍겨나오더니만 조금 후 전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나
저는 이제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주님을 배반하고 사제를 독설로써 비방하고 교우들을 모함했으며, 주님의 실재마저도 부인했던 가엾고 또한 구제받을 길 없던 중범자를 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시고 당신께서 실존하고 계심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동안 저의 동생이 저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드렸으며 저의 어머님께서는 제가 다시 성당에 올 수 있도록 주님께 눈물로 호소하시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이미 천국에 계실 저의 어머님께서는 이 사실,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하실지 모릅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이 죄인을 용서하사 당신의 품으로 안아 주십사"고 간청해 주신 성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시궁창에 버려진 이 영혼과 생명 구원하사 당신께로 인도해 주신 주님, 이 기쁨, 이 영광 모두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아멘!

 

1994년 12월
1681. SW. 327th. STREET. FEDERAL WAY/
WA 98023-6406U.S.A
PETER H. NO 노희영(베드로)
T.(206)838-5851

 

 

 

짙은 장미향 내음은 어찌 그리도 향기롭고 그윽한지 

박 마리아

안녕하신지요. 나주에 계신 교우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성모님의 은혜를 받으시며 모든 어려운 시련들을 보속으로 희생하시는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기도 생활을 하시는 모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묵상하노라면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겪은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들이 사실은 주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려웠던 시련이 지나면 광명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용기와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8월 18일에 나주 성모님을 방문하였던 미국 산호세에 사는 박마리아입니다. 마음으로 그리던 성모님을 뵈옵던 기쁨에 그저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몇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2주일의 시간은 짧았지만 저는 많은 경험을 하였고 하루 하루가 은총의 나날이었습니다.
성모님을 뵙던 그 순간에 느끼던 기쁨과 평화는 어머니의 사랑안으로 스며들던 기도와 짙은 향기 속에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영성적인 고요함이 아직도 가슴 뿌듯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오르는 환희와 너무도 잔잔하던 평화에 감사드리며 성모님의 은혜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몸 안으로 안겨오는 그 아늑함이란 그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었습니다.
특히 성모님을 가까이 뵈올 때 풍기던 짙은 장미향 내음은 어찌 그리도 향기롭고 그윽하게 가슴에 와 닿는지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벌써 몇 년 전이던가요. 나주 성모님의 책자와 비디오를 보았을 때 너무나도 두려웠고 또 애처로웠던 일들이 그러나 성모님을 만나뵙고 받은 평화와 기쁨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어머님의 자비와 우리를 불쌍히 여겨 한없는 사랑을 주심이라고 느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원의를 위하여 우리들의 작은 희생들이 모아져서 보속으로써 빛을 발하여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 엉기던 의심과 어리석음이 다 부질없음을 깨닫게 하였으며 기도의 참뜻과 희생의 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진정 성모님을 위하여 아니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작은 정성과 기도를 모아 어머님께 봉헌하여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방문했을 때 주셨던 상본들은 한인천주교회에 배부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였으며 또한 영문으로 된 상본 역시 미국성당에 배부하였습니다. 혹 작은 상본이 더 있다면 더 많은 분들께 나누어 드리려고 하지만 상본이 없습니다. 아울러 소식지 몇 부를 보내주시면 더욱 더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기도와 희생을 함께 나누며 성모님의 말씀에 따르는 한 자녀로서 작은 모든 것까지도 봉헌하며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과 주위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1992년 11월 12일
박 마리아

 

 

 

죽은 이의 무덤속이 좋아보였는데... 

서상길(도마)

저는 1972년 고등학교 3년 때 정신분열증세가 보이기 시작하여 공부도 잘 안되고 대학 예비고사도 치르지 못하고 1973년에 입원하기 시작하여 거의 매년 1-2회 입원해 왔습니다.
1995년에도 언제 입원할지 모르는데 그 해(1995년) 6월 30일 나주 성모님 눈물 흘리신 10주년 기념일에 참석한 후 지금까지 병원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알기전 저는 무덤 속의 죽은 이가 평화롭게 보여지고 그 안이 더 좋게 보이니 제게는 괴로움뿐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높은 2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는데 무섭기도 했지만 참는 고통이 더 컸으므로 말리는 분의 손을 뿌리치니 흘러내리듯 떨어져 가벼운 상처를 입기도 했으며, 병원에서 준 영양제와 먹다 남은 정신병 약이 있었는데 저는 영양제와 그 약을 합하여 50-60알을 한꺼번에 다 먹고 3일간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하여 있었고, 배교를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쉽게 여러 번 했으며, 스카풀라를 벗어서 길가에 몇 번 놓아 두었으며, 이러저러한 형태의 정신병을 나주 성모님 집에 오기전 1995년까지 24년간을 앓아 왔습니니다.
4년 전에는 친척을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부동산을 은행에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 분이 실패하자 대신 갚아준 돈이 6천만원에 이르렀습니다.
인천의 한 형제가 나주 성모님께 은혜받아 3천만원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신앙 체험지를 95년 12월 24일 성모님 집에서 읽고 저도 한푼도 받지 않기로 성모님께 봉헌했으며 지금도 그 마음 변함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모친께서 궁핍한 가운데도 저의 정신병의 미래를 예측하여 남긴 교육보험과 보잘 것 없는 가구만이 전재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주 성모님께서 제 손을 잡으시니 제가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어 가난과 병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끔 6천만원이 생각나도 기쁨이 있고, 병마가 저를 다시 흔들 때 실망되기도 하지만 봉헌이란 생각이 떠오르니 이 병마까지도 봉헌합니다. 여자를 보고 죄짓는 일은 이미 오래 됐지만 나주 성모님을 알고 난 이후 완전히 지우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사랑한 후로 전보다 더 강렬함을 드리고 있으며 개심의 필요성이 더 강하게 요구되어져 와 닿으며 생각으로만 살았던 것들이 행동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눈물과 피눈물, 향유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지만 그 밖의 다른 놀라운 경험들은 일생의 큰 행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햇수가 오래된 죄의 종, 죄의 멍에가 벗어졌음을 느낍니다. 어찌 저에게 죄가 없겠습니까만 하느님 성체 대전이 좋고 마음에 드는 곳이니 저는 은총의 세계를 향하여 있습니다.
저는 세속의 벗이 되지 않을 것이며, 나주 성모님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나 수중에 돈이 없고 아이들 학비부담이 고통스러워도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탁하는 마음은 돌아온 탕아처럼 하느님 품안에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리오며, 율리아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모든 분들이 나주 성모님을 깨닫고 믿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1997년 4월 6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 자비심 축일.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3동 534-36
서상길(도마) T.(062)263-4395

 

 

 

죽을 수 밖에 없던 아내와 뱃속의 아이도 살게 되어
제2의 인생을 산다.
 

권영준(세바스티아노)

찬미 예수
1991년 봄에 교우들과 함께 피정을 다녀오다가 차 안에서 교우 한 분이 나주 성모님의 집에 한 번 들렀다가 가자고 제의하여서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모님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짙은 장미향기가 진동하여 이것이 무슨 향기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전부 의아해 했다. 이내 우리 일행 (약 30명 정도)은 모두가 장미향기를 맡게 되었다.
나는 참으로 신기하고 신선함을 느끼고 성모님의 현존을 더욱 느끼며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집사람이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결코 원하던 시기의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 낙태로 인한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냥 낳기로 하였다.
그런데 건강하던 아내가 갑자기 진통을 느껴 병원에 가보니 태아의 맥박이 불규칙적이고 산모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병명은 임신에 의한 간기능 상실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였다. 이 병은 산모도 죽고 뱃속의 아이도 죽는다는 것이었다.
이 순간 나는 그동안 잘못 살아왔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내와 아이가) 천국에 가기를 원했으며 아내와 아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회개와 보속을 하게 되었고 나주의 성모님을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러던 중 나주 성모님의 사랑으로 20년간의 냉담이 풀린 형제님이 나주 성모님께 가서 기도해 보자고 하여 그 즉시 밤열차를 타고 나주로 향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나주 성모님 집에 도착하여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성모님께 매달리며 기도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와 아이는 성모님의 은혜로 영적, 육적 치유를 받아 아이도 살고 아내도 살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제 2의 인생과 삶을 살게 되었다. 전에는 그렇게도 미웁던 아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뒤로 나주 성모님을 생각하며 모든 신자들이 영적, 육적인 회개와 치유받기를 고대하며 성모님의 현존을 느끼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기를 바라던 중 1994년 11월 24일 부천 원미동 철야기도 은혜의 밤에 조호동 바오로 신부님의 허락을 얻어 율리아 자매님을 초청하게 되어 1994. 11. 23. 밤열차로 김정렬 루시아 자매님과 함께 나주 성모님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침 이날 교황청의 주한 교황 대사님께서 방문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더욱 더 장미향기가 성모님 집안에 진동 하였다.
율리아 자매님과 교황 대사님, 파신부님, 그리고 성모님 집을 순례하던 신자들과 기도를 하던 중 성체의 발현을 뵙게 되는 감격에 찬 순간을 맞게 되었고 같이 간 루시아 자매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를 교황대사님을 통하여 영하는 은총을 받게 되었다.
본인이 쓴 이 내용은 추호도 거짓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1995년 3월 30일
부천시 소사본 2동 82-4 <대우전자 부천대리점>
권영준(세바스티아노)
T.347-1230(가게), 346-3839(집)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형제가
피눈물 사진을 대고 기도하여 살아나다니..

최정자(말가리다)

 

<나주의 성모님께 드리는 글>

지옥으로 향해 가는 이 세상 많은 자녀들을 구하시고자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고 향유까지 흘려주신 성모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우시는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갖고 기도했을 때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형제를 치유해 주심을 저희들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성모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가 없어 부족하나마 펜을 들었으니, 부족한 글일지라도 우리 마음을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 이해하고 봐 주십시오.
1993년 8월 13일 농약을 먹고, 중환자실에 누워 혼수상태에 빠진 한 형제님을 방문하였는데 머리와 온 몸에 농약이 다 번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요아킴 안나 형제님이었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병원측에서는 혹시 살더라도 식물인간이 된다고 하면서 그날 바로 퇴원시키라고 했지만 우리는 퇴원을 보류하고 그 형제님의 마지막을 나주 성모님께 의탁하며 예수님께 전구해 주시도록 도움을 청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10월 14일에 피눈물을 흘리셨던 나주 성모님의 사진을 그 형제님의 가슴과 머리에 대어주고 그 형제님의 영혼의 회개를 위하여 간절히 주의 기도와 성모송과 영광송을 바쳐드리고 성모님 메시지 말씀을 낭독해 드렸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한 영혼도 빠짐없이 나에게 속하여 있기를 바라기에 이 모든 것을 내 어머니 마리아께 맡긴 것이고 또 맡긴다.
그렇기에 내 어머니를 따르는 길은 곧 나를 따르는 것이다." 낭독하고 나자 그 형제의 의식이 돌아와 저의 손을 잡으려고 했고 잡은 손에선 뜨거운 전율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기쁨 속에서 티 없으신 성모님을 통하여 주 예수님께서 그 형제와 함께 하실 것을 굳게 믿고 회개하여 임종을 잘 맞이하도록 기도하며 우리 일행은 병실을 떠나왔습니다.
8월 18일 저희들은 다시 연락을 받고 두번째 병문안을 갔을 때 이미 죽었어야 될 사람이 죽기는 커녕 상태가 아주 좋아지고 있어 그 형제를 보고 우리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방문 했을 때 그 형제는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온 몸은 많이 부어있었고 산소 호흡기가 코와 입에 꽂혀 있었는데 두 번째 봤을 때에는 퉁퉁 부어오른 온 몸이 다 빠져 아주 야윈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목소리를 알아듣고 손을 잡으려 했고 그 형제는 그의 가족 모두와 함께 하느님께 깊이 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피눈물을 흘리시는 사진을 머리와 가슴에 대어주며 나주 성모님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그때 형제의 입에서 침이 주르르 흘러 내리자 직접 부인에게 침을 닦아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소 말조차 하지 못하던 형제님이 말씀하시는 그 장면을 보고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성모님을 통하여 자녀들이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적 회개의 은총을 주시고 육신까지 치유시켜 주신 것입니다. 병원 문을 나설 때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느님께 찬미 찬양 드렸습니다.
요아킴 안나 형제님은 8월 28일에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옮겨졌고 9월 2일 집으로 퇴원하여 다시 건강한 몸으로 식사도 잘 하시게 되었고 9월 14일 나주의 성모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나주에도 다녀왔으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부친 칠순 잔치를 포기했다가 죽을 수 밖에 없던 그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에 이웃과 함께 즐거운 칠순 잔치를 할 수 있었으니 이 모든 것 성모님의 사랑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모든 영광을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통하여 주 예수님께 돌려드립니다.

 

1993년 9월 17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구포리 66번지
최정자(말가리다)
T.73-9441, 675-9441(상가)

 

 

 

죽음을 각오하고 권총으로 머리를 쏜 락손(LOCSON)의 이야기 

윤미숙(안젤라)

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
성모님께서 부족하기만한 죄인인 저를 불러주셔서 사랑 베풀어 주신 윤안젤라입니다. 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이 율리아 자매님이 필리핀에 가실 때 저도 함께 모시고 간 적이 있는데 그 나라는 대단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곳마다 성당 안이 가득 찰 뿐만 아니라 성당 밖에까지 많은 사람들이 끝날때까지 서서 경청하는 모습을 볼 때 한국과는 너무 비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노디 디플로마씨의 고향인 바크로드의 시장이 간절히 초청하여 우리 일행이 가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너무 고통이 심하여 비행기에서도 누워서 가셨는데 필리핀 스튜어디스가 율리아 자매님 곁에 와서 자세히 바라보며 율리아 자매님을 가만히 만지더니 자기 가슴을 부둥켜 안고 기쁨을 금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앓고 있던 가슴앓이 병까지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리니 수많은 사람이 마중나와 있었는데 꽃다발을 채워드려도 휠체어를 타고 가니 안타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노디 디프로마 변호사 별장에 우리는 도착했는데 그때도 율리아 자매님은 귀가 아파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머리와 온 몸이 아파서 부축 받아 2층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꼼짝을 못하니까 의사와 간호사를 불러서 주사를 놓고 난리가 났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싫다고 해도, 안된다고 자꾸만 주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와서 자기 귀가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락손(LOCSON)인데 자기는 아버지 하고 싸워서 죽어버리기 위하여 머리에 권총을 쐈는데 머리가 맞지 않고 귀로 관통하여 죽지만 안했지 엉망의 상태, 즉 죽음만도 못한 상태였는데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완전히 치유되어 좋아 어쩔 줄 몰라 샐러드를 손수 해 가지고 와서 쥬리아가 먹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상태의 죄인을 주님은 살리시어 회개시키고자 살려 내신 것에 대하여 우리 일행은 모두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고통 중이어서 메시지 전달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는데 의사와 간호원이 지키고 있어서 행사장에 가실 수가 없어 제발 혼자 좀 있게 해달라고 하여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링겔을 뽑아 버리고 행사장으로 가서 메시지를 전할 때 그곳에 운집한 수많은 신자들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 받은 이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직접 장미꽃잎을 떨어뜨려 주신 것을 많은 사람이 보고 쓰러져 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닐라에 돌아와 그린 벨트 성당에서 했는데 약 2만명 정도 모였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성모님께서 직접 장미꽃잎을 떨어뜨려 주시고 불치병이 치유되신 분도 많으신데 바크로드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궁암, 위암, 여러가지 불치병들, 가슴앓이, 심장병 등 여러가지 병들이 나았다고 하며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치유 받은 것이 더 큰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사랑의 환영과 기적의 일들을 보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여도 고향인 나주와 한국에서는 너무나 심하게 푸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나주 성모님께서 하루빨리 인준이 되어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알렐루야.

 

1995년 6월 11일
서울 중남구 중화1동 연립주택 유 한신빌라
윤미숙(안젤라)
T.455-4705(사무실), 434-9329(집)

 

 

 

"죽음 직전이었으나 성모님께서 살려주시다" 

김 아오스딩(기돈)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 아오스딩입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성모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주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이지만 성모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알수가 없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하지요. 주님께서 드러내신 영광도 나눌수록 커져서 그분께는 그만큼 더 영광이 되리라 생각되어 몇 자 적고자 합니다.
특히 "주여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소서!"라는 기도처럼 주님께서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주신 생명수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치유받은 사례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하 존칭 생략)

92년 9월 20일 오후 5시경에 택시 기사인 교우 하 파스칼 형제가 나를 찾아와 나주 성모님 물을 조금 달라고 했다. 이유인즉 인천시 구월동 소재 길병원에 입원한 모 자매가 산후 하혈이 심하여 중환자실에 있는데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 물 (기적수?성모님의 젖이라 생각함)을 조금 주었더니 다음 날 아침, 산모의 하혈이 멈추고 저상으로 돌아와 산모와 아기가 함께 건강하다고 하 파스칼 형제로부터 전화가 왔다.

증인 하파스칼 T.(032)427-2963


92년 11월 3일 오후 5시경에 주 엘리사벳 자매가 환자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신부님이나 영적 은사 받은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했지만 굳이 나를 찾아 오겠다 하여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받아들였다.
성모님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으니 건장한 형제 한 사람과 자매 세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려는 한 자매를 엄한 죄인 다루듯이 강제로 데려왔는데, 그 자매는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앉았다가 섰다가 방안을 걸어다니면서 예수님, 성모님상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고성으로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함께 온 형제, 자매들이 강제로 손발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앉혀 놓고 나서야 주 엘리사벳 자매가 하는 말이 그녀는 조 모니카라는 자매인데 연령회 봉사자로서 활동을 하다가 며칠 전부터 마약이나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혼미하여 정신 이상 상태가 되고 머리가 터져 나갈 듯 통증이 심하고 눈에 이상한 물체가 보이면서 고통스러워 무당을 찾아가 물으니 종교를 잘못 믿어 조상들이 진노하여 가정 파탄과 불행이 닥쳐오고 있으니 천주교를 버리고 무당이 되면 부귀 영화와 행복이 깃들일 것이니 당장 집에 가서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를 버리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믿고서 무당이 되려고 돈을 들여 모든 준비를 해놓고 그 다음날 (11월 4일) 산으로 들어가 신을 받으러 간다 하며 대모인 주 엘리사벳 자매에게 성물들을 몽땅 가지고 왔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엘리사벳 자매는 다급한 나머지 나에게 연락을 하고 직장에 근무하던 남편 (황스테파노)과 다른 봉사자 2명을 불러 그 자매를 나에게 같이 데려 온 것이었다.
이런 일을 본당 신부님이나 본당 내의 공동체를 찾아가 상의하지 않고 나에게 온 것이 참으로 당황된 일이었으나, 이도 주님과 성모님의 뜻이라 여기고 "예수님, 성모님께 맡깁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하고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나주 성모님의 물이 생각이 났다. 그 물을 우리 영혼 육신을 구하려고 주셨으니 사탄도 물리쳐 주시리라 굳게 믿고 함께 기도한 후 조 모니카 자매에게 물을 마시게 하였으나 뱉어버리고 절대로 입에 대려하지도 않아서 강제로 조금 먹이고 억지로 스카풀라도 걸어주고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이 드러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잠시 후 악령에 사로잡힌 그 자매는 발악을 멈추고 쓰러졌으며 10여분 후 깨어나서 스스로 성모님 물을 한 잔 더 마시고 나자 성모님 (나주 성모님과 같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예수님, 성모님께 감사하며 순명할 것을 맹세하며 치유를 받았다.
조 모니카 자매의 가정은 혼자만이 천주교 신자였으나 그 후로 남편괌자녀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강원도 외지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인천으로 전근되어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성가정이 되었다.

증인:김형순 마리안나, 강순녀 데레사
황철수(스테파노), 주영숙(엘리사벳, 인천 간석동 본당)

 

92년 11월 16일 오후 3시경
주 엘리사벳 자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지금 신 마리아 (영자, 38세 미혼)라는 자매가 운명 직전이니 마지막 기도를 가자고 했다.
그 자매는 2년 전 1990년 초부터 길병원, 성모자애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병명이 나타나지 않았고, 2개월 전부터는 물도 못마시고 링겔도 못맞고 체중이 20-30kg 정도가 되어 종부 성사도 이미 받았고, 그녀의 집에서는 굿이라도 해보자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교우들이 주님과 성모님께 마지막 기도로 저세상에서나마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고 나까지 부른 것이다.
그동안 신부님, 그리고 여러 단체에서 기도를 많이 하였으나 더욱 악화되어 죽음에 임박했는데 난들 어찌 하겠는가? 예수님, 성모님께 맡기고 그 집에 도착하자 뼈만 남아 해골 같아 무서워 보이는 신 마리아 자매에게 내가 "신 마리아! 예수님, 성모님 믿습니까?" 하고 물으니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이 물은 나주 성모님 물인데 당신에게 죽기 전에 성모님 젖을 생명수로 마시도록 주님께서 은총을 주셨으니 토한다거나 못마신다는 마음 버리고 감사하며 마셔요.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 성모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셔서 보내셨을거요." 하고 성모님 물을 주었더니 물 한 모금 못 마시던 사람이 여러 차례 나누어서 한 컵을 다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난 후 의식을 잃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성모님의 마지막 은총을 입고 죽어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려주시어 주님 영광 드러내시지 않는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여간 평화의 안식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깨어나서 목이 탄다고 물을 달라고 하여 성모님 물을 컵에다 가득히 넘치도록 주었는데 꿀물을 마시듯 단숨에 다 마셨다.
그리고 나는 당장 죽지 않은 것과 물이라도 먹도록 해주신데 감사하며 집으로 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300m 거리) 전화가 오기에 운명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기도하며 받았더니 마리아 자매가 밥을 달란다는 것이다. 못먹어 죽지, 먹는자는 죽지 않으니 미음이나 죽을 주라고 했다.
그러나 속으로 이것이 옛 어른들이 말하는 사자밥인가? 했더니, 그날 저녁 마리아 자매는 죽을 먹고 복숭아 통조림 등을 다 먹고 다음 날은 혼자서 택시를 타고 돌아다니며 짜장면도 사먹고, 시내 공원을 돌아다니고 친척집 방문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자매를 보는 사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놀라고, 뼈만 앙상한 여자가 돌아다니니 마주치는 사람과 택시기사는 등이 오싹할 정도였단다.
지금은 레지오도 하면서 건강하게 은총 속에 살고 있다.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현대아파트 313동 1204호
증인:주엘리사벳, 이데레사(경숙),
신데레사(광옥, 신마리아 언니) 외 4명

 

93년 2월 23일에는 나의 집에서 정마리아(창옥), 유카타리나(순영), 장미카엘라(애정), 최아숨타(정화), 유릿다(연숙) 자매들과 함께 나주 성모님 물을 마시고 예수님, 성모님 앞에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중 모두 탈혼 상태로 들어갔으며, 전원이 영적 치유를 받았다.

93년 8월 23일에는 서울 마포구 신촌에 사는 마귀들려 악령들과 대화하고 냉담한 이아녜스(은영) 자매를 김베드로(일생), 송요셉(희구) 형제들과 함께 찾아가서 나주 성모님 물을 먹이고 함께 기도후 마귀를 쫓아냈다.

이상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나주 성모님 물'을 통하여 이루신 당신 사랑의 놀라운 기적을 몇가지 적어 보았습니다. 더더구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이 죄인을 통하여 이루셨으니 제가 직접 목격한 것을 다른 증인들과 실제로 이렇게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자 이 글을 율리아 자매님께 전합니다.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영원 무궁토록 하느님께 영광 있으시길...

 

94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인천시 부평구 산곡4동 294-35
우성아파트 106동 1406호
김 아오스딩(기돈) 드림

 

 

 

죽음을 각오하고 퇴원했는데 살아나다니... 

홍 안나(복순)

"생명이 위독합니다."
이 한마디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누라도 암으로 죽고 자식들에게 아픔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끙끙거리면서 머리가 너무 아파 머리를 부둥켜 안고 뇌신과 진통제를 계속 먹으면서 혼자 울다가 "먼저 죽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꺼나"하며 넋두리처럼 늘 울상짓던 재종 동생이 거의 죽다시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전대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다니...
"하느님 도와주세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먼저 하느님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려던 심정이던가?
증상을 알아보니 귀가 37년 전부터 많이 아파왔는데 자식들 가르치느라고 별 치료도 하지 않고 겨우 한다는 것이 병원에는 가지 못하고 약국에서 약이나 사다 바르고 먹다보니 만성 중이염이 터져 뇌막에까지 염증이 가 뇌막염까지 간 것 같다고 한다. 뇌에서 계속 호스로 염증을 빼어내고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단 한마디라도 하고 죽으라고 모두들 아우성이었다.
제발, 제발... 이러다가 며칠이 지났는데 너무 가난해서 살릴 수도 없고 산다해도 식물인간이 된다고 하니 차라리 집에 가서 호스를 빼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집안회의를 했는데 자식들은 재산이 다 없어지더라도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했다. 어른들은 어차피 죽을 것인데 했고, 친동생들까지도 퇴원시켜서 집에서 마지막 임종이나 기다리자고 했을 때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 나주의 물을 가져와 먹여보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물로 효험을 보았다고 하여 나는 즉시 언니에게 말하여 물을 가져다 먹이자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여 물을 가져다 먹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사람을 알아보고 말도 할 수 있으며 나중에는 믿음으로 퇴원하겠다고 하니 병원에서는 "당신들 죽음의 사자요." 할 정도로 야단 야단이었는데 그래도 고집을 피워 퇴원을 했다. 가족들은 살릴 수도 없는데 많은 병원비만 들이고 있으니 죽음을 각오하고 퇴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퇴원하여 그 물을 계속 먹으면서 처음에는 말도 조금은 빗나가고 걸음도 조금 절뚝거렸지만 이제 완전히 정상인이 되어 3년이 넘도록 잘 살고 있으니 이것 또한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친지 가족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이 기쁨을 형제 자매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이니 주여 찬미 받으시고 성모님 위로 받으소서!

 

영암군 금정면 용흥 2구 511번지
홍 안나(복순) T.(0693)71-1962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 성모님의 성심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 위하여...

노 엘리사벳

찬미 예수, 마리아
저는 노 엘리사벳이라고 합니다.
처음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은 1987년 5월 초였지요. 어떤 자매의 권유로 같이 기차를 타고 갔는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건빵으로 배고픔을 면하며 수원에서 나주까지 가서 성모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경당에 들어서니 성모님 상에서는 피눈물 자국 위로 눈물 방울이 흐르고 있었지요.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서 봐도 아무런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고 성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5월 28일에 제 오빠와 가수 삼태기의 어머니 정데레사씨, 호계의 정 선생, 푸른 군대의 노베드로씨 등 12분과 함께 방문하였는데 그 때도 눈물을 흘리고 계셨고, 그 후로 나주에 방문할 때마다 눈물, 피눈물, 코피, 입가와 가슴의 피, 성모님 이마, 귀 뒤에서 흐르는 향유 등을 목격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40여회를 개인적으로 또 단체로 버스 1대 또는 2대, 3대, 4대까지 해서 성모님 집을 다니며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고통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걸음을 한발짝씩 걸을 때마다 뚝뚝 소리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고 접골원에도 갔었는데 접골원의 의사 선생님에게 '걸음 걸을 때마다 뚝뚝 소리가 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뼈 속에 라디오가 들었나? 왜 소리가 나나?' 하고 제게 도로 물어 보시길래 의사 선생님도 잘 모르는 병이구나 하고 병고치기를 포기하고 나주 성모님 집에 사람들을 인솔해 오고 성모님 비디오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책자를 전하는 동안에 언제 나았는지도 모르게 저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또 저와 함께 성모님 집에 가서 은혜 받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몇 명이 받은 은총에 대하여 제가 증언을 함으로써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성모님께는 위로가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을 나누는 일이 되고자 미약하나마 이 글을 씁니다.

손 막시밀리아노 꼴베 형제는 3년 전에 결핵성 늑막염으로 수원에 있는 한독병원에 입원을 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나주 성모님 집에 갔다오고 성모님 물을 마시고 바르고 나서, 그 이튿날 입원실에 있을 때 또 의사 선생님이 물을 뽑으러 들어오셨습니다. 꼴베가 "아마 안 나올걸요."하니까 의사 선생님이 "아, 어제도 델몬트 병으로 한 병을 뺐는데, 빨리 옷이나 올리라구."라고 했어요. 또 꼴베가 "안 나올거예요."하니까 의사 선생님이 "나 원, 살다 별일 다 보겠다." 하시며 옆구리에 주사기를 넣었는데 물이 한방울도 안 나왔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퇴원을 하였는데도 2년 반이 될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답니다. 결핵성 늑막염은 물이 안 나온다 하더라도 결핵약은 먹어야 한다는데도 약도 전혀 먹지 않고 치유가 된 것입니다.
2년 반이 되어 다시 한독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검사하시고 "당신 딴 병원에 다닌 것 아니냐?"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안다녔다고 했더니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 하시더래요. 3년이 되었는데 현재까지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T.(0331)213-9729


손 프란치스카 자매는 아들 신종민(요한)이 6년 전에 나무에 올라가서 "얏!" 하고 뛰어 내리다가 생식기 전립선을 많이 다쳐 피와 진물과 고름이 나와 동네 병원에 갔었는데 안된다고 큰 병원에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자매와 그 애를 데리고 함께 나주에 한 번 갔었는데 그 후로 피와 진물이 꾸덕꾸덕해 지더니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요한이는 외아들이어서 그 자매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그애가 중 3이고 아주 건강하답니다.
T.(042)621-0854


외인이었던 한 막내 자매는 잡지책에서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아! 무엇이라도 믿어야겠다' 싶어 수원 조원동 성당에서 교리를 받아 바올라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했습니다. '잔치국수'라는 음식점을 하고 계시는데 작년 94년 7월에 자궁이 이상해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자궁에 주먹 반 만한 혹과 작은 혹 2개가 날로 자라서 커지고 있더랍니다. 아이들이 방학하면 수술하기로 성모병원에 예약해 놓고 꼴베 형제와 얘기가 되었는데 그는 나주에 갔다와서 기적수도 먹고 결핵성 늑막염이 나았던 형제로 바올라 자매네 바로 옆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기적수를 그 형제가 주어서 마시고 미사도 봉헌하고 9일 기도도 했고 또 나주에 가서 회개를 하였는데 방학이 되어 수술을 하려고 병원에 가서 새로 검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먹 반만하던 혹도 줄어 붙고, 작은 혹은 없어져서 수술은 안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현재까지 수술을 안했는데 치유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완전 치유가 된 것이지요.
T.(0331)255-8401(가게)


양세실리아 자매의 큰 딸 이빅토리아(겨라)는 고 3때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3번, 4번 척추가 이상이 생겼습니다. 대학 때문에 휴학도 못하고 앉아 있기도 서 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체육 시간만 양해를 얻어서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벽 6시에 나가 밤 11시 30분은 되어야 들어오니 그 애의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죠. 수원에 있는 유명한 이춘택 정형외과 (김남수 주교님이 다니시는)에 가서 검진을 했더니 이 상태로는 결혼도 출산도 힘들거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세실리아 자매가 저와 함께 나주 성모님 집에 가게 되었는데 철야기도를 하기 전에 겨라에게 전화를 해서 성모님을 믿고 집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도를 하니까 함께 기도하자구요. 나중에 들으니 아빠랑 TV 보던 아이들 (딸 둘)이 자기들 방으로 가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더래요. 철야를 하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 딸을 보자마자 '나주 성모님 집에 갔다온 손이다."하며 손을 허리에 대어주고 껴안았고 밤새 성모님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새벽 6시가 되어 겨라는 학교에 갔습니다. 밤 11시 반에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엄마를 보자 마자 "엄마! 엄마!" 하고 다급하게 불러서 놀라 "왜? 왜?"하고 대답을 했더니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운동장 두 바퀴 반이나 돌고 물구나무도 섰는데 허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하고 얘기를 하더래요. 둘이 서로 껴안고 많이 많이 울었답니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겨라 동생 유리도 장이 많이 나빠 영복여고에 다닐 때 화장실을 하도 자주 가니까 똥순이란 별명까지 생겼는데 그 애도 학생이라 나주에 가지 않고 엄마가 나주에 갔다와서 만져주고 언니랑 같이 기도했는데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당사자가 쓴 체험담이 또 있음>
T.(0331)48-3600


채 밤피나 자매는 남의 남편과 관계를 맺고 음란의 죄를 지으며 안보면 못살겠다고 하더니 나주에 갔다 와서는 회개하여 자기가 지은 죄를 보속하고자 성당에서 반장, 구역장이 되어 활동하고 또 수술한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성체 조배를 다니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자매를 위하여 전화번호는 생략하겠습니다.

화서동 본당 소속 푸른군대 부회장으로 봉사하던 윤마리아 자매의 아들 최 요한(민구)은 대학생인데 얼굴이 누가 보면 술을 먹었나 할 정도로 여드름도 많이 나고 피부도 안 좋았습니다. 너무 심해 학교까지 빼먹어가며 용인 염광병원 피부과에 갔더니 한달에 40만원씩 드는 치료를 하라고해서 약도 먹었지만 안 낫고, 130만원짜리 기계도 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자매가 나주에 가서 성모님 물 (기적수)을 작은 병에 두 병을 담아가지고 와서 "얘야, 기적수 좀 먹고 발라라."했더니 "병원에 가도 안 낫는데요."하며 안 먹더래요. 그래서 그냥 마리아 자매가 기도만 했답니다. '어머니 당신이 주신 것이니까 뭐 좀 보여 주세요' 하고 볼일 보러 나갔었는데, 그 사이에 아들 요한이 답답하니까 기적수를 얼굴에 발랐답니다. 한 병은 다른 사람을 주려고 갖고 왔는데 그것까지 다 바르고 얼굴이 깨끗이 나아 다시 학교에 갔다 합니다. 요한이가 기적수도 바르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했다고 하니 성모님께서 어여삐 여기셨나 봅니다.
T.(0331)255-3356


실비아 자매는 딸이 둘 있는데 또 임신을 하여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딸이라고 해서 유산시킬까 생각하고 있던 참에 나주에 가서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에 "낙태는 살인이다"은 얘기를 듣고 뉘우쳐 아기를 낳았는데 이름을 '마리아'라고 지었답니다. 성모님께서 살려 주셨으니까요.
T.(0331)38-7219


수원에 사는 어떤 자매는 최영수라는 애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태어날 때부터 코가 막혀 젖 먹을 때나 숨쉴 때 고통스러워 했어요. 나주에 갔다와도 낫지 않더니 어느날 하루는 애기가 우유병을 빨다가 질식하다시피 해서 영수 엄마가 놀라 "아이구, 나주 성모님, 우리 영수 코 좀 뻥 뚫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그 후로는 병원에 가지도 않았는데 코가 완전히 나았습니다.T.(0331)212-4245

또 한 번은 나주에 가려고 하는데 관광버스가 없어 예비군 수송차를 빌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운전하는 분의 부인이 차장처럼 옆에 앉아서 왔는데, 귀에는 마차 바퀴만한 귀걸이를 하고 손가락에는 번쩍번쩍 하는 반지를 몇 개씩이나 끼고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추며 흔들거렸습니다.
경당에 도착하여 마당을 돌고 경당 안을 휙 둘러보고 성모님까지 보고 나더니 저에게 "집이, 나 좀 봐." "네?" "나는 피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사람 눈에서 피하고 눈물이 나오는 줄 알았지. 아니, 저기 저런데서 (신자가 아니라서 성모님을 모름) 피눈물이 나오다니 누가 알았는가! 아니, 세상에 내가 50평생 살았어도 이런 일은 처음 보네. 내 머리카락이 쭉쭉 솟는 것 같어." 그리고 나서 비디오를(고통테이프) 보고 나더니 울고 앉아있는 거예요. "나는 애를 둘이나 유산시켰는데 죄인 줄도 모르고 그랬어."하며 회개를 했고 나중에 돌아와서는 허리까지 치유가 되었답니다. "나는 천주교 안 믿어도 당신들보다 먼저 피눈물을 흘리는데 갔다 왔어. 또 내려가자구."하며 성모님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오 헬레나 자매는 높은 계단에서 떨어져 척추 세마디가 어긋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석우 정형외과에서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며 저에게 연락이 왔기에 성모님 물을 마시게 하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7시 30분에 전화가 왔는데 수술을 하려 했더니 허리 뼈가 맞춰져 수술을 안해도 된다고 해서 교정만 하고 퇴원을 했답니다.
T.(0331)255-2292


김영희 자매 (김카나리나 자매의 여동생)는 두 번이나 자연유산이 되고 새로 애기를 가졌는데 배 속에 6cm나 되는 혹이 있어 (혹이 5cm만 되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함) 혹과 아기를 수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해서 성모님 물 (기적수)을 주었는데 물을 마시고 기도하고 배에 발랐더니 다음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 결과 "혹이 줄어 들었고 수술은 안해도 되고, 아기도 심장이 잘 뛰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T.(0331)39-7385


조카타리나 자매는 장손에게 시집갔지만 10년 동안 아기가 없어 고심을 하다가 89년 12월 20일에 나주에 갔다 왔는데 1월에 입덧이 있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얻어 지금은 인천으로 이사를 해서 살고 있습니다.

제 조카 노경희는 가슴이 없고 생리조차 없어 여자 구실을 못할까봐 걱정하다가 아무 것도 없는 정비사한테 시집을 보냈습니다. 결혼 후 4년 이상 아기가 없자 데려다 키울까 하다가 나주에 갔다 오고나서 아들을 낳았고 남편도 영세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T.(0343)54-7245


안병선 안드레아 형제는 아내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머리가 많이 아파서 봉고차를 운전해 우리의 뒤를 따라 나주에 갔는데 4-5시간의 운전으로 몸이 피곤해서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듣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천둥 번개 소리에 놀라서 옆구리가 진동하더니 간이 아팠답니다. 예전부터 간이 너무 많이 아파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는데 그 진동 후 완전히 치유되었답니다.
T.(0331)293-3184


여기에 쓰지 않은 사람도 상당히 많지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쓴 사람, 안쓴 사람,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피눈물 흘리셨던 아니 지금도 흘리고 계실 어머니의 성심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고통이 있어도 그 고통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십시오'라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으로 인내하며 부족하지만 봉헌하면서 잘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고통이 와도 사랑으로 인내하고 봉헌으로 가라앉히며 무료 급식소와 사랑의 집에서 1992년 6월 27일부터 무료로 이발을 해주고 있으며 빈첸시오의 집, 병자 행려자, 성 빈센트 병원의 사제님까지 이발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집도 너무나 가난한 제가 나주 성모님이 아니었다면 봉사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1995년 6월 14일
수원에서 노 엘리사벳 T.(0331)45-3183
수원시 장안구 화서동 103-22, 23통 1반
안세영(베드로), 노정례(엘리사벳)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증세가 없어요. 

임헬레나

저는 임헬레나라고 합니다.
몇 년 전 율리아 자매님께서 여기 뉴욕에 방문하셨을 때 브롱스 천주교회에서 저녁 7시 30분부터 나주 성모님의 거룩하시고 훌륭하신 메시지를 저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때 너무나 놀랐고 앞으로 잘 살 것을 다짐하면서 율리아 자매님을 이곳에 보내주신 것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또 많은 환자들이 기도끝에 치유를 받았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일치시켜 주시고 기쁨을 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치유 예절이 끝나고 율리아 자매님 일행이 저희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의과대학 본과 1학년이었습니다. 죤 합킨스 의과대학을 다닐 때도 추운 날이면 배가 뒤틀리고 매스껍고 설사하는 증세가 있었으나 본과 다닐 때부터는 폐가 아프고 기침이 많이 나고 항상 머리가 아팠으며 Lower back pain이 있어 허리 밑으로 엉치쪽이 많이 괴로웠어요.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께서 이상한 말로 기도해 주셨어요. 약 1시간 동안 기도해 주신 후에 율리아 자매님께서 몇 번 기침을 하시더니 가래를 뱉는데 피가 섞여 있었고 많은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양팔 묵주기도를 많이 했지요.
그런데 자매님은 별안간 변소에 뛰어 가셨어요. 한참 후에 저에게 장과 콩팥이 안좋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바로 그 때 율리아 자매님께서 "영적 수술을 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기도하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일러 주셨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려다가 영적 수술을 받았으니 수술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학교에 가나 생각하고 그냥 잤어요.
깨어보니 저녁 7시여서 실컷 잔 셈이죠. 처음에는 느낀 것이 없었는데 자고 나니까 가슴 답답한 것도 없어졌고 머리 아픈 것도 모두 다 없어졌어요. 그리고 그 당시 제가 가고 싶은 학교에 지망한 것이 아니었기에 공부도 하기 싫었는데 그 때부터 공부가 재미있었습니다.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증세가 없어요.
성모님은 자매님을 통하여 영적, 육적으로 모두 치유시켜 주신 것입니다.
주님, 성모님, 율리아 자매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1995년 6월 12일
뉴욕에서 의학박사 임 헬레나 드림


 P.S.: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누려 가족이 화목하게 된 것이지요. 아빠는 병원에 근무하시고 엄마는 한의사였어도 고치지 못한 병이지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신 오묘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지옥에 있어도 맨 끝에 있어야 될 이 죄인을. 

김 마리막달레나

질식할 것만 같았던 나의 과거의 삶.
그것은 바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벌레만도 못한 그런 삶이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눈물의 연속이었던 저의 과거를 들추기는 부끄럽지만 그러나 새 생명을 주신 주님과 성모님께 부끄러운 저의 과거를 고백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씁니다.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난 저는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에 국민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배다른 어머니 즉, 둘째 할머니 댁으로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눈물로 이별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가게 되었는데 불행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애기 보고,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밤이면 둘째 할머니와 삼촌이랑 함께 자게 되었는데 한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은 위로 자고 저는 삼촌 발 밑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마다 삼촌은 할머니가 잠드신 뒤 저를 끌어다가 자기 욕구를 채우고 나서는 발 밑으로 밀어넣기를 계속하니 어린 것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니까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그 무서운 밤을 맞는다는 것은 저에게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오늘이나 그냥 지나갈까' 그것이 두렵기 때문에 정말 밤이 무서웠습니다.
포근한 가정의 사랑 속에서 살아야 될 어린 나이에 포근한 사랑 대신 벅찬 일들이 어린 저에게 떠맡겨진 것입니다. 손등이 다 터지도록 일해야 했고 불꺼진 캄캄한 밤에는 삼촌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육욕의 노리개가 되었으니 냉가슴을 앓으며 죽지 못해 사는 한 많은 생활이었습니다. 이 슬프고 기막힌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게 저를 울렸습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세월이 2년쯤 지난 뒤 언니는 손이 터져 피가 흐르는 등 모진 고생을 하는 동생이 너무 안쓰러웠던지 저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가난과 고통과 어두움은 제 주위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럭저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 보모로 약 3년간 근무했으나 그곳의 생활도 여러가지로 어려워 그곳을 뛰쳐나와 유흥업소에 가면 돈을 많이 번다고 하여 다방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사창가까지 전전하였지만 손님들은 얼굴도 예쁘지 않고 술도 잘 마시지 못하니 늘 저를 좋아하지 않고 찾지도 않았으며 주인까지 달갑지 않게 생각하여,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은 열망은 채워지지 않은 채 빚은 늘어가고 큰 죄악만 남겼을 뿐입니다.
이곳 저곳으로 전전하면서 외롭고 고독한 날들이 계속되어 그 스트레스를 사치로 풀어보려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돈을 빌려쓰기 시작했는데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언제나 무시당하고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짓밟히고 어린시절부터 육욕의 노리개감으로 사용되었던 자신이 한스러워 죽고만 싶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방에서 한 유부남을 만나 10년동안 사귀면서 낙태가 살인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채 자연스럽게 30번 이상이나 낙태수술을 자행했습니다.
이런 저의 사주팔자를 한탄하면서 어리석게도 점 쳐보기를 100번 이상을 했지만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술집과 사창가에서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 두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빚진 돈을 갚고 언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니 집으로 돌아왔지만 회개는 커녕 언니들에게 대들기도 잘하고 나가서 잠을 자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 언니들의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얼마간 언니집에 있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많은 날들을 잘못 살아왔기에 아버지께서 저를 받아주지 않아서 아버지 몰래 여동생하고 자취를 했습니다.
동생의 권유로 전문대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 했으나 나이가 많다고 받아주질 않아 또 한 번 쓴잔을 마시고 또다시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차렸는데 손님이 너무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리다가 오랫만에 손님이 머리를 하고 가면 자기들 "머리가 헐었네" 아니면 "머리가 상했네" 하여 편할 날이 없었는데 어느 날 어떤 손님이 머리가 헐었다고 파출소에 고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운명의 신은 마음잡고 잘 살아보려고 하는 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너무 놀란 저는 겁을 먹고 파출소 소장님을 만나 이야기하니 그런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인정이 메마르고 사랑에 굶주리다보니 저를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었던 소장님하고 가깝게 지내게 되어 결국 불륜의 관계가 3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잘 하려고 노력을 하여도 잘 되지 않는 미용실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 해 보았지만 전혀 되질 않았습니다.
22살에 영세받고 이제껏 냉담했는데 이제라도 성당엘 다니면서 의지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죄중에 있으면서도 죄를 완전히 끊지 못한채 오랫만에 성당문을 두드리고 약 18년만에 성당에 나가게 되었지요.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6계명을 어기고 계속 죄를 저지르면서도 고해성사도 보지 못한채 체면 때문에 성체를 모시는 모독죄를 저지르기를 계속하였습니다. 내 썩어 없어질 육신에게 드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고 마구 쓰며 낭비하면서도 주일금은 천원 낼까? 이천원 낼까? 하는 갈등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죄라는 죄는 다 지으며 이제는 모령성체로 인하여 한가지 죄악이 더 늘어났으니 저의 육은 죽은 영을 안고 평화 대신 미움과 분노, 불만과 원망, 한탄이 저절로 나왔으며 복수심에 활활 타오르는 마음을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옥과 같은 삶이 너무나도 지겨워 거기에서 회피해 보려고 나름대로 미숙한 존재가 성숙한 태도를 취하려고 발버둥도 쳐봤지만 저에게는 되는 일이 도무지 없고 저의 삶은 빛을 전혀 볼 수 없는 칠흙같은 어두움이었고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희망없는 삶이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형제 모두가 저에게 손가락질 하며 미워했고, 무슨 일만 있으면 생각하고 싶지않은 저의 과거를 들추어내 상처입고 아픈 제 마음에 더한 상처를 찔렀을 때 의지할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기에 남몰래 흘렸던 눈물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자포자기로 인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지옥의 길인 줄도 모른 채 지옥의 길로 맹진하고 있을 때 저를 잘 아는 자매가 나주에 가면 내적 회개의 은총을 많이 주신다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했고 본인도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자를 읽고 테이프도 들었다고 하며 나주 성모님 집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별 기대 없이 한 번 가봤는데 별 느낌없이 갔더니 "장미향기가 많이 나지?"하고 함께 간 자매가 이야기 하는데 "무슨 장미향기냐?"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습니다.
1993년도에 저는 신뢰심을 가지고 나주를 다시 방문했을 때 그윽한 장미향기는 취할 정도로 코를 자극했고,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뒤 첫 토요일 철야기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어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예수님의 메시지 말씀 중에 "자 오너라, 세상의 모든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희생제물이 되어 너희를 기다린다. 천상의 식탁에 모두 모여 함께 사랑을 나누자. 너희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돌아올 때 너희의 과거를 묻지않고 내 너희에게 축복의 잔을 내리리라."하신 말씀과 "마리아 막달레나는 많은 죄를 지었지만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고 향유를 부어드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찢겨진 상처에 향유를 부어드리고 위로를 드립시다."
"많은 죄를 지었으면 많이 용서받고 많이 사랑 받는다"고 하시며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장 많은 죄를 지었지만 많은 회개를 하였기에 가장 많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회개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팔을 벌려 반겨 맞으시고 성모님께서도 망또 안에 숨겨주시며 새롭게 길러주시니 우리 모두 실망치 말고 오늘 밤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에 안기도록 합시다...."하고 말씀하시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에 저는 눈물, 아니 통렬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저분이 나를 그렇게 잘 아시고 나에게 말씀하니?" 하고 생각하는 순간 또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의사에게는 성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고 병자가 필요합니다...."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는 또 다시 통곡하며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은 다른 사람 아닌 나를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며 이제까지 기다려 주셨구나'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더럽다고 저에게 손가락질 했지만 주님과 성모님은 이 더럽고 죄많은 대죄인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자비의 눈길로 굽어보시고 지옥의 길로 맹진하던 이 죄인을 나주 성모님을 통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과거,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사람들, 그리고 죽으려고 생각했던 처절한 나를 되돌아 볼 때 사람들 때문에 울고 분노하고 복수심에 불타던 저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모든 것이 내 탓이었습니다"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시 귓전을 때리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분개하거나 죄를 짓는다면 내가 없었더라면 그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그래서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 닮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미워했던 모든 사람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하고 말하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을 듣게 되니 '네 탓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온전히 변하여 오히려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오열이 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또 자매님이 받으셨던 고통 테이프를 보고나서 상등 통회를 하여 새생명으로 바꾸어 주시고 암흑에서 광명으로 끌어내 주셨으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고통 받으면서도 죽지 못해 살며 말할 수 없어 냉가슴 앓으며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나주 성모님께 찾아와 생생명으로 탈바꿈하기를 바라면서 나주 성모님께 저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여 암흑에서 울부짖는 이들의 위로가 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씻을 수 없는 저의 죄에 대한 상등 통회의 은총 속에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여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한 사랑을 성모님으로부터 받고, 포근한 사랑과 희열 그리고 영적 즐거움을 맛보고 있으며 나주 성모님께 가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내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성모님을 알기 전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끊지 못했던 여러가지 죄악을 피하고 육욕을 끊게 되었습니다.
영세받은 지 20여년 동안 주님을 몰랐지만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이제야 어린아이로 새로 태어나 주님께 찬미드리고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성모님께서 나를 위하여 피눈물을 흘려주시며 불쌍한 이 죄인을 불러 주셨으니 이제 남은 저의 한 생애를 보속의 제물로 성모님을 위하여 바쳐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모, 형제한테까지 소외당하고 살아왔던 제 자신의 변화를 보고 형제들이 놀라워 했고 나주에 다닌다고 미쳤다고까지 말하며 무관심했던 형제들도 이제는 천리 길이 멀다하지 않고 매주 목요일과 첫 토요일을 빠지지 않고 성모님 집에 다니며 온갖 은혜를 다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도 여러가지 치유를 받았습니다. (죄 중에 살면서 받아왔던 여러가지 질병들....)
즉 20년간 앓았던 대장염, 낙태수술과 성병으로 인한 여러가지 합병증, 그리고 치질, 두통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병원생활을 많이 해왔는데도 병은 심해만 갔는데 성모님 집을 다니면서 언제인지 모르게 하나씩 치유가 되어 지금은 매우 건강하니 주위 분들과 형제들이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주 성모님 덕분으로 부모 형제가 서로 미움이 변하여 사랑으로 일치하고 개신교 신자였던 동생과 형제들 모두가 나주에 다니며 서로 기쁨을 나누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만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물질까지 몇 백 배로 주셔서 지금은 죄 중에 있을 때 빌렸던 돈을 수소문하여 다 갚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15-16년이 지났는데 찾아가 미안하다며 빌린 돈을 갚으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변화된 저의 모습이 기적적인 일이라고 하여 저는 자신있게 "저 천주교회에 다녀요."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는 개신교 신자라고 하면서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지금은 제 나이 마흔 살인데 주님과 성모님께 저를 바쳐 이제까지 잘못 살아오면서 지은 죄값 대신 보속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봉헌할 것입니다.
성모님께 100? 의탁하면 100? 행복하다는 것을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많은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안되던 사업도 이제는 온전히 풀려 가족 뿐만 아니라 이웃까지도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고들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성모님의 도우심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복되시고 자비로우신 어머니!
저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며 남은 한 생애 주님과 성모님 맘에 드는 딸이 되어 눈물과 피눈물을 닦아드리도록 노력하겠어요.
나주의 성모여!
지금도 저처럼 상처 속에서 헤매고 있는 죄인들을 구하여 천국을 얻게 하소서. 아멘.

 

1994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인천시 남구 용현2동 571-3(김선양씨 댁)
김 마리막달레나 T.(032)887-3222

 

 

 

첫 토요일 3번 참석하고 간암이 나았어요. 

<박종희씨 경우>
간암 환자로 전주대학병원에서 종부성사를 두 번이나 받은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율리아 자매님께 특별한 봉헌으로, 기도로 인해서 병원에서 죽겠다는 사람, 화장실도 못가는 사람을 위해, 여기서 촛불을 봉헌했어요. 그 순간 그분은 병원에서 늘 불러만 있던 배가 푹 꺼졌데요.
아침 6시 40분경이었어요. 내가 전주에 12시에 도착하니까 그 때는 벌써 환자가 자기 스스로 화장실을 다녀왔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분은 나주를 3번 다녀갔데요. 그 분은 완치되었어요. 완치되어서 3월 30일날 초청 받아 내외분이 미국을 갔어요.

서 데레사씨 증언

 

 

 

짓무른 피부가 성모님께서 주신 물로... 

엄기옥(아녜스)

찬미 예수님!
말로만 전해 들었던 성모님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나주로 향했습니다. 저의 미지근한 신앙심의 한편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표징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잔뜩 기대하고 그곳에 도착한 저는 처음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성모님! 저에게도 성모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하고 간구했을 때 부드러운 장미향이 한동안 저와 함께 했음을 느끼며 기쁨이 왔습니다.
또한 자매님들의 체험담과 순례객들의 모습에서 성모님을 볼 수 있었고 잘못 살아왔던 저의 삶을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은혜로움 속에 집으로 돌아와 또 한 번 놀라운 은총을 입었습니다. 성모님 집 물이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말을 믿고 저도 병에 조금 담아 왔습니다.
17세 된 딸 글라라가 어릴 때부터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1년이면 몇 차례씩 입술과 입술 주위에 물집이 생겨 낫기까지 한 번에 열흘 이상씩 고생을 합니다. 이 때도 마침 아프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주님의 성혈로 치유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그 물을 상처 부위에 발랐지요. 글라라는 따끔따끔하다고 하더니 몇 분 후 짓무른 상처가 마르는 것 같이 나아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글라라의 입술 상처는 완전히 없어지고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주는 참으로 찬미 받으소서. 알렐루야. 저절로 찬미가 나왔습니다.
그 후로 한 번도 발병하지 않았음은 물론 완전히 나았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끌어내고자 협력자로 오신 나주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을 살리고자 나주 율리아 자매님을 택하셔서 우리에게 오신 성모님을 모두가 알아 볼 수 있게 되기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서울 강남구 대치 1본당
엄기옥(아녜스)

 

 

 

주님의 부르심은 고통과 시련이었다. 

김현근(빅토리노)

그동안 하느님께서 저의 가족을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불러주심에 감사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글로써는 다 증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불효 막심한 죄인입니다. 처음에는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신체조건이 좋아 운동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공부는 하기 싫고 운동만 열중하여 결국 문제 학생으로 규율부장을 하다 중2 때는 고2 뺏지를 달고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며 학생들을 때리고 하다가 시내 불량배들이 저를 따르기에 같이 휩싸여 생활하였습니다. 그래도 개신교 학교라 주님의 말씀 중에 '악한 자는 악으로 망하고 선한 자는 선으로 산다'는 말이 떠올라 꼭 주님 앞에 나아가 하루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몰랐더라면 저는 영원한 깡패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다 군에 들어갔는데 특수부대로 생명수당을 받으면서 교회도 안다니는 외인이 손수 십자가 하나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며 생활하다 무사히 군을 제대하고 마음을 잡아 학원을 거쳐 건설업에 근무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저는 직장을 그만두고 망설이다 무허가 집을 사글세로 얻어 살면서 돈을 빌려 차 정비가게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태어날 아이를 위해 과거의 나를 전부 청산하고 겸손과 친절을 베풀면서 오직 살아보려는 마음 때문에 어떠한 수모와 갈등 속에서도 나 자신을 누르고 기사 한 분 한 분을 최선을 다하여 성심 성의껏 모시고 일을 해 많은 돈을 벌었으나 아이의 아픔으로 인해 돈은 거의 다 병원비로 들어갔는데도 가망이 없자 아이도 살리고 다른 사업을 위해 시골로 갔습니다.
사업을 궁리하며 쉬고 있을 때 아이의 아픔은 심하고 아내가 시부모와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속에서 아내는 한마디의 불평과 말대답도 없이 충실한 삶을 살아줄 때 저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으나 제 마음이 괴롭다보니 그 반대로 아내에게 투정과 억지소리로 속을 많이 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좋은 여건을 모두 다 팽개치고 사람의 성실성 하나 보고 시골에서 7남매 대종손이며 직업도 없는 저를 택하여 불평불만과 후회, 넋두리 한마디 없이 자기의 모든 꿈을 남편의 성공과 아이를 위해 전부 희생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에게 미안하면서도 열등의식과 남편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아내를 더 힘들게 하였습니다. 결국 아내가 많은 돈을 얻어 2번째 사업인 지하수 개발을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 중에 고난을 겪다가 10년 전에 약 3천여만원이라는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저는 많은 내적갈등을 겪다가 해외취업을 신청하여 취직이 되었는데 아내는 그 취업 통보서를 찢어버리고 사업을 하려면 이 정도의 실패는 우리에게 큰 재산이라며 돈을 잃었어도 경험은 1억을 벌었다고 위안을 주었고 용기 잃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는 아내의 격려의 말로 저는 다소 위안을 얻었습니다.
말 한마디지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할 때 그 모습은 엄마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그대로 잠을 잤습니다.
용기를 얻은 저는 다시 지하수 개발사업을 시작하여 거의 빚을 갚자 나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나주에서는 야채사업을 시작하여 몇 년째 전전긍긍 하다가 결국 야채농사는 완전히 망하고 실의에 빠져 정신적, 경제적 갈등을 겪으며 몇 번이고 가족과 함께 죽으려고 하던 이 죄인은 모든걸 포기하고 처와 아이들을 성당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나간 후 무면허로 두 번이나 교통사고가 나서 돈을 다 물어주게 되었으나 그래도 인명피해가 없어서 다행이었지요. 세례 받기 한 달 전에 지하수 개발을 혼자 하다 기계의 일부인 레바가 머리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주위의 사람들도 놀라 떨고 있었습니다. 겨우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머리를 보이니 아내는 부은 머리를 보고 놀라 울면서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저는 목숨은 건졌으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 후 또 일주일 뒤에 다시 레바가 머리 정면에 떨어져 머리에서 피가 너무나도 많이 흘러 수혈해야 한다고 감독이 말했지만 쑥으로 지혈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머리에 범벅된 피를 씻지 못하고 그날 밤을 지내고 주일 아침에, 어떻게 할까? 하다가 머리를 감고 크레졸을 바르니 눈 앞이 두 세개로 보이면서 어리둥절 했지만 그 순간이 지나니 통증은 없어졌습니다. 주일 성당 가는 그 기쁨을 마귀는 빼앗아 가려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반대로 불러 주셔서 92년 6월에 영세를 무사히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가정과 사회와 사업, 그리고 부모와의 갈등이 상처로 뒤범벅이 되어 저 자신이 너무도 힘든 가운데 아내는 무당을 찾게 되었고 몇 번이고 가족 전체가 죽음을 시도하기도 했던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저희 가족을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가정 모두가 세례를 받게 되었고 92년 결산 대피정을 과천에 있는 영보 수녀원에서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나주의 율리아 자매님이 오셔서 마무리 피정을 해주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죠. 저 역시 회개하여 죄인이지만 영보 수녀원에서 알게된 나주 성모님을 위해 그때부터 성당과 성모님 집을 도와 조그만 일이라도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고향에 내려와 저는 성모님 집을 방문하기에 앞서 제가 영세를 받고나서 영적으로 존경하는 자매님을 찾아가서 성모님 집에 가서 봉사 하겠다고 하였더니 그 자매님은 역정을 내면서 "아직 때가 아니다."하면서 이상한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은 저 자신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 자매님을 성모님 집 협력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매가 하는 말은 제가 피정 때 받았던 성모님에 대한 은혜와는 정반대적인 말이었기에 저는 성모님 집에 가겠다고 하고 그 후 시간이 있으면 성모님 집에 와서 봉사를 하는데 그 자매의 너무나도 이상한 여러가지 말들이 저와 제 아내에게 간접적으로 들려올 때 저는 아내에게 이러한 말을 했지요. 무당 같은 사람들 말 신경쓰지 말라고요. 저의 탓으로 돌리고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생활하는데 그 집단들이 우리 가정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이유를 알았지요. 그들은 제가 아무리 성령으로 산다 하여도 주님께서는 장작더미의 불쏘시개로 넣어버릴 거라고 아내에게 직접 말하였지만 그들 모두를 용서했습니다.
그 후 93년 1월 첫 토요일 철야기도를 하고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에 장미 향기를 체험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이 율리아 자매님의 손만 닿으면 뒤로 넘어지기에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넘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발 뒤꿈치를 힘있게 모두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버티고 있는데 기도 받은 그 순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미 향기를 주셨는데 바로 그 향기는 강한 강풍이 지나가는 것과 같이 가슴으로 관통했습니다. 저는 그 체험을 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업도 안될 거라고 나주 성모님 집에 가지 못하게 막았던 거짓 예언자가 말했지만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몸이 피곤하여 일을 못할 정도로 넘치도록 사업이 번창하여 계속 잘됩니다. 사업을 하면서 용접할 때 쇠가 눈으로 들어가 눈을 뜰 수 없을 때도 성모님 물을 넣고 깨끗이 치유가 되었고, 손을 다쳤을 때도 물을 바르고 기도할 때 깨끗이 치유가 되었는데 이밖에도 많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성모님을 몰랐을 때 대형사고가 몇 번이나 났고 사업이 세 번이나 실패했으며 부모와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져 헤어져야 했는데 이제 성모님의 사랑으로 모두가 화해하여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의욕까지도 상실되었던 미웠던 딸이 성모님 산에 다녀오면서 변화되어 예쁜 딸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이 원하신다면 수도자로 보내기로 봉헌하고 우리가 종손이지만 아들도 주님의 뜻이라면 하고 성직자로 봉헌했습니다. 그렇게도 자주 뜻이 맞지 않아 무시해 버렸던 아내가 지금은 그렇게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일을 하고 힘들 때, 때로는 성모님의 장미향기를 현장에서까지도 주실 때 거기에서도 성모님을 생각하며 늘 함께 해주시니 너무나 힘이 나서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인간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에 여러모로 불러주시나 인간이 무디어 못 알아 듣기에 고통을 통해서 불러주신 것은 참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모든 희생 이제 남은 한 생애 성모님을 위하여 봉헌하겠습니다.
우리 가정 살려 주시고 변화시켜 주신 주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4년 12월 8일 무염시태 대축일에
나주시 금계동 수강 APT 301호
김현근(빅토리노) T.(0613)32-0203

 

 

 

처음은 빈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게 되기를 

김원배

윤 율리아님
안녕하신지요.
벌써 이곳 뉴욕을 다녀가신지도 까마득한 옛일처럼 생각되는군요. 세상일만큼 열심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마귀와의 싸움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믿음 적은 저희 부부가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지며 주님을 의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저희에게 율리아님께서 오셔서 제 아내의 병 (유방암)을 낫도록 기도해 주시고 또 그 계기로 저희에게 확고한 믿음 주셨음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율리아님을 통하여 능력 베풀어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 항상 올립니다.
"너희 마음이 완악하여 이적이나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김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더 큰 축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 말씀을 생각할 때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 살아계심을 믿으며 주님께서 하느님의 독생자이시고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속사업을 통하여 해방시켜 주셨음을 믿으며 이제는 주님 보혈의 십자가를 당당히 세상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전도하며 생활할 것입니다.
처음은 빈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되기를 주님께서 이뤄주시리라 믿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고루고루 비춰지기를 기도로 간구합니다.
율리아님, 저는 개신교신자이지만 저의 아내는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고자 원합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지요. 물론 저도 매일 묵주기도를 드립니다만.
율리아님, 저희 믿음이 꺼지지 아니하고 더욱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세요. 물론 저희도 믿음 안에서 생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성직자들과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 주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주님께 영광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55-55 67st
MASPETHNY 11378 U.S.A뉴욕에서
소아네 가족 드림
김원배

 

 

 

척추결핵으로 8번이나 수술했는데 이제는 약 한 번도 안먹어요. 

이 비비안나

찬미 예수!
저는 경남에 사는 이비비안나 입니다.
구 교우라는 제가 성모님의 사랑도 생각하지 못한 채 제 자신의 병마와 싸움하면서 살기에 급급했습니다. 주일미사, 아침 저녁 기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고통 속에서 저는 결핵수술을 여덟 번씩이나 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이제는 수술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각도 하기 싫고 척추 결핵이 있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요에 누워서도 못자고 방바닥에서 자고 결핵약을 먹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서 차도 못타고 양말도 못빨고 연탄도 못갈고, 계단도 못 오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저의 장부가 모든 것을 다 하였습니다. 한 번 더 수술하려면 그 때 돈 천만 원이 든다 하데요. 동생이 수녀로 나주 본당에 있을 때인데 성모님이 눈물 흘리신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가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성모님을 뵙지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미용실 안방에 계실 때인데 사실 처음에는 우신다 해도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뵙고 저는 너무나 많이 울면서 '성모님, 왜 우십니까? 이 죄인 때문에 울고 계십니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담석증, 피소변에다 황달까지 겹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성모님, 울지 마세요. 차라리 저보고 죽으라시면 죽겠어요.'하고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는 모습을 차마 무엇이라 말할 수 없어 잘못 살아온 저의 죄에 대해 처음으로 그렇게 많이 회개하고 울었어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면 우리한테 기도하자고 하십니까?' 하면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습니다. 저는 저의 병을 낫게 해주시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기도 도중에 아프던 곳이 사라지고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병마는 언제 있었나 할 정도로 이제까지 한 번도 병마와 싸운 일이 없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약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고 주사 한 번도 맞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좋아 집에 와서 성모회장과 모든 분들께 말씀드렸더니 거짓이라고 성모님 마음을 몰라 주시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여러 분이 성모님 집에 가서 성모님 울고 계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와서 믿더군요. 저는 그 때부터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성모님께서는 이 죄인을 항상 불러주셔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나주 성모님 집에 10여년 동안 다니면서 모시고 다니는 분들 중에서만도 수많은 영적, 육적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유미숙이라는 자매가 있었는데, 병마가 심해서 병원이라는 병원 약국은 다 돌아다녀도 낫지 않고 대소변을 볼 때에도 안아서 화장실에 앉혀주어야만 대소변을 보는 실정이었습니다. 증세가 너무 심하여 아무 효험이 없자 하루는 점쟁이 집을 갔더니 많은 귀신이 들어 있다고 큰 산굿을 하라고 하면서 큰 일을 당한다고 하더랍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께 가자!"고 하니 그 자매는 "앉아 있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차를 타고 가느냐?"하며 거절하자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성모님께 맡기고 가자."하면서 성모님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유미숙을 성모님은 그날밤 철야를 앉아서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자매는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함께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성모님께서는 이 자매(유미숙)에게 많은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자매는 집에 돌아와서 보니 남편의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어젯밤 우리 집안에도 향내를 많이 풍겨주어서 기분이 좋은데 당신은 어때?"하고 아내 유미숙에게 물어보면서 "우리도 이제 성당에 나가자"라고 말을 했답니다. 그 때부터 유미숙 자매님은 병마로부터 완전 해방되었고 자매님은 마리아, 남편은 요셉으로 저희 부부가 대부, 대모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레지오 활동도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이 밖에도 많은 냉담자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성모님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도 나주 성모님 집에 다녀와서는 많은 기도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나면 두 배로 기도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는 성모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기쁘게 살고 있으며 지금도 묵주의 기도를 하루에 80단-100단을 바칩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며...) 사람들 중에는 병이 나았으면 됐지 나주에는 뭣하러 자주 가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저는 속으로 "아이고 저 사람들이 주님께 매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판단을 할까?" 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은혜받고 나면 발을 딱 끊고 감사할 줄을 모르는데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세상 것을 생각지 말고 천상의 것을 생각하여 성모님 손을 잡고 우리 모두 구원 방주 올라타고 천국갑시다.
감사합니다.

 

1995년 1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 5-9
이 비비안나 T.(0591)41-8559

 

 

 

치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충남 당진 할머니

저는 충남 당진에 사는 노인입니다. (조금은 젊음)
지난날 골다공증이 있어서 좋다는 약은 다 먹어도 임시적으로 가라앉기만 할 뿐 허리가 뻐근해서 앉을 때마다 손을 받치고 엉거주춤하고 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치유는 생각지도 않고 어떤 다른 사람이 나주 성모님 집에 오면 치유받겠다 싶어 같이 오자고 했는데 그분도 치유된 것은 물론이고 저도 허리가 치유되었습니다. 또 젊은 새댁시절부터 장딴지에 땀띠처럼 뭐가 나서 가려웠는데 긁어서 피가 나도 가렵고 치료도 안되고 해서 양잿물을 발라 보았던 피부병이 있었습니다.
습진 같기도 했던 그런것이 허리와 함께 치유되었습니다.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994년 7월 23일
충남 당진 할머니

 

 

 

 진정 살아계신 주님과 성모님을 체험했기에 개종했습니다. 

홍순임(요안나)

저는 정통 불교에 몸담고 있었던 종가집에서 교회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강아파트에서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린다고 외인이었던 언니가 가보자고 하여 가봤더니 정말로 피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겁도 나고 무섭기도 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언니에게 재촉하여 빨리 집으로 도망치듯 와버렸습니다.
그런데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 작은 성모상에서 피눈물을 흘려야만 될까? 제가 잘 못 살아온 과거가 생각이 나서 이제 잘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그 다음에 직장 동료들과 국장님과 소장님을 모시고 갔더니 그 때는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천주교로 개종은 못하면서 와서 눈물과 피눈물, 향유, 성체, 기적을 볼 때마다 그리고 기도회때마다 마음의 변화, 평화를 얻기 때문에 한 번도 거를 수가 없었어요. 사람을 미워했던 마음들은 차츰차츰 저에게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첫 토요일에 배가 남산같이 불렀던 간암, 간경화 환자가 뒤에서 누워 있더니 어느 순간에 보니 배가 푹 꺼져서 물도 못먹던 사람이 배가 고파 죽겠다며 먹는 것이 아닙니까. 그 뒤 그 형제는 완전히 치유되어 매주 목요일과 첫 토요일에 나주 기도회에 다니는 것을 보고 "정말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생활에 쫓기다보니 얼른 성당에 발이 디뎌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첫 토요일 율리아 자매님은 고통이 심해서 못 나온다는 것이었어요. 고통의 의미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는 머리는 열이 펄펄 끓고 머리 밑으로는 너무 추워서 여름인데도 전기 장판을 제일 높은 열로 올리고도 겨울 이불을 두 채나 덮고 머리는 계속 얼음 찜질을 했다는 이야기를 루비노 회장이 하자 어떤 자매가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는 서울과 광주에서 패션을 하는데 너무 바빠 독일로 서울로 광주로 다니면서 계속 쉴 새 없이 일을 하다보니 쓸개가 녹은 줄도 모르고 일을 하다가 너무 많이 아파 병원에 가보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며 당장에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했는데 그래도 견딜 수 없이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서 냉장고 두대의 얼음이 부족할 정도로 머리에 찜질을 했고 머리 밑으로는 추워서 최고로 뜨겁게 하고 있다가 처녀 때부터 고질병인 위장병을 치유받은 조카를 따라 여기에 오게 되었는데 1시간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앉아 있었다니, 아프지 않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냥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제보니 율리아님이 저의 고통을 그대로 받았네요. 저는 완전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자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나왔는데 그 즉시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이 멈추고 행사장에 나와 우리 모두는 또 놀랐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을 의심하던 제가 이제 더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낙태 보속 고통으로 인하여 배가 불렀을 때 낙태한 사람이 회개하니 남산만한 배가 쑥 꺼지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을 체험한 저는 "누가 뭐라 해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은 종손이라 안된다."고 하였지만 {진정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과 성모님께 나를 의탁하고 믿고 세례를 받으리라} 생각하고 교회가 너무 멀어 힘들었지만 1994년 8월에야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은 계속 마르고 아침에 일어나면 혀는 완전히 말랐는데 나주에서 가져온 물을 남편만 주다가 그 날은 너무 많은 눈이 와서 물을 뜨러가지 못해서 그 물을 먹었는데 먹고 나니 입에서 시커먼 덩어리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제 증세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이웃 아줌마하고 비슷해서 죽는가 싶었는데 그 뒤로 병은 치유가 되었고, 그 후 며칠 뒤 손자가 광주에서 집에 왔는데 밤에 열이 너무 높아 펄펄 끓을 정도가 되었는데, 병원도 약국도 없어 나주에서 가져온 물을 먹였더니 조용해져서 "괜찮니?" 물었더니 "응, 안 아파" 하는 것이 아닌가! 또 남편은 간이 아파 굳어진 지 10년이 넘었고 간이 손에 주먹처럼 잡힌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느 날 많은 피를 토하고 기독병원 응급실에 입원해서 생명이 위독하여 임종을 준비할 정도였는데 나주에서 물을 가져다 먹고 거의 깨끗해져 지금은 퇴원하여 일을 하고 계십니다. 치유된 남편은 그 이후 그렇게 즐기던 술과 담배도 끊고 마음도 넓어져 전에 느끼지 못하던 정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이제 모든 것 오로지 주님께, 성모님께 맡기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잘 봉헌하며 성모님 메시지 실천하고 살아가겠습니다.

 

1995년 4월 16일
전남 담양군 남면
홍순임(요안나) T.(0684)83-7148

 

 

 

치유가 일어났던 것은 성체 축성 때였습니다. 

통고 율리아나

(다음은 필리핀 씨부시의 통고 율리아나 부인께서 보낸 증언입니다.)

1994년 1월 23일 오후 7시, 예수 성심 성당에서 제리 올버스 신부님께서 집전하시고 율리아씨가 참석하셨던 치유 미사 때 있었던 일.

사랑하는 천주 성부여,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을 찬양하며, 기쁘거나 슬프거나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마다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당신의 수없이 많은 축복들에 대해 감사드리나이다.
사랑하는 천주성부여, 이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올버스 신부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위해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기도드렸을 때, 당신께서는 참으로 치유의 기적을 내려 주셨나이다.
저는 그 때, 일주일 간 저를 괴롭혔던 오른쪽 귀의 염증이 치유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의사를 보러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귀가 나았으므로 그 후 오늘까지 가지를 않았습니다.
치유가 일어났던 것은 성체 축성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갑자기 귓속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마치 제 귓속에서 곤충 한 마리가 밖으로 기어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귀가 가려워서 비비고 싶었으나, 성심께서 저를 들어올려 주시는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천주경을 외우는 시간까지 귀를 만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제 오른쪽 귀를 만졌습니다. 그 때 저는 천주님의 은총과 치유의 능력에 의하여, 귀가 멍하고 아프던 것이 다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뻤으며, 이 기쁨은 영성체 이전부터 율리아씨가 증언하실 때까지도 계속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이 기적에 대하여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미사의 다음 날은 저의 41회 생일이었으므로 이 기적은 가장 훌륭한 생일 선물이 되었습니다.
올버스 신부님, 율리아씨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도구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는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합니다. 당신께서는 가장 위대한 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1994년 3월 18일
씨부 시에서, 통고 율리아나

 

 

 

천상 어머님의 사랑과 축복의 장미향기를 맡으면서 

김주복(요한)

지난 3월 22일(일요일),
인천 주안3동 본당에서 율리아 자매님의 피정에 참석했다. 많은 교우들이 본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금 후에 율리아 자매님이 본당에 입장하셨는데 짙은 장미 향기가 성당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과 평화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콧물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율리아 자매님의 피정내용에 감탄하여 인간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정이 끝났다. 피정 시간에 계속 장미 향기를 맡았다.
그후 우리 몇몇 교우들은 남아서 율리아 자매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사제관으로 달려갔다. 가다가 우리는 율리아 자매님을 만났다. 우리는 인사를 드리고 함께 기도했다. 그 때 나는 율리아 자매님한테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엄마! 엄마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하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그 때 나는 성모님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너의 믿음이 너의 병을 고쳤다 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하셨다.
기도한 후 장미 향기가 짙게 났다. 너무도 기쁘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 날 점심도 굶었으나 배고픔도 모르겠고 너무 기쁜 마음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 때 집에 와서 묵주반지와 묵주를 아내에게 주었더니 장미 향기가 난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성모님의 사랑이 아주 간절하게 와 닿았으며 "나주 성모님을 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그 때부터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여름 휴가 때는 꼭 나주 성모님을 뵙도록 주님께 간구하며 천상의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생활하였다. 그 후부터 계속 기쁨과 평화 사랑으로 마음이 변하기 시작되었다.
지난 6월 6일 (토요일) 인천 성령가족이 버스 두 대로 나주를 방문하는데 우리 부부가 인도하게 되었다. 기도의 지향은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사랑으로 가정의 평화, 성가정, 가족의 건강, 더욱 더 굳은 신앙에 대한 은총을 간구하는 지향으로 나주를 방문했다. 그 때까지 우리 가정은 매우 어려운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다. 부정적인 아내와의 갈림, 막내아들이 대학에 떨어져 방황하는 생활로 가정은 평화가 깨어지고, 이러한 어려움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나주 성모님을 뵙게 되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다 이루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 날 우리 부부는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기도할 때 가슴이 떨리며 "엄마 사랑해요."하면서 "이 죄인을 버리지 마세요."하며 울었다.
그 후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내 몸에서 장미 향기가 난다고 앞에 앉아 있는 자매님이 말해서 알았다. 그후 계속 목요기도회 참석 후, 귀가할 때 장미 향기가 난다고 말해서 천상 어머님의 사라에 찬 축복의 향기를 맡음을 알았다.
그 후 우리 가정은 평화가 왔고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었으며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서 성모님께 묵주의 9일기도를 시작하여 간구한 소망이 다 이루어짐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9일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있으며 기도의 신비를 체험했다. 지난 8월 15일은 성모님 승천 대축일이어서 성모님 승천에 감사의 묵주기도 15단을 드리고 저녁미사에 참례했다. 신부님께서 시작기도 드리실 때 나의 온 몸이 뜨겁고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을 받으며 장미 향기를 맡았다. 그 순간 감사한 마음과 사랑, 평화, 기쁨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때부터 더욱 더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가지게 되었다.
오늘 아무 것도 모르는 본인에게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천상의 어머님의 사랑에 찬 축복의 장미 향기를 받은 신앙의 신비 체험을 부족한 글로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장미 향기는 성모님의 사랑이며 현존입니다.

 

1992년 9월 27일
인천시 남구 주안8동 1464번지 6/4 석암본당
김주복(요한) T.422-3964

 

 

 

친구 위해 기도했는데 아들이 나았습니다. 

권 가브리엘라

3년전 나주에 처음 내려오던 날, 버스안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 남편이 간경화로 죽음을 며칠 앞두고 있다면서 나주에 가면 성모님께 기도 드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친구를 위해 밤새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이 고 3년생인데 새벽 6시-밤 11시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다녔고 또 지압 등 여러가지 치료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꽁지뼈까지 아프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울면서 기도 드렸어도... 잠시 실망과 실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위한 기도는 나오지 않고 친구를 위해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 우리 아들도 나았으면 하는 생각이 살짝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 순간 율리아 자매님이 "허리 아프신 분들과 꽁지뼈 아픈 사람도 치유되었습니다." 하시는 순간 저는 "아멘!"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물어보니, 다 나아서 안아프다고 했습니다.
성모님, 나주 성모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4년 8월 6일
   수원 서둔동 본당
권 가브리엘라

 

 

 

테이프를 보면서 회개하였는데 아픈 곳이 다 나았고,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할아버지가 영세를 받았습니다. 

최계원(말따)

찬미 예수
관절을 앓으면서 식욕이 증가하여 밥만 먹게 되었습니다. 몸은 무겁고 배만 자꾸자꾸 불러 왔습니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고 또 고픈 그 상태가 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금년 73세가 되신 할아버지와 함께 4년 전 우연히 나주 율리아 자매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끔찍하였습니다.
낙태하는 순간을 율리아 자매는 몸으로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기가 낙태 당하지 않으려고 뱃속에서 기어 다니는 장면들을 보면서, 옛날에 제 자신이 유산을 많이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통회하는 그 순간, 한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며 저리고 아파오는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때 앉아 있는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아주 센 바람이 배를 통하여 위로 휙 올라갔습니다. 하도 이상하여 발을 옮기니까 항상 무겁던 발이 가벼웠습니다. 또 다른 발을 옮기니까 역시 가벼웠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배가 너무 불러서 앉은 상태에서 발을 세우면 그 발이 가슴에 닿지도 않았는데 그 두 발 무릎이 가슴에 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 배가 없어졌습니다. 임신 8개월로 보이던 불룩한 그 배가 없어졌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테이프가 끝나고 흘러내리는 바지를 부여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며, 공경하고 감사드립니다. 한없는 사랑만 베푸시는 주님께 제가 기도를 드리면 다 들어주셨습니다. 팔이 아파서 머리 위로 올리지 못했을 때, 배에서 항상 꺼억꺼억 소리나던 것들 모두를요.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하시던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제 병이 하나씩 하나씩 낫는 것을 보시고 드디어 영세를 하셨습니다. 이제 젊은 청춘은 다 갔지만,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우리 부부, 마

지막 남은 이 황금시기를 오직 주님 영광 빛내는 데 쓰겠습니다.

 

안성 구포동 본당
최계원(말따) 올림

 

 

 

휠체어를 타야만 되었을 아들이 성모님의 손길로 껑충껑충 뛰다니...

윤한채(베드로)

찬미 예수
저는 인천에 사는 윤 베드로라고 합니다.
제가 받은 은혜는 많지만 아들을 통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리며 몇자 적고자 합니다.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인 제가 1992년 11월 23일 광주에 왔다가 버스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고 있으면서 큰 처형 댁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작은애가 조금 다쳤다고 밤 9시인데도 집으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다른 얘기는 일절하지 않았지만 큰애가 교통사고라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애가 다쳤더라도 머리만은 다치지 않고 생각과 기도만은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인천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습니다. 상황을 들어보니 친구들과 함께 잃어버린 친구 자전거를 찾으러 가다가 과속으로 달리는 고속버스에 받혀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밑으로 머리가 부딪히려는 순간 무릎이 먼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일단은 감사기도를 드리고 C.T (시티)촬영을 해보니 이상이 없다고 하여 허벅지가 아프다는 데도 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2-3일 지나자 아내는 애가 오줌을 자신도 모르게 싼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라 어이가 없어 하늘만 쳐다보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제가 군에서 상이 제대를 했기 때문에 척추가 다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감각없이 오줌을 누기 시작하면 하체가 마비되어 반신불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돈을 빌려서 허리를 촬영해 보니 1번 부터 5번 척추까지 수액 탈수증으로 물렁뼈가 다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대책이 없어 차를 운전하면서도 계속 눈물만 나고 서러웠습니다. 꽃동네다, 삼성산이다 기도회만을 운행하는 저는 계속 운전을 하면서 제 아들만한 애들을 보면 너무 눈물이 나와 운전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진단이 영구장애로 나왔는데 입원비가 한달에 100만원 이상 들게 되고 일단 다시 퇴원을 했지만 교통사고는 의료보험이 안되기에 궁리를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다시 부평 성모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검사결과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하면서 성가병원으로 가서 MRI 촬영검사를 하면 치료법까지 나온다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암담하기 그지없는 저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차를 가지고 (광주)왔다가 11월 마지막 목요일 나주 성모님 집 성시간 기도회에 와서 성모님께 당신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사제가 되겠다고 하던 어린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되겠습니까? 하고 울며 기도를 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아들 로렌죠를 위하여 촛불 봉헌해 주셨고 성모님이 주신 물을 주셔서 즉시 가지고 가서 로렌죠에게 먹였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다시 성가병원에 가서 MRI 촬영한 결과 "괜찮네요, 아무렇지도 않네요." 하고 결과가 나왔는데 정말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얼마나 기뻤는지... 그 뒤 12월 첫 토요일에 로렌죠는 나주 성모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나주에 와서 성모님 앞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은혜 성모님께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1992년 12월 6일
인천시 서구 가좌3동 184-38호
상일주택 8동 103호
T.(032)571-1519
윤한채(베드로) T.(032)571-1519

 

 

 

평생동안 용서를 빌어도 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황 레지나

저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믿음이 없었고 나주 성모님 집에 와서 율리아 자매님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보니 평생동안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용서를 빌어도 다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내 살아 생전에 다 빌고 죽겠나 생각하면서 통회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상대방이 저에게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율리아 자매님처럼 저는 두들겨 맞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도와준 것이 어리석게 도와주었기에 갖은 수모를 다 받았습니다. 용서하려고 해도 10년을 마음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기도회나 세미나에 가서 용서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 드렸으나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하느라고 했는데 나더러 바람을 피웠다고 하면서 남편과 헤어지도록 만들어 한 가정을 파괴시켰던 그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습니다. 교우가 그것도 제일 가까운 대모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었기에...,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듣고나니, 몇 달, 몇 년 아니 평생 죽을 때까지라도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겠습니다. 그리고 돈 빌려가고 갚지 않은 사람들이 용서가 되지 않았는데 오늘 저녁 성모님 앞에서 다 용서해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 다른 분에게 사정하여 돈을 빌려주었더니 갚지 않아서 제가 5년동안 3백만원 빚을 5백만원이 넘도록 갚았습니다. '나에게 돈을 빌려준 집 딸은 수녀원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돈 갚느라고 나 때문에 늦게 보내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살아오면서 하느님 자비를 많이 받았는데 벌써 죽을 목숨 살려 주신 것을 증거 안하고 내돈, 내돈 하면서 원망만 하고 살아온 것이 부끄럽습니다.
나주 성모님 집에 오면서 앞문으로 들어왔는데 나올 때는 화장실쪽 문으로 나오겠습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5년 6월 3일
부산 영주동 본당 황 레지나

 

 

 

평생 장애자나 성불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김영자(아가다)

찬미 예수
하느님께 영광을!
저희는 인천에서 버스로 순례자를 인솔해 다니는 김아가다입니다.
저희가 나주 성모님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1월 죄중에서 무지함과 고통 중에서도 성모님의 돌보심을 늘 깨달으며 크고 작은 수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받은 은총은 많지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고속도로 대형사고에서도 성모님은 안전하게 지켜 주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1992년 11월 첫 토요일 철야기도를 하기 위하여 인천에서 나주를 향해가던 중 호남고속도로에서 앞에 가던 차가 사고가 나 길이 막혀 서행하던 중 뒤에 따라오던 고속버스가 우리 차를 발견 못하고 들이받았습니다. 그 힘에 밀려 앞차들을 다 밀어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차가 살짝 옆으로 비껴났기에 우리 차는 뒷부분만 박살나고, 차 안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은 그 순간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고 했는데 그 위기 속에서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는데 반면 우리 차를 받은 차는 27명이 병원에 입원했답니다. 이 모든 것 어찌 성모님의 은혜라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천주께 영광을 드리고 성모님께 찬미를 드리며 죄 많고 고약한 우리 영혼을 가꾸어 주시는 나주 성모님을 생각하며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표현력 없는 저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여러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1992년 11월 23일 중학교 1학년생인 둘째 아들 로렌죠가 학교에 다녀와서 친구들과 함께 잃어버린 친구의 자전거를 찾으러 나갔다가 과속으로 달리는 고속버스에 받쳐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떨어져 다치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다치지 않았기에 큰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한 우리 부부는 천만다행이라고 주님께 감사하며, 그들에게 조건없이 합의를 해 주려고 병원으로 갔더니 글쎄 아이가 울상이 되어 있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사고 낸 부부가 함께 와서 너 때문에 150만원짜리 비디오가 펑크가 났다고 하면서 재수 없다고 아이에게 말했대요. 얼마나 기가 막히고 화가 나는지 그들이 처음 사고라고 하여 우리는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합의를 해주려고 했는데 다친 아이한테 했다는 그말에 저희들은 합의를 해주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병원비도 우리가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렌죠는 자꾸만 소변이 나오는 데도 감각이 없고 허리도 아프다고 했지만 저희는 타박상으로 그런 줄만 알고 있었고 진단서도 그들이 마음대로 떼어갔기에 원인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옆에 입원환자 한 사람이 자꾸만 허리검사를 해보래요. 그 사람도 비슷한 환자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검사를 했더니, 글쎄 척추가 1번부터 5번까지 다 다친거예요. 너무 기가 막히고 캄캄했었죠. 왜냐하면 평생 장애자나 성불구자가 되어야 한다니.... 사실 그런 사람이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기에 더 확실히 알게 된 거지요. 너무도 놀라 암담해진 장부 베드로씨가 그 사실을 안 즉시 나주 성모님께 로렌죠를 봉헌해 달라며 율리아 자매님께 전화 드렸고,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 율리아 자매님은 나주 성모님께 우리 로렌죠를 위해서 촛불 봉헌을 하고 성모님께서 주신 물도 가져다 먹이라고 하여 저희는 즉시 그렇게 했습니다.
보험에 안들어 있던 차였기에 병원을 옮기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일주일 후 다시 *** 검사를 했는데 로렌죠의 병이 완전 치유가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성모님께서 주신 물을 마시고 또 자매님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아마 당해보지 못한 분은 이런 기쁨과 감사를 느끼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 천주께 감사드리고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한가지 제가 사랑하는 큰 언니가 성모님께서 주신 물로 받은 은총에 대하여서도 함께 사랑을 나누고자 합니다. 큰 언니는 전남 곡성에서 농사짓고 살며 형부는 7대 독자이기에 자녀를 3남 5녀, 8남매를 낳아서 35년 가까이 잘 기르고 안전하게 살아왔는가 했는데 가정에 큰 폭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언니는 위암선고를 받았고 치료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둘째 아들이 군에 입대하여 6개월 만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또 6개월만에 시집간 딸이 출산일 15일 앞두고 구정 전날 시댁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언니는 죽기로 작정했고, 남은 조카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형부는 남자이기에 아내를 지키기 위하여 아들과 딸을 잃은 슬픔을 속으로만 삼켰기에 홧병이 들었습니다. 지치고 지친 상태의 언니를 우리가 사는 인천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형부는 처제가 믿는 하느님이 언니 좀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마음이었겠지요. 형부의 믿음대로 하느님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언니가 살 수 있는 길, 또 남은 가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길은 나주에서 있는 첫 토요일 기도회 때마다 다니면서 묵주의 기도도 열심히 하며, 성모님께서 주신 물도 열심히 먹으면서 성모님께 한을 풀라고 말했는데, 언니는 그대로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인천 성모 자애 병원에서는 위암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저희와 언니는 나주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기도 드리기로 마음을 모아 매월 첫 토요일마다 열심히 다니며 성모님이 주신 물을 가져다가 열심히 먹었는데 10월 19일 철야기도회 때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형부는 영세도 하게 되었고 홧병도 치유되었으며, 개신교에 다니던 조카도 영세하고 모든 가족이 구원받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언니와 형부는 공소에 다니고 계시는 데 그 공소에서 언니 부부가 빛이 되어 신자가 많이 늘어났답니다.
또 조카가 시댁인 영광에 가다가 사고가 났는데 그 아이는 교적만 영광에 있지 주민등록상 주소지는 그 곳이 아니어서 교구묘지는 커녕 화장시키는 것도 주소지인 인천에 가서 해야할 입장이었습니다.
저희는 사고 연락을 받고 바로 또 나주 성모님께 봉헌해 달라고 율리아 자매에게 전화드리고 광주 전남대병원에 와보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언니, 형부는 실신 직전이었는데도 조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정날이라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주 성모님 때문에 알게 된 신부님 세 분께 장부 베드로씨가 부탁드렸는데 신부님들의 기도와 성모님 도우심으로 광주교구 수도자묘 한가운데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화장도 광주에서 시킬 수 없다고 주소지로 가라고 했는데 정말 성모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어떠한 불가능도 가능케 해 주셨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가족들은 묘지에 와서 환희에 찬 기쁨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광주 교구묘지, 참으로 아름답더군요. 그때 마침 수도자 묘가 일반에게 몇 자리만 허용되는 시기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 조카가 살아 생전에 수녀원 간다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였지만 그냥 결혼을 했는데 죽어서라도 수도자묘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지요. 그 아이가 영세 받는 날 얼마나 장미향기가 풍기는지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랬더랬어요. 얘기 하다보니 자꾸 사고 이야기만 했는데 사실은 변화되어 가는 우리 영혼이 더 중요하지요. 저희가 나주 성모님 집에 다니면서 부터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얼마나 고약한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 되었건 남에게 지기 싫어한 죄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번에 은총을 받기를 원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나주에 갔다 올 때마다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것 같애요.
받은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그 반면에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더욱 열심히 나주에 다니려고 노력하는 신자들을 볼 때 저희는 힘을 얻습니다. 그러니 저같이 무지한 죄인도 이렇게 느끼게 되는데 성모님은 당신을 만나러 오는 자녀를 얼마나 기쁘게 반기시겠습니까.
저희들은 앞으로도 나주 성모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착한 아들 딸이 되어서 주님과 성모님을 따라 하늘나라까지 가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시다. 서로 기도하며 성모님의 손을 잡고 구원 방주타고 하늘 항구까지...

 

1995년 5월 20일
인천시 서구 가좌3동 184-38호 상일주택 89통 103호
김영자(아가다) T.(032)571-1519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과 햇빛의 찬란함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나주 성모님 덕분이어라 

이연희(데레사)

500배드가 넘는 규모의 종합병원 과장으로 있던 남편이 44세가 되던 해에 정신질환에 걸려 얼마나 처참하게 괴로워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원래 남편은 열이 40도까지 올라도 옆에 사람이 모를 정도로 미련스러울 만큼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약을 먹어도 2-3시간 밖에 못잤고, 그것도 육체만 쉬는 것이지 머리 속은 핑핑 계속 돌아가고 눈을 뜨는 순간부터는 1초도 쉬지 않고 더욱 생각이 돌아갔지요. 원망과 분노, 한에 대한 불덩어리로 자신을 태우고 또 태웠습니다.
추운 겨울에 얇은 런닝셔츠와 팬티만 입고도 진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갔다 하다가 런닝셔츠마저 휙 하고 벗어던질 때, 1.5l (리터) 짜리 생수병이 금새 식탁위에 빈병으로 10병쯤 가득 놓여져 있을 때 아득해졌었습니다.
병원에 한 번 가려면 여러 사람이 며칠을 매달렸지요. 약은 잠만 좀 잘 수 있게 해 주었고 다른 증상들은 그대로였지요.
약 먹고는 갑자기 살이 많이 찌고 둔해졌는데 종일 마루방을 걸어다녀 두 발바닥은 찢어지고 굳은살은 쩍쩍 갈라져 피가 흘렀습니다. 현관 벨소리가 나면 눈초리가 변하면서 얼른 방으로 숨었었지요. 절대로 현관 바깥을 나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세수하는 것도, 양치질 하는 것도 잊어버렸고, 손발도 씻어주지 않으면 더러운채 그대로였고, 손톱이 마귀손톱처럼 길게 자라도 깎아주지 않으면 그대로였지요.
최고로 심해졌을 때는 걸레, 휴지뭉치, 물뚜껑, 연필 등 여러가지 물건들을 보이는대로 일렬로 늘어놓고 그 사이를 고개를 숙여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 했습니다. 1년에 1-2회 목욕을 시켜도 재빠르게 대충 씻어 드려야 했어요. 따뜻한 물이 닿으니까 숨이 컥컥 막히고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떨었습니다. 6명의 전문의를 4년동안 바꿔보기도 하고 약을 써보았는데 좋아지기는 커녕 나빠져 가고 있었지요.
푸른하늘의 아름다움과 햇빛의 찬란함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차츰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발병하고 2년쯤 되니까 주위에서 "병 낫는 것을 기대하지 마라."하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병에 걸린 친지를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병원에 수차례 입?퇴원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도 그들이 여전히 그대로임을 얘기들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제게 어떤 무서움의 고통을 주는지도 모르고요.
친정 어머니까지 "이제 안낫는다. 포기해라. 준필 (엄마 남동생 아들)이 봐라. 병원에 그리 오래 입원 했어도 10년이 넘어도 안나았잖아." 서울의 친언니도 "얘! 너보다 더 신앙이 깊으신 우리 동네 목사님 바로 친형이 정신병에 걸렸는데 안나아서 결국 병원에서 자살했다더라. 그렇게 남편에게만 매달려서 광신자처럼 하느님, 성모님 찾지 말고 앞으로 애들 공부시키고 살아나갈 계획을 생각해라. 좀 현실성 있게 살아라." 하고 걱정어린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럴수록 믿음은 더 커갔습니다.
대구 성모당을 몇 번 작정하고 하루도 안빠지고 다니고 있던 중 6개월이 채워지는 어느날 불현듯 나주 성모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째서 그동안 나주에 한 번도 못갔을까?' 나주엘 가고서 부터는 성체를 영했을 때와 흡사한 영혼의 힘을 얻곤 했습니다. 나주 성모님상과 비슷한 성모상을 저희 집에 모실 수 있도록 율리아 자매님께서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요. 모시고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성모님의 집에서처럼 장미향기가 진동을 해 몽롱하게 취했습니다. 설득해서 데리고 간 개신교 신자인 친구가 "아이고 퍼붓는다 퍼부어!" 해서 저만 맡는게 아님을 알았지요. 둘째 딸이 집에 와서 "엄마, 집에 향수 뿌렸나?" 했습니다.
작년 8월에 빈첸시오 형제분들의 도움으로 남편을 나주에 데리고 왔었어요. 병원에 가는 줄 알고 남편은 울었어요. 도착해서 3일째쯤 되던 날인가, 생각하는 자세로 몇 년 동안 땅만 보고 지냈기 때문에 뒷목덜미에 불룩한 살덩어리가 생겨서 목을 뒤로 젖힐 수 없었습니다. 많이 아파했었지요. 내내 "당신은 이 목이 얼마나 아픈지 모를꺼야!" 했었는데 그날 봉사자가 "누구 목뒤가 아픈 분 계세요? 율리아 자매님 목뒤가 많이 아파요. 아침에 병원에 갔다 왔는데 계속 아파 못 움직이셔요." "우리 아빠가 3년째 아픈데..."생각하며 "여보, 목을 뒤로 젖혀 보세요."하자 "어? 여기 오니까 목이 안 아프네."하며 큰방에서 주방까지 뛰어보며 확인하였습니다. 자매님은 제 남편을 만나기 전인데도 대신 고통을 받으셨고 남편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유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마침 서울서 도착한 시어머니, 시동생도 보았습니다.
며칠 뒤 토요기도회 만남의 시간이 되었을 때 남편을 성모님께로, 또 율리아 자매님께로 인도해야 하는데 '어떡하나'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지금 대부가 되신 사비아노씨께서 주저앉아 꼼짝도 않는 남편을 부축해서 성모님께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기도를 받자마자 얼굴에서 두려움이 걷히고 표정이 변화되고 밝아졌습니다.
대구에 돌아오니까 당장에 담배를 사러 나가는게 아닌가요? 가슴이 두근 두근거렸어요. 다음날 조심스레 "여보! 산책하러 갈래요?" "그럴까."하며 양말과 바지를 혼자 입는데 그 순간의 신기한 기쁨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 달 가량을 동네 산에 하루 1시간 정도 산책할 수 있는 기적의 선물을 받았지요. 갇혀서 못나오던 분이, 어떤 약으로도 당장 외출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였는데 9월이 되어 함께 갈 수가 없어서 저 혼자라도 나주에 갈까 했는데 큰 딸애가 "엄마, 여기 나주 성모님상 모셔 놓았으니 기도하면 성모님 오실텐데..." "그래, 그러자." 이미 향기가 사라져 버린 율리아 자매님께서 주신 묵주에 코를 대고 성모님 냄새를 찾으니 "엄마! 제발 좀 그러지마, 그러니까 이모가 흉보지, 미신 믿는 사람처럼" "아니다. 너희도 엄마 없을 땐 냄새 찾다가 나중엔 엄마 베개 서로 안고 잔다면서? 꼭 같은 마음이란다." "자! 니가 이 묵주들고 해라." 묵주를 바꾸어 쥐고 기도하고 있는 중에 큰 애가 "아이, 깜짝이야!" 몸을 움칫하며 놀란 소리를 질렀습니다. 딸의 콧속으로 진한 장미향기가 갑자기 확 뿌려졌다 했습니다. 아빠와 같이 과학적 사고와 육적이고 세상적이던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8월에 나주를 한 번 가고 계속 못갔더니 겨울에 더 심해졌습니다. 다급해서 병원에 가기 전에 아무래도 나주 성모님께 한 번 더 봉헌하고 가고 싶었어요. 택시기사가 번쩍 안아 차에 태우고 나주엘 갔습니다. 밤새 남편을 위해 기도하려고 묵주를 들었는데 옆에서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자궁암 말기로 암덩어리가 항문에 번져서 변을 못보는 고통 때문에 진통제를 계속 먹어도 소용없는 자매의 신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기도 지향이 그 새댁을 위해서 바뀌어 지기에 "안돼, 남편도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데"하고 지향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또 신음소리가 제 마음에 와 박혀 조여드는 안쓰러움으로 가득차 또 묵주알은 새댁을 위해 굴려지고 있었고 다시 '안돼! 남편이 더 괴로워!' 하면 금새 새댁의 고통 앞에 제 마음이 가 있었어요. 안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어느새 불쌍한 마음이 가득차 버려 빠르고 다급하게 새댁을 위해 기도하게 됐습니다.
아침이 되니 불교신자인 새댁이 고통이 말끔히 가시어 기쁨으로 밝아진 얼굴 모습이 되어 두 손을 합장하고 성모님께 고개 숙였습니다. 불교신자인 시어머니도 기뻐했었어요. "참 신기하지요. 진통제 먹어도 소용이 없더니 지금 아무렇지도 않고 안 아프네요."라고 새댁이 말하더군요.
우리는 대구로 왔다가 다시 서울 병원으로 갔는데 나주 성모님께 봉헌하고 왔기에 어머니를 자신있게 불렀습니다. 의사가 남편과 대화를 해보더니 "아! 나으셨군요. 3년 전보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 때는 횡설수설 하셨는데요." "어떤 치료를 받으셔서 저렇게 좋아지셨습니까?" 저를 보고 물었는데 "네?" 하고 멍하니 있으니까 "왜 오셨습니까? 저렇게 나으신 것 같은데"라고 하셨는데 남편은 다시 열과 구토로 잠을 잘 못 주무셔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3월 기도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난뒤 새벽쯤 되니 모든 걱정, 근심 사라지고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기쁜소식이 있을 것만 같아서 오전 내내 성모님 곁에서 더 기도 드리고 대구에 전화를 했더니 둘째 딸의 목소리가 방울같이 명랑해졌어요. "엄마, 나주 성모님께서 응답해주셨어! 아빠가 방금 전화하셨어."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빠가 걱정이 되어서 애들이 전화를 하면 안받거나 "응! 응!" 딱 두마디 하고 얼른 끊어버리곤 하셨는데 제가 옆에서 "여보,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있으니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말씀 좀 해 주세요."하고 사정해도 안받던 아빠가 직접 전화를 해서는 여러가지 말도 기분좋게 하시고 "아빠, 곧 갈께!" 하셨다 합니다.
3월 기도회부터 남편에게는 하루 하루가 쏟아지는 은혜 덩어리였습니다. 무신론자인 남편이 이태원 성당까지 매일 가서 마당에 계신 성모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왔고 드디어 교리반에 입교해서 1달 만에 모든 기도문을 다 외웠습니다. 이 모두가 성모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음을 느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3월에 입교했는데도 5월에 영세 주시겠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어머니께서 지휘, 감독하심을 잠깐 잊고 4월 기도회 때 성모님과의 만남의 시간 때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를 받기 위하여 눈을 살짝 감았는데 십자성호를 그어주시며 "성가정 이루도록 하세요!" 하시는게 아닙니까. 뛸듯이 놀랐습니다. 아니! 어찌 알고 병원에 아직 있는 줄로만 아실텐데 예전에 수 십 번 만나뵙고, 기도 받아도 한 번도 그 말씀은 안하시더니, 정말 성모님께서 제 낙담의 기도 들어주시어 율리아 자매님의 목소리로 제게 허락을 하셨으니 아! 너무나 큰 죄인인 저는 그 사랑에 어찌 보답해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펜을 들고 있는 지금도 불효녀 신세를 못 면했습니다.
남편은 기쁘게 교리 공부를 하러 매주 화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다녔어요. 신부님께서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시고, 많이 사랑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6월 5일로 영세식날이 정해져서 주보에 공지가 되었어요. 5월 어머니달에 영세를 받게 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유는 어머니가 살려주셨으니 어머니 달에 세례받고 30, 31 예수님 모실수 있게 되었으면 싶었고, 6월 4일날 나주에도 갈 수 있기를 바랐는데 정말로 다시 5월 29일로 바뀌어졌습니다.
영세식날 이태원 성당 성가대에서 나주에서 처음 들었던 "성모님께 바치는 노래"인 "해와 같이 찬란하고 달과..." 성모찬가를 불렀고 남편은 하느님의 참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6월 4일 나주 토요기도회에 참석하러 나란히 가서 어머니께 인사드렸어요. 남편은 12월인 지금까지 미사참례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신?구약 성서 3독했고, 다시 성당에서 시작하는 성서 40주간에 정독으로 4번째 읽어갑니다. 믿음이 없었지만 자꾸만 되풀이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하느님의 역사를 봄으로써 언젠가는 씨앗이 돋을 것으로 믿습니다.
하루 묵주기도 20단, 성체조배, 미사전례에서 독서, 신자들의 기도, 봉헌예절을 자주 맡아 봉사합니다. 레지오에도 하도 권해서 입단은 했는데.... 8월부터 테니스치기 시작했고 병들기전 선수급이었던 실력이 병들무렵 갑자기 날아오는 공을 못맞추게 되면서 라켓을 놓았는데 5년만에 다시 시작했어요. 3개월만에 테니스 클럽에서 잘치는 순서 5위안에 듭니다.
아픈 줄 모르니까 굉장히 인기가 좋습니다. 본인이나 저는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하게 되는 시기는 테니스를 이전처럼 치게 될 때로 잡습니다. 우리의 회개와 악습을 뿌리 뽑는 날, 허락하실 것 같아요.
"나주 성모님 책 몇권 줘, 줄 사람이 많다." 받는 분들은 좋은 반응을 보입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할 때 더 빛이 납니다. 200권 이상 메시지 책을 돌렸는데 그 중에 대구 신부님만 10명쯤 됩니다. 한 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에 어머니께 누가 될까봐 그동안 근신하고 있었더니 저대신 남편이 전파합니다. 재가 할 때보다 확실하게 또 남자들에게 전파되니... 전교도 하는데, 예전에 이런 날이 올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아프기 전에 철저한 무신론자였으니까, 나주 성모님께 불경스런 얘기하신 신부님께 분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기적의 선물 앞에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한가지 은혜 받은 것 빠뜨릴 뻔했습니다.
3월 기도회 끝나고 집에 와보니 큰 딸애가 열이 펄펄 끓어 호흡이 가빠지고 페렴으로 입원하기 전과 꼭 같은 증상이라 앞이 캄캄했어요. 딸의 손을 잡고 주저앉아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있는데 고 3학년인 큰 것이 "엄마! 가지마! 내손 잡아줘." 헐떡이며 말할 때 성모님 생각이 번쩍났습니다. "아니다! 기도해 줄께." 마루에 나가서 어머니께 앉으니 철야기도회에서 얻은 평안한 마음이 다시 찾아오고 든든하게 믿음이 커져 "어머니, 조금만 아프게 해주세요. 이것을 통해서 천상 부모님 사랑 알게 해주세요." 하고 편안히 잤습니다. 이전 같으면 밤새 걱정으로 간호하며 밤을 지새웠을텐데, 아침이 되어 열이 내려서 하얀 얼굴로 또 놀란 토끼 눈으로 딸이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 기도했어요?" "응" "엄마! 간절히 기도했구나." "아니,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했다." 큰 딸 아이의 감동이 스쳐 지나가는 눈빛에서 "천상 부모님 사랑 알게 해주십사."했던 응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말고 나주 성모님상 앞에서 기도 응답받은 것 여러가지이지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율리아 자매님 사랑합니다. 저희들 죄악으로 대신 당해내셨던 많은 고통의 대가로 영원한 멸망의 구렁에서 살아났습니다. 물론 천상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구해내시는 성모님과 함께 도와주셨으니까요.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아멘.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지산 청구APT 102동 1302호
이연희(데레사) T.(053)792-9718

 

 

 

피어보지 못한 꽃이 꺾어지는가 했는데
"날개 달린 하얀 엄마하고 같이 왔어" 하며 아들은 살아났다 

황규봉(발바라)

찬미 예수
안녕하십니까?
주님과 성모님께 제가 잘못 살아온 생애와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어야 했던 제 둘째 아들을 통하여 저희를 나주로 불러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나주 성모님께 받은 은총에 대하여 몇 자 올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 길이 얼마나 잘못 살아온 길이었는지 나주 성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하여 큰 꿈을 가지고 신학교에 다녔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 동안 돈과 재물이면 만사가 해결되는 줄 알고 주위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살아왔으며 때로는 주일 미사까지 빠져가며 돈을 벌기 위하여 뛰면서 냉담까지 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식에게 "악성 뇌종양"이라는 죽음의 병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끝내는 2-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고 저는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돈도 재물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같은 자식의 생명을 지켜볼 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병원 다니기를 한 두군데도 아니고 여섯군데나 병원을 다녀봐도 똑같은 결과였습니다. 수술 할 수도 없이 뇌종양 암세포가 퍼져 있어 수술하지도 못하고 죽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쓰라린 아픔, 손을 쓰지 못하고 그냥 구경만 해야하는 기막힌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학교 2학년인 레오가 이상이 생겨 부천 병원에 갔더니 큰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하기에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강남성모병원으로 가라고 하셔서 갔더니 M.R.I와 C.T 촬영을 한 결과 악성 뇌종양이며 3개월 밖에 더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눈 앞이 캄캄했고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습니다. 믿기지 않는 현실, 그래서 다시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원자력병원에 가서 다시 검진했을 때에는 2개월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호주머니에는 1,500만원 2,000만원이란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돈이 있어도 수술도 하지 못하고 손을 쓸 수 없이 구경만 해야하는 부모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 하루 말라서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레오는 14kg-15kg밖에 나가지 않아 바람이 불면 100m는 날아갈 것만 같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아이라 병원에서 받아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애가 만일 당신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고 제가 의사 선생님께 물었더니 "나 같으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겠습니다."하며 전혀 희망이 없음을 표현하는 말을 듣고 퇴원하는 전날 밤 저는 병원 안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 곳에 가서 성모님께 하염없이 하소연 하면서 울었습니다. "어머니, 도대체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고 하소연하면서 혼자 울고 있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얼굴을 가리고 울며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옆에 오는가 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레오는 혼자 입원실에 있었는데 4-5개의 주사 바늘을 혼자 다 빼고 계단을 기어서 저를 찾아 내려온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달래야 되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이를 위로해 주고 달래주어야 되는데 아이가 저를 달래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한참 울다가 성모상을 가리키며 "그래, 이 엄마가 살려주신다 아빠가 너 살려줄께 같이 기도하자."하고 아이를 달래주기 위하여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어떤 자매님이 조그만 책을 주고 가는데 저는 순간적으로 '이 자매님이 미쳤나? 남의 속도 모르고 독서를 시키려고 하나'하고 생각했지만 그 자매님은 아무런 다른 소리도 없이 "형제님, 이 책 한 번 읽어 보세요."하고는 가셨습니다. 저는 '뭐 저렇게 생긴 사람이 다 있나?' 하면서도 '무슨 책인데 그럴까?'하고 보았더니 나주 성모님께 관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식의 죽음 때문에 울고 있는 저 자신과, 수 많은 영혼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고 계신 성모님을 생각하며, 자식을 퇴원시키고 오로지 자식의 영혼 육신을 성모님께 바치고자 집사람과 큰애랑 함께 넷이서 처음으로 나주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전혀 나주 지리를 모르기 때문에 묻고 또 물어서 아이가 국민학교 2학년이었지만 14-15kg밖에 안되어 걷지도 못해 업고 오다가 목마를 태우고 오다가 하면서 성당까지 가게 되어 성모님 집을 찾게 되었는데 성모님 집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웬지 모르는 평온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인자한 모습이셨고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장미 향기와 숨김없는 사랑으로 저의 가족을 맞이해 주시는 박 루비노회장님, 이 모두가 주님의 뜻이 아닐까요? 루비노 회장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작은 방을 주셔서 저는 그날 밤부터 성모님 앞에서 계속 울었습니다. "어머니, 이 아이를 데려가시는 것은 좋습니다. 그 대신에 이 아이가 받아야할 육체적 고통은 저에게 주시고 아이가 편안한 마음으로 당신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요."하며 울면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사흘째 되던날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 집에 오셨고 그중에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회장님께 말씀드리지도 않고 집사람과 큰애를 서울로 먼저 올려 보냈습니다. 레오는 엄마를 따라 가겠다고 울고 불고 떼를 쓰는데 저는 애를 달래며 속으로 '너는 여기서 엄마 (성모님)품에 안겨라. 더 이상 엄마 가슴에 못을 박지 말아라'하고 울며 간청했습니다.
하늘도 이 마음을 알았는지 비를 내려 주셨고 모자간은 눈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우는 아이를 업고 목마를 태우고 다시 경당으로 들어섰을 때 웬지 성모님의 모습은 너무도 처량하게 보였습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이 비천한 죄인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또한 맑고 깨끗한 이 어린 영혼, 육신도 당신께 바칩니다.
이 아들은 저의 아들이기 전에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뜻대로 하소서.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렵니다." 저는 몇 시간을 성모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철 없는 아들은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저녁 늦게 아들을 업고 성모님의 집에 왔지만 사람이 많아 여인숙으로 갔습니다.
피어보지도 못한 꽃이 꺾여져야 할 어린아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을 끌어 안고 팔베개를 해주고 잠을 잤는데 11시 30분쯤 팔이 허전해서 눈을 떠보니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없어져 깜짝 놀라 찾아 봤지만 여관에서는 찾을 길이 없어 우산을 쓰고 찾아 나섰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우산을 썼지만 옷이 다 젖었습니다. 나주 병원에서 2번 또 나주 역에서 2번을 왔다 갔다 하며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세 번째 다시 가 보아도 아이는 없어서 몇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찾아 다니다가 쓰레기통만 보아도 아이가 아닌가? 살펴보고 아이를 찾아 돌아 다니다가는 도랑에서 넘어져 발목을 삐었는데 오직 아이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에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아이를 찾아 다녔는데 '이 녀석이 혹시 시신도 안보이고 어머니 품으로 가려고 일부러 어디 안보이는데 간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때 무언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 집을 생각하며 '아차 거기구나' 그때부터 우산도 팽개치고 성모님 집으로 뛰었습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는지 삐어서 부었던 발목은 감각도 없었습니다.
성모님 집으로 뛰어가서 보니 아이가 성모님 집 제단에서 뭐라고 혼자 흥얼흥얼 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곳에는 다른 사람은 없었고 장 마리아라는 위암 4기 시한부였던 자매님이 혼자 누워 계셨습니다. '나주 지리도 모르는데 어떻게 걷지도 못하는 애가 여기까지...?' 생각하며 아무리 보아도 계속해서 흥얼거리고 있는 그 애는 틀림없는 제 새끼였습니다. 경건한 곳이기에 뛰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잃었던 아이를 보는 순간 성호도 긋지 않고 성모님 앞을 뛰어갔습니다.
"레오야!"하며 끌어 안은 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너, 어떻게 여기를 왔니?" "아빠, 나 아까왔어, 왜 아빠는 이제와?" 자꾸 물어보니 "날개 달린 하얀 엄마하고 같이 왔어." "뭐?" 저는 우산을 받고도 비를 다 맞았는데 애는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소리를 듣고 '거짓말이다.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장 마리아 자매님에게 애가 누구하고 같이 왔었느냐고 물어보니 "누구하고 온 것은 확실히 모르지만 단지 문 앞에서 "엄마 안녕!" "엄마 안녕!"이라고 말을 했었고 애가 들어올 때 장미향기가 굉장히 짙게 났었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 마리아 자매님은 레오가 엄마와 같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는 네가 갈 때가 되었구나 엄마 품에 갈 때가 멀지 않았구나! 이제 네 육신의 고통을 내가 받는 수밖에 없다'하고 성모님 앞에서 애를 잠 재우고 울고 또 울며 묵주 기도를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해는 이미 높이 떠 있고 애는 또 없어졌습니다. 너무 놀라 밖을 내다보니 레오는 밖에 계신 성모님상 앞에 가서 피를 토하고 있었죠. 얼른 뛰어 나가는데 "왜 뛰어요?" 하는 마리아 자매님의 목소리도 들리는듯 마는듯 했습니다. 나가보니 성모님상 앞 뜰에 피를 토해 놓았습니다. '치료가 되는 건가? 아닌가? 피를 토해 내서 이제 끝나는가?'하는 별별 생각을 다해 보다가 또 '여기서 기적도 많이 일어난다는데 이것이 기적이었으면 /'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비노 형제님과 율리아 자매님 또 다른 형제 자매님들이 보실까봐 얼른 물을 떠다가 씻어낸 뒤 애 입도 닦아주고 레오를 데리고 밖에 잠깐 다녀 오겠다고 얘기하고 나가면서 (레오가 걸을려면 힘도 없을뿐더러, 머리가 움직이면 아파서 걷지 못하기 때문에 여지껏 업고 다녔기에) "레오야 업자."고 하자 레오는 "내가 애기야? 왜 업어?" "내가 이제까지 너 업고 다녔잖아!"하니 레오는 "아빠, 나 먹고 싶은 게 있어-아빠! 나 통닭 사주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도 못먹던 애가 통닭이라니... 네가 어떻게 통닭을 먹어? 그렇지만 네가 사달라니 아빠가 사 줄께."하면서 양념통닭 한 마리를 사 주었더니 한 마리를 다 먹는 것이 아닙니까.
죽도 잘 먹지 못하던 애가 통닭 한 마리를 다 먹다니... "야! 이것봐라"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며 그동안 레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던 저의 본당 태의선 로마노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손을 대 주셨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후 2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 때 당시 2학년인데도 체중이 14-15kg이 나가던 아이가 2년이 지난 지금 그러니까 4학년이 된 지금은 54kg이 나가고 아빠인 저 보다도 더 크고 건강합니다.
이제는 제가 어디가서 술을 못 마십니다. 술을 먹고 나면 그 애가 저를 업고 오거던요. 사실 지금도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 병원에서 M.R.I 촬영을 해보니 머리 속에 퍼져있던 암세포는 다 없어졌지만 종양은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상을 안고 찍은 상본을 큰 애와 레오가 서로 뽀뽀하려고 다투다가 서로 부딪쳐 레오가 넘어져 입원시켰는데 1,000명에서 하나 있을까 말까한 좋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왜 한 번에 치유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한 번에 치유가 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치유시켜 주심을 오히려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성모 어머니께서 저희 가족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한 번에 치유가 되면 저도 인간이기에 교만해져서 "치유가 다 되었는데 거기는 무엇하러 가느냐"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성모님께서 아시고 우리 가족을 어머니의 사랑의 고리로 연결시켜 험한 이 세상에서 죄악속에 헤매이지 않고 어머니께 의탁하며 살도록 하시려는 지극한 모성애라 생각하며 감사드릴 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부모의 잘못으로 부모가 잘못 살아왔기에 아이는 죄가 없지만 아이를 통해서 부모를 불러주셔서 회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잘못 살아온 과거를 묻지 않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 어머니... 이제는 어머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그러한 자식이 되렵니다. 매월 기도회 때마다 자식의 머리를 감싸고 애절한 기도를 해 주시는 자매님께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진실한 통회의 눈물로 어머니의 피눈물을 닦아 드리고 희생 봉헌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금도 철야 기도의 날만을 기다리는 자식 앞에 부끄러운 아빠일 뿐입니다. 이제 저희 기도 안에서 늘 회개하고 서로 사랑하여 엄마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자식으로서 봉헌된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시고 성모님 찬미 받으소서. 아멘.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역곡1동 243-29호 12/4 경신주택 7호
황규봉(발바라) T.(032)342-8592

 

 

 

필리핀 공화국 국회의원으로 부터 온 편지 

빅토리코 엘 샤베즈

친애하는 율리아 자매님께,
지난 4월 11일 저와 저의 아내 카타리나, 그리고 저의 동료 국회의원들이 자매님을 방문하여 자매님과 함께 기도회를 가질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의 아내와 저는 저희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저희의 경험에 대해 알려주고 있으며 또 자매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자료들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저희 방문시에 말씀드렸듯이 치료가 불가능한 매우 희귀한 병에 걸려있던 호세 마노사씨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 치유 사실은 일주일 전에 그의 제수씨에 의해서 저희에게 확인되었습니다.
이 희귀한 병은 혈액암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올라 호세 마노사씨는 피부과에 다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어 미국까지 가서 진찰한 결과 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온 몸의 피를 다 빼내고 새로운 피로 바꾸어 주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필리핀 그린벨트 성당에서 한국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전달이 있어 그 곳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때 그 불치병을 치유받았다고 했습니다.
지난 달 한국에 갔을 때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저희와 아주 친한 가족의 아이가 자매님께서 필리핀에 오셨을 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마르코로서 루이기 에스텔라의 아들인데 소아마비(?)에 결려 있었습니다. 네 명의 소아 신경과 의사들이 따로 이 아이를 진찰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유명한 의사에 의해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그 의사는 이 아이가 일평생 다시 걷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이기 에스텔라에 의하면, 자매님께서 전에 필리핀에 오셔서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신 바로 다음 날에 마르코가 완전히 정상적으로 두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마르코는 다섯 살이 넘었으며 완전히 정상입니다. 미국에서 전문가들이 마르코를 진찰했는데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매님을 통하여 그 아이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자매님께서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이 소식을 드립니다.
저희 방문 시에 말씀드렸듯이, 저희들은 6월 30일 행사때 다시 자매님을 방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매님과 율리오씨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1997년 5월 21일
빅토리코 엘 샤베즈 드림


 (이 분은 필리핀 하원의 금융기관 위원회의 위원장이시며, 청소년과 체육 위원회의 부위원장, 정부내 부정 퇴치 위원회의 부위원장, 기타 외교 위원회, 국방 위원회 등 여러 위원회의 멤버로 계신다고 합니다.)

 

 

 

필리핀 방문기 

김 라파엘

1992년 나는 김포공항을 떠나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하니 기온은 완전히 여름 삼복 더위로 바뀌어 아열대 지방의 특유한 세상으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마닐라 공항 대합실에는 율리아 자매님을 환영하려는 분들이 나와 있었는데 자매님은 맹인 여섯 명이서 기타를 연주하며 애조섞인 음색으로 노래하며 구걸하는 이들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적선하며 기도로 그들의 굶주린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현지 협력자 분들의 안내를 받으며 '멀씨'의 집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 집에서도 많은 분들이 자매님을 환영해 주었고 '올리케' 신부님께서도 함께 기다리셨다가 강복해 주셨습니다.
이튿날 신언회 소속이신 최종복(아론) 수사님이 달려와 이곳 필리핀 실정을 대강 말씀해 주셨고, 저녁 6시에 '빌라 빌리지' 교회에서 다섯 신부님의 미사 집전으로 성모님의 메시지를 자매님이 전하였습니다. 나로서는 처음 목격하는 대성황이었고 충격적인 행사였습니다. 회개와 치유의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저녁식사를 '트리닝' 자매의 집에서 했는데 그곳에서도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협력자 '리자' 자매의 남편과 다른 분이 다리 관절과 허리통증을 치유받았습니다.
아침 나절에 '테레싱' 자매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립빠'라는 곳에 위치한 봉쇄 수녀원에서 예비수녀로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기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가끔씩 장미꽃잎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때로는 장미꽃 송이가 통째로 형형색색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여긴 '테레싱' 수녀님은 이 사실을 원장 수녀님에게 보고했고 원장 수녀님은 본당 신부님에게 보고하니 신부님은 자연히 교구장이신 주교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주교님은 황당무계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셨음인지 원장 수녀님을 섬으로 25년간 보내 버렸고, 신부님 또한 그와 비슷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테레싱' 수녀님도 그곳에서 쫓겨났는데 지금까지도 꽃잎을 내려 주셨습니다.
몇 십년이 지나서도 이 일이 계속되자 주교님께서 직접 그곳을 방문하여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주교님이 도착하자 꽃잎이 내려왔는데 그 꽃잎에는 예수님 모습과 성모님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수녀원에는 성모님이 직접 발현하시기도 했다고 하는데 '테레싱' 자매는 그동안 수녀원에서 쫓겨 나와 양녀를 하나 데리고 사는데 율리아 자매를 방문하여 성모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낮에는 무더위 속에서도 멀씨의 집에서 방문객들을 만나기도 하시고 저녁 나절에는 공식적인 행사에 임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은 '그린벨트' 성당에서 미사후 성모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날도 여러분의 신부님과 현지 협력자들의 도움을 얻어 치유의 기도로 끝을 냈는데 어찌나 많은 분들이 자매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아우성이었으므로 여간 큰 곤욕이 아니었습니다.
성당마다 성모님상 모실 자리를 따로 마련하여 모셨고 또는 제대에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육군본부 성당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성모님을 모시고 '제리' 신부님 집전으로 미사와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 그린벨트' 성당의 행사가 끝나고 ' 디플로마'씨의 초청으로 교포가 경영하는 한국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고려정에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신부님 두 분과 자매님을 비롯하여 30여명이 모처럼 고국의 음식맛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건축업자인 '호세 마노사'씨가 멀씨의 집으로 자매님을 찾아 왔습니다. 자매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59세의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하고 낙천적인 스페인계 실업인이었습니다.
지난 2월달에 자매님이 마닐라를 방문하여 메시지를 전달할 때 믿음이 없었지만 참석하여 5시간을 기다려 만났다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희귀한 불치병에 걸려 있었는데 그의 살갗은 피부병으로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마닐라 시내의 유명한 병원은 다 뒤져 찾아 보았으나 병명마저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피부는 자꾸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미국 뉴욕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는데 진찰 결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사는 유태인에게만 걸리는 피에 독이 있는 병인데 치료가 불가능하며 1년 이상 살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온 몸의 피를 바꿔 주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는 병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누이의 권유로 자매님의 메시지 전달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성당 안은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는 뒷쪽 한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포기한 삶이라 힘 없이 자매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매님의 말씀중에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라는 성모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 놀랐는데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합니다. 메시지 전달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피부병의 일부가 없어지고 가렵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고 24시간이 다 되기 전에 그의 피부는 깨끗하고 말짱해졌습니다. 그래서 병원마다 다녔는데 병원에서는 너무 놀라 그럴 수가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다고 했다 합니다. 뉴욕병원으로 쫓아가 확인해 보았는데 병원분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건 기적이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5월 15일 오전 10시 30분 메시지 전달차 '씨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리 일행은 시내를 나섰습니다. 마닐라 시내 중심가에는 평화의 거리가 있고, 그곳에는 거대한 성모님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마르코스 치하의 선거 부정을 항의하는 대규모 시민 저항이 있자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하려 했습니다.
필리핀의 정신적 지도자이신 신추기경님이 하신 방송을 통해 모든 시민은 물론 뜻있는 필리핀 국민들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 때 수녀님들이 탱크 앞에서 가로막고 묵주의 기도를 드릴 때 탱크부대는 물러가고 부정에 항거하는 시위는 평화로이 이루어졌고 마르코스의 계엄군은 총부리를 돌려 시민들의 편이 되었습니다. 이때 성모님이 평화의 거리에 발현하여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모님 상을 세운 것입니다.
'씨부'시는 마닐라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제리 신부님과 아나운서 쥰 키틀러가 우리 일행과 동행하였습니다. 숙소는 중국계인 피터(양주기)씨 집이었고, 밤 7시 30분에 "예수 성심" 성당에서 미사와 메시지 전달행사가 계획되어 있었으므로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밤낮없이 활동해야 했으므로 신심이 피로했는데 거기에 더위까지 겹쳐서 어려움은 더해졌습니다. 자매님은 가끔 고통 중에 있었기에 우리와는 달리 더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휴식하는 동안 오제리 신부님은 한국에서 4년간 계셨기 때문에 우리말도 곧잘하시며 여간 유머스럽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J에게'라는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며 눈을 지긋이 감고 애창할 때면 매력 만점이었습니다.  신부님이 'J에게'를 좋아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첫자가 J이고 율리아 자매님의 첫자가 J이며 자기의 이름인 제리의 첫자가 J이기 때문에 유난히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성심' 성당은 참으로 거대하고 웅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는데 정성스럽게도 한국 나주에서 모셔온 성모님상을 제대로 모셔 놓으니 한결 돋보이기도 했습니다. 숨막힐 듯 경건하고 장엄한 미사는 형제 자매님들 모두가 주님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피터씨의 집에서 1박한 우리 일행은 세 번째의 도시인 '일로일로'의 '하로'에 있는 '피아몬테' 추기경님의 관저에서 아침식사를 하였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시고 '하란 도니' 여사의 집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여사의 배려로 점심식사는 해변의 '타토이 프레스 (해변에 갈대 비슷한 재료와 대나무로 지어진 집)'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도중 자매님이 실수로 숟가락을 떨어뜨리자 오제리신부님이 필리핀에서는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남자 손님이 온다고 농담 비슷하게 하였습니다. 5분쯤 지났을까? 일행을 아는 남자 한 분이 갑자기 나타나 식사를 함께 하게 되어 우리 일행은 모두 놀라워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 '하로 대성전'에서 미사와 메시지 전달이 있었는데 이곳은 신추기경님이 전에 계시던 곳인데 성전에 모셔 놓은 조그마한 성모님상이 키가 자라나 성전벽을 헐어 수리하여 모셔 놓으면 또 자라고 하여 지금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게 되셨습니다. 행사시간이 임박해 오자 신부님들과 주최하신 분들의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날 이 시간은 모대통령 후보를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계획되어 있었고, 또 다른 후보의 지지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으며, 데모가 있을 예정이니 기도를 많이 하자고 하여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하였는데 아무일 없이 피정이 시작되어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를 받았는데 특히 우리가 머물렀던 집은 기쁨과 사랑과 평화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4시에 그 집 모친의 심장병이 치유되었으며, 부친은 기쁨을 얻게 되고 딸인 '하란 도니'는 어깨와 허리를 치유받았습니다.
또 다시 우리는 '일로일로'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였습니다. 70여명의 수녀님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율리아, 웰컴' 하며 프랑카드를 걸어 환영하였습니다. 자매님은 바쁜 일정 중에서도 기도와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수녀님들은 자매님과 헤어짐이 너무 섭섭했던지 비행장까지 달려와 주었습니다.
5월 18일은 우리 일행이 신추기경님을 뵙는 날이었습니다. 신추기경님은 아침 7시에 비행기로 출타하시면 24일에나 오신다고 일찍 만나기를 원하셨기에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하여 추기경님을 뵈러 관저를 방문하였으나 약속시간에서 30분정도 늦어졌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은 우리 일행을 기다리시며 강복하여 주셨고 자매님은 추기경님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침식사를 추기경님 관저에서 함께 하기로 되었는데 우리가 늦어서 추기경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장군들과 함께 그냥 가셔야 되었습니다. 이 미안함은 말할 수 없었지만 추기경님은 그냥 웃고 계셨습니다. 정말 자비로우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추기경님과 함께 일하시는 '도시 살바돌'씨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두시간 소요되는 '롤롬보이 성지'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찾아 뵙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어느날부터 목이 없는 사람이 나타나 사람들이 혼비백산 하여 도망쳤고, 개들까지도 자지러지도록 짖어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식모들이 무서워 견디지를 못하고 도망갔다고 하는데 그 때 마침 오기선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 동상을 세우려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그런 일이 있어 그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 하여 그것을 안 '모데스타멘도사' 할머니의 부지 기증으로 이곳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동상이 만들어져 오던날 이후부터 김신부님의 영혼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인이 머물러 공부하였던 이 자리를 성지로 정하고 그분의 거룩한 삶과 그분의 순교정신을 기리고자 오기선(요셉) 신부의 지도하에 마닐라 한인 천주교회 신자들과 고국의 신자들이 뜻을 모아 김수환 추기경과 마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 임석하에 1986년 5월 22일 그 동상을 세웠는데 성인을 이곳 관할 롤롬보이 성당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박 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크게 믿고 있습니다. 천주께서는 제가 끝까지 이 모든 혹독한 형벌을 감수하도록 도우시기를 바라나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는 성인이 참수당하기 약 한 달전 신자들에게 보낸 고별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성인 동상 건립을 하는데 율리아 자매님도 함께 동참하였다 합니다.
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동상이 있는 성지의 순례를 마치고 잠깐의 시간적 여유를 얻어 '팍삭한 폭포'를 관광하였습니다.
자매님은 카누를 타고 가는 동안 마리아의 구원방주를 묵상하며 방주를 타려는 불쌍한 영혼들이 이 어려운 뱃길을 끝까지 타고 가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희생될까 생각하며 성모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구원 방주에 태우고 가시면서 이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으신다는 것을 알기에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통곡하여 울었다 하였습니다.
멀씨의 코코낫 농장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와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성당 정면에는 대형 프랑카드가  자매님의 방문을 환영한다며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한 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가난하고 초라한 농촌 본당이었습니다. 자매님은 더욱 정성을 다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저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필리핀 가톨릭의 대본산이며 시초인 성 어거스틴 대성전은 어마어마하고 웅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12시쯤 도착했을 때는 대성전 옆 소성당에서 몬시뇰의 집전으로 미사가 막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사방벽에 걸려있는 선풍기는 소리내어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무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려 온 몸을 땀으로 적시게 했습니다.
이 때 자매님은 낙태 보속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배는 갑자기 남산만큼 되었으며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협력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으나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아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사람들은 자매님을 보기 위하여 버스 주위에 떼지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몬시뇰께 연락하여 와서 강복해 주시라 부탁했습니다. 몬시뇰은 자매님인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뛰어 오셨습니다.
강복이 끝나고 몬시뇰께서 기도해 주시고 나서 율리아 자매님은 고통이 없어지고 편안해 하였습니다. 노안의 그 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 했습니다.
멀씨의 집에서 '마리아 성당'의 메시지 전달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모님상을 모시고 자동차로 일행이 막 출발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모님상의 온 몸에서 향유가 흘러내리지 않겠습니까? 기쁨의 향유로 성모님께서 이 행사를 축복해 주심일 것입니다. 성당 제대 옆에 마련한 장소에 이 성모님상을 모시고 수많은 교형 자매가 지켜보는 가운데 감동적인 미사와 자매님의 열띤 메시지 전달과 치유의 기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튿날 전주교구 김환철(스테파노) 신부님이 사목하고 계신 한인교회에서 자매님은 메시지 말씀을 전하고 오전 11시에 서둘러 아퀴노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냥궁으로 향했습니다. 자매님이 대통령을 뵈려고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대통령에게 기념으로 드린 성모님상에서 장미향기가 풍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매님과 대통령의 만남을 축복하시는 듯 장미향기를 주신 것입니다. 자매님이 대통령을 뵙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지금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매주 수요일에만 국무회의 장소로 이용하는 말라카냥궁을 이날 (매주 수요일)은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지 않으나 특별히 우리에게는 개방하여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천 이백 오십켤레의 이멜다 신발 등 당시 호화와 사치의 극치를 한 눈에 볼 수 있었고 마르코스 정권의 부정부패 현장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인간이 저지른 죄값을 주여 용서하소서.
아래층 작은 성당에서 대통령궁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가족을 위하여 자매님께서 메시지 전달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가족의 수를 거느린 대통령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필리핀에서의 일정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라더니 '산토 도밍고' 성당은 5천여명 이상의 교우들이 모여 자매님의 메시지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여섯 분의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엄숙한 분위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환자석을 따로 마련하여 그많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철저한 준비에 감탄하였습니다. 자매님의 메시지 전달과 스텔라 자매님의 통역은 최상이었습니다.
장내는 울음 바다가 되었고 영혼을 울리는 기도가 사방을 메아리 쳤습니다. 육신과 영혼이 병들어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과 성모님은 함께 하신 것입니다. 밤늦게까지 기도는 계속되었으므로 잠을 자는둥 마는둥 4시에 일어나서 두시간 거리인 장미꽃잎을 주신다는 '립빠'의 갈멜 봉쇄 수녀원을 방문하였습니다.
'립빠'를 다녀오니 멀씨집에서 수많은 환자들과 올리케 신부님과 봉사자들이 모여 미사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미사 끝에 치유기도가 시작됐는데 눈물바다가 되었고 병원에서 엠브란스를 타고 차에서 기다리는 사람, 휠체어를 탄 사람, 들것에 들려온 사람 등 여러 환자들을 기도하고 나서 점심 때가 되어 부랴부랴 점심을 먹고 이스라엘로 떠나는 3시 3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짐도 거의 챙기지 못한채 바쁘게 행동해야만 하는 자매님의 일정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김 라파엘

 

 

 

한국은 선택받은 나라입니다. 

프란치스꼬 사베즈

한국은 선택받은 나라입니다. 나주는 축복받은 곳입니다. 천국으로부터 비추어지는 믿음과 희망의 빛줄기가 나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주는 믿는 이들 뿐 아니라 의심하는 이들의 삶조차도 변화시켜주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나주를 찾아 왔습니다. 지금 제 나이 46세에 이르기까지 저는 나름대로 많은 일을 했고 직업상 성공도 했으며 세상의 인정도 받고 상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저 나름대로의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직분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축복을 떠나서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나주에 와 있는 몇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 실존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의 오류에 가득찬 영혼을 사랑으로 꼬집어 주셨으며 저의 방황하는 마음을 껴안아 주셨고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저를 움직여 주셨습니다.
성모님 집에 와서 제가 경험한 것은 저의 영혼이 씻겨지는 기적이었으며 영혼이 새롭게 되고 신앙과 애덕, 인내심과 항구심, 그리고 겸손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나주는 참으로 신앙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1993년 5월 13일
프란치스꼬 사베즈(변호사, 전 필리핀 검찰총장)
121캄공, 마닐라 알라공 빌리지
문틴루파 마닐라시 필리핀

 

 

 

한국이라는 것을 한 번도 자랑스럽게 생각 해 본 일이 없었는데
한국 나주 성모님께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했는지.... 

전명옥 세라피나

지난달 5월 6일부터 16일까지 스페인에 있는 대데레사 성지 토레토, 프랑스 성모님의 발현지 루르드, 벨기에의 성모님 발현지 바늬를 방문하고 무엇엔가 좇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태리 란치아노에서 몇 년 전 필리핀의 오제리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본대로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며 "성모님,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 드리면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워싱톤에 있는 성 김 안드레아 성당에 다닙니다.
5년전 1990년에 필라델피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듀케인 대학에서 세계의 성모님 발현에 관계되시는 분을 모시고 성모 신심 대회를 한다기에 항상 성모님 공경이 부족하다는 마음에 용기를 내어 2박 3일 피정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강당에는 미국 전역에서 가톨릭 신자 칠천여명이 모였고 성직자만도 몇 백명이 참석하는 큰 대회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분은 성모 신심을 부정하라고 핍박 받은 체험담을 이야기한 러시아 사람 죠셉이라는 분 (지금은 카나다로 망명하신 분)과 유고슬라비아 메주고리에 성모님 발현을 보는 임신한 몸으로 참석한 이방카 자매의 모습 등등 성모신심과 관계되시는 분들이 많이 참석하셨는데 주제 강사이신 대한민국 나주 성모님을 보시는 윤 율리아 자매님이 한복을 곱게 입고 나오셔서 한국말로 묵주신공을 시작으로 성모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20여년 미국 생활에 항상 영어의 불편함으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한국인임을 자랑하며 한국말로 강당이 떠나가라고 묵주신공을 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선창은 한국말로, 후창은 영어로, 언어는 달라도 주님을 향하는 일치하는 마음으로 묵주신공을 드리는 그 아름다운 모습들이 한국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다만 이날 천대 받던 한국인들이 키스 세례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이 대회에 소수의 한국 사람이 참가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저는 그동안 한국인이라는 것을 한 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때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했는지... 강단 앞에 대형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사진이 전시되었고 율리아 자매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그 많은 미국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된 미국인들의 삶에 방향의 전환기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왜 성모님은 피눈물까지 흘려가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실까? 이 대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고 저 또한 형식적으로 살아온 믿음 생활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7000여명이 넘는, 주교님이하 신부님, 수녀님, 신자 모두가 일어나서 기립박수가 10번 이상이나 되었는데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대회 중에 특기할 일은 하늘에서 해의 움직임에 변화 (태양의 기적)가 있었고 T.V방송국과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으며 뉴욕타임즈에도 보도 되었고 워싱톤에 있는 백악관 보좌관들이 율리아 자매님의 메시지 전달을 듣기 위해 자매님을 초대하였습니다. 자매님이 묵을 호텔을 주최 측에서 준비하였지만 음식 준비 관계로 한국집을 찾을 때 제가 저희 집으로 모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나주 성모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또 율리아 자매님을 조금이라도 먼저 알았다면 저희 집으로 모시는 그런 일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한국 사람 시골 친구 내외분을 모시는 그런 마음으로 저희 집에 모셨는데... 무식이 용감을 낳는다는 말이 있지요? 이 분이 저희 집에 계신 것을 알게 된 신자들은 저희 집을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그 때 저는 신자들이 왜 오는 줄도 몰랐던 그런 신자였습니다. 저희 집에 계시던 보름간을 저의 말과 글 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매일 매일 율리아 자매님은 많은 사람들의 근심 걱정을 기쁨으로 돌려 놓고 병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위하여는 함께 기도함으로 치유되는 것을 보고 '지금 나는 굉장한 일을 체험하고 있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볼티모어에 있는 성당에서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한국 신부님이 오셔서 한국인 본당을 만들자 해서 흑인이 많은 동네 (말하자면 빈민촌)에 가게 되었는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느니, 흑인들하고 같이 미사를 해야 하느냐, 본당으로 하기 싫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던 차에 율리아 자매님이 그 성당에 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날 율리아 자매님은 피정에서 메시지 전달을 세 시간동안 하셨고 또 신부님이랑 수녀님 그외 여러 분들과 한 시간 가량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함께 하신 신부님께서 "내가 이렇게 4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라고 하셨어요. 사실 신부님은 미사만 겨우 겨우 하실 정도로 허리가 많이 아팠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치유가 되었고 그 성당이 지금은 미국 동부에서도 아주 이름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또 이때 저의 남편 고등학교 친구분에게 S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에 병으로 휴학하고 있었어요. S는 그분 삶의 전부인 하나밖에 없는 자랑스런 아들인데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가슴아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치유되신 분을 보고 S가 생각이 나서 그 친구분에게 와서 기도 받아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응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저녁 우리집 마루에는 신발이 80켤레가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그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오라고 했는데 저는 이 때에 S가 너무 기대를 갖고 왔다가 치유가 되지 않을 경우도 우려가 되고 제 믿음의 전부가 이 정도로밖에 안되었을 때이므로 더 강경히 이야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S는 머리 윗부분 두개골의 뼈를 갉아 먹는 세균이 번식하고 있어 몇 번의 수술로 세균을 제거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뼈가 얇아져서 더이상의 수술도 가능하지 않은 그런 상황속에서 S는 잠을 잘 수도 없는 너무나 심한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워싱톤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워터드리라는 육군 병원이 있고 N.I.H라는 세계 첨단 의학 연구센터가 있는데도 두 곳 모두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렇지만 남편 친구분의 저희 집 방문은 아무도 모르게 단둘만이 기도 받게 해 준다면 한 번 해 보겠다는 조건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집에 모시고 있는 파티마 성모상앞 에서 율리아 자매님은 주님이 살아 계심을 전하며 "너의 병이 낫게 되면 가톨릭 신자가 되겠니?" 하고 물으니 대학에 가면 다니겠다는 약속 후 주모경을 따라서 하게 하고 성모송을 한 뒤 율리아 자매님이 손을 머리에 올려 놓으려는 순간 S는 뒤로 내빼면서 "왜 눌러요?"라고 하였습니다. 미처 손을 머리에 얹기도 전에 그저 머리 위에 손을 대려는 순간인 것을 S의 아버지도 보고 있었으므로 율리아 자매님은 "내가 머리 위에 손을 얹었어요?"하고 S의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니, S는 불안한 눈으로 기도를 받고 집으로 갔습니다. S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께 미국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는 전부 찾아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지만 자기의 아픈 부위를 정확하게 누르는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날밤 S의 아버지가 기쁨에 찬 전화 목소리로 "지금도 자요.", "지금도 자고 있어요."하고 여러번의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날밤 S는 15시간 넘게 긴 잠을 잘 수 있었고 잠에서 깨어나서는 "또 기도 받으러 가도 돼요?" 하고 말하더랍니다. S는 그동안 머리 고통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기에 그의 아버지는 기뻐서 자주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율리아 자매님이 귀국할 날짜가 3일 밖에 안 남았고 기도 받기를 원하는 분이 너무 많아 개별적 만남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했더니 괜찮다면서 집단 속에서 두 번 더 기도를 받고는 완전히 치유가 되어 대학 3학년에 재학중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매님을 통하여 성모님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여 워싱톤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려 공고없이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외국 신자들은 워싱톤 교구로 전화를 걸어 워싱톤 한인 성당이 어디 있느냐?고 문의가 쇄도하여 외국 신부님과 신자들이 참석하였는데 갑자기 하는 모임이라 통역없이 5시간을 강연 하였는데도 끝까지 참석하였으며 "성모님이 함께 하셨기에 통역 없이도 기뻤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국 자매 한 사람은 성당에서 율리아 자매님을 모시고 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우리 시어머니를 모시고 와야 되는데, 우리 시어머니를 모시고 와야 되는데" 하고 자꾸 얘기를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 그 자매는 5형제중의 한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에게 제일 미움을 받고 있었고, 그 시어머니는 허리가 많이 아프다는 것도 알기는 했지만 저는 조금 의아해 하였어요. 계속 고민을 하더니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한국에서 율리아라는 분이 피정하러 오셨는데요." "누구냐?" "나주에서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상을 모시고 계신 분이래요." 다행히 시어머니가 오셨는데 그 날 치유를 받으시고 그 다음부터는 "나는 다른 사람 말은 안 듣고 이 며느리 말만 들어"하시며 그 며느리를 가장 사랑하시게 되었고 아주 화목한 가정이 되었답니다. 이 때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율리아 자매님은 본당 신부님께 인사드린다고 20분 전에 성당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가셨었습니다. 5분 후에 또 가시고 몇 분 안되어 또 가시고 해서 어디 병이 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서 제가 쳐다보았더니 "응, 오늘 신장 나쁜 사람이 많이 낫겠어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인간 생체학상으로 20분 사이에 4번 그것도 많이 소변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 피정 후 누가 신장이 나았다는 사람이 없기에 잊고 있었는데 1년 후 어느 날 주일 미사후 (워싱톤 성당은 매주 친교실에서 점심을 먹으며 친교를 나누는데) 많은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Mrs. 윤이라는 분이 "미세스 전, 나 할말 있어요. 율리아 자매님에게서 나 신장치유 받았어요. 오랫동안 신장에 염증이 있어 피소변을 보고 살았는데 지금은 완치되어 감사미사 드렸어요." "왜 이제 말하느냐."고 물었더니 긴가민가 했었다나, "아무리 그래도 일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 할 게 뭐람"하고 제가 투덜대는 것을 듣고 있던 Mrs. 김이라는 사람의 말이 "나도 그 때 치유되었어요. 난 20년간 이 병으로 고생을 했는데 낫기 위해 서울까지 가서 치료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 고생하고 있었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단체로 기도하는 순간 온 몸이 화끈해지며 두드러기 같은 것이 생기더니 며칠 후 없어지며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4명은 깨끗이 치유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와 연결이 안되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천주님 감사합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한국으로 귀국하실 때 주최측에서 비행장에 배웅 나왔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이번에 너무 많이 수고해 주었어요. 쥬리아 때문에 엄청난 효과가 있었는데 그 대회를 마치고 나자 사제가 된다는 사람이 50여명 이상이 되었으며 율리아 자매님의 피정을 듣고 난 대통령 직속 보좌관이 말하기를 메시지 책이 번역되어 나오는 대로 백악관 도서실에 많이 비치해 두고 많은 사람이 읽도록 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태양의 기적이 쥬리아가 오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일어났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쥬리아가 오신지 1달이 되었는데 영적 육적으로 치유 받아 감사하다는 전화가 매일 하루에도 50통 이상이 왔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이 백악관에서 대통령 직속 보좌관 비서관들을 대상으로 피정을 하고 한국으로 떠나신 뒤에 부시 대통령이 '낙태 반대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 후 2년 뒤인 1992년에 저는 갑자기 율리아 자매님을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비행기 표를 사면 배가 더 비싼 것을 아는 저는 안가겠다고 하니 남편이 다녀오라고 하기에 남보다 몇 배 비싼 경비를 들여 이스라엘에서 율리아 자매님을 또 뵙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에서 2000여년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던 그 길을 그대로 우리들은 십자가를 같이 지며 14처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혼자는 들 수도 없이 무거운 십자가) 제 3처에서 혼자는 걷기도 힘들게 고통 중이던 율리아 자매님이 혼자 지겠다고 하시며 십자가를 혼자 지고 가시는데 십자가는 무겁고 날씨는 사막기후라 너무나 더웠기 때문에 땀을 비오듯 흘리셔서 제6처 (성녀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린 곳)에서 제 옆에 있던 필리핀 여인의 손에서 흰 손수건을 빌려서 율리아 자매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분명 이마에서는 땀인데 수건에 묻은 것은 선명한 빨간 피였고 그 일대는 짙은 장미 향기로 가득 차서 순례객 뿐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과 상인들까지 모두 주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좁은 골고다 언덕은 길 양쪽 모두 순례객 상대로 상점이 열려 있었고 이스라엘인이 아닌 아랍계 사람들이 상권을 장악하였는데 이들 상인들이 한국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아-아줌마 싸-게 줄께, 떨이해 줄께 빨리와, 가방 반 값에 줄께"하며 호객 행위를 하였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팔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을까?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 영원 세세히 찬미 영광 받으소서. 이스라엘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경비 절약을 위해 긴 비행기 여행 후였는데도 호텔에 가서 쉬지도, 간단한 복장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상태에서 파리 시내 관광을 하느라 지친 몸이 중심을 잘못 잡아 버스에서 내릴 때 저는 나뒹굴어졌습니다. 제 발등이 그 자리에서 주먹크기 만큼 금방 부어오르는 것은 뼈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일어 설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호텔 방에 들어갔을 때 저는 여행을 중단해야 하는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나 혼자서는 한 발 짝도 걸을 수 없었고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 어떻게 여행을 계속 하겠는가 하고, 그런데 이날밤 율리아 자매님이 "우리 함께 기도해요." 하면서 묵주신공과 함께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사진을 들고 기도를 해 주셨는데 짙은 장미향기를 맡게 되면서 그 순간 부었던 것이 고무풍선 바람 빠지듯 없어지면서 일어설 수 있었고 걸을 수도 있어 그날 밤에 치유가 되어 여행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란치아노성당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가톨릭 역사상 성체 기적 제1호라 불리는 성체를 모셔놓은 성당인데 정말로 작은 시골 교회에서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1300년전에 일어났던 성체의 기적은 지금 방금 우리 몸에서 떼어낸 살과 피의 성분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 현대 과학으로 판명되었으며 또 세계 각지에서 모여 조사한 과학자들이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것이지요. 1300년전 어느 한 신부님이 미사 도중에 성체는 살 심장으로, 포도주는 피로 변한 것을 모셔 놓은 성당으로, 문명시설이 없던 그때 일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 성체 대축일에는 빨간색의 피로 변한다는 그 성당에서 미사 드렸을 때 성체를 모신 율리아씨의 입에서 그 성체가 정말로 피와 살이 되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처음 찍고 나서 보니 피가 더 많아졌습니다. 또 찍었지요. 찍고 나서 또 보니 가운데 성체조각이 두꺼워져서 또 찍고 조금 있으니 성체가 살색으로 변해서 또 찍고 4번을 계속 찍었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날 저는 미사때 모시는 성체의 변화를 보았고 또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서 성체의 신비를 보여 주셨을까? 그리고 그분은 왜 보기에도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되실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신부님들이 드리는 미사 중에 축성된 성체가 실제로 당신의 살과 피임이 마지막 만찬 때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지금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그 사진들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오제리 신부님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과 전화 한 통화로, 그리고 비싼 여행을 안 가겠다고 투정하던 저를 보내준 제 남편에게 고맙고 존경을 보내게 되며 이런 체험을 함께 와서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욕심이 생기더군요.
지난달 성모님 성지를 순례하면서, 루르드의 기적수를 마시면서, 어린 벨라뎃다의 무염시태라는 단 한마디에 신부님과 주교님이 인정하고 교황청에 보고하여 성모님 메시지를 그대로 실천하여 구름처럼 많은 순례객들이 순례하며 참회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벨기에 바늬의 성모님 성지는 아직 교황청의 인준은 없지만 8번의 발현 뿐인데도 훌륭한 성당을 지어 많은 순례객들이 미사 봉헌할 수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한국을 특별히 사랑하사 103위 성인을 모시게 했고 성모님은 10년이나 계속 메시지를 주시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무엇을 했나 반성하게 됩니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그것을 그때 그때 심사숙고하고 많은 조사가 따르는 고충이 있겠지만, 이 나주 성모님의 일이 진정 주님의 뜻이라면 거짓으로 꾸민 일이라고 반대한다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기적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던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제가 본 것과 제게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제가 기적에 의존하지 않으며 진심에서 우러나는,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믿음의 생활인으로 저를 이끌어 주시라고 기도 드리면서 제가 체험했던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1995년 6월
전명옥 세라피나 T.301-229-8189

 

 

 

한 많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이을분(막달레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죄인은 죄인이라 생각 못하고 어쩌다 세상을 잘못 만났다고 원망하면서 병들고 찌들리고 연약한 한 많은 자신의 목숨을 끊을려고 약을 먹고 동맥도 끊어보고 연탄도 피워보고 여러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하여 죽지 못한 저는 굴러다니며 어둠 속에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저를 하느님은 너무 불쌍히 여기시어 빛을 비추시어 성모 어머니를 통해 저를 살려 내셨기에 부끄러운 저를 들추어 어둠에 사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써 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올케의 심한 학대를 받으며 살게 되었는데 저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고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눈을 떠 보니 집이었습니다. 조부님이 올케의 말만 듣고 동생과 저를 대통 (담배대)으로 자꾸 때리는 모습을 보시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산소만 늘상 바라보시며 우시던 모습을 보고 나 하나 없어지면 가정에 불화가 생기지 않겠구나 생각이 들어 집을 뛰쳐나온 10대 소녀였습니다. 저는 여기 저기를 전전 하던 중에 남자를 만나 살게 되었고 딸 아이까지 낳게 되었죠. 그때 올케의 학대에 못이겨 찾아온 여동생과 단칸방에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남편은 동생과 가까와졌으므로 너무 심각한 사이가 되더니 결국 저에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내쫓고 말았습니다. 저는 딸을 놓아두고 집을 나오면서 그래도 조카니까 남보다 잘 키워주겠지 하면서도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방황하며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던 중 3년후에 또 결혼하게 되었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의처증 환자였습니다. 그동안 아이도 하나 낳게 되었는데 남편은 중학생 정도의 남학생하고 스치는 것만 보아도, 주인집 아저씨에게 인사만 하여도, 아이를 업고 시장에 다녀와도 두들겨 패며 옷을 다 벗겨 검사하고 결국은 집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행위가 계속되니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아이와 함께 죽을려고 연탄을 피웠는데도 지나가는 장사꾼이 물을 얻어 먹을려고 왔다가 살려 주었습니다. 이웃 아줌마들이 차마 보지 못해 맞아 죽기전에 살려 내자고 자기들 옷을 입혀서 차비를 마련해 주며 도망가라고 했을 때 아이 때문에 절대로 갈 수 없다고 하니 당신이 죽고나면 아이가 무슨 소용이냐며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막상 집을 나가보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 집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며 알아보니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제 이름을 목메이게 부르며 눈을 감지도 못하고 운명하셨다 하니 제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가정부로 취직은 했지만 그것도 허사였고 발길 닿는 곳은 소개소였으며 소개된 것은 술집이었습니다. 술도 먹지 못했던 저는 아이를 잘 키워 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지만 빚만 계속 늘고 살길이 막막하여 아이는 아버지에게 주고 또다시 죽음을 결심하고 동맥을 끊었지만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후 어느 분의 소개로 또 결혼하게 되었는데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시누이의 시집살이가 날로 심하여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괴롭혔고 남편을 충동질하여 돈 한푼 주지 못하게하여 아무리 아파도 약 한 번 사먹을 수가 없었고 또 저를 내쫓을려고 했지만, 그전에 두고온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또다시 이 두남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없어 죽는 한이 있어도 참으며 살아보려고 결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였으나 남편의 냉담한 박해가 심하여 십자가와 성모 성심과 예수 성심 상본도 던져 버리고 성서책도 찢어버리는 행패로 인하여 우리 가정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7개월동안 자리에 눕게 되었고 보상금 천만원을 탔는데  그 돈중 조금이라도 헌금 하자고 하니 피흘린 돈이어서 절대로 안된다고 하며 친구에게는 칠백 오십만원을 빌려주고 나머지로 월부기계 사서 일하던중 15일만에 불이 났습니다. 기계는 엉망이 되어 버렸고 친구에게 빌려준 돈도 받지 못하고 다리가 나은지 3개월 후에 또 다시 교통사고로 가슴과 머리가 박살이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가해차량은 봉고차였는데 비가 많이 와서 현장보존이 되지 않아 죽인 증거가 없기에 무효라고 단정내려져 약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저는 평생 살아오면서 속옷을 제외하고는 옷 한 벌도 제대로 사입어 보지 못하고 아이들에게도 사 입히지 못하였는데 어미로서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기워져 하늘을 바라보며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마음을 달래보려고 성령 세미나, 철야기도회, 예수님 계신 곳이라면 피정비 내기 위해 밥을 굶어가며 다녀봐도 텅빈 제 가슴은 채워질 길이 없었습니다. 남모르는 아픔을 달랠 길 없던 중 하느님은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기에 차비가 없어 엄두도 내지 못하던 나주에도 그냥 오게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는데 세 번째 왔을 때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우리는 주님을 매순간마다 얼마나 배반 했습니까?"하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이 저의 뇌리를 쳤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 용서하소서. 엄마 용서해 주셔요." 끝없는 눈물과 콧물은 걷잡을 길 없이 쏟아져 내렸고 저의 가슴은 두 방망이질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까지 죄인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고 팔자가 기구했을 뿐이라고 여겼으며 세상에서 잘나고 착하고 열심하고 기도 잘하고 교만도 이기심도 시기 질투도 없고 남을 이해하고 남을 위해 봉사한다고 마음 속으로 으시대며 살아왔던 제 과거를 되돌아 볼 때 사뭇 가증스러웠습니다. 나주 성시간에서도 "회개하여 죄인으로서 주님을 만납시다." 하던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에 저 자신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고 성모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죽고싶은 심정이 되기까지도 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과 성모님의 마음을 그렇게도 많이 아프게 했으며 가장 추한 일을 10대 소녀때부터 살길 찾아 전전하며 낙태뿐 아니라 닥치는대로 모든 죄악까지도 서슴없이 저질렀는데도 이 모든 것이 환경 때문이라는 편리한 생각으로 한 번도 죄인이라고 생각지도 못했고 어리석고 부족한 저를 성모님은 죄인으로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중죄인이 되어 "엄마 이 막달레나를 데려가 주셔요. 이제까지의 추한 때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이제 아빠 엄마만이 내 안에서 살아 계셔야 합니다." 하며 몸부림치며 한 없이 울었습니다. 숨막히는 절규로 엄마를 부르짖으며 찢어질 듯한 아픈 가슴을 억제할 길이 없었는데 그때 "지금 내적 치유를 받고 계십니다."하는 율리아 자매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니 그때 병들고 찌들리고 연약한 제 가슴은 희열로 차오르고 부풀어 올라 편안해지며 하늘을 날듯한 기쁨으로 충만되었습니다. 저는 한 없이 울며 "엄마 감사합니다. 보잘것 없고 부족한 이 죄인 용서해 주시고 또한 사랑으로 치유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며 한 생을 뒤돌아 볼 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제가 받은 성모님의 사랑에 놀랍기만 하여 부끄러운 자신을 들춰 고통받는 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자 합니다. 세례받을 때에도 대모님이 떼끌라라는 본명을 지어 주셨는데 어떤 음성이 "너는 막달레나다." 하여 본명이 막달레나로 바뀌었는데 "그렇습니다. 창녀 막달레나. 죄많은 막달레나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겠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막달레나를 사람들이 돌멩이로 쳐 죽이려고 까지 했던 것처럼 저도 철저하게 무시당하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입에 담을 수 조차도 없는 말로 저를 압박하였고 누명을 씌우고 조소와 질시의 눈초리 등 회오리 바람같은 고통들이 저를 짓눌러 영혼 육신이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아들도 거리를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로 들어갔지만 제 아들도 나주 성모님을 찾는 순간 그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어 이제 우리 모자가 함께 모두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화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내가 죽을 죄인임을 고백할 때 심한 육신의 모든 병도 다 치유해 주시어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 말씀대로 "진노의 잔 대신에 축복의 잔을 내려 주시고 저녁에 울어도 아침이면 기쁘리라"은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저를 살려주신 분을 위하여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제 아들과 딸도 봉헌하며 남은 여생을 성모님의 메시지 따라 성모 성심 안에서 생활이 기도화 되어 병든 모든 이들과 함께 마리아의 구원 방주에 타고 천국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아멘! 알렐루야!

 

인천시 남구 주안3동 726-10호 23/4
이을분(막달레나) T.868-3171

 

 

 

항상 내가 편리한대로 살아왔음을 회개했을 때
암 덩어리가 없어졌어요 

안 루비나

안 루비나입니다.
저는 나주에 네 번째 왔는데 세 번째 올 때까지도 나주에만 오면 하혈을 했습니다. 남들은 치유를 받는데 저는 오히려 하혈을 하기에 이상했지만 계속해서 다녔지요. 암덩어리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올 때에는 남편하고 같이 왔었는데 옷 전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갈아입을 옷은 없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다행히 치마를 입고 왔기 때문에 조금은 감출 수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 올 때는 오는 도중에 휴게소에서부터 하혈을 많이해서 나주에 오기도 전에 옷을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철야기도를 하면서 '내 믿음은 참 보잘것 없고 항상 내가 편리한대로 살아왔음'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일 없이 지내다가 하루는 9시 30분 미사를 참례하고 돌아와서 평범하게 지내고 저녁에 기도를 하고 누워 있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주님과 성모님께서 치유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랫배를 만져 봤더니 조그마한 것이 손에 잡히는 것이었어요. 옆에 계시던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게 암 덩어리인가 봅니다." 하고 했더니 그 순간부터 아랫배의 통증이 가셨고, 지금은 그 잡히던 덩어리가 없어졌습니다. 매사에 희생과 기도로써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봉헌한다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모든 은총을 가득히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께 감사합니다.

 

1995년 1월 7일
부산 괴정 본당 안 루비나 T.(051)204-8946

 

 

 

향내를 맡는 순간 동맥경화증이 나았어요. 

서 데레사

저는 서 데레사입니다. 20년전에 혈압으로 쓰러져서 8일만에 깨어났어요.
그 뒤로도 6차례 혈압으로 쓰러져 전신마비가 왔는데 나주 성모님께 뜨겁게 매달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니까 밤새 24시간 지나서 진짜 일어나 버린 거예요.
제가 동맥경화 협심증으로 3년전에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병원장이 정상인은 맥박이 1분간에 72번 뛰는데 저는 39번밖에 뛰지 않는다고 했어요. 잠자다가 옆사람 모르게 죽는다고 심장 박동기를 갈으라고 했지만 제가 안 갈고 나주 성모님 집으로 왔어요. 자매님의 기도를 2번 받고 성모님의 진한 향내음이 코를 찌르기에 저는 꽃이 있나 살펴 보았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성모님은 당신 존재를 향내로 풍겨서 나타내신다고 하셨어요. 그 순간 저는 향내를 맡았고 바로 그때 동맥경화증이 나았어요 . 3년동안 약을 먹지 않았어요. 남편을 정말 미워했는데 성모님께서 피눈물 흘리신 것을 보고 회개하고 남편에게 잘못한 것 용서 청했습니다. 그리고 3년전에 며느리를 얻었는데 개신교를 다니면서 천주교를 반대하는거예요. 이것을 어떻게 고칠까? 마침 나주의 성모님께서 피눈물 흘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느리에게 말했더니 며느리가 카메라를 가지고 요모조모 살피는 거예요. 그러더니 지금은 남편 (내 아들) 데리고 성당엘 다닌답니다.

 

1991년 전주 노송 본당
서 데레사 T.(0652)84-3618

 

 

 

허영에 들떠 세속과 타협했던 저를 고통을 통하여 불러주시다니 

김귀옥(미카엘라)

성모님 사랑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많아 저의 가슴이 벅차 올라 글로 쓸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처음에 성모님을 만나러 갔을 때에는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그저 살아 계시는 성모님이시라고 생각했고 내가 사업에 실패를 보았으니 가서 한 번 매달려 볼까? 뭐 그렇고 그렇겠지, 그런 생각으로 갔었는데 너무나 깜짝 놀랄 일이 저에게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저는 세속적인 세상 물이 너무 많이 들어 온갖 허영에 들떠 있었습니다. 화려한 옷에 재미있는 친구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며 성당은 그저 일요일 마실 나가듯 하는 형식적인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주 성모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저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동생 아셀라가 나주 성모님 집에 너무 자주 가길래 미친년이라고 했지요. 하느님을 곱게 믿지 성모님이 뭐 거기만 계시냐? 하구요.
그런데 그런 믿지못할 일들이 저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 하는 옷들...
제가 추구하고 살았던 그런 허영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저의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백화점에 쇼핑하며 돌아다니는 일, 친구를 만나 깔깔거리던 일, 이러한 일들이 너무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모든 일련의 일들이 저의 뜻이 아니라 성모님의 사랑과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나주 성모님한테 달려가고 싶은 충동들, 갈 때마다 성모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어떤 방법으로든 저를 여러가지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지 않았던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이제 이 세상을 육적으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볼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저를 인도하시었기에 이제는 기쁘게 생활합니다.
제가 22번째 나주 성모님을 뵈러 갈 때의 일입니다. 평소에는 저의 여동생과 둘이서 성모님 집에 가곤 했는데 그날에는 저의 아이들이 방학을 했기에 막내동생이 운전을 하고 아이들과 아셀라 동생등 총 5명이 대구에서 전주로 해서 나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정읍 휴게소에서 한참 쉬고 출발한지 한 10여분쯤 되었을 때 일입니다.
저의 눈 앞에 성모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앞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는데 성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 그만 저 애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하더군요. 저렇게 열심히 나를 찾아오는데 나를 찾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면서 우리들 죄를 용서해 주자고 간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앞에 기다란 줄에 동그란 굴렁쇠가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우리들이 나주 성모님 집에 가는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계셨습니다. 1개는 우리 아이, 2개는 남편, 16개는 막내 동생것, 22개는 제것이었죠. 그리고 한 쪽에는 수북하니 쌓여 있었습니다. 아셀라 동생은 수도 없이 많이 갔기에 수북한 것은 아셀라 동생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저희들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의 삶은 어디에 어느 곳에 있든지 성모님이 우리를 감싸고 계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가며 살고 있답니다.
이제 남은 한 생애 주님과 성모님 따라 천국 가는 그날까지 성모님 메시지 말씀 실천하면서 마리아의 구원 방주 타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허영에 들떠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이 죄인 이제라도 회개할 수 있도록 고통을 통하여 불러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감사합니다. 주님, 성모님 찬미 영광 받으소서.

 

1995년 6월 12일
대구시 동구 입석동 981-6
김귀옥(미카엘라)

 

 

 

형언할 수 없는 처절한 악마의 장난과도 같은 삶
그러나 나주 성모님은 이단에서까지 끌어내 주셨다. 

요셉

 

찬미 예수
율리아 자매님께

"네가 빛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빛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와 나]에서

자매님,
먼저 나주 성모님께 문안 드립니다.
이 큰 죄인을 이단에서 구하시고 성모님의 넓으신 품으로 불러 주셨음에 오늘도 묵주의 기도로 하루를 마치며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분 가슴에 못박으며 살았는지 그저 머리숙여 회개하고 또 회개할 따름입니다.
이 순간에도 진정 주님께 그리고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집안은 5식구입니다. 국가보훈처에 다니시는 아버지, 어머니, 간호사 (현 강남성모병원)인 작은 누나와 병중에 있는 큰 누나, 그리고 저 이렇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이때까지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중에 있었는데 그 고통의 채찍에 맞아 때로는 찢어지고 때로는 아팠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의 견책이셨음을 느껴 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심한 정신병으로 1년에 2/3를 아프셨습니다.
제가 5살 때부터 그것을 알았는데 처음의 증상은 그냥 헛소리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버지는 점점 성당과 담을 쌓은 채 어머니의 병을 핑계 삼아 주말에는 낚시, 테니스, 등산, 골프... 등으로 늘 나가셨고, 어머니는 더욱 심한 히스테리를 일으켰습니다. 지금도 중학교 때의 집안 분위기를 생각하면 빛바랜 분노와 서글픔이 기억납니다. 어머니의 정신병은 가슴이 아프고 불쌍한 생각에 모든 시간을 눈물로 채우기에 충분했는데 아프신 어머니를 아버지는 무지하게 구타하셨고 심한 고함 소리와 울음 소리는 늘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계속되는 불화에 큰 누나는 제가 중3 때 정신병을 얻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계속 승진도 못하셔서 집안은 이미 죽음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원래 성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아버지의 방황을 회개시키기 위한 성모님의 채찍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렇게 큰누나가 병이 나서 휴학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잠시 정상으로 돌아왔다가도 또 아프기 시작하면 집안은 쑥밭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상태였고, 단순한 병의 차원을 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증오하고 폭력으로 모든 것을 뒤엎어 갔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리만치 처참한 심정, 불쌍한 연민과 죽이고 싶은 분노, 그리고 병의 고통으로 갈기갈기 가슴은 찢겨져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장남이자 막내인 제가 대학엘 들어갔고 별 달라짐 없는 가운데 작은 누나가 SLE 이라는 자가 면역결핍증에 걸렸는데 그것은 사형 선고였습니다. 이제 그 처참한 피비린내 나던 싸움의 결과가 하나씩 나타나자 아버지는 조금씩 무엇인가를 깨달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만 제외한 4식구가 모두 병들어 그것도 불치병만 걸려 허덕였습니다. 근 8년 동안의 저희집 상황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이 외에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처절한 장난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런 배경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심장이 약하고 신경성 증세는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쓰러지면 집안이 쓰러질 것이 너무도 명백했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면서 겪었던 일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한 누명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견디다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 묵주를 들었습니다. 5월 26일 시작하여 7월 17일에 끝내려고 했는데 기도를 시작한 지 이틀 후인 28일에 저는 '나주로 오라'는 성모님의 응답을 받고 전화를 드렸으나 그때 자매님은 필리핀에 계셨습니다. 다행히 6월 6일에 기도회를 위해 오신다는 어떤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저는 공부를 잠시 잊고 6월 6일 일행 4명과 함께 나주로 향했습니다.
차가 막혀 11시 10분쯤에 도착했는데 마침 자매님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갈등에 대해 딱 한마디의 대답만 듣고자 사정사정해 보았으나 인자하신(?) 회장님께서 허락치 않으셔서 결국 저는 그 먼길을 힘들게 달려간 것이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너무 속상하고 허무해서 땅바닥에 앉아 성경의 앉은뱅이처럼 고집하여 꼭 자매님을 만나 뵙겠다고 다짐했으나 어느 분의 설득으로 그것도 포기하고 그냥 서울로 가려 했습니다. 저는 그때 성모님께 '성모님, 저는 이만큼 비참한 인간입니다.'하고 말씀드린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다가 고통이 있어 방에 누웠는데 성모님과 만남의 시간이 있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성모님께 나아가 인사드리고 자매님께 나가자 자매님께서는 저의 손을 꼭 잡으시고 눈을 들어 쳐다보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자매님의 눈 속에 계시는 성모님을 뵈었고 모든 생각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자매님은 제 가슴에 손을 얹어 주셨고 또 뺨을 제 뺨에 대어 주시며 환히 웃으셨는데 저는 그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성모님' 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생각납니다. 너무도 선명히...
저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못하다가 잠시 후 가슴이 이상해지는 느낌,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이상한 기분에 비내리는 마당에 나가 성모님 앞에 앉아 무릎 끓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뱃속부터 올라오는 감정의 북받침에 못이겨 엉엉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와 큰 누나, 아버지, 작은 누나에 대한 연민, 그리고 같이 간 일행 중 가슴 저민 한 아이의 가정, 그리고 자신의 나약함과 성모님의 사랑, 감사의 눈물까지, 눈물샘이 마르도록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서울로 향했습니다.
저는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들으며, 성모님의 인준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더욱 서둘러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단에 있었기에 성모님의 메시지를 더욱 절실히 알 수 있었다는 점에 저 역시도 성모님과 주님의 예비하심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새롭게 정립되어져 가는 가톨릭,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뿌리를 갖춘 유일한 종교임을 거듭 느끼고 깨달으며 그전까지는 사교라 스스로 지칭했던 이 천주교를 도리어 전하고 특히, 성모님의 은총 분배와 나주 발현의 의미... 등을 외치고자 노력하나 닫혀진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에 쓰디쓴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이전의 그 죄악에서 해방되어 영성체를 한다는 것이 자매님께 가장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며 누나들과 얘기하며 우리 가정엔 울음 대신 웃음이 피어나고 병이 나아진건 아니지만 환경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들로 모두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이 기적이다."라고 서로들 얘기합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 알면서도 거듭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은총을 부어 주셨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상상도 못하리라 생각했던 우리가정의 변화, 급기야 7월 26일 과천 영보 수녀원에서 있었던 산피정에 가족이 들어가 성호도 긋지 않으시던 아버지께서 60이 지나신 지긋한 연세에 손뼉을 치고 노래하고, 주님을 부르고...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 뿐... 특히 율리아 자내님께서 메시지 전달하실 때 맨 앞자리 땅바닥에 나와 앉으셔서 눈물 훔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성모께서 '우리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게 했습니다. 제가 나주 다녀온 이후로 변화 되어가는 많은 상황들, 더더욱 성가정 피정 1차에 우리 가족을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주에 갔을 때 자매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자매님께서 한 33세 드신 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예수님이셨고 또 벤치에 앉아 계셨다고 직접 자매님이 앉아 그 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친구 성주와 저는 세면을 하면서 우리 잠시 예수님이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 기도드리고 묵주의 기도 15단 바치고 자자고 했습니다. 자매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건물 2층에 예수님상이 팔을 펼치신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주님'하고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이 이상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물안경 끼고 물을 안경에 흘릴 때 아른거리듯이 예수님상이 아른거렸습니다. 저는 눈이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부비고 보고 또 부벼 보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성주가 말을 더듬으며 "혀-현아 너 보-보이니?" 하며 겁에 잔er 질려 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저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성주야, 주님이 움직이셔!"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둘은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두려워 했고 무릎을 끊었습니다. 30분 가량 계속 주님께서는 팔과 옷자락, 손가락, 몸의 위치를 움직이셨습니다. 성주는 그 순간까지도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고 준비도 안된 자기에게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심에 통회의 기도와 다짐을 거듭했습니다. 저는 두려워 계속 큰 소리로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성주는 자신의 재산과 노력을 바쳐 저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업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고 저는 경당에서 자던 사람들과 자매님께도 알려 드렸는데 그때는 이미 주님의 움직이심이 많이 적어진 후였습니다. 이 기적(?)에 성주와 저는 넋이 빠져 성모님의 장미향 그윽한 경당에서 15단 묵주기도를 감사하며 드렸습니다. 자매님께서 저에게 주신 묵주에서 진한 향기가 났습니다.
다음 날 저희는 아침 미사를 참례하고 자매님께서 주신 스카풀라와 기적의 패를 받아 들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자매님! 젊은 저희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물론 자매님께는 주님과 성모님께서 계시지만 힘찬 저희들이 있습니다. 더욱 힘내시고 죄인들의 회개 (바로 저희들의...)를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저도 성모님의 뜻과 주님의 계획하심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회개하겠습니다.
자매님. 건강 하시구요. 가정에 평화 가득하시길 빕니다.
또 편지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1992년 9월 23일
성모님의 미천한 종 요셉 드림

 

 

 

회개로 얻은 하느님 사랑 

이 세실리아

제1부
"주여! 당신 종이 듣나이다." 라는 성경 말씀을 귓전에 반복하여 50여 평생을 들었지만 그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명언으로만 넘겨버리는 습관에 젖어 있던 내 영혼이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으로 눈을 뜨게 된 지도 어언 3년 6개월된 오늘, 다시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받은 그 많은 은혜를 결코 다시 봉헌하지 않고선 이 기쁨을 누를 길 없어 펜을 들었다.
1990년 이전에도 풍문에 듣고 있었으면서도 무관심했던 내가 같은 직장 동료인 예비 신자 여직원이 광주 임동성당 수녀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가져왔던 피눈물 흘리시는 나주 성모님의 팜플렛을 보고서야 나주 성모님께 달려가 통곡하던 죄인이 오늘 이렇게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기쁨으로 나날을 보내니 다시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받은 내적 은혜는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다. 남보다 더 많은 일과 분주함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나에게 청천병력과 같은 물질적인 고통이 있었다.
장부가 친구 보증을 섰는데 1985년도에 사업 실패와 함께 사업빛 1억원과 보증금 1억 5천만원이 보증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나에게도 법적인 제재가 떨어진 것이다. 먼저 내 봉급을 5년여 동안 압류당하고도 그 나머지는 현금으로 부채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아파트 1채와 단독주택 2채를 모두 팔아 정리해도 85년도에는 부동산 값 하락으로 그 부채를 청산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20여년 동안의 공직생활에 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부도난 사람의 얼굴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8년간 갚아오고 있는 상태다. 때론 죽고 싶다는 충동까지 받았고 남편이 정말 싫고 미웠다. 그런데 웬일인가. 나주 성모님께 가서 이 괴로운 마음을 보여 드리고 '내 죄의 보속이라면 너무 야속하십니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더니 나를 당신께 오게 하기 위한 성모님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쁨이 오고 과거에 우울했던 마음은 간 곳 없이 행복함에 가슴이 부풀어 오면서 남편이 좋아지더니 "아! 예수님 성모님께서 남편의 이 실수를 통하여 당신 사랑으로 나에게 오셨구나"라는 믿음이 강하게 복받쳤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답답할 때나 괴로운 현실에 부딪히면 그때마다 어김 없이 나주 성모님이 보고 싶고 가고 싶은 충동에 하루가 멀다하고 성모님께 쫓아다녔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성모님 앞에 앉아 있으면 편하고 모든 만물과 사람이 다 사랑스러우며 남편이 그렇게도 중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 참으로 고마우신 성모님. 그것 뿐인가? 영적인 성장을 주십사라는 기도를 들어 주셔서 하루하루가 천국인 것을 체험케 해주시는 하느님! 내가 언제 이토록 행복하게 기도 시간을 보내며 미사 시간이나 영성체가 이토록 기쁘고 즐거웠던가. 그리고 나주 성모님을 통한 율리아 자매님의 가르침으로 일상생활이 모두 성령과 함께 하는 영적 성장과 자기 반성으로 오는 통회의 은총이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온 50평생. 얼굴 들기조차 부끄러운 죄인임을 다시 통감한다.
이제는 그 많은 빚을 거의 청산하고 있는데 "짐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은 하느님의 손짓으로 능력없는 분들 대신 능력과 재주와 시간까지도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손수 나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재물과 능력과 시간까지도 분배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제야 깨닫고 오히려 물질적인 고통을 통하여 내가슴 깊숙히 자리하고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정말로 깊이 감사하며 성모님께 이 고통주심을 감사하는 감사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둘째로는 외적인 치유 은총이다.
처음으로 첫 토요 철야 기도회에 참석한 우리 부부에게 성령께선 30여년간 불치병으로 앓고 있는 장부의 당뇨병을 성령으로 직접 수술해 주셔서 완치된 것이다. 그것뿐이랴. 내적인 치유에 기뻐 뛰며 목요기도회와 토요일 철야 기도회에 빠짐 없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직장도 개의치 않고 성모님께 쫓아 다니는 죄인의 모습이 가상하셨던지 한 번도 치유해 달라는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도 고질병인 팔 굳어지고 쑤시는 팔병과 어렸을 때 이층에서 뛰어내려 부러진 다리 통증과 수도원에서 있을 때 치료되지 않아 수련 수녀의 옷을 벗게 했던 만성 위장염과 12지궤양이 너무 심하여 4개월밖에 못산다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위장병까지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두 치유되어 아무리 심한 노동을 하고 산을 올라도 팔 다리는 너무도 강건하고 한밤중에 마른 오징어를 머리째 다 먹고 찰떡을 한 접시 다 먹어도 육신을 건강한 뚱뚱보로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나를 아무런 병도 없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당신을 증거케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하루 24시간을 주님께 성모님께 봉사해도 모자라지만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받은 커다란 은총은 가족화해를 이룬 가정성화다.
나는 9남매의 맏며느리이다. 아니 두 살 아래 시작은 아버님까지 10남매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거기다 시조모님, 시부모님, 남편, 그리고 나 해서 15명 가족의 가장인 셈이다. 왜냐하면 가족 중에서 나만 혼자서 돈을 버는 직장인이고 남편은 가톨릭 농민회 도회장이며 중등과정 불우학교 (재건중학교) 교장으로 교사들에게 봉급을 주는 처지였으니까 내가 명실공히 돈 버는 가장이었다.

제2부
시가 쪽의 부모님이나 시동생들의 성격이 다혈질 이어서 항상 시끄러운 편이고 나는 돈을 번다는 죄아닌 죄목 때문에 죄인이 되어 14식구의 뒷바라지를 하였고 가족들에게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나는 혼배성사의 중요성과 고등교육을 이수한 측면의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이혼을 결심하였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하느님 앞에 떳떳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후 시어머님은 우리 집을 떠나 거의 시누이들의 살림을 해주고 있어서 나와는 가까이에 살지 않으면서 며느리의 흉은 많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잠깐 시어머님이 광주 우리집에 오셨는데 나에게 대한 감정은 다름이 없었다. 굳어진 시어머님의 마음을 열리게 하기 위해서는 나주 성모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올라 즉시 나주 성모님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예상대로 시어머님은 한없는 눈물과 피눈물 범벅이 된 성모님을 보시고 흐느껴 우셨다. 그리고는 메시지 책과 팜플렛을 가지고 (다섯째네집 살림을 맡아 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제주도로 가셨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에 대한 말씀과 메시지 말씀 그리고 당신이 보신 성모님의 현존을 성당에서나 마을에서 열심히 전파하시며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루종일 바치며 영적 성화를 얻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2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9남매 형제들을 서로 불목하게 만드셨던 장본인이신 시어머니가 전화로 내 안부도 묻고 나주 성모님의 근황을 물어오기 시작하면서 점점 변해지신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변화는 나에게도 있었다. 맏며느리로서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한 번도 형제들에게 전화도, 찾아가 본 적도 없었기에 시가쪽 조카들의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그런데 시어머니 전화 받으면 반갑고 보고싶고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 이제 늙으셨으니 내가 잘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지난 잘못은 자식된 도리를 못한 나에게 있었지 부모님에게 있었겠느냐는 회개의 마음이 일었다. 그후 1년만에 시어머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밤 내내 얼마나 통곡하고 울었는지 모른다. "하느님! 나주 성모님, 우리 어머니를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정말로 잘 모셔서 지난 잘못을 용서받지 않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그런데 무의식 중에서도 묵주를 손에 꼬옥 쥐고 놓치지 않더니 눈을 뜨게 되었고 소생하셔서 6개월여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하셨다. 그런데 우리 집에 오셨다가 다시 쓰러지셨는데 순천 가롤로 병원에서는 아예 받아 주지도 않았고, 순천 신경외과에서도 이제는 소생 가망이 없다고 입원도 거절하고 오늘밤을 넘기지 못한다 하기에 자식된 도리로 겨우 사정하여 기능 정지 직전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시켜 마지막으로 알부민 주사를 놓아 주라고 사정하여 초상을 치르기 위하여 엠블란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직행했다.
나는 광주에서 초상에 필요한 많은 음식물이며 그릇 등을 준비해 갔고 20년 동안 불목했던 형제들이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시골 우리 집에 모였다. 장부 라파엘씨는 엎드려 울면서 "하느님 저도 어머니와 함께 데려가 주세요."하며 통곡을 했고, 함께 모인 가족들도 울면서 눈 한 번만 떠보고 말씀 한마디라도 하고 돌아가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애원했다. 장부는 울면서 또 말했다. 빨리 나주에 전화하여 임종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도록 부탁하라고.
그 때 모여있는 식구들은 시댁 형제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친정 부모님과 친정 언니까지 무려 25명이나 되었고 자자 일촌인 마을 친척까지 30여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임종을 지켜보며 숨을 거두시기 전에 속옷도 갈아 입히고 수의도 발밑에 놓아 드렸다. 어머니의 몸은 꺼져가는 눈매며 볼, 벌어지는 턱, 가빠지는 숨소리, 이미 차디차게 굳어져 버린 팔다리, 시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변해갔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시동생이 "하느님!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형님 형수를 미워하고 욕했어요. 내 죄 때문에 어머니가 벌 받으시는 거예요. 형수님 나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며 나를 붙들고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는 바람에 형제들이 같이 "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이제 언니가 어머니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우리가 나쁜 사람이었어요. 언니 정말로 잘못했어요."라고 모두가 나에게 용서를 청하며 울부짖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랬다. "아! 이 큰 은총이여, 이 큰 사랑이요! 성모님 당신은 정말로 사랑 덩어리입니다." 하는 순간 나의 영적 눈도 드디어 떠졌다고 느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이 미워했겠지,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이런 불목은 없었겠지, 하며 나는 하느님께 감당하지 못할 사랑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동생들 하나하나 가슴으로 껴안으며 "내가 잘못했다."고 "나를 용서하라."고 얼마나 큰 통회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대 화해의 장으로 어머니를 통해서 나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신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서 손들을 맞잡고 "마리아의 구원방주" 성가를 가르치며 계속 부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돌아가실 분 놓고 노래 부른다고 의아해 하고 있을때 밤 10시에 율리아 자매님이 오셨는데 곧 돌아가실 어머님을 가슴에 안으시고 하느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셨다. 기도가 끝나니 어머니는 눈을 뜨시고 자매님을 알아 보시더니 혀가 꼬부라진 상태에서 "성수"하시니 자매님이 성수를 찍어 성호를 그어 주시려고 했지만 온 몸은 이미 굳어져 있었던 관계로 팔이 굽어지지 않는 상태라서 공중에 십자가를 그으셨는데 또 "용서하소서."라고 통회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 온 가족이 기뻐 소리지르며 "하느님 용서하소서."라고 각자 통회하는데 어머니는 눈을 뜨고 우리를 일일이 보셨다. 그리고 내 손을 찾아 잡으실 때 나는 그 때 죽고 싶도록 내가 잘못했던 사실들이 가슴을 찢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형제들도 모두 갖가지 병고에 시달렸는데 내 바로 밑 동서는 위장병으로 20여년간을 매운 음식 등을 전혀 먹질 못했고 그 남편인 시동생도 당뇨병으로 간염 합병증을 앓고 있었으며 셋째 시누이 남편은 늑막염으로 수술하고 일주일 만에 잡수시지 못하여 입원을 여러 차례 했으나 설사가 잡히지 않아 퇴원하신 지 며칠 안되었으며 친정 언니는 소아마비인데 욕실에서 넘어져 무릎 둥근 뼈가 깨져서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 모든 환자들이 오직 어머니 소생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 소리에 흐느끼며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아멘"을 열심히 하였는데 내 형제들은 원불교, 개신교, 무신론자, 각양 각색인 사람들이었는데 철야기도하는 열심한 자매 형제님들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느꼈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님이 이런 내 형제들의 모습이 어여뻤던지 내가 신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도 피곤도 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얹어 기도를 해 주셨다. 나는 너무도 고맙고 기뻤으며 행복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도 자매님의 기도를 진정으로 받았고 자매님을 통해서 풍기는 장미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울 때 이방인인 형제들은 모두 장미향기에 취하고 놀래고 감격하면서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약속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께 감사했다. 율리아 자매님은 밤 12시 가까이 되어서 가시겠다고 나가시니 우리도 따라 나갔는데 갑자기 소아마비 언니가 "오메! 나도 혼자서 일어나 걸어나왔네. 내 다리에 상처난 뼈가 다 나았어. 뭔일일꺼나?"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이 커다란 은혜를 즉시 목격하였고 다시 한 번 자매님이 감사 영광송을 바쳐 드렸다.
율리아 자매님이 돌아가시며 "이제 어머니는 살으셨네요."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날 밤에 미음과 요플레까지 받아 잡수시고 딸들에게 일어나겠다고 하시며 앉으셔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 이 모습을 직접 본 남자분들이나 동네분들은 이 신비스러운 기적에 여러 번 놀랬다 한다.
나는 아침에 어머니 얼굴과 손, 발을 씻겨 드리고 미음을 드리니 어머니는 정상으로 이미 돌아와 있었고 구경꾼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기뻐서 초상치르기 위해 사왔던 그 많은 음식들을 모두 장만하여 어머니의 제2의 탄생을 기념하는 잔치를 했는데 초상치르려던 집에 개도 한마리 사오도록 하여 보신탕을 얼큰하게 끓였는데 위장병이 심하던 동서도, 설사가 심하시던 간장염 아버지도 모두 한 그릇 반을 얼큰 하게 잡수시고도 속이 다 치유받아 설사도 위장염도 아프지 않다고 또 야단들이다. 그리고 늑막염 시누이 남편도 일어나서 몸이 거뜬하고 다 나은것 같다며 읍에까지 차를 운전하고 가서 개를 사왔었다. (전날엔 차에 누워서 왔음)
오랫만에 화해한 내 사랑하는 형제들과 시어머니를 위해서 사랑을 베풀 좋은 기회로 여겨 직장은 1주일 휴가내어 놓고 혼자서 30여명의 밥을 4일간 사랑의 힘으로 장만하여 먹이는 기쁨은 바로 그것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형제들도 율리아 자매님을 통해 나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까지 다 치유해 주셨다고 얼싸안고 또 한바탕 기쁨의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그후 어머니는 죽었던 피부가 다시 살아나니까 살껍질을 누에처럼 벗었다. 나주 성모님의 현존하심이 바로 천국의 축소판인 것이다.
나는 과거를 되돌아 볼 때 정말 놀랍기만 하다. 나는 성악을 전공해서 어떤 콩쿨대회때도 1등을 도맡아 했다. 그런 성대가 성대염에 걸려 아 소리도 못했으나 율리아 자매님이 철야기도회때 찬미 봉사하라고 하셔서 못한다고 했는데 자매님이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이 치유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라고 하셨다. 나는 Amen만 했는데 내 목소리가 터졌고 15년간 막혀 있어서 못했던 성가를 이제 옛날과 같이 할 수 있어서 본당에서 성가봉사를 하고 있고 성가발표때나 미사때는 독창을 할 정도이니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물질 은총도 주시어 어려울 때마다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도와주셔서 부채가 거의 청산되었고 이제 남아있는 것은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주님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보존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더욱더 열정적인 영적 성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며 생활과 기도로써 예수 성심의 상처와 사람들에게 끼쳤던 상처를 기워갚는 숙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성화의 길로 거듭 매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께 찬미 찬송을 영원무궁히 바칠 것이다. 마귀의 횡포가 심하여 오해와 불목을 자아내게 하는 경험도 얻었으니 이제 어떤 경우라도 마귀에게 밥을 주지 않고 영신생활을 통한 성모님의 은총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
이 세실리아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이게 웬일 입니까 

정명자(마리아)

찬미 예수
안녕하세요. 율리아 자매님!
저는 현재 수원교구에 속하는 46세의 주부입니다. 글솜씨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고 있는 신자로서 아이 하나 더 낳으려고 약도 많이 먹고 병원도 많이 다녔지만 36세 되는 해까지 아이가 없어 병원에 다니는 것을 포기하였는데 기도 끝에 주님께서 딸 아이를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딸 아이가 다섯 살쯤 되던 해에 제가 그만 주님 보시기에 너무 부족하고 경솔했던지 아니면 어떤 고통을 통해 더욱 굳은 신앙을 주시려고 하셨는지 하혈을 한달 이상 하더니 자궁 내막증 증세로 큰 수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수술후 두통과 통증은 근 6개월간 너무나 심해서 걷지도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밥을 누워서만 먹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 동안 후유증이 심하였지만 병원에서는 별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주위에서는 수술할 때 도구를 그대로 두고 꿰매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아는 신부님께도 하소연하면서 통증과 두통이 너무 심해서 차라리 죽고만 싶다고 심정을 이야기했더니 신부님께서는 고통 끝에 분명히 큰 은총이 뒤따를 것이라고 하시면서 함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저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주님도 원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자매님을 통하여 그 당시에 나주 율리아 자매님 집의 성모상에서 피눈물을 많이 흘리신다고 하는데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들으면 성모님 말씀같이 들린다고 하여 저 역시 괴롭지만 꼭 그 곳에 한 번만이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쳤습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그 몸으로 그 먼곳을 어떻게 가느냐고 극구 만류를 했지만 죽더라도 꼭 그곳에 가서 죽는다는 마음을 먹고 성모님을 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곳에 갔었습니다. 좀 어리석은 마음이긴 하지만 그곳에만 성모님이 계신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아무튼 꼭 한 번 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서까지 차 안에서 의자에 앉아서도 힘이 없어 그만 앞으로 쓰러졌기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며 부축하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나주에 도착하여 율리아 자매님을 보는 순간 저는 성모님을 뵙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고 율리아 자매님 말씀을 통해 많은 회개와 하염없는 눈물이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한참 기도 중에 율리아 자매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았으면 바로 성모님 망또 만지는 것과 같을텐데... 하면서도 '이 죄많은 나에게 무슨 복이 있겠느냐'하고 회개의 눈물을 얼마만큼 흘리고 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 반대쪽에 서 계시던 분이 어느 새 눈을 떠보니 제 손을 꼭 잡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만 "성모님 감사합니다. 이 죄인 때문에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시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제 통증만 가지고 원망을 했으니 이런 죄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하며 울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님 입을 통해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 또한 성모님을 통해 성령의 힘으로 우리 마음을 움직여 주신다는 것을 제 나름대로 깨달았습니다. 그 시간 후부터 그렇게 아팠던 두통과 통증은 말끔히 사라져 날아갈 듯이 개운하여 돌아올 때는 제가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면서 체험 이야기를 하면서 왔습니다.
그후 제가 회개하여 치유 받은 모습을 보고 다섯차례 관광버스가 10여대 넘게 다녀왔습니다. 물론 수원 자매님의 봉사와 주님께서 이끌어 주셨기에 냉담자도 그곳에 다녀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아울러 저는 그후 건강하여 열심히 살아가 저의 딸아이도 벌써 3학년이 되었지만 저의 병은 재발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께 감사드리고, 율리아 자매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세요.

 

1995년 1년 23일
경기도 군포시 당동아파트 10-106
정명자(마리아) T.(0343)8-3741

 

 

 

회개한 그 날 이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심대연(루시아)

찬미 예수
태중 교우로서 어려서부터 천주 성삼과 성모 마리아의 현존을 그대로 믿고 살아 온 본인은 어느 날 언니를 통해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믿고 따르며 나 자신 외에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던 중 윤율리아 자매님의 철야기도회 방문소식을 듣고 갈 조건이 아니건만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서 꼼짝도 못하던 처지에 저는 말했습니다. "하느님, 어떤 일이 있어도 갈거예요." 하고 다짐 하던 중 앓던 배는 곧 나았고 철야에 참석해 율리아 자매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일어서던 중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성전이 떠나가게 나의 눈물은 북받쳐 왔었습니다. 바로 회개의 은총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의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일들의 회개와 사랑의 실천과 기쁨과 함께하는 전교생활, 그러나 고심이 되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에 관한 인간의 판단들이죠. 교회의 모든 방침에 순명해야 할 우리 신자들의 의무이기에, 전후 사정의 말과 함께 그래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찌 됐던 나 자신부터 돌아 보았습니다. 나주 성모님으로 인해 과연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아니다. 참 삶으로 바꿔주셨을 뿐 박해를 받으셔야 할 한 점의 잘못됨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게 그간 일어난 아니, 행해주신 모든 일들을 어찌 이 작은 종이 한 면에 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 누구라도 다 만나 드릴 수 있겠습니다. 나 자신 하나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 자매와 함께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 뜻하시는대로 살고 싶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저는 성모님과 함께 지난 날의 나를 거울 삼아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해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답니다.
말이 태중 교우고 유아세례자이지 잘못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아온 지난날의 부끄러운 모든 일들을 주님앞에 고백드리고 용서를 청하며 늘 매순간을 처음 회개한 여인처럼 살아가게 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바꿔주신 천주 성삼께, 성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비오니 당신 뜻 이루시고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995년 6월 20일
심대연(루시아) T.875-2939

  

 

 

회개한 그 날 이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은영(마리아)

 저는 오늘 8월 27일 수요일 오전 9시 30분 미사를 마치고 남편과 둘째 아들과 함께 성모님 집에 왔습니다. 묵주기도 15단을 바치고 집으로 가려다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과 흥분된 마음으로 또 다시 영광의 신비를 봉헌하고 있을 때 율리아 자매님께서 배가 불러오시면서 고통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어찌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묵주의 기도 영광의 신비 3단을 봉헌하고 있을 때, 기도하며 성모님상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중앙으로부터 나풀나풀 (살랑살랑)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율리아 자매님 앞을 통과하여 파 신부님과 율리아 자매님옆 중간 쪽에 성체가 사뿐히 내려 앉으셨음을 저의 남편과 아들 (둘째)인 영민(요셉)과 함께 보았음을 증언합니다.

 

1997년 8월 27일 1시 40분
나주시 송월주공아파트 10동 105호
이은영(마리아)

 

 

 

안 마태오

1997년 8월 27일 오전 내에 경당에서 어머니 이루시아와 기도하고 있었는데 파 신부님과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묵주기도중에 위로부터 하얀 나비 모양이 움직이면서 번쩍거리며 내려오다가 율리아 자매님 있는데로 갔다가 파 신부님쪽으로 떨어졌다. 가까이 가서보니 그것은 성체였다. 나는 오른쪽 눈이 안보이고 왼쪽 눈은 사람이 가까이 와야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성체가 내려오시는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전남 나주시 성북동
안 마태오 T.(0613)33-4811

 

 

김 베아따 수녀

나는 광주에 있는 까리따스 교육관에서 북한 형제들의 죽음의 고통을 호소하고 조금이라도 북한 형제를 돕고 싶어 오전강의를 하고 평소 나주 성모님을 뵙고 싶어하던 차 그곳 교육관 원장수녀님께서 율리아 자매님께 전화 드렸다며 빨리 오라고하여 도착했을 때가 오후 5시경이었으며 경당 내는 장미향기가 그윽했다. 성모상 가까이 가보니 성체가 성모상 발밑에 놓여 있었고 단 밑에는 성체가 내려 오셨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성체가 닿았던 자리에는 장미향기로 가득했다.
너무나 황홀한 순간이었다. 성체가 내려오시는 모습은 비디오로만 보았지만 모셔진 성체를 목격했고 밤 11시 50분경 광주 교구청 신부님께서 모셔 가시면서 경당 내에 있는 20여명의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시고 떠나가셨다. 놀라운 나의 성체 체험이었다.

 

1997년 8월 27일
서울시 성북구 정능1동 10번지
김 베아따 수녀

 

 

 

한분민(임마꿀라따)  


 
안양에서 오신 파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리며 올겐을 맞추어 성모님께 노래를 해드리고 있었다. 율리아 자매님이 나오시자 또 다시 올겐을 치시며 노래를 하셨고 얼마 후에 성모님 앞에 나아가 묵주의 기도를 드리실 때 우리들도 모두 함께 묵주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영광의 신비 3단째 율리아 자매님이 십자가와 성모님상으로부터 빛이 나온다고 하여 나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십자가 쪽에서 무엇인가 하얀 물체가 내려왔다.
눈송이처럼, 아니 흰나비처럼 움직이며 내려올 때 내 눈은 그 물체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그 물체는 심한 고통 중에 계시던 율리아 자매님쪽으로 가더니 파 신부님과 중간지점에 내려졌다. 누군가가 "성체다" 큰소리로 부르짖으니 모두가 그쪽으로 몰려들어 나도 질세라 재빨리 달려가 보니 과연 성체가 내려져 있었다.
오, 놀라운 성체의 신비여!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이런 영광을 보여주시다니
이 놀라운 사건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이 감미로움, 환희, 기쁨, 평화, 사랑.
뛰노는 내 심장의 고동을 억제할 수 없이 떨리는 맘으로 주님을 부르며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 이제 이 죄인도 다시 새로운 삶으로 주님과 성모님을 배척하지 않으며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삼구전쟁에 승리하여 기쁨과 사랑과 평화 안에서 더욱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영웅적으로 충성을 다해주기 바란다."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 따라 '아멘'로 순명하여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1997년 8월 27일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2동 5-88
한분민(임마꿀라따) 외 23명

 

 

 

유숙희(아녜스)

 저는 조그만한 식당을 하고 있으며 결혼 생활 24년째 되었고 영세 받은 지는 17년이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 초부터 갈등이 심했습니다. 어느새 두 딸들이 성장을 해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도 우리 부부사이는 여전히 평화로운 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제 입에서 이혼하자는 말이 밥먹듯이 튀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결국 97. 7. 14. 오후 3시 합의이혼 결정을 짓고 문래동 가정법원에 가서 위자료를 줄 테니 도장을 찍으라고 했으나 전 믿을 수 없으니 위자료를 주면 도장을 찍겠다고 버틴 결과 남편의 요구대로 한 집에 살지만 남남처럼 지내다 내년 5월말에 위자료를 주면서 갈라서자는 제의에 저는 찬성했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시장갔다, 가게갔다, 밤늦게 귀가하여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해가면서 한 집에 산다는 것은 제겐 너무 큰 고통이었습니다.
가게도 신경 써지지 않고 온통 남편 생각뿐이었습니다. 난 이렇게 뼈빠지게 고생만 하는데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친구들 만나고 여자 만나고. 별의별 생각으로 가게를 할 수 없어서 결국은 휴식을 취하고 싶었습니다. 한 달이라도 저에게 평화만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피정의 집을 찾던 중 97년 8월 26일 밤 8시 20분경 성모님의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오면서 어떤 기적을 바란 적도 없었으며 어떤 징표를 보여 달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제마음에 평화를 안고가고 싶었을 뿐, 그러나 저는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기적을 보게 된 것입니다. 97년 8월 27일 성체가 십자고상에서 내려 오신 광경과 율리아 자매가 배가 불러오면서 괴로워하는 모습 그러다가 외국 신부님이 십자고상에서 내려오신 성체를 율리아 자매 배 위에 대고 기도를 해 주시니 예전처럼 원래대로 되어가던 자매님 모습, 저는 어리둥절해 무아지경에 빠진 듯 싶었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려 그냥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지, 그것은 저의 회개를 통한 은총의 눈물임을 알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정의 파탄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나주를 떠나 29일 오후 2시 40분경 영등포역에 도착했으나 집에 가기가 싫었습니다. 또 다시 무서운 남편의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아 다시 어디론가 떠나려고 여러곳에 전화를 했으나 다시 갈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들에게 엄마 도착했다는 얘길 할려고 전화를 했는데 뜻밖에 남편이 받았습니다. 너무 부드러운 음성, "빨리 집으로 와." 그래서 집에 도착하니 수고했다면서 저를 따뜻하게 포옹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전 울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남편 품에 안겨서...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1997년 9월 18일
서울 서구 화곡4동 464-21 정안빌라 302
유숙희(아녜스) T.(02)651-7681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우리 부부를 화해시켜주신 나주 성모님 


정노현(루까), 유숙희(아녜스)


우리 부부는 집안과 개인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수 개월에 걸쳐서 심각한 갈등속에서, 부부지간이면서도 더 남남같이 지냈고 더욱이 서로 더 이상 부부이기를 원치 않아 끝내는 가정법원에까지 가서 모든 이혼수속을 밟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완전히 이혼이 성립될 단계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TV에서 방영되는 '인간의 생.노.병.사'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인간의 생.노.병.사에서 오는 자연의 섭리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맘속에 걸려있던 어떤 문제들이 꽉 막혀 있다가 뻥 뚫리는 듯한 어떤 힘을 느꼈다. 왜 이렇게 내 맘이 정화될려고 하는가? 하는 생각이 거듭되는 동안 나는 또한 맘이 차분해졌다. 언뜻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에다 나도 모르게 금년 9월 1일부터는 좀더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구상의 계획을 적어갔다. 큰 노트 한 페이지에다 큰 타이틀의 계획과 세부실천 계획도 적었고, 실제 실천도 할 각오를 하였다. 그날은 나도 모르게, 한 동안 고상밑에 있는 촛불에 불 한번 켜지 않았던 성초에다 불을 붙여 오랫동안 못한 기도를 하게 됐다. 정말 알 수 없는 맘이 집사람 아녜스를 용서하겠다고 했고,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결심하게 됐는지 나는 이제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녜스가 나주에 있는 성모님 계신 곳에서 며칠간 기도하면서 (97. 8. 26- 8. 29) 성가정 기도의 응답을 성모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은총의 결과란 것을.... (그 시간이 바로 아녜스가 나주에서 기도하고 있는 시간이었음.)
이제 저의 가정은 물론 아녜스와 저는 나주에 계시는 성모님으로부터 직접 화해를 통하여 이전보다 더 깊은 부부애를 가질 수가 있게 됐으며, 은총을 통하여 저의 부부는 다시 이곳 나주의 성모님의 집에 오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저의 가정을 봉헌합니다.

 

1997년 9월 18일
서울 서구 화곡4동 464-21 정안빌라 302
정노현(루까), 유숙희(아녜스)
T.(02)651-7681

 

 

 이제는 나주의 유언비어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버릴때다.

 권영준(세바스티아노)

나는 1991년 봄 교우들과 피정을 다녀오던 중 한 분의 제의로 나주 성모님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경당에 들어서는 순간 30여명의 우리 일행은 신선하면서도 짙은 장미향기를 맡고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을 마음 깊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후 집사람이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건강하던 아내가 갑자기 진통을 느껴 병원에 가 보았더니 임신에 의한 간 기능 상실로 산모와 태중의 아기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이 순간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하염없는 눈물 속에 나주 성모님을 생각하며 그 동안 잘못 살아왔던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개와 보속과 묵주기도를 끊임없이 바쳤다.
나의 회개로 사랑하는 아내와 태중의 아기가 천국 가기만을 눈물로 애원하며 나주 성모님께 아내와 아이를 봉헌하며 기도했는데 나주 성모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나의 아내와 아이는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아 건강하게 되었고 나와 나의 가족은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가 되셨고 가급적 성모님 집에 자주 가고만 싶었다.
눈물과 피눈물은 물론 온몸을 다 짜내어 향기와 기름을 흘려주시며 나주 성모님을 통하여 불목한 가정들이 변화되고, 냉담자들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며, 불치병자들이 치유됨을 목격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여러 번의 성체기적과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징표들을 보면서 정말로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성모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사랑을 부족한 나의 마음에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모든 분들이 나주 성모님을 통해서 영적, 육적으로 치유되어 하느님을 찬미하여 살게 되기를 바라던 중 그 당시 부천 지구 성령쇄신 봉사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나는 원미동 본당 주임이신 조신부님의 허락을 받아 1994년 11월 24일 부천지구 철야기도회에 율리아 자매를 초청하여 "은혜의 밤"을 갖게 되었다.
그 날 자매님은 심한 고통 때문에 조금 늦게 성당에 도착하였지만 자매님의 힘있고 은혜로운 성모님의 메시지 전달과 기도로 많은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회를 했고 성당 안은 이곳 저곳의 우는 소리로 분위기마저 숙연해 졌었다.
마지막으로 파견미사와 마침 기도가 끝나고 자매님이 성당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조호동 바오로 신부님께서 향유천을 들어 보이며 "율리아 자매님 것 아니예요?"
하자 율리아 자매는 "제 것이 아니예요."하고 성당을 나가셨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누구나 다 향유천을 갖고 싶어하는 것을 보아왔기에 "신부님께서 가지시고 기도 많이 하셔요."하며 율리아 자매를 배웅하기 위하여 따라나갔다.
며칠 후 율리아 자매를 도와주는 미카엘라 자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데 "조 신부님께서 갖고 계신 그 향유천은 나주 성모님께서 마지막으로 향유를 흘려주실 때 성모님상 발아래 깔아 놓았던 천인데 그 당시 향기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향유가 많이 묻혀져 있었기에 평상시 율리아 자매가 좋아하던 성경구절인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이 있는 책갈피에 끼워 놓았다."고 하며 그날 저녁 기도회 후 성경책을 챙기면서 자신의 실수로 "그 귀중한 향유천을 빠뜨렸으니 조신부님께 말씀드려 그 향유천을 받아 달라."은 부탁 전화였다.
나는 조신부님을 방문하여 그 전후 사정을 소상하게 말씀 드렸는데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님이 직접 전화하지 않고 대리로 부탁해서 했으니 향유천을 돌려줄 수 없다."고 하셨다. 그 향유천은 율리아 자매의 강론이 끝난 후 미사준비를 하시던 수녀님이 강론대 아래에서 주웠다고 하시며 조신부님께 드린 것이다.
조신부님은 여러 가지 향수병을 꺼내시어 향유천에서 나는 장미향기와 향수병에서 나는 장미향기를 비교하였으나 향유천의 향기와 똑같은 향기를 찾지 못하자 신부님은 "잘 아는 어떤 젊은 자매로부터 같은 향기를 맡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율리아 자매가 장미향기 나는 천조각들을 옷에다 깁고 다니다가 그 중 하나가 떨어지자 은폐하려고 '자기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향유천 때문에 장미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냐?"라고 의심하며 판단하기에 평소에 내가 늘 간직하고 있던 똑같은 향유천을 보여 드리며 장미향기에 대해 여러 가지 경험한 실 예를 들어가며 이 향기는 성모님의 사랑이며 우정이자 현존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정당한 상황설명을 해 드렸으나 조신부님께서는 나로서는 차마 상상하기 조차 힘든 표현들도 서슴없이 하시기에 '성모님은 신부님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내 사제라고까지 하셨는데 어떻게 저럴수가...' 마치 내가 변명이나 하러 온 죄인이나 된 듯하여 대화를 중단한 채 '성모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사제관을 나왔다.
그 후 1994년 12월 1일 신부님께서 목요일 철야기도회에 모인 신자들에게 향유천을 들어 보이시며 "확실치는 않지만 이런 천을 온몸에 지니고 있으면 장미향기가 나지 않을까...?하며 장미향기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나 이러다가 성모님께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라고 강론 말씀을 마치셨다.
강론 후 나주 성모님의 사랑을 체험한 많은 신자들이 너무 마음아파하며 울기까지 했다.
그 후 조신부님은 여러 신부님들과 신자들에게 "율리아의 강론까지 중단시켰다."은 등 근거 없는 증언을 하여 여러 가지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사제님들을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어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율리아 자매는 "신부님들까지도 부족한 이 죄인때문에 판단죄를 짓고 있으니 주님께서 이 장미향기를 거두어가 주십시요."라고까지 기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당시 기도회를 직접 주관했던 나의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그래서 나는 진위를 밝히고자 하였지만 율리아 자매는 "그 신부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봉헌하자."고 하셔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우리 모두는 가만히
있으면서 그저 기도만 했다.
위에 언급된 사건은 하등 문제가 될 것도 없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이 사람들의 근거없는 의심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대표적인 예이다.
그 일을 바로 볼 수 있기 위하여 다음의 사항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1. 율리아 자매는 향유천을 몸에 지니고 있는 일도 없을뿐더러, 자매님을 싸고 있는 향기는 향유천과는 무관한 일이다. 성모님께서 율리아 자매에게 주신 향기가 때로는 약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해지기도 하는데, 특히 함께 묵주신공을 할 때 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향기가 보통 신선한 장미꽃 향기인데, 향유천의 향기를 맡아 본 사람은 향유천의 향기와 장미꽃 향기가 똑같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향유천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여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향유천의 향기는 보통 가까이서 맡아야 느낄 수 있는 정도이며, 그 향유천의 향기로 인하여 그렇게 강한 향기가 난다든지 경당이나 성당 전체가 가득 찬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 성경갈피에 끼워놓았던 향유천이 없어진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율리아 자매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 것이 마치 고의로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애매한 사람을 억울하게 잡아매는 것이 된다.
그때까지 이미 향유천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은 율리아 자매가 자기의 성경 갈피에서 빠진 것을 모르고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향유천은 다 같은 모양과 크기이기 때문에 아마 누군가가 떨어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한다. 이는 우리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갑자기 묵주나 볼펜이나 지폐를 주워서 당신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쉽다.
거기에 억지로 고의가 있었다고 상상하고 단정하여 율리아 자매뿐 아니라, 성모님께 누를 끼치는 경솔한 판단을 내려서야 되겠는가.

3. 나주 성모님께 지금까지 향유 및 향기름 주신 것은 율리아 자매를 직접 통해서 뿐만 아니라, 나주 성모님 메시지 전파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주셨다.
나주의 성모님 상을 통하여 주신 향유와 향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향유와는 관계없이 경당에서 기도회 시간 동안에 강한 향기가 경당 전체를 채운 예는 수도 없이 많았다.
율리아 자매가 경당 안에 없을 경우에 강한 향기가 난 적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 상을 찍은 사진에서 아직도 계속하여 향유가 흘러나오고 진한 향기가 나고 있는 경우들도 있고, 또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과 신문과 사진 등을 우편으로 받은 사람들이 강한 장미 향기를 받고서 혹시 우편물에 향수를 뿌려서 보낸 것은 아닌가하고 전화로 물어오는 경우들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주 성모님께 대하여 장거리 전화로 설명해 주고 있을 때 듣고 있던 사람이 강한 장미 향기를 맡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나주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다가, 또는 증언을 쓰다가
장미 향기를 맡고 또 향기와 더불어 육신병의 치유까지 받은 예도 많이 있으며 향유천으로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고 있다.
그런데 이 계속되는 수 많은 향기의 기적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그 많은 성모님의 사랑의 징표들이 율리아 자매나 그의 협력자들이 조작을 한 것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너무나 억측이고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체에 대하여 세계 많은 이들이 성체 신심이 깊어지고 주교님, 성직자, 수도자들까지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조작이라느니, 쇼를 했다느니, 여러 가지 근거 없는 소문들이 계속되어 나주에서 은혜 받은 이들까지도 혼란에 빠져 신앙을 잃어 가는 것을 볼 때 너무 안타까워 나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진실임을 확실하게 증언하고자 이 글을 써 본다.
1997년 8월 27일날 율리아 자매님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십자고상쪽에서 성체가 내려오시는 장면을 함께 참석한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비디오에 잡혔음은 바로 조작이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전에 나주 성모님 피눈물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옷을 벗고 행패 부리던 부천의 인베드로의 사건이 나주 성모님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평화신문에도 게재했건만 지금도 나주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이들과 향유천 사건에 대한 진상과 수천명이 목격한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체의 진실성을 증언하는 바이며 이 증언은 사실이고 추호도 거짓이 없음을 주님앞에 맹세한다.
"너희가 쌓아 놓은 공로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남을 헐뜯고 비판하며 작은 일에 소홀히 하면 그 공로가 하나씩 허물어지고 만다.
입을 열기를 더디하고 혀를 지혜롭게 다스리도록 하여라. 남을 판단하고 싶어질 때 사랑으로 덮어 주는 것도 하나의 공덕이 된다." (나주 성모님 메시지 57쪽과 92-93쪽 참조.)
마지막으로 전 세계의 많은 신자들이 한국 나주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데도 유독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와 축복의 손길에 대하여 경박하고 냉담한 태도로 보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 생각해 봐야 하겠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당신의 교회에 맡기신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유래하는 온갖 오해와 무리한 이론적 추측과 하느님 앞에 무지한 인간적 논리에 빠져 하느님의 메시지와 초자연적 신비를 멀리하고 경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서도 나주 성모님께 대한 여러 가지 터무니 없는 왜곡된 소문과 교만으로 얼룩진 억측들이 나돌고 있어 많은 신부님들까지도 소문의 진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진실로 영적 존재를 믿는다면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흐리게 하고 변질시키려는 마귀들의 존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 전 정말 나주 성모님이 진짜였는지 몰랐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지의 교만과 하느님 뜻에 둔감해져 무디어진 마음이 하느님 앞에 진정 죄악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왜 우리는 하느님이 많은 것을 보여 주시며 당신의 뜻을 전하려 하시는데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일까.
"사탄은 너희를 내 사랑 안에서 끊어 놓기 위하여 너를 쓰러뜨리려고 항상 올가미를 놓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주 성모님 메시지 336쪽)
이 세상의 암혹이 깊어 눈이 멀고 귀가 멀었어도 밤이 깊음은 성모 성심의 승리의 때인 동트는 여명이 밝아 오는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성모 어머니께서 하신 말슴이기 때문이다.
 

1997년 10월
부천시 소사본 2동 82-4
권영준(세바스티아노)
T.(032)347-1230-1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성교회에 맡기신 계시 진리 전반에 대하여, 특히 성모 신심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공적 계시에 대한 바른 인식과 확고한 믿음이 없이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대한다면 엉뚱한 추측과 그릇된 결론에 달하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지와 징표를 논하기에 앞서서 성모님께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치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모님 공경이 예수님 공경을 방해하고 감소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 정반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할 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끔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성모님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 생각할 때 자칫하면 그분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게 되기 쉽습니다. 반면,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있으면, 성모님을 통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신, 구체적이고 친근감이 가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성모님을 멀리하면, 천주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 사이에 거하고 계신다라는 개념이 모호해집니다. 이는 마치 보물 상자를 찾으면 보물을 얻기 쉽고, 사과 나무를 찾으면 사과를 얻기 쉬우며, 유전을 찾으면 석유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이치와도 같을 것입니다.
천주 성자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셨지만, 성모님을 통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천주님의 강생이 없었다면, 십자가를 통한 인류의 구원도 부활도 없었을 것이므로,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는 필수적인 협력자이시고 도구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마음은 항상 당신의 아드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또한 당신의 아드님께서 피흘려 구속 (救贖)하신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또 성모님의 마음은 하느님께의 흠숭과 순명과 겸손으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생활할 때,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주시고 겸손과 순명과 애덕에의 길로 이끌어주시지 않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이는 마치 불 옆에 가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고, 아기 오리들이 어미 오리를 따라다니다가 저절로 헤엄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천주 성자의 강생 도리를 깨우쳐 주시는 성모님

우리는 성모님을 "천주의 모친"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우리가 성모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높고 영광스런 호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절대적으로 확실한 이유가 없이는 그런 엄청난 호칭을 그 어느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고 또 사용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성모님께서 과연 참으로 "천주님의 어머니"이 되시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2천년 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분, 성인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만든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들 예수님께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중간 쯤에 속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중간 쯤에 속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데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가 구원의 길을 바로 걸어갈 수 있기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직 성교회의 가르치심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참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천주 성자 한 분의 인격체 안에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인간이신 예수님이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한 분이신 천주 성자이신데 그 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게 결합되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인성만의 모친이시다.'라고 하는 주장은 모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그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천주 성자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모친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와 성모님의 호칭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서 천주님의 어머니이시다."라고 할 때와 "성모님께서 천주님의 모친이 아니시다."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 대한 이해가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천주님의 모친"으로 믿는다면, 천주 성자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참으로 인간으로 강생하셨다는 도리를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이 되지만, 성모님께서 천주 성자의 모친이심을 부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예수님의 한 인격체 안에 천주성과 인성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신비입니까?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지키고 계셨듯이 지금도 천주 성자의 강생 도리를 확고히 지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천주님의 모친"이라고 부를 때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금방 깨우쳐주시며 따라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천주 성자 강생의 도리를 바로 깨닫게끔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깨우쳐 주시는 성모님

우리는 또 성모님을 "보속의 협조자" 또는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성모님께서 또 한 분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아드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엮어나가시는 모든 과정, 즉 강생과 수난에 성모님께서 참여하시어 아드님을 도우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원죄를 짓는데 에와가 필수적인 보조 역할을 했듯이, 성모님께서도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는 데에 필수적인 보조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모님을 "보속의 협조자" 또는 "공동 구속자"라고 부를 때마다, 성모님께서는 또 하나의 엄청나게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작은 "보속의 협조자"요 "공동 구속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특히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운동 이후로 너무나 잊혀져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변한 적이 없으며, 또 수많은 성인 성녀들께서는 꾸준히 그 진리를 몸소 실천하여 지켜왔습니다.
루터는 신앙만으로써 구원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우리가 신앙을 토대로하여 겸손과 자아 부정과 사랑과 희생의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우리가 성화되고 그리스도께로부터의 은총이 모든 이들에게로 흘러들어가고 교회가 완성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으로 이루신 것을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도 그 분의 은총에 의지하여 그 분을 본받아 이루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성 바오로 종도께서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 받음을 기뻐하며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웁니다."라고 하심으로써 (골로사이 1:24)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수난이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서도 계속되고 완성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 중에서도 성모님께서는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강생과 생애와 수난에 참여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서 "보속의 협조자"이 되시며 "공동 구속자"이 되심을 깨달음으로써 우리가 걸어야 할 구원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 즉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더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1964년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성모님을 정식으로 "교회의 모친"이시라는 칭호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세우셔서 당신의 진리와 은총 및 성사들을 위탁하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인류 구원 사업을 세상 끝날까지 수행해 나가시는 당신의 신비체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주님을 도와 이 사업을 함께 밀고 나가시는 "보속의 협조자"이시므로, 교회 안에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 필수적으로 개입하여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역할은 성인들의 생애를 보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성인들이 가르치셨듯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은총의 보고 (寶庫)이시고 통로이시므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전례와 성사와 신심 행사와 기도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성화 과정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역할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

주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 즉 진리와 성사와 교도권 및 사목권 등을 당신의 교회에 위임하신 다음에 "나머지는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라."하시고 멀리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항상 교회 안에 계시고, 천주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해주시고, 또 때로는 뛰어난 성인을 보내 주시거나 메시지와 징표 등의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시어 당신 자녀들에게 경각심을 주시고 격려하여 주시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구약 시대에도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듯이, 신약 시대에도 특별히 보속의 협조자이시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통하여 메시지와 징표들을 주고 계십니다. 메시지와 징표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성모님께서 마귀의 머리를 실제로 밟아 부수는 역할이 교회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전개되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531년에 성모님께서는 멕시코에서 당신의 메시지와 징표를 통하여 그 당시 우상 숭배에 빠져서 매년 수만명 씩 사람을 잡아 그 심장을 꺼내어 우상에게 제사바치던 천만 명에 이르는 멕시코 주민들 거의 전부를 구출해 내셨습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 전에도 가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고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가 주어지고 그 지방 주교님을 위시하여 모든 멕시코 주민들이 성모님의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였을 때 온 나라 백성이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멕시코에서 발현하실 즈음, 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성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세계는 점점 더 인간 중심 주의와 물질 주의에 빠져들어갔고 도덕적 타락과 인간 존엄성의 박탈과 전쟁 등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이러한 위기로부터 구하시기 위하여, 성모님께서는 특히 1830년 블란서 빠리에서의 발현을 통하여 기적의 패를 만들도록 지시하였고, 그 후로도 각처에서 거듭 발현하시어 인간들을 타락에서 건져내고 바른 신앙에로 이끌도록 애써오고 계십니다.
한국 나주에서 지난 1985년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우리가 위와 같은 역사의 흐름을 알고 또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맡기신 역할들에 대한 진리들을 바로 인식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메시지들의 심도 (深度), 그 메시지들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밀접한 일치, 그리고 이에 동반하는 놀라운 징표들을 살펴볼 때, 이는 바로 지금까지 교회 역사의 전반에 걸쳐 계속되어 온 구세주의 협력자로서의 성모님의 활동의 극치요, 종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한국 나주에서 이와 같은 특별한 계시들을 주시는 것은 온 세계와 전체 성교회를 위한 확고하고도 중대한 목표를 위해서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와 축복의 손길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경박하고 냉담한 태도로 지내오지나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당신의 교회에 맡기신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유래하는 온갖 오해와 무리한 추측에 빠져서 하느님께로부터의 거룩한 메시지와 징표들을 멀리하고 경시하는 우 (愚)를 범하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특히 가끔 나주 성모님께 관하여 터무니없는 왜곡된 소문들이 돌고 있는데, 이러한 꾸며낸 소문들에 귀를 기울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은 주님과 성모님께 배은망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함과 거짓 증언 때문에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마귀가 이를 방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소문을 퍼뜨려 우리가 참된 메시지를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거짓으로 모함한다고 하여 거짓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며, 거짓 메시지나 잘못된 판단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거짓이 진리로 변하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느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겸손되어 그분의 진리가 밝게 빛나고 그분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려야 겠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에 대한 공적인 판단은 교회에서 내려주실 것이고 모든 신자들은 이에 순명해야 할 것입니다. 공적인 판단 이전에도 우리 각자가 겸손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성모님과 일치하여 나아감으로써 많은 결실들이 더 맺어지고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성취되어 나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공적인 인정은 그러한 성령의 결실들에 대한 확인이 될 것이며 또 이는 성모님의 손을 잡고 힘껏 노력한 모든 작은 일군들에게 보람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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