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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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성사에 대한 소고(小考)

 

 1.  외면되는 성체 성사에서의 주님의 실체적 현존

몇 년 전 필자는 미국의 어느 가톨릭 출판 기관의 책임자와 통화를 하다가, "성체에서 피가 흐르는 현상은 가톨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미신적인 일이다,"라는 말을 그분에게서 들은 일이 있었다.  며칠 후에 다시 통화하게 되었는데, 그분은 자신이 사제였음을 밝히면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몇 개월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큰 성령 대회가 있었는데, 어느 자매님이 그 대회의 연사 중의 한 분이셨던 신부님께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 사진 한 장을 드렸다. 그 미국 신부님은 고맙다고 하면서 받아가셨는데, 저만치 가서 그 사진을 찢어버리는 것을 다른 이가 보았다고 한다. 좀 성격이 다른 예이지만, 한국 동란 때 서울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이 명동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로부터 성체를 꺼내 쏟아놓고는 군화로 짓“M는 독성을 범하였다고 한다.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죄에서 구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저 면병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비신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신자들로부터 냉대와 모욕을 받고 계신다. 1995년 7월 2일 나주의 율리아 자매는 자신이 보았던 환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많은 사제들이 죄 중에서 미사를 드리고 많은 수도자들과 대다수의 평신도들이 죄 중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거리낌없이 먹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 여러 나라들에서 실시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의 숫자가 30%도 채안되는 경우도 많고, 성체 성사에 주님께서 실제로 계심을 믿는 신자들도 소수에 불과함을 볼 수 있다. 현대의 많은 신자들 사이에 교리 지식이 결핍되어있음은 전반적인 현상이겠지만, 특히 이 문제는 성체 성사에 관하여 가장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거룩한 성체 성사에 대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바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경솔하게 이 성사를 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2천년 전에 주님께서 성체 성사에 대하여 예고해주실 때부터 이미 혼란이 있어왔다. 주님의 설명을 들은 많은 유대인들은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더 이상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요한 6장 60, 66절).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1336조)에서도 "수난 예고가 제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듯이, 성체 성사에 대한 첫 번째 예고도 제자들을 분열시켰다. . . 성체와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그것은 동일한 신비이며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요한 6장 67절), 주님의 이 질문은 오랜 세월을 통해 울려 퍼지고 있다,"라고 되어있다.  

 성체 성사에 대한 논쟁은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되풀이되어 왔으며, 지금도 크리스챤들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나주에 관한 논의 역시 그 주요 부분이 성체 성사에 관해서이다.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서는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사 위원회의 주요 교의 신학자께서는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부정된 진짜 이유는 개신교와의 일치라고 하는 대전제를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셨다. 나주에서의 일들을 계기로 더 활기를 띄고 있는 성체 성사에 관한 토론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 각자에게도, 가톨릭 교회 전체를 위하여서도 지극히 중요한 사항이다.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성체 도리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이 변질된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권세가 당신의 교회를 쳐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주셨으니, 반드시 진리가 유지될 것이고 승리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2.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그러면, 지금 과반수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일부 신학자들과 사제들조차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성체 성사에 관하여 교회에서는 확실한 가르침을 베풀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성체 성사에 대한 확실한 진리는 아직도 많은 논쟁을 더 거쳐야만 밝혀질 수 있는 사항인가?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교회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무류지권에 의거한 가르침들 중에서 핵심적인 일부이다. (아래에 "저주받을지어다,"라는 문구는 라틴어로 anathema sit을 번역한 것으로서, 누구를 저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어떤 오류의 사상을 단죄함으로써 그에 관한 진리를 확정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1)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 변화(Transubstantiation)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2)

 

이로써,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공존한다라고 하는 루터 등의 주장이 단죄된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및 18세기의 여러 신학자들(Emmanuel Maignan, John Saguens 등)은 성체 성사에서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물리적인 현실임을 부정하고 단지 주관적으로 그렇게 환상처럼 보여질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러한 주장은 위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1.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 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3)

 

따라서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던 후스파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의 주장이 배척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체의 작은 조각들과 성혈의 한 방울에까지 깊은 경외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뜻한다. 만약 성체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만 존재하신다라고 생각한다면 성체와 성혈을 소홀히 취급하게 될 것이다.  

 

 2. 만일 누구든지 성체 축성이 끝난 후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성체 성사 안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말하든가, 성체 성사가 사용 중일 때 즉 영해질 때(그 전도 아니고 그 후도 아니고)에만 계시며, 보관되고 있거나 영성체 후에 남은 축성된 면병과 그 조각들에는 주님의 몸이 참으로 남아있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4)

 

 3. 만일 누구든지 거룩한 성체 성사에서 하느님의 독생 성자께서 흠숭지례(欽崇之禮)로써 외적으로도 공경받으실 수 없다라고 하든지, 따라서 특별히 경축적인 의식으로써 공경드려서는 안된다라든지, 성 교회의 훌륭하고도 보편적인 의식과 풍습에 의거하여 거동을 할 수 없다라고 한다든지, 사람들이 공적으로 흠숭할 수 있도록 현시되어서는 안된다든지, 성체를 공경하는 이들은 우상 숭배자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6)

 

그리고 위와 같은 교회의 정통 가르침은 현대에 와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1965)에서도 재확인되었다. 동 회칙에서 바오로 6세께서는 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함으로써 그리스도 전체께서 "물리적인 현실"로서 신체적(身體的)으로 현존하심을 말함이 없이 단지 빵과 포도주가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고 새로운 목적성을 지니게 된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려는 현대주의적 신학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서 화란의 신학자들의 중심으로 빵과 포도주의 변화를 실체 상의 변화가 아닌, 의미 상의 변화, 목적성의 변화로서 설명하는 경향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부엌칼이 음식 장만에 쓰이면 부엌칼이지만, 범죄를 위하여 쓰이면 무기가 되는 것처럼, 빵과 포도주는 그대로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 의미와 목적이 변한다라고 하는 주장을 폈다.)  

 

3.  성체 성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천주 성자 강생의 현실

결국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의 요점은 성체와 성혈의 외양은 빵과 포도주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천주성과 영혼과 몸과 피를 지니신 완전하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확실하게 믿고 생활화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이다. 따라서 우리는 2천년 전에 주님을 실제로 가까이서 뵙고 따랐던 제자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 하면, 우리 역시 주님과 실제로 함께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있다. 성체로서의 주님은 2천년 전처럼 외적으로 말씀하시거나 활동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외적인 활동을 연장하는 것이 성체 성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체에서의 주님은 물리적인 실체를 포함하는 현존을 통하여 우리와의 내적인 대화와 일치를 원하신다. 주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진리를 계시하시고, 인간 생활을 실제로 살으심으로써 이를 성화하시고,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수난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되풀이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과거 속으로 흘러가고 만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세상 끝날까지 모든 곳의 인간들에게 현실로서 다가오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85조 참조). 성체 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실체적인 현존이 지속되며, 미사 성제를 통하여 주님의 희생 제사가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화되며 그 제사로부터의 은총이 그들에게 실제로 흘러가게 된다. 고해 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수난 공로에 의지하여 주님의 권위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실제로 사해지게 된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참으로 전해지게 된다. 이러한 인류 구원을 위한 천주 성자의 강생과 구속활동의 현실이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성체 성사는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4.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이유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체 성사에서 왜 구태여 당신의 실제의 모습을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가리고 계실까?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째, 성체는 바로 강생하신 천주 성자이시므로, 우리가 결코 함부로 대해드리거나 모실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성체 안의 주님을 믿고 인정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며 그분을 충실히 따르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 본래의 영화롭고 위엄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신다면 신앙과 사랑이 없는 경우에도 모든 이가 그분 앞에서 부복하게 될 것이며, 이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시면서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진정한 신앙과 사랑을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진심을 알기 위하여 짐짓 아주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과 사랑의 눈으로 볼 때, 빵과 포도주의 초라한 형상이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계명을 어겨서 주님께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등을 돌렸다면, 먼저 진정한 통회와 고해 성사로서 자신의 영혼을 씻고서 성체를 모시는 것이 그분께 대한 마땅한 예의가 될 것이다.

  둘 째, 빵과 포도주의 외양을 취하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을 쉽게 영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육신을 양육하는 음식이니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는 성체의 외양이 빵과 포도주인 것은 매우 적합한 일이 될 것이다.

 

5.  "성체는 지속적인 기적"

1994년 11월 24일 당시 주한 교황 대사이셨던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께서 교황님의 대리자의 자격으로 나주에 오셨을 때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희를 오늘 특별히 성체의 신비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영웅적이며 충실한 증인으로 주님과 나의 현존을 체험케 하는 이 장소에 불렀으니 길 잃은 양들을 어서 구하도록 도와다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인 성체의 신비는 바로 마르지 않는 샘이며 구원의 약이라고 이미 내가 몇 번이나 말했건만,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 준비하는 자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성체는 바로 생명이며 영속적인 샘물이며 만나이며 우주 창조의 기적과 구속의 기적에 뒤지지 않는 지속적인 기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면 수많은 나의 자녀들이 지옥의 길로 향하지는 않았을 것을. . . 이렇게 성체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의 주역인데도 이미 수많은 자녀들로부터 모독과 모욕과 능욕을 받으며 짓밟히고 있으니, 어서 내 사랑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더욱 강하게 전해져 성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새로운 성령 강림의 ‹š를 단축시켜 맞이해야 한다."

 

위의 말씀 중에서 특별히 여기에서 논하고저 하는 부분은 성체가 "지속적인 기적"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어째서 성체가 지속적인 기적이 되는가? 기적이란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으로 인하여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사 때 사제의 축성으로 인하여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주님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하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기적이다. 자연적으로나 사람의 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적의 변화는 사제에 의한 축성 때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지속적인 기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보통의 경우 빵의 외양은 빵의 실체와 결부되어 있고, 포도주의 외양은 포도주의 실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정상이다.  다시 말해서 빵은 빵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성체 성사에서는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빵과 포도주의 실체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어떤 물건의 실체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빵과 포도주의 외양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가 동시에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의 몸이요 피라는 뜻이다. 천주성과 영혼, 살과 피를 완전히 지니신 살아계신 주님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자연적인 차원에서 전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자연적으로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뿐 아니라, 일순간이나 짧은 기간만이 아니라 성체 성사에서의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지속되는 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 또한 지속되고 있으니 이는 지속적인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이 있어야만 지탱될 수 있는 일이다. 즉 성체 성사에서는 성체나 성혈이 영해지기까지에는 지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하느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하심이 지속되고 있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대할 때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에 의하여 계속되는 기적을 대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성모님께서 성체를 "지속적인 기적"이라고 부르신 것은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지속되는 기적에 의하여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지속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치유하고 성화하고 계신다라는 뜻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주의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한 기적들은 위에서 언급된 "지속적인 기적의 상태"가 정지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예수님의 실체 이외의 어떠한 실체에 결부됨도 없이 성체 성사의 외적 표지로서 계속되는 기적을 중단하시고 그 외적 표지에 가려져 있던 성체 성사의 내적인 현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실을 밖으로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 나주 등지에서의 성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성체 기적을 보여주시는 목적은 인간들의 믿음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도와주시기 위함이다. 이에 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성체 기적은) 기만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적적인 현상을 통하여 성체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신학대전 Question 76, Article 8)

 

6.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가?  

먼저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 1.2 (3)항을 살펴보기로 한다.

윤 율리아 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 (DS 752, 802, 1321, 1642, 1652; Mysterium Fidei 참조)에 어긋납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들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하에 이루어지는 성체 성사에 대한 믿음에 도움이 되는 표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혼란을 야기시키는 표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지문 상의 판단의 근거로 언급된 원전은 이미 위에서 인용된대로,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한다라고 하는 트렌트 공의회의 가르침이다 (DS 1652). 즉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실체 변화만 있고 형상의 변화는 없다라는 뜻이다. 위의 공지문 조항에서 말하는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이라는 뜻, 즉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축성이 끝난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라는 뜻은 트렌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지않다. 공의회의 가르침에서는 사제에 의한 축성 때 실체 변화만 있고 외형 변화는 없다라는 뜻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주 등지에서 성체의 형상이 살과 피의 형상으로 바뀌었다라고 하는 것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이 아니고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하심에 의해서 그리 되었다라는 뜻이다. 사제의 축성의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의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 축성의 효과에 관한 교리를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에 적용하여 이를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것은 사제의 축성이 끝난 이후였으며 사제의 축성 행위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은 9세기 이태리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은 성체 안에 주님께서 참으로 계심을 의심하면서 미사를 거행하던 사제가 축성 기도를 바치자 말자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기적은 위에 언급된 교리에 어긋나는 것인가? 란치아노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일어난 것은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실체 변화뿐이었다. 성체와 성혈의 외형이 변한 것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하심에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사제의 축성이 있자 말자 성체와 성혈의 외형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것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 성사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거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의 외형을 특별히 거두시고 그 외형에 가려져 있던 내적인 현실, 즉 주님의 몸과 피의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은 진실에 위배되는 것일 수 없다. 그 기적이 성체 성사의 내적 현실을 올바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주님의 살과 피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외양, 즉 꽃나무라든가, 돌, 동물 등의 모습으로 변했다면 이는 진실된 기적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닌 다른 것들은 성체 성사의 내적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7.  나주의 경당에 내려오신 성체가 축성되지 않은 면병일 수 있는가?

나주에서 있었던 두 번째 종류의 성체 기적은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위에서 내려오신 기적이었다.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이 오셨을 때 두 번, 1995년 7월 1일 철야 기도 때 일곱 개의 성체가 한꺼번에 내려오시고, 1996년 7월 1일에도 여러 개의 성체가 율리아 자매의 입 속으로 강림했으며, 1997년 6월 12일 김 창렬 바오로 주교님께서 오셨을 때 한 번, 그 해 7월에 로마에서 오신 주교님 앞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해 8월 27일 파 신부님께서 오셨을 때 한 번, 도합 7번 성체가 내려오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내려온 것이 성체가 아니라 보통 면병일 수가 있는가? 첫 째, 사람이 이런 일을 조작하였다면 보통 면병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고 비디오 및 사진들에 찍힌 자료들에 의거하면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다는 하등의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둘 째, 마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마귀가 성체를 모셔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마귀가 보통 면병을 다른 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런 혼란스런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으로 믿지만, 가능할 수는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나주에서 내려온 것이 마귀가 다른 곳들에서 옮겨온 면병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

 먼저, 1995년 7월 1일에 내려온 7개의 성체가 대주교님의 명에 의하여 영해졌는데 맨 마지막 성체를 영한 율리아 자매의 입 속에서 그 성체가 살과 피의 형상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연관하여 그 곳에 있던 병들어 죽어가던 여자 아기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즉 위에서 내려온 것이 축성되지 않은 보통 면병이 아니라 진정한 성체였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성체로부터 채취한 피의 자국을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 DNA 검사 결과 사람의 피임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성체가 내려오시기 전에 보통 율리아 자매가 십자가 상에 달려 피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으며, 그 성혈이 하얀 성체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또한 진정한 성체가 내려오셨다라고 하는 율리아 자매의 증언이 된다. 공지문의 1.2항에서 사제의 축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성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 흘리시는 성혈이 성체로 변한 것은 실체 변화가 아니고 외양의 변화일 뿐이므로 사제의 축성이 필요하다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교회 역사 상에 많은 횟수에 걸쳐 일어났던 비슷한 기적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사에 의해서 어느 성당의 감실로부터 성체가 모셔져왔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하신 것임이 인정된다면, 하느님께서 성체가 아닌 보통 면병을 보내주실 수는 있는 것일까? 이는 하느님의 진실성에 의거하여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하면, 성체로서 인식될 상황에서 성체가 아닌 면병을 보내셨다면 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무한히 진실하시다라고 하는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나주의 경당에 내려온 것이 참으로 성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결론이 될 것이다.

 

8.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은 "의도적"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나주에 고위 성직자들이 방문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체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이는 고의적이었다라는 의심을 일으키게 한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적이 우발적으로 일어나야만 참된 기적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 소위 "기이한 현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 역사를 이끌고 나가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거한 징표들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징표, 즉 기적들이 참된 것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 즉 그분의 의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느님의 뜻하심이 없고 계획하심이 없고서는 참된 기적이 있을 수 없다. 천주 성자의 강생하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 라자로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모님의 몽소승천, 성모님의 루르드 발현. . . 그 어느 하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면, 교황님의 대리자라든가, 주교님들에게 특별히 징표가 주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교회를 대표하고 신자들을 사목하시는 그분들에게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신의 뜻을 전하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의도적"인 것 같다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에집트 왕 파로에게 거듭하여 기적을 보여주셨다. 16세기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는 농부였던 완 디에고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 지방의 주교에게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민족 거의 전부가 우상 숭배를 버리고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게끔 이끌어주셨다. 따라서 지금까지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께 특별한 징표들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나주에서 밝혀주시는 주님의 뜻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9.  영성체 방식에 대한 신자들의 선택의 자유

성체 성사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사제직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성체를 혀로만 모시게 되고, 양형이 아닌 성체만을 모시게 되고, 또 누룩을 쓰지 않은 면병을 교회 전반적으로 쓰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9세기부터의 일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몇몇 나라들의 주교님들의 요청에 의거하여 교황청에서는 성체를 손으로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는 성체를 혀로 받던 것을 그만두고 손으로만 받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손으로 받을 수도 있다라고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성체를 손으로 받는 것이 거의 완전히 법령에 의한 것처럼 되어있는 현실이며, 때때로 특히 외국 신자들이나 교포 신자들이 자기들의 습성대로 혀로 받으려고 하면 손을 내어놓으라고 요구당하는 일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이에 관련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전 세계의 주교님들께 보내신 회칙: 성체 성사의 신비와 흠숭에 대하여(Dominicae Cenae, February 24, 1980)의 내용 일부를 살펴본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손으로 성체를 모시는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방식은 몇몇 개별 국가들의 주교 회의의 요청에 의하여 사도좌에서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체에 대하여 통탄할만큼 존경심이 결핍된 경우들이 보고되었는데, 이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개인들만의 책임이 아니며, 성체께 대한 신자들의 태도를 주의깊에 지켜보지 않는 교회의 사목자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성체를 손으로 받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 곳들에서 성체를 혀로 받는 방식을 계속하고저 하는 신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 . 성체를 그들의 손으로 만지고 배부하는 것은 신품을 받은 이들의 특권입니다. . . 교회는 분명히 이러한 기능을 사제나 부제가 아닌 이들에게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 .  

 

물론 지방 교회는 교회 운영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 지역의 여건에 맞도록 제반 조치들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핵심 부분인 교리, 성사의 집행 방식, 교회법 등에 있어서는 교황청의 방침과 지도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체를 분배하는 평신도들이 혀에다 성체를 줄 경우 손가락으로 혀를 접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러한 책임을 맡게 된 평신도들에 대한 더욱 철저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10.  결 론

다른 지면들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지금 가톨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과제는 현대주의의 오류들과 풍조를 몰아내고 순수한 정통 가톨릭 신앙이 새롭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시 진리, 즉 교회의 정통 가르침 전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 가르침들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특히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체 도리에 대한 혼란이 극복되어야 하며, 또 성체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며, 주님의 인류 구속 사업에 필수적으로 협력하시는 성모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떤 자매님에게 그의 개신교 친구가 말하기를, "나는 병이 나면 의사에게 가지 의사의 어머니에게 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성모 신심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의사는 우리가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라고 하는 하나의 제한된 목적을 위하여 찾아가게 되는 사람이다. 그 의사에게 우리 인생의 전부를 거는 것도 아니며, 그 의사가 우리 인생 전부를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을 세상 의사에게 찾아가는 것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사나 변호사나 기술자나 상인 등을 찾아가는 사무적이고 제한적인 관계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주님과의 관계는 모든 것을 바치는 전적인 사랑과 충성의 관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국이며 대가족이다. 왕국에는 왕도 계시고 모후도 계시며 신하들도 많이 있다. 가정에는 아버지도 계시고 어머니도 계시며 형제 자매들도 있다. 모후나 왕비가 없는 왕국, 어머니가 빠진 가정의 썰렁함과 결함됨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이신가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거룩심을 가득히 부어주신 분이시니 우리를 주님께로 가장 확실하게 이끌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1999년 9월 8일

성모님 탄신일을 기념하며,  이 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