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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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9일

인천 나 주교님의 증언
 

인천교구 부천 소사 3동 성당에서 율리아 자매가 메시지를 전한다기에 나는 김 라파엘 부부와 함께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하여 갔는데 2000여 명의 교우들이 성당 안에 발붙일 틈조차도 없이 빽빽하게 꽉 들어차 있었다.

본당 신부와 수녀 그리고 참석한 모든 교우가 3시간 30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경청하는 것이었다. 율리아 자매는 웃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면서 자신의 신앙 체험과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영가와 치유 기도로 끝을 맺었다.

인천 교구 서 병섭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를 보러왔는데 86년부터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실천하고 있었으며 눈물과 피눈물 흘리신 성모님의 사진과 메시지 테이프를 본당에 비치해두고 특별 강론과 각 반모임마다 나주 성모님을 소개하고 있다고 하였다.

율리아 자매는 건강이 좋지 않은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였고 나주 성모님 집에서 당뇨병, 심장병, 그리고 류마치스를 완전히 치유 받은 이 곳 교우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였다.

우리 일행은 몇몇 형제 자매의 안내를 받아 나 주교님을 찾아 뵙고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인천 교구청으로 갔다.

교구 사제들과 함께 다락방 모임에 다녀온 주교님은 율리아 자매를 보고서 "여기에까지 찾아 주시니 참 기쁨입니다."라고 인사하셨다. 주교님은 율리아 자매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주교님은 호주머니에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자를 꺼내 보이시는데 매우 닳아 낡은 것이었다. 그리고 성직자 경본 갈피에다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상본을 넣고 계셨는데 그 상본에서 향유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또한 눈물 흘리신 나주 성모님상 앞에서 향유가 배어든 사진을 파신부님으로부터 받아 성무일도에 끼워 놓았는데 그곳은 향유로 젖어 있었고 사진은 암에 걸려있는 미국의 누이 동생에게 보냈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주교님이 매일 기도하실 때마다 그 상본에 입맞춤을 하신다며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복음성서를 현대어로 표현한 주해서이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교회의 신앙이요, 가르침이다"라고 증언하셨다.

우리는 하느님과 성모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교님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이렇게 훌륭한 주교님과 함께 살고있는 사제들과 교우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면서 감탄했다.

 

1992년 1월 10일

인천교구에서 메시지 전달
 

인천 교구 성령 봉사회에서 주최한 철야 기도회에 율리아 자매를 초청하였다. 밤 12시 30분 용현동 본당에서 약 3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자매님은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지하실까지 만원이 되어 수백 명이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너무 고통이 심했기에 함께 간 김 세실리아 자매가 먼저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일어난 기적들, 본인의 치유와 회개를 통하여 얻은 은총에 대한 신앙 체험담을 요약하여 15분간 하였고 곧 이어 율리아 자매의 메시지 말씀이 있었는데 특히 성체의 중요성과 용서에 대한 자신의 체험담을 힘있게 들려주었다.

3시간 30여분 동안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 많은 교우들이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숨을 죽이고 경청하는 모습은 너무나 숙연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강론과 강의를 들어보았지만 율리아 자매가 전하는 말씀처럼 살아있는 강한 생명력이 있는 말씀은 들어본 적이 없다. 치유 기도가 끝나자 자매님은 세 명의 사제들과 손을 잡고 전 교우들과 함께 "마리아의 구원 방주" 성가를 합창했다.

새벽 4시 30분에 철야 기도가 끝나자 우리는 곧바로 서울 여의도 성모 병원에 입원중인 지 학순 주교님을 문병하였다. 율리아 자매를 기다리시는 주교님을 찾아 뵙고 함께 기도하였다. 당뇨로 합병증까지 겹쳐 임종을 준비하고 계신 주교님은 기도 중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하며 힘겹게 기도하셨다.

주교님은 이 나라 이 민족의 민주화를 위해 외치시다 투옥까지 당하신 정의의 선구자, 사랑의 사도이시다.

그런데 그 많은 고통을 겪고 계시다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1990년 1월 14일에 나주에 내려오시어 성모님 집에서 기도하시던 중 성모님 상이 계속 움직이시고 눈물을 흘리시니 손수 성모님 상을 제 자리에 모셨는데 또다시 움직이시자 "성모님께서 다시 앞으로 나오시어 옆을 바라보고 계신다"하시며 또다시 제 자리에 모셔 놓으시고 기도하셨다.

주교님은 나주에서 2주일 정도 기도하고 가셨는데 그 높은 당뇨의 수치가 100으로 다운이 되어 건강을 되찾으셨고 원주로 가신 날도 몇 시간 차로 가셨는데도 도착하시자 산책을 가실 정도로 좋아지셨다. 그래서 광주 윤대주교님께도 자신이 나주에 가서 치유를 받았노라고 말씀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에서 기(氣)하는 두 자매를 데려다가 기를 받으시게 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항문에 된장을 집어 넣어 병이 악화되었는데도 나주와의 관계를 멀게 했으나 고통이 너무 심한 주교님은 "율리아만 찾고 있다"하여 방문 했던 것이다. 그러나 회생은 불가능 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다.

치유 될 수 없다면 부디 선종하여 천국으로 오르시기를 기도한다. 주님! 지 주교님께 자비를...

 

1992년 1월 14일

눈물 흘리신 지 700일째 되는 날

 

나는 나주 성모님의 집에 오면 할 일이 많아 너무 기쁘다.

나주 성모님 소식지에 대한 편집에 관해 김 라파엘 형제와 함께 논의하였던 바 이번 호는 신앙 체험이 하나 더 추가되는 관계로 4면에서 6면으로 증편하기로 하였다.

미사를 청한 율리아 자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각인 오후 3시에 미사를 봉헌하고자 하여 그 시간에 협력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지 700일째 되는 날이기에 미사 중에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주시리라 기대했었는데 율리아 자매는 미사 중에 예수님의 늑방 고통을 받게 되었다.

자매는 오후 3시 15분부터 호흡하기 곤란할 정도로 늑방 고통을 받았으며 우리는 심한 고통으로 많이 부어오른 자매님의 왼쪽과 오른 쪽 옆구리를 만져보았는데 더 놀라운 일은 그리고 나서 우리들의 손에서도 장미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는 자매의 갸륵한 사랑에 대해 곁에 있던 우리에게까지도 덤으로 성모님께서 주신 축복의 향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자매는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로마 군인이 창으로 늑방을 찔렀던 시간이 오후 3시 15분쯤이 아닐까?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