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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수첩과 나주 진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성모님께서 메시지와 징표를 주시는 목적은 어떤 새로운 신앙의 길을 제시해주시기 위함이라든가 또는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에 대한 수정을 가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계시되었고 천주 교회에 위탁되어 가르쳐져 내려오고 있는 진리들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우리가 되찾고 또 이 진리들을 우리의 일상 생활 안에서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성모님의 유일한 목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논하기에 앞서서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 절대선(絶代善)이시며 영원하신 유일신(唯一神), 천주 성삼위(天主聖三位)를 만유 위에 흠숭하며, 경외하며, 사랑하며, 순종한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유일신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진리와 생명과 선과 사랑 자체이시며, 따라서 모든 진리와 생명과 선과 사랑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유래되지 않고서는 참된 진리도, 영원한 생명도, 진정한 선과 사랑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제한되고도 영속될 수 없는 여러 가지 대상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제한된 선들은 자신의 명예, 재물, 학력, 권력, 오락, 쾌락, 또는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어떤 사상이나 자신의 야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선들을 절대선이신 하느님보다 더 우선적으로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는 무관한 별도의 목표로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우매함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매순간 지탱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모른다 하고, 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과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즐기면서도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어떤 집에 들어가서 그 집의 주인은 외면한 채 그 집안의 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 인양 사용하면서 즐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삶의 모든 것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그분의 뜻만을 실천한다는 목적 하에 종속시킴으로써 비로소 우리 삶의 바른 질서가 갖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과 목표들을 하느님과는 무관한 맥락에서 추구할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도 가능하게 되며, 우리의 삶이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모든 좋은 것의 참된 근원이시며,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고 그분의 선을 반영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2.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생(降生)과 구속(救贖)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상의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시어 지성(知性)과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와 오류, 그리고 선과 악을 인식하고 구분할 수 있으며, 또 그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이러한 선택들을 해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하루 엮어가는 세상 삶의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꼬임에 빠진 우리 조상 아담과 에와는 진리 대신에 오류를 선택하고 순명 대신에 불순명을 택하는 죄를 범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초성 생명(超性生命) 즉 상존 성총(常存聖寵)을 잃게 되었습니다.

뿐 아니라, 아담과 에와의 후손들 역시 거듭하여 그들의 지성과 자유 의지를 오용함으로써 인간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다는 것은 무한히 엄위하신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며, 하느님께서 인간 각자에게 부여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무한하신 분을 거스린데 대하여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은 충분한 보속을 할 수도 없는 처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써 천주 성자를 보내시어 인간성을 입으신 그분의 수난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보속하게 하시고, 또 그분의 가르치심과 표양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役事)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겸손되이 실천하는 이는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닫혀졌던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활짝 열린 것입니다.

3.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속 사업.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강생, 즉 천주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 사이에 거하심과 그분께서 하시는 구속 사업이 2천년 전에 그분의 승천과 더불어 완료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에 당신의 진리와 권위와 능력뿐 아니라 당신의 현존(現存) 자체를 위탁하셨으며,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만민에게 가르치고 성세를 주며 당신의 제자로 만들라고 하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지 열흘 후에는 천주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의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여 나가시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 사업의 현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세상 끝날까지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 현실에 참여하는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성장과 완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2천년 전에 유대 나라 사람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오류없는 확실하고도 영원한 진리를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듣고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교회의 성세 성사, 고해 성사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공로와 권위로써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성체 성사를 통하여 살아계신 완전하신 예수님, 즉 육신과 영혼 그리고 신성(神性)을 모두 갖추신 구세주와 실제로 함께 있을 수 있고, 그분을 흠숭할 수 있고, 그분을 우리 안에 모셔서 그분께 일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미사 성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희생 제사가 영속되고 있으며, 또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보속에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사명과 초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특히 그 안의 신앙과 윤리에 대한 가르침들과 7성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인 사제들을 통하여 세계의 어디에서나, 그리고 역사상 어느 시대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와 실제로 함께 있을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분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원 사업이 이처럼 교회를 통하여 실제로 계속되고 있음을 믿는 것이 가톨릭 신앙이며 또 프로테스탄트 신앙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세우신 당신의 지상의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존과 권위와 희생과 진리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째서 천주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느냐?"라고. 사실 잘못을 저지르는 신자들을 보고서 교회를 멀리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신자가 됨으로써 성화(聖化)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며, 일평생 동안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지하여 자아, 세속, 그리고 마귀의 세 가지 적들과 끊임없이 싸워 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 싸움에서 실패할 때도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또 고해 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노력을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교회를 밀과 잡초가 함께 자라는 밀밭에 비유하셨으며, 또 당신의 제자들도 특히 성령 강림 이전에는 실수를 잘하는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실수를 보고서 예수님을 배척한다면, 이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핑계하여 자신을 위한 구원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으로 개선할 때까지는 그 구성원들이 아직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므로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며, 또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시고 진리를 주시고 우리를 성화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하등의 변화나 하자가 없음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교황님, 주교님들, 신부님들께 미사 성제 때의 성체 축성권, 고해성사에서의 사죄권, 그리고 진리를 가르칠 교도권 등이 있다고 하는 말은 그 분들 자신으로부터 그러한 권한과 능력이 유래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인 성직자들에게 당신의 양을 치라는 사명을 주심과 동시에 그 사명의 수행에 필요한 능력과 권한들을 위탁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단체들 안에서 각각의 직분에 합당한 책임과 권한이 위임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성직자들도 인간인데 어째서 남의 죄를 사할 수 있으며,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묻는다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단순히 인간들이 모여서 이룬 인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우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초자연적인 신비체임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4. 천주 성자의 강생과 구속 사업에서의 성모님의 필수적인 역할

우리는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천주 성부께로 갈 수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그리스도를 정점으로한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에 대한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떤 개신교에 다니는 부인이 천주교 신자인 친구에게 말하기를, "왜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는가? 나는 아프면 의사에게 가지 의사의 어머니에게 가지는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만 믿고 그분께 죄사함을 받으면 된다는 그럴듯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부인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사랑에 바탕을 둔 커다란 하나의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의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란,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고 요금을 지불하고 다시 자기의 생활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사이에는 세상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를 훨씬 초월하고 더 밀접한 사랑과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줄기에 비유를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한 생명(초성 생명)이 흐르고 있고, 한 분의 성령께서 호흡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정점으로 하여 한 몸, 즉 하나의 신비체를 이룩하여 생활하는 유기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바로 우리의 참 어머니가 되시며 따라서 우리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한 가정에서도 그러하지만,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가정 안에서도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은 자녀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이 아버지의 존재와 역할을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참으로 한 몸이며, 하나의 진정한 가정이며,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조합 단체나 민주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왕국임을 이해하는 것이 성모님께 대한 많은 편견들을 불식(拂拭)하는 데에 핵심적인 관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의 생명으로 형제가 되신 예수님의 생애 전반을 한 번 생각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천주 성자께서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심으로써 하느님의 지상에서의 현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께서는 성모님의 태중에서 성장하시고, 탄생되시고, 성모님의 품 안에서 자라시고, 또 소년 시절 그리고 성인(成人)이 되신 후에도 성가정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도 성모님께서 여러 모로 예수님과 당신 제자들을 뒤에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인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실 때에도 성모님께서는 아드님의 수난에 참여하셨습니다.  사도 행전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천주 성령의 강림 때에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기도하시며 성령 강림을 맞이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어머니의 끊임없는 현존과 필수적인 역할이 지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주 성자 즉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죄를 빼놓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신 인간이십니다. 인간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면, 예수님께도 그러하셨으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아담이 원죄를 지을 때에도 에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는 남녀의 역할이 종합된 가운데에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 사업에 있어서도 모든 남자들의 대표이신 예수님과 모든 여자들의 대표이신 성모님의 역할이 함께 엮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지혜와 섭리에 의한 구원의 신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 역할에 있어서는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베푸시고 인류의 죄를 보속하시고 성모님께서는 이에 협력하시어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공로가 모든 자녀들에게 흘러가서 그들이 영적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자상한 노력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일하여 수확을 벌어오면, 그 수확을 가지고서 가정을 꾸리고, 식사를 준비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은 주로 어머니가 하는 역할들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류 구원사업에서도 성모님의 이러한 조용하면서도 자상하고 필수적이며 사랑에 찬 역할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천주 성자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구속 사업을 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어머니"라는 존재를 사용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어떤 방법이라도 쓰실 수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여성을 그 잉태 순간으로부터 정성껏 준비하시어 구세주를 그 여인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고 그 어머니의 돌봄에 의지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본래 "어머니"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내려주신 귀중한 사랑의 선물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들에게로 흘러가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모성애가 가장 희생적이고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생성자를 이 험한 인간 세상에 보내시면서 당신께서 마련하신 어머니라는 사랑의 도구를 사용하시어 그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에 구세주의 강생과 성장을 맡기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어머니, 즉 천주의 모친이 되신 성모님께 그 잉태 순간으로부터 은총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써 성모님을 과연 어느 정도로 사랑과 거룩함과 순결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차게 해 주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이르러서야만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와 한 생명으로 연결된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성모님의 보호와 영적인 양육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과거의 성인들 중에 성모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지니지 않았던 성인은 한 분도 없었다고 합니다.

또 교회의 신학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의 모든 은총이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근래에 교회 안에서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많이 식어져가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다른 많은 문제들이 교회 안에서 발생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등한시하면,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 진리를 시급히 깨닫고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신심을 다시 활성화해야 되겠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아니시며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구세주도 아니십니다. 성모님은 사람이 되신 천주 성자의 어머니로서 구세주를 도와 인류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노력하시는 모든 은총의 중개자이시며, 구속의 협조자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천상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도와 인류를 구원하시는 공동구속자이시며, 우리 모두가 작은 공동구속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겨드림으로써 가장 확실히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나, 무한하신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수많은 천사들과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천사들과 인간들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사랑으로 일치된 천상 가족, 천상 왕국을 이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멸시하고, 해를 가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외적인 기준에 의하여 사람을 차별 대우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기준들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께 의해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나라에로 초대되어 있고, 무한히 고귀하신 그리스도의 성혈로 보속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은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므로, 외적인 조건들이 빈약할지라도 그 존엄성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외적인 조건들이 개선 될지라도 기본적이 존엄성이 증가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직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지도 못하는 태아들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아이들을 대변하여 불의와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억압되고 착취되는 자, 노약자, 병자, 외로운 자들을 존중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에게 행한 것이 바로 당신께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 참다운 애덕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겸손과 극기가 반드시 필요한 선행 조건일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려 하고, 나의 공로를 인정받기 원하며, 남의 비판에 대하여 분노하며,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고집한다면 겸손과 극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또 우리가 겸손과 극기의 정신이 부족하면 남의 결점과 실수를 더 잘 보게 되고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작아질수록, 하느님의 선을 더 잘 반영하게 될 것이며 그분께 더 큰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 공적계시 (公的啓示)와 사적계시(私的啓示)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인 계시 진리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에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는 초자연적인 종교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속 사업 또한 초자연적인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은 초자연적인 구원의 신비와 자연적인 생활이 한데 엮여진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초자연적인 생활에의 참여가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면 이단, 미신 등 온갖 폐단이 초래될 것이므로,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시고 교회를 통해 보존되고 있는 가르침에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의 계시 진리에 하등의 오류도 섞이지 않게끔 성령의 보호 하에 지켜주시는 것이며, 또 교회는 역사상 수많은 오류들에 대해서 타협이 아니라 단호한 자세로서 대처해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계시 진리를 흔히 "공적 계시"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공적 계시는 그리스도와 종도 시대에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어떠한 변경이나 첨가도 있을 수 없으며, 교회 안의 모든 것이 이 공적 계시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또 부합되어야 합니다. "공적 계시"와 구분하여 "사적 계시"란 용어는 공적 계시에 변경을 초래함이 없이 신자들이 계시 진리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메시지나 관련된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적계시"란 용어에 대해서도 더 명확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사실상 많은 사적 계시들이 교회 전체를 위해서라기보다 개인들의 신앙 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영성 생활에 진보한 많은 이들이 주님과의 밀접한 일치를 경험하고 있으며, 때로는 기적적인 현상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성인들에게 수많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적 계시들이 일부 개인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반적인 활성화를 위하고 모든 사람들의 회개를 목적으로 주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과달루페, 빠리 (기적의 메달), 루르드, 파띠마 등에서의 성모님의 발현과 메시지가 좋은 예일 것입니다.

이러한 공적인 중요성을 띤 초자연적 현상들을 "공적계시" 즉 계시진리와 구분하기 위하여 "사적 계시"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겠으나, "사사로운 목적의 계시, 교회 전체를 위한 중요성은 없는 계시" 라는 뜻으로 "사적 계시"라는 용어를 쓴다면,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교회의 역사 안에 특별히 개입하시는 바를 경시(輕視)하여 신자들을 오도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적 계시"라기보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사용하셨던 "특수 계시," 또는 "특별 계시"라는 용어가 더 적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 분별의 필요성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도권을 12 사도들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에 부여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도 교회만이 이를 최종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할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분별의 책임과 권한은 해당 지역의 주교님께 속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교황 성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현상들 모두를 교회가 조사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메시지와 징표들의 내용으로 보아서나 그 결실들을 보아서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에만 주로 교회가 개입하여 조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도 메시지와 발현, 그리고 기적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야기 시킬 수 있고, 또 인간들의 조작이나 착각에 의한 현상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교회의 조사는 매우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진행되는 것이 항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役事)를 방해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새로운 발현이나 메시지의 소문에 접할 때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신중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교황님을 비롯한 전체 교회의 일치 하에서 발표되는 교회의 공적 판단이 나오면 이에 순종할 것이며, 그러한 판단이 있기 전에는 최선의 노력으로 바른 분별을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요한 종도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靈)이든지 다 믿지 말고 하느님께서 온 영들인지 시험해 보시오. 사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肉化)하여 오셨다고 고백하는 모든 영은 하느님께서 난 것입니다. "(1 요한 4:1-2)

◈ 분별의 기준

위에 인용된 요한 종도의 말씀은 영의 분별에 대한 핵심적인 기준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여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 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화하여 오셨다라고 하는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핵심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천주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고, 당신의 수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속(救贖)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달리 주신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초자연적인 현상들이나 학설 등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구원의 길에 종속되고, 부합되고, 도움이 될 때에만 참다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 사업은 2천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므로,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주님의 현존과, 진리와, 교도권과, 성사들과, 교회의 목적 등에 종속되지 않고 부합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 현상들이나 주장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르는 사람이 많고 그럴듯하게 들리는 내용의 메시지들이 있고 기적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내리신 구원의 길과 부합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고, 우리가 그 길을 잘 가도록 도와주지 못하고, 교회의 일치된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참된 계시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예수님의 어떤 사진에 예수님의 성체적인 현존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성체 성사에 관한 계시 진리를 변경시키는 것이며 또 성체를 이루는 사제직을 모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체가 사제에 의한 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을 찍어내는 기계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분명히 공적 계시에 변경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신경에는 분명히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새로운 육신을 받게 된다."라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이 얼핏 들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럴싸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은 계시 진리를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것이 됩니다.

교회의 교도권 자체를 부정 내지 경시한다든지, 기적이나 메시지를 교회의 교도권 밖에 놓으려고 한다면 이는 모든 덕의 기본인 겸손을 어기는 것이 되며, 교회에 위임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성화와 구원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호기심을 만족 시키고 공포심을 조장하는 내용의 메시지들도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그 때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오 24:36)라고 하셨는데도, 마지막 때를 정확히 예언하려는 메시지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오류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들을 확실히 배우고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의 진리들을 배우고 익히기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 상 많은 혼란이 발생할 수 있고, 또 오류들이 발생될 때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빛입니다. 이 빛으로써 우리는 마귀로부터 오는 모든 오류의 암흑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진리의 보화를 교회에 위탁하셨으니, 이 보화가 찬란하게 빛나며 세상을 비추게 되는 것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 교회의 공식 인정이 있기 전에는 계시를 무조건 거부해야 하는가?

사실 상 많은 분들이 아직 교회의 공식 인정이 나지 않은 계시들에 대해서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시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 거짓 계시들이 너무나 많으므로, 이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계시가 참될 경우에도 이를 배척하게 되고 그 계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게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들이 교회의 인정을 먼저 받고 나서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도 천사들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즉시 아기 예수께로 달려갔습니다. 대제사장에게 먼저 여쭈어보고 나서 가보겠다고 했다면,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 성인께서도 꿈에서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 즉시 아기 예수와 성모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만약 성모님의 루르드와 파티마의 발현 때 그 당시의 신자들이 아직 교회의 공식 인정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고 발현지에 거듭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더라면 교회가 루르드와 파티마에서의 성모님 발현을 조사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아무런 영적인 열매도 징표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가난하고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듯이 하느님의 계시들은 보통 보잘 것 없고 약하게 보이는 길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하고 우리 스스로가 작은 자가 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들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지와 징표들을 무슨 이유로든 외면하게 된다면 이는 너무나 불행한 일이며, 또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적 계시들에 대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대해야 된다는 것은 분별의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음으로써 주님께로부터의 징표들을 놓치지도 말 것이며, 마귀의 홀림에 빠지지도 않아야 될 것입니다.

◈ 나주에서 주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의 의의(意義)

1990년 9월에 로마로부터 마티아스 페데스 메리노 몬씨뇰께서 나주에 오셨을 때,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은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들의 종합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몬씨뇰께서 다녀가신 후에도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많은 메시지들을 주셨습니다. 특히 근년의 메시지들과 징표는 성체 성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85년부터 주신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징표들 전반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교회에 위탁하신 계시 진리 전반에 대한 재조명이며 새로운 강조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재조명과 강조를 주시는 이유는 특히 현대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계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흐려져 있고 실천이 이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의 세계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고, 교회 안에도 전통적인 가르침에 등을 돌리는 배교의 위험이 커가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계시 진리의 심오하고도 중요한 뜻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여 개인의 성화와 구원을 도모할 뿐 아니라, 교회를 활성화하고, 위기에 처한 이 세상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속 사업의 현실에 대해 나주에서 거듭 상기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특히 성체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 강조하시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님과 모든 성직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고 계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진실되이 자주 보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교리들을 충실히 받아들이며 그리하여 전례와 교회법의 혼란도 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 모두가 교회의 지체로서 맡은 바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그리고 희생적으로 실천하고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이바지하는 공동 구속자들이 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또 한 가지 나주 성모님 메시지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는 주제는 "일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일치를 이르고 계심과 같이 우리들도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사회 안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인종들 사이에서, 그리고 성모님을 위해 일하는 자녀들 사이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르라고 요청하십니다. 애초에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하느님의 품안에서 사랑과 생명으로 일치된 천상 가족으로 초대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성의(聖意)를 따르지 못하고 인간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매우 진노하고 계시므로, 한 시 바삐 생활을 개선하고 보속을 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자행되고 있는 낙태 및 산아 제한에 대해 말씀하시며 많은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미 수태된 인간을 제거하는 것은 약자(弱者)를 무참하게 짖밟는 현대악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모든 인간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를 이룩하라는 것이 성모님의 간절한 요청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 사업에 있어서의 성모님의 필수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수많은 성인들과 신학자들이 이미 자세히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5세기의 네스토리우스 파의 이단과 16세기에 시작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성모님의 역할을 경시함으로써 구세주의 강생에 대한 개념에조차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풍조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여 많은 신자들이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속 사업의 사실에 대한 확신도 흐려지고 있습니다.

나주에서는 성모님께서 지극한 강조를 뜻하는 숫자인 도합 700일 동안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고, 또 그 후의 700일 동안 향유를 흘리심으로서 모든 인간들에 대한 지극한 모성애와 염려를 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메시지 말씀을 통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천상 어머니이시며, 천상 모후이시며, 은총의 중개자이시며, 보속의 협조자, 그리고 공동 구속자이심을 명백히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라는 표현을 쓰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시고 구속 활동을 하심에 있어서 필수적인 매개체 역할을 하신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와 우리의 자연적인 세계를 연결시켜 일치시키시는, 다시 말해서, 구원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필수적인 도구요 통로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고 확실해질 때 우리 개인들의 성화 뿐 아니라 전체 교회의 활성화와 세계 평화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1995년 9월 22일 나주에서의 11번째 성체 기적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의 가장 큰 보배는 지극히 거룩하신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이해가 빨리 안 될 수도 있는 말씀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는 교회 안의 가장 큰 보배는 성체 성사 즉 예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부터 성모님께 관한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빨리 이해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습성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과 성모님은 다른 인격체이시나, 천주 성자께서 인간으로 강생하신 순간부터 두 분이 항상 함께 계시며, 두 분은 항상 지극한 사랑 속에서 인류 구속을 위한 일치를 이루어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당신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기르시고, 보호하시며, 보조하시고, 우리에게 모셔다 주시는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보물 상자를 가리키며 "저 보물 상자는 우리 집안의 가장 큰 보배다."라고 말한다면, 비어있는 상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물을 담고 있는 상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항상 구세주를 지니고 계시는 성모님을 교회 안의 가장 큰 보배라고 하시는 말씀은 결국은 예수님 자신이 가장 큰 보배이시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법궤(the Ark)처럼 신약 시대에 구세주를 항상 지니고 계시며 우리에게 모셔다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나주에서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확인해주시기 위하여 수많은 징표들을 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19회에 걸친 성체기적들이 가장 고귀하고도 가장 놀라운 징표일 것입니다.

19회 중 다섯 번은 교회를 대표하시는 교황 성하와 (1995년 10월 31일), 전 한국의 교황 대사님(1994년 11월 24일), 캐나다에서 오신 주교님(1995. 9. 22), 그리고 말레이시아 사라와크 시부의 주교님(1996. 9. 14), 그리고 제주 교구의 김창렬 바오로 주교님(1997. 6. 12) 앞에서 주셨습니다.

이는 나주에서의 계시들이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것임을 뜻하는 중요한 징표들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 성체 기적들은 대개 빵과 포도주 형상의 성체 성혈이 눈으로 볼 수 있고 움직이는 살과 피로 변하는 형식으로 일어났지만,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께서 오셨을 때와 1995년 7월 1일과 1996년 7월 1일, 그리고 1997년 6월 12일, 1997년 8월 27일 성체가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렇게 내려오신 성체가 예수님을 상징하는 빵이 아니라, 살아계신 완전하신 예수님, 즉 당신의 살과 피와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 천주 성자이심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 징표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중요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징표들을 "놀랍다"라고 경탄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며 그러한 징표들을 주시는 하느님의 깊으신 뜻과 목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꼭 필요할 것입니다. 나주에서 지난 15년간 주어오신 많은 메시지들과 징표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강력하게 우리를 계시 진리에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또 그 징표들의 강도와 횟수도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전체 교회의 활성화와 전 인류의 회개를 원하고 계시리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모님 메시지들 전반에 걸쳐서 우리들 각자의 성화, 즉 성녀 소화 데레사가 걸었던 작은 자의 길을 거듭 설명해주시고 계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성화와 우리의 구원이 동일한 길이기 때문이며, 이는 나주 메시지의 진실성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역사(役事)가 우리 한국 땅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며, 우리 순교자들의 희생에 힘입은 바가 크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 개인과 사회 안에 고쳐야 할 문제들과 보속해야 할 죄가 너무나 많음을 기억하고 겸허한 자세로서 메시지를 실천해나가야겠으며, 또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에게 힘차게 퍼져나가서 한 사람이라도 더 성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께로 돌아오고 교회의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기도와 보속과 희생과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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