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주에서 일어난 일들과 율리아 자매에 관하여 발표된 공지문에 대한
논평
다음의 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리아 잡지인
"바다의 별 (Stella Maris)"지의 주간 앙드레 가스뗄라(Andre Castella) 씨가 쓴 것이다
(1998년 5월호). 까스뗄라 씨는 빠르비 출판사(Editions du Parvis)라고 하는 큰 출판사도 운영하고 있다.
Editions du Parvis CH-1648 Hauteville,
Switzerland
광주 대주교께서 임명한 나주 조사 위원회는 서류들을 검사하고, 율리아의 집을
방문했으며, 메시지를 참조하고, 율리아를 포함한 14명의 증인들을 인터뷰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처음 9년간 아무런 공식 조사도 없었던 것에
비하면, 진보를 한 셈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선의의 조사 활동을 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 뒤에는
여러 가지 결함들이 숨겨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함들은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성질의 것들이다.
(1) 메시지를 받고 환시를 보는 당사자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증언이 아니었다.
그가 받은 은사와 메시지의 내용에 대하여 일련의 질문을 했어야 했다. 율리아와 같이 많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는 충실한 증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글 몇 장으로 어떻게 12년이 넘는 기간의 여러 가지 신비적인 체험을 요약하고, 그가 받은
많은 메시지에 대한 종합을 내놓으란 말인가? 위원회에서 사용한 조사 방법은 근본적으로 사실과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다. (2) "기적"을
목격하셨던 교황님과 네 분의 주교님들께 문의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 회개, 봉사에로 부르심을 받음, 병의
치유 기타의 결실들은 전적으로 불문에 붙여졌다. (4) "공지문"은 나주의 사정을 다른 어떤 사제들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율리아의 영적
지도자 파 신부 (Fr. R. Spies)의 관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세속의 어떤 기관도 감히 하지 못할 것을 주교님의 선언에서는 자만과 강경일변도로
권위를 행사하는데, 그러한 선언문은 교회의 얼굴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정당한 자율성을 존중하시는 것과 같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모성적인 자애로움을 찾아볼 수가 없게 한다. 이상은 일반적인 고찰이었고, 다음은 좀더 자세히 공지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광주 대주교는 나주시가 속해있는 교구 안에서 교구장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의 권한 밑에 속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의 뜻을 선언할 수 있다. 교회법 제212조 제1항은 이렇게 규정한다. "그들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는 신자들은 신성한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앙에 관한 스승의 자격으로서 선언하거나 교회의 지도자로서 결정하는
사항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순명으로 따라야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6항)은 교도권의 행사 범위에 관하여 이렇게 규정한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며 성실히 진술하고, 또한 하느님의 계시로 믿어야 한다고 제시된 모든 것을 이 단일한 신앙의 유산에서 퍼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적 계시는 인정된 것까지도 사도들이 받아서 교회에 위탁된 신앙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사적 계시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은 그 발현이나 메시지나 기적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공식적인 인정은 주교가 그 사적 계시들이
하늘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개연성(蓋然性)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 내용에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니까, 사적 계시가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보존하고 가르칠 사명을 가진 신앙의 유산에 속하지 않는 만큼 각자의 평가에 맡겨져야 한다.
관할 교구장은 공식적인 전례의식으로 하는 공적인 종교 예식을 허가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 외에는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I-1. 현대의 다른 계시들의 구절들과 비슷한 메시지의 구절들이 있다는 것은
근원이 같은 (주님, 성모님) 이상 논리적인 것이다. 율리아의 글에서는 때로는 메시지 앞에 있고, 또 때로는 메시지 뒤에 있는 율리아 자신이
쓴 해설과 메시지 자체를 구별해야 한다. 영적 지도자가 환시를 보는 본인의 해설에서 어떤 요소들을 변경하거나 지우거나 또 어떤 것은 추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는 사람들의 정신에 메시지의 내용이 "들어가게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사에서 강론하는
사제들이 성경을 가지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같은 목적으로 영적 지도자는 메시지를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연기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 환시를 보는 이들의 영적 지도자들 여러 분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나에게 확인해주었다. 나중에 경우에 따라서는
연루(連累)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적절하면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한 시대의 종말"을 연기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대목에 관해서는
"한 시대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구분하는 한 가톨릭 신앙에 반대될 수가 없다. 사도들과 성 아우구스티노 이전의 교부들도 이 구별을
했는데, "예수님의 중간 재림"은 그레고리 주교의 책에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최근에 라칭어 추기경께서 뻬나사(Penasa)신부에게 확인한
것과 같이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딱잘라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에 속하는만큼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잘 이해하거나 모든 것을 잘못 이해하거나 할 수
있읍니다,"하고 어떤 참사원이 내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계시와 발현의 분야에서는 책임있는 당국자들이 분명히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한다.
I-2. 성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고 싶으실
때에, 오고자 하시는 곳에, 오고자 하시는 모양으로 오시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미카엘 대천사가 파티마의 세 목동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을
때 그 성체가 하늘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어느 감실에서 모셔온 것일 수도 있다. 파티마에서 일어난 일이 나주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한 것에 관하여는 만일 윤 대주교님의 해석을 일반화하면 교회가 이미 인정한 모든 성체 기적들(란치아노, 시에나,
파베르네 등)이 다 교회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고, 그 기적들의 진실성을 믿은 사람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 된다.
I-3. 성모상에서 일어나거나 (눈물, 피눈물, 향유 등) 율리아의 몸에서 일어난
현상들(고통, 오상 등)을 초능력에 의한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주교의 권한이 아니고 과학자들의 임무이다.
II-1. 교회법 제823조 제1항에 근거를 두고 윤 대주교님은 나주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출판물의 발행과 유포를 금하고, 이를 읽고 보는 것까지 삼가라고 권고한다. 대중 통신 수단과 특히 출판물에 관하여 교회법
제3권, 제4절은 특별히 편집상 정확도가 기해진 것이 아니므로 신앙을 거스리지 않으면서도 여러 점들에 대하여 여러 모로 이해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다른 문헌들이나 교황들의 선언들을 참조함으로써 보완되어야 하고, 특히 대중 통신 수단에 관한 공의회의
법령(Inter Mirifica)을 참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법령의 제5항은 알아보고 알리는 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준다
(교회법에서는 이를 묵과하였다).
"정보(수집, 전달)는 아주 유익하고, 대개의 경우 필요불가결하기까지 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개인의 자격으로서나 어떤 사회의 일원의 자격으로서 사람들에게 관계되는 문제들에 관한
정보(수집, 전달)에 대한 권리는 인간 사회에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 권리의 올바른 행사는 전달된 내용이 객관적으로 진실하고, 또 정의와
사랑의 요구를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또한 전달 방식은 성실하고 적절하기를, 즉 소식을 얻고 전파하는 데 있어서 도덕률과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의 견해로는 한 지방 교회의 목자인 윤 대주교님께서 메시지의 전파를 금지하신
것은 공의회의 법령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베드로의 후계자에 의하여 승인된 권리와 출판과 보도의 자유와 기자들과 신문, 잡지 발행자들의 의무에
관한 수많은 다른 문헌들과 교황들의 선언문과 상치된다. 그런 결정은 무효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II-2/II-4. 사목상의 규율에 관해서는 (전례적인 성격을 가진 의식 거행)
윤 대주교님이 전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입의 결과로 잃어지는 영적인 결실들을 잘 의식하고 있는가? 우리가 확신하는 대로 참으로
하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주님과 그의 거룩하신 어머니께서 인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막는 사람의 책임은 엄청나게 크다. 메시지의 전파를
금지하려면, 주교는 그 메시지가 하늘에서 오지 않고 또 영혼들의 구원에 해를 끼친다고 하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결실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발현들과
메시지들이 사람들을 신앙에로 이끄는 데에 있어서 정규적인 사목 활동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자주 있다. 주교님의 공지문의 내용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고 사실로 믿고 있는 바와 상치된다. 어떻게 하여 이런 명백한 모순들을 주교님께서 간과하셨단 말인가?
결 론
"만일 이 의도나 이 일이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면 저절로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은 스스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5:38-39) 가믈리엘의 이 충고를 오늘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나주에서의 일들의 진실성을 믿고 있다. 부정하거나 단언함에 있어서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주교님의 공지가 나주를 방문해서 또는
메시지들을 읽음으로써 갖가지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확신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대제사장 안나스에 의해 비난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경비병 한
사람에 의해 뺨을 맞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대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으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
"대보아라..." 즉, "부인할 수 없는 증명을 해보아라." 예수께서 안나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고소를 당하는 누구든지 당국에 요구할 수
있다. 불행히도 현대의 계시와 발현과 마주친 많은 주교님들이 마치 그들의 권위가 복음적 권고보다 높고, 보편적인 교회가 교회 법규에 의해
보장한 권리보다 높은 것처럼 행동한다. 보편적인 교회가 그 구성원들의 권리를 어떻게 박탈할 수 있겠는가? 대주교님의 공지문 발표 후에
율리아 또는 그의 영적 지도자가 반응을 한 것을 우리가 정확히 알게되면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려드릴 것이다.
첨가 사항: 스위스 프리부르의 주교님은 메시지를 읽는 데 대한 일반
신자들의 권리를 명확히 밝혀주셨다. 광주에서는 이 권리가 침해되었다.
앙드레 가스뗄라
(Andre Castella)
참배 금지당한 나주의
기적 - 월간조선 98년 6월호 특집 -
우종창 월간조선 기자
● 나는 확실히 보았고, 굳이 믿습니다. (지학순
주교)
● 필리핀 제리 오르보스 신부 : 『저는 1991년 5월 16일
나주 성당에서 미사 중, 율리 아의 입속에 들어간 성체가 가장자리부터 실핏줄이 생기면서 차츰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1994년 11월 24일 주한 교황청 대사 죠반니 블라이티스
주교가 이곳을 방문한 날, 성모상 위의 천장에서 갑자기 알파와 오메가 문장을 새긴 성체가 두 개로 떨어져
내렸다.
● 이탈리아 종교 주간지 : 『율리아는 입을 열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한 광경을 보여 주었다. 교황은 이를 관찰하였다.』
● 나주 조사위원회에 참여한 일부 신부들은『광주교구청의 공지문은
그릇된 선언이며 나주를 미신시하는 신부들 위주로 조사위원을 선정한 것 자체가 잘못된 출발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참례객만
1만여명
전남 나주에서「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키 50cm 가량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성모상이 눈물을 흘린 데 이어 피눈물과 향유를 흘렸고, 십자가 위에서 느닷없이 성체(하얀 밀떡으로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몸과
살을 의미함)가 떨어졌다. 이 성체를 영하자( 먹는다는 뜻) 하얀 밀떡이 살아 움직이는 피와 살로 변했다. 이러한 현상이 85년 6월30일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94년 11월24, 주한 교황청 대사 죠반니 블라이티스 주교가 나주를 방문한 날, 성모상 위의 십자가에서
알파(α)와 오메가( Ω) 문양을 새긴 성체가 두 개로 쪼개져 떨어져 내렸다. 성 미카엘 대천사가 하늘에서 성체를 갖고 내려와 세 목동에게
영하여 준, 포르투갈 파티마의 기적(1917년에 발생)과 같은 현상이 나주에서 일어난 것이다. 죠반니 블라이티스 주교는 이 성체를 70여 명의
신자들에게 영하여 주었다.
블라이티스 주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을 로마 교황청에 보고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듬해 5월 교황 개인 비서인 몬시놀(주교와 신부 가운데 직책) 투투를 나주에 보내『나주 성모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교황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나주는, 비록 공인은 받지 않았지만 세계적 성지로 떠올랐다. 85년부터 96년까지 국내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 50여만명이나 나주를 방문했고 일본,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
사이판 등 동남아 일대는 물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캐나다, 멕시코, 스위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폴란드,
이집트,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1만여명이 성지 참례차 나주를 찾았다.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일들의 진실을 알기 위해 기자는 지난
4월24일 나주로 내려갔다. 성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는 곳은 나주시 교동 107번지, 나주『성모의 집』이었다. 금성산을 뒤에 두고, 앞에
나주천을 낀『성모의 집』은 향교동 동사무소 바로 옆에 있었다. 입구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쓴, "천주교 순례단 여러분의 나주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대형 간판이 걸려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대형 성모상이, 건물 1층 옥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상이 서 있으며 눈물과 피눈물, 그리고 향유를 흘렸다는 화제의 성모상은 경당(성당과 달리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곳) 안에 있었다. 기자가
찾아간 그날, 미국에서 온 신부와 수녀들이 이곳을 방문해 기도를 올렸고, 6명의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예배를 보고
있었다.
기적을 보여준 성모상은 키 50cm 가량의 플라스틱 성물로서,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밝은 미소를 띠고 있다는 점이 약간은 특이했다. 성모상은 열쇠가 채워진 유리장 속에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걸려 있었다. 기자는 성모상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눈물과 피눈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제단을 바라보며 한가운데, 기도회 장소 맨 앞에 우뚝하게 설치된 나무
상자가 눈길을 끌었다. 시멘트 바닥에 카펫을 깔고 그 위에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정면에는『이곳은 1997년 8월27일 낮 12시경
성체께서 내려오신 자리입니다』라는 글이 한글과 영문으로 쓰여 있었다.
『성모의 집』을 관리하고 있는 박연훈씨(세례명 루비노)는『성체가
떨어진 그날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성모님의 향기가 계속해서 새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자는 나무 상자 위의 유리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코를 댔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주 강렬하고 냄새가 짙었다. 호흡을 가 다듬고 다시 한 번 맡았다. 새콤한 향기 같았다. 성모의 향기는 흔히 장미향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장미향 같지는 않았다. 기도회장 곳곳에 꽂아놓은 짙은 흑장미 냄새와도 같지가 않았다.
상자 바깥의 카펫 위에 코를 대어보았다. 발 냄새 등이 섞인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나무 상자 속과 밖의 냄새는 분명 달랐다. 관리인 박씨는『수시로 카펫을 털고 말리는 청소를 하고 있지만 향기가 가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모의 집』과 관계있는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향수를 뿌려놓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박씨는 『만일 그렇게 했다면 1년 반 동안이나 계속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꼬리가 잡히게 마련』이라며『그런 일이 있었다면
여기서 일어났던 각종 기적들은 벌써 부인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의
증언
이곳은 원래 나주천변의 쓰레기장이었다. 이 일대 4백평을
매립해『성모의 집』을 지은 사람은 『성체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윤율리아(52.여.본명 윤홍선)다. 윤율리아는 개신교 신자였다. 6.25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친척집에 얹혀 살며 고생을 많이 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미용사 기술을 익혀 생활을 헤쳐나간 그녀는
20대 후반에 불치의 병, 암에 걸렸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남편의 권고로 성당을 찾았다. 성당에 나간 지
3일만에 "성경을 가까이 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불치의 병이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병자를 낫게 하는 등의 기적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윤율리아는 미장원을 운영하는 주부에 불과했다.
83년 어느 날, 폐병에 걸린 박연훈씨가 소문을 듣고 윤율리아를
찾아왔다. 윤율리아는 박씨를 위해 기도했다. 병을 고친 박씨는 윤율리아가 돈을 받지 않자, 고마움의 표시로 성물 가게에서 산, 성모상을
선물했다. 윤율리아의 미장원(나주시 중앙동 정미용실)에 놓여 있던 이 성모상이 선물받은 지 2년 후인, 1985년 6월30일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주의 기적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듬해 86년 10월19일부터 성모상은 눈물 대신에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윤율리아는 그해 11월5일 이 성모상을 나주 천주교회 사제관으로 옮겼고 그후 나주천변의
쓰레기장을 매입,『성모의 집』을 지어 화제의 성모상을 모셔왔다는 것이다. 『성모의 집』은 87년 12월8일 축성되었다.
성모상에서 눈물과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현상은 92년 1월4일을 기해
그쳤다. 그렇지만 문제의 성모상을 나주 천주교회에 모셔 놓은 86년부터 피눈물을 그친 92년 사이에 나주를 방문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의
수가 13만여명에 달했다고 "성모의 집 "은 밝혔다. 외국인 방문객도 1천5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가톨릭 원주교구청 지학순 주교가 이곳에서 성모상의 눈물을 목격한 것은
90년 1월20일. 일주일 전에 이곳을 찾아와 기도를 드리고 있던 지 주교는 이날 오전 10시경, 성모상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지
주교는 방명록에 자필로『나는 확실히 보았고, 굳이 믿습니다』라고 썼다.
원주교구청 소속으로 지 주교를 4년째 보필해 온 김 니꼴라오
수녀도『오전 10시경 주교님을 모시고 경당에 와보니 성모님께서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계셨습니다. 어느 누가 의심한다 해도 분명이 저는
보았습니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파하는『나주 성모님 메시지 보급회』에서 펴낸『은총은 강물처럼』이란 책에는 눈물과
피 눈물을 보았다는 수많은 신부와 수녀, 신자들의 목격담이 실려 있다.
눈물, 피눈물에 이어
향유
광주 가톨릭대학생 이진태씨는『나 이진태는 본 대로 적는다』고 전제하고
『성모님의 왼쪽 아랫눈썹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눈물은 왼쪽 뺨을 통해서 흘러내렸고, 또한 코 왼편에도 묻어 있었다. 오른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오른쪽 코 옆으로 해서 그 주위에 묻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나주 천주교회 이천수 주임 신부는 『1989년 7월5일, 김대건
안드레아 대축일에 피눈물을 흘린다는 전화 보고를 받았다. 경당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40분. 잠깐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 성모 제단 앞에
나아가 자세히 관찰해보니 오른쪽 눈에서 흘린 피가 가슴과 치맛자락, 발등에까지 굳어 있었고, 왼쪽 눈에서는 머금은 듯한 눈물이 조금씩 흘러
내리고 있었다. 10분쯤 기도하고 나서 나중에 증거로 삼기 위하여 기념 촬영하였다』고 기록했다.
눈물과 피눈물 현상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던 91년 5월16일, 나주
천주교회에서『성체 기적』이란 것이 일어났다고 한다. 『 성체 기적』이란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때 먹는, 밀로 만든 떡 모양의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가톨릭 역사에 의하면 서기 700년경 이탈리아 란치아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 기적의
성체는 아직까지 보관돼 있다는 것이다. 이 성체는 1970년대에 실시된 과학적 조사에서 사람의 심장 근육으로서 혈액형은 AB로
판명되었다.
나주의 첫 번째『성체 기적』은 필리핀에서 온, 제리 오르보스 신부가
미사를 집전할 때 일어났다. 제리 오르보스 신부는『은총은 강물처럼』이란 책에 목격담을 적었다.
『저는 1991년 5월16일 나주 성당에서 미사 중, 윤율리아에게
성체를 영해 준 신부입니다. 그때 저는 필리핀에서 온 30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성체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율리아의 입속에 들어간 성체가
가장자리부터 실핏줄이 생기면서 차츰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첫 번째 기적 이후 작년 8월27일까지 모두 19차례의 기적
현상이 일어났다고『성모의 집』은 밝혔다. 이 가운데 다섯 번은 윤율리아가 해외 성지 순례 중에 일어났다고 한다. 1992년 6월2일 윤율리아가
로마 성지 순례 도중 유서깊은 란치아노 성당에서 미사를 볼 때, 또 94년 11월2일 하와이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세계적 성체 연구가 마르틴
루치아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 중에 성체가 피와 살로 변하며 윤율리아의 입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는 것이다.
윤율리아를 통한 성체 기적이 행해지고 있는 가운데 나주 성모상은
92년 11월24일부터 장미꽃 향과 비슷한 짙은 향기를 풍기는 향유를 흘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향유를 흘리는 현상도 94년 10월23일까지
2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주한 교황청 대사의
보고
『성모의 집』과 윤율리아를 둘러싼 이같은 각종『기적』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한 교황청 대사가 이를 교황청에 보고한 94년 11월 말부터다. 그때까지 매년 1천명 안팎이던 나주 방문 해외
순례단이 이를 계기로 급증하기 시작, 95년에 3천68명, 96년에는 4천3백14명을 기록했다.
나주『성모의 집』을 관장하는 광주 교구청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광주 교구청은 94년 12월30일, 『나주 본당 윤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메시지에 대한 조사위원회』(약칭
나주 조사 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 85년 6월30일부터 시작된 이적에 대한 진상조사가 10년 만에 처음 시작된
것이다.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에도 기적은 계속 일어났다. 95년
6월30일은 성모상이 눈물을 흘린 지 10주년 되는 날이다. 이날 "성모의 집"에는 외국인 순례자, 국내 순례자 등 1천여명이 밤샘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40분경 성 모상 위의 십자가에서 7개의 작은 성체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일곱 상처(머리,
가슴, 양손, 양발, 늑방) 에서 피가 흘러나오더니 그 피가 성체로 변해 성모상 발 아래 떨어져 내렸다는 게 목격자들의
말이다.
이를 보고받은 광주 교구청은 이 성체를 보존하는 대신,
모두『영하라』(먹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에서 온 프란시스 수 신부를 비롯해, 김율리오, 박루비노, 최노렌조, 박안드레아 등이
차례로 성체를 먹었다. 일곱 번째 성체는 윤율리아가 먹게 되었다. 윤율리아는 이 성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뜻에서 처음엔 영하기를 주저하는 몸짓을
보이다 순명하는 마음에서 성체를 입 속에 넣었다. 그순간 율리아가 영한 성체는 피와 살로 변했고, 이를 목격한 프란시스 수 신부는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여러 신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광경은 현재 사진으로 보관 중이다.
같은 해 9월22일, 캐나다의 로만 대닐락 주교와 신학박사이자 런던
성 베드로 성당 소속인 요셉 베드로 핀 신부가 나주를 방문,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이들이 미사를 올린 곳은, 성모의 계시를 받은 윤율리아가
맨손으로 흙을 걷어낼 때마다 물줄기가 솟아 올랐다는 곳이다.
이날 미사 때 윤율리아가 영한 성체가 심장 모양의 살아 움직이는 살과
피로 변했다고 한다. 율리아 혀 위에 놓인 하얀 밀떡이 가장자리부터 시작해 흰색이 사라지고 검붉고 움직이는 살로 변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대닐락
주교가 유심히 관찰하는 모습은 비디오 카메라에 잡혔다.
성체 기적을 목격한 로만 대닐락 주교는『세속주의와 합리주의가 교회
심장부와 신자들에게까지 파고든 이 어려운 시기에, 윤율리아 자매는 우리를 회개의 길로 불러주기 위해 천주님께서 당신의 섭리로써 쓰시는 진정하고
참된 도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열매와 행실을 보고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율리아의 생애와 활동들은 풍부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열매들은 '회개' '예수님과 성모님께로 돌아옴' '신앙생활의 심원화' '평화와 기쁨', 그리고 성모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라는
글을 나주 성모의 집에 보내왔다.
『기적수』가 솟아나는 산에는 이 물을 모으는 대형 저수탱크와 순례온
신자들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끔 하는 목욕 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나주『성모의 집』에는 기적수를 길어놓은 물탱크가 있는데, 이 물을 받아가는
주민들이 꽤 많았다. 윤율리아를 둘러싼 이상한 일들은 의학적으로도 규명이 어려웠다. 눈물 흘린 성모상 11주년 기념 미사 때,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십자가에서 강한 빛이 내리면서 윤율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고 한다. 신자들이 가까이 다 가가자 그녀의 양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손에 낀 흰장갑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놀란 신자들은 율리아를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 상처가 특이했다는
것이다. 치료를 했던 의사 양동희씨(나주 양동희 내과 원장)는 소견서에 이렇게 적었다. 『손바닥 중앙에 2.5cm X 2.3cm 정도의 혈액
응고가 있었다. 과산화수소와 알코올 등으로 혈액 응고를 제거한 후 손바닥을 관 찰하였던 바, 아주 가느다란 핀끝 혹은 바늘끝 크기의 상처가
보였다. 손상 부위는 58개 정도로 관찰되었는데 크기는 채 1mm도 안되었고, 깊이도 1mm 안팎으로 추정되었다. 이 손상 부위들이 오른쪽 것은
어렴풋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고, 왼쪽 것은 타 원형 양상을 보였다. 인위적 손상일 때, 대개의 경우 주위에 염증성 변화가 보이나 이런 게
없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 손상일 가능성이 적다. 혈액 응고 양으로 볼 때, 이 정도 크기의 상처에서 그만한 출혈량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아
인위적 출혈일 가능성도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의사 이하상씨도 같은 소견을 보이면서『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결론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남
작년 2월,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가톨릭계 전문 주간지『일
세그노』지는 3회에 걸쳐『나주 사건』을 특집기사로 다뤘다. 첫 번째 특집 기사의 제목은『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미사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한국의 나주에서 성 베드로 성당으로』이었다. 기사를 쓴 사람은 마리아 영성 신학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르네 로랑땡 신부.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1995년 10월, 율리아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그녀는
10월31일 오전 7시30분, 교황청 3층의 교황 개인 소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초대되었다. 교황에게서 직접 성체를 분배받았는데, 이때 성체가
피를 흘리는 놀랍고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체를 모시고(먹고) 나서 율리아는 자신의 입에서 살과 피의 맛을 느꼈다. 그녀는 미사에 함께
참여한 한국 주교단 사무총장 신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열고, 그에게 일어난 현상을 보여주었다. 다른 신자들도 그때 함께
있었다.
교황의 비서관 중 한 명이 요한 바오로 2세가 깊은 묵상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율리아를 소성당 두편으로 데리고 나갔다. 미사 전례가 끝나고 나서, 늘 그랬듯이 교황은 참석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묵주를
하나씩 선사했다. 율리아에게는 그 중 두 개를 선물했다. 그리고 나서 그 변화한 성체를 보존하고 있던 율리아는 입을 열고 교황에게 살과 피로
변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이를 관찰하였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율리아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에게 멈춰 서
있지는 않고 계속해서 다른 순례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교황은 나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성모 마리아의 눈물 사진 앨범이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매우 유심히 관찰했었기 때문이다. 1995년 8월 교황비서 중 한 명이 나주에 가서
교황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3월21일 한국의 주교들에게 나주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였는데 성체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나주 사건에 대해 어떤 암시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신학적
해석
이 기사에서 르네 로랑땡 신부는 나주에서 있었던 성체 기적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율리아에 의해 완성된 영혼의 여정과 그녀의 회개, 그녀의 성모상에서
흘러내린 눈물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의 표시로 영혼의 희생양이 된 그녀의 소명은 나에게 내면 깊숙한 감명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이
성체의 기적들은 나를 당황케 하고 혼란을 안겨준다. 이러한 현상들을 신학적으로 부합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체로부터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다. 이 물질적인 피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성체가 눈으로 식별 가능한 살덩어리로 변했다.
이는 정말로 깜짝 놀랄 현상이고 성체성사를 식인 행위로 여기는
합리주의자의 공격을 받기가 쉽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미신이라 여기고 함구할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소위 성체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일들이 이루어졌다. 하 느님께서는 이 기적 표출을 통해서 학자들의 지혜를 조롱하시는 것 같고, 그분 자신이 직접 행하시는
은총의 총체인 당신의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며,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표징으로 주시려는 것 같다.
가톨릭 신앙에 반대하여 성체성사를 단순한 상징 행위로 축소시키려고
애쓰는 신학자와 신도들이 난무한 이때에, 저 표징은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축복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고 이끌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것은 내 몸의 상징이니라'하고
말씀하지 않았고, '내 몸은 이 빵 안에 있도다'라고 말씀한 적도 없다. 그분은 단지 '이는 내 몸이니라'고 했을 뿐이다.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물리적으로 영하게 하고자 준비한 당신의 살에 대해 어떤 변화를 보여준 게 아니고, 빵이 외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실에 입각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쪼개진 빵 안에 자신을
선사했고, 이는 이미 더 이상 빵이 아니라 그의 말씀에 따르면 몸인 것이다.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과 신비의 한계를 정한다거나 기적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하고 신화적이고 부적절 한 설명들을 제거하는 것 모두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본질은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지적 한계를
뛰어넘는 그분의 사랑 의 표현행위 안에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 주교들을 향한 교황들의
메시지
『일 세그노』지는 두 번째 특집기사에서『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나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1995년 초, 나주의 눈물 흘리는 성모상에 관한 사진들이 교황에게
전해졌다. 교황은 마치 미사를 집전할 때 사제들 이 제단에서 하는 것처럼 양팔을 가볍게 접고서 40분 이상 그 사진들을 아주 주의깊게 보았다.
1996년 3월21일, 한국 주교들은 앗 리미나를 위해 바티칸을 방문했다. 교황은 그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 자리서 교황은 나주
마리아에 대한 공감과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집기사는 윤율리아를 통해 성체 기적을 목격한 주교와 신부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첫 증언자는 말레이시아 시라 와크 성 안토니오 성당의 프란시스 수 신부이고, 두 번째 증언자는 말레이시아 시부시 주교좌
성당의 도미니코 수 주교였다. 이 들이 목격한 성체 기적은 3천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996년 9월17일 말레이시아 시부시에서 열린
미사 때 발생했다.
프란시스 수 신부의 목격담. 『그때에 나는 율리아를 향했고,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그녀의 혀 위에 놓인 성체가 움직이며 심장 모양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들은 몇 개의 사진에 찍혔다. 나는 이
현상이,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표징이자 선물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거룩한 성체변화의 실제적 현존을 바탕에 둔, 우리
주교들의 강론에 대한 하나의 확신이다.』
도미니코 수 주교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관구장 윌리암 보스
몬시뇰과 통 코노스 신부, 프란시스 수 신부, 야고보 옹 신부 , 폴 채 신부와 함께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성찬례 중 성체분배가 진행되는
동안 율리아는 앞으로 나아가 프란시스 수 신부에 게서 성체를 받았는데, 잠시 후에 축성된 성체는 율리아의 혀 위에서 심장 모양을 이루면서 살과
피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기 위해 그녀에게로 달려갔으나 나는 이를 말렸다. 성체 분배가 이루어지는 동안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몇분이 지나고 나서 율리아는 이 살덩어리를 삼켰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당신의 실제적 현존이 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이 기적을 완성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사랑의
메시지
이 기사가 던진 반향은 컸다.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의 나주 방문을
촉진시켰다. 기사가 보도되고 한달 후인 작년 3월20일에는 한국을 방문한 온두라스 대통령의 영부인이 공식 일정에서 짬을 내, 외무장관 부인과
함께 나주『성모의 집』을 방문했다. 이어 4월11일에는 IPU(국제 의원연맹) 서울 총회 참석차 내한한 필리핀 국회의원 루돌프 알바노, 빅토리고
자베스 등이 주한 필리핀 대사관 관계자들과 함께 나주를 방문하기도 했다. 전 필리핀 검찰총장 프란체스코 사베즈와 필리핀 하원 금융기관위원장 빅
토리토 엘 사베즈씨도 나주를 방문했다.
전 필리핀 대통령 아키노 여사는 92년 5월 윤율리아를 필리핀 대통령
궁으로 초청, 나주 성모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필리핀의 하이메신 추기경은 나주를 방문한 적은 없으나 나주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주『성모의 집』에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관련한 많은『증거물』이
전시돼 있다.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모상을 찍은 사진과 이를 비디오로 담은 테이프, 그리고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릴 때 그 피로 얼룩진,
헝겊으로 된 성모상 받침대와 성모상에서 향유가 흘러내릴 때 이를 채취했던 1회용 주사기, 윤율리아와 관련된 성체 기적 사진 등이다. 또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목격한 신부와 수녀, 신자들의 증언도 책으로 비치돼 있다.
작년 6월12일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와 광주 교구 원로인 안당
신부가 나주『성모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두 사람 이 성모상 앞에서 성체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서
천정에서 한 개의 성체가 내려왔다.
이 성체에는 사랑의 불꽃과 작은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성체는『나주 조사위원회』가 성합에 담아 광주 대교구로 갖고가 보관 중이다. 이어 8월27일에는 앞의 것과 같은 문양의 성체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신자들이 앉은 카펫 바닥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 성체 역시 광주 대교구에서 가져갔다. 그 후 성체가 떨어지는 현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체가 떨어진 카펫 위에서 향기가 나는 현상은 작년 8월27일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눈물에 이어 피눈물, 향유, 성체 기적 등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윤율리아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전파다. 윤율리아는 85년 7월18일부터 성모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나주 성모의 메시지는 주 내용이 사랑이어서 『사랑의 메시지』로 불린다. 『성모의 집』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즐겨 암송하는 메시지는『최후의
만찬』과 관련한 것 이다.
윤율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최후의 만찬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사랑이며 나눔의 잔치이다. 높고 깊고 넓은 나의 사랑 전체를 내 아들 예수와 나의 사랑하는 교황과 추기경, 주교, 그외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자녀들에게 온전히 내어주고자 나를 모두 짜내어 향기와 기름을 주는 것이다. 내가 모두를 위해서 주는 향기와 기름은 하느님의
선물인데 그것은 바로 나의 현존이며 사랑이자 우정이기도 하다』.
율리아가 받은 메시지들은 한글 영어 일어 불어 독어 월남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라틴어 아랍어 헝가리어 등으로 번역돼 전 세계에 보급되고 있다. 각국의 신부들이 한글을 영어로 바꾼 책을 토대로 현지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성체 기적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도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보급되고 있다.
광주교구청의
결정
그러나 광주교구청은 지난 1월1일 윤공회 대주교 이름의 공지문을
발표,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신앙적으로 참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고, 오히려 어떤 초능력에 의한 현상일
수도 있다』며 일종의 '미신'이란 결론 을 내렸다.
광주교구청은『윤율리아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 윤율리아의 메시지는 사적 계시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기존의 다른 책들을 모방, 표절, 인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광주교구청은 그러나 성모상에서 눈물, 피눈물, 향유가 흐르고 성체가
내려왔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성모의 집』에서 갖고 간 두 개의 성체에 대해서도 공지문은 언급하지
않았다.
광주교구청은 결론적으로『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관련된 유인물,
간행물, 오디오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의 발행과 유포를 공식적으로 금하며, 그와 관련된 홍보물을 읽서나 보는 것 역시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며『신도들은 이같은 교도권에 순종하라』고 권고했다. 동시에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진원지인 나주『성모의 집』에서 기도회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시켰다.
가톨릭이 정한『성 마리아 대축일』이자『세계 평화의 날』로서 용서와
화해를 베푸는 성스러운 날에 광주교구청은『성모의 집』 을 사실상 폐쇄시켰다. 공지문에 따라 나주『성모의 집』은 예배금지 조치를 당했다. 『성모의
집』에는『윤공회 대주교님의 공지에 순명하여 나주 성모님 집에서는 매주 목요일 기도회와 첫 토요일 또는 기타 공동체적 집회를 하지 않는다』는
게시문이 붙었다.
이렇게 되자 해외 순례객과 국내 순례객의 발길이 급감했다고 한다.
윤율리아는 대주교의 공지문에 따르기 위해 신자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교도권과 양심의
소리
광주교구청이 이런 결정을 내리자『성모의 집』을 사랑하는 신자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광주 교구의 공지문이 교리서를 잘못 해석했으며, 조사방법도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달 후. 성서 전문 월간지 『가톨릭
다이제스트』는 98년 2월호에 『나주 문제를 생각해본다』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집에 모셔진 성모상에서 눈물과 향유가 흘러 나온다면 우리는
그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 우리가 영하는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하고, 나직한 성모님의 말씀이 들려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일을 비밀에 부치고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외부에 알려야 할까? 우리는 나주 성모
메시지와 관련된 광 주교구청의 공지문을 접하면서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기사는 이어『신자는 의문이 있어도 교도권이라는 권위에 무조건 따라야
할까? 아니면 자신들의 내부에 숨겨진 양심의 소리를 표출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며,『나주 성모상과 관련하여 많은 이적을 보았던 사람들은,
나주의 여러 현상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초능력에 의한 현상일 수도 있다는 윤공회 대주교의 공지를 쉽게 이해할 수 없어 혼란에 빠져
있다』고 보도했 다.
두달 후, 이 잡지는『참된 일치는 성실한 교도권 행사에서』라는
글에서, 나주 조사위원회가 사실 조사를 벌였으면 그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데 발표문엔 결과가 나와있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광주교구청의 결정을 재차
비판했다.
비판문은 CBS(기독교 방송) 객원 해설위원이며 변호사인 윤학씨가
썼다.
이무렵 하이텔을 비롯한 PC 통신에서도『나주 사건』이란 제목 아래,
진실을 밝히기보다 침묵을 강요하는 광주 대교구의 결정을 비판하는 글이 계속 올랐다.
기자는 광주교구청의 입장을 듣기 위해 지난 4월25일 광주교구청을
찾아가『나주 조사위원회』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기자가 알고 싶었던 것은 기적의 실체여부가 아니라 조사방법이었다. 이 요청에 조사위원장
신부는『우리 입장은 공지문에 다 나와 있다』 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공지문 작성에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신부들도 인터뷰를
거절했다.
제주 주임 신부의
증언
그러나 조사위원회에 참여한 10여명의 신부 가운데 몇 명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에 응한 신부들은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초자연적 현상에 의한 기적이며, 이 기적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 근거로『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고명한 주교들이 믿는다고 증언했고, 증언자들의 증언에 의심할 만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나주의 일을 미신시하는 신부들 위주로 조사위원을 선정한 것 자체가 잘못된 출발이었다』고 비판하고『공지문은 그릇된 선언』이라
주장했다. 이들은『이러한 성체 기적이 보고되면 외국에서는 수천 내지 수만명을 수십년에 걸쳐 조사한 후 결론을 내린다』며 『그러나 나주 문제는
조사 위원들이 처음부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출발했기 때문에 조사에 성의도 없고, 결론도 성급하게 내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들은『주한 교황청 대사가 교황청에 보고할 만큼 의미있는 곳인데도
윤공회 대주교는 한번도 성모의 집을 찾지 않았고, 신자인 윤율리아의 면담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사위원들도 윤율리아를 한번 만났으며,
증언자 14명에 대한 인터뷰도 한번밖에 실시하지 않았다』며『실체규명과 관련한 노력도 없이 어떻게 이런 공지문을 발표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특히 광주교구청이 교도권이란 이름 아래 신자들로 하여금『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고 결정한 것은『신자들의 영적인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주교권의 남용』이라 지적했다.
나주를 방문해 성체가 떨어지는 현장에 있었던 김창렬 제주교구장은
인터뷰 요청에『임문철 신부와 상의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해왔다. 임신부는 제주교구 서귀포 복좌교회 주임 신부다. 다음은
일문일답.
- 나주 성모의 집에 간 적이 있습니까.
『몇 번 다녀왔습니다.』
- 거기서 일어난 일을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믿습니까.
『사진을 보고 처음엔 믿지 않았아요. 그런데 90년대 들면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느 님께서 하시는 일이알 보고 싶기도 했어요. 직접 가서 보고난 후, 성모님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신자들과 같이
가기도 하고 윤율리아 자매를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 눈물, 피눈물, 향유, 성체 등과 관련된 것 중에서 직접 목격한
장면은.
『향유가 흘러 내리는 것은 내 눈으로 확인했어요. 몇 년째 계속된
일이었으니까요. 며칠이 지나도 그 향기가 가시지 않았어요. 그외 것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 김창렬 주교님께서 나주에 갔을 때 성체가 떨어지는 기적이
있었다는데요.
『비디오 테이프로 보았는데, 조작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누가 천정에
올라가 그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천정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웨하스란 과자보다 더 얇은 성체가 주교님 앞에 곧바로 떨어져 내렸다는
게 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 김창렬 주교님은 그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깝습니다.』
과학자들의
몫
나주 문제에 애정을 갖고 있는 필리핀 하이메 신 추기경의 견해를 듣기
위해 기자는 한 선교 단체에 인터뷰를 부탁했다. 이에 대해 신추기경은 자신의 총비서인 부주교를 통해『나주 문제에 대해 필리핀 주교단이 공적인
자리를 빌려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전해왔다.
성체 기적을 목격한 주한 교황청 대사 죠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는 작년
5월 알바니아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세계적인 마리아 전문 주간지『바다의 별』은
최근호에서 나주 문제를 다루었다. 기사는 이 잡지의 주간인 앙드레 가스텔라씨가 썼다.
『한국 나주에서 일어난 일들과 율리아 자매에 관하여 발표된 공지문에
대한 논평』이란 제목에서 『바다의 별』은 먼저,『기적을 목격한 교황님과 네 분의 주교들에게 문의가 없었다는 것은 조사방법의 결함』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공지문 내용이『강경일변도로서 주교의 권위행사에 치우쳤으며 이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모성적인 자애로움을 찾아볼 수 없게 했다』고 비판했다. 또 성체가 천정에서 떨어진 기적과 관련해서는『미카엘 대천사가 파티마의
세 목동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다는 파티마의 기적이 나주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말로 간접 인정했다.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한 것에 관하여는, 『만일 윤공회 대주교의 해석을
일반화한다면 교회가 이미 인정한 모든 성체 기적들 (란치아노, 시에나, 파베르네 등)이 다 교회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것이고, 그 기적의
진실성을 믿은 사람은 오류에 빠진 것이 된다.』고 꼬집었다.
이 주간지는『성모상에서 일어난 눈물, 피눈물, 향유 현상과 율리아
몸에서 일어난 고통 오상 등의 현상을 초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주교의 권한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나주 사건』의 사실여부는 기자가 논할 대상도 아니고, 논할 자격도
없다. 기자는 광주 대교구의 조사활동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공정하게 이뤄졌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성모의
집』을 사실상 폐쇄시킨 광주 대교구의 조치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믿는 마음에서 오든, 호기심에서 오든, 많은 사람이 가톨릭 교회 주변에 모이는
것은 가톨릭으로서 결코 우려할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눈물 흘리는 羅州 성모상 현상, 그 5년
뒤 이야기
아직도 향기는 코끝을 찔렀고, 광주 교구청의 부정적 평가도 유지되고
있다.
우종창 월간조선 부장대우
(woojc@chosun.com)
새콤한 향기
기자는 5년 前에 聖母 마리아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전라남도 羅州
「성모의 집」이란 곳에서 한 향기를 맡았다. 장미향 같기도 하고 백합향 같기도 했지만 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새콤한 꽃향기였다. 강렬하고 냄새도
짙었다.
이 향기는 성모 마리아상과 예수상이 걸려 있는 祭壇(제단) 바로 밑,
기도회 장소 맨 앞에 놓여 있는 유리 상자 속에서 풍겨 나왔다. 신자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시멘트 바닥 위에 깔아 놓은 얇고 낡은 카펫 위에
그 상자는 있었다. 당시 기자는 상자 위에 놓인 유리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깔려 있는 낡은 카펫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지만, 가로·세로 20cm 크기의 작은 공간에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성모의 집」 자원 봉사자 金東明(48)씨는 『성모님의 향기』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곳에서 향기가 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8월 27일부터라고 했다. 이날 낮 12시경, 십자가 위에서 느닷없이 사랑의 불꽃과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聖體(성체: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몸, 즉 살을 의미한다. 미사 도중 신자들이 먹는 하얀 밀떡을 성체라고 칭한다.) 하나가
카펫 위에 떨어 졌고, 그 직후부터 聖體가 떨어진 곳에서만 향기가 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1998년 4월 말, 羅州「성모의 집」을
찾아가 문제의 향기를 맡아 보았고,「성모의 집」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른바 기적이란 현상들에 대하여 취재했다. 「성모의 집」에 모셔 놓은 「羅州의
성모님」이 1985년 6월30일부터 눈물을, 그리고 1986년 10월 19일부터는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1992년 11월 24일부터는
장미꽃 향과 비슷한 香油를 흘리기 시작했다는 등의 내용은 月刊朝鮮 1998년 6월호에 「참배 금지당한 羅州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기사화
되었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羅州 「성모의
집」
이 향기가 지금도 계속해서 풍겨 나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기자는
지난 4월 26일 羅州로 내려갔다. 전남 나주시 교동 107번지, 나주川 옆에 있는 「성모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경이었다. 「성모의
집」은 성당이 아닌 경당이다. 경당은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를 말한다. 예배소 안에는 여자신자 한 명이 조용히 默珠(묵주: 큰 구슬 다섯
개, 작은 구슬 54개를 줄에 꿰고 끝에 십자가를 단 성물) 기도를 드리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유리 상자는 5년 前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상자 앞에
한글과 영문으로 써놓은 글(이곳은 1997년 8월 27일 낮12시경 聖體께서 내려오신 자리입니다.)에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다. 상자 위의 유리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5년전에 맡았던 그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맡았다.
역시 그 향기였다. 카펫도 5년 전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게 낡고
얇았다. 시멘트 바닥과 카펫 사이에 스티로폼을 깔아 놓은 것이 5년 전과 달랐다.
다음날 오후 1시경, 「성모의 집」을 다시 찾아갔더니 신자 두 명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상자 속에서는 어제와 똑같은 향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성모의 집」관리인 朴연훈씨(세례명 루비노)는 『카펫을 털고 말리는
청소를 수시로 하고 있지만 향기는 가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모의 집」과 관계 있는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향수를 뿌려 놓는 게 아니냐는 기자의
의심에 朴씨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지난 5년 동안 계속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꼬리가 잡히게 마련』이라며 『그런 造作이 있었다면 여기에서
일어났던 각종 기적들은 벌써 부인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聖體기적」이란 것
기자는 화제의 성모상을 자세히 관찰했다. 祭壇 중앙에 모셔 놓은
성모상은 열쇠가 채워진 유리장 속에 들어 있었다. 키는 50cm가량이며, 플라스틱으로 만든 聖物인데 가톨릭 신자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밝은 미소를 띠고 있다는 점이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물과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던 1991년 5월
16일, 이른바 「聖體 기적」이라 불리는 기이한 현상이 나주 「성모의 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聖體 기적」이란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때 먹는
밀로 만든 떡이 인간의 살과 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가톨릭 역사에 의하면 「聖體 기적」은 서기 700년경 이탈리아
란치아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프란체스코 성당에는 바실리오회 소속 수도자들이 살았는데 이 중에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한 수도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미사 때 사용하는 밀떡 속에 진실로 예수의 몸(聖體)이 현존하는지, 또 포도주 안에 예수의
피(聖血)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늘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 도중에 그가 聖體를 축성하자(가톨릭 의식의 하나로 사람이나 물건을
하느님에게 봉헌하여 성스럽게 하는 것), 밀떡은 살로 변하고 포도주는 피로 변했다는 것이다. 피는 즉시 응고 돼 다섯 개의 球體(구체) 덩어리로
변했는데, 이 피와 살이 밀봉된 용기 안에 봉인된 상태에서 보존돼 있다고 한다.
1200년의 세월이 흐른 1970년, 란치아노를 관할하는 대주교 등의
요청에 의해이 聖體와 聖血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아레초 종합병원 내과과장 오도아르도 리놀리 교수의 주도 아래 1970년
11월18일에 시작해 1971년 3월4일에 끝났다. 조사 결과, 聖體와 聖血은 모두 사람의 것으로 판명 났다. 성체는 심장의 줄무늬진 근육
조직으로 확인되었으며 聖體와 聖血에 대한 혈액형은 똑같이 AB형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조사팀은 『聖體와 聖血의 혈액형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것이라는 점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같은 혈액형을 가진 두 사람의 것일 수도 있다』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성모의 집」에서 약 3km쯤 떨어진 곳에는 「성모님 동산」이 있다.
이 동산은 미국인 20여 명의 기부금에 의해 단장되고 있었다. 기부한 미국인의이름은 동산 맨 위에 있는 바위에 적혀 있는데 이들은 「성모님의
발현(발현)을 믿고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신자라고 한다.
이 동산에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을 올라간 예수의 고행을
재현하는 「십자가의 길」도 있다. 기자가 이 동산을 찾아갔을 때 여자 두 명, 남자 한 명이 맨발로 기도하며 걷고
있었다.
이「십자가의 길」에서 2001년 11월9일, 란치아노 성당의 기적과
유사한 「聖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선혈이 낭자한 피가 돌과 낙엽 위에 묻어 있는 것을 수십 명의 신자가 목격했다는 것이며, 이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십자가의 길」입구 표지판에는 이 피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십자가의 길」에 나타난
血痕
「2001년 11월9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때 예수님은 聖血을,
성모님은 피눈물을 처참하게 흘리시는 顯示를 보았는데 실제로 3000여 개의 돌과 낙엽들 위에 금방 흘린 듯한 선혈이 낭자하였으며 살점과 피가 돌
위에 엉켜 붙어 있었다.
바로 이 날 성모님께서는 『갈바리아의 십자가 길에서 애절하게 바치는
너희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는, 피 흘리며 너희와 함께 하고 있는 내 아들 예수의 곁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너희와
동행하고 있다』는 말씀을 주시어, 이날 보여 주신 징표는 바로 예수님의 聖血과 성모님의 피눈물임을 알게 해 주셨는데 국내외의 DNA(유전자)
검사 결과 모두 사람의 살과 피로 판명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피가 떨어진 이러한 현상은 2002년 1월 18일에도
일어났다고 한다. 피는「십자가의 길」위 돌과 보도블록에 떨어졌는데 光州에 사는 曺基鶴(조기학·58)씨는 목격자 중의 한 사람이다. 조씨는
31년간 농어촌진흥공사에 근무하다 3년전, 건강이 나빠 퇴직한 사람이다. 조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의 목격담을 이렇게 말했다.
『그날 오전 9시30분경 聖血이 내려왔다는 소리를 듣고 집사람과 같이
구경하기 위해 성모님 동산에 갔습니다. 도착한 시각이 오후 5시20분경입니다. 성모의 집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聖血 보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후드득」하는 소리가 나면서 제 발 앞에 일곱 방울의 피가 떨어졌습니다. 바위와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이 피들은 「팍 팍」하는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피에서 장미향 비슷한 향기가 나는데… 정신이
멍해지고 엄청 놀랐습니다.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연상하면 당시 상황이 이해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피가 떨어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曺씨는 『그동안 심장병과 고혈압, 肝(간)경화등 으로 고생했는데 羅州 성모님을 알게 된 후 병이 다 나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주의 기적을 믿는다』고 말했다.
십자가 모양의 血痕에 나타난 성모
얼굴
「십자가의 길」위의 돌과 보도블록에 떨어진 피는 서울에 사는
李廣(이광·64)씨가 촬영했다. 李廣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중앙 부처에서 33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은퇴했다』고 했다. 『취미가
사진이어서 공직생활 중에 야생화 촬영을 많이 했다』고 그는 말했다.
다음은 李廣씨와의 일문일답.
- 그날(2002년 1월18일) 「성모님 동산」에 왜
갔습니까.
『오전 9시30분경 십자가의 길에 성혈이 내려왔다는 연락을 받고
사진을 찍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오후 5시20분쯤 성모님 동산에 도착했습니다.
- 하늘에서 피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장면을 직접
보았습니까.
『현장 근처에 있었지만 피가 떨어지는 장면은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오전에 떨어진 血痕(혈흔)들을 관찰했는데 이 혈흔들이 2001년 11월9일 것과 거의 비슷한 모양이어서 사진 찍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철수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몇 사람이 십자가의 길 위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던 사람들이
갑자가 「으악」하고 고함을 지르기에 급히 올라가 보니 바위와 보도블록 위에 붉은 피가 묻어 있고 목격자 일곱 명이 소스라치게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후두둑」하는 소리가 나면서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핏방울이 떨어졌다는 겁니다.
저는 카메라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니콘 F2 카메라에 105mm렌즈를 사용했습니다』
- 핏방울이 떨어진 장소는
어떠했습니까.
『한 평 정도의 공간인데 큰 바위 한 군데 와 보도블록 등 일곱
군데에 붉은색이 선명한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몰랐지만 찍고 난 후 인화를 했더니 바위 위의 혈흔은 십자가 모양이고,
십자가 정중앙에 羅州 성모님의 얼굴과 거의 비슷한 영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 그날 날씨는 어떠했습니까.
『아주 맑았습니다』
- 언제 가톨릭에 입문했습니까.
『羅州를 알고 나서 2001년에 영세를
받았습니다』
기자는 「성모님 동산」에 전시돼 있는, 血痕(혈흔)이 묻어 있다는
돌맹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1년 반이 지난 탓인지 돌멩이에는 누르스름하고 검은 흔적들만 보였다.
서울大 법의학교실 李正彬(이정빈)교수는 사체 검안과 유전자 감식
전문가다. 2001년 가을 어느 날, 李교수의 연구실에 한 초로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聖血이라는 성스러운 피가 있다. 이 피에 대한 검사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李교수는 『사람의 피인지, 동물의 피인지, 그리고 사람 피라면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는 검사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 남자는 피가 묻은 돌멩이 하나를 李교수에게 주며 유전자 검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李正彬교수에 의한 유전자 감식
결과
이 제의를 받은 李正彬교수는 처음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李교수는 검사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자료들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血痕이 묻은 돌멩이와 나뭇잎 등을 건네 받은 李교수는
유전자 감식에 돌입했다.
다음은 李正彬교수와의 일문일답.
- 의뢰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의도 있고, 합리적인 분이었습니다. 일에 대한 집착력이
대단했습니다.』
- 유전자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돌멩이 3개와 나뭇잎 하나에 묻은 血痕 감정 결과가 작년 3월7일에
나왔는데 모두 사람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동물의 피가 아닌가 의심했는데 사람 혈흔이고, 여자 피라는 결과가 나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검사는 한 번으로 끝났습니까.
『두 번째로 작년 8월에 혈흔이 묻어 있는 거즈를 갖고 왔는데
AB형의 남자로 판명되었습니다. 올해 초에 또다시 혈흔이 묻은 돌멩이를 갖고 와 현재 검사를 진행중입니다』
- 의뢰인이 돌멩이를 가져올 때 누구의 혈액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것은 성모의 혈액이라고 했고, 두 번째 것은 예수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여자 혈액인 것으로 판명된 피의 혈액형은
무엇입니까.
『처음엔 혈액형 검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혈액형 검사를 해
보았는데 AB형과 B형일 가능성이 높은데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을 현재 조사중입니다.』
- 의뢰인이 갖고 온 돌멩이나 나뭇잎, 거즈 등에 묻어 있는 혈흔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묻혀 놓았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조작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피가 섞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증거물을 계속 가져오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결과는 같은 사람의 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현대 의학은 기적을
부정』
- 검사는 어떻게 합니까.
『피 묻은 돌을 생리식염수에 넣어 피 속의 백혈구를 끄집어냅니다. 이
백혈구에서 DNA를 추출하는데 의뢰 받은 돌멩이들은 건조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백혈구 추출이 용이했습니다. 피가 말라 있으면 백혈구는 상당히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미라 속의 혈액형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DNA를 한우와 젖소, 고양이, 개, 오리, 염소,
말, 토끼 등 동물의 유전자와 비교했는데 동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유전자가 그 피 속에는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 血痕이
분명합니다』
- 검사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2001년부터 올해까지 3년에 걸쳐서 조사를 했는데, 결과가 똑같이
나왔습니다. 여자 혈액의 경우엔 동일한 여자의 것으로 판명되었고, 남자의 것은 AB형이 확실합니다』
- 聖體 기적이나 聖血 기적이란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의뢰인이 그럼 말을 하면서 羅州의 기적과 관련된 자료들을 잔뜩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에서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 血痕이 묻어 있다는 돌멩이들에 대한 현장 조사는 해
보았습니까.
『羅州에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李正彬 교수에게 유전자 감식을 의뢰한 사람은
朴日圭(박일규·71)씨였다. 朴씨는 미원그룹 산하 기업인 내셔널합섬(現세원화성), 한국중앙기계, 대한리노륨 등 3개회사 사장과 미원그룹 회장
상담역을 역임했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朴씨는 李正彬 교수에게 의뢰한 돌멩이와 나뭇잎, 거즈 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돌멩이와 나뭇잎은 2001년 11월9일에 내려온 聖血이 묻은
것이고, 거즈는 聖體가 피와 살로 변했을 때 그 피를 닦은 것입니다. 그때가 1995년 7월1일 새벽인데, 저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聖血을 거즈로 닦아 준 분은 말레이시아에서 온 프란시스 수 신부입니다. 이탈리아 란치아노 성당에 보관 돼 있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 결과 예수님의 혈액은 AB형이라고 통념화되고 있습니다. 羅州에서 살과 피로 변한 聖體 역시 예수님의 살과 피이기 때문에 거즈에
묻어 있던 血痕이 남자 것의 AB형이라는 유전자 조사 결과는 예수님의 聖血임을 입증하는 단서가 될 것입니다』
필리핀 신부 : 『나는 기적을
보았다』
지난 4월30일 기자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턴 호텔에서 필리핀
신부 제리 올보스(49)를 만났다. 올보스 신부는 1991년 5월16일 한국을 방문, 羅州성당 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자리에서 성모를 대신하여
「나주의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윤 율리아(여·57·본명 윤홍선)에게 聖體를 영해 준(먹게 해 준) 신부로서 율리아의 입 속에 들어간 성체가
가장자리부터 실핏줄이 생기면서 차츰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을 모았다고 증언한 사람이다.
올보스 신부는 필리핀 가톨릭 신자 16명으로 구성된 순례단을 인솔하고
지난 4월28일 한국에 도착, 羅州「성모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서울에 올라와 명동성당과 절두산 聖地를 순례하고 5월1일 출국하기 전
기자와 만났다.
올보스 신부와의 인터뷰 자리에는 필리핀 순례단의 여행 안내를 맡은
예성관광주식회사 徐慶原(서경원·42)대표가 배석, 통역을 맡았다.
다음은 올보스 신부와의 일문일답이다.
-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1984년부터 1988년까지 4년간 한국에서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경기도 광명시의 한 성당에 籍(적)을 두고 한국말도 배웠습니다. 파견근무를 마치고 필리핀에 돌아갔는데 羅州「성모의 집」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91년 5월 羅州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 나주성당에서 윤 율리아에게 영해 준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영성체가 살로 변하고 그 주변에서 피가 생기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聖體 기적을 목격한 이후 저는 더욱 더 공경심을 가지고 미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羅州를 관장하는 광주교구청은 그 현상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능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공지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현상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저는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광주교구청의 결정에 順命(순명)하기는 하지만 광주교구청에서 내린 결정이 다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羅州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은 감춘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윤 율리아가 성모님과 예수님을 대신해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 그녀가 광주교구청의 결정에 順命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겸손하다는 사실은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반증입니다. 羅州는 필리핀內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聖地입니다. 羅州에 가서 병이 치유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체적 치유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앙심이 더 경건해진다는
점입니다』
외국 신도들이
찾아오기도
- 羅州가 聖地로 인정받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포르투칼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 이탈리아의 시라쿠사 같은
聖地도, 聖地로 인정받을 때까지 상당 기간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은 초창기엔 거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羅州도 시작에 불과
합니다. 저는 로마 교황청에서 언젠가는 羅州를 聖地로 인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제리 올보스 신부는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羅州를 순례했다고 말했다.
통역을 맡은 예성관광주식회사 徐慶原 대표는 1991년부터 「성모의
집」을 위시해 한국內 가톨릭 聖地 참배를 원하는 全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여행사를 운영해 왔다고 한다. 徐慶原 대표에 따르면 한국 순례단은
보통 6박7일 일정으로 들어와 서울에서 하루를 머물며 명동성당, 절두산, 새남터 등을 둘러본 뒤 羅州에 내려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徐慶原 대표는 『미국, 멕시코, 캐나다, 벨기에,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홍콩 등지에서 많이 오는데 나주를 참배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羅州「성모의 집」은 매달 한 번, 첫째 토요일에 기도회를 갖고 있다.
지난 5월3일 기도회 날에는 1500여명이 참석했다. 외국인도 수십 명이었다. 羅州에 온 신자들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성모님 동산」에 모여
이른바 「기적수」라는 물로 샤워를 하고「십자가의 길」을 걸은 후,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성모의 집」에 모여 오후9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30분까지 철야기도하고 해산했다.
「성모의 집」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스스로 「기적수」라 부르는 샘은
1992년 6월 27일 聖母의 계시를 받았다는 윤 율리아가 발견했다고 한다. 샘 앞에는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는 윤 율리아의 사진과 샘을
발견하게 된 내력, 그리고 기적수와 관련된 예수의 계시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92년 6월27일 윤 율리아 聖母님의 顯示(현시)를 보여
준 장소를 찾아내어 맨손으로 땅을 팠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메마른 너의 영혼과 육신을 생기 돋아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모여라. 이
물을 마시고 씻어라. 내 어머니와 나를 찾아 이곳에 와서 全心을 다하여 간곡히 부르짖을 때마다 내 불타는 聖心의 빛과 자비의 빛을 내려줄 것이며
내 어머니께서도 성심의 빛과 자비의 물줄기를 내려줄 것이니 그러면 너희의 모든 갈증이 해소되고 은총으로 충만케 되어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윤 율리아의 성모상
샘 옆에는 전남 보건환경연구원에서 조사한 水質 검사표가 붙어 있었다.
색는 1이하로 맑으며, 냄새가 나지 않고 암모니아나 페놀, 세제 등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수소이온 농도(ph)는 7.9로
알칼리성이며, 먹는 물의 기준으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물을 만져 보니 마치 비누칠을 한 것처럼 미끌미끌했다.
「성모님 동산」에는 이 물을 모으는 대형 저수 탱크와 순례 온
신자들이 목욕할 수 있는 샤워시설이 설치돼 있다. 「성모의 집」관리인 朴연훈씨는『철야 기도회가 있는 날이면 하루에 25t 내지 30t가량의 물이
소비된다』고 말했다.
「성모의 집」은 원래 나주川 변의 쓰레기장이었다. 이 일대 400평의
땅을 매입해「성모의 집」을 지은 사람은 각종「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윤 율리아이다. 윤 율리아는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6·25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친척집에 얹혀 살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미용 기술을 익혀 생활을 헤쳐 나간 그녀는
20代 후반에 癌(암)에 걸렸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남편(김만복)의 권고로 성당을 찾았다. 남편은
농촌지도소 소장이었다. 성당에 다닌 지 3일 만에 그녀는 『성경을 가까이 하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癌이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후 그녀는 病者를 낫게 하는 등 기적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3년 어느 날, 폐병에 걸린 朴연훈씨(「성모의 집」관리인)가
소문을 듣고 윤 율리아를 찾아왔다고 한다. 윤 율리아는 朴씨를 위해 기도했다. 병을 고친 朴씨는 윤 율리아가 돈을 받지 않자 고마움의 표시로
聖物 가게에서 산 성모상을 선물했다. 윤 율리아의 미장원(나주시 중앙동 정미용실)에 놓여 있던 이 성모상이 선물 받은 지 2년 후인 1985년
6월 30일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羅州 기적의 시작이다.
눈물을 흘리던 이 성모상이 이듬해인 1986년 10월19일부터 눈물
대신에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이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윤 율리아는 1986년 11월5일 화제의 성모상을 나주 천주교회
사제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나주川변의 쓰레기장을 매입, 「성모의 집」을 지어 성모상을
모셔왔다는 것이다. 「성모의 집」은 1987년 12월8일 완성되었다.
池學淳 주교의 목격담
성모상에서 눈물과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현상은 1992년 1월4일 기해
그쳤다고 한다. 대신 1992년 1월4일부터는 장미꽃 향과 비슷한 짙은 향기를 풍기는 香油(향유)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香油를 흘리는
현상은 1994년 10월23일까지 2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생기자 1986년부터 1992년 사이에「성모의
집」을 찾아온 사제·수도자·평신도가 13만여 명에 달했다고 관리인 朴연훈씨는 말했다. 외국인 방문객도 1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모의 집」에는 방문객들의 방명록이 남아 있다. 방명록에 따르면
원주교구청 池學淳(지학순·작고)주교는 1990년 1월20일 오전 10시경 성모상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池學淳 주교는
방명록에 자필로 「나는 확실히 보았고, 굳이 믿습니다」라고 썼다. 池學淳 주교를 따라온 원주교구청 소속 김 니꼴라오 수녀는 「오전
10시경 주교님을 모시고 경당에 와보니 성모님께서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계셨습니다. 어느 누가 의심한다 해도 분명히 저는 보았습니다」라고
방명록에 적었다.
羅州 천주교회 이천수 주임 신부는 방명록에「1989년 7월5일
김대건(한국 최초의 신부) 대축일에 피눈물을 흘린다는 전화보고를 받았다. 경당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40분, 잠깐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
성모 제단 앞에 나아가 자세히 관찰 해보니 오른쪽 눈에서 흘린 피가 가슴과 치맛자락, 발등에까지 굳어 있었고, 왼쪽 눈에서는 머금은 듯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10분쯤 기도하고 나서 나중에 증거로 삼기 위하여 기념 촬영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것이 이른바「聖體 기적」이다.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은 앞에 언급한 필리핀의 제리 올보스 신부다. 제리 올보스 신부는「은총은 강물처럼」이란 책에 목격담을 이렇게 적었다.
「저는 1991년 5월16일 羅州성당에서 미사 중, 윤 율리아에게
聖體를 영해 준 신부입니다. 그때 저는 필리핀에서 온 순례자들과 함께 聖體 기적을 목격하였습니다. 율리아의 입 속에 들어간 聖體가 가장 자리부터
실핏줄이 생기면서 차츰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첫 번째 기적 이후 이와 똑같은 일이 윤 율리아 신상에서 여덟
번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윤 율리아가 1992년 이탈리아 란치아노 성당에서 미사를 볼 때, 그리고 1994년 11월2일 하와이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세계적 성체 연구가 마르틴 루치아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 중에 윤 율리아의 입에 들어간 聖體가 피와 살로 변하여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모의 집」과 윤 율리아를 둘러싼 이같은 각종「기적」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駐韓 교황청 대사 죠반니 블라이티스 주교가 이를 로마 교황청에 보고한 1994년 11월말부터라고 한다.
駐韓 교황청 대사가 「성모의 집」을 방문한 것은 1994년
11월24일이다. 이날 성모상 위의 십자가에서 알파(α)와 오메가(Ω)문양을 새긴 聖體가 두 개로 쪼개져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광주 교구청의 조사
성 미카엘 대천사가 하늘에서 聖體를 갖고 내려와 세 목동에게 영하여
주었다는 포르투칼 파티마의 기적(1917년 발생)과 같은 현상이 나주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죠반니 블라이티스 주교는 자신이 목격한 일을 로마 교황청에 보고했고,
로마 교황청은 1995년 5월 교황 개인 비서인 몬시뇰(주교와 신부 가운데의 직책)투투를 羅州에 보내『나주 성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교황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外信을 통해 보도되면서 외국인 1만여 명이 성지 참례차
羅州를 찾았다고 한다.「성모의 집」을 관장하는 光州교구청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광주교구청은 1994년 12월30일「나주 본당
윤 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메시지에 대한 조사위원회」(약칭 나주조사위원회)를 결성한다.
1997년 2월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가톨릭계 전문 주간지 일
세그노誌는 3회에 걸쳐「羅州 사건」을 특집으로 다뤘다. 첫 번째 특집 기사의 제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미사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 -
한국의 羅州에서 성 베드로 성당으로」이었다. 이 기사는 마리아 영성 신학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르네 로랑땡 신부가 썼다.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1995년 10월 율리아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그녀는
10월31일 오전 7시30분 교황청 3층에 있는 교황 개인의 소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초대되었다. 교황에게서 직접 성체를 분배받았는데, 이때
성체가 피를 흘리는 놀랍고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녀는 미사에 함께 참여한 한국 주교단 사무총장 신부에게 다가가 입을 열고 그에게 일어난
현상을 보여 주었다. 교황의 비서관 중 한 명이 요한 바오로 2세가 깊은 목상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율리아를 소성당 뒤편으로 데리고 나갔다.
미사 전례가 끝나고 나서, 늘 그랬듯이 교황은 참석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默珠를 하나씩 선사했다. 율리아에게는 그 중 두 개를 선물했다. 그리고 나서 그 변화한 성체를 보존하고 있던 율리아는 입을 열고
교황에게 살과 피로 변한 광경을 보여 주었다. 교황은 이를 관찰하였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율리아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교황은 羅州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성모
마리아의 눈물 사진 앨범이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매우 유심히 관찰했었기 때문이다. 1995년 8월 교황 비서 중 한 명이 나주에 가서 교황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3월21일 한국의 주교들에게 羅州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였는데,
성체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나주 사건에 대해 어떤 암시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광주교구청의 부정적
판단
1998년 1월1일, 광주교구청은 尹恭熙(윤공희)대주교 이름의
공지문을 발표,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신앙적으로 참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증명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고, 오히려 어떤 초능력에 의한
현상일 수도 있다」고 규정했다. 광주 교구청은 공지문에서 「윤 율리아입에 모신 성체가 입 안에서 살 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제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광주교구청은 결론적으로「羅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관련된 유인물,
간행물, 오디오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의 발행과 유포를 공식적으로 금하며 이와 관련된 홍보물을 읽거나 보는 것 역시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
신도들은 이 같은 교도권에 순종하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성모의 집」에서 기도회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지문에 따라 「성모의 집」은
예배금지 조치를 당했다.
광주교구청은 나주의「기적」과 관련한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광주교구청 책임자는 尹恭熙 대주교 후임인 崔昌武(최창무)대주교인데, 대주교 비서실측은『대주교님의 일정상 인터뷰할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비서실측의 한 수녀는 『설사 인터뷰를 한다 해도 대주교님께서는 아마 노 코멘트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서실장이라고 신분을 밝힌 신부는『우리는 나주「성모의 집」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그곳에 가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