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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성모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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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관련 언론 기사들

PD 수첩과 나주 진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나주 공지문에 대한 의견  -  1998년 3월 7일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를 읽고서  -  1998년 3월 28일

한국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니꼴라오 주교님 귀하  -  1998년 5월 11일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  -  1998년 8월 16일

나주의 성체기적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  1998년 11월

성체성사에 대한 소고 (小考)  -  1999년 9월 8일

기적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  2000년 3월 6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 및 교도권에 대한 충실이다 -  2000년 6월 29일

나주의 경당에 내려오신 성체의 진실성을 믿는 이유  -  2000년 7월 5일

나주의 성체 외양 변화들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가?  -  2000년 7월 10일

† 나주 성모님께 관한 의견


나주 성모님께 관한 여러분들의 견해들을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이해를 넓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하는 희망에서 부족하나마 저의 의견을 밝히려고 합니다. 

분별의 필요성

첫째, 나주 성모님께 관하여 토론하면서, 메쥬고리에나 황 테레사 씨 등 별개의 사항들은 함께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들은 연계된 사항이 아니며, 이를 함께 토론하다 보면 불필요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은 성모님의 발현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우리가 이를 더 공부하고 묵상하고 토론해서 이들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메쥬고리에나 황 테레사 씨의 경우 등 아직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타지역의 사항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토론되는 것은 몰라도 나주 성모님과 연결하여 토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메시지, 발현, 기적 등의 보도가 많은 데, 그 중에는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들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지성과 양심을 토대로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또 진리와 교도권에 바탕을 둔 교회의 공적 분별을 존중하고 따라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지한 분별의 노력이 없이 발현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면, 이 발현들을 교회의 교도권 위에다 놓는 결과가 되며,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공적 계시 진리보다 우월 또는 그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과오를 자신도 모르게 범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가톨릭 교회는 발현, 메시지, 기적 등의 사적 계시들의 토대 위에 서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에게 남겨주시고, 성교회를 통하여 전해지고 가르쳐지고 있는 공적인 계시 진리들을 바탕으로 서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그리고 성교회 안에는 그 계시 진리를 세상 끝날까지 오류없이 가르치기 위하여 목자들, 즉 교황 성하를 비롯한 성직자 제도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물론 자신들의 지식과 양심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천주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또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공로로부터의 은총을 신자들에게 분배하여 주는 임무와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양심과 지식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계시 진리들을 철저히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하며, 또 교황 성하와 주교님들, 신부님들께서 전해주시는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의 순종으로 따라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의 양심과 지식이 날이 갈수록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계시 진리들에 순응되고 복종되고 부합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악기의 연주자가 전체 관현악단의 연주에 맞추어가듯이.  우리들 자신의 지식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지식 앞에서 자랑할 것이 못되며, 모든 자연적, 초자연적 진리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 뿐이십니다.  우리가 계시 진리를 깨닫는 것도 우리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주 성령의 은총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창조주 앞에서 겸손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시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적계시에 대하여

그러면, 사적 계시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공적 계시만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사적 계시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의 계시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 당시, 즉 사도들의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추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이미 계시된 진리의 변경도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진리의 추가나 기존의 진리에 대한 변경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는 확증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 어떤 것이라도, 예를 들어 7성사의 핵심 사항에 관하여 어떤 변경을 주장한다면, 이는 거짓입니다.  어떤 예수님의 사진이 예수님의 참 모습인데, 그 사진에 예수님의 성체적 현존이 있다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이는 성체 성사에 대한 추가 사항이므로 거짓입니다.  또, 부활 때 우리의 죽은 육신이 되살아 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육신을 받는다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이는 계시 진리의 변경이므로 거짓입니다.  또 이제는 천주 성자 대신 천주 성부께서 직접 구세주로 오신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계시 진리의 변경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고 계신다라고 주장해도 교리의 변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주 성부와 동등하신 하느님이심을 부정한다면, 이것도 교리의 변경이므로 거짓입니다.  성모님께서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거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치심을 부지런히 익혀서, 이를 일상 생활에서 늘 묵상하며, 이를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의 바탕으로 삼고 또 이에 의거해서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직업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깊은 지식과 숙달된 기술이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령 사업인데, 이를 위해 필수적인 지식인 교회의 가르치심들을 우리가 잘 모른다면 너무나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 즉 전체 교회의 활성화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계시 진리의 교육을 위한 범 교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맡겼으니 내가 없는 동안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전적으로 일임한다,"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고 (마테오 28:20), "진리의 영이 오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주시리라,"고 하심으로써 (요한 16:13)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주실 것임을 다짐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된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유기체, 즉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그 신비체는 성령에 의해 숨쉬면서 진리와 애덕 안에서 성숙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와 인간의 자연적인 세계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실존과 성성과 능력에 의해서 자연적인 차원에만 속해 있던 우리들이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생명과 섭리와 활동 속에 점점 깊이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초자연성을 망각 또는 경시한다면, 우리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변질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상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진리와 계명과 7성사를 주시고, 당신의 실존과 성령의 이끄심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잊는다면, 우리는 교회가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고 친목하는 단체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고 하는 진리를 항상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The First Vatican Council, DS 3005).

그래서, 비록 육안으로 잘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은총 지위에 있는 한, 천주 성령과 우리 영혼 사이의 친교 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이러한 하느님과의 밀접한 친교를 경험하고 있으며, 표현하기 어려운 영적인 감미로움과 평화와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흘러넘쳐서 이웃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또 우리 생활 속의 고통들과 짐들을 더 기꺼이 질 수 있도록 힘도 주시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내적인 평화와 감미로움이 항상 계속되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약한 본성과 자애심 때문에,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선물들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또 자신의 끊임없는 성찰과 통회 그리고 때로는 진실된 고해 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순진성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외적인 징표들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 성녀들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러한 경험을 하신다고 봅니다.  결코 우리가 밝히거나 자랑할 것도 아니며, 또 필요한 사항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기적들은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 상의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주 성령의 가시적인 손길과 맥박들이 개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보다 공적인 차원에서 전체 성교회를 위하여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만 들더라도,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기적의 그림과 메시지를 주신 것은 결코 완디에고 개인이나 그 주변의 몇몇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830년 불란서 빠리에서의 기적의 메달, 1858년 불란서 루르드와 1917년 폴튜갈의 파티마에서의 성모님의 발현과 메시지, 1973년 일본의 아끼다에서의 눈물과 메시지 등도 몇몇 개인들이나 그 지방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와 전 인류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질의 계시들은 그 메시지 내용 상으로나, 또는 징표의 성격을 고찰함으로써 비록 그 계시들이 사적 계시로 분류되드라도, 매우 중요한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징표들에 대해 전체 교회가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안에 내포된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 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징표들을 통해서, 특히 그 시대에 필요한 경고와, 격려와, 진리의 조명을 주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와 뜻하시는 바를 더 확실히 깨닫고 충실히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š문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7조).  구약 시대에도 노아와 요나 등을 통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셨는데, 노아를 통한 경고는 무시되었으므로 세상이 징벌을 받았으며, 요나를 통한 경고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니느웨 성은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 역사 상의 성모님께 관한 교리의 선포라든가, 성인들의 저서들, 성모님의 발현, 메시지, 기적 등은 그냥 하느님께서 심심하셔서 허락하시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방향성이나 목적성도 없이 아무렇게나 주어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마귀의 세력이 여인에 의해서 분쇄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통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를 주셨으며, 구세주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임종 직전에 당신의 어머니이신 그 여인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참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세주의 어머니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재확인하심, 1964).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생활에 긴밀히 그리고 필수적으로 개입되시어 당신의 자녀들이 오류와 죄악으로부터 벗어나 당신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직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성모님의 이러한 활약의 일환으로써, 성모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현존과 원의를 메시지와 여러 가지 징표들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특별한 활동들은 교회가 신앙적, 도덕적 위기에서 벗어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에 바로 도달할 수 있기 위하여 중요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아니시라, 하느님의 피조물이시며, 딸이시며, 여종이십니다.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천주 성자 즉 하느님의 어머님이시며, 천주 성령의 정배이시며, 하늘의 여왕이시며, 우리들 모두의 천상 어머니이며, 구세주의 협력자이시며, 은총의 중개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를 구세주 안에서 양육하시기 위하여 성모님께 필수적인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깊은 성모 신심은 부녀자들이나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지녀야할, 우리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하여 특별히 하시는 일들에 모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겸손하고 진지하게 자녀로서의 사랑으로 귀기울이고 응답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새 신덕 도리를 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실천적인 메시지를 주고 계시며, 또 계시 진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를 들어 나주에서 지난 1985년부터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그 일들의 매개체가 되었던 율리아 씨나 기타 주변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만을 보고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š문에 인간적이고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주란 곳은 초라한 곳이지만,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주로 초라한 곳들을 찾아오셨고 초라한 이들을 도구로 쓰셨습니다.  2천년 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인간이심만을 보고, 그분께서 사셨던 나자렛의 보잘 것 없음을 보고 비웃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도 나주와 거기 있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을 도구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들과 징표들을 지나쳐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주에서 정확하게 도합 700일 동안 눈물과 피눈물을 흘려주시고, 또 정확히 700일 간 계속하여 향유를 흘려주시고, 12번 성체가 볼 수 있는 피와 살로 변하게 하시고, 7번 성체가 위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주셨으며, 병든 가정들이 화목하고, 죄인들이 회개하며, 사제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으며, 불치병이 치유되고,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향기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 등의 숫자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메시지들의 내용 또한 현 세계와 교회 안의 문제점들을 핵심적으로 지적하고 계시며 또 그 해결책도 알려주시며, 그 내용 전반에 걸쳐서 교회의 공적 계시 내용들과 심오하면서도 완전한 화합을 이루고 있는 것 등을 볼 때, 과연 나주에서의 계시들은 지금까지의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들의 종합이다라고 하신 교황청 소속 신학자 마티아스 페레스 메리노 몬시뇰의 말씀(1990년 8월)을 더욱 수긍하게 됩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메시지 시작 당시 성교회에 들어온지도 몇 년 안되었던 율리아 자매가, 아니 다른 어떤 분이라도 그와 같은 장엄하고 조화되고 심오하고 사랑에 찬 메시지들을 조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나주 공지문을 대하면서

이번 윤 공희 대주교님의 공지문에 관한 문제점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지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나주 공지문을 읽고서").  해당 지역의 교구장께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신 사항이니 신자들이 이를 존중하고, 또 그 사목 지침들은 특히 해당 교구 안에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경우에는 다른 교구들에서도 그 공지문이 화합과 존경의 정신 속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지문의 문제점을 논하고 대주교님 결정의 재고를 청원해야만 하는 심정은 매우 착잡한 것입니다.  대주교님은 바로 12 사도들의 후계자 중의 한 분이시며, 이번 공지문 여하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런데도, 공지문의 내용에 대해 이론을 논하는 것은 매우 곤혹스럽고 또 대주교님께는 죄송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를 피할 수 있으면 하는 느낌 간절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공지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라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왜냐 하면, 공지문에는 진리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이번의 부정적인 결정도 그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평신도가 감히 진리 운운하면서, 대주교님의 결정에 수긍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교만이고, 불순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부모님이 어린 자식들에게 밥을 먹여주고 계십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없이 즐겁게 밥을 받아 먹습니다. 만약, 맛이 없다라든지, 더 비싼 고기 반찬을 달라고 하면서 주는 음식을 받아먹지 않고 말썽을 피운다면, 참으로 고약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잘 받아먹고 있던 아이의 입 안에서 갑자기 돌이 씹혀졌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울쌍이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얼른 뱉으라고 하시고, 밥에 돌이 또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밥을 먹여주십니다.  만약 그 때 부모님께서, "아니, 돌은 무슨 돌?  주는대로 받아먹을 것이지.  내가 밥과 돌도 구별 못하고 섞어서 줄 것 같으냐?"라고 역정을 내신다면,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되겠습니다.  교회에서도 교도권이 하느님께로부터의 진리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86조).

빌라도가 체포되어 오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왕이냐?"  에수님께서는, "...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 18:37).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진리들을 가르쳐주시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하는 교회 역시 인간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계명을 지키도록 이끌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나누어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진리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2천년 간의 교회 역사 전체가 온갖 이단들, 오류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느님의 속성이며, 하느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반면, 오류는 마귀의 속성이며, 마귀는 모든 오류의 아버지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주지만, 오류는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끌며 우리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독소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고 (요한 8:32), 진리가 우리를 성화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17:17).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므로, 그의 백성들은 진리 안에서의 생활에로 불리어져 있다,"라고 교회는 가르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5조).  따라서,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지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바로 진리의 단체이며 진리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많은 이들이 가톨릭 교회에로 귀의하는 것은 교회 안에 참다운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우리가 교회 안의 목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그분들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주님께서 주신 권위로써 가르쳐주시며 주님의 은총을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계시 진리가 세상 끝날까지 오류 없이 교회 안에 전해지고 가르쳐질 수 있도록 천주 성령의 이끄심을 통하여 보호하여 주고 계십니다.  특히 교황님과 전 세계 주교님들께서 교황님과 일치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공적인 해석이나 가르치심을 주실 때에는 일체의 오류가 섞이지 않도록 보장하여 주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서, 만약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 안에 어떠한 오류가 단 하나라도 섞인다면,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마귀의 세력이 침투했다라는 말이 되며 이는 교회가 지옥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주님의 약속(마테오 16:18)에 어긋나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주교님들은 교황님과의 일치, 전체 주교님들과의 일치를 통하여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들에 충실하심으로써 그 무류지권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주교님들께서 신앙에 관한 결정을 하실 때에도 무류지권이 적용됩니까?  그렇지 않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p. 300, Dr. Ludwig Ott, Tan Books and Publishers)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교회 역사상에 일부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이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치심을 벗어났던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 네스토리우스 파, 포시누스 파, 루터 파 등등)  오늘의 현실을 보아도, 미국에서는 이미 교황님께서 여성 사제직은 안된다고 거듭 선포하셨는데도, 아직 이를 주장하는 일부 주교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혼란과 고통이 되겠습니까?

나주의 성체 기적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가?

최근에 나주 성모님께 관련하여 한국의 어느 몬시뇰께서 "(나주의) 성체 변화 현상이 교회의 정통 신앙에 위배되므로 .... 굳이 번거러운 과학적 분석을 할 필요가 없을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심으로써, 성체 변화 현상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점이 이번 결정의 핵심적인 근거 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재확인하셨으며, 이는 공지문 안에서도 이미 언급된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가르침에 부합되느냐 않느냐, 즉 진리인가 오류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적인 사항입니다.  만약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참으로 위배된다면, 나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거나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나주를 살리기 위하여 진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꼭 같은 이유로 인하여, 만약 이번 공지문 내용의 일부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시급히 이를 시정해주셔야 하며, 이번 결정의 번복내지는 재조사를 시작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공지문에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이번 공지문 내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체 성사에 관한 부분들입니다.

(1) 공지문에서는 "윤 율리아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제의 축성 후에도 성체의 외적인 형상이 변해서는 안되며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남아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얼핏 보면은 하자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정확히 분석하여 과연 이것이 교회의 가르치심과 부합되는지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위에 밑줄이 쳐진 부분은 교회의 교리를 문자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고 의역하신 것입니다.  특히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분에 담겨진 뜻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않으며, 따라서 교리의 왜곡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공지문에서 언급하시는 원전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적용이 된다고 보는 DS 1652, 즉 트렌트 공의회의 성체 성사 관련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If anyone says that in the sacred and holy sacrament of the Eucharist there remains the substance of bread and wine together with the body and blood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denies that wonderful and singular conversion of the whole substance of the bread into the body, and of the entire substance of the wine into the blood, the species of the bread and wine only remaining, a change which the Catholic Church most fittingly calls transubstantiation, let him be anathema. (번역: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남아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가 완전히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의 실체가 완전히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절하게 "실체 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이 말씀은 가톨릭 교회의 신덕 도리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담겨진 의미에 대하여 일체의 왜곡이나, 첨가 또는 빠트림이 없이 정확하게 해석되고 가르쳐지고 믿어져야 합니다.  특히 밑줄쳐진 부분이 지금 토론의 초점이 되고 있는데, 이는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제가 축성을 할 때 실체 변화만 있고 외형 변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외형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써 이를 극복하기를 주님께서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 교리는 사제의 축성의 효과가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이것이 이 교리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공지문에서는 이를 달리 해석하여 사제의 축성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변해서는 안된다라고 설명하시는데, 이는 교회의 가르치심이 아닙니다.  성체가 이루어진 후에 성체가 감실 안에 모셔지면, 상당 기간 변화없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변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또 성체를 우리가 모시면, 우리 몸 속에서 얼마 후에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율리아 자매의 입에서 성체가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한 것은 분명히 사제의 축성이 끝난 이후였습니다.  율리아 자매가 성체를 영한 것도 사제 축성 행위의 일부가 아니었고, 입속에서 성체의 외형이 변한 것도 사제 축성 행위의 일부가 아니었는데, 여기에 사제 축성의 효과에 관한 교리가 적용되는 것은 부당합니다.

만약 공지문의 말씀이 옳다면, 교회 역사상 일어난 많은 성체 기적들이 다 부정되어야 하며, 그 중 다수를 인정하신 교회의 결정들이 다 실수였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교리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여, 우리의 성체 신심을 확고하게 해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성의에 순종하여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귀중한 성체 기적들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공지문에서는 또 "윤 율리아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의 기적이라고 함부로 주장하고 있는 현상들은,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만 성체가 이루어질 수 있고,"라는 교회의 성체에 대한 믿을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습니다.  1215년에 개최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일반적인 사제직을 주장하는 왈덴시안 이단에 대항하여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만이 성체 축성을 할 수 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DS 802).  즉, 유효한 서품을 받은 사제가 아닌 수도자나 평신도, 이단의 성직자, 기타 그 어느 인간도 성체를 축성할 수 없으며 또 축성해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에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조차도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교리가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항하여 선포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사제직을 주장하는 이단에 대항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가 하느님의 개입하심을 부정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성, 즉 영혼과 육신을 신성에 결합하여 계시기 때문에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동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의 모습을 직접 취하시기 위해서는 실체 변화가 필요치 않으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하기 위해서는 사제의 축성이 필요합니다.  1995년 7월 1일 및 1996년 7월 1일에 율리아 자매는 십자고상의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변하시어 당신의 일곱 상처로부터 성혈을 흘리심을 보았고, 곧 그 성혈이 하얀 성체로 변하여 내려오셨는데, 그 내려오는 모습을 기도회에 참석했던 많은 이들이 목격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성혈이 성체로 변하는 것은 외형상의 변화이며 실체의 변화가 아닙니다.  거기에 사제의 축성이 없었다고 하여, 내려오신 성체를 단순한 면병으로 취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특별한 방식으로 오셨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머리로 왈가왈부할 성질의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아직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우리 시대를 위한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에 대한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우리가 겸손하게 하느님의 징표를 받아들이고 기다려야 할 줄 압니다.

(3) 공지문에서는 또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힘은 성체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개인적 성덕과 관계없이 성사 안에 성사를 통하여 작용한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정확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께서 나주에 오셔서 목격하신 성체 기적을 부정하는 데에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미카엘 대천사가 한 사제로부터 성체를 모셔왔다고 하는 것은 성체 축성이 이루어진 이후였으므로 유효한 성체 축성이 부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항목은 교리의 잘못된 적용입니다.

결    론

기타 공지문 내용 상의 문제점들은 교리에 관한 것이 아니며, 위에 언급된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이 글은 어느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오로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바로 지키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진리의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하여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우리가 경솔하게 배척하기보다는 신중히 분별하고 또 그 신빙성이 인정되었을 때에는 전체 교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교회의 활성화와 개개 신자들의 회개와 전 세계의 교화를 위하여 과거 16세기에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약 천만명의 사람들이 성교회로 귀의했던 것처럼 크나큰 은총의 열매가 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입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율리아가 꾸민 것이고 그 주변 사람들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면, 일순간의 지체도 없이 이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마귀의 장난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우리가 이를 배척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이 엄청난 가능성에 대해 모든 신자들이 진지하게 기도하고 생각해보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모쪼록 이번 일이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의 참뜻을 더 진지하게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성모님과 함께 충실히 수행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께 영원한 영광이 있으시기를.

이 분도 드림
Gresham, OR, 97030
1998년 3월7일

 

†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를 읽고서


가톨릭 다이제스트 1998년 2월호에 실린 나주 관련 기사
를 비판하는 글이 1998년 3월 25일자로 컴퓨터 pc통신 상에 게재되었다.  교회 안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신자들 사이에 토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일치된 견해에로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이러한 토론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자기의 뜻과 같지 않다고 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따라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기 쉽다는 점이다.  토론에 앞서 대전제가 되는 것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가르치심과 그분의 거룩하신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 중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고 하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스스로의 오류나 부족함을 인식하게 될 때에는 즉시 이를 인정하고 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해야 하며, 그 분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먼저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글을 읽고서 그 글을 쓰신 분과 동감하는 점들을 밝히고저 한다.  첫 째, 우리가 무엇보다도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가르치심 즉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들이 이 진리에 의해서 분별되어야 한다.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께서는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는 전제 하에서 여러 가지 많은 내용들을 전개하고 계시는데, 정말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다른 내용들은 고려할 필요조차도 없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얘기는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둘 째,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고 배우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펴실 때 우리 인간들의 의견이나 주장들을 참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과 순종의 정신으로 당신께서 주시는 진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하여 받아들인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성과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들을 로보트처럼, 노예처럼 기계적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의 지성과 자유 의지를 발동하여 그 진리들에 겸손되이 동의하면서 사랑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하느님의 진리들을 순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양심이 성령의 빛 안에서 그 진리들의 진실성을 수긍하게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무한하신 진실성과 지혜와 좋으심에 기쁨으로 감탄하고 찬미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진리의 엄위하심, 그리고 당신의 교회 안의 교리와 교도권을 통하여 그 진리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라고 하는 대전제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을 줄 알며, 그렇기 때문에 이 토론은 반드시 주님 안에서 공통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추가로,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의 내용에 대해서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가 지적했던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첫 째, 공지문의 영문판에 나왔던 "The Magisterium"이란 단어가 "無謬之權"이 아니라, "교도권"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The Magisterium"은 무류지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교황님과 또 교황님과 일치하는 전체 주교님들의 교도권을 뜻한다.  각 교구의 교구장이신 주교님들께서 지니신 교도권은 "episcopal magisterium"이라고 하며, 주교님들은 교황님과 일치하고 또 정통적 교회의 가르치심에 충실함으로써 무류지권에 참여하시게 된다.

 

 

둘 째, 나주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많은 외국 순례자들이 나주를 찾아오게 되는 것이 나라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라고 하는 말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드라도, 지금 신앙과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전혀 부적당하고 유익하지 못한 내용이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께서는,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치심에 어긋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그분의 글 내용 전체가 그 전제 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 "과연 광주 대교구의 공지가 신자들을 합리적으로 설득시키기에 부족한, 또한 신학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이 있는가?" (2) "과연 광주 대교구가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면서 교회의 명에 따르도록 하여 교회 일치를 역행하고 있는가?" (3) "그들이 교회의 교리와는 다른 것을 원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당혹해하는 것은 아닌가?" (4) 계시된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열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 않는가?"  (5) "나주에서의 일이 교회의 신앙적 혼란을 야기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치심에 어긋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대주교님께서 교도권을 가지고 공지문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뜻인 것 같고, 또 거듭하여 "사목"지에 발표된 리순성 신부님의 글("천주교 광주 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 성사의 실체 변화에 대한 이해")을 참조하기 바란다라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리순성 신부님의 글에 대해서는 이미 별도로 논평문들이 한글 및 영문으로 나갔으므로 여기에서는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성체 도리에 대한 이 순성 신부님의 글을 읽고서" 및 한 바오로 형제의 글과 "A New Theology of the Eucharist for Both Catholics and Protestants?").

 

 

사실 대주교님의 공지문에 교회의 가르치심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다.  주교님들은 그리스도의 12사도의 후계자들이시며, 주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가르치시고 신자들을 사목하시는 엄위하신 목자들이시다.  모든 신자들은 주교님들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며, 또 그분들께 순종해야 한다.  이번 공지문의 여하를 불문하고 대주교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또 모든 신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주교님들을 도우시는 사제님들을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고 도와드려야 한다.  그런데, 어찌 감히 그분들의 말씀에 異議를 제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런 일이고, 또 이런 일을 지켜보는 분들에게도 매우 당혹스런 일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신중하지 못하게, 정당하고도 중대한 사유없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으로 온당치 못한 일이며 지탄받아야 될 일일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의 일이라도, 신부님이나 주교님께서 어떤 경우에 잘못된 내용을 말씀하신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자들에게는 성직자들을 판단할 권리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그렇다면, 의문을 제기하고, 토론조차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분명히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제86조).  다시 말해서, 교도권은 진리를 왜곡됨이 없이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사항에 진실성을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교도권의 고유 기능이 아니다.  진실성의 근원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니 교회는 이를 교도권에 의거해서 바로 분별하고 가르칠 임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도권에 의한 분별과 가르침에는 반드시 천주 성령의 도움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또 이에 성직자들께서는 지성과 자유 의지로써 협력하시게 되는 것이다.  교도권은 하느님의 진리에 봉사하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하느님의 도구이다.  그리고, 그 도구가 성직자들게 위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그 도구가 오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주교님이 교도권에 의거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셨다고 하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다는 진리가 부정되거나 변경되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교도권이 진리에 바로 봉사하지 못하고 진리를 왜곡해서 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주교님의 사목 지침들은 특히 해당 교구 안에서 순명되어야 한다.)

 

 

그러면, 주교님의 판단에 그러한 오류가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이는 참으로 신자로서 묻고 싶지도 않은 질문이며, 대개의 경우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를 위해서 그 질문은 답해져야만 한다.  우리는 개별 교구의 교구장 자격으로 주교님들께서 신앙과 윤리에 관한 판단을 하실 때 필연적으로 무류지권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Dr. Ludwig Ott, Tan Books & Publihsers, P.300).  개별 주교님들께서 교황님과 일치하여 교회의 정통 교리에 충실하실 때에는 무류지권에 참여하시게 되지만, 그러한 일치와 충실이 결여되었을 때에는 무류지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교회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의 교회 상황을 살펴볼 때 불행스럽게도 주교님들이나 사제님들께서 진리와 함께 하지 않으셨던 몇몇 예들을 볼 수가 있다.  과거의 네스토리우스 파와 포티누스 파 등은 주교님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 와서도 미국 및 캐나다의 일부 주교님들께서는 교황님께서 거듭 거부하신 여성 사제직을 찬성하고 있으며, 동성 연애를 긍정적으로 보시며, 또 면병 대신 식빵을 사용함으로써 감실조차 없애려고 하시는 현황이다.  (이번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 안의 문제점들은 대주교님께서가 아니라, 공지문 내용의 신학적인 뒷받침을 하신 신학자들께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로 인하여 우리들의 주교님들이나 신부님들께 대한 존경과 사랑에 절대로 금이 가서는 안된다.  교황님, 주교님, 신부님께 불손하고, 또 나라에서는 나라의 권위와 법을 경시하고, 학교의 스승을 없이 여기며,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는 풍조는 결코 하느님의 뜻에 부합될 수 없다.  바울 사도께서도 모든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했으니 이러한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야말로 질서있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건일 것이다.  동시에 권위를 위탁받아 있는 분들은 그 권위를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맡겨진 이들의 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번 나주 관련 공지문 내용에 교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거듭하여 나오고 있는 것은 나주를 살리고 안 살리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발생되는 지극히 중대한 사안이다.  가톨릭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하느님의 진리의 등대이며, 모든 신자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

 

 

이번 공지문 상에서 교리상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들은 주로 성체 성사에 관련된 부분들인데, 이에 대해서는 별지에서 상세히 논해졌으므로,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나주 성모님 관련 공지문을 읽고서"와 "나주 성모님께 관한 의견").  이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개인들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교황청에서 다루어주실 줄 안다.  물론 광주 대교구 또는 한국 주교단 차원에서 해결해 주신다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그리고 성체 성사에 관한 문제는 비록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교회에 관련된 것이므로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논하고 판단함으로써 성체 성사에 대한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전 세계 신자들이 더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께서는 "신앙과 도덕의 보전을 위해 노력하는 목자를 음해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이러한 논의가 우리의 목자들을 음해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또 필자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환시나 기적을 신앙보다 강조하여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나주에서의 일들을 너무나 잘못 이해한 데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미 누차에 걸친 글에서 강조되었지만, 사적 계시들은 공적 계시의 위에 서거나 동등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적 계시를 밑에서 보조하는 것이다. 공적 계시 밑에 종속되어 이에 봉사하지 않는 것이면, 발현이나 메시지 뿐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어떠한 주장이나 학설이나 대화나 그 어떤 것이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는 또 "예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가 뭐가 부족하여 굳이 성모님을 통해 또 말씀하시는가?"라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모든 사적 계시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공적 계시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 완성되었다.  그 계시들을 우리가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길이 단지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셨다 (마테오 7장 21절).  그리하여, 우리가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걸으며 성부의 거룩하신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반성하고 회개하고 또 때로는 고해 성사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됨들을 시정해야만 한다.  우리 교회 전체, 그리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정체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성장되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병이 들 수도 있다.  교회 전반에 걸쳐서 신앙과 애덕이 식을 수도 있고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오류들이 침식해들어올 수도 있다.  이러할 때에 교회를 끝까지 지켜주시기로 보장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들에게 경고와 격려와 도움을 보내주신다.  어려운 시기에 큰 성인들을 보내주시기도 하시고, 성모님을 보내시기도 하신다.

 

 

16세기에 성모님의 기적 그림과 메시지를 통하여 천만 명에 가까운 멕시코 민족 거의 전부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주신 것은 하나의 좋은 예이다.  그 후에도, 빠리에서의 기적의 메달, 루르드, 파티마에서의 발현과 메시지 등을 통하여 교회의 어머니로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로서, 그리고 보속의 협조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하여 깨우쳐주고 계신다.  이는 새로운 진리를 펴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셨던 진리가 더 깊이 이해되고 더 강력히 위력을 발휘하게 됨을 뜻한다.  마치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교회도 그리고 교회 안의 진리에 대한 인식도 시대를 흐르면서 성숙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복음서의 메시지가 이미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성모님을 통하여 또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의 흐름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는 동시에 우리의 구원을 원치 않는 마귀와의 투쟁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담과 에와를 죄에로 이끈 마귀는 아직도 끊임없이 오류를 인간들 마음 속에 주입시키고, 인간들을 분열시키고, 타락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귀의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수많은 거짓 발현, 거짓 기적들을 들 수 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거짓 메시지와 거짓 발현들에 매혹되어 휩쓸리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진리에 의거해서 냉철한 분별을 해야 하며, 또 교회에서도 그러한 미신적인 현상들을 단호히 격파해주실 것을 기대한다.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부합되는지 하는 것과 참된 징표라고 볼 수 있는 진정한 기적들이 있는가 하는 점을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충분히 분별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심 활동이 그러한 잘못된 곳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그리고 신자들이 공적 계시를 보다 깊이 확실히 이해하게 되도록 신학자들의 적극적인 공헌이 기대된다.

 

 

또 한 편으로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무조건 배격하는 현대주의 사상 역시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며, 우리 인간들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시고, 초자연적인 생명을 주시며, 초자연적인 은총의 도움을 주고 계신다.  교회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현실이다.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육적 현실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육적 현실을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올려주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서 하느님과 그분께 관한 모든 것들을 아주 먼 곳으로 밀어내어버림으로써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와 우리의 자연적인 세계를 격리시키고저 하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성을 취하사 우리 가운데 실제로 거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성부께로 이끌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사랑하며,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천주 성자의 강생 및 그분의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는 보속의 협조자, 우리의 모후이신 티없으신  사랑의 성모님께 의지하는 작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분도
Gresham, Oregon,  U. S. A.
1998년 3월 28일

 

 

 

 

† 한국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니꼴라오 주교님 귀하

 

 

† 찬미 예수

 

존경하올 정 주교님께, 한국 주교회의 의장정

 

 

안녕하십니까?  주님을 대리하여 12 사도의 후계자로서 수많은 신자들을 돌보시고 이끌어주시는 고국의 주교님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드립니다.  특히 복잡한 이 현대에서 사목을 하시는 데에는 수많은 애로들이 따르는 줄 알지만, 주님께서는 주교님들의 노고에 대하여 열배 백배의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해외에 있는 평신도로서 우리 교회가 처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평신도들의 임무는 교황님, 주교님들, 그리고 신부님들의 지도에 충실히 따르는 것임을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동시에 성직자들께서는 신자들이 그들의 생각과 애로 사항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을 들어주시고, 또 필요하면 이를 사목 활동에 참조해주실 것을 희망하면서 감히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뜻밖에 닥친 나주 성모님께 대한 부정 발표

 

 

저는 대구 출신이며, 대학과 군복무를 마친 후 1972년에 도미하였습니다.  1988년에 신문을 통하여 나주의 일에 대하여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1991년부터는 몇 차례 방문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적 계시는 성교회의 가르치심에 완전히 부합되어야만 하며, 또 신자들은 교회의 공적인 판단에 순명해야 한다는 것을 줄곧 강조해왔습니다.  그리고, 나주에서의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광주 대교구에서 이를 부정하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부정적인 발표를 대하고 나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교회의 이끄심과 양심의 판단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장로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해서 들어온지 35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 그러한 괴리 현상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일은 참으로 뜻밖이고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마음속의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았으며, 또 많은 외국 성직자들 및 신자들도 이번 일에 대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동안의 저의 생각들을 정리하여 한국의 교회를 맡고 계시는 주교님들께 報告 내지 호소를 드리고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주 대주교님의 교도권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먼저, 많은 이들이 과연 광주의 대주교님께서 신자들의 집회를 금지하고, 출판물을 금지하며, 말하는 것까지도 금하실 권한이 있으신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천부의 권한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하고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주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지문에서 나주의 일들이 부정된 이유는 그곳에서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š문이라고 지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주의 일들은 오류이며, 이단이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판단이 옳다면, 저는 공지문에 발표된 여러 가지 사목 지침들이 완전히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상치되는 것이라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 즉 집회나 출판물이나 말하는 것까지도 금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성교회에서는 지난 2,000년간 오류, 즉 이단에 대해서는 항상 단호했으며, 일말의 타협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진리이시고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시니, 추호의 오류나 악도 수용할 수 없다고 저는 확고하게 믿습니다.  죄인에 대하여서는 사랑과 관용으로 대해야 하지만, 죄와 오류 그 자체에 대해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광주 대주교님께서 과연 그런 단호한 사목 지침들을 명하실 권한이 있으신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저는 물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각 교구의 주교님들께서 오류나 악한 표양의 유포에 대하여 단호한 제재 조치들을 취하실 정당하고도 충분한 권한과 임무를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는 교도권의 정당성이 아니라, 진리에의 부합성입니다.

 

 

지금까지 성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사적 계시의 보도들에 대한 조사가 있었고, 그 일부는 인정되었으나, 많은 것들이 부정되었습니다.  부정되는 이유는 대개, "조사해본 결과 초자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불충분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주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조사해보니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가 없더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 즉 교리에 어긋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국의 어떤 몬씨뇰께서는 "나주의 일들이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충분한 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은 사적 계시의 보도에 대한 판단 중에서도 가장 부정적이며, 가장 치명적인 판단입니다.  세상 법정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사형 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조사가 불충분했다면, 다시 조사하면 되겠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더 이상 조사해볼 필요조차도 없으며, 시급히 내다버려야 하고 피해야 할 오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공지문의 내용이 이처럼 사적 계시의 보도에 대해 극형을 선고한 것은 참으로 교회 역사 상 매우 독특한 예가 될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지금 나주에 관련하여 논하여야 될 사항은 광주 대주교님의 교도권 행사가 합법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주를 부정하게 된 근거로 지적된 "진리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옳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참으로 나주의 일들이 진리에 어긋난다면, 나주의 일들은 이쯤에서 다들 덮어두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것도 충분히 못하는데, 오류에 집착하여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이유로 인하여, 만약 이번 공지문의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판단 자체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이 또한 묵과할 수 없는 성질의 사안이라고 봅니다.  가톨릭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완전한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치는 곳이며,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줄 것이기 ‹š문에, 만약 교회의 일부 지도층에서 오류를 말씀하셨다면, 이를 시급히 시정해주시는 것이 필요하며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양들이 먹는 먹이에 오류의 독이 섞여있는데 이것이 방치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상황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교도권의 행사가 교리의 잘못된 제시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는 진리를 오류없이 보존하고 가르치는 것을 至上 임무로 하는 성교회로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목자들께서 먼저 이를 시급히 시정해주셔야 된다고 봅니다.

 

 

성체 도리에 관한 공지문 상의 문제점들

 

 

이미 별지들에서 언급되었지만, 이번 공지문에서는 특히 성체 성사에 관한 교리들을 성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치심과는 다르게 제시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1.  "사제의 축성에 의하여 빵과 포도주가 실체 변화를 한 뒤에도 그 외양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남아있어야 된다,"라는 말씀은 교리의 잘못된 제시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의 교리에서는 사제의 축성으로 인하여 빵과 포도주의 외양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실체가 주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한다고 하여, 사제의 축성의 효과가 어떠한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트렌트 공의회, DS 1652).  그런데, 축성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남아있어야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교리에 없는 뜻을 추가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교리의 변조라고 생각됩니다.  뿐 아니라, 나주 조사 위원회의 총무이신 리 순성 신부님께서는 "사목"지 1998년 3월호에서 성체 성사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부정하는 글을 발표하셨습니다.  리 신부님께서는 그 글을 광주 대주교님의 공지문 내용을 설명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쓰셨다고 하셨으며, 그러한 새로운 성체 신학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일치라고 하는 대전제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리 신부님께서는 "신학 전망"지 1998년 봄호에서 "교회는 오직 성령께만 순종하는 이들의 공동체여야 한다,"라고 하시며 교계 제도와 따라서 교도권을 부정하는 글을 발표하셨습니다.

 

 

2.  "성체는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의 축성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다,"라는 말씀도 얼핏보면 하자가 없는 듯 하지만, 이 역시 교리의 왜곡이라고 생각됩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및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도 성체 성사를 거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에 대한 교리를 반포하신 것이며, 그 교리의 내용은 위의 말씀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성체의 축성은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만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 교리입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조차도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직접 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뜻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봅니다.

 

 

3.  공지문에서는 죄 중에 있는 사제도 유효한 성사 집행을 할 수 있다라는 이유로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께서 오셨을 때에 일어난 성체 기적을 부정하셨는데, 그 때의 기록을 읽어보면, 사제의 유효한 성사 집행이 부정된 적이 없으므로, 위의 지적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번 나주의 부정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로 인용된 내용들이 사실은 교리의 왜곡이었다라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주의 징표들을 진실로 받아들이시며 증언하신 몇 분의 주교님들의 의사는 왜 무시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 주교님들 역시 성교회 안에서의 정당한 교도권의 일부를 담당하고 계신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주에서의 일들이 일차적으로 광주 대교구의 관할 사항임은 물론이지만, 그 일들은 성체 성사, 성모 신심, 교황님께의 충성, 사제직의 중요성, 고해 성사의 필요성, 가정의 평화, 교리에의 충실, 낙태 중지 등에 관한 것으로서 광주 교구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 및 전 인류를 위하여 지극히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뿐 아니라, 성체 기적, 성흔, 회개, 병의 치유, 장미 향기 등이 누차에 걸쳐서 외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나주의 일에 대해서 직접 관련된 세계의 여러 주교님들과 많은 신부님들의 증언과 의사가 존중되고 고려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무엇보다도 교리상의 오류는 지체함이 없이 시정이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는 사실 검증이나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일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줄 압니다.

 

 

저희는 이번 공지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성직자도 원망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 메시지들과 오류와 사이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주교님들께서 그러한 소문들에 대해서 극히 염려하시고 또 그 분별에 있어서 엄격한 규준을 적용하시는 데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나주에서의 지난 13년 간의 일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상상을 워낙 초월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쉽게 인정해주기 어려우셨던 점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에 닥친 부정 발표와 그에 따른 어려움들에 대하여 주교님들께 아무런 원망도 불평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워주신 주교님들께의 깊은 존경과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리상의 오류는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시정되어야만 한다고 보며, 뒤따라서 조사상의 미흡했던 점들도 보완되어야 할 줄 압니다.  오류는 영신상의 독이므로, 그대로 방치해두면 독이 퍼지고 전신을 마비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류가 포함된 내용에 근거를 둔 이번의 사목 지침들도 하루 속히 해제시켜주시기를 청원드립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번 일의 시정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께로부터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주님과 주님의 진리에 봉사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므로, 순교자의 정신으로 이번 문제를 시정하여 주신다면, 전 세계의 신자들은 광주 대주교님 및 모든 한국 주교님들께 비판은커녕 깊은 찬사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하여 한국 교회로서는 가장 자랑스럽고 찬란하고 보람있는 역사의 새 장이 펼쳐지기 시작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국의 주교님들 및 모든 사제님들께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과 보호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분도

Gresham, Oregon, U. S. A.

1998년 5월 11일

 

 

 

 

†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여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고 죽음에로 몰고간 이들은 바로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의로움에 차있던 그들이 막상 하느님께서 그들 앞에 오셨을 때 그분을 내친 것이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전하고 행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하느님께서 위탁하신 권한과 지위를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데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만이 모든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심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틀에 박힌 사고 방식과 생활 습성 속에서 안주하려던 그들이 참된 진리가 그들의 앞에 제시되었을 때 이를 솔직하게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배척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그리고 하느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자세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이러한 위선적인 태도에 대하여 많이 꾸짖으셨다 (마태오 15:8-9).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을 얻을 수 없을 것임을 밝혀주셨다.

오늘날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특히 주님께서 주시고 교회에 위탁하신 가르침들을 인간들의 편리에 맞게 적응시켜서 이를 정착시키려는 이들에게는 "순수한 진리," "변질되지 않은 복음서의 교훈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란 개념이 도무지 취향에 맞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0년 간 교회가 가르쳐오고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정성껏 실천해온 주님의 가르치심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교회 안에 얼마나 참된 진리가 가리워져 있는지를 잘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 심지어는 일부 성직자들까지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심을 부정하고 있다.  아직 사해지지 않은 대죄가 있을 경우 영성체에 임하기 전에 고해 성사부터 보아야 된다고 하는 교회의 가르치심이 너무나 자주 무시되고 있다.  미사 참례의 의무가 있는 주일과 축일에 미사를 임의로 빠지는 것이 대죄가 된다는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얼버무려지고 있다.  아예 죄라는 개념조차가 흐려져 있다.  죄의 개념이 흐려지면 그 반대의 개념, 즉 거룩함과 성화의 개념도 흐려지며, 구원과 보속의 필요성까지도 모호해진다.  개신교 신자들이 흉을 볼까봐서인지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표시하고 실천하기를 자제하고 있는 경우 또한 얼마나 많은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자기 부정과 희생 보속의 진리 또한 낡은 개념에 불과하다는 생각 역시 널리 만연되어 있다.  교회가 세상을 진리로써 교화한다기보다는 교회를 세상에 타협시키고 그 진리들과 계명들을 중화시키려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 아닌가.  16세기에 개신교가 나와서 성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갔을 때 교회 안에서는 트렌트 공의회를 통하여 질서와 기강을 다시 잡음으로써 교회는 새로운 힘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현대화, 개인화, 세속화의 정신이 교회 내부에 널리 침투함으로써 교회를 안으로부터 병들게 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진리가 가려지고 기강이 흐트려지고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가 지옥의 권세에 굴복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여 주셨으니, 이러한 문제들이 결국은 수습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심각하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그 심각성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로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나주에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하여 수많은 징표들을 보여주시고 중요한 메시지들을 주심으로써 인간들이 영적인 잠에서 한시 바삐 깨어날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이 꾸며낸 것도 아니고, 우연히 자생한 일도 아니며, 하느님께서 심심풀이로 하시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 일들을 너무나 경솔하게 지나쳐버리면서 안심하고 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이를 부정해버린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이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우려를 야기시키고 있다.  해외의 많은 신자들이 "어째서 한국 교회에서는 교리를 잘 모르는가?"라고 하는 기막힌 질문을 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이 이번 공지문이 대주교님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니, 그 내용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 신자들이 의문을 제기할 성질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의 가르치심을 잘 모르는 데에서 야기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5조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즉, 교도권은 진리를 부여하는 권한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의 진리를 바르게 전해야 하는 봉사의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교도권에 의거한 공지문에 진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이를 시급히 인정하고 시정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것만이 전체 교회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다.

또 어떤 이들은 "나주에서의 일들이 설사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공적 계시, 즉 믿을 교리(信德道理)가 아니므로 반드시 믿어야 할 의무가 없다,"라고 한다.  물론 하느님께서 나주에서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 후에는 새로운 공적 계시가 있을 수 없음을 교회에서 가르치신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6조).

그러나, 나주에서의 일들이 새로운 믿을 교리라고 주장되거나 암시된 일도 없으며, 또 교회에서는 믿을 교리를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구원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믿는 것만으로 구원된다고 하는 것은 루터가 범한 오류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마태오 7:21). 그러므로, 나주에서의 일들이 믿을 교리가 아니므로 무시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질문이다.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들이나 마귀에 의한 것인가를 신자들 각자가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기초하여 분별하여야 하며, 또 조사 위원회에서 교회의 공적인 분별을 위하여 조사해야 할 사항이다.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면 아무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모두가 정성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할 사안이다.  우주 창조 및 인류 구원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하느님 중심의 역사이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해놓으시고, 또 구원 사업을 이룩해놓으시고 멀리 가버리셨으므로 나머지는 인간들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인류 역사의 목적은 하느님뿐이시며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역시 하느님이시다.  대개는 자연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때로는 초자연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하심이 사도 시대에 끝난 것도 아니고, 교회 역사 내내 계속되어 왔으며,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에 겸손되이 시선과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하며, 교회에서는 이를 막을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도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주에서뿐 아니라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진정한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대하여 신자들은 겸손하고 진지하게 마음 문을 열고 있어야 하며, 또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기적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한 특별한 기적들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중요한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천주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천주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다.  이는 단순히 기적이라기보다 삼위 일체의 도리를 드러내주시는 대단히 중요한 진리의 계시였다.  예수님의 현성용의 기적 역시 당신께서 인간이신 동시에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는 중대한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나주 및 세계의 여러 곳에서 성모님 상을 통하여 눈물과 피눈물을 보여주시는 것 역시 기적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보속의 협조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을 재강조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며 또한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니고 계시는 지극한 사랑의 사실을 역력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향유와 향기 역시 성모님의 말씀대로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을 의미하는 징표들이다.  성체가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하는 기적들은 주님께서 성체 성사 안에 실제로 계신다고 하는 중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금 깨우쳐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적들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는 특별히 중요한 징표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징표들을 우리가 배척한다면, 그 징표가 담고 있는 진리 자체에 대한 배척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루르드에서의 성모님 발현과 메시지의 핵심은 성모님의 무염 시태(無染 始胎) 도리였다.  따라서 루르드의 발현, 메시지, 기적적인 치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자로서의 의무는 아니라 할 지라도 이를 거부한다면 무염 시태 도리조차도 거부 내지 경시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모든 징표 중에서도 인간으로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그리스도께서 가장 위대한 징표이실 것이다.  즉 진리 자체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육을 입으시고 우리 사이에 오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징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징표는 2,000년 전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즉 주님의 실체는 성체 성사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으며, 주님의 진리는 교회의 가르치심으로 이어져나가고 있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기타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의 은총을 주시는 것은 성사들을 통하여 전승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성사들을 행하는 사제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고 계신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지속적인 징표인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징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자유의 행사에는 책임이 수반된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지고한 징표를 받아들인다면 영생이 주어지겠지만, 그분을 거부한다면 구원에의 길이 열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하느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생각하고 또 남들에게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방문하심을 배척했다면, 하느님을 거부한 것이 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징표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무시하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주에서 주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진리들을 재조명, 재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즉 교회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계속되는 하느님의 개입하심이다.  만일 나주의 일들이 허위라면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헛된 것을 경솔히 받아들이는 것이 벌받을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를 거부한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징표들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기 때문이다.  

"나주의 일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라는 방관의 자세를 취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일이 허위라면 방관을 하든 배척을 하든 문제될 것이 없지만, 참으로 하느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데 이를 방관한다면 결국 배척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일을 배척하면서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해도 허사일 것이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른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오 6:33)."     
 

                                이 분도
Gresham, OR,  U. S. A.
1998년 8월 16일

 

† 나주의 성체 기적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수많은 초자연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추정되는 사건들만 교회의 정식 검사의 대상이 되었다.  더러는 인정되었으며, 더러는 부정되었다.  교회에서 부정적인 판단을 내릴 때에는 대개 "검사해보았으나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한국 나주의 경우는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광주 대교구의 조사 위원회에서는 나주에서의 사건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제대로 조사다운 조사도 하지 않은 채 결론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나주 관련 공지문이 발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의 어느 몬씨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데, 번거롭게 조사하느라고 수고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어떤 사안이 참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날 경우에는 그 일이 교회 안에 발붙일 곳은 없다. 왜냐 하면, 교회가 수행해야 할 至上 과제는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의 가르치심을 오류없이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당국에서 어떤 메시지나, 발현이나, 기적이나, 신학적 이론이나, 주장이나, 예절 또는 신심 행사가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대개 그 사안들의 교회 안에서의 생명은 끝장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현재 한국 교회 내에서의 나주에 관한 분위기는 심각하다.  대다수의 한국 신자들은 나주를 방문해도 안되고, 선전해도 안되며, 연구하거나, 토론을 해도 안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나주에 가는 신자들은 돌아와서 고해 성사를 보라고 말하는 신부님들도 계신다.  나주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는 것은 신앙과 순명에 위배되는 죄라고 주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야 할 질문은 한 지역 교회의 교도권이 전체 교회와의 일치가 결여되고 또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부합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행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광주 대교구에서는 왜 나주와 관련된 성체 기적들을 친히 목격하신 교황 성하와 다섯 분의 주교님*들의 의견을 들어봄도 없이, 그리고 나주에서의 수많은 징표들을 경험한 신부님들과 평신도들 대다수를 인터뷰함도 없이 서둘러서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던가?  그리고, 한 지역 교회의 교도권이 전체 교회와는 별도로 그 지역 교회만을 위한 독자적인 진리의 선언과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인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교도권은 하느님의 백성이 빗나가거나 믿음이 쇠약해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며, 올바른 신앙을 오류없이 고백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890)

주교들의 권한은 교황의 지도 아래 전체 교회의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895)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 (#86)

(註:  나주에서 또는 나주와 관련하여 성체 기적을 목격하신 주교님들은 전 교황 대사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 캐나다의 로만 대닐랙 주교님, 제주 교구의 김 창렬 주교님, 말레이지아 시부 교구의 수 도미니끄 주교님, 그리고 교황청에서 오신 데르꼴레 주교님 이렇게 다섯 분이시다.  그리고 1991년 1월에 나주에 오셨던 원주 교구의 지 학순 주교님께서는 성모님의 피눈물과 움직이는 모습을 목격하시고 "나는 확실히 보았고 굳이 믿습니다,"라는 증언을 쓰셨다.)
 

교회의 정통 교리와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 상의 설명과의 상이점(相異点)

(1)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윤 율리아 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 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들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하에 이루어지는 성체 성사에 대한 믿음에 도움이 되는 표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혼란을 야기시키는 표징들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공지문 1.2. (3))

즉, 사제가 축성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외양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교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율리아 씨의 입 속에서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것은 이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가르침인가?  사제의 성체 축성이 끝난 이후에도 성체의 외양, 즉 빵과 포도주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고 교회에서 가르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들이 성체를 모신 후 성체가 우리 몸 속에서 변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가?  또 성체를 감실 안에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모셔둔다면, 서서히 외양이 변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 또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교회 역사 상에 일어났던 수많은 성체 기적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중 다수가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았고,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성지를 방문하신 교황님들도 계신다.  (예를 들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1263년에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이태리의 볼세나를 방문하시고 성체에서 성혈이 흘렀던 제대에서 미사를 거행하셨다 (성체 기적들, 죠앤 캐롤 크구즈 저, 미국 Tan Books 출판사)

성체 축성에 관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남아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가 완전히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의 실체가 완전히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절하게 "실체 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 공의회, DS 1652)

이 교리에서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 그대로 남아있고"라는 부분의 뜻은 사제가 성체 축성을 할 때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실체로 변하게 하는 효과만 있고, 빵과 포도주의 외형을 변하게 하는 효과는 없다라는 것이다.  외형 변화가 없는 것은 이 엄청나게 고귀한 성사를 우리가 모시기 전에 신앙과 사랑의 마음 자세를 재확인할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 결핍되어 의심하고 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성사를 받지 말고 먼저 자기 성찰과 통회를 해야 할 것이며 필요하면 고해 성사까지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모실 바른 자세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체 축성이 끝난 후에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으로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변화된다면, 이는 교회의 가르치심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8세기에 이태리의 란치아노에서는 성체 도리를 의심하면서 미사를 드리던 사제가 성체 축성문을 외우자 말자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 기적이 교회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기적을 인정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이러한 기적들은 기만이 아니라 성체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계신다고 하는 진리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신학 대전, Part III, Question 76, Article 8).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 상의 문제점은 (i) 성체 성사 관련 교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의미, 즉 사제에 의한 축성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 변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어야 된다고 하는 새로운 뜻을 첨가시킴으로써, 마치 성체 축성이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변화시키고 그 외형은 변하지 못하게 계속 붙들고 있는, 말하자면, 두 가지의 효력이 있는 듯한 주장을 한 것이며, (ii) 성체 축성의 효과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교리를 성체 축성 이후에 성체의 외형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에까지 연장 적용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성체 축성 이후에 성체의 외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교리를 선언한 일이 없다. 따라서 교회는 성체 축성 후에 성체의 외양이 변하는 기적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르침을 편 일이 없다.

(2) 광주의 공지문에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윤 율리아 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의 기적이라고 함부로 주장하고 있는 현상들도 유효하게 서품 받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만 성체가 이루어질 수 있고 ...라는 교회의 성체에 대한 믿을 교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공지문 1.2.(1))

제 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는 일반적인 사제직을 주장하는 왈덴시안 이단에 대항해서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만이 성체 축성을 할 수 있다라고 선포하였다 (DS 802).  역시 평신도의 사제직을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 대항하여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교회 안에는 특정한 사제직이 설정되어 있음과 사제들만이 성체 축성권이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DS 1764).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들의 참 뜻은 유효하게 사제직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성체 축성을 할 수도 없고 또 하려고 시도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하느님께서도 개입하실 수 없다라는 뜻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성체가 무엇인가?  성체는 어떤 특수한 물건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신성과 인성을 완전히 가지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시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체는 동일하시다.  단지 지상에서의 성체에는 주님의 영광과 아름다움과 엄위로움과 권능이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체는 예수님의 현존을 담고 있는 물체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신 것이다.  최후의 만찬 때, 주님께서는 "이 빵 안에는 나의 몸이 들어있다,"라든가, "이 포도주는 나의 피를 담고 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는 나의 몸이다," "이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 나의 피이다,"라고 하셨다 (마테오 26:26, 28).  성체가 사제의 축성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시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체가 주님 당신이시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며, 주님의 실재하심과 전능하심을 사제직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제직이 주님과 주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직분이며, 사제직의 모든 거룩한 권능이 주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51).   

나주에서 성체가 내려오신 기적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i) 미사로부터, 또는 감실로부터 천사가 성체를 모셔왔다.  1994년 11월 24일, 당시 교황 대사님께서 나주를 방문하셨을 때, 기도 중에 갑자기 율리아 씨의 손가락들 사이에 큰 성체가 반쪽 씩 두 손에 쥐어졌는데, 잠시 후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를 통하여 성 미카엘 대천사로 하여금 미사로부터 성체를 모셔오게 하셨다고 확인해주셨다.

(ii) 주님께서 직접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로 축성하셨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至高하시고 영원하신 사제이시며, 성체 성사를 설립하신 분이시니 이러한 일을 하시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실 것이다.  

(iii) 천국에 계신 주님께서 직접 성체의 외양을 취하여 오셨다.  이 경우에는 실체의 변화가 있은 것이 아니고 외양의 변화만 있는 것이므로, 사제의 축성이 필요치 않다. 예를 들어, 1995년 7월 1일, 율리아 씨는 십자고상의 주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변하심을 보았고, 곧 일곱 상처에서 성혈이 흐름도 보았다. 그리고 그 성혈이 일곱 개의 성체로 변하여 밑으로 내려왔다. 이 때 성체가 내려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도 많았고, 일곱 개의 성체가 성모님 상 앞에 세차게 내려와 닿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도 많았다.  다음 날 대주교님의 명에 의해서 일곱 개의 성체가 영해졌는데, 맨 마지막 성체를 영한 율리아 씨의 입속에서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외양으로 변하였다. 말레지아에서 오신 수 프란시스 신부님께서 손가락으로 성혈을 찍어내어 흰 수건에 닦았다. 이 수건은 지금 과천의 파 신부님 계시는 곳의 소성당에 모셔져 있으며, 그 수건에 묻은 피의 일부가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 DNA 검사를 받았는데 사람의 피임이 판명되었다.  

나주에서 내려오신 성체들이 축성되지 않은 보통 면병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정당한 근거 위에 서있지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사랑과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추측과 의심 위에 서있을 뿐이다.  성체가 보통 면병으로 간주된다면 독성(瀆聖)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나주에 내려오신 성체들이 성체가 아니라 보통 면병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나주에서 면병이 내려오도록 인간들이 조작했음을 밝혀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작이 있었다는 하등의 근거가 없으며, 마침 1997년 8월 27일에는 성체가 내려오시는 모습이 비디오에 명확하게 찍혔으며, 또 그 내려오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증인들도 많으므로, 하등의 인간적인 개입이 없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사 위원들 중에는 그 광경이 비디오에 찍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그것이 조작의 증거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신부님들도 계시지만 (녹지 않는 소금, 리 제민 신부 저), 나주의 경당에는 천정 양쪽에 두 개의 비디오 카메라가 항상 장치되어 있어서 기도회 시간에 경당 밖에 있는 이들도 화면을 통해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귀중한 손님이 오시면, 기적이 있든 없든 그 방문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것이 常例이다.  그러므로, 조작된 기적을 찍기 위하여 일부러 비디오 카메라를 준비해두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억측이며 중상(中傷)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직접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하는 사실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상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환영할 수도 있고 배척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도 자유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 역사 상 기적적으로 성체를 영하게 된 예는 매우 많이 있었다.  그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성체 기적들, 죠앤 캐롤 크구즈 저).

(i)  서기 4 세기 안씨라의 주교였던 성 클레멘스는 감옥에서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주님께로부터 직접 성체를 받아 영했다.
(ii)  13세기의 성 보나벤뚜라는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iii) 14세기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주님께로부터, 때로는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iv) 16세기의 성 파스칼은 젊은 시절에 일 때문에 성당에 갈 수 없었을 때 여러 번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v)  16-17세기의 빠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주님께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vi) 1917년 폴튜갈의 파띠마에서는 천사가 성체와 성작을 세 아이들에게 모시고 왔다.
(vii) 오상을 받았으며, 1962년에 선종한 테레사 노이만 수녀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기적적으로 혀 위에 나타난 성체를 모셨다.

위의 기적들은 1994년 11월 24일과 1996년 7월 1일에 율리아 씨가 기적적으로 입에 성체를 받았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 외에 나주에서 성체가 성모님 상 앞의 제대에 또는 마루 위에 내려오신 경우들은 역사 상 전례가 없는 매우 독특하고 특별히 중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체가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의 성체가 이미 영해졌지만,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께서 오셨을 때 내려오신 큰 성체의 작은 두 조각과 같은 날 내려오신 작은 성체 전부는 지금 파 신부님께서 계신 곳의 소성당에 모셔져 있다.  1997년 6월 12일 김 창렬 주교님께서 오셨을 때 내려오신 성체와, 1997년 8월 27일 파 신부님께서 오셨을 때 내려오신 성체는 광주 대교구청으로 모셔져갔다.  

나주에 내려오신 성체가 그냥 면병이 아니라 참된 성체라고 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진실하시다라고 하는 진리이다.  나주의 경당에서 성체가 내려오셨을 때 경당 안에 있던 이들은 이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참 성체로밖에 볼 수 없었다. 만약, 그 때의 상황 하에서, 하느님께서 축성되지 않은 면병을 보내셨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혼란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말이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하느님께서 보통 면병을 보내실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무관한 징표를 보내실 리도 없고 우리를 혼란으로 이끄실 리도 없다.  나주에서 내려온 성체가 면병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고, 스스로 속으실 수도 없으시다 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DS 3008).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교리 상의 문제점들은 사소한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가르치심이며 따라서 일체의 오류가 포함될 수 없다.  교회의 가르침은 구세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류의 암흑을 물리치기 위하여 주시는 진리의 빛이다.  빛과 암흑은 본질적으로 반대의 개념이며 서로 타협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 진리가 오류없이 보존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교황 성하와 그리고 모든 주교님들께서 교황님과 함께 신앙과 윤리에 관하여 공식적인 가르침을 베푸실 때 무류지권(無謬之權)의 은사로써 보호하여 주신다.  개별 주교님들이나, 신부님들, 신학자들, 그 외의 어느 누구도 교회의 가르침을 정통 교리와 부합되지 않는 독자적인 뜻으로 제시하거나 해석할 권위가 없다. 광주의 공지문 상의 교리적 오류들은 시급히 그리고 하등의 모호함없이 설명되고 시정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교회의 교도권에 순명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교도권의 행사가 참된 진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주에서의 일들을 막고 있는 근원은 교회 안에 침투한 현대주의이다.

광주 가톨릭 대학교의 교의 신학 교수이시며 나주 조사 위원회의 총무이신 리 순성 신부님께서는 한국 주교단의 명의로 출판되는 司牧 지, 1998년 3월 호에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려는 목적으로 "천주교 광주 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 성사의 실체 변화'에 대한 이해"라는 제목의 글을 내셨다.  이 글에서 리 신부님께서는 성체 성사에서의 주님의 진정한 살과 피를 통한 실제적인 현존을 부정하셨으며, 이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일치를 위하여 유익하다는 이유로 정당화하셨다.  리 신부님께서는 갈려진 형제들과의 일치 운동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상기하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가톨릭 진리의 순수성을 해치고 그 진리의 참되고 확실한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거짓 평화 주의처럼 일치 운동의 정신으로부터 먼 것은 없을 것이다 (Unitatis Redintegratio)  

광주 가톨릭 대학교에서 발간하는 神學展望 지의 1998년 봄 호에서 리 순성 신부님께서는 성령과 교회의 관계: 성령의 해를 위한 小考라는 글을 발표하셔서 "교회는 성령께만 순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라는 주장을 펴시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임을 부정하고 교회 안의 교계 제도와 교도권을 배척하셨다.  나주 조사 위원회는 교회의 교도권에 의지하여 나주의 일들을 막고 있다.  그러나, 그 위원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신부님들께서는 교회의 교도권을 배격하고 계신다.

역시 나주 조사 위원회의 위원이시며,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이셨던 리제민 신부님께서도 共同善 잡지 1998년 5/6월 호에서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적인가"라는 글을 쓰시어, 리 신부님을 포함하여 세 분의 한국 신부님들께 재차 경고문을 보내신 교황청에 반발하여 현대주의적인 주장들을 되풀이하고 계신다.  

한국 교회 안에 현대주의적인 경향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나라들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물론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충실하고 교황 성하께 충성하는 많은 성직자들, 수도자들 및 평신도들이 계신다.  하지만, 이들은 교구 내 및 본당 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있어서 너무나 자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들을 我田引水 격으로 잘못 해석하여 진보적인 개혁을 계속 밀고 나가려는 이들에 의하여 밀리고 있다.  교회 내의 현대 주의자들은 계속하여, 이미 교황 성하께서 확정적으로 거부하신 여성 사제직을 주장하고 있으며, 사제들의 독신제 폐지, 심지어는 교회의 토착화라는 구실 하에 토속적인 무속 행위들을 가톨릭 전례에 도입하자는 주장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이미 교회를 세속에 적응시키고 타협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교회 안에 도입시켰으며, 신자들의 사고 방식과 신앙 행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러한 현대주의적인 노력은 교회의 건축 양식, 성상들을 포함한 교회 미술의 현대화, 추상화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전례 및 신심 행사 상의 개혁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성당들 대부분으로부터 장궤틀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현대주의자들은 윤리 도덕이 주로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많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죄"와 "보속"의 개념들을 희석(稀釋)시켜 놓고 있다.  "죄"의 개념이 흐려지면, "聖性"의 개념 또한 흐려지며, 따라서 교희의 수많은 성인, 성녀들로부터 별로 배울 것이 없다라는 인식이 들게 한다.  교회의 계속적인 세속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나주란 하나의 골치아픈 방해 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 이유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교회의 정통 교리들과 신심 행사들에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지역 교회들이 처해있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835), 동시에 지역 교회들의 전통이 사도 전래(使徒傳來)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부합되지 않고 이질적인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 교회에서 생겨난 신학과 규율과 전례와 신심에 관한 "전승(傳承)들"은 사도 전승과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전승들은 독특한 형태들을 이루게 되는데, 거대한 "성전"은 다양한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된 표현들을 이러한 양식 안에 수용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성전"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되거나 또는 폐기될 수도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83).

지상에서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성모님께서 이끄시는 군대와 악마가 이끄는 군대와의 사이에 끊임없는, 치열한 영적인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 전투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는 지극히 중요한 전투이다.  그리고 이 영적 전쟁이 바야흐로 그 절정에 다다르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성모님의 승리에 참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을 열심한 기도와 자아 부정과 오류없는 순수한 진리로써 무장하고, 주님과 성모님께 봉사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해야 한다.  성모님께서 나주에서 말씀하셨듯이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1998년 10월 7일 메시지).

나주에서의 일들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들 사이에서도 그 일들이 단지 개인 신심의 활성화를 위한 도움 정도로 인식하시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주에서의 초점은 개인들의 회개와 생활 개선 뿐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신앙과 도덕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주의 일들을 통하여 전체 교회의 구성원들과 전 세계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주심과 동시에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해결책도 알려주고 계신다.  주님께서 13세기 성 프란치스꼬에게 "나의 교회를 재건하라,"고 하셨듯이 그와 꼭 같은 말씀을 지금 우리들에게 하고 계시는 것 같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2천년 전에 세우시고 이끌어 나오고 계시는 가톨릭 교회를 세속 주의로부터 정화하고 오로지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로부터만 올 수 있는 진리와 거룩함의 광채를 교회 안에 회복시키라는 말씀이시다.  앞으로 무서운 징벌이 닥칠는지,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의 잔이 내릴는지는 우리들이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있다.
 

이 분도 드림
Mary's Touch By Mail
Gresham, Oregon  97030  U. S. A

 

† 성체 성사에 대한 소고(小考)


1.  외면되는 성체 성사에서의 주님의 실체적 현존

몇 년 전 필자는 미국의 어느 가톨릭 출판 기관의 책임자와 통화를 하다가, "성체에서 피가 흐르는 현상은 가톨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미신적인 일이다,"라는 말을 그분에게서 들은 일이 있었다.  며칠 후에 다시 통화하게 되었는데, 그분은 자신이 사제였음을 밝히면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몇 개월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큰 성령 대회가 있었는데, 어느 자매님이 그 대회의 연사 중의 한 분이셨던 신부님께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 사진 한 장을 드렸다. 그 미국 신부님은 고맙다고 하면서 받아가셨는데, 저만치 가서 그 사진을 찢어버리는 것을 다른 이가 보았다고 한다. 좀 성격이 다른 예이지만, 한국 동란 때 서울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이 명동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로부터 성체를 꺼내 쏟아놓고는 군화로 짓밟는 독성을 범하였다고 한다.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죄에서 구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저 면병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비신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신자들로부터 냉대와 모욕을 받고 계신다. 1995년 7월 2일 나주의 율리아 자매는 자신이 보았던 환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많은 사제들이 죄 중에서 미사를 드리고 많은 수도자들과 대다수의 평신도들이 죄 중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거리낌없이 먹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 여러 나라들에서 실시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의 숫자가 30%도 채안되는 경우도 많고, 성체 성사에 주님께서 실제로 계심을 믿는 신자들도 소수에 불과함을 볼 수 있다. 현대의 많은 신자들 사이에 교리 지식이 결핍되어있음은 전반적인 현상이겠지만, 특히 이 문제는 성체 성사에 관하여 가장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거룩한 성체 성사에 대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바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경솔하게 이 성사를 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2천년 전에 주님께서 성체 성사에 대하여 예고해주실 때부터 이미 혼란이 있어왔다. 주님의 설명을 들은 많은 유대인들은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더 이상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요한 6장 60, 66절).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1336조)에서도 "수난 예고가 제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듯이, 성체 성사에 대한 첫 번째 예고도 제자들을 분열시켰다. . . 성체와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그것은 동일한 신비이며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요한 6장 67절), 주님의 이 질문은 오랜 세월을 통해 울려 퍼지고 있다,"라고 되어있다.  

성체 성사에 대한 논쟁은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되풀이되어 왔으며, 지금도 크리스챤들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나주에 관한 논의 역시 그 주요 부분이 성체 성사에 관해서이다.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서는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사 위원회의 주요 교의 신학자께서는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부정된 진짜 이유는 개신교와의 일치라고 하는 대전제를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셨다. 나주에서의 일들을 계기로 더 활기를 띄고 있는 성체 성사에 관한 토론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 각자에게도, 가톨릭 교회 전체를 위하여서도 지극히 중요한 사항이다.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성체 도리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이 변질된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권세가 당신의 교회를 쳐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주셨으니, 반드시 진리가 유지될 것이고 승리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2.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그러면, 지금 과반수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일부 신학자들과 사제들조차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성체 성사에 관하여 교회에서는 확실한 가르침을 베풀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성체 성사에 대한 확실한 진리는 아직도 많은 논쟁을 더 거쳐야만 밝혀질 수 있는 사항인가?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교회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무류지권에 의거한 가르침들 중에서 핵심적인 일부이다. (아래에 "저주받을지어다,"라는 문구는 라틴어로 anathema sit을 번역한 것으로서, 누구를 저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어떤 오류의 사상을 단죄함으로써 그에 관한 진리를 확정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1)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 변화(Transubstantiation)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2)

이로써,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공존한다라고 하는 루터 등의 주장이 단죄된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및 18세기의 여러 신학자들(Emmanuel Maignan, John Saguens 등)은 성체 성사에서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물리적인 현실임을 부정하고 단지 주관적으로 그렇게 환상처럼 보여질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러한 주장은 위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 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3)

따라서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던 후스파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의 주장이 배척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체의 작은 조각들과 성혈의 한 방울에까지 깊은 경외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뜻한다. 만약 성체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만 존재하신다라고 생각한다면 성체와 성혈을 소홀히 취급하게 될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성체 축성이 끝난 후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성체 성사 안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말하든가, 성체 성사가 사용 중일 때 즉 영해질 때(그 전도 아니고 그 후도 아니고)에만 계시며, 보관되고 있거나 영성체 후에 남은 축성된 면병과 그 조각들에는 주님의 몸이 참으로 남아있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4)

만일 누구든지 거룩한 성체 성사에서 하느님의 독생 성자께서 흠숭지례(欽崇之禮)로써 외적으로도 공경받으실 수 없다라고 하든지, 따라서 특별히 경축적인 의식으로써 공경드려서는 안된다라든지, 성 교회의 훌륭하고도 보편적인 의식과 풍습에 의거하여 거동을 할 수 없다라고 한다든지, 사람들이 공적으로 흠숭할 수 있도록 현시되어서는 안된다든지, 성체를 공경하는 이들은 우상 숭배자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트렌트 공의회 (DS 1656)

그리고 위와 같은 교회의 정통 가르침은 현대에 와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1965)에서도 재확인되었다. 동 회칙에서 바오로 6세께서는 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함으로써 그리스도 전체께서 "물리적인 현실"로서 신체적(身體的)으로 현존하심을 말함이 없이 단지 빵과 포도주가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고 새로운 목적성을 지니게 된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려는 현대주의적 신학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서 화란의 신학자들의 중심으로 빵과 포도주의 변화를 실체 상의 변화가 아닌, 의미 상의 변화, 목적성의 변화로서 설명하는 경향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부엌칼이 음식 장만에 쓰이면 부엌칼이지만, 범죄를 위하여 쓰이면 무기가 되는 것처럼, 빵과 포도주는 그대로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 의미와 목적이 변한다라고 하는 주장을 폈다.)

3.  성체 성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천주 성자 강생의 현실

결국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의 요점은 성체와 성혈의 외양은 빵과 포도주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천주성과 영혼과 몸과 피를 지니신 완전하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확실하게 믿고 생활화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이다. 따라서 우리는 2천년 전에 주님을 실제로 가까이서 뵙고 따랐던 제자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 하면, 우리 역시 주님과 실제로 함께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있다. 성체로서의 주님은 2천년 전처럼 외적으로 말씀하시거나 활동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외적인 활동을 연장하는 것이 성체 성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체에서의 주님은 물리적인 실체를 포함하는 현존을 통하여 우리와의 내적인 대화와 일치를 원하신다. 주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진리를 계시하시고, 인간 생활을 실제로 살으심으로써 이를 성화하시고,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수난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되풀이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과거 속으로 흘러가고 만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세상 끝날까지 모든 곳의 인간들에게 현실로서 다가오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85조 참조). 성체 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실체적인 현존이 지속되며, 미사 성제를 통하여 주님의 희생 제사가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화되며 그 제사로부터의 은총이 그들에게 실제로 흘러가게 된다. 고해 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수난 공로에 의지하여 주님의 권위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실제로 사해지게 된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참으로 전해지게 된다. 이러한 인류 구원을 위한 천주 성자의 강생과 구속활동의 현실이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성체 성사는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4.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이유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체 성사에서 왜 구태여 당신의 실제의 모습을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가리고 계실까?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째, 성체는 바로 강생하신 천주 성자이시므로, 우리가 결코 함부로 대해드리거나 모실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성체 안의 주님을 믿고 인정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며 그분을 충실히 따르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 본래의 영화롭고 위엄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신다면 신앙과 사랑이 없는 경우에도 모든 이가 그분 앞에서 부복하게 될 것이며, 이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시면서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진정한 신앙과 사랑을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진심을 알기 위하여 짐짓 아주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과 사랑의 눈으로 볼 때, 빵과 포도주의 초라한 형상이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계명을 어겨서 주님께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등을 돌렸다면, 먼저 진정한 통회와 고해 성사로서 자신의 영혼을 씻고서 성체를 모시는 것이 그분께 대한 마땅한 예의가 될 것이다.

둘 째, 빵과 포도주의 외양을 취하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을 쉽게 영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육신을 양육하는 음식이니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는 성체의 외양이 빵과 포도주인 것은 매우 적합한 일이 될 것이다.

5.  "성체는 지속적인 기적"

1994년 11월 24일 당시 주한 교황 대사이셨던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께서 교황님의 대리자의 자격으로 나주에 오셨을 때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희를 오늘 특별히 성체의 신비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영웅적이며 충실한 증인으로 주님과 나의 현존을 체험케 하는 이 장소에 불렀으니 길 잃은 양들을 어서 구하도록 도와다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인 성체의 신비는 바로 마르지 않는 샘이며 구원의 약이라고 이미 내가 몇 번이나 말했건만,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 준비하는 자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성체는 바로 생명이며 영속적인 샘물이며 만나이며 우주 창조의 기적과 구속의 기적에 뒤지지 않는 지속적인 기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면 수많은 나의 자녀들이 지옥의 길로 향하지는 않았을 것을. . . 이렇게 성체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의 주역인데도 이미 수많은 자녀들로부터 모독과 모욕과 능욕을 받으며 짓밟히고 있으니, 어서 내 사랑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더욱 강하게 전해져 성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새로운 성령 강림의 때를 단축시켜 맞이해야 한다."

위의 말씀 중에서 특별히 여기에서 논하고저 하는 부분은 성체가 "지속적인 기적"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어째서 성체가 지속적인 기적이 되는가? 기적이란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으로 인하여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사 때 사제의 축성으로 인하여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주님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하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기적이다. 자연적으로나 사람의 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적의 변화는 사제에 의한 축성 때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지속적인 기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보통의 경우 빵의 외양은 빵의 실체와 결부되어 있고, 포도주의 외양은 포도주의 실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정상이다.  다시 말해서 빵은 빵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성체 성사에서는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빵과 포도주의 실체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어떤 물건의 실체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빵과 포도주의 외양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가 동시에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의 몸이요 피라는 뜻이다. 천주성과 영혼, 살과 피를 완전히 지니신 살아계신 주님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자연적인 차원에서 전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자연적으로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뿐 아니라, 일순간이나 짧은 기간만이 아니라 성체 성사에서의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지속되는 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 또한 지속되고 있으니 이는 지속적인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이 있어야만 지탱될 수 있는 일이다. 즉 성체 성사에서는 성체나 성혈이 영해지기까지에는 지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하느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하심이 지속되고 있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대할 때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에 의하여 계속되는 기적을 대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성모님께서 성체를 "지속적인 기적"이라고 부르신 것은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지속되는 기적에 의하여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지속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치유하고 성화하고 계신다라는 뜻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주의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한 기적들은 위에서 언급된 "지속적인 기적의 상태"가 정지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예수님의 실체 이외의 어떠한 실체에 결부됨도 없이 성체 성사의 외적 표지로서 계속되는 기적을 중단하시고 그 외적 표지에 가려져 있던 성체 성사의 내적인 현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실을 밖으로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 나주 등지에서의 성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성체 기적을 보여주시는 목적은 인간들의 믿음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도와주시기 위함이다. 이에 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성체 기적은) 기만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적적인 현상을 통하여 성체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신학대전 Question 76, Article 8)

6.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가?  

먼저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 1.2 (3)항을 살펴보기로 한다.

윤 율리아 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 (DS 752, 802, 1321, 1642, 1652; Mysterium Fidei 참조)에 어긋납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들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하에 이루어지는 성체 성사에 대한 믿음에 도움이 되는 표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혼란을 야기시키는 표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지문 상의 판단의 근거로 언급된 원전은 이미 위에서 인용된대로,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한다라고 하는 트렌트 공의회의 가르침이다 (DS 1652). 즉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실체 변화만 있고 형상의 변화는 없다라는 뜻이다. 위의 공지문 조항에서 말하는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이라는 뜻, 즉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축성이 끝난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라는 뜻은 트렌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지않다. 공의회의 가르침에서는 사제에 의한 축성 때 실체 변화만 있고 외형 변화는 없다라는 뜻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주 등지에서 성체의 형상이 살과 피의 형상으로 바뀌었다라고 하는 것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이 아니고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하심에 의해서 그리 되었다라는 뜻이다. 사제의 축성의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의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 축성의 효과에 관한 교리를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에 적용하여 이를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것은 사제의 축성이 끝난 이후였으며 사제의 축성 행위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은 9세기 이태리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은 성체 안에 주님께서 참으로 계심을 의심하면서 미사를 거행하던 사제가 축성 기도를 바치자 말자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기적은 위에 언급된 교리에 어긋나는 것인가? 란치아노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일어난 것은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실체 변화뿐이었다. 성체와 성혈의 외형이 변한 것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하심에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사제의 축성이 있자 말자 성체와 성혈의 외형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것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 성사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거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의 외형을 특별히 거두시고 그 외형에 가려져 있던 내적인 현실, 즉 주님의 몸과 피의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은 진실에 위배되는 것일 수 없다. 그 기적이 성체 성사의 내적 현실을 올바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 주님의 살과 피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외양, 즉 꽃나무라든가, 돌, 동물 등의 모습으로 변했다면 이는 진실된 기적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닌 다른 것들은 성체 성사의 내적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7.  나주의 경당에 내려오신 성체가 축성되지 않은 면병일 수 있는가?

나주에서 있었던 두 번째 종류의 성체 기적은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위에서 내려오신 기적이었다.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이 오셨을 때 두 번, 1995년 7월 1일 철야 기도 때 일곱 개의 성체가 한꺼번에 내려오시고, 1996년 7월 1일에도 여러 개의 성체가 율리아 자매의 입 속으로 강림했으며, 1997년 6월 12일 김 창렬 바오로 주교님께서 오셨을 때 한 번, 그 해 7월에 로마에서 오신 주교님 앞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해 8월 27일 파 신부님께서 오셨을 때 한 번, 도합 7번 성체가 내려오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내려온 것이 성체가 아니라 보통 면병일 수가 있는가? 첫 째, 사람이 이런 일을 조작하였다면 보통 면병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고 비디오 및 사진들에 찍힌 자료들에 의거하면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다는 하등의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둘 째, 마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마귀가 성체를 모셔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마귀가 보통 면병을 다른 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런 혼란스런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으로 믿지만, 가능할 수는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나주에서 내려온 것이 마귀가 다른 곳들에서 옮겨온 면병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

먼저, 1995년 7월 1일에 내려온 7개의 성체가 대주교님의 명에 의하여 영해졌는데 맨 마지막 성체를 영한 율리아 자매의 입 속에서 그 성체가 살과 피의 형상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연관하여 그 곳에 있던 병들어 죽어가던 여자 아기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즉 위에서 내려온 것이 축성되지 않은 보통 면병이 아니라 진정한 성체였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성체로부터 채취한 피의 자국을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 DNA 검사 결과 사람의 피임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성체가 내려오시기 전에 보통 율리아 자매가 십자가 상에 달려 피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으며, 그 성혈이 하얀 성체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또한 진정한 성체가 내려오셨다라고 하는 율리아 자매의 증언이 된다. 공지문의 1.2항에서 사제의 축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성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 흘리시는 성혈이 성체로 변한 것은 실체 변화가 아니고 외양의 변화일 뿐이므로 사제의 축성이 필요하다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교회 역사 상에 많은 횟수에 걸쳐 일어났던 비슷한 기적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사에 의해서 어느 성당의 감실로부터 성체가 모셔져왔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하신 것임이 인정된다면, 하느님께서 성체가 아닌 보통 면병을 보내주실 수는 있는 것일까? 이는 하느님의 진실성에 의거하여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하면, 성체로서 인식될 상황에서 성체가 아닌 면병을 보내셨다면 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무한히 진실하시다라고 하는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나주의 경당에 내려온 것이 참으로 성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결론이 될 것이다.

8.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은 "의도적"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나주에 고위 성직자들이 방문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체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이는 고의적이었다라는 의심을 일으키게 한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적이 우발적으로 일어나야만 참된 기적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 소위 "기이한 현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 역사를 이끌고 나가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거한 징표들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징표, 즉 기적들이 참된 것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 즉 그분의 의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느님의 뜻하심이 없고 계획하심이 없고서는 참된 기적이 있을 수 없다. 천주 성자의 강생하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 라자로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모님의 몽소승천, 성모님의 루르드 발현. . . 그 어느 하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면, 교황님의 대리자라든가, 주교님들에게 특별히 징표가 주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교회를 대표하고 신자들을 사목하시는 그분들에게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신의 뜻을 전하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의도적"인 것 같다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에집트 왕 파라오에게 거듭하여 기적을 보여주셨다. 16세기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는 농부였던 후안 디에고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 지방의 주교에게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민족 거의 전부가 우상 숭배를 버리고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게끔 이끌어주셨다. 따라서 지금까지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께 특별한 징표들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나주에서 밝혀주시는 주님의 뜻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9.  영성체 방식에 대한 신자들의 선택의 자유

성체 성사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사제직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성체를 혀로만 모시게 되고, 양형이 아닌 성체만을 모시게 되고, 또 누룩을 쓰지 않은 면병을 교회 전반적으로 쓰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9세기부터의 일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몇몇 나라들의 주교님들의 요청에 의거하여 교황청에서는 성체를 손으로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는 성체를 혀로 받던 것을 그만두고 손으로만 받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손으로 받을 수도 있다라고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성체를 손으로 받는 것이 거의 완전히 법령에 의한 것처럼 되어있는 현실이며, 때때로 특히 외국 신자들이나 교포 신자들이 자기들의 습성대로 혀로 받으려고 하면 손을 내어놓으라고 요구당하는 일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이에 관련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전 세계의 주교님들께 보내신 회칙: 성체 성사의 신비와 흠숭에 대하여(Dominicae Cenae, February 24, 1980)의 내용 일부를 살펴본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손으로 성체를 모시는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방식은 몇몇 개별 국가들의 주교 회의의 요청에 의하여 사도좌에서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체에 대하여 통탄할만큼 존경심이 결핍된 경우들이 보고되었는데, 이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개인들만의 책임이 아니며, 성체께 대한 신자들의 태도를 주의깊에 지켜보지 않는 교회의 사목자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성체를 손으로 받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 곳들에서 성체를 혀로 받는 방식을 계속하고저 하는 신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 . 성체를 그들의 손으로 만지고 배부하는 것은 신품을 받은 이들의 특권입니다. . . 교회는 분명히 이러한 기능을 사제나 부제가 아닌 이들에게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 .  

물론 지방 교회는 교회 운영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 지역의 여건에 맞도록 제반 조치들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핵심 부분인 교리, 성사의 집행 방식, 교회법 등에 있어서는 교황청의 방침과 지도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체를 분배하는 평신도들이 혀에다 성체를 줄 경우 손가락으로 혀를 접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러한 책임을 맡게 된 평신도들에 대한 더욱 철저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10.  결 론

다른 지면들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지금 가톨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과제는 현대주의의 오류들과 풍조를 몰아내고 순수한 정통 가톨릭 신앙이 새롭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시 진리, 즉 교회의 정통 가르침 전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 가르침들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특히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체 도리에 대한 혼란이 극복되어야 하며, 또 성체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며, 주님의 인류 구속 사업에 필수적으로 협력하시는 성모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떤 자매님에게 그의 개신교 친구가 말하기를, "나는 병이 나면 의사에게 가지 의사의 어머니에게 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성모 신심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의사는 우리가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라고 하는 하나의 제한된 목적을 위하여 찾아가게 되는 사람이다. 그 의사에게 우리 인생의 전부를 거는 것도 아니며, 그 의사가 우리 인생 전부를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을 세상 의사에게 찾아가는 것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사나 변호사나 기술자나 상인 등을 찾아가는 사무적이고 제한적인 관계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주님과의 관계는 모든 것을 바치는 전적인 사랑과 충성의 관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국이며 대가족이다. 왕국에는 왕도 계시고 모후도 계시며 신하들도 많이 있다. 가정에는 아버지도 계시고 어머니도 계시며 형제 자매들도 있다. 모후나 왕비가 없는 왕국, 어머니가 빠진 가정의 썰렁함과 결함됨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이신가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거룩심을 가득히 부어주신 분이시니 우리를 주님께로 가장 확실하게 이끌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1999년 9월 8일
성모님 탄신일을 기념하며,  이 분도

 

기적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에서는 나주에서의 기적들에 대하여 이를 “갖가지 형태의 기이한 현상들”이라고 일컬으며, 이어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신빙성을 갖게 하기 위한 근거로, 윤 율리아 씨는 자신이 성모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소위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사적 계시라고 주장하며 선전하고 있습니 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복음 성서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전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어 표징들 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르꼬 16:20)  우리는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목적과 그 목적을 뒷받침하는 수단의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복음 성서에서는 복음의 전파가 중심이며 징표들이 복음의 진실성과 초자연성을 증거하기 위한 보조의 역할을 하는 뜻

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공지문에서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 들의 중심이며 메시지는 단지 그 현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것이라는 식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공지문에서의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나주에 가는 사람들은 기이한 현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뵈러 간 사람들이든, 나주에 간 사람들이든 기적의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찾게 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주에 가는 사람들은 기적을 따라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나주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그렇게 매도하는 것은 그들의 진의와 진심을 부당하게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을 찾는 대부분 신자들의 동기는 주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도 주위의 따가운 이목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성모님이 그리워 그 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기적을 찾아서 또 오셨군요,”라고 한다면, 이는 현실과 맞지 않는 큰 실례의 말이 될 것이다.  지금 까지 나주를 계기로 하여, 식어졌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은 이들은 수없이 많으며, 고해 성사를 멀리하고, 성체 성사를 상징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고치고, 사제직의 고귀함을 더욱 깊이 인식하며, 반목했던 이들과 화해하고, 낙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론,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기적적으로 낫게 된 이들도 많지만, 그들 중에는 병의 치유를 구해서라기보다는 회개의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뜻하지도 않게 육적 치유까지 받은 이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향기라든가 기타의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한 이들도 많지만, 그들은 그 현상들의 신기함 자체에 매혹되어서가 아니라, 그 현상이 주님과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을 의미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이들까지 살려주시고, 마귀를 내쫓으시며, 빵 몇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시고도 남은 조각을 주어 모으니 12 광주리나 가득찼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며, 호수의 물 위를 걸으시며, 거센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등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 기적들의 주요 목적은 당신께서 인간이실 뿐만 아니라,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하느님이심을 증거하시며, 따라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에 신적인 권위와 가치가 있음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적의 역할을 일반적으로 경시하는 많은 이들은 주님께서 십자가로부터 뛰어내리라고 하는 이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셨다라는 이유를 들면서, 마치 주님께서 기적을 반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에 대한 지나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첫째,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주님께서 복음을 뒷받침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기적을 친히 행하셨다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며, 또 모든 참된 기적은 사람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뛰어내려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인간들의 발상(發想)이었으며, 그것도 조롱과 야유에 가득찬 악한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진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적이 인간의 뜻으로 일어날 수도 없는 것이고, 인간들의 놀림감으로 전락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진복자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기적의 징표들을 보지 않고서도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확고하게 믿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충실히 지킨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 안의 현실이 그렇지가 못하다.  성세는 받았으나, 교리를 잘 모르는 이들이 허다하며, 신자의 과반수 이상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다.  고해를 먼저 보아야 할 상황에서 고해하지 않고 영성체에 임하는 이들도 허다하며, 성체가 바로 살아계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너무나 많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더욱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전하자라는 취지를 밝힌 것을 가지

고, 마치 공의회 이전의 가르침들은 모두 새 것으로 대체되었거나, 희석(稀釋)되었다라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며 또 그렇게 남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지금 많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는 옛 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도 별 것이 아니며, 성인들도 지나쳤던 사람들이므로 그들로부터도 우리가 실제로 배울 것이 별로 없다라는 잘못된 의식이 차 있으며, 모든 것을 현세적인 복지와 타협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고지식하게 그대로 주장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라는 판단 내지 잠재 의식까지 알게 모르게 유포되어 있다.  지금 주님께서 특히 나주를 통하여 많은 성체 기적들과 성모님의 모성애와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상기시켜주는 징표들을 보여 주시는 것은 분명히 현대의 교회가 처해 있는 신앙의 위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똑똑하다고 하는 현대인들이 사실은 너무나 꽉 막혀있고 자만심에 차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강력한 메시지들과 물리적인 징표들로써 우리들을 깨우치시며, 격려하시며,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징표들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목표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시기 위함도 아니고, 이미 완성되어 있는 계시 진리에 무엇을 보태거나 변경하시기 위함도 아니며, 오로지 우리가 그 계시 진리를 더 확실히 알며 충실하고, 교만과 죄악의 생활을 뉘우치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따라 주님을 보조하시는 성모님과 함께 사랑의 희생과 보속의 삶을 살 것을 독려(督勵)하시기 위함일 뿐이다.  그리고, 혹 나 자신이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고 충실한 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는 기적의 징표들이 별 의미가 없다라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적의 징표들이 주어졌다면, 이는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렇다

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겸손되이 감사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이를 경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그분께 대한 경시나 외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킨다라고 자부하던 이들이 실제로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시어 그들 앞에 서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고 단죄했었다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며, 그러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만 맡겨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과달루페, 빠리, 루르드, 파티마 등지에서의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인류의 영적, 도덕적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많이 알려 주셨다.  몸에 좋은 약이 쓰듯이, 회개하라는 말씀이 듣기 싫을지라도 그 길만이 우리를 참으로 위하는 길이다.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진의를 알아차리고, 주님과 그분의 교회와 그분의 진리 앞에서 진정으로 부복할 때에 비로소 그분께서 주시는 메시지나 징표들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주의 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우리의 생각과 생활에 대한 뉘우침과 개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자들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지역 교회 전체, 나아가서는 보편적인 교회 전체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주의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무슨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이 된다든가, 가톨릭 교회에 무슨 새로운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본래의 정통 가톨릭 진리들에 참으로 충실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구세주의 어머니시요,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우리 각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최소한 그 정도의 신뢰는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성모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주님께로 바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이 분도
2000년 3월 6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 및 교도권에 대한 충실이다.

 

광주 대주교님의 나주 관련 공지문이 나온 후 공지문 상의 교리적 의문점들을 거론하며, 동시에 나주에서의 일들에 대한 보다 성의있는 재조사를 청원하는 이들에게 자주 던져지는 질문은 “왜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다른 지면들에서 이미 어느 정도 논하여졌지만, 그런 질문이 야기되는 근거에 관하여 문제점들이 발견되고 있고, 또 그런 질문을 받는 이들도 당황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1.  신자들이 사적 계시(또는 특수 계시)를 포함하여 모든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안들에 대하여 교회의 교도권에 순명해야 함은 그 교도권이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당위성을 지닌다.  교회는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의견들을 주장 하는 이들의 친목회일 수 없으며, 참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진리의 빛을 순 명과 사랑과 감사로써 전적으로 수용하고, 이에 충성하는 이들의 일치된 가 족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사목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특히 교구의 으뜸이신 주교님과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께 극진한 효심으로써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나주에 관한 일들을 논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을 대리하는 사목자들께 대하여 순명해야 된다고 하는 이 중요한 원칙에 관하여 하등의 흔들림이나 양보도 있을 수 없으며, 이를 끝까지 수호하고저 한다.

 

2.  이와 동시에 우리는 지상의 모든 권력과 권위가 그러하듯이 교회의 교도권도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되어 있는 것임을 (로마서 13:1 참조)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상의 권력과 권위는 그 자체로서 절대성 및 궁극성을 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어떤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방편이며 시종(侍從)인 것이다.  그리하여, 가정, 학교, 회사, 군대, 국가 등모든 단체에는 그 단체들의 고유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적합한 권력과권위가 그 단체들 안의 책임자들에게 위임되어 있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고, 은총을 전해주기 위한 책임과 권위가 사목자들에게 위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까지나 그 교도권은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봉사의 기능이며, 주님께서 주신 신앙의 유산을 충실히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한 기능이다.  그리고, 이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86)에도 명백히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며 성실히 진술하고, 또한 하느님의 계시로 믿어야 한다고 제시된 모든 것을 이 단일한 신앙의 유산에서 퍼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교도권에 관해서도 그 권한의 행사가 주님의 뜻하심과 가르치심에 자동적으로 부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을 행사하는 이들의 충성스런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사목의 책임이 부여된 분들께 는 그 책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이 풍부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은총이 사목자들을 도와준다는 뜻이지, 그 분들의 자유의지를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함에 의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혼자서 성취하실 수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 사업에 인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배려에 의한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인류 구속의 공로를 넘치게 세워 놓으셨으나, 그 공로에 의지하여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서 당신의 구원 사업이 성취되어 열매맺게 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 모두의 협력에 맡겨진 사업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늘 지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끊임없이 진리와 오류 사이, 그리고 선과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 길을 걸 어가고 있다.  지상에 살고 있는, 명오(明悟)가 열린 그 어느 누구도 이 선택 의 현실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며, 매 사에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어, 권위가 오히려 진리 위에 서려 하고, 그 권위가 지향하는 목적을 경시한다면, 이는 그 권위의 남용이 될 것 이다.

 

3.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진리와 뜻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2천년 전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직접 여쭈어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지금에는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10일 만에 천주 성령을 보내시어 그 때로부터 항상 교 회 안에 거하시게 하심으로써,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교회가 진리 안에 확실히 머물게끔 인도하시도록 하셨다 (요한 14:25-26; 15:26; 16:13 참조).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그 안에 현존하시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가톨릭 교회 안에 객관적으로 확실한 계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 다.  교회 안의 진리는 성서와 성전(聖傳)을 통해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으 며, 교회에서 그 내용을 교리, 즉 도그마로서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 교리들은 천주 성령에 의지한 무류지권(無謬之權)에 의한 것이므로, 신자들은 하등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순명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계시 진리에 대하여 확실하게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은 교황성하와 교황님께 일치하는 공의회에 지속적으로 위탁되어 있으며, 각 교구들의 주교님들 또한 교황님과 일치함으로써 그 무류지권에 참여하실 수가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유권적인 가르침은 아닐지라도, 수많은 성인들 과 거룩한 신학자들의 고귀한 저서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계시하신확실한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 러한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며, 이를 수호하고 전파해 야 할 사명을 받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진리는 인류를 암흑과 멸망으로 부터 구하고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성세 성사의 준비를 위하여 어느 정도 교리 공부를 하다가 준비가 끝나면, 교리 공부도 “졸업”을 해버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교리는 계시 진리의 요약으로서 그 의미의 깊이는 무진(無盡)하다.  그깊은 의미들을 더 잘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일평생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며, 그 계시 진리로써 우리의 모든 사고(思考)와 가치관의 기본틀을 삼아 야 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이 확립되어 있어야 할 우리 마음의 한 가운데에 온갖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선입견들이 자리잡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생활의 진보도 어려울 것이고, 오류들을 분별하고 극복할 힘도 모자랄 것이고, 남들에게 신앙의 전파를 할 능력이나 의욕이 생기기도 힘들 것이다.

 

4.  결국 지금 나주 관련 공지문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교회의 교도권을 존중하느냐 않느냐 하는 차원에서가 전혀 아니다.  교도권에 대한 존중은 흔들릴 수 없는 대원칙이다.  지금의 현안 문제는 그 지엄한 교도권에 의지하여 선포된 내용에 주님의 진리와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이 이러한 부류의 의견을 사목자들과 다른 신자들에게 알리고 호소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있다 (교회법 제212조 참 조).  그리고, 공지문에 성체 성사에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시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는 지적은 다른 지면들에서 자세히 다루어졌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의 의견을 발표하고 또 기도하는 것 뿐이며, 문제의 시정 자체는 교도권을 가지신 사목자들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공지문의 내용에 참으로 교회의 교리를 잘못 제시한 점들이 있다면, 이는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시급히 시정되어 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도권이 오류를 지탱하고 있는 상황은 결 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의 수많은 중요한 일들 중 에서도 주님의 계시 진리를 바로 보존하고 왜곡됨이 없이 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우선적인 임무일 것이다.

 

5.  참된 일치와 교도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진리에 충실할 때에만 가능 하다.  신자들이 진리에 대해서 논하고 나주의 일에 대하여 재조사를 청원 하는 데에 대하여 이는 “교회의 일치를 해치는 일이다,”라는 말을 가끔 듣게 된다.  일치는 지극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관한 토론 조차를 막고 사실을 외면하는 선에서 일치를 추구한다면 이는 참된 일치일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제께서 “성체는 밀떡이지만, 그 안에 는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현존하신다,”라는 가르침을 펴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일 미사를 고의로 빠졌더라도, 고해 성사 없이 통회만 하면 성 체를 다시 모실 수 있다,”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가르침 들이 교회의 정통 신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치와 순명을 위하여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인가?  권력과 여론에 눌려서 진리가 왜곡되는 것을 눈감아 준다면, 우리는 진리를 저버리는 비겁자가 될 것이며 하느님 앞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진실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크 나큰 불성실이며, 계약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4).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가르치 신다 . . . 인간은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증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 .그 리스도인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6, 2467, 2471).  진리를 무시하면서 얻어지는 평화와 일치는 거짓 평화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치가 아닐 것이 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에 충실함으로써 참된 일치를 이루고 교 도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진 리와 진실에의 충실이 결핍된 평화와 일치란 모래밭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세상에 거짓 평화를 주려고 오셨더라 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

 

끝으로,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그 어느 일부인들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 안의 신앙의 침식, 오류의 유포, 혼란, 불일치 등은 우리 모두가 오랜 기간 기도와 자아 부정과 희생과 애덕의 실천과 교리 공부를 소홀히 해온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지금 교회와 세상에 닥친 신앙과 도덕 의 위기는 우리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하고 절박한 상황 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는 성모님께서 전력을 다하시어 메시지 말씀을 주시고 도와주고 계신다.  수많은우리의 순교 선열들 또한 우리를 위하여 열절히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그 러나,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우리가 싫다고 고집하면 하느님께서도 어쩌실 수 없으시다.  우리가 무한한 선이시며 진리이시고 사랑이신 하 느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분을 거절할 수도 있는 이 엄청난 자유의지가 우리가 지상에 사는 한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명심하고 이 귀중한 시간을허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광주의 대주교님께 우리는 변함없는 존경과 사랑을 드리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분을 위하여 매일 열절한 기도로써 도와드려야 할 것이다.  대주교님께서 나주에 대하여 일단 부정적인 발표를 하신 것은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확실히 확인하기 위하여 짐짓 한 번 철퇴를 내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도 든다.  우리 모두는 진리와 교도권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다짐하며, 또 한 편으로는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그로부터 열 리는 좋은 열매들이 대주교님과 모든 사목자들께 확신을 드릴 수 있는 징표 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이 분도
2000년 6월 29일

 

 


나주의 경당에 내려오신 성체의 진실성을 믿는 이유

 

나주의 성모님 집에 내려오신 성체가 과연 진정한 성체인가 하는데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사실은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한 단정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에 대해서이다.  즉, 나주에 내려온 성체가 사제의 축성을 거쳤다는 증거가 없으니 진정한 성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게시판에서도 요시비님이 그와 같은 의사를 표시했으며, 이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이미 좋은 해답을 해주셨으나, 그것이 워낙 중대한 사안인지라 몇 가지를 덧붙이고저 한다.


먼저 다른 분에 의해 이미 설명된대로, 1994년 11월 24일 당시 교황 대사님의 방문 중에 내려오신 큰 성체가 이미 축성된 성체라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그 성체가 둘로 나뉘어서 율리아 자매님의 양손의 손가락들 사이에 받아졌는데, 교황 대사님께 서 성체의 두 쪽을 맞추어보니 한 쪽 끝이 떨어져나가고 없었으므로, 이는 미사를 드리는 사제가 그 부분을 떼어서 성작에 넣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교황 대사님께서 직접 증언하신 내용이다.


또 한 가지는 1995년 7월 1일의 철야 기도회 중에 율리아 자매님은 십자고상의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변하시고, 일곱 상처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 피가 점차로 하얀 성체로 변하여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성모님 상 앞의 제대에 소리를 내며 내려온 7개의 성체를 기도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직접 목격하였다.  다음 날 광주 대주교님의 명에 의해서 7개의 성체를 두 신부님들과 다섯 명의 신자들이 영했는데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한 율리아 자매님의 입 속에서 볼 수 있는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했으며, 신부님들께서 그 일부를 채취하여 흰 수건에 닦았으며, 그 피가 나중에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의 DNA 테스트 결과 사람의 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로써, 그 성체들이 사제에 의해서 축성되었다는 증거가 없었고, 예수님의 성혈이 직접 성체로 변한 경우였지만 진정한 성체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1994년 11월 24일에 내려오신 큰 성체를 제외하고는) 나주에 내려오신 성체들이 사제에 의해 축성되었다는 증거가 없었으므로, 진정한 성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논리는 사실은 교리적인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체는 주님의 현존을 담고 있는 특수한 물체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몸소 신자들에게 실제로 오시기 위하여 성체 성사를 세우셨고, 성체 축성권을 사제들에게 부여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체 성사와 사제의 성체 축성권은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실제로 오시기 위한 길이요 방편인 것이지, 주님의 현존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주체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성체 성사로서 우리에게 오시기 이전에 하늘 나라에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며,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어느 곳에든지, 언제든지 계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체의 모습으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사제의 축성을 통해서만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리일 것이다.  사제가 받아 있는 성체 축성권은 지극히 고귀한 것으로서 유효하게 서품된 사제 외에는 그 어느 사람에게도 주어지지 않았 으며, 심지어는 천사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위대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주님을 사제의 축성 행위에 대한 포로가 되시게 하실 수는 없는 일이다.  사제님 들의 성체 축성권, 고해 성사권 역시 주님과 주님의 백성을 위한 봉사의 기능인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7)"에도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세례성사에 매어 놓으셨지만, 하느님 자신이 성사에 매여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교리서의 한글 번역문이 아니라, 원문을 보면 "하느님 자신이 성사들에 매여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성사"가 복수로 되어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세례성사를 포함하여 일곱 성사들을 주셨지만, 당신의 현존과 힘이 그 성사들에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씀 이다.  즉, 세례성사의 경우에도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정상이나, 예외적으로는 순교를 통한 혈세(血洗), 불타는 신앙을 통한 화세(火洗)를 통하여서도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있어서도 정상적으로는 밀떡과 포도주를 사제가 축성함으로써 성체와 성혈이 있을 수 있으나, 사제의 축성함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본다.  교리에서 유효한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체 축성권을 가진다라는 말씀의 뜻은 사제가 아닌 다른 인 간들에게 그 권한이 없다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써 특별히 개입하심까지를 부인하는 뜻은 아닌 것이다.


사제의 축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성체가 내려오신 사례는 교회 역사 상으로 많이 있었다.  그 중의 몇 가지 예만 든다면,

 

(1) 서기 4세기 안씨라의 주교였던 성 클레멘스는 감옥에서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주님께로부터 직접 성체를 받아 영했다.

(2) 13세기의 성 보나벤뚜라는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3) 14세기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주님께로부터, 때로는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4) 16세기의 성 파스칼은 젊은 시절에 일 때문에 성당에 갈 수 없었을 때 여러 번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5) 16-17세기의 빠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주님께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6) 1917년 폴튜갈의 파티마에서 천사가 성체와 성작을 세 아이들에게 모시고 왔다.

(7) 오상을 받았으며, 1962년에 선종한 테레사 노이만 수녀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기적적으로 혀 위에 나타난 성체를 모셨다.

 

(이상 "성체 기적들" 죠앤 캐롤 크루즈 여사 저, Tan Books & Publishers)

 

그러면, 만일 성체 같이 생긴 물체가 위에서 내려온다면 무조건 성체라고 믿어야 되는가?  결코 그런 뜻은 아니다.  신앙과 도덕에 관한 모든 말과 글과 행동과 현상 은 냉정한 분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나주에서 성체가 내려오는 모습이 비디오에 찍혔다고 하여 조작이라고 단정했는데, 이는 실제의 상황을 무시한 억측이며 속단이다.  나주의 경당에는 천정에 비디오 카메라들이 항상 장치되어 있어서 중요한 기도회나 방문 등 을 자동적으로 기록하게 되어 있다.  기적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서 카메라를 켜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마귀가 했는가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분별해야 한다.  마귀가 예수님이신 성체를 모셔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마귀가 보통 면병을 가져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성체가 내려오는 기적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메시지라든가, 기타 상황들을 주의깊게 관찰해보아야 한다. 

마귀가 한 짓이라면 분명히 허영적이고 혼란스럽고 신앙에 위배되는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나주의 경우에는 성체가 내려오시는 기적과 더불어 주님과 성모님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내용의 메시지들이 주어졌으며, 성체가 내려오시는 방식도 그 어떤 허황됨이나 난잡함도 없이 경건한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였으며, 특히 위에 언급된대로 1995년 7월 2일 율리아 자매님이 영한 성체가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성체 강림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요한 형제님이 이미 설명하신 것이지만, 그 일이 인간에 의해서 조작되었거나 마귀에 의해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배제되어 하느님께서 이루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될 경우에 성체가 아니라 보통 면병이 내려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다.  왜냐하면, 내려온 물체를 성체로 신자들이 인식하게 되는 상황에서 성체가 아닌 면병을 보내신다는 것은 진실함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으시고 혼란을 주지도 않으신다.  그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확실한 성체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시는데, 우리가 마음이 완고하여 자꾸 의심만 한다면 큰 실례가 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진리와 교도권의 수호를 위하여" 책자 2권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지만, 율리아 자매님이 본대로 십자가 상의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성혈이 성체로 변하여 내려온 경우들에는 사제의 축성이 있었고 없었고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밀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하기 위해서는 사제의 축성이 필요하지만, 주님의 성혈이 성체로 외양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실체 변화가 없으므로 사제의 축성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시니, 성혈의 외양을 성체의 모습으로 바꾸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님께서 나주에서 성체 강림의 기적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2천년 전이거나 현대이거나 호기심 만족의 차원에서 기적들을 대하는 이들도 있으며, 또 기적들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기적들을 주로 그러한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경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적들은 그렇게 허황된 것이 아니며, 주님의 뜻을 담고 있는, 특히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징표들이다.  우리는 기적에 대하여 보고 들으면서, 거기에 담긴 고귀한 주님의 뜻을 공적 계시의 맥락 안에서 살피고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하는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기적 자체에 도취되는 것도, 기적을 경시하는 것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주에서 지금까지 일곱 회에 걸쳐서 성체의 강림이 있었는데, 이에 담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열두 번에 걸쳐서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바뀌는 기적들의 뜻은 다소 이해하기가 쉽다고 볼 수 있다.  즉, 성체 안에 실제로 계시는 주님을 많은 신자들이 믿지 않고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특수한 방법을 통하여 성체 성사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시는 것이다.  성모님 상을 통하여 보여주신 눈물, 피눈물, 향유는 온 인류에 대한 성모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염려, 그리고 수많은 죄악들과 불신앙에 대한 성모님의 슬픔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회개하고 성모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주님께로 갈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경우에 사제의 축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이 직접 성체로서 오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칫하면, 사제의 성체 축성권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경계될 수도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이와 같은 징표들을 주셨다.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충분한 해답은 앞으로 신학자들에 의하여 두고 두고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주님께서 중대 한 이유없이 그런 징표들을 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우선 지금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경당 안에 감실을 설치하여 주님을 항상 모시며, 미사 성제를 바치도록 하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셨다.  이를 통하여 마귀를 쫓고, 신자들에게 수많은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와 같은 주님과 성모님의 뜻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사 성제를 바치고 성체를 이루고 모시는 임무를 위탁받아 계시는 사목자들께서 아직도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주님과 성모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을 알리시기 위하여 직접 성체를 내려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95년 7월 1일 새벽, 일곱 개의 성체를 내려주신 후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감실을 마련해 달라고 내 어머니는 몇 번이나 부탁했건만 실제적인 감실이 마련되지 않아서 이는 오늘 너희 모두를 위하여 특별히 내려주는 내 살과 내 피이니라."

 

위에 열거된 여러 성인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또는 천사들을 통하여 성체를 영하게 해주신 경우들에도 그 성인들이 감옥에 갇혀 있거나, 병들거나,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성당에 갈 수 없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도록 마련해주신 길이 막혀 있을 경우에 우리에게 오고저 하시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원의를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성체의 외양이 변하는 기적들은 나주 성당, 경당, 성모님 산, 바티칸, 로마, 란치아노, 하와이, 말레이지아 등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지만, 성체가 내려오시는 기적들은 모두 나주의 경당 안에서만 일어났다.  성체가 내려오시는 기적들이 경당 에 감실의 설치와 미사의 봉헌을 원하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체 강림의 기적들은 사제의 축성권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모쪼록 교회의 지도자들께서 주님과 성모님의 간절하신 원의를 이해하시고, 하루 속히 적합한 조치들을 취하여 주실 것을 삼가 간청드린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영을 끄지 말고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시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은 굳게 지키시오.  온갖 형태의 악을 멀리하시오," (1데살 5:20-22)라고 하셨듯이, 우리가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신중히 분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나, 그 특별 계시들을 완전히 배척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의 은총이 영적으로 병들고 굶어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힘차게 흘러가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이 분도

2000년 7월 5일

 

 


나주의 성체 외양 변화들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가?

 

1988년부터 1997년 사이에 모두 12 차례에 걸쳐서 나주의 윤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혀위에 서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적인 현상들이 일어났다.  (다섯 번은 나주 성당에서, 그리고 나주의 성모님 경당, 나주 부근 산, 이태리의 란치아노, 로마, 바티칸, 말레이지아의 시부, 그리고 하와이의 카일루아에서 각각 한 번씩 일어났음.)  성체가 정상적으로 지니는 면병( 餠)과 포도주 의 형상이 기적적으로 살과 피의 모습으로 바뀌는 현상은 교회 역사 상 상당히 많은 횟수에 걸쳐 서 일어났으며, 그 중의 다수가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에 대한 역대 교황님들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예를 들면, 1263년 볼세나- 오르비에또에서 피흘리는 성체를 직접 목격하신 교황 우르바노 4세께서는 크게 감동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 공경을 위한 기도문을 짓도록 하셨으며, 또한 성체 축일(the Feast of Corpus Christi)을 설정하셨다.  1887년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성 프란치스꼬 성당을 순례하는 이들에게 전대사를 그 지방 대주교님을 통하여 허락하셨고, 1964년 8월에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볼세나-오르비에또의 대성당에서 그 기적을 기념하는 미사를 거행하셨다.  그리고, 교황께서는 1976년에 그 곳을 다시 방문하셨다. 

1980년 9월에는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또 다른 성체 기적지인 이태리의 시에나를 방문하셨다.  그 밖에도 성체 기적들을 인정하시고, 순례자들에게 전대사를 베푸시고, 또는 몸소 성체 기적의 유물들을 살펴보신 교황님들이 많이 계신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성체 성사 안에서의 주님의 살아계신 실체적 현존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이 현대에 와서 율리아 자매를통하여 12 차례나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성체를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려는 불신의 경향이 교회 안에서 조차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성체 기적들에 대해서도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오히려 그 기적 들을 이단시, 미신시하게 될 것이다.  성체 성사에 관한 오류 사상들에 대하여 크게 염려하시는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의) 신비를 글로써 또는 구두로 다루는 이들 중에 신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그들의 마음을 신앙에 관한 큰 혼란으로 채워주는 견해들을 퍼뜨리는 이 들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누구든지 이미 교회에서 정의(定義)한 교리를 망각해도 무방하며, 교리 문구의 순수한 뜻과 그 문구에 담긴 기존의 인정된 개념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실체변화의 신비를 논하면서 빵의 실체 전부 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하는 트렌트 공의회에서의 선언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 상의 변화(transignification)'라든가 '상징적인 변화 ransfiguration)'에 대해서 말하며, 또 미사의 희생 제사가 끝난 후에는 축성된 면병 안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현존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견해 들 및 이와 유사한 견해들을 유포하는 것이 신성한 성체 성사에 대한 믿음과 신심에 큰 해를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전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체 신심의 활성화가 거짓된 의견들의 유포에 의해서 좌절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사도좌의 권위로써 존경하는 형제들인 여러 분들(주교님들)께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알려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목적 염려와 걱정을 일으키는 이유들 -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1965))

 

2천년 전 인성을 취하시어 강생하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 서셨을 때, 그들은 입은 옷을 찢으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밝히시는데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들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사고방식 과 자만의 틀 안에 안주함으로써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께서 강생하시어 우리와 함께 실제로 계신다고 하는 개념 (Emmanuel)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며,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자로 단죄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인류는 2천년 전의 유대인들이 당면했던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 세상의 다른 여러 종교들 안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있지만, 오로지 주님께서 직접 세우시고 이끌어 가시는 가톨릭 교회 안에만 인류의 구원을 위한 충만한 계시 진리와 은총의 통로가 있다는 현실을 많은 이들이 수용하기 어려워 한다.  가톨릭 교회가 단지 신자들의 모임만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과 진리가 있고, 천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하는 사실을 배척하는 주장들은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주 들을 수 있다.  특히 성체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이 영적인 현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과 피를 통한 실체적이며 물리적인 현존이라는 사실, 그래서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천주성과 인성을 지니시고 지상에 실제로 현존하시고 구속 사업을 하시던 때와 기본적으로 같은 현실이 교회와 성사들을 통하여 지속되고 있음에 눈을뜨고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톨릭 신앙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그러한 핵심적인 신앙의 현실에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면, 그 현실을 가시적으로도 보여주시는 주님의 기적들에 대한 이해 또한 용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주의 성체 기적들에 대해서는 광주 공지문에서 그 현상들이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라고 선언하었다.  이러한 단정은 나주의 일들이 오류이고 따라서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위험한 현상들이므로 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는 사목 지침에 대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에 인용된 공지문 상의 교리 제시가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다른 여러 지면들에서 설명되었다.  간단히 요약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변하지 않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사제의 축성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기능만 가지고 있고, 그 외양을 변화시키는 기능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지문에서는 사제의 축성이 끝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그대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는, 교리에 없는 뜻이 첨가되어 선언되어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사소한 차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심각한 차이이다.  만일 공지문 상의 그 교리 제시가 옳다면, 나주의 성체 기적 들 뿐 아니라, 교회 역사 상의 성체 기적들이 다 부정되어야 하고, 그들 중 다수를 인정한 교회의 결정들도 다 번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성체 축성 후에도 여전히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어야 한다," 라는 공지문 상의 표현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성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를 오류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변호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에 공지문 상의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는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성체 성사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살펴보자.

 

성체 성사는 빵과 포도주라고 하는 물체를 가지고, 유효하게 서품된 사제에 의해서, 주님께서 주신 축성 기도문을 바침으로써 거행된다는 것이 그 기본틀이다.  그리고, 성체 축성이 끝난 후, 신자들이 성체를 영하면 그들의 몸속에서, 또는 가상적으로 감실 안에서라도 너무 오래 보존되어 성체가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면 더 이상 성체라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실체적 현존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빵과 포도주의 가시적 표징은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광주 공지문에서, 그리고 공지문의 내용을 변호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일 것이다.  그래서, 나주의 성체 현상들에는 성체 성사의 필수적인 가시적 표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논리와 그에 따른 성체 기적들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 과연 타당한가?

 

(1)  나주의 성체 외양 변화 현상들이 인위적으로나, 자연적으로 일어났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성체 성사의 빵과 포도주라고 하는 가시적 표징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인위적인 의도나 노력도 없었으며, 따라서 교리를 어겼다고 지적당할 수 있는 책임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율리아 자매가 한 것은 성체를 영한 것 뿐이며, 성체 기적이 일어난 것은 율리아 자매의 의도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다.  교회 역사 상에 일어난 성체 기적들과 수많은 다른 기적들에 대해서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버린다면 이는 기적들의 진정한 주체이신 주님의 역할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57조에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세례성사에 매어 놓으셨지만, 하느님 자신이 성사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교리서의 원본에는 "성사들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성사"가 복수로 되어 있다.  그 뜻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7성사를 세워 교회에 위탁하셨지만, 하느님께서 현존하심과 역사하심이 그 성사들에 제한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체 성사에서의 주님의 현존이 정상적으로는 반드시 빵과 포도주라고 하는 형상에 결부되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초월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실 수 있으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사와 자연 법칙과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2)  그리고, 주님께서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성체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지, 성사의 보편적인 방도를 변경시키고저 하심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기적들을 주시면서, 앞으로는 빵과 포도주의 외양으로보다는 살과 피의 모습으로 이 성사를 거행하도록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에서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사제직과 성체 성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강조하셨던가!  그리고, 사적 계시(또는 특수 계시)가 공적 계시를 더 빛나게 해주고 그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해줄 수는 할 수 있어도 그 내용을 변경시킬 수 없음은 이미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체 성사의 기본틀에 수정을 가하려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체 성사의 내적 현실을 특별히 가시적으로도 보여주시려고 내려주시는 기적들에 대해서 "성사적인 견지에서" 논하면서, 그 현상들이 성사의 기본틀에 맞지 않는다고 단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일이다.

 

(3)  나주의 성체 현상들이 성체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성체의 실체, 즉 주님의 살과 피라고 하는 사실이 변한 것은 아니므로), 변한 것은 오직 성체의 외양 뿐이었다.  그것도 꽃나무라든가, 돌이라든가 하는 성체의 실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형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성체의 실체와 자연적으로 완전히 부합되는 살과 피의 형상으로 된 것이다.

 

지금까지 빵과 포도주의 외양에 가리워져 있던 진정한 현실이 그 기적적인 현상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 뿐이다.  인간들이 성체의 현실을 하도 인식하지 못하니까, 주님께서 베일을 벗겨서 현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현상들에서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라고 하는 성사의 가시적 표징은 벗겨졌으나, 주님의 살아계신 실체적 현존이라고 하는 성체 성사의 핵심적 현실에는 하등 변화가 없다.  결국 빵과 포도주의 외양도 성체 성사의 가시적 표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며, 성체 성사에 주님의 실체적 현존이 있게 하는 것은 그 가시적 표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시다. 

 

(4)  결국 이 문제는 그 성체의 외양 변화 현상들이 하느님의 뜻과 힘에 의한 초자연적인 기적들인가 아닌가 하는 데에로 귀결되는 것 같다.  특히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있는 세속 주의, 현대주의에 물든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의 흐름에 친히 개입하시고 그 안에 임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유래되는 기적들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기적의 가능성과 의미가 모호해지면, 성체 기적들, 그리고 당신의 "Fiat!"로써 천주 성자의 강생이 이루어지게 협력하신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모든 가시적인 사랑의 징표들을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성체의 내적 현실을 외적으로도 보여주시는 기적들을 극구 반대하는 이들이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들이 많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체를 주님의 참 몸과 피라고 믿는 이들을 "식인종"이라고까지 부르면서 비난하고 있다.  옛날 로마 제국 하에서의,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도 그와 같은 비난을 받았었다.  성체 성사에 대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이 바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때 성체 기적들에 관한 의견의 일치도 어렵지 않게 성취될 것이다.

 

이 분도
2000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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