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 16일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의 삶」과 일기를
읽으며
요즈음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율리아 자매가 쓴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의 삶」과 일기를 읽고 있다.
1985년 6월 30일부터 시작된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에 대한 체험과 증언 그리고 성모님의 메시지와
자매의 고통과 사랑의 대 파노라마를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는다. "목마르다"라는 주님의 외침은 사랑의
울부짖음이었고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며 고통은 나눔의 기도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배운다. 나는 여러 번 자매를 통해서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했지만 이 일기를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한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서 어떻게 그런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성령의 도움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일까? 이 은총의 일기가 속히 출판이 된다면 많은 영혼들에게 영적 양식이 되어 주님께 나아가는 좋은 길잡이가 될 줄로 확신한다.
이 일기에는 살아 있는 기도가 있고 사랑이 있으며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고 치유의 묘약이 있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22일
봉헌하지 못한 나를 위해 대신 받은 보속
고통
"나는
주님의 품안에 들기까지는 항상 불안하나이다."
이 말씀은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신앙 고백이며 우리 모두의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불안이 마귀 때문일까? 원죄 때문일까? 인간의 죄악(culpa) 때문일까? 아담의 잘못 (culpa)을 하느님께서
더 큰 은총으로 축복해 주신데 대한 사랑일까? 어쨌든 인간의 나약함이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부른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나주의 성모님 집을 알고 난 후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가 어떤 도덕적 가치관을 떠나 순수한 나의 모습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담배를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한 채 나 자신과 타협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실패하였다. 그러기에 봉헌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가보다.
봉헌은 자유의지로 하느님과 하는 약속이기에 중대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 내지는 미화시키는가 보다.
왜냐하면 혼자 몰래 몇 번씩 피웠던 담배를 이제는 무의식중에 율리아 자매 앞에서 태연하게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매는 나의 태도에 깜짝
놀라더니 "저도 담배 하나 주세요." 라고 하여 처음에는 장난이려니 했는데 정말 입에 물고 연기를 뱉아 내는 것이 아닌가! 그 즉시 자매의
입안이 온통 헐어 식사는 물론 물조차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봉헌하지 못한 나를 위해 대신 보속하고자 고통을 봉헌한 것이다.
그 이후로 이상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담배 맛이
없어진 것이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일부러 피워 보았지만 더 이상 피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율리아 자매가 병원에
찾아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입안 전체와 혀, 목까지 패이고 헐어 여러 군데 누런 농이든 염증과 구멍이 뚫리는 그 상처가 아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화를 받고 나는 "자매가 그렇게 된 것은 오로지 나 때문이다"라고 즉시 통회했다. 그랬더니 자매의 입안은 그 순간 완전히
치유가 된 것이었다. 피가 나고 심하게 패이고 헐어 농이 가득했던 입안이 완전히 살로 채워지고 깨끗해진 사실에 얼마나 많이 놀랐던지!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의 능력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다.
1991년 12월 23일
이웃을 위한 낙태 보속 고통
나는 어제 저녁 김 라파엘 부부의 집을 찾아갔었다.
몸이 불편한 율리아 자매가 그 집에서 쉬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라파엘 형제가 최 요셉 베드로 형제의 배를 만지면서 임신한 배와 같다고 하면서 율리아 자매를 쳐다보았는데 자매의 배가 부른 것을
느꼈다고 한다.
율리아 자매가 나주의 집에 갈려고 옷을 입는 순간 임신
고통이 왔는데 배가 얼마나 부풀었던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몇 명이 자매님을 들어서 침대에 눕혔지만 아기를 배에서 위
아래로 움직이는 고통은 옆에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화장실에 가서 문고리를 잡고 안간힘을 쓰며 아기가 난산하는 고통을 받았다.
자매님의 임신 고통을 두 번 목격했지만 이처럼 심한
고통은 처음 보았기에 놀랐다. 나는 성모님께 원망스런 기도를 하였다. "어머니 너무 하십니다. 당신의 딸이 이렇게 고통받아야 합니까? 비록
율리아가 「한 영혼이라도 구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떠한 고통도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이제 그 고통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 오후 8시에 시작하여 9시까지 꼭 1시간 동안 몸부림친 고통이었다. 나는 즉시
나주의 성모님 집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였다. 지금 누군가가 영적, 육체적 치유를 받고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000라는 아가씨가 성모님 집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아가씨는 세속에 빠져 자살까지 하려다가 나주의 성모님을 찾아와 회심하여 가끔 나주에 온다고 한다. 출산 고통이 끝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율리아는 웃으며 주의 영광과 찬미를 노래하면서 손뼉을 치며 감사하는 모습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영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주로 가면서 차내에서 하시는 말씀이 고통받고서 자신의 건강이 더 좋아졌다는 것이다.
성모님 집에 저녁 11시 경에 도착했는데 어떤 아가씨가
뛰어 나오는 것이었다. 율리아 자매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만나게 됐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율리아 자매가 낙태보속 고통을 받기 시작했던 저녁
8시부터 갑자기 자기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주님과 성모님을 원망하며 마음 아프게 해드렸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네 탓이 아닌 내 탓」으로
받아들여 성모님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율리아 자매의 고통받은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어쩐지…"하며
울더니 말을 이었다.
"눈물 흘리신 성모님 앞에서 있었는데 8시경부터 그 동안
제가 살아왔던 과거의 잘못들이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상처 받았던 것만 생각했지 제가 이웃에게 상처 준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매님이 늘상 저희들에게 해주신 말씀처럼 의사에게는 성한 사람이 아닌 병자가 필요하듯이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성모님을 통하여 죽음 직전에 불러주셔서 이렇게 죄인으로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을까요"하는 그 자매를 보면서 또
한번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한없이 넓으신 성모님의 따뜻한 사랑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너무나 기뻐하며 자신을 치유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아가씨의 모습은 마치 어린애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성모님의 부르심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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