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20일
롤롬보이에 목 없는
유령은?
롤롬보이에 가서 김 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신학생 때 잠시 피해 있던 성
도미니코 수도원 터에 참배를 하고 미사를 드렸다.
이곳이 성지가 된 이유는, 밤 12시만 넘으면 무슨 연유인지 개들이 아주
시끄럽게 짖어대 잠을 잘 수가 없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갈 정도였다 한다.
그러던 중 멘도사 할머니가 이사를 왔는데 12시가 넘어 개가 마구
짖어대자 무슨 일인가 하고 식모가 문밖에 나갔다가 목없는 유령을 보고 기겁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식모는 보따리를 싸
도망치듯 그 집을 떠났다 한다. 그러던 중 한국의 오기선 신부님께서 롤롬보이에 김대건 성인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셨다. 그 곳에 성인의 동상이
도착한 날부터 개 짖는 소리가 나지 않아 목없는 유령이라고 무서워했던 그 분이 바로 목이 잘린 한국의 김대건 신부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멘도사
할머니께서 자신의 터를 한국 교회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망향의 망고 나무 밑에서 김 대건 신학생이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보고서 심히 울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나무 밑에서 조국을 사랑하였던 김 대건 성인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망고 나무는 멘도사 할머니 가족의 관리로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성 도미니꼬 수도회 별장이었던 이곳의 1839년경의 사진은 마닐라 시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무척 사랑했던 율리아 자매는 동상을 만들 때 동참했고
동상 제막 축성식 때도 오기선 신부님과 함께 와서 기도한 곳이다.
1997년 1월 21일
신 추기경님의 고통의
신학
오후 4시에 신 추기경님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우리 일행은 신 추기경님
관저로 갔다. 항상 온화하시고 다정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신 추기경님께서는 나주 성모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에 우리 일행을 맞는 그분의 모습은
더욱 다정다감하셨다.
그분은 가끔씩 가난한 환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시곤 하는데 이 날도
장애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계셨다.
신 추기경님은 병환 중에 계셨기에 추기경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와 성가를
불러드렸더니 주의기도를 성가로 해 달라고 하셨다. 추기경님은 고통의 신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십자가에 못박히시며,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통곡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들을 우리를 위해 대신 받으셨던 것이다. 교황님께서도 교회의 고통을 대신
받으신다고 하셨던 것처럼 나도 마닐라 교회의 쇄신과 백성들의 고통을 위해 미약하지만 나의 고통도 봉헌하였다. 고통은 가치있는 것이며 주님의
은총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92년 2월에 율리아 자매와 함께 추기경님을 만나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율리아 자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기에 통역없이 기도하고 영가를 부르는데도 눈물을 흘리시던 추기경님을 생각할 때 체면과 이목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청해서 기도 받으시는 어린 아이와 같은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기에 잊혀지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는 「팍상한 폭포」에 가기 위해 카누를 저으며 계곡을 힘겹게
올라가는 뱃사공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주 하느님 크시도다" 성가를 부르며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아름다움을 찬미하였다. 어디에서 그 많은
폭포수가 떨어지는지? 나는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 쓴 채로 뗏목을 타고 폭포수 밑에까지 들어갔다 왔다.
1997년 2월 18일
송별사와 답사
지난 2월 4일 광주 염주동 본당에서 이곳 여수 동산동으로 옮긴 지 벌써
3주 째가 되었다. 염주동 본당 송별식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고별사를 하였다.
"5년 동안 성전 신축을 마무리하느라 애환을 같이 한 존경하는 염주골
교우들을 떠나게 되니 섭섭하면서도 홀가분합니다. 왜냐 하면 빚 없이 오히려 1억이나 흑자를 내고 성전을 완공하게 되어 제가 할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제 인사 이동은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사제는 선교사이기에 언제 어디든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러한 순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저를 여수로 부르신 것은 그 곳에서 선교해야 할 일을 마련하고 계신 주님의 계획이라고 봅니다. 그 동안 여러 모로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사랑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혹시 저 때문에 상처받으시고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염주동 성당을 떠나 동산동 본당에 들어서면서 고풍스런 옛날 성당과 사제관이 마음에 들었다. 작지만 오붓하고 따스함을 느꼈다.
대부분 연세가 많은 교우들이었으며 63년이라는 신앙의 뿌리가 깊은 본당이다. 젊은 층은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갔기에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환영사에 대한 답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가장 작은 본당에 보내 달라고 했더니 역사가 깊고 안정된 본당에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공기 좋고 수려한 해변도시 여수로 보내 주실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제 본명처럼 알로 즉 아래로 낮아지는 삶,
항상 밑에서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 안에서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과 생활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성체 조배실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성체와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한 작은 방을 마련하겠습니다. 거기서 매일 예수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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