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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수첩과 나주 진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아프리카 잠비아의 몬씨뇰께로부터 온 편지  -  1999년 9월 9일

인도의 가필드 쟌센 신부님께로부터 온 편지  -  1999년 6월 14일

현 시대는 마리아의 시대  -  1999년 10월

말씀에 육(肉)을 주신 성모님

저는 교만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  1999년 4월 12일

나누고 싶은 체험  -  1999년 7월 7일

미국의 아버님으로부터 온 편지  -  1999년 6월 6일

김 마르티노 형제님의 글을 읽고  -  1999년 7월 20일

나주는 주님께서 한국민에게 내리시는 엄청난 영광입니다  -  1999년 8월 5일

독일에서 온 편지 -  1998년 11월 16일

천 시몬 형제의 편지  -  1999년 7월 8일

볼리비아 리카르도 박사의 증언  -  1999년 6월 30일

나주와 교도권에 대하여

성모 승천 대축일 나주 순례기  -  1999년 8월 21일

나주를 향해 던지는 작은 불꽃

와서 보시오  -  1998년 9월 28일

프리카 잠비아의 몬씨뇰께로부터 온 편지

 

Mary's Touch By Mail 귀하,

보내주신 자료들에 대하여 먼저 감사드립니다.  사실 그 자료들을 받은 지가 꽤 오래되었군요.  저는 보내주신 신문들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이곳 마을들의 많은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숲이 우거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는 이 주민들을 찾아가기를 항상 갈망하고 있습니다.  가능하시다면, 나주에서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의 사진 큰 것을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시는 성모님의 큰 사진을 성당에 걸어놓아서 기도하러 오는 신자들이 잘 볼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여기 신자들은 직접 보고 만져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매우 주저함을 느끼면서 다음의 부탁을 드립니다.  만약 귀하께서 성모님의 상을 보내주실 수 있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니까 부담을 느끼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귀하께서 보내주신 신문들은 믿음이 없는 이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신문에서 성모님께서 당신의 상을 통하여 피눈물 흘리시는 사진들을 보고서 감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소식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에 이런 소식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다시 저를 도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귀하는 매우 멀리 계시지만, 선교 활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귀하가 사람들을 참된 신앙으로 이끌려고 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하실 수 있도록 항상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일치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씨 치콘데 몬씨뇰
만싸 교구, 잠비아, 아프리카
1999년 9월 9일

(번역자 주:  치콘데 몬씨뇰께서는 탄자니아의 키팔라팔라 대신학교를 다니셨고, 1947년 8월 15일에 탄자니아의 타보라 대성당에서 신품을 받으셨습니다.  서품 후에 곧 잠비아로 오셔서 사목 활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넓은 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교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1997년 1월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길가에 찢어진 칼라로 된 신문이 눈에 띄어서 보니까 Mary's Touch 신문이었고, 거기에는 한국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기사와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본당에 돌아오셔서 자세히 보니까 저희 주소가 있었으므로 연락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도의 가필드 쟌센 신부님께로부터 온 편지

 

(신부님께서는 신학 박사, 문학 박사 및 교육학 박사이시며, 인도의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Mother Theresa와도 가까우셨던 분이십니다.)

친애하는 친구들께,

당신들이 보내주신 아름다운 (나주) 성모님 상에 대해 대단히 감사를 드립니다. 성모님 상은 너무나 훌륭합니다. 저는 이 성모님 상을 사랑하며,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귀중하게 보존할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행복하며 기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며 저도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당신들에게 성공과 행복이 있기를 빕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십시오. 당신들은 항상 저의 마음과 기도 속에 계실 것입니다. 성모님 상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성모님 상을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사랑합니다. 이 성모님 상은 이 곳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당신들을 성모님 품 속의 돌보심에 맡겨드립니다.

성모님의 향기가 나는 눈물을 닦은 천 조각들을 동봉합니다. 이 귀한 선물에 대해 기뻐하시기를 희망합니다. 그 눈물은 당신들이 저희에게 보내주셨던 두 장의 나주 성모님의 큰 사진들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눈물은 아직도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의 사진을 들고 찍은 저의 사진들을 보십시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 사진들을 확대하고 또 엽서로 만들어서 저에게도 좀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급하게 필요합니다.

저는 나주에서의 성모님 발현을 사랑하며 인도에서 전파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여러 지방들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나주의 성모님 상과 사진들을 보려고 오고 있습니다. 주교님들과 대주교님들도 오십니다. 동봉하는 사진들을 보십시오. 열매는 놀랍습니다. 수많은 회개와 치유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꼭 계속 도와주십시오. 당신들을 신뢰합니다. 이곳 사람들의 신앙이 증가되고 있으며 더 성화되고 애덕에 찬 삶을 살고 있읍니다. 인도에 와서 보십시오. 인도에 오신다면 진심으로 환영해드릴 것입니다. 저는 당신들을 성모님의 품속에 맡겨드립니다. 다음에 열거된 품목들을 매달 한 번 씩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1) 비디오와 오디오와 슬라이드
(2) 성모님 상, 묵주 및 스카풀라
(3) 나주에서의 기적들을 담은 사진들 (크고 작은 싸이즈들)
(4) 책들, 소책자들, 그리고 신문들
(5) 엽서로 된 사진들

지금까지 보내주신 많은 출판물들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당신들께 드리는 선물로서 당신들의 의향을 위하여 100번의 미사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기도와 축복과 사랑을 드리며,

첨언: 성모님의 향기가 나는 눈물을 흘리시는 사진들과 성모님 상을 보는 이곳 사람들의 행복에 찬 얼굴들을 보셔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십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베풀고저 합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Garfield Jansen 신부 드림
1999년 6월 14일

 

 

현 시대는 마리아의 시대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우리의 시대는 마리아의 시대라고 불리울 수 있다,"라고 하셨다 ("큰 징표," #6, 1967년 5월 13일).  아래에 열거된 사건들은 과연 현 시대가 마리아의 시대임을 확인해준다.  (아래에 언급된 성모님의 발현들 및 기적들은 이미 교회의 공식 인가를 받았음.)
 

1800-1823

교황 비오 7세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최소한 여덟 군데의 성모님 성지에서 성모상에 왕관을 씌워드리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 중에는 로레또의 성모님 성지(1801)와 사보나의 자비의 성모님 성지(1815)도 포함되어 있음.

1826

당시 27세였던 가경자 폴린 쟈리괄에 의하여 "생활한 매괴 신공"회가 설립됨.  그 회는 1827년에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인정되었으며, 1835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하여 재차 인정되었고, 1836년에는 회원 수가 2백만을 초과하였음.

1830

성모님께서 불란서 빠리에서 발현하시어 기적의 메달 신심을 시작시켜 주심.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기적의 메달 전면에는 두 손으로 은총을 내려주시며 발로 뱀을 짓밟고 계시는 자비의 성모님 모습이 있고, 성모님 주위로 "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기도문이 새겨져있음.  뒷면에는 십자가와 성모님을 상징하는 "M"자가 함께 있고, 예수 성심 및 성모 성심이 있으며, 그 둘레에 열두 개의 별들이 있음.  

1836

불란서 빠리의 승리의 성모님 성당에서 티없으신 성모 성심회가 설립됨.  그리고 그 본당이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됨.

1840

불란서 블랑기에서 티없으신 성모 성심의 녹색 뱃지 및 스카풀라 신심이 시작됨.

1841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무염시태의 성모님을 한국 및 미국의 주보로 선포하심. 이로써 한국은 이미 주보 성인이셨던 성 요셉과 함께 무염시태의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게 되었다.

1842

성 루이 마리 드 몽포르 성인의 저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의 참된 신심"이 불란서의 셍 로렝 슈르 세브르에서 발견됨.

1842

1월 20일에 기적의 메달의 성모님께서 알퐁스 마리 라티스본에게 산 안드레아 델레 프라떼 성당에서 발현하셔서 그를 회개시켜주심.

1844

5월 1일에 테오도르 포르카드 신부(나중에 주교가 됨)가 오끼나와 섬에서 일본을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함.  나중에 교황청에서 이 봉헌을 인정했으며, 티없으신 성모 성심을 일본의 주보로 선포함.

1846

성모님께서 불란서의 라살레뜨에서 발현하심.

1849

7월 16일에 티없으신 성모 성심의 아들들의 선교회(클라레시안 선교회)가 성 안토니 마리아 클라렛에 의해 스페인에서 설립됨 (이는 19세기와 20세기 동안에 성모님께의 봉헌 하에 설립된 많은 수도회들 중의 하나였다.)

1854

교황 비오 9세는 성모님의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심.

1858

무염시태의 이름으로 성모님께서 불란서 루르드에서 성녀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심.

1864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모님께서 성 안토니 마리아 클라렛에게 발현하심.

1871

성모님께서 불란서 뽕뜨멩에서 발현하심.

1875

이태리 폼페이에서 매괴의 성모님 성지가 건설됨.  역시 이태리에서 로사리오의 성모님 수도회가 설립됨.

1876

성모님께서 불란서  레봐쟁에서 발현하심.

1877

성모님께서 폴란드의 기르즈르발트에서 두 소녀에게 발현하심.

1883

캐나다에서 매괴의 모후이신 성모님 성지가 건설됨.

1884

교황 레오 13세는 "Superiore Anno" 회칙을 매괴의 성월인 10월에 반포하심.

1891

교황 레오 13세는 "Octubre Mense" 회칙을 매괴의 성월인 10월에 반포하심.

1892

교황 레오 13세는 묵주 신공의 효과에 대하여 "Magnae Dei Matris" 회칙을 9월 7일에 반포하심.

1893

교황 레오 13세는 묵주 신공이 사회악에 대한 처방임을 가르치신 "Laetitiae Sanctae" 회칙을 반포하심.

1894

교황 레오 13세는 은총의 중개자이신 성모님과 묵주 신공에 관하여 "Jucunda Semper" 회칙을 반포하심.

1895

제1차 국내 성모 대회가 이태리 리보르노에서 개회됨.  (1895년 이후로 150회 이상의 대규모 국내 성모 대회가 개최되었고, 134회의 보다 작은 규모의 성모 대회가 개최되었음.)

1896

교황 레오 13세는 묵주 신공이 완전한 기도임을 가르치신 "Fidentem Piumque" 회칙을 반포하심.

1897

교황 레오 13세는 매괴 신공회에 대하여 "Augustissimae Virginis" 회칙을 반포하심.

1900

제1차 국제 성모 대회가 불란서 리옹에서 개최됨.  (이후로 16차례의 성모 대회가 세계적으로 개최되었다. 1900: 불란서 리옹; 1902: 독일 프라이부르크; 1904: 이태리 로마; 1906: 스위스 아인지델른; 1908: 스페인 사라고싸; 1910: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1912: 독일 트리르; 1950: 이태리 로마; 1954: 이태리 로마; 1958: 불란서 루르드; 1963/65: 도미니칸 공화국 산토 도밍고; 1967: 폴튜갈 리스본: 1971: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1975: 이태리 로마; 1979: 스페인 사라고싸; 1983: 말타 안치펠; 1992: 스페인 후엘바; 등등)

1906

에콰도르 키토에서 성모님의 기적의 그림이 주어짐.

1917

5월부터 10월까지 폴튜갈의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심.

1921

아일랜드에서 프랭크 더프에 의해서 레지오 마리에가 창설됨.

1932

벨기에 보렝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심.

1933

벨기에 바늬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심.

1942

10월 31일 로마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처음으로 전 세계를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드림.

1946

독일 마리언프리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심.

1950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님의 몽소 승천을 믿을 교리로 반포하심.

1952

교황 비오 12세는 두번 째로 전 세계를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드림.

1953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이태리 시라큐스에서 티없으신 성모 성심상을 통하여 눈물을 흘리심.

1954

1953년 9월 8일에 반포된 "Fulgens Corona"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을 첫 번 째 마리아의 해로 선포하심.

1955

오스트리아에서의 전 국민의 묵주 기도 운동을 통하여 소련군이 물러남으로써 매괴의 성모님께서 승리하심.

1961

불란서 리지외에서 마리아 대회가 개최됨.

1961

교황 요한 23세는 사목 서한 "Il Religioso Convegno"에서 묵주 기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하여 가르치심.

1964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에 교황 바오로 6세는 세 번째로 전 세계를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드림.

1964

묵주 기도 운동을 통하여 브라질이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매괴의 성모님께서 또다시 승리하심.

196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교회헌장(Lumen Gensium, 제8장)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성모님의 역할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설명함.

1967

5월 13일,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5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큰 징표"(The Great Sign)를 발표하심.

1972

이태리 밀라노에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에 의하여 "마리아의 사제 운동"이 시작됨.

1973

일본 아끼다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심 (6월 12일:  감실의 성체로부터 빛이 비쳐나옴;  6월 28일: 아녜스 사사가와 수녀가 성흔을 받음;  7월 6일: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발현하심)

1974

2월 2일에 교황 바오로 6세는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신심에 관한 "Marialis Cultus"를 발표하심.

1976

성모님께서 베네주엘라의 베타니아에서 발현하심 (관할 주교는 2천명 이상의 증인들을 심문하였으며, 드디어 성체에서 피가 흐르는 기적이 나자 초자연적인 현상임을 확신하고 사목 서한을 발표하여 공적으로 인정하심.)

1982

5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네 번째로 전세계를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하심.

1984

3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세계의 주교들과 함께 다섯 번째로 전 세계를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하심.

198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7년 6월부터 1988년 8월 15일까지를 두 번째 마리아의 해로 선포하심.  3월 25일에는 "구세주의 모친"(Mater Redemptoris)을 발표하심.   

 

 

 로버트 제이 빌레트 신부, C.M.F
클라레시언 선교 수도회,  미국 캘리포니아 주
1999년 10월

 

 


말씀에 육(肉)을 주신 성모님 <스˜ 한(Scott Hahn) 교수, 신학 박사>

 

(번역자 주:  스˜ 한 교수는 개신교 목사였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로 활약하고 계시며, 오하이오 주의 프란치스칸 대학교 (Franciscan University)에서 교수로 계십니다.  이 글은 "바티칸 내부 (Inside The Vatican)" 잡지의 1997년 10월 호에 게재되었으며, 저희가 이 글을 옮겨 출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바티칸 내부"의 편집인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보속의 협조자," "공동 구속자"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적 의미의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으며, 이 말씀들의 깊은 뜻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전통적인 정통 가톨릭 신앙을 활성화함에 있어서 필수적 사항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뿐 아니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모님께 관한 새로운 교리의 반포를 이미 여러 해 동안 신중히 검토해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즉, 성모님께서 "공동 구속자(the Co-Redemptrix)"이시며, "모든 은총의 중개자(the Mediatrix of All Graces)"이시며, "우리를 위한 변호자(the Advocate)"가 되신다는 교리입니다.  스˜ 한 교수가 쓰신 아래의 글은 바로 이러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며,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톨릭 교회로 귀의하는 이들을 이끄심에 있어서 자주 놀라운 굴곡들과 변화들을 사용하신다고 생각됩니다.  제 경우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목사로서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깊은 반대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사오로가 크리스챤들을 반대하고 박해했듯이 마리아께 대한 공경을 열심히 반대하였는데, 인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모친께 대한 자식으로서의 깊은 사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열렬히 반대했던 것만큼 사랑도 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가톨릭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중개자이신 마리아를 위한 민중의 소리 (Vox Populi Mariae Mediatrici)"라는 운동에 접했더라면, 저는 경악했을 것이며,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의심과 반감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는 다음과 같이 외쳤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마리아가 '공동 구속자요, 모든 은총의 중개자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변호자'라구요?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 대신에 마리아를 섬기려고 하는군요!"

저는 마리아 교리와 신심을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저는 마리아 교리와 신심이 가톨릭 교인들에게 전염되어 있는 무슨 죽을 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왜 천주교가 틀렸는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제가 가톨릭 신자가 되고 난 후에도, 처음에는 저는 새로운 마리아 교리를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 교리가 반포된다면 더욱 혼란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학 교수로서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혼란이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그 대답은 "혼란을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혼란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이며, 교황님께서 선언하는 것을 나도 선언하는 것이며, 또 이를 신학자로서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제가 과거에 마리아께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께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 흔히 제시되는 논리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으며, 교황님에 의해서 새로운 마리아 교리가 선포될 전망에 대해서도 잘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주의자로서 제가 마리아께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반대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마리아 신심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업의 완전함을 손상시키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아간다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제가 교회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중요한 이유는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가장 완전한 결실이시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달이 태양의 영광을 감소시키지 않는 것처럼 마리아께서도 당신 아드님의 영광을 감소시키지 않으십니다.

제가 로마에로 가는 길 위에서 겪었던 온갖 우여곡절을 되돌아볼 때, 아마도 복음주의자였던 제가 어떻게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그리고 왜 제가 새 마리아 교리를 교황님께서 선포하시기로 결정하시면 이를 환영할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마리아 안에 구체화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그 복음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천주 성삼의 제2위께 어떤 변화를 초래해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드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생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티끌만치도 증가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유익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창조주의 이익과 피조물의 이익 사이에 줄당기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속하셨습니다. 성삼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마리아 안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안에서 성취된 그 완전한 업적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감소시키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장 완전한 결실을 이루신 인간을 주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업적을 축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아니시며,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피조물이시지만,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십니다.  화가들이 가장 훌륭한 걸작품을 그리고 싶어하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어머니가 가장 훌륭한 걸작품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마리아께 관한 이러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마리아께 관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마리아는 계약(The Covenant)에 기초를 둔 가족 관계의 유대(紐帶)로써 하느님께 직접 연결되어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 연결로 인하여 우리들도 양자녀(養子女)로서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하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그 어느 아들보다도 더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신적 영광의 선물을 어머니께 부여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게 하신 예수님을 본받도록 부르심받아 있습니다.

구원은 함께 이루는 과업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냐 하면, 당신의 신비 안에 부성(父性)과 아들의 신분과 가족의 본질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 사업은 성삼위께서 함께 이루시는 사업입니다.  우리의 구속(救贖)은 성삼위의 일이요 가족의 일입니다.

성삼위의 제1위께서는 이제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요한 20:17).  이는 "많은 형제들 중의 첫 째가 되신"(로마 8:29) 성자의 구원 사업으로 이루신 것이며, 아들의 영이시며 우리가 "압바, 아버지" (로마 8:15)라고 부르도록 충동하시는 천주 성령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 점이 그리스도교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당신의 가정과 사랑에 참여시키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 관계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삼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의 힘으로 성자를 잉태하심으로써 성부께 순종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신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들입니다 (We are God's co-workers)" (고린토 전 3:9).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느님께서 혼자서 일을 하실 수 없으십니까?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당신의 협력자들로 삼으심으로써 성숙한 아들들과 딸들로 길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구속(救贖)이며, 그 일을 하심에 있어서 마리아를 특별한 협력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께 당신의 아드님을 젖먹이어 키우시고, 자장가를 불러 재우시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아드님의 고통과 함께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즉, 성부께서는 당신 성자의 인간으로서의 모든 삶이 마리아의 끊임없는 "피아트" (Fiat, 즉 "그대로 이루어지소서")에 의존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보다 더 밀접한 협력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협력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고통이 따릅니다. 제가 개신교에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성 바오로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나의 고통을 기뻐하며, 내 육신의 고통으로써 그분의 몸이신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핍됨을 채웁니다" (골로사이 1:24).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무슨 좌절이라든가 약간의 상처 같은 것들을 보속으로 바치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간단한 말이 우리의 공동 구속 신비를 풀어주는 열쇠를 지니고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우리의 고통들을 우리 주님의 구속을 위한 고통들에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공동 구속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복되신 성모님께서는 특히 갈바리아 산 위에서 당신의 마음을 아드님의 마음에 일치시키심으로써 가장 출중한 공동 구속자(the Co-Redemptrix par excellence)가 되셨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도 있습니다. "은총의 차원에서의 마리아의 이러한 모성은 천사의 아룀에 대하여 충실히 동의했을 때부터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림없이 지속되었다 -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된다" - #969. 그런데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아드님의 부활 및 승천과 함께 끝나지 않았으며, 마리아께서 몽소 승천(蒙召昇天)하신 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리서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은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을 위한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준다. . .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된 동정녀를 변호자(Advocate), 보조자(Helper), 협조자(Benefactress), 중재자(Mediatrix)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 #969. 교리서에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구원의 역할 (saving office)"이라고 부르며, 이어서 그 역할을 여러 가지의 경이로운 명칭들로써 설명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역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리아의 "구원의 역할":  모성적인 중개(仲介)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러한 명칭들을 "공동 구속자 (Co-Redemptrix)"라는 명칭과 더불어 자주 사용해오셨습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그 명칭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그 명칭들을 깊이 이해하고 축하할 수 있도록 노력해오셨습니다. 신학에 조예가 깊으신 교황님께서는 "모성적인 중개 (maternal mediation)"라는 용어가 교회안의 신학 용어로서 널리 사용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개념이 성모님께 관한 교리와 신심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주의자였던 저는 이 이단적으로 보이는 불똥을 꺼버리기 위하여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급히 찾았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오직 한 분의 중개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티모데오 전 2:25).  어찌 감히 마리아의 모성적 중개에 대하여 말하며 마리아를 "중개자 Mediatrix)"라고 부른다는 말입니까?

먼저, 여기에서 하나라는 뜻을 위해 사용된 희랍어는 "eis"인데 이 단어는 "첫 번째의" 또는 "으뜸가는"이란 뜻이며, 단 하나라는 뜻을 가지는 "monos"와는 다릅니다.

한 분의 중개자가 계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단 한 분의 성자가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아들 자격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분의 중개자 역할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개 역할은 마리아의 중개 역할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세워줍니다.

더군다나, 히브레아 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대 사제직을 하느님의 맏아들이란 개념으로써 설명하고 있으며(히브레아 1:6, 2:17), 바로 이 개념이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이루는 것이며, 또한 우리들의 사제적 성성과 봉사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히브레아 13:10-16, 베드루 전 2:5).  그리스도의 역할과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의 역할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가족에서 맏아들이심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그의 자녀들 사이의 대 사제로서 중개하고 계십니다.  반면 마리아께서는 모후로서 중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의 모성적 중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부 앞에서는 마리아는 성자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는 우리의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십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위해서는 그의 동생들을 돌보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의 마리아의 역할은 "어머니 (mother)"라는 단어가 명사일 뿐 아니라 동사가 되기도 하며, 따라서 하나의 직분입니다.

하느님의 모친이시며 그의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성부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즉 비굴하게 굽실거림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그분의 아드님을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가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참여자" (베드루 후 1:4)가 될 수 있게 해주는가입니다. 그래서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이들이 복음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고저 하신다면,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잘 모시고 있으며, 마리아를 어머니로 잘 모시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현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을 잘 이해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모성적인 중개"라는 개념을 깊이 꿰뚫고 계시는 것은 결정적인 영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께서 공로를 세우는 능력의 바탕이 되는 공로를 세워주셨다

"공로(功勞)"라는 개념을 순전히 경제적으로 이해한다면 불쾌한 개념이 될 수 있지만, 가정이라는 맥락 안에서 사용된다면 자연스런 개념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족 안에서 자녀가 되는 우리들은 자녀들이 아버지로부터 상을 받는 것과 같이 은총을 받을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면서 불평을 하겠습니까?  또 상을 주면서 아까워하겠습니까?  성 아오스딩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력들에 대하여 상을 주실 때에는 우리 안에서 이루신 당신의 업적을 빛내시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08 참조)라고 했습니다.

교리서에서는 우리가 공로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느님의 부성적(父性的)인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천주성에 참여시켜주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거저 베푸시는 의로움의 결과로 참된 공로를 베풀어주실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의 약속된 유산'을 받게 하는 은총에 의한 권리, 사랑의 완전한 권리이다" - #200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공로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을 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분의 성령에 의한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부여해줍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공로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 하면 그분께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 공로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 성부께서는 어디에서 당신의 성자께서 세우신 크나큰 공로를 온 세상에 보여주십니까? 물론 우리들 각자 안에서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먼저 마리아 안에서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께는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무한한 은총의 선물에 의하여 마리아께서는 계약의 목표를 달성하셨습니다. 즉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적 의지와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마리아께 있어서는 이상과 현실이 하나요 동일합니다.

MATER ET MAGISTRA (어머니와 교사)

그런데 이에 관하여 교도권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교도권을 스트라이크와 아웃을 선언하는 무서은 심판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도권은 심판이라기보다는 우리 팀 자체에 속해있습니다. 팀 주장인 교황님과 그의 동료 주교들은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오는 직분을 수행하고 있으며, 나머지 우리 모든 신자들과 함께 "신자들의 감성 (the sense of the faithful)"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도권을 신학자들을 적대하며 심판하는 주교들로 구성된 재판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교도권이 교회 안에서 사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교적이며 예언적인 역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좋지 않은 뉴스들만 수없이 들어왔던 이 세상에 복음, 즉 좋은 소식을 설교하고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교계 제도를 설립하시고 교도권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교도권은 이 세상에 주어지는 가장 한결같은 예언의 목소리입니다.  교도권은 베드루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주신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는 우리 주님의 권위로써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교황의 교도권이 신앙의 유산(遺産)의 무한한 깊이와 풍요함을 깊이 파고들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많은 진리의 유산이 순수함과 힘을 지닌채 선포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사랑으로써 무류지권의 은사를 교도권에 부여하셨습니다.  교도권은 인간들에 의한 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빛입니다.

이미 금세기와 지난 세기에 두 가지의 성모님 관련 교리들이 반포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교도권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54년의 무염시태 교리와 1950년의 몽소승천 교리가 반포되었던 것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서나 오랜 기간의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교리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선교적 목적을 위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복음이 하느님의 모친이시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분 안에서 완전하게 구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앙과 죄악으로 찢어진 이 세상에서 마리아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족을 회복시키시는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징표이십니다.

몽소승천 교리가 선포되고 나서 얼마 안되어 풀톤 쉰(Fulton J. Sheen) 대주교는 그 교리가 또 하나의 마리아 교리를 암시하고 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아직 선포되어야 할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그것은 마리아께서 당신의 아드님 밑에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가 되신다라는 진리이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주님의 승천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개하심을 선행(先行)했듯이 성모님의 몽소승천은 우리를 위한 성모님의 중개를 선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선포된 마리아 교리들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서 모성적인 역할을 하심을 설명하는 교리의 선포에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목적은 교리의 정의가 아니라 사목적이었습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새로운 마리아 교리를 선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마리아께 대한 사항들을 교회 헌장 (Lumen Gentium)의 결론적인 마지막 장(章)에 포함시켰습니다.  마리아의 중개자로서 그리고 변호자로서의 공동 구속적인 역할은 재확인되었으나 새로운 교리로 반포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진리를 교리로 선포하는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 맡겨진 사명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을 해치는가?

신학은 하나의 진정한 과학입니다.  그리고 연구 과제는 신성한 계시에 의한 신비들입니다.  교회 역사 전반을 걸쳐서 그리스도께서 뿌려놓으신 교리의 씨앗들은 나중에 교도권에 의하여 정식 교리로서 꽃을 피웠습니다.  이처럼 신학도 다른 과학들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발전되었지만, 그 발전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의 가정들과 이론들을 작성하고 테스트합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확실함이 인정되어 "법칙"이라고 불리워지게 됩니다.  또 다른 것들은 신빙성없는 가정들로 밝혀져서 버려집니다.  이렇게 "법칙들"이 과학의 진보에 대한 표시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교리의 선포는 신학의 발전을 알리는 표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리 즉 도그마는 가르침의 완성이며,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명하시고 권한을 주신대로 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교황님께서 이 마리아 교리를 선포하기로 결정하신다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의 신학적 교훈을 주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을 주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무류지권의 은사를 사용하시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사도적 임무(마테오 28:18-20)를 수행하게 되실 것입니다 .

교회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교리의 선포는 가장 뛰어난 마음의 소유자들의 사도적이며 신학적인 에너지가 발산되도록 자극해왔습니다.  특히 어떤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서 교리가 반포될 때 그러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교황 비오 12세께서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를 반포하려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맹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들은 몽소승천이 성경 어디에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런데 가장 극렬히 반대하던 막스 튜리안은 나중에 가톨릭 신부가 되었고 1996년 몽소승천 축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정한 교회 일치 운동의 진보는 우리의 인간적 노력만의 결과는 아닙니다.  더우기 그것은 양측의 양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신앙의 유산을 뜯어고치자는 것도 아니요, 교리들의 의미를 변화시키자는 것도 아니요, 교리들로부터 중요한 단어들을 빼버리자는 것도 아니요, 진리를 한 시대의 기호에 맞게 적응시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는 오로지 계시된 신앙의 내용 전체에 충실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Ut Unum Sint, 18).

그러므로 교회 일치 운동은 당신의 가족을 위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역사(役事)를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께서 가정 일치의 상징이요 원천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어머니를 떠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문가들이 가톨릭 에큐메니즘의 시작을 1950년대 초기로 잡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1950년에 몽소승천 교리가 선포된 직후였으며 또한 1954년에 무염시태 교리 선포의 100주년 기념으로 마리아의 해를 경축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가톨릭 에큐메니즘이 꽁꽁 얼어붙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러나 얼어붙기는커녕,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은 화해의 시작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서기 2000년을 눈앞에 두고서 저는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개종, 프로테스탄트와 정교도뿐만이 아니고 가톨릭교도들의 개종을 위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깊은 은총을 내려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교황 성하께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회개의 대화"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잘 부합됩니다.  그래서 위원회들을 구성하는 것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들입니다.  양보들을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확실한 신앙을 가지는 용기입니다.

아마도 현대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모범을 주신 분은 테레사 수녀님일 것입니다.  수녀님께서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에 지극히 충실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또한 제안된 마리아 교리의 선포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찬성을 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공동 구속자이십니다,"라고 수녀님은 기록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 그의 육신을 주셨으며,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함께 고통받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중개자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모든 은총들을 우리를 위해 얻어주십니다.  교황님께서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 중개자 및 변호자로 선포하신다면 교회에 큰 은총이 내릴 것입니다."

교리의 선포에 대하여 험담하는 사람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그 진리를 믿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금 교리로 선포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또 한 부류는 그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과거에 그 두 부류에 다 속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또 다른 반대자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일부 대중 통신 매개체에 의존하여 거짓된 정보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교리의 지지자들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제4위로 만들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황이 그 교리에 반대하고 있다라는 보도를 했습니다.  "도그마를 패배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스티그마(stigma, 즉 오명(汚名))이다,"라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의견 차이들이 있던 간에 그것들은 정치적인 쟁점이 아니라 "가족 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 안의 정치적인 문제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에 대항해야 합니다. 저는 낙천주의자가 아니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희망을 가지게 되는 유일한 근거는 성부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당신의 성자와 성모님 주위에 불러모아 일치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힘을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라는 사실입니다 (Redemptoris Mater 25).  바로 이것이 제가 교황님께서 결정하신다면 그 새로운 교리의 선포를 찬성할 것이라는 데 대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천주 성자의 강생 2,000 주년을 앞두고 그 강생을 가능하게 하셨던 여인의 역할과 신원을 충분히 밝혀드리는 교리로써 이를 축하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합당한 일이 되겠습니까.

 

(번역:  Mary's Touch By Mail,  1999년 11월 15일)

 

 

 

저는 교만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 찬미 예수님, 성모님

저는 그런대로 신세대이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계몽주의, 합리주의, 르네상스를 많은 의의가 있는 사상 및 사건이라고 배워 왔으며, 지금은 공학도로서 정보통신분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저에게 종교라는 것은 저의 삶을 규제하는 무엇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가만 생각해 보건대, 그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경을 설화나 감동적인 이야기처럼 생각해왔던 때문이고, 하나는 살아오며 저도 모르게 습득된 합리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하의 흐름이며 컴퓨터 내부에서의 데이터의 이동, 이런 따위는 각종 실험을 거쳐 확인을 합니다. 그 후에 그것들의 실재(實在)와 운동을 알 수 있고 공식을 만든다 뭐다 하는 일들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들과는 틀리니, 어떻게 확인을 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 20여 년 동안의 저의 신앙생활은 그저 주일에 가서 미사 드리고 때되면 허겁지겁 고백성사를 보고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근래에 저는 나주 성모님 홈페이지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눈물,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사진,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 입에서 살덩어리로 바뀌는 성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저의 신앙체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교리가 인간들이 그냥 만들어놓은 교리가 아니라 정말로 천상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그리고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해 계신 예수님을, 성모님은 피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성체가 하늘에서 내려오시는걸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진만으로도 저는 변화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성모님의 눈물은, 신앙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했던 굳은 마음을 가진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성경말씀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말씀임을 깨닫자, 성서의 여러 사건은 2000년의 갭(gap)을 뛰어넘어 지금 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이셨고, 참으로 인간이셨고, 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주님수난주일에 수난복음을 들으면서, 저는 난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만과 이기심으로 굳을 대로 굳어진 저는 20년 동안 예수님을 계속 못박아 왔던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나중에는 울음을 참느라 목구멍이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제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약하고 죄 많은 인간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구절구절 감명을 받습니다.

어제(11일)는 부활 2주일이었고, 의심하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의미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저 역시 토마처럼 계속해서 "증거를 대봐라",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봐라"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신부님은 강론시간에 이런 예를 들어주시더군요. 밀림에서 채벌꾼들이 채벌할 때 코끼리를 데리고 간답니다. 코끼리는 그 우람한 코로 통나무를 통째로 굴리면서 일을 아주 잘 합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코끼리를 조그마한 말뚝에 묶어 놓습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꼼짝도 못합니다. 밀림에서 통나무를 굴리는 코끼리가, 조금만 힘을 주면 당장 부러져나갈 말뚝에 묶여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코끼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말뚝에 묶여서 자랐기 때문에 그 말뚝에 묶이면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커서 힘이 세어졌는데도 그 사고체계를 바꾸질 않습니다. 마치 사슬에 묶여 있던 독수리가 사슬에서 풀려나면 날갯짓 한번으로 날아갈 수 있는데도, 지레, 나는 묶여있다고 생각하여 평생 날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닫힌 사고체계를 조금만 바꾸면 무한한 하느님으로부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셨건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묶여 그것이 진리인양,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꾸라고 주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의심 많은 토마스는, 그리고 저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실 때 토마스 사도의 심정이 어땠을까,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넣어볼 것도 없이 당장 그 자리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저는 여태 그 복음을 들으면서 토마스를 비웃었는데 저는 토마스보다 더한 인간이었지 않습니까. 저는 성모님이 주시는 증거를 보고야 믿었으니 말입니다. 성상(聖像)을 보고 신을 이해한 게르만인은 그나마 순수한 편입니다. 저는 성상도 모자라 "증거를 대라"고 외치고 있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한 저의 소견이지만, 지금 교회는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논리적으로 무장된 사람들 때문에 더 상처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신비는 경시되고 가톨릭이 간직해왔던 진리들이 차츰 빛을 잃고 있습니다. 새로 개정된 가톨릭 기도서에는 수호천사 기도문이 빠져 있습니다. 이제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은 수호천사를 동화에 나오는 예쁜 이야기속의 주인공으로 알겠죠...

바야흐로 지금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만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는 시대입니다. 그 단적인 예를 저는 저의 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건강상의 이유로 중퇴하셨지만, 가톨릭대학을 다니셨습니다. 라틴어와, 신학과 철학도 배우셨죠. 그러나 저희 어머니는 대학을 안나오셨고 장로교에 다니다가 시집 오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냉담중이고 어머니는 아주 열심한 신자이십니다. 두 분이 신앙에 토론이 붙으면, 논리와 말재간으로 아버지를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알고 계시는 신이 정말 하느님인가, 저는 이제야 그런 의심이 듭니다. 철모르던 부끄러운 시절에는 아버지의 논리가 맞다고 생각했지요. 만약 아버지가 더욱 기도를 열심히 하고 지혜를 주십사 간청을 하면서 예정대로 사제가 되셨다면, 아버지의 오류는 당신 스스로, 성모님의 은총으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사고 그대로 사제가 되셨다면 얼마나 많은 신자들을 오류에 빠뜨렸을 것인가, 이런 상상을 하면 아찔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베드로 사도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같은 이유로 성모님도 주로 아이들에게 발현을 하십니다. 아이들이 무슨 지식이 있어서 그러시겠습니까. 순수하고, 그러기에 주님의 진리를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배운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무슨무슨 지식이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도, 그것이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이 하느님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함부로 왜곡하며 하느님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독(毒)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고귀한 지식욕을 준 것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역설했지만, 오류를 전파하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지식욕이 쓰이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갈 뿐입니다. 저는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타고난 교만 때문에 스스로를 잘난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똑똑하신 분들 앞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시 효자3동 754-17 2/4
김학자 루시아
1999년 4월 12일

 

 


나누고 싶은 체험

 

제가 나주 성모님을 안 지는 몇 달 되지 않습니다. 나주의 기도회에 참석한 것도 이번 14주년 기념 기도회까지 세 번입니다. 나주에 대해 알게 된 후부터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것과 저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6월 30일날 나주에 가면서 저는 조금 심각한 회의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씻지 않은 죄를 그대로 지닌 채 가는 것도 그렇고, 나주 성모님을 안 후 석달 동안 계속해서 저의 신앙은 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나주에 가기 전에 저는 여러 글들을 통해서 숱한 기적을 간접 체험했습니다. 특히 기적수와 장미향기에 관한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저에게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처음 나주에 갔을 때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는데 두통약을 먹지 않고 기적수를 먹었는데도 두통이 낫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장미향기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가끔은 성모님께 '저도 향기를 맡고 싶단 말입니다, 어머니'하고 조르기도 했지만, 역시나 향기가 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신앙의 깊이에 비례해서 그런 경험들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조금씩 의기소침해 졌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게 무슨...하는 자조도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6월 초첨례에 가기 전에는, 그런 마음으로 가다간 계속해서 실망만 커질 것 같기에, 주위 분들에게 저의 고민을 상담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기적은 대부분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러워 해야 한다. 또, 얼마나 믿음이 약하면 기적을 보여 주시겠는가'하는 내용의 답장들이 왔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애써 위안을 삼았지만,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 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지난 30일에는 기적에 대한 반복되는 기대와 실망보다 더 큰 것이, 제 자신의 약함과 무력함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을 알았다면 생활이 바뀌어야 될텐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실망도 있었고, 또 나주 성모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리아 자매님 입에서 살덩어리로 변하는 성체 사진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안좋았으며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경당의 분위기도 때로는 좋지 않은 이미지로 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제 안에, 제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0일에 나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제 안의 이런 모순을 똑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가 몰려왔습니다. 나는 나주 성모님을 과연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인가, 혹시 공지문에 대한 반발 때문에,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나주는 정말 진실일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나주를 향해 가자니 착잡하더군요.

나주에 도착해서는 더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나주에 갔을 때는 경당 정면에 있는,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사진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제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치면서, 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아무리 무딘 사람이기로서니, 저 사진을 보고 눈물이 안날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일 날에는 그 사진을 보아도 무감각한 것이었습니다. 뚫어져라 사진을 쳐다보아도 제 안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기도회가 시작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기도회가 끝나는 네시 반까지 저는 줄기차게 졸았습니다. 중간에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찬물에 세수를 하고 팔을 꼬집어도 밀려오는 잠을 쫓을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분노에 떨었습니다. 어떻게 온 나주인데 그깟 졸음하나 못이겨낼 수가 있는가... 정작 잘 수 있을 때는 화가 나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모든 의심과 회의와 실망이 한꺼번에 겹쳐, 저는 그만 제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지요.

버스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탔을 때는 울고 난 후처럼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할 일도 없고 해서 저는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기도회 휴식 시간에 저를 아는 어떤 분이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한 장 두 장 읽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아: 저에게는 너무나 힘이 없습니다. 이 무자격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옵니다. 한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이 죄인이 어떻게 그 큰일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성모님 : 그래, 바로 그것이다. 누구는 자격이 있다더냐?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과 잘못을 할지라도 뉘우치고 주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87. 2. 25 메시지 중에서)

"회개라는 것은 단순히 죄만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울며 후회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느냐!"(87. 6. 14)

"너의 매일의 서투른 잘못을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언짢게 화를 내거나 변명하지 말고 나에게 의탁하여라."(87. 7. 15)

"망토 속에 많은 자녀들을 모아들이지만 그러나 자주 흩어진다."(87. 12. 11)

"너희들이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부른 것이다."(88. 1. 30)

"나의 고통을 보고 울지 말고 마음을 아파하지 말며, 예수님의 고통을 만방에 전하여라."(88. 1. 30) 

"설령 너희가 자유의지로 과오를 범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88. 11. 6)

메시지 책에 있는 성모님 말씀은 정녕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고민과 변덕을 뚫어 보시고 위로해 주시고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제 영혼이 고요해지고 차츰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밖에 나왔는데 차 안에 키를 두고 문을 잠가 버렸으니 보조키를 가지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흥얼거리며 걸어갔습니다. 동생이 있는 곳을 가려면 대학 캠퍼스를 지나야 했습니다. 차가 오지 않기에 학교 안에 난 도로 중앙선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나주 경당의 성체 내려오신 자리에서 나는 향기가 삭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 곁에는 남학생 둘이 저를 지나쳐 앞서 가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학생들에게서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학생들을 뒤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 걸음이 무척 빠르더군요. 점점 뒤처지면서 내가 착각을 했었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 순간 또 한번 같은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분 동안 같은 향기가 났다 안났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꽃향기가 아니라 경당에서만 나는 특별한 향기였기에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또 지난 주일에는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한 장미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맡은 향기와는 달랐습니다. 그 곳은 하수구 냄새와 쓰레기 냄새가 간간히 나는 동네였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장미 덩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향수냄새와도 같이 진한 싱싱한 백장미 향기였습니다. 고해소 앞에 줄을 섰을 때도 같은 향기가 났고, 제 차례가 되어 고백소 문을 여니 고백소 안에서도 향기가 확 퍼져 나오더군요. 그 때 저의 기분은, 고요함 중에 은은히 퍼지는 향기와도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아기가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안도감같은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성모님의 향기는 불쌍한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제가 당신을 알고서도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로써 죄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힘으로는 제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절망의 바닥에서 당신의 현존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나주 성모님을 알게 된 것이나 실제로 나주에 찾아간 것은 제가 간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읽기 전까지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제가 성모님의 장미향기를 맡았다면, 저는 틀림없이 교만에 빠져, 저의 공로 때문에 저를 이뻐하시는 줄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저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내가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내 메시지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흘린 눈물을 보지 말고 내 메시지를 보아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 말씀을 알고서도 메시지를 읽기 보다는 기적과 나주 반대자들과의 토론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게 주시는 성모님의 은총은 정말로 얼마나 강물처럼 크고 깊은 것인지! 성모님께서는 제가 인간적인 교만에 빠져 오류의 극치를 달릴 무렵 당신을 알게 하셨고, 당신을 제대로 따르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과 그리 크지 않은 고통을 주셨습니다. '자아포기'와 '아이같은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고, 영생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기적은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두운 영혼을 가진 제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단단한 껍질을 가진 저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주에 가시는 분들 중에는 저처럼 실망과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 뿐 아니라 나주에 대한 실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나큰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 분은 정녕 어머니이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끝까지 성모님 손 꼭 붙들고 예수님께 가십시다. 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나주 성모님을 열심히 전파 하십시다. 어머니와 함께라면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1999년 7월 7일
김학자 루시아

 

 

미국의 아버님으로부터 온 편지

 

며칠전에 미국에 계시는 아버님으로 받은 편지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5년전에 큰 형님을 따라 미국의 시카고로 이민을 가셨고, 지금은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아버님의 연세는 76세, 어머님의 연세는 68세 이십니다. 부모님께서는 출국당시에 나주의 성모님 발현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없으셨으며, 공지문이 발표되기 직전인 1997년에 제가 성모님의 메시지와, 은총은 강물처럼, 비디오 테이프 등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장문이지만 나주의 성모님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여 싣도록 하겠습니다.

" ... 특별히 너 요한에게 감사할 것은 97년에 나주 성모님에 관한 귀중한 많은 책자와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주어서 영적으로 많은 변화를 갖고 왔음을 인정한다. 나는 요즘 왜 이렇게 기도 생활이 흥미있고 기쁨이 넘치는지 나도 모르게 피부로 느끼게 된다. 또, 묵주기도를 할 때면 가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기쁜 마음을 금할 길 없구나. 보내준 성모님 메시지 책자는 모두 읽었고, 한인 성당의 여러 신자들중 나주 성모님을 잘 모르는 분께 책자와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해 주었더니 아주 고맙게 받더라.

그래서, 신부님한테 양해를 얻어 대대적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모든 신자들에게 보여줄까 했는데 신부님과 사목회장님의 말이 아직 정식 인준이 안되었으니 공개적으로는 곤란하고 사적으로 원하는 신자들에게 대여해주라고 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길 없었다. 하루 빨리 나주 성모님께서 교회의 인준 받기를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 간구하고 있지. 성모님께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만하다.

... 첨가해서 보내는 이 곡(아버님께서는 음악에 소질이 있으셔서 자주 곡을 쓰시곤 했습니다.)은 네가 보내준 '은총은 강물처럼' 책자를 접하면서 우연히 뒷면 표지에 성체 사진이 특이해 유심히 보는 순간 밑에 詩를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악상이 떠올라 곡을 지은거야. 좋지 않은 곡이라도 詩가 너무 좋으니 짬이 있는대로 부르기로 해라. 詩가 1절 밖에 없어 2절은 연결성은 없으나 내가 만들어 보았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님께서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루종일 기도밖에 다른 할 일이 없으신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나주 성모님 발현이 교회로부터 인준받기를 간절히 기도하신다고 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백발 노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의 뜻이 나주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통해 온 인류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1999년 6월 6일
요한

 

 

김 마르티노 형제님의 글을 읽고...

 

김 마르티노 형제님, 반갑습니다.

형제님께 명오(明悟)를 열어주시어 진리의 길로 이끄신 성모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저는 나주를 1998년 5월인가 6월부터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들은 나주를 열심히 다니다가 공지문이 발표되고 나서 발길을 끊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 반대로 예전에는 말로만 나주의 소식을 듣다가 공지문이 발표되고 나서부터 나주의 첫 토요일에 꼭 참석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기로는 그 이후로 첫 토요일은 추석이 겹쳤을 때, 한 번만 참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주 성모님 기념일에는 평일인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저에게 별종이라는 말을 합니다. 남들은 열심히 다니다가도 교회의 공지문 발표로 안가는데 가만히 있다가 발표문이 나고서야 가느냐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청개구리가 아닙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반대로 하고서야 속이 후련해지는 삐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도 아닙니다. 형제님은 영세받은 지 4년이 되었다고 하셨지요. 저는 3대째 가톨릭 신앙을 이어오는 구교우 집안입니다. 아버님의 고향은 신의주이며, 그 곳에서 사촌 고모님 두분이 수녀님으로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두분 모두 북한 공산 치하에서 신앙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요. 구교 집안이라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런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교 신자들이 그러하듯이(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신앙 생활이 때로는 안이하고 습관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저는 40년을 살아오면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고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가톨릭 신자였고, 지금도 가톨릭 신자이며, 앞으로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가톨릭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 제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만한 생각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이야말로 나의 삶의 중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주의 성모님 발현에 대하여는 1997년 가을 정도에 자세한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주의 성모님 발현 소식은 1987년 정도에 알고 있었지만 바쁜 직장 생활로 머리 속에서 잊혀졌었는데 인터넷 홈 사이트를 보고 그 동안의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주의 성모님 소식은 저에게 신앙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으며, 예전보다 좀 더 깊은 마음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8년 나주의 성모님 발현에 대한 광주대교구의 공지문 발표를 접하고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만해도 저는 나주에 한번도 가보지 않고 홈 사이트의 내용만 보고 나주 성모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만, 저는 공지문의 내용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공지문의 내용 중에는 가톨릭 교리에 해박하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실망한 것은 율리아 자매라는 한 개인을 초능력자 운운하면서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한 사실이었습니다. 설령, 율리아 자매님이 잘못된 신심으로 오류를 범하였다고 해도 가톨릭 교회는 사랑으로 감싸고 가르치고 이끌어주었어야 했습니다. 그 공지문은 제가 그동안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지문의 신학적인 오류는 그 후에 자세히 알게 된 것이구요. 저는 나름대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공지문에 신학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것과 율리아 자매님이 공지문의 발표대로 초능력자 운운한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주장하지 못하고 침묵한다면 결국에는 하느님의 진리는 어떤 형태로든 거부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혹자는 그래도 교회의 발표에는 무조건 순명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겠지만, 교회 교도권의 참 의미는 <무조건 보지도 말도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진리에 봉사하는 것임을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의 양심에 비추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주의 성모님 발현에 대한 진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저 역시도 형제님과 같은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왜 꼭 나주를 가야만 하는가" "나주를 가지 않으면 안되는가" 저는 그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나주는 친히 성모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성체 모양으로 친히 내려오신 거룩한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 성모님의 발현이 급증하고 있으며,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400 여군데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참된 발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님 발현은 생소한 것이 아니며, 성모님 발현으로 교의(원죄없으신 잉태 등...)를 확정 발표할 정도로 그 비중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친히 발현하시어 율리아라는 작은 영혼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수백만원들을 들여서 외국의 성모님 발현지를 순례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그분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포르투갈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에 못지 않은 성지가 있습니다. 전세계 어느 성모님 발현에도 뒤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성지를 한달에 한번씩 순례하는 것은 당연한 일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한달에 한번 밖에 순례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가톨릭 신자에게 같은 하느님 믿는 개신교회에 나가라는 것과 우리집에도 성모님상이 있으니 굳이 나주에 가서 기도할 것이 뭐냐는 질문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주는 성모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지임을 잊지 맙시다.

두 번째,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지방 교회로부터 부정되었으며, 성모님께서 입으신 마음의 상처를 기워 갚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나주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광주대교구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성모 어머니께서 온갖 비난과 심지어는 이단(異端)이라는 극단적인 박해를 받고 계시는데 자녀된 우리가 공지문 하나로 인해 나 몰라라하고 나주를 찾지 않는다면 성모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매월 첫 토요일을 지내면서 썰렁한 성모님 경당을 상상해 보십시오. 공지문 발표전에는 성모님 경당이 비좁아서 체육관을 빌려서 행사를 치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갔나요? 성모님의 사랑으로 크고 작은 은총을 입은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서 있을까요? 예전보다 나주를 순례하시는 분들의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저는 성모님께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성모님, 성모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가 않지요? 죄송합니다. 성모님, 이 부족하고 못난 죄인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려 합니다. 그들을 용서해주세요.." 우리가 나주를 잊지 않고 찾을 때 성모님께서 입으신 마음의 상처를 기워 갚을 수 있으며, 나주를 향하는 순례객의 발길이 멈추지 않을 때에 나주의 성모님 발현은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이 성모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함입니다.> 저는 처음에 나주를 순례하는 것을 가톨릭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신 성모님께 위로드리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아도 그것이 맞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나주를 다니다보니 오히려 성모님께서 저를, 저희들을 위로하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달 동안 생활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누구나 다 그럴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등등.. 하루라도 근심 걱정 없이 지내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한달의 모든 근심을 마음에 담고서 나주를 내려갑니다. 밤을 꼬박 지새며 기도를 하면서 마음 속의 모든 근심, 괴로움, 걱정 거리를 온전히 성모님께 봉헌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항상 온유한 모습으로 "그래, 너의 모든 것을 나에게 봉헌해다오. 너희들의 모든 근심, 괴로움, 걱정 거리, 고통 등등을 내 아들 예수께 봉헌하마..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주의 순례를 통하여 최근까지도 엄청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고는 합니다만, 그런 육적인 치유보다는 영적인 치유 사례가 훨씬 많고 또한 육적인 치유 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자녀의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마르티노 형제님의 질문에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나주의 성모님을 찾아 뵙고 싶은 열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답니다. 1년 이상을 꾸준히 다니니 말로 설명하지 못한 그 부분을 어렴풋이 알 것 같더군요.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형제님께서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해 줄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아주 자연스럽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형제님께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지난번에 형제님의 글을 보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면 아내나 주변 분들이 "나주가 어떤 곳인데 사람을 그렇게 변화시키는가"하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저도 형제님과 똑 같은 과정을 밟았었습니다. 저의 아내도 처음에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변화된 제 모습을 보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저를 이해하고 나주의 성모님을 사랑하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행동으로 믿음으로 보여주십시오.

나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1999년 7월 20일
이명길 사도 요한
 

 

나주는 주님께서 한국민에게 내리시는 엄청난 영광입니다.

 

"그 열매들을 보아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쓸모없는 나무인지 알게 되리라." (마테오 7장 16-20절)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자비 안에서 나주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와 징표"를 통하여, 이 메시지를 받으시는 율리아 자매님의 자아를 버리는 헌신적인 기도, 희생, 보속, 그리고 그분의 고통들로 인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병의 치유, 가정의 성화, 냉담자들의 회두 (사제들 포함), 죄인들의 회개 등,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좋은 열매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맺히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들이어서 이것들이 어느 한 개인, 혹은 개인들의 취향에 맞든 안맞든, 또 어떤 의도에서건 이를 배격하고저 어떤 논쟁과 공박을 해온다 해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옳은 이해와 판단을 지니신 독자들이라면 자꾸 맺혀지는 이 좋은 열매들을 인정,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먼저 율리아 자매님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이분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그 많은 비판의 말들, 조소, 냉대, 멸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단 한 번의 원망도 없이, 그들의 회개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의 고통에 겸손되이 사랑으로 동참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비판하시는 분들께서도 타인을 위하여, 그것도 자신에게 비난을 하고 모함하는 이들을 위해, 또 자신과 전혀 무관하여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오로지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그분처럼 심한 고통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또 앞으로도 고통을 계속 받을 각오와 사랑의 자세가 되어있는지요?

성모님을 운할 때는 최고의 경어와 최고의 사랑의 태도를 보이며 사용합시다.  나주가 아직 교회의 인준을 받지않았대서 그곳의 성모님을 빈정대는 말투로 언급하는 것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도 교황청에 청원서와 독일인들의 서명록을 보냈고, 지난 1998년 10월 라칭어 추기경님과의 접견에서 저는 나주의 빠른 교회 인준을 위해서 재조사를 간곡히 부탁드렸으며, 또 이곳 독일의 많은 신자들과 신부님들, 주교님들께 나주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공지문 상의 문제점들은 다른 지면들에서 이미 논해졌으므로 더 이상 이곳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고, 단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성체 기적을 목격하신 교황님의 의견도 듣지 않았고, 또 증언의 신빙성이 완전무결하다 할 수 있는 성체 기적의 목격자들이신 주교님들, 즉 전 교황 대사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 로만 대닐랙 주교님, 김창렬 주교님, 도미니끄 수 주교님, 그리고 목격 신부님들의 인터뷰도 포기한 사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나주와 율리아 씨는 주님께서 당신의 큰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 한국민에게 내리시는 엄청난 영광입니다.  그 무엇과도 결코 견줄 수 없는 지극히 값진 보배입니다.  이 커다란 예수님의 사랑에 가슴 속 깊이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 겸허한 자세로 예수님과 성모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께서 이루고저 하시는 "사랑의 기적"이 꼭 성취되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 보속으로 매일, 매일 봉헌된 삶을 살며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천상 엄마의 원의에 따라 전파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십시다.  나주의 교회 인준은 시간 문제입니다. 빛은 아무리 감추려해도 새어나가기 때문입니다.

독일 부퍼탈에서 세실리아 폴
1999년 8월 5일

 

 

독일에서 온 편지

 

†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 안에서

친애하는 분도 형제님, 안녕하세요?  약 일주일 간의 로마 여행을 잘 마치고 (Ecclesia Dei) 지난 10월 24일, 13시 30분 경 교황청 신앙 교리성성 장관이신 라칭어 추기경님을 뵙고, 율리아 자매님과 나주의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인자하시게, 벌써 아시고 계시다, 라고 했습니다.

한국 나주의 일에 대해 하루 속히 교회의 빠른 인준이 있게 되기를 추기경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제게 한국의 나주에 대해서 꼭 편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나주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 독일어 번역을 맡고 있습니다.  출판에 대해 경험이 많으실 테니 제게 좋은 조언들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 포부는 세계 각국의 독일어 사용권의 나라에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저 하는데 성모님의 뜻이라면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요긴한 도구로서 많이 일하고 계시는 형제님에게 주님과 성모님의 많은 축복과 사랑, 기쁨 또 평화를 보내며, - 가족들에게도 역시 - 기도중에 만나기를 기약합니다. 안녕하시기를,

1998년 11월 16일
Minja Cecilia Pohl
Paul-Matthey-Str. 52, 42369 Wuppertal, Germany
el. Fax:  (49) 0202/4698990
 

 

천 시몬 형제의 편지

 

† 나주 성모님께 찬미

주님 안에서 윤 율리아 자매님께
윤 율리아 자매님!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은총은 강물처럼' 이라는 나주 성모님 메시지 보급회에서 나온 책자를 보고 율리아 자매님을 알게 된 청주교도소의 수용자 53세의 천기화 시몬입니다. 저는 사회에서의 한 순간 큰 잘못으로 장기수의 몸이 되었고 9년이 넘는 이곳 생활을 하였으며 앞으로도 약 3년여의 이곳 생활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구속될 당시 죽겠다는 심정으로 치사량 이상의 극약을 마셨는데 병원 응급실을 거쳐 사흘만에 깨어났고 작은 후유증 조차도 없어서 그후에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으로 저를 살려주신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생활해 왔습니다. 평소에 묵주기도를 특별히 많이하여 하루에 100단 이상씩을 하였었지요.

그런데 약 2개월 전 어느날 어느 신자 형제가 가지고 있는 '은총은 강물처럼'을 보게 되었고 그때가 마침 성체 성혈 대축일을 몇일 앞둔 시기였기에 책의 내용과 사진 설명속에 성체가 성혈로 변화되는 율리아님의 사진을 보면서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율리아 자매님의 기도와 함께 성모님으로부터 치유의 기적들을 받으신 사연들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상본이 없기 때문에 '은총은 강물처럼'의 표지에 있는 성모님 모습을 앞에 놓고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쳤습니다. 기도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100단이 넘던 양을 50단으로 줄이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먼저 저의 건강을 돌봐 주십사고, 저도 장미 향기를 맡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비몽사몽간에 짙은 장미향기를 맡고 그 이튿날 저와 다른 형제들이 쓰고 있는 스킨, 로숀들을 가져다 냄새를 확인해 보아도 장미 향기와 다르기 때문에 더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몇일후에는 제 왼손에 통증이 없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70년도에 월남전에서 왼팔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신경이 절단되어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왼손가락들은 완전 치유가 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전상 제대를 하였으며 다친 그날부터 최근까지 왼손바닥 전체가 바늘 수백개로 찌르는듯한 통증과 저림 속에 살아왔었는데 그 통증과 저림 현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주 성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눈에 보이는 치유의 기적도 하나 주세요 하고 애원하며 제 오른쪽 눈 밑에 아주 오래된 사마귀같고 티눈 같은 것을 없애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바늘 끝으로 파내도 안되고 점빼는 약을 발라도 다시 나오는 어쩔수 없는 작은 사마귀 종류였지요. 그래서 제가 묵주기도 드릴 때마다 표지 성모님 얼굴 턱에 맺힌 눈물 방울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다시 눈밑에 그 손가락을 갖다대고 기도를 하곤 하였지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후 기도시간에 그 사마귀가 가려워서 긁었는데 그냥 빠져 나왔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성모님 정말 감사드립니다하고 기도한 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성모님 한 가지만 더 떼를 쓸께요. 제가 더워서 땀은 나고 돋보기 쓰고 책 읽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냥 읽을 수 있도록 좀 해주세요. 그러면서 성모님 턱에 눈물을 찍어다 제 양 눈두덩을 누르고 책을 들어서 눈을 감고 성모님의 눈물 턱을 제 양 눈에 번갈아 몇 초씩 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성서, 은총은 강물처럼, 신문 등을 돋보기 없이 맨눈으로 그냥 읽습니다.  중간에 돋수를 높였던 7년간이나 쓰던 돋보기를 벗고 읽을 수 있는 기적을 주셨습니다.

그외에도 두세가지 기적이 또 있는데 지면 관계로 다 적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기적, 치유의 은혜는 제가 성모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약 2개월 전에 많이 상심되는 일이 있어서 냉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때가 있었지요. 그 당시에 성모님께 이 책을 보면서 애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게 저에게도 보여 주셔서 지금의 제 마음을 구원해 주십사고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는 아직 뵙지도 못한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시면 상본과 메시지 책자, 그리고 묵주도 좀 보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곳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제는 이곳 천주교 미사가 끝나고 생각도 못했는데 수녀님이 200여 형제들과 20여 자매님들 앞에서 신앙 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라고 하셔서 그러지 않아도 신부님과 수녀님께 신앙 상담을 하려고 했었는데 바로 성모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편지에 드린 사연과, 또 다른 치유의 기적까지 말씀을 드려서 감동과 박수갈채를 받았고 나주 성모님을 자랑하였습니다. 정말 예수님과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율리아 자매님!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안녕히 계십시오.

다달이 발행되는 소식지가 있으면 좀 보내주십시오. 저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나주 성모님의 홍보를 하는 보람으로 기쁨속에 살아갑니다. 그럼 율리아 자매님과 율리오 형제님 그리고 그곳에서 봉사하시는 모든 분들의 안녕을 위해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도와 전구 드리며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9년 7월 8일
청주에서 천 시몬 올림
청주우체국 사서함 144-885호

 

 


볼리비아 리카르도 박사의 증언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신 곳이 베들레헴이 아니라 이 곳 나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오늘 밤 주님과 성모님께 찬양을 드리며 함께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성모님의 신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에 매우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같이 온 형제와 함께 20세기에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들을 조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세계를 순례하며 약 50여명의 메시지 받는 이들을 조사했고 92년에 나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남미의 볼리비아에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카타리나라는 자매가 있습니다.(카타리나 자매는 볼리비아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는 분으로서 볼리비아의 관할 주교의 승인을 받았다. 그녀에게는 매우 놀랄만한 오상 등의 기적의 고통을 예수님께서 주심으로써 무디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셨다.) 바로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 카타리나 자매를 통해 저희에게 "내가 친히 씨앗을 심은 곳에 가서 추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메시지에서는 또한 일본의 아키다와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나주에 방문하라는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우 특별하게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협의체가 있는데 그 곳에서 추구하는 사업은 전세계에 진실로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면서 많은 과학자들과 성직자들 까지도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사회가 하느님이 계실 자리에 하느님을 놓지 않고 돈, 권력, 섹스등등 우상을 숭배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인류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을 받는 대신 쾌락을 추구하고 가난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더불어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데도 그렇지 못하고 인간적 자만에 빠져 하느님께서 가장 노여워하시는 교만에 싸여 있습니다. 저는 전세계의 많은 발현지를 가보았으며 예언자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항상 그분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전세계 각지에 있는 성모님의 발현지에서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주님과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고백하게 된 길은 예수님의 가신 길, 즉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이 곳 성스러운 나주에 모인 여러분들께서 많은 이들을 데리고 와 성모님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청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주님과 성모님께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곳 나주에서는 율리아 자매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운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메시지를 읽어보시고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는 메시지를 믿는 것이고 두 번째는 메시지를 따라 살고 세 번째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예수님과 성모신심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할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개개인들은 성모님의 메시지를 묵상하고 따르고 전파해야 하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여기 나주에 올 때 기적이나 어떠한 현상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 소중한 것은 남들이 다 자고 있는 이 시간에 이렇게 모여와 서로가 형제, 자매가 되어서 함께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리아 자매는 가장 겸손하고 가장 작은 자입니다. 우리도 그녀와 같이 작고 겸손한 영혼이 되어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성모님의 원의는 당신의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혼들까지도 하느님께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리아 자매는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것은 율리아 자매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 곁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시는 여러분들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율리아 자매가 심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세상 어떠한 메시지를 받고 있는 선견자라 하더라도 율리아자매 만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율리아 자매를 통해서 전하고 계시는 메시지를 믿고 따르고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율리아 자매의 고통과 그리고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시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2년 전일 것입니다. 볼리비아의 어느곳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는데 성모님의 메시지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발현하지 않겠다"

1년 후에는 많은 이들이 떠나버렸고 작은 기도회 모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매우 마음 아픈 결과였습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주의 성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주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여러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각자의 믿음들이 하나, 둘 모임으로서 이 사랑스러운 자리는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시는 곳마다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묵상하고 전파하여 나주 성모님의 사도가 되십시오. 그리고 가능한 한 매일의 미사에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나주의 목요성시간과 매월의 초첨례에 모여 기도하십시오. 그러한 생활을 할 때 많은 이들이 성모성심께 모여오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나주의 핵심은 살아계시는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실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으며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율리아 자매만이 해야 할 일도 아니고 사제들이 해야 할 일도 아니고 바로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오늘밤,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머니, 여기 나주에 모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답니다." 라구요.

1999년 6월 30일 성모님 눈물 흘리신 14주년에
Dr. Ricardo Castanon G.
South America
Fax. 591-2-740228

 

 

나주와 교도권에 대하여

 

나주 성모님의 눈물, 피눈물, 향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외인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성체의 중요성으로 함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성체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실체임을 보여 주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가 인위적인 조작극이 아니라면 하늘이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인위적 조작극이라면 진실을 밝혀내어 배척해야 할 것이며,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라면 방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충과 효를 다하여야함은 마땅함이요, 더더욱 특별히 선택된 사제님들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함이 옳은줄 압니다. 불충과 불효의 우를 범하지 않으시기를 바랄뿐입니다.

권영호 사도요한


주님의 온갖 은총을 받고도 육신과 세속과 마귀의 유혹 앞에서 쉽게 주님을 저버리고 배반하고 때로는 두려워서라도 피할 죄를 스스로 지음으로 멸망의 길을 치닫고 있는 영혼들까지도 단죄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한 영혼이라도 구하시고자 성모님께서 주님의 협력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달아든다면 그 폐허위에 내 사랑은 불타오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3년동안 수많은 영혼들이 천상 어머니의 영적인 젖을 먹고 살아나고 회개하여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예언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마귀는 초자연적인 현상까지 써가면서 착한 연혼들까지 현혹시켜 끌고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실 천상의 부모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 말씀에 마지막 시대에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가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하시고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주님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달릴수 없음을 잘압니다. 나주에서 헤아릴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의 회개를 보아왔습니다. 울면서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실을 고치려 애쓰며 남의 탓으로만 돌리던 손가락질을 자신의 탓으로 깨닫고 하느님앞에 또 사람들에게 잘못했다고 뉘우쳐 착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저 자신부터 또 수많은 사람에게 이르러 보아왔습니다.

교회안의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의인인줄로 알고 자신의 신앙만이 올바르다라고 믿고서 남을 판단하고 상처주면서도 죄인줄 모르고 사는 교만함에서 벗어나도록 회개의 은총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오묘한 진리를 깨달은 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영혼으로 깨닫게 된 것도 나주에서 받은 은총입니다.

예전엔 저만이 이 세상에서 착하고 양심적이고 신앙도 참되다고 여기는 오만방자함으로 교만죄에서도 전혀 몰랐기에 나주성모님집에 다니고 부터서야 눈먼 소경에서 벗어나 자신을 볼수있게 되었고 가장 큰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은총을 주셨음에 어머니를 주신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하느님을 되찾고 인생의 궁극목적과 목표가 사라져버릴 이 세상의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마르지 않는 샘을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왕으로 재림하실 주님께서 머무르실 가치있는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머니 메시지 말씀따라 잘 살 때 천국의 시민 자격증을 얻을수 있겠지요. 그럴수 있도록 참 지혜의 빛을 영혼에 비추어 주시고 더러운 우리의 영혼을 매번 갈때마다 깨끗이 목욕시켜 주셨고 병든 영혼의 상처를 치유시켜주신 성모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내가 너희들의 피난처이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사랑의 목소리가 어서 성교회에 받아들여질 때 교회안에 본래의 어머니의 자리로 오르시어 더욱 강하게 이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의 목소리가 전파되어 나갈수 있을 것이고 하느님 의노의 잔 대신에 축복의 잔이 내릴것이며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님 사랑의 반대자인 원수들의 조롱과 편태와 능욕을 보고 있을 하느님을 부디 의식하여 모두가 '예'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돌아올수 있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는 제 무능을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천상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심을 확실히 사람들이 알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 살아 생전에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신 이천년전 유다의 지도자를 그들의 반대와 모함 폭언등에도 비록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야단은 치시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구원까지도 원하시기에 야이로 회당장이의 딸의 소생과 과부의 아들의 소생을 일시적인 경직상태로 믿지 않으려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마지막 베풀어 주셨던 가장 크고 확실한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셨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죽음의 엄청난 고통들을 허락하시고 함께 감수하신 주님, 주님의 눈물을 우리는 성서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물과 기적과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는 영혼에게는 소용이 없었떤 그때처럼 지금도 똑같은 역사의 재현들을 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각각 700일간씩 흘리신 눈물과 피눈물, 향유 또 성체의 기적들도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아무소용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기도해드리고 또 기도로 우리 천상 부모님을 위로해 드립시다. 또 죄와 악습을 끊도록 노력하고 자아포기 하도록 노력하며 하루속히 천상 부모님의 뜻이 성교회와 특히 성직자 수도자들께서 사랑으로 받아들이시고 눈멀고 귀멀은 우리들이 만약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신 성모님의 오심이 없으셨다면 벌써 이 세상은 불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크신 천상 부모님의 뜻에 우리 모두 겸손되이 경청하고 부모님 말씀따라 잘살수 있도록 회개와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합시다.

대구 수성구 범어 1동 371번지 범어궁전 맨션 6동 1405호
권영호 사도요한, 이연희 데레사

 


성모 승천 대축일 나주 순례기

 

† 찬미 예수님 희망 성모님.

주님 품안에서 하나이신 형제 자매님들께.

지난 8월 15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지요. 성모님께 많은 축하 올리셨는지요.8월 첫 토요일 나주를 방문했던 저는 일주일만에 다시 나주를 찾는다는 것이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자석에 끌린듯 혼자서 차를 몰고서 다시 나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몽소 승천 대축일 기념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일요일 철야기도라 초첨례만큼 많은 분들이 모이시진 못하였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성모님 소식지'운영자님이 그곳 사이트에 그날의 자세한 소식을 곧 올려주시겠지만, 그날의 감동을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시나 먼곳에 계셔 참석하지 못하신 형제자매님들께 전하고 싶어서 먼저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날은 특별한 축일이어서 그랬는지, 성모님께서 향기를 그야말로 '퍼부어' 주신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네번의 방문을 통해, 저는 그토록 강한 향기를 맡아본적이 없었습니다. 기도회 초반에는 간간히, 그리고 은은히 풍기던 장미향이, 열두시를 넘어서면서 강하게 풍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는 이곳 사이트에도 글을 올리신 박 유스또님이 성모님 상본에서 흘러나온 향유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향기의 강도란, 마치 스프레이 수십개를 한꺼번에 뿌리는 것같은 정도였습니다. 박 유스또님의 이야기 도중 경당에 앉아계시던 분들이 여기저기서 '향기 나요!'하고 소리칠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향기의 강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신선한 공기를 쐬러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경당에 들어설때 다시 맡은 그 장미향의 강도가 너무 짙어서 약간은 숨을 쉬기가 불편할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잠시후에는 그 장미향과는 사뭇 다른--더 싱그러운 느낌이었습니다-- 향기가 다시 삽시간에 퍼졌는데, 옆에 앉으셨던 자매님들은 그 향기에 익숙한 듯 그것은 '백합향'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두 종류의 향기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강했으니까요.

서울로 올라온 그날 저녁, 저는 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동네 공원으로 바람을 쐬러나갔습니다. 아이가 그네를 타는 동안 저는 혼자 벤치에 앉아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그때도 수시로 장미향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하지만 무딘 후각의 소유자인데다 의심도 많은 저는, 그것은 그 근처를 지나간 사람들이 흘린 향수냄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곤하여서, 성모님의 향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무척 자주 향기를, 그것도 지난번 방문후 맡았던 것보다 더 강한 향기를 맡았는데도요. 그러다 도중에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아내는 그날 나주에 동행하지 않았으며, 아직 성모님의 향기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때 다시 한번 강한 장미향이 저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 향기를 저만 맡은것인지 확인해보려고 아내에게 '무슨 냄새 나지 않아?'하고 물었더니, 곧바로 아내는 '그 향기 난다!' 하고 놀란듯 소리쳤습니다. 이번엔 저희 근처에 아무도 없었고, 부근을 지나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아내도 확실히 기적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놀라와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나주 경당에서 짙게 퍼진 그 향기가 인위적 향기일 수가 없다는 저의 확신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경당안에서 그토록 강한 향기가 풍기는데도,그것을 맡지 못하시는 분들도 여러분 계셨거든요. 제 옆에 앉으셨던 한 자매님은 저에게 '지금 정말 향기 나고 있어요?' 하고 물으실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자매님은 뒤에 풍기기 시작한 백합향은 같이 맡으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의 향기를 맡고 안맡고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더 받고 덜받고의 여부, 또는 개개인의 믿음이나 성덕의 정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주와 인터넷 이메일을 통해 알게 된 한 형제님이 며칠 전 들려주신 얘기지만, 곱비 신부님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이 향기에 대해 '이것은 나의 현존을 알리고 또한 너희들에게 대한 나의 우정의 징표이지만, 그것을 맡지 못한다고 해서 너희가 사악하거나 내가 너희를 덜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너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내가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 말씀을 공감합니다... 그 말씀을 듣기 전에 이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주 철야기도회 도중(새벽 세시경)에 하는 통성 기도와 회개의 시간에 저는 오히려 정신이 맹숭맹숭해져서,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난 왜이리도 마음이 차가운 거지?'하는 자책감도 들었구요.'진정으로 제가 깨우치지 못한 저의 죄를 보게 해주시고, 인정하지 못하는 잘못을 반성하게 해주세요'하고 참으로 많은 기도를 하고 그곳엘 갔건만, 통회의 시간이 되자 제게 찾아온 것은 싸늘한 느낌과 답답함뿐이었고(회개가 되질 않으니까요), '난 아직 주님의 사랑을 받기엔 부족한, 너무 큰 죄인인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으로부터, 심지어 '별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회개할게 없나보지 뭐'하는 극도의 교만감에 이르기까지 엄습하여,제 마음은 참 복잡해졌습니다. 심지어 주님께 원망스런 느낌까지 들었고, '난 혹시 구제 불능 아냐?'하는 유치한 생각까지 갖게 되었지요...... 반면 장미향을 맡지 못하셨던, 앞서 말씀드린 그 자매님은, 그 시간이 되자 정말 통회의 통곡을 하시다가 심지어 구토까지 하셔서, 뒤에 앉은 자매님께서 연신 등을 두드려주실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후련하실까... '하고 부러워했습니다.

복잡한 심경으로 서울로 올라온 저는 앞서 말씀드린 향기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되었고, 제 마음은 정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향기의 은총, 회개의 은총, 그것들은 제가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주님만의 깊은 섭리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라고요. 개개인마다 그것들을 필요로하는 순간이 다를 것이며, 그 필요의 순간을 결정하시는 것도 주님만이 내리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잘 모르던 저를, 태어나서 전주 이남으로는 내려가 본적도 없는 저를, 성당 교우라고는 대부님빼고 한 사람도 없었던 저를, 석달새 네번이나 나주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주님은 제게 '확실한' 애정을 보여주셨는데, 향기를 다시 못맡았다고, 회개의 은총을 아직 받지 못하였다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적으로 판단하여 회의에 빠지거나, 필요 이상의 자괴감에 젖어들거나, 의심에 마음을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며 '나는 정말 신비와 기적만을 쫓아다닌 건 아니었던가?'하는 회의와 함께 '성모님, 저 당분간 쉬었다가 올께요. 죄송해요'라는 말씀을 드렸던 제 마음은,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벌써 9월의 초첨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다시 통회하면 아직도 영혼을 사랑하는', '십억번뿐만 아니라 십억씩 백만번이라도 사랑하고 항상 용서하며', '아무리 잘못하여도 영혼을 싫어하지 못하고 저들이 내 성심께 와서 의탁하기를 간단없이 고대하고 계신'(성심의 메시지에서) 주님을, 다시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은총'은 '강물'처럼 흐르듯이, 주님을 향한 저의 사랑도 '강물'처럼, 은은하고 변함없는 것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녀들에게, 결국은 구하는 은총을 모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항상 지니면서 말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철야 기도회를 다녀온 직후 며칠전부터는, 나주 기도회에서 자주 부르는 '마니피깟'(성모 찬가 2번곡)의 가사와 멜로디가 자꾸 생각이 나더군요. 그 노래를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따라부르면서(전 목소리가 'pig's throat cutting sound'인데, 마음속으로 불러도 애꿎은 돼지 목만 날라가더군요. 그래서... 기도회에서 반주 봉사하시는 자매님의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제 마음은 자꾸 눈물로 젖어들었습니다.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를 잉태하심을 아신 그 순간,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마음에 자꾸 연민이 들어서요.

앞으로 펼쳐질 천상 모후의 영광, 하지만 그와 함께 필연적으로 펼쳐질 고통의 바다. 그 모든 것을 보셨을 성모님은 '주께서 비천한 여종의 신세를 돌보셨나이다'하고 노래하셨지요...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던 어머니. 어머니께서 그 순간 느끼셨을 두려움과 마니피깟을 통해 보여주신 그 순명의 아름다움이 교차되면서, 왜 그 노래를 들을때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던 것인지를 깨닫게되었습니다...

'이름모를 들꽃이 되어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하셨던' 율리아 자매. 하지만 성모님의 요청으로 온갖 고통에 순명하시는 그 분의 마음도,마니피깟의 성모님이 심어준, 바로 그 마음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만난 여섯살짜리 히야친따는, 주님의 품에 안기기전 약 2년간 성모님의 요청으로 그 어린 나이에 죄인들의 회개와 보속을 위해 참으로 많은 고통을 기꺼이 받고 떠나갔다고 합니다('루치아 수녀 회고록 참조'). 저는 루치아의 회고에 기록된 히야친따의 모습을 보면서, 한번도 뵌적이 없는 율리아 자매의 모습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심성을 가진 분이신지 말이죠. 아아.. 결국 다 하나인 것이 아닐까요?

나주 율리아 자매님과 히야친따의 이야기를 보면서, 성모 발현의 역사는 바로 그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이 우리에게 계속 전달되기 위한 역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성모 성심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해야할, 인류의 유산이란 것도요. 결국 그것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될 것이고, 마귀의 멸망을 보게될 것이니말입니다. 성모님의 심장을 꿰뚫은 슬픔의 검은, 히야친따와 루치아를 통해, 그리고 율리아 자매를 통해 하나의 줄기로, 우리 마음에 하나 하나 전달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고통받는 율리아 자매님을 위해서... 많은 기도 올립시다. 주님의 평화가 당신의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님들께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9년 8월 21일
김 마르띠노

 

 

나주를 향해 던지는 작은 불꽃

 

가톨릭은 얼마나 아름다운 물결인가. 구원의 충만한 은총이 강물처럼 숲을 거느리며 흐르는 고향, 이 가톨릭을 나는 사랑한다. 그 곳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냇물이 일렁이는가 하면, 성프란시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여울도 찰랑대고, 한국 순교 성인들의 맑은 개울도 큰 강을 이루어 흘러가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적인 모든 것은 항상 나에게 조건 없는 애정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최고의 정신적 가치로 삶의 이정표 같이 느껴져왔다.

그런데 최근 하나의 문제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주의 기적과 관계된 일련의 현상들 때문이다. 이 문제로 인하여 일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적지 않은 갈등을 빚고 있음에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 가톨릭 교회는 순명과 일치, 화합과 포용이란 미덕의 길을 걸어왔다. 또한 그 동안 많은 현안들앞에 우리 교회는 문을 활짝 열고 관면과 관용을 베풀어 왔다. 특히 제사와 음주 문화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지근한 신앙에 소중한 일깨움을 주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기적에는 교회가 너무 성급하게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한다. 물론 사적 계시는 냉정한 이성과 지성을 통해 그 진실이 판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부분을 보고 너무 빨리 전체의 결론을 도출하거나, 양심에서 우러나는 평신도들의 호소를 원천 봉쇄시켜서도 안된다.

최근 나주의 기적과 관계된 일부 기고문이나 학술 논문 등을 정독하면서 많은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 파티마와 루르드는 용인되면서 나주는 인정되지 않는가, 왜 아끼다의 성모님은 가톨릭계 신문의 전면에 소개되면서 나주의 성모님은 그늘 속에 묻혀야 하는가, 왜 우리 교회는 교의적 신학과 외적인 팽창에 매달리면서 영성적인 문제에는 갈증을 느끼게 하는가, 왜 교리서와 성서의 문자에만 얽매여 그 이면에서 살아 숨쉬는 하느님의 입김과 성령의 역사하심에는 소홀한가? 이런 의문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편치 못했다.

우리의 신앙이 어느 한 방향으로 화석화되면 좀체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글로쏘리아, 즉 심령 기도나 영가(靈歌)마저도 무당들의 주문(呪文) 정도로 격하하려는 가람들이 있다. 따라서 왜곡되거나 뒤틀려진 진실은 올바른 방향으로 서로 길트기를 해 줄 책임이 우리 신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고린토 후서 4:13)"라는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언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나주의 기적과 관계된 몇 가지 오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여 진지하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1. 시한부 종말론과 관련된 문제

최근 나주 기도회가 사이비 신종교의 천년왕국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이 강한 결집력과 교주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방법대로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류 역사 이래 지금까지 유토피아를 꿈꾸는 그들의 예언은 한번도 성취되지 않은 미신으로 단정하고 있다. 물론 정확한 진단이다. 오늘날 기승을 부리며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사이비 신종교 운동은 이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 성심에 대한 흠숭과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나주의 집회를 그 운동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필자도 나주 기도회에 몇 차례 참여한 바 있고, 메시지도 정독해 보았지만 거기서 천년왕국설이나 시한부 종말론을 들어본 적은 적은 없다. 다만 세상의 극심한 타락과 죄악으로 인하여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큰 징벌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면하려면 각 개인이 회개와 기도, 보속과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이 경고는 성서의 가르침이나 이미 인준된 여타의 사적 계시와 상반되는 내용이 아니다. 가령 성서에 "야훼께서 몸소 온 세상을 불로, 모든 사람을 칼로 심판하신다.(이사야 66:16)", "나는 하늘과 땅에 징조를 보이리라. 피가 흐르고 불길이 일고......(요엘 3:28)", "재난의 시작(마태 24:3-24:31)", "가장 큰 재난(루가 21:20-21:28)", "주님의 재림(데살로니까 전서 4:13-5:11)", "재림의 약속(베드로 후서 3:1-13)" 등에서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또한 이와 같은 세말의 징조 및 새 시대 도래에 대한 약속은 각국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메시지나 많은 성인, 선견자들의 예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1975년 이탈리아에서 간행된 「시대의 표징」이란 책은 주목할 만하다. (앨버트 J. 허버트 신부 지음) 이 책에 의하면 이미 우리 시대는 종말을 예고하는 여러 징후들이 목격되고 있다. 가령 성상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 배교와 낙태의 만연, 교회 내부의 분열, 예수님과 성모님 및 천사들의 지속적인 발현, 악마 숭배 또는 악마 의식의 급증 현상(허브트 신부, 앞의 책, P. 28-35 참조)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종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한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토대로 오늘날의 많은 종말론 중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참된 알곡을 분별해내야 한다. 존재 방식의 올바른 전환을 충고해 주는 건강한 종말론과 특정한 날짜를 지정하여 사람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왜곡된 시한부 종말론은 반드시 구별될 필요가 있다. 불의 제련을 통해 불순한 광물질에서 순금을 판별해내듯이, 우리는 성령의 불길을 통해 더러운 악령의 찌꺼기들을 걸러내야 한다. 따라서 엄청난 죄악이 난무하는 이 세기말에 세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의 소심판과 정화를 거치지 않고 새 시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또 다른 교만이다.

2. 설화적 전기성(傳奇性) 하느님의 초자연적 기적의 구별 문제

설화적 전기성이란 과거의 전설이나 민담 등에서 잘 드러나는 기이한 이야기의 속성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사실이 오랜 세월 동안 구비 전승되어오다가 민중들에 의해 포장되어 비현실적인 괴기성을 띠는 이야기로 변질된 것이다. 이 전기성에는 인간의 초능력에 의한 각종 도술이나 환술도 포함된다. 가령 고대 영웅 설화에 등장하는 신비한 이적이나 행적, 고대 인도나 중국에서 극성을 부렸던 민간 신앙의 온갖 비술(秘術), 「장자(莊者)」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등장하는 신인(神人)의 설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최근의 사이비 신종교에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음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계 신종교의 경우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능과 기적의 힘, 예언과 계시 등을 교묘하게 혼합하여 사람들을 더욱 쉽게 유혹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나주를 바라보는 일부의 시각이 정제되지 않은 왜곡된 신앙에 뿌리를 둔 이들 신종교의 속성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려는 점이다. 하느님의 초자연성이 실증적, 가시적,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나주의 기적이 구세사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성찰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빨리 부정적인 결론으로 치닫고 있음은 분명히 오류가 있다. 냉소주의자들은 신비와 기이 그리고 예언 현상 등을 통해 사이비 신종교와 유사한 방법으로 나주도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영분별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러한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착화된 율법과 신학, 계율과 문자에 얽매인 기성 종교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왜 이러한 현상에 경도되는가 한 번쯤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참된 사랑으로 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버려진 자들은 새로운 출구를 꿈꾸는 것이다. 예수님 생전에도 많은 기적을 목격한 가난한 제자들과 민중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마태오 8:27) 또는 "모두들 놀라"(마르코 1:27) 수근대거나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들었"(마르코 1:45)던 사실이 있지 않은가.

나주의 초자연적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기만술 또는 초능력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를 분별하지 못하다보니 한 때 예수님도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마르코 3:30)"고 비난받아야 했으며, 제자들 역시 "저주받을 족속(요한 7:49)", "몹쓸 전염병(사도행전 24:5)" 같은 존재로 조롱받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신앙을 타성화된 논리나 시각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며,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눈물을 현미경으로 분석해서도 안된다. 이성 또는 지성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그 탐사 대상이 주변의 일상적 사물이 아니라 영적 현상과 결부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현상은 냉정한 이성과 더불어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고린토 전서 12:10)"을 갖추어 분별해야만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공표한 '신앙과 이성'이란 회칙(가톨릭신문 1998. 10. 25, 6면)은 이런 점에서 참고가 될 수 있다. 이 회칙에 의하면 신앙과 이성은 대립관계가 아닌, 일치의 관계를 이루며 진리에 대한 인식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시와 사적 체험에 대한 접근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성과 날카로운 지성이 함께 조화를 이룬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설령 이러한 평균적 감각이 없더라도 '나무를 보면 그 열매를 알 수 있다'는 복음서의 말씀을 참고로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데살로니카 전서 5:19)라는 사도 바울의 충고도 참고로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윤율리아 자매님의 기도회에 참석한 수많은 국내외 신자들의 증언집을 정독한 적이 있다. 그 증언집에서 냉담자나 냉소주의자들이 눈물로 회개하여 신앙의 큰 쇄신을 이루어가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참석한 나주의 철야 기도회에서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동안 미처 깨닫지 못한 하느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더욱 영혼 깊이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열매가 교회의 가르침에 상반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은밀히 역사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칫하면 성령을 거스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도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한 3:8)" 그러므로 성령께서 어느 곳에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든 그것은 피조물의 권한이 아니다. 그 현상이 피눈물이든 성체의 기적이든, 아니면 장미 향기든 태양의 기적이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따라서 나주의 초자연적 현상을 여타 신종교의 초능력 정도로 격하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외경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나주에서 일어난 지금까지의 기적이 율리아 자매가 연출한 한 바탕의 이브닝쇼였다면, 그 곳을 다녀온 수많은 순례객들은 조작된 밤무대에 동헌된 엑스트라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주를 다녀온 직후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세워 둔 필자의 승용차 안에서 왜 그렇게 진한 장미 향기가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지 냉소주의자들은 이성과 지성을 동원하여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율리아 자매의 초능력이 나주에서 이곳 대구에까지 도달하여 나의 후각을 사로잡았단 말인가?

아무튼 나주의 기적은 좀더 영적인 눈을 뜨고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혹세 무민하는 환술이나 도술도 아니며, 온갖 세속적인 죄악에 오염되어 있는 어두운 이 시대에 끝없이 타오르며 길을 비춰주는 영적인 불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3. 사회적 공동체 의식의 결여와 물질적 욕망의 문제

비판주의자들은 나주의 기도회가 사이비 신종교와 유사하게 자신들이 처한 역사나 사회적 상황을 망각하고 오직 자기 구원이나 자기 도취에 사로잡힌 집단이 아닌가 하고 역시 의구심을 갖고 있다. 특히 물질에 대한 이기주의적 욕망도 이 의구심 속에 포함된다. 물론 이 경우도 사이비 신종교에 있어서는 올바른 지적이다. 요즈음 지탄을 받고 있는 신종교들은 구원이란 속임수 아래 노동 착취, 교주와 그 추종자들의 경제적 이익 갈취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이 신종교의 하위 구성원들 역시 기복적 신앙에 빠져 있어 부귀영화와 출세, 치병과 득남 등의 극히 현세적 욕망만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광신적인 근본주의자들처럼 개인의 구원과 안심입명(安心立命)에만 몰두할 뿐, 자아 밖의 사회나 국가의 현안들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나주를 함께 끌어들이는 데 있다. 최근 율리아 자매가 많은 신자들로부터 복채를 가로채어 부를 은닉하고 있다는 해괴망측한 소문까지 떠돌고 있다. 어떤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문제 제기자가 직접 그 현장에 가서 진실을 가늠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그 현장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의 겉보기가 아니라, 실재적 의미를 알기 위해 직접 기도회에 지속적으로 참석하여 탐구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이것은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주에 다녀온 사람들의 의견을 간접적으로만 참고 했을 때 엄청난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감사 헌금을 낼 때 그 장소와 방법이 꼭 교회이거나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 바깥의 어떤 기도회나 집회에서든지 하느님의 몫으로, 또는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진실하게 사용된다면 개인의 정성과 자유 의지에 맡겨져야 한다. 가령 구약에는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레위기 27:30) 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성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신명기 14:28)라는 충고처럼 교회가 아닌 열린 공간에서도 하느님을 얼마든지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하느님을 위한 성무를 전적으로 담당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계 수단을 포기하고 기도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영적 지도자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의 일부를 바쳐도 십일조의 근본 취지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관심을 나주쪽으로 돌려보자. 율리아 자매는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 속에서 철장 없는 감옥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의지로서도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의 초자연성을 체험하여 진실과 진리를 증언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핍박받고 있음은 분명히 문제가 많다. 만약 그 자매가 물질적 이익과 개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자라면 왜 교회에 순명하여 영어(囹圄) 생활을 하고 있겠는가. 차라리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기도회를 매월마다 잠깐만이라도 적당히 이끌어가면 이른바 복채도 넝쿨째 굴러들어올 것인데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헌금이나 기부금이 있는 곳엔 잡음이 없는 곳이 없다. 문제는 그러한 악성 여론을 조성하는 편협된 신자들의 마음인 것이다. 하느님과 성모님의 무한한 은총에 감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몇 푼의 감사 헌금마저 사이비 종교의 '복채'와 연관시키려 하는 오늘날의 비정한 세태에 대해 황량함을 느낀다. 어느 종교 집단이건 각종 홍보비나 책자 인쇄비, 시설 유지비나 기타 운영비 등이 필요한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나주에서 발간되는 각종 칼라판 책자나 증언집을 거의 원가로, 또는 무상으로 얻게 된 독자들은 이 말뜻을 이해할 것이다. 사랑의 불꽃 한 점 던져주지 못할 망정,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로 나주의 길목에 덫을 놓으려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또한 그 기도회의 성격 역시 결코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개인의 죄에 대한 회개와 예수님 및 성모님의 고통에 대한 묵상, 공동체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따라서 자기만의 구원과 안락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집회는 결코 아니다. 교황님과 주교님, 많은 사제와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사이비 종파의 이기주의와 같은 성격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아무리 정통 가톨릭 신앙을 자랑하며 교회의 제 단체에서 봉사와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더라도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모르면 헛된 것이다. 이 경우는 나주 기도회의 봉사자들이나 지속적인 참석자들에게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스스로는 깨어있다고 자부하며 기도회에서 많은 기적을 체험한다 하더라도 경당의 출구에 나서면서부터 애덕을 실천할 줄 모르면 무의미하다.

사랑은 나눔이다. 이미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분명히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반사회주의자 또는 이기적 욕망에 물든 자들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진실이 하루 빨리 규명될 수 있도록 짧은 화살기도라도 주님께 한 번 바친다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성모님도 곱비 신부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거룩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되어 모든 형제의 마음에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의 불을 놓아야 한다.(마리아 사제운동, 성모님의 메시지 모음, 1998, 가톨릭출판사, P. 80 참조)"라고. 이제 우리는 굳어가는 영혼을 맑게 헹구어야 한다. 이 세기말에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모든 이가 자신의 영혼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혹시 자신의 눈이 멀어 수많은 예언가들을 처형한 이세벨 여왕(열왕기 하 9:33)처럼 변질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코라진과 베싸이다 사람들(마태오 11:20-24)처럼 기적에 대한 냉소주의자로 전락되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열린 자들은 항상 창조적인 삶을 지향한다. 비록 나주라는 한 작은 변방에서 일어난 초자연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그것의 구세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겸손하게 묵상할 줄 안다. 그리고 그 깊은 성찰을 통해서 문자와 율법과 타성에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가 그리스도적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안개같이 갑갑한 풍문에만 의탁하는 뒤틀린 편견에서 탈피하여 우리 모두는 따스한 불꽃 한 점을 고통받는 한 이웃을 향해 던질 수 있도록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3)

이 진엽 비오
대구시 신매동 보성아파트 261동 1206호

 

 

"와서 보시오" -- 우리는 왜 나주로 가야 하는가

 

1. 왜 체험 신앙이 필요한가?

"와서 보시오." 우리는 자주 어떤 상황에 대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그 때 상대방은 현장의 사태를 직접 확인하고 난 뒤에 나름의 판단을 내리거나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 경우는 성서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 중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길에서 처음 만나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요한 1:39)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시려던 즈음에 필립보란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그 기쁜 소식을 당대의 대율법학자인 나타나엘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냉소를 머금으며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반문했지만 필립보는 그에게 역시 "와서 보라"(요한 1:46)고 권하였다.

여기서 "와서 보라"는 말은 참으로 묵상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우리는 가끔 교회 내에서 종교적인 편견과 독선에 빠져있는 신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대개 어떤 문제나 상황를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 타인의 말이나 풍문을 통해 또는 몇 줄의 성서구절을 통해 쉽게 결론짓거나 판단하려고 한다. 그 결과 문제의 참된 본질은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된 지식으로 내적성장의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와서 보라"는 그 권유에 용기있게 응하여 어떤 의미있는 순간을 직접 체험하게 될 때 그의 삶은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토록 완고하던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찾아와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하고 난 뒤에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요한 2:49)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또한 나병에 걸린 시리아의 군사령관 나아만은 어떠했는가. 그 역시 예언자 엘리사가 일러준 치유의 말을 믿지 못하고 처음엔 화를 내었지만, 마침내 자신이 깨끗이 낫고 난 뒤에는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열왕기 하 5:15)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런 예들은 성서에 무수히 나타난다. 사도 바울로의 변화(사도행전 9:4), 이디오피아 내시의 변화(사도행전 8:33),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의 신앙 고백(출애급 18:11), 예수님을 처형할 당시 십자가 아래에서 전모를 지켜봤던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마태오 27:54)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어떤 상황의 진면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이론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체험적 접근 역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와 섭리를 참답게 깨닫기 위해서는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과 '영혼'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왜냐하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론적 이론 신앙으로 우리는 지적 충만을 느낄 수는 있지만, 거기서 깊은 생명의 물소리를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 신앙은 사람마다 심령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하느님의 카리스마를 영혼 속에 감지하는 소중한 것이다.

2. 나주, 사적 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가톨릭 신자의 영성 계발은 각종 피정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영성 계발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나 계시가 충만히 내리고 있는 특정한 장소로의 순례를 통해서도 훌륭히 이루어질 수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의 나주이다. 최근 『월간조선』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나주 성모님과 초자연적 기적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 나주의 기적은 이미 가톨릭 신자들의 입을 통해 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90년대 들어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대한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국내외적으로 수십만의 순례객이 다녀갈 정도로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초자연적 현상은 솔직히 말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세계 도처에서 이러한 현상은 있어왔고, 교회는 그 때마다 하느님의 다양하고 풍성한 은총과 계시를 깊이 있게 체험한 바가 있다. 멕시코의 과달루페, 프랑스의 뤼 뒤 박과 루르드, 포르투칼의 파티마, 벨기에의 바뇌, 일본의 아끼다, ..... 등에서 발현된 초자연적 현상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계 가톨릭 교회사에서 유일 무이하게 자생적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린 한국에 하느님의 어떤 징표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러한 표지로서 하느님께서는 나주의 한 가난하고 착한 촌부(윤홍선:율리아)를 택하셔서 어머니 마리아로 하여금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고 있다.  

그렇다면 나주의 기적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가?  첫째, 성모 마리아 상에서 몇 년간 눈물과 피눈물, 향유가 흘러내린 점. 둘째, 천상의 성체가 하늘에서 몇 차례 떨어져 내린 점. 셋째, 성체가 피로 물들며 예수님의 성혈과 살로 변한 점.(성변화) 넷째, 율리아 자매를 통해 예수님과 성모님의 메시지가 계속 전해지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들 앞에서 무척 당황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정한 이성과 지성으로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어떤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이미 우리 교회 안팎에서도 경북 상주의 황데레사, 부산의 사랑의 불꽃, 대구 대명동의 예수님과 성모님 발현 등과 같이 그 동안 사적 계시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중에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은 경우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 할 때 더욱 그러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사적 계시에 대해 현장 답사와 기적의 증언 및 목격, 그것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과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연구는 도외시 한 채 신자들은 대개 부정적인 편견에만 사로 잡혀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한겨울 멕시코 고원 지대에서 후안 디에고라는 인디언에게 성모님이 나타나 천상의 장미꽃을 전해 준 기적과,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 어린아이들에게 천상의 성체를 영해 준 저 파티마의 기적, 벨라뎃따란 한 시골 소녀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루르드의 기적도 처음에는 한갖 허무맹랑한 사적 계시로 조롱받지 않았던가.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많은 사적 계시 중에서 하느님과 성모님으로부터 온 참된 계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떤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그 계시가 참으로 자신의 신앙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성서 및 교회의 가르침과 상반되지 않는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나주의 성모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관찰되고 체험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나주 문제는 광주 대교구의 공식 인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월간조선』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가 잠자고 있을 동안 이미 각국의 주교, 사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평신도들이 나주의 초자연적 현상을 직접 체험한 바 있다. 특히 교황 성하께서는 나주의 성모님께 '지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신다고 한국 주교들과의 바티칸 만찬장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흔히 가톨릭 교회는 은총을 받는 방법이 개신교에 비해 매우 풍부하다고 한다. 예컨데 개신교에 비해 성서 이외에도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성전(구비 전승된 하느님 말씀)이 있고, 또한 성인 성녀들과의 영적 교류 및 미사 성제, 성사와 준성사 등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이 매우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상경 지례(上敬之禮)의 믿음으로 특별히 공경하고 있다는 점은 가톨릭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은 꼭 도식적인 방법으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이 아시는 신비한 현상으로 나타내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러한 현상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피조물이 조물주의 주권에 도전하는 월권 행위에 불과하다. 육과 감각의 껍질에 둘러싸인 인간이 어떻게 초월자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페소 4:6)"에 계신 것이다. 구약성서에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이사야 7:14, 9:2:-9:6)은 잘 나타나 있지만, 하늘에서 '별'이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 줄 것이라는 예언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탄생을 동방 박사들에게 별을 통해 은밀히 계시(마태오 2:2)해 줌으로써 인류 구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사적 계시라고 하여 무조건 배척하거나 곡해할 것이 아니다. 동방 박사들의 영적 체험이 없었다면 아무도 세상은 구세주 탄생의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볼 때 한국의 나주에서 나타난 일련의 현상도 매우 신중하게, 진지하게 접근되어야 한다. 적어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진짜 메시지라면 그것을 단순히 무당판수들의 예언이나 초능력의 산물 정도로 격하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이 우주에는 무수한 영이 떠돌고 있는 바, 사탄의 힘을 빌린 주술사들도 때로는 약간의 기이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 때 많은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도 베엘제불(사탄의 두목)에게 사로 잡혔다고(마르코 3:22) 오해를 받지 않았던가. 때문에 인간이 고도의 정신 집중과 기(氣)모음을 통해 터득한 '초능력'(가령 타심통이라는 방법처럼 상대의 마음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보는 힘)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초자연적 능력'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다 보니 우리 교회 내에도 아주 교묘하게 이러한 위험한 영들이 사람을 통해 묻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주의 초자연적 현상도 대게 이러한 초능력적 파동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진실은 곧 밝혀지겠지만 어쨌거나 지금까지 그 곳에는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1998년 1월 광주 윤공희 대주교의 공지문에도 불구하고 순례객들의 발길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순례객들의 행렬이 지속되는 이유는 교황 성하는 물론, 한국의 지학순 주교, 제주 교구의 김창렬 주교, 국외의 많은 주교와 사제, 평신도들이 나주 성모님의 피눈물 또는 성체의 변화 현상을 직접 목격한 바 있고, 그 현상이 거짓이 아님을 증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금년 1월 광주 대교구장의 공지문이 발표되자 그에 반박하는 각종 여론이 사제나 신자들의 입을 통해서, 또는 PC통신과 언론 매체를 통해 조성되고 있다. 특히 『가톨릭다이제스트』에서는 몇 월호에 걸쳐 광주 대교구장의 왜곡된 교도권에 대한 비판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현재 홍콩에서 사목 활동 중인 미국인 엘싱거 신부님이 이 잡지에서 매우 안타깝께 피력하고 있는 견해에 우리 모두는 한번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실 사적 계시의 체험이 제대로 없는 우리 나라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생기면 뚜껑부터 미리 닫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왔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유럽)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종교적, 과학적 접근을 오랫 동안 주도 면밀하게 실시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성지로 개발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3. 내가 본 나주

나주에 관한 소식을 내가 처음 접하기는 90년대 초로 기억된다. 그 당시 우연하게 서울 대교구의 한 신심 깊은 자매님(李아녜스)으로부터 나주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처음에는 '뭐 그럴수도 있겠지' 하는 정도로 곧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1996년 4월 경 그 분의 인도에 이끌려 차량 봉사를 하며 처음 따라가게 되었다. 오후 4시경 대구를 출발, 88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지리산 휴게소 부근에 이르자 그토록 맑던 날씨가 갑자기 심한 변동을 일으켰다. 천둥 번개와 드센 빗발, 사방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가는 길을 막았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인 나주 성모 경당에 도착했을 때 또 한번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각 교구의 수많은 순례객들이(1000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첫토요일 성모 신심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당 안팎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중을 비집고 간신히 출입구 부근에서 센드위치처럼 끼여 나도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미 몇 해 전에 피눈물과 향유가 흘러내리는 현상이 끝났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은 목격할 수 없었지만, 그토록 소문으로만 듣던 윤율리아 자매님이 이끌어가는 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어 마음이 설레였다.

기도회 끝무렵에는 이곳을 다녀간 후 내적, 외적 치유를 받은 각 교구의 신자들과 LA의 한 교포가 증언을 했다.  특히 그 날따라 홍콩에서 온 신부님과 30여 명의 외국 순례객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성모 경당 안에는 사람에 따라 진한 백합, 또는 장미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향기를 맡을 수 없었고, 새벽 4시까지 인파에 시달리다가 귀가했다.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나주는 내 기억 속에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었을 뿐, 단조로운 일상과 세속적 삶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또 다시 나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1998년 8월 첫토요일에 생기게 되었다. 필자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소공동체 기도회를 희망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최근 성모 신심이 아주 깊은 각 본당의 신자들로 구성된 기도회에 매주 참석할 수 있는 행운을 주셨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근 다락방 기도회 중에 촛불의 심지가 사랑 마크(예수님의 심장?)의 형태로 서서히 바뀌면서 보통 때와는 다른 모양으로 촛불의 불빛이 몇 시간 가량 지속되었다고 한다.  또한 기도회 도중 장미 향기가 방안에 잠시 풍길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런 현상은 성모 신심이 아주 깊은 분들에게는 가끔 있는 현상인 것 같은데, 나로서는 난생 처음 듣는 일이라 직장에서 집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난 뒤 무척 들 떠 있었다.

더욱 신기한 일은 아내가 금년 7월 4일 첫토요일 나주 기도모임에 다녀온 뒤 일어났다. 7월 5일 일요일 아침 아내에게서 대구에 무사히 도착하여 지금 집 부근의 성당에 와 있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나는 그 곳까지 나가 함께 아침 미사를 보고 귀가했다. 그런데 미사 때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내 왼쪽 눈 주위가 오전 11시경 갑자기 통증과 함께 심하게 부어 오르며 실눈처럼 흉하게 변해 있었다. 눈꺼풀을 이리저리 들추어보니 눈물샘 부근에 약간의 화농이 형성되어 빨갛게 부풀어 있었고 그곳이 바로 통증의 진원지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어서 약국이나 병원에도 갈 수도 없었고,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아내가 나주에서 가져온 기적수를 눈에 한 번 넣어 보자고 제의하여 반신 반의하며 그대로 시행했다.

그 후 20분쯤 지나자 통증이 사라졌고, 두어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부위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빠졌다. 이 정도의 부위라면 화농을 제거하고 최소한 3-4일은 가야 정상으로 돌아올 텐데 참으로 이상했다. 많은 생각을 거듭한 후 나는 이번 8월 1일 첫토요일에 다락방 기도회원들과 함께 나주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 속은 아직도 남아있는 의심의 찌꺼기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끝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나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쪽 지방에 폭우가 휘몰아쳐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토요일 아침까지 대구에도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오후가 되자 날씨가 개기 시작해지만, 정원을 훨씬 초과한 전세 관광 버스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갑갑했다. 우여 곡절 끝에 오후 3시경 출발, 저녁 8시경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순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당 안팎을 가득 메운 것을 보고 내심으론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지난 번과는 달리 광주대교구장의 공지문으로 인해 이곳의 공식적 집회가 금지되었는 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만나기 위해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율리아 자매님은 그 자리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경당 바로 옆에 위치한 가정집에 유폐되다시피하여 그 곳에서 외롭게 기도 모임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잡신을 숭배하던 로마인들도 사도 바울을 아무런 준비 기간 없이 바로 단죄하진 않았다. 천인 대장에게서 펠릭스 제독에게로, 다시 본토 로마의 황제 케자르에게로 보내어 인간의 자연법 절차를 철저히 따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처형했는가. 세속의 자연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보다 못한 종교적 율법이란 독선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던가. 작은 창문밖으로 전등 불빛이 비치는 율리아 자매님의 집을 보며 문득 측은한 마음과 함께 이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쨌던 나는 그 동안 의심이 가던 경당 안 맨 앞쪽 '천상의 성체'가 떨어진 곳으로 가보았다. 그 곳에는 투명한 유리로 덮여 있는 가로 40센티, 세로 25센티 정도의 나무상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안으로 코를 들여댔을 때 진한 향기가 난다고 했다. 아내도 경당 안에 장미 향기가 은은히 풍기고, 성체가 떨어진 곳에서는 향기가 진하게 난다고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아무런 향기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은 안 될거야!' 라는 넋두리를 잠시 속으로 해 보았다. 줄곧 마음이 착잡하여 다시 30여 분 후 사람들의 긴 행렬에 끼여 재차 시도를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혹을 떼려고 시도하다가 더 큰 혹을 달게 된 혹부리 영감처럼.   

이러던 와중에 순례객들 1중 몇분의 인도로 본격적으로 기도가 시작되었다.  로사리오 기도와 찬양이 계속되었지만 마음은 가볍지 못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새벽 3시경 통성기도 시간이 되었다.  각자 예수님과 성모님의 처절한 고통을 묵상하며 자유롭게 기도했다. 기도를 이끌어가는 분이 흐느끼면서 "우리는 저 아름다운 성모님의 모습만 늘 보았지, 저분의 마음 속에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있음을 누가 알고 있었는가?"라고 되뇌자 내 눈에서는 한동안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매님들이 주변에 많이 앉아 있어서 다소 부끄럽기도 하여 눈물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때였다. 문득 백합 비슷한 진한 식물 냄새가 꽉 막힌 코 안으로 두어 차례 풍겨옴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도모임이 끝나고 막 경당 밖으로 나설 즈음 이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로운 장미 향기가 진하게 콧속으로 두번 풍겨왔다. 그래서 황급하게 다시 경당 쪽으로 몸을 돌려보니 아주 은은한 장미 향기가 그 곳에서 역시 풍겨왔다. 마음은 상기되었고 너무나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이제까지 무겁던 마음이 내내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 가득참을 느꼈다. 성모님께서 끝없는 의심과 거짓 지식에 빠져 있던 한 죄인에게 처음부터가 아니라, 힘겨운 고생 끝에 작은 하나를 깨닫게 해 준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땅으로 향할 때, 왜 야훼께서 에돔왕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닫게 하여, 그들을 지름길인 카데스란 마을로 지나가게 하지 않고 먼길을 돌아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지(민수기 20:17-20:21)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은 시련을 많이 겪을수록 다시는 이집트로 돌아가 죽음의 나일 강물을 마시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후 한 달이 지나갔다.  9월 첫 토요일날 또 다시 세 번째 나주를 순례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경당에 들러기 전에 기적수가 일곱 번이나 솟아올랐다는 성모님의 산으로 올라가 촛불 봉헌도 하고 침수의 은총도 받게 되었다. 아내는 침수 도중 진한 장미 향기를 맡았다고 했다. 필자는 97년 여름 해외 성지 순례시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침수를 한 경험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도 성모님과 관계된 기적수가 흐르는 성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이 기뻤다.

침수가 끝나자 일행과 더불어 경당으로 내려와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새벽 3시경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많이 울었다. 예수님과 천상 어머니의 속을 썩혀 드린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때마다 가슴은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쓰라렸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내가 언제 성모님 때문에 이렇게 운적이 있었던가? 그 날은 지난 방문 때와는 달리 경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또는 진하게 계속 풍겨왔다.

특히 내가 놀란 것은 기도회가 끝나고 대구에 도착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일행과 함께 전세 관광 버스를 타고 대구에 도착, 내 승용차로 갈아타기 위해 차문을 여는 순간, 그 차 안에서 온통 진한 장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럴 수도 있을까! 나는 그 당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월요일날 학교로 출근하여 문학 수업을 하는 도중, 은은한 장미 향기가 두어 차례 순간적으로 코끝을 스쳐감을 분명히 느꼈다. 언제나 세상의 지식과 논리에 깊이 빠져있는 이 죄인에게 성모님께서 자주 어떤 징표를 보여 주시며 현존하심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였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렇다, 잘 살아야 한다. 영적으로 항상 깨어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 쳐녀들처럼......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모두가 자유롭게 판단하고 말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식이 지향하는 대로 반응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라고 섣불리 가벼운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필자는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고린토 후서4:13) 라는 성서의 구절처럼 감각 기관을 통하여 몇 가지 현상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주의 성모님과 관계된 초자연적 현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점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앙관 또는 실존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선택 뒤에는 자신의 영혼에 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제 나주의 기적에 대해 색안경만 쓰고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지고 조용히 묵상하며 그 의미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후, 그 제자들이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 분의 성령에 대해 외치고 다닌 일이 있었다. 그 때 대사제와 추종자들은 그들을 잡아다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통찰력 깊은 율법 교사 가믈리엘은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 만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사도행전 5:35-5:39)라고 충고한 점을 조용히 묵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 나주의 기적에 대한 냉소주의는 잘못하면 하느님과 맞서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닫힌 마음이 아니라, 모두가 내면의 문을 열고 하느님의 카리스마를 받으려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현실적 삶을 방치하고 무조건 신비한 것 만을 추구하는 열광주의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하느님의 초자연 현상이라면 무조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괴기담'이나 마술사의 '손수건' 정도로 무시하는 지적 교만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신비한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일회용의 '밥'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8년 9월 28일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 보성아파트 261동 1206호
이 진엽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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