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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수첩과 나주 진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나주 공지문을 읽고서(윤대주교님의 공지문)

나주 조사위원 리순성 신부님의 '성체성사의 실체변화'  -   1998년 3월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에 대한 리순성 신부님의 글을 읽고서 -  이 분도

나주 조사위원 리순성 신부님의 '성령과 교회의 관계'  - 1998년 봄

'성령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리순성 신부님의 글을 읽고서 -  이 분도

이제민 신부님의 글을 읽고  -  신 카타리나

이제민 신부님의 글을 읽고  -  한 바오로

'나주 조사위원 이제민 신부님의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적인가?' (공동선 1998년 5-6월)
 


 

광주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에 대한 이해

 

리순성(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교도권의 행사권자가 교도권을 발할 때의 의지와 목적은 그리스도적 '신앙과 도덕'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교회 공동체적으로 일치하기 위한 것이다.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는 그러한 일치를 위해서 1998년 1월 1일에 " '나주 본당 윤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메시지'에 대한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의 공지"를 통해서 교도권을 행사했다. 물론 그 교도권은 일치를 위한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들, 그리고 로마 교황청과 협의하여 행사된 것이었다.1)

1)윤공희 대주교는 로마의 신앙교리성이 윤 대주교에게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문의한 1993년 9월 21일자 편지 (93-9-21, Prot. N. 112/93)에 대해 신앙교리성의 알베르토 보보네(Alberto Bovone)대주교에게 보낸 1993년 11월 19일자 답서에서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때까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 등에 대해 말한 이후 1995년 1월 14일에 1994년 12월 30일 9명의 신부로 구성된 나주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음을 신앙교리성의 알베르토 보보네(Alberto Bovone) 대주교에게 알렸고(교구 공문 94-67). 1995년 6월 20일에는 6월 16일자로 발표된 나주 조사위원회의 중간 발표문과 파 신부(Fr. Raymond Spies)에게 보낸 두 차례이 질의서와 그에 대한 파 신부의 답서를 로마에 보냈다.
그리고 1996년 2월 26일 나주 조사위원회의 조사 진행 상황과 아울러 그 진행과정에서 주변 인물들 때문에 조사에 영향을 미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로마의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셉 라칭거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냈고 1996년 사도좌 정기 방문(Ad Limina)을 위해 로마를 방문하던 중 1996년 3월 26일 오후 12시 45분부터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을 만나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그에 관한 조사의 진행 상황 등에 대해서 구두로 보고 겸 대화를 했으며 그 내용과 함께 1997년 1월 16일에 그때까지 진전되어 오던 제반 사항들 곧 로마와의 협의 과정, 나주 조사 진행 과정 그리고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등렝 대해 여기저기에서 문의해 오거나 증언해 온 사람들과 교환했던 서신 자료들을 Report Ⅰ,Ⅱ라는 묶음으로 만들어 로마 신앙교리성 장관 요셉 라칭거 추기경에게 발송했다.
마지막으로 최종 발표에 앞서 1997년 11월 4일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들에게 송부하여 의견을 들은 후"작성된 공지 예정 문서를 교황대사를 통해 신앙교리성 장관요셉 라칭거 추기경에게 발송했고 12월 16일 그에 대한 신앙교리성의 의사를 주한 교황대사의 '전언의 형식'을 통한 답서로서 들었다.
윤 대주교는 1997년 12월 30일 공지 확정된 내용을 로마에 보냈고 1998년 1월 1일 그 내용을 발표했다. 이러한 협의 과정은 주한 교황대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전에 있었거나 현재 있는 교황대사들도 왕래했던 문서들의 전반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 산하 기관지의 하나인 <사목>은 1998년 3월호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희망'을 중주제로 하고 소주제를 여러 가지로 나누어 해당 사항들을 다루고자 했던 것 같다. 필자에게 맡겨진 소주제는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에 대한 이해'이다. '일치의 성령'2)께서 작용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적인 일치를 염두에 두고 채택한 소주제인 것으로 보인다.

2)『일치교령』 2항 참조.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에 관한 것은 신앙을 전제로 하되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그리스도적 일치' 곧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가톨릭의 모든 신자들의 일치를 대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의 공지'에서 다룬 내용 가운데 "윤 율리아 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가르침(DS782,802, 1321,1642,1652;[신앙의 신비]참조)에 어긋납니다." 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실체변화'라는 신학적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신앙의 불일치로 기울어간다.

이 글을 쓰는 필자의 의도와 목적도 단순하다. 정통 가톨릭의 성체성사에 대한 신앙과 그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차원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가톨릭의 모든 신자들이 일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1. 성체 논쟁의 역사

초대교회 이래 그리스도교는 성체성사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신학적으로 유일한 것으로 인정해 왔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생애 중 한 사건인 그분의 구속적인 죽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재현한다는 것, 그래서 미사 중 발해지는 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단에 현존하시고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성체안의 실제 현존).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둘러싸고 크게 세 번 논쟁이 일어났는데 그 논쟁들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과 현존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구분하면 9세기와 11-13세기 그리고 14-16세기에 있었다.

1) 9세기의 논쟁
첫 번째 논쟁은 842-853년에 코르비(Corbie)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원장이었고 오늘날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와 역시 베네딕토회원인 라트람누스(Ratramnus)사이에서 벌어졌다. 논쟁의 발단은 라드베르투스가 831년에 출간한 책 De corpore et sanguine domini(PL 120:1263- 1350년) 였다. 그는 그 책의 내용들이 치프리아노와 암브로시오, 힐라리오, 아우구스티노, 크리소스토모, 예로니모, 교황 그레고리오, 이시도로, 헤지키오 그리고 베다(PL 120: 1268A)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가 전개한 것들은 주로 암브로시오가 가르쳤던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로서의 몸과 역사상의 몸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라트람누스는 두가지 몸의 물질적 정체보다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관계에 대해서 강조하며서 그를 공격했다. 논쟁의 진전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라드베르투스는 일단 세빌라의 이시도로가 내린 정의 (Etym. 6. 19. 39)를 빌려 성사란 그 안에서 외적이면서 가시적인 행동이 그 어떤 내적이고 불가시적인 것을 일으키는 전례의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성사의 종류를 세가지(세례, 성유, 성체)로 말하면서 그 세 가지가 성사들인 이유는 신적인 힘이 '물질적인 것들을 빙자한' 그것들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이고 또 교회 안에서 성령이 그것들을 효과적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씀의 성사도 서약이나 신비를 나타낼 수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라드베르투스에 따르면 성사는 성령께서 성서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면 언제든지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힘의 영향을 받을 때면 언제든지 존재하기 마련이다(De corpor.3.1-3)

그 이후 폭넓게 쓰이던 '성사'라는 말은 좀더 한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근본적인 오해들도 발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라드베르투스로서는 성체성사가 하나의 상징(figura)인지 하나의 실체(veritas)인지 자문한 후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살은 사제가 발설하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통해서 성령에 의하여 제단에서 축성된 그분살의 성사"(De corpor.4.3)라는 의미에서 외적 상징이자 내적 실체라고 자답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힘, 축성의 말들이 빵과 포도주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취하셨던 살과 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physicalism).

그러자 라트람누스는 같은 제목의 책을 통해서 우선 용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figura라는 것은 언어의 형상을 뜻하고 veritas라는 것은 개방되어 있으면서 직접적인 표현이자 실체에 관한 지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요한 15.5)라고 하셨을 때는 그분께서 분명히 언어의 형상을 사용하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다른 이들이 말하게 될 때의 그 언어는 단순히 실체에 대한 하나의 진술이라는 것이다.(De corpor. 5-8). 마찬가지로 비록 축성 이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모습은 그대로 남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그 안에서 본다고 여겼기에 그는 성체가 veritas라기보다는 figura로 불리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렇게 말할때의 근거는 아우구스티노(Doctr. christ. 3. 16. 24:PL 34-75)였다. 요컨대 그의 주장은, 빵과 포도주은 물질인 이상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서만 가능하는 것이기에 그것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란 영적 것이고 그 효험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친교에 있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그는 아우구스티노가 보니파시오(Bonifacius)주교에게 보낸 편지 (Epist.98.9)에서 축성된 빵이 성사로 있는 상태에서 성사와 실체(res)사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특성을 가르쳤다고 (De corpor. 33-36) 밝히는 가운데 라드베르투스가 이시도로를 오해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암브로시오도 현명하게 '살의 성사'를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살의 실체(De corpor. 57)와 구별했다고 지적했고(De corpor. 40-50) 또 성 예로니모의 전례조차 그리고 성 풀젠시우스(Fulgentius)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구별했다고 밝혔다(De corpor. 70. 88. 90)

그의 주장은 오르바이스(Orbais) 의 고트샬크(Gottschalk), 마우루스(Rabanus Maurus) 그리고 여타의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철저한 상징주의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안에서의 실제 현존이 아닌 것으로 곧 그 어떤 변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요컨데 그의 주장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무슨 변화이든 인지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서만 성체로 현존한다는 것 곧 축성 후에 "무슨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De corpor.12)는 것을 요지로 한다.

그리스도의 성체 안에서의 실제 현존에 대해 약간은 유치한 물리주의와 그에 반발해서 단순히 표상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figura 중심적 상징주의 사이의 논쟁의 결과는 라드베르투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후 상세한 설명이야 어떻든 적어도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신학적 이해가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2) 11-13세기
두 번째 논쟁은 투르(Tours)의 마르티노대학 학장이었던 베렝가리우스(Berengarius, 1005-1088년)가 라트람누스의 주장을 옹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베렝가리우스는 라트람누스의 책이 에리우제나(Johannes Scotus Eriugena, 9세기)에게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그를 변호해 주기 위해 수많은 철학적 원리들을 예로서 인용했다. 그러자 라프랑(Lafranc)이 자신의 De sacramento corporis et sanguinis Christi 를 통해서 베렝가리우스를 공격했다. 여기에 베렝가리우스는 1070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De sacra coena를 통해서 그를 논박했다.

베렝가리우스는 '신성한 실체의 표상'으로서의 성사라는 아우구스티노와 정의를 빌려 성사라는 말은외적이고 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뜻하고 무엇이든지 내적이고 불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것은 성사가 아니라 상관적인 실체이기에 성체 현존이란 그리스도의 어떤 역동적 현존 곧 그분과 우리의 영적인 결합을 드러내는 것, 하나의 표상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가 성사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표상이어야지 그 표상과 동일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빵의 조각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논리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조각들로 있는것이고 또 만일 포도주가 실제로 그분의 피라면 그분의 피가 그분의 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자 꽤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왜곡하면서 극단적이면서도 이단적인 경향을 보이는 베렝가리우스를 반대했다. 특히 라프랑으 베렝가리우스가 신성한 표상으로서의 성사라는 정의가 갖는 그 고유한 맥락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고 제한적으로 말한다.(De sac. 12)고 지적했다. 라프랑은 그 정의를 가시적이면서 불가시적인 성사적 실체들과 연관시켜서 지속적으로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신법까지도 단 하나의 의미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De sac. 19)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몸의 성사는 그분의 살이다"(De sac. 14)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De sac. 19)라는 말로써 웅변된다.

그러나 베렝가리우스로서는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이 성체성사에 관하여 전개하는 내용들을 부정하지는 않았기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사실상 성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작품들은 한결같이 오직 축성된 가시적, 물질적, 일시적 빵과 포도주만이 그리스도의 그 불가시적, 비물질적, 영원한 실체(res)의 성사라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 안에 물질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논리적으로 하나의 성사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운데 성체성사란 단지 신앙의 눈으로 인식한 것이자 영성체로써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영적 실체라고 생각한 그의 견해가 반복해서 단죄되거나 서약을 요구받은 후 [Roma, Vercelli, 1050: Paris, 1051: Tours. 1054: Roma, 1059(DS 690), 1079(DS 700)] 그 역시 "모든 작품들이 빵과 포도주는 축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선언한다" (Desacra coena 42)고 함으로써 축성을 통한 변화 (conversio)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사실은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가 주장한 바가 적극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1215년의 제 4차 라테라노공의회가 (보고밀파와 알비젠시우스파, 가타리파, 페트로브루시아누스파 그리고 여타의 사람들을 반대해서) "빵과 포도주는 신적 힘에 의해 몸과 피로 실체 변화된다." 고 선언한 것으로 입증되었다(DS 802). 부연하자면 13세기 초 투르의 힐데베르투스(Hildebertus)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에 근거해서 쓰기 시작했고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가 1202년에 리용의 전임 대주교 요한에게 보낸 서한 Cum Martae Circa에서 사용한 '실체변화' (transsubstantiatio)라는 용어 (DS 782)가 그 공의회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바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말해 주는 것은 초대교회 이래 믿고 있었던 바와 같이 성체성사 안에서의 '변화' 라는 사실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빵에 대하여 "이는 내 몸"이라 하고 포도주에 대하여 "이는 내 피" 라고 한 말씀이 참인 이상, 빵과 포도주가 겉으로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로 보이더라도 결국 빵은 이미 빵이 아니고 포도주도 이미 포도주가 아니라는 것 곧 성체성사 제정의 말씀이 사제에게서 발설될 때 "실체"(substantia)인 빵과 포도주의 본질적인 존재는 '변하고' 한편 '우유'(偶有. accidentia)인 외적으로 나타나는 형식들-물리 화학적 구조들-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3) 14-16세기
세 번째 논쟁은 스콜라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데 아퀴노, 요한 둔스 스코투스, 윌리암 오캄 등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인 '실체변화'로서 성체성사의 현존 방식이라는 교리에 반대하고 축성 후의 빵과 포도주의 지속성에 관한 베렝가리우스의 견해를 받아들인14-16세기의 사람들에게서 비롯됐다. 베렝가리우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제단의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가르친 요한 위클리프가 1415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미 단죄된 적(DS 1151-1153)이 있었는데, 그와 거의 비슷한 관점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여타 종교개혁가들이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1274년의 제2차 리옹공의회에서 하나의 교리로서 가르쳐온 '실체변화'(DS 860)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가했다.

루터는 성서적 근거가 없는 '실체변화' 교리가 개인의 의견으로서는 주장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속력 있는 신앙 교리로 선언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유일한 구속력을 가진 성서에서조차 사도 바오로가 성찬의 빵을 성체 제정의 말씀이 있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빵'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고린 10,16:11, 26-28 참조). 물론 루터 자신이 성서의 증언대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령 불인 동시에 쇠붙이인 달구어진 쇠붙이를, 또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신 그리스도를 예로 들면서 두 '실체'의 동시적 공존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빵과 포도주의 본질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 이 둘의 본질들과 결합하여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consubstantiation 성체공존설).

칼뱅(Johannes Calvin)도 그리스도께서 영성체를 통하여 현존하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로써 참된 현존을 체험할 수 있고 또 그로부터 영적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virtualism潛勢力說). 그러나 그는 최후 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자구적 의미에서보다는 오히려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형상 또는 표상이었고 영성체로써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받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그 성사를 통해서 영적으로 자양분을 얻고 강해지기 때문에 (Institutio Christi, religionis IV.17,1 참조) 그리스도야말로 영혼을 위한 참된 음식이고 음료(요한 6, 5)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천국 이외의 어떤 곳에 물질적으로 위치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인 만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은 물질적 요소들 안에 현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다만 빵과 포도주가 영해질 때 성령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 영양분이 참으로 현존한다(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 2 참조)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성체성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실제 현존에 대한 그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이 성령을 통해서 현존한다는 그의 생각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을 말했고 칼뱅은 성사 안에서의 강하게 해주시고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했다. 그러나 울리히 츠빙글리 같은 사람은 성체성사 안에서 신성한 현존을 순전히 정신적이거나 심리학적인 현존으로 해석했다. 그는 주님의 만찬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최후 만찬, 수난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기념의식으로 보았다. 그는 이 기념 의식에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빵과 포도주를 사용 하지만 그것들은 최후 만찬에서의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도 그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봉헌될 몸과 피를 뜻하는 빵과 포도주로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는 성체성사는 실제로 단순한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물질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참아 받으신 것에 대한 회상으로 그것을 감지해야 한다고 했다 (De vera et falsa religione Ⅱ 참조).

트리엔트공의회는 제 13회기 (1551년 10월)에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성체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들을 단죄하고 실체변화 교리를 교의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교의가 성체성사에 관한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으로 상세한 설명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특히 DS 1642.1651-1652의 성체성사교령 1-2항). 그래서 설명이 부족한 이 교의에 대항하기 위해 루터파 교회들은 1577년의 「일치신조서」로써 루터의 표현이 그대로 들어있는 성찬의 선물 '안에서'(in), 그것과 '더불어' (cum), 또 그 형상 '아래서'(sub) 그리스도의 몸이 신앙인들에게 주어진다는 신앙고백 양식을 수립했다. (solida declaratio Ⅶ)


2. 성체 논쟁의 결과와 추이

문서화를 통한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완화되지 않은 상태에 이르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에 공포한 회칙에서 트리엔트공의회의 가르침을 재강조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가톨릭 교회 내에서조차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평이한 만남을 위한 어떤 발판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안에서의 현존에 관한 공통된 이해일 것이다. 양자는 그 현존을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인 현존으로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양자는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주는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성사에 고유하게 주어진 구원의 선물 자체로서도 현존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견해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실체'와 '우유'라는 식의 '사물적' 표현들은 오늘날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기면서 전통적인 '실재론'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 좀더 적중한 말로 표현해 보고자 힘쓰고 있는 중이다.


3. 맺는 말

1215년 제 4차 라테라노공의회가 "빵과 포도주는 신적 힘에 의해 몸과 피로 실체변화된다."(DS 802)고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실체변화'라는 신학적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초대교회 이래 믿고 있었던 바와 같이 성체성사 안에서의 '변화'라는 사실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빵에 대하여 "이는 내 몸"이라 하고 포도주에 대하여 "이는 내 피"라고 하신 말씀이 참인 이상, 빵과 포도주가 겉으로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로 보이더라도 결국 빵은 이미 빵이 아니고 포도주도 이미 포도주가 아니라는 것 곧 성체성사 제정의 말씀이 사제를 통하여 발설 될 때 '실체'인 빵과 포도주의 본질적인 존재는 '변하고' 한편 '우유'인 외적으로 나타나는 형식들-물리·화학적 구조들-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데 아퀴노, 요한 둔스 스코투스, 윌리암 오캄 등도 그러한 의미에서의 '실체변화'로서의 성체성사의 현존방식이라는 교리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였고 트리엔트공의회가 제 13회기 (1551년 10월)에서 비록 성체성사에 관한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으로 상세한 설명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성체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들을 단죄하고 실체변화 교리를 교의로 선포했던 것(특히 DS 1642. 1651-1652의 성체성사교령 1-2항)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도 1965년에 공포한 회칙 「신앙의 신비」에서 자연스럽게 트리엔트공의회의 가르침을 재강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평이한 만남을 위한 발판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안에서의 현존에 관한 공통된 이해인데 양자는 사실상 그 현존을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인 현존으로 좀더 깊이 이해하기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주는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성사에 고유하게 주어진 구원의 선물 자체로서도 현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견해를 함께하고 있는 중이다. 말하자면 과거에 활용되었던 '실체'와 '우유'라는 식의 '사물적' 표현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기면서 전통적인 '실제론'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좀더 적중한 말로 표현해 보고자 힘쓰고 있는 중인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언제나 체험하는 '기적'은 신앙의 눈으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건'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빵과 포도주'만이 보일 뿐이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비록 형상이야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보이는 것이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어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시면서 끊임 없이 '신앙'을 강조하신 이유, 교회가 전통적으로 성사를 '신앙의 성사'라고 설명해 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매일매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성사 안에서의 기적'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힘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을 일치하게 해주시는 힘이신 분이다. 한마디로 구분은 일치의 영이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또한 일치의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기적사건이자 일치 자체를 체험하게 하는 사건인 것이다. 3)

3)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을 주시는 주님』, 62항 참조
 

신앙의 내용과 실천적 행위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은 애초부터 병행되어 왔다. 기적과 그에 대한 설명은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일어나는 실체변화, 곧 실체변화라는 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되는 기적은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과 함께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다. 한마디로 기적은 언제나 신학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4)

4)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것을 체험한 이들의 신학적인 설명으로 되어있다. 교회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정점으로 한 신. 구약의 구원사건을 현재화 시키기 위해 신학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시대적 언어로 설명해 온 역사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위험시하는 일방적인 '근본주의', '초월주의', '신비주의'라든지 '신학우선주의'는 정통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과 아성은 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제 1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3-4항: DS 1790(3009). 1796(3016)참조]
 

끝으로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의 공지' 를 통해서 교도권자인 윤공희 대주교가 진실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른바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관련된 ..... 현상들에 매료되어 신앙의 일치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월간 사목 1998년 3월호)

 


 


성체 도리에 대한 리순성 신부님의 글을 읽고서

 

광주 가톨릭 대학교 교수이시며, 나주 심사 위원회 위원이신 리순성 신부님께서 "사목" 1998년 3월호에 "천주교 광주 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 성사의 실체 변화'에 대한 이해"라는 글을 발표하셨다. 윤 대주교님의 공지문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판정하신데 대한 신학자로서의 그리고 조사 위원으로서의 설명이라는 점과 이 글이 한국 전체 주교회의 기관지에 실렸다는 점에서 리 신부님의 글은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자들의 깊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리 신부님의 글의 초점은 성체 성사의 핵심 사항인 "실체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으며, 지금까지 나주에서 일어났던 성체가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하는 현상들은 리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실체 변화"에 대한 설명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공지문 상의 발표 내용이 옳았다라는 뜻이다.

신부님께서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하고 혼란스럽게 느끼고 있는 점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신부님의 설명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이에 대해 많은 성직자들 및 신자들과 함께 걱정하고 기도하고 토론하자는 취지에서 이 글을 쓰는 바이다.

먼저 리 신부님께서는 과거 2천년 간의 교회 역사 상에 있었던 성체 성사에 관한 구구한 설들, 그 중의 상당수가 이미 교회에 의해서 이단설로 판단되었던 주장들을 소개하고 계신다. 과거의 이단들, 성체 성사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한 수많은 이단설들을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유익할 수 있다.

이단설들에 대해 앎으로써 우리가 진리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이단설들의 소개가 성체 성사에 대하여 갖가지 주장들이 있어 왔고 또 지금도 있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하나가 확정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보기는 힘든다든지 또는 성체 성사에 대해서는 아직 확고한 진리가 정의(定義)되어 있지 않고 지금도 신학자들의 연구가 계속 중이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라면, 이는 이(利)보다는 해(害)가 더 많은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갖가지 이설들이 있었던 사안은 성체 성사만이 아니다. 교회 초기부터 하느님께 대하여, 삼위 일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 대하여, 성모님께 대하여, 은총에 대하여, 성사들에 대하여, 사제직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성서와 성전에 대하여, 대사(大赦)에 대하여, 원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기타 많은 신앙 상의 중요 사항들에 대하여 온갖 설과 주장들이 등장해 왔다. 때로는 그러한 주장들이 수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어 성교회와 대항하며, 교회에 순명하는 이들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설들에 대하여, 성교회에서는 타협이나 종합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교도권에 의해서 그리고 천주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확실한 진리를 밝히고 오류들을 배척하여 왔다. 하느님의 속성(屬性)은 완전한 진리이시며, 완전한 단순하심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는 사항들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도께서 그냥 인간이실 뿐인데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고 하는 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쯤에 위치하는 분이라는 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성부께 의해서 창조되셨다는 설,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로부터 나셨지만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등하신, 완전하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가르침 이 모두가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서로 상치되는 이 모든 설들을 수용하여 모든 이들을 함께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종합적인 진리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라 타협이고 진리에의 배반일 것이다.

리 신부님께서는 교도권 발동의 목적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안에 대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성체 성사에 대한 신부님의 주장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신학적 일치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일치를 위한 일치는 진리의 양보를 필수적으로 수반하게 되므로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평화, 일치를 위한 일치를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으며 (마테오 10:34-36; 루까 12:49:53), 당신께서 성체 성사에 대한 가르치심을 주셨을 때에도 이를 모질다고 하며 떠나가는 많은 이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다시 불러 당신의 가르치심을 양보하시기보다는 당신의 열두 제자들에게까지도 물러가겠느냐고 다그치셨다 (요한 6:26-69).

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나는 이 세상에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 18:37), 오류와 타협하여 세속 및 인간적인 사고 방식과의 일치를 이루기보다는 진리를 지키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성체 성사의 "실체 변화"에 대하여 리 신부님께서 설명하시는 핵심은 "성체 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어떤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인 현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제의 축성에 의해 면병과 포도주가 그 외양만 남고 실체가 완전히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하며, 이 살과 피가 죽어 있는 살과 피가 아니라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므로 필연적으로 주님의 영혼과 신성이 함께 계신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실체의 변화는 덮어두고, 그냥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으로 현존하신다라고 하는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거듭하여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도, 실제로는 이의 변경을 주장하고 계시며, 개신교의 주장에 적응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실체 변화 없이 인격적인 현존만 있다라고 하는 말은 결국 영적인 현존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신부님께서는 "루터는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을 말했고,"라고 언급하심으로서 그의 주장에 동조하심을 암시하고 계시며, 또 "성체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평이한 만남을 위한 발판이 됨"을 밝히심으로써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성체 도리를 양보하실 것임을 뜻하고 계신다.

또 신부님께서는 "실체"와 "우유성 (偶有性)"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설명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시면서, 성체 성사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설들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적당한 표현을 해보고자 힘쓰고 있다고 하셨다. 리 신부님께서는 성체 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인격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덧붙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안에서 구원을 주는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성사에 고유하게 주어진 구원의 선물 자체로서도 현존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구원의 선물 자체로서의 그리스도"란 개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계시지만, 아마도 성체 성사 안의 그리스도의 실체적 현존의 대안으로서 말씀하고 계시는 듯하다.

그러나,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체적 현존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한 것이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극구 피하려고 하시는 것을 보아서 그 개념이 교회의 가르침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개신교와의 일치, 가톨릭 안에서의 일치라는 대전제 하에 신학적인 접근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지만, 잘 고찰해보면, 신부님의 주장은 결국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변경하는 것이며, 개신교의 주장에 흡수되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 진리의 보다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신학적인 탐구와 설명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우신 가톨릭 교회는 학자들의 새로운 학설들과 주장들의 토대 위에 서있지는 않으며, 주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맡겨져 있고 성령의 보호하심에 의하여 오류없이 전해지고 있는 계시 진리와 이를 지키는 교도권 위에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계시 진리와 교도권에 신학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이 순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학적인 탐구가 진리에의 봉사라고 하는 고유 영역을 넘어서 교리를 변조하고 새로운 정의(定義)을 내리려고 한다면 이는 신학의 탈선이고 오만이다.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면병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교회에서 확실히 정의된 교리인데 (트렌트 공의회 (DS 884)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4),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보다 진보적인, 개신교적인 정의로써 이를 대체하려고 하신다면, 이는 또 하나의 이설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리 신부님의 성체 성사에 대한 새로운 설명은 같은 개념을 새로운 용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념 자체의 변조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며, 교도권에 의해 심사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어찌하여 성체 성사에 대하여 이처럼 끈질기게 구구한 이설들이 많은 것일까?

거기에는 매우 심각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천주 성자께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심으로써 하느님의 육화(肉化) 즉 강생(降生)이 이루어졌다. 즉,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성을 취하시어 인간 세상에서 실제로 거처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이는 엄청난 사실로써,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와 인간의 자연적인 세계가 연결됨을 뜻한다.

사실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이미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에와에게 초성 은총을 부여하심으로써 그러한 연결이 이루어져 있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그 연결이 끊어졌던 것을, 다시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시고 수난하심으로써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그 연결이 회복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성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영원히 하느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태오 7:21).

그런데, 한 사람이라도 더 멸망되기를 원하는 마귀는 하느님께서 인간 세계에 육화하여 계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오고 있다. 2천년 전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몰라보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여 성부 오른 편에 앉으셨다. 동시에 몸소 세우신 지상의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육화의 현실과 구원의 역사(役事)를 계속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우리는 12 사도가 모셨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실제로 모실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치심을 받을 수 있고, 그분께서 이루신 보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귀는 인간들이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못알아보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성체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육화의 현실이 실제로 지속되고 있음을 인간들이 믿지 못하게끔 한다. 육화되신 천주 성자와 인간들 사이의 실제적인 만남을 막으려는 것이다.

교회에 하느님의 완전한 진리가 위탁되어 있으며, 이를 오류없이 가르치기 위한 교도권이 주어져 있음에 대해서도 이를 조소하고 불복하게끔 한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재현이며 말할 수 없이 큰 은총의 보고(寶庫)인 미사 성제를 소홀히 하게끔 한다.

고해 성사에서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죄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하며, 죄의 개념 자체까지 모호하게 하여 양심의 둔화를 촉진시킨다. 또 천주 성자의 육화 및 아기 예수의 성장과 보호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영적인 성장과 보호를 위하여 필수적인 역할을 하시는 성모님의 존재를 무시하게끔 한다.

하느님의 육화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성모님을 부정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마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자아 포기와 애덕의 실천을 모범으로 보여준 성인 성녀들도 망각하게 하며, 성인들과 천사들의 전구(轉求)에 대한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끔 한다. 연옥에서 혹독한 고통을 받으며 정화되는 영혼들을 기도와 선행으로써 도와야 하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육화가 구원의 복음의 토대임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차이점들에 대해서도 모호해지게 하며,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게끔 한다. 세상 끝날까지 지속되는 하느님의 육화의 현실을 증거하는 곳은 가톨릭 교회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한다.

결국은 계시 진리 전반에 대한 모든 것이 모호하게 되게끔 이끈다. 요한 사도께서도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영을 신뢰하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하는지를 시험해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나가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음의 기준으로 하느님의 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되어 오셨다라고 증언하는 영은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요한 1서 4:1-2)라고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육화하여 계심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진리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며 척도임을 알려주고 계신다.

범죄한 인간이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천주 성자께서는 당신의 천주성을 그대로 지니시면서 동시에 인간성, 즉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취하셔서 우리 가운데 실제로 거하셨으며, 우리 인간의 삶을 살으시고, 인생의 희비애락을 겪으시고 보속을 바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육화의 현실은 당신이 세우신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실제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가 무엇인가 정의하자면 바로 그리스도의 육화의 지속이며, 그 교회의 활동은 육화되신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주님의 몸이신 이 가톨릭 교회의 핵심 사항인 성체 성사의 진리를 줄기차게 공격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의 실제적인 현존으로부터 유래되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리 신부님께서는 이번의 공지문에서 언급된 성체 성사에서의 "실체 변화"라는 용어의 신학적 개념을 신자들이 제대로 알아들어야 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결국은 이번에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이 부정된 이유는 이 기적들이 성체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이 새로운 신학에 어긋난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새로운 신학에 의하면, 성체 안에서의 예수님의 현존은 어떤 사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적인 현존 즉 영적인 현존만을 뜻하는 것이어야 하며, 기껏 더해야 애매한 개념인 "구원의 선물 자체로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뜻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리 신부님의 신학적 설명을 통하여 이번의 나주 성모님께 대한 부정적 판단이 어떤 근거에서 유래된 것인지에 대한 보다 확실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다른 글들("나주 성모님 관련 공지문을 읽고서" 및 "나주 성모님께 관한 의견")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이번 공지문에는 성체 성사에 관한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나주에서 일어난 일들" 즉, 메시지, 성체 기적들, 눈물과 피눈물, 향유, 성흔, 병의 치유 등의 사실들과 이들에 대한 많은 이들의 증언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부정적인 판단이 내려졌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주에서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위탁하신 참된 계시 진리에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고 계신다. 참된 진리, 전통적인 신심, 진실된 겸손에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의 현상태는 어떠한가?
우리는 세속의 정신과 타협되어 안일주의에 빠져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과연 주님의 진리와 계명에 의거하여 오류와 죄악들에 대항하여 힘껏 싸워야 하며, 세상에 진리와 사랑과 믿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선교사 및 순교자의 정신으로 활동해야 할 의무를 잊고 있지는 않은가?

특히. 교황님들과 공의회들을 통하여 주옥같이 귀중한 진리의 설명들이 주어졌다. 그런데 교황님들께서와 공의회들에서 거듭 확인해주신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들과 신심들을 희석시켜가면서까지 현대화와 개신교와의 일치라는 미명하에 많은 신자들의 희망과는 무관하게 여러 불필요한 조치들을 취해오지는 않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가 나주를 통한 하느님의 경고와 격려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에 대해 거부감과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억지로 누르며, 게다가 이를 새로운 신학으로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모쪼록 이번 일들을 계기로 우리 모두가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다시 살펴보고, 겸손되이 하느님께 은총의 빛과 자비하심을 무릎꿇고 간청함으로써 우리 개인들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새로운 생명력으로 약동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분도
P.O. Box 166
Gresham, Oregon, U. S. A.
1998년 3월 11일

 
 



'성령과 교회의 관계'의 주요 발췌문

 

광주 가톨릭 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리 순성 신부님께서는 "신학전망(神學 展望)"지 1998년 봄호에 "성령과 교회의 관계: 성령의 해를 위한 소고(小考)"라는 글을 기고하셨다. 그 글은 15 페이지나 되는 상당히 긴 글이므로 그 주요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발췌해 본다.

"하느님의 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루아흐(註: 구약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담을 창조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을 행사한다. 그 숨결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살아있게 하는 생명의 원천으로도 기능한다."

"그 루아흐의 생명력은 자연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통제받지 않는 신비스러운 것이다. 루아흐는 오히려 자연을 위한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이렇게 바람이라는 표상 안에서 파악되는 루아흐의 실재, 즉 하느님의 루아흐는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창조자의 힘, 하느님의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루아흐와 하느님의 말씀은 필연적으로 결합된 상태에서 일치, 작용하는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와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또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 벨라르민 (Robertus Bellarminus, 註: 리 신부님께서는 성 벨라르민을 그냥 벨라르민이라고 부르신다)의 신학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정되었고 그분이 규정해주신 기능들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는데, 그 실행에 있어서 요체는 교계제도이고 성령은 교회가 교계제도를 통해서 행하는 것을 입증해주고 거룩하게 해주며 그렇게 행하는 교회에 힘과 권위를 더해주기 위해 들어오신다. 한마디로 교회가 무엇이든지 규정하고 행하는 것은 곧 성령의 덕분이라는 것이다. (註: 리 신부님께서는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즉 교리까지를 "규정"이라고 부르신다.)  이러한 신학에 젖어있게 되면, 그 결과는 엄청난 오해를 초래하게 된다. 실제로는 인간이 작정하고 실행한 행동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보증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즉 일은 인간이 저지르고 그 책임을 성령께 지우는 꼴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교회는 그러한 신학의 영향을 받아왔다. 따라서 만일 그러한 신학의 영향력에서 해방되지 않는 상태에서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말한다면 성령은 교회의 창조자나 창설자도 아니고 교회가 결정하고 행하는 일들의 원인도 아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그러한 교회에 계시지 않는다. 교회로서는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 성령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이야말로 틀림없는 교회의 창조자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벨라르민 같은 이들의 신학과 특히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에 따라서가 아니라 바로 계시에 근거한 것이다."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대체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신적으로 우위의 실재라고 말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히 채우신 분이라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성령께서는 먼저 사도들을 만들고 이어서 그들을 통하여 공동체를 만드신다. 그 공동체들은 요즈음 식으로 사도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배우는 학생들의 공동체도 아니고 교회조직 안에 입문했다는 표시를 부여받는 신참들의 무리도 아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실재를 체험한다. 하나 하나의 공동체는 성령께 대한 체험을 함께 가지는 백성을 통해서 생성된다."

"루가의 성서는 교회가 직접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죽게 될 그분의 생애 중의 활동을 통해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결국 교회의 기원을 마련하셨던 분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의 실재로 체험했고 그로 인해서 살게 된 성령이셨던 것이다."

"만일 신비체에 대한 규정만으로 교회를 이해하려 한다면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말할 여지가 별로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의 목적은 성령의 오심과 모든 육 위에 성령의 부으심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의 통교를 통하여 죽어야 할 모든 존재들이 생동하게 하는 것, 영원한 빛 속에서 그들을 변형시켜 하느님의 포괄적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령의 역사의 목적은 모든 것들을 영원한 영광을 향하여 종말론적으로 회복시켜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다. 요컨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통교는 본질적으로 창조의 근원인 동시에 목적인 것이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을 드러내고 체험하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가 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맺는 관계이며 그래서 교회는 생명을 주시는 영의 표지이며 도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성령의 활동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 성령은 교회에 묶이지 않는다는 것. 성령께 중요한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교회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 생명의 다시 태어남, 모든 사물의 새 창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활동은 교회의 활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불고 싶으신대로 분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이 불고 싶으신대로 부는 곳을 따라가야 하고 그 따름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도교회라 하며 비난하는 그 제도교회로 있는 것을 더 편안해 하는 실재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직자 중심주의라고 규탄하는 그 위계질서를 고집해야만 되는 그러한 계급사회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군주적 독재주의로서 비교회적이라 하며 예언적으로 질타하는 그 체제만을 고수하는 단체가 아니다. 만일 교회가 여전히 그러한 교회이기를 고집한다면 그러한 교회의 행태가 가장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전형적인 것이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성령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 성령의 활동, 즉 창조력과 생명력 그리고 생동력과 인도력을 가로막는 행태, 그리하여 진리를 왜곡하게 하는 행태로 인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제 삼천년기에는 교회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성령께만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상 리 순성 신부님의 글에서)

 


리 순성 신부님의 '성령과 교회의 관계'를 읽고서

 

신학의 연구는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하느님께로부터의 계시 진리를 보다 깊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기 위하여 폭넓은 사색, 고찰, 논리 및 추측까지 동원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계시 진리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개개인들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세우신 성교회에 맡기시고 그 교회 안의 교도권에 의해 오류없이 전승되기를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의 연구에는 항상 교회의 가르침에 사랑으로 순종하는 마음과,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천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겸손한 자세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신학의 연구는 하느님께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머리로부터 나오는 개념과 주장들이 마치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행세하게 하며, 이로 인하여 참다운 진리를 오히려 가리우게 되고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되기 쉬울 것이다.

특히 리 순성 신부님께서는 미래의 사제들을 길러내는 신학교의 교수이시며, 광주 대교구의 나주 심사 위원회 총무로 계신다. 리 신부님께서는 이미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 산하 기관지인 "사목(司牧)"지 1998년 3월호에 "천주교 광주 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 성사의 실체 변화'에 대한 이해"라는 글을 기고하셔서 광주 대주교님께서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을 부정하신 데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해주신 바 있다.

그 글에서 리 신부님께서는 "성체 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어떤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인 현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며, 이러한 이해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일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첨가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체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기보다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현존을 뜻한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은 인정될 수 없었다라는 말씀이다.

리 신부님의 이러한 주장은 교회의 가르침과는 명백히 상치되며, 개신교와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를 양보하는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헌장 (Unitatis Redintegratio)"의 내용과도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이다. 이 헌장에서 공의회의 교부들께서는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해치고 그 정확한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거짓 평화주의처럼 일치 운동의 정신에서 먼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
성체 성사에 대한 리 신부님의 이러한 놀라운 주장은 아마도 단지 성체 성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계시 진리 전반에 대한 어떤 특이한 개념의 기본틀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며, 특히 이번의 "성령과 교회의 관계"라는 새 글을 통하여 이러한 의문이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하는 슬픈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글들이 이미 공적으로 발표된 이상 이미 리 신부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교회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므로 이를 공론화하여 잘못된 사상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또 그 잘못들이 하루 속히 시정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어디까지나 최종적인 분별은 교황님과 주교님들께서 해주실 것이며 모든 신자들은 이에 전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따라야 할 것이다.

리 신부님의 새 성령 신학의 문제점들

천주 성령께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열절히 구할 수 있도록 계몽하는 것은 어지러운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보다는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는 이질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리 신부님께서는 특히 구약 성서의 구절들에 의거하여 성령께서는 만물의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강조하시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새로운 교회론을 전개하신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우주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교회에 생명을 주는 교회의 창조자이시며, 교회에 계속적으로 생동력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결론을 유도하신다. 그리고, 교회 및 그 안의 성사들은 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표지이며 도구이라고 선언하신다.

리 신부님의 글에서 들어나는 문제점들을 간추려본다.

1. 리 신부님께서는 성령께서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펴시면서, 피조물의 자연적인 생명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상실하게 되는 것은 초자연적인 생명 즉 성화은총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은 초자연적인 생명과 결합됨으로써 비로소 죽음을 초월하고 성화되어 하느님의 영원하신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설명이 없이 모든 생명력을 함께 취급한다면 계시 진리를 바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세계와 자연적인 피조물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서는 천주 성자의 육화(肉化)를 통한 초자연적인 세계와 자연적인 인간의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구세주의 수난을 통한 인류의 구속,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간들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에로 들어올려지고 결합된다는 하느님의 인류 창조와 구원의 섭리를 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 리 신부님께서는 공동체인 교회가 성령께만 순명함으로써 생명력과 생동력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 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생명력과 생동력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께 순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 문장 자체로만 보면 하자가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인간이 초성 생명을 잃은 것이 자유 의지의 오용 즉 범죄였다는 사실이 명시되지 않은 가운데에서 이러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게 된 것은 그들의 죄에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죄를 보속하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임이 얼버무려져서는 안된다. 뿐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해야하는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의 삶이란 바로 이 선택의 기로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자유 의지를 바로 사용하여, 영과 육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인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끔 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중에서 잘못과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늘 반성하고 뉘우치고 보속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겸손 즉 자아 포기와 사랑 안에서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즉 더욱 작은 자가 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이러한 사실을 뛰어넘어서 단순히 성령의 생명력에만 집착하려는 것은 신앙을 추상화하기 쉽고 신앙과 우리 실제 생활의 괴리(乖離)를 초래하기 쉽다.

3.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간과됨으로 인해서 천주 성자께서 육화(肉化) 즉 영혼과 육신을 함께 가진 우리 인간 세계에 강생하시어 수난하시는 것이 필요했다는 사실 역시 명시되지 않고 있다.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것은 믿을 교리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DS 1521). 왜냐 하면, 인간의 범죄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거스리는 것이므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무한한 죄를 상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자신, 즉 천주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시어 우리 사이에 내려오셔서 우리 대신 보속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부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유의지로써 성자를 구세주로 보내시고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진리를 계시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셨으며, 드디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라는 사실과 이러한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원의 신비가 교회를 통하여 계속된다고 하는 사실이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인류 구원 계획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심 흐름에서 벗어나서는 구원을 논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논할 수도 없으며, 천주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을 논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를 받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의화(義化)될 수 없다,"라고 교회는 선언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DS 1530). 그리고, 성 요한께서는 참된 구원의 복음과 거짓 복음을 구별하는 대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영들인지 시험해 보시오. 사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여 오셨다고 증거하는 모든 영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관해 그렇게 고백하지 않는 모든 영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反)그리스도의 영입니다." (1요한 4:1-3)

리 신부님의 주장은 육화되어 수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기보다는 "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증거하심으로써 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으며, 성령께만 의지하는 새로운 설(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리스도의 강생의 현실과 구속 활동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설립하신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을 영혼으로 하여 살아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비난되고 있다.

교회를 통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여 세우신 무한한 가치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간과되고 있다. 바로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어 얻어내신,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며,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그리스도의 늑방으로부터 성혈과 물이 흘러내림으로써 교회가 탄생되었으며,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시고 우리를 성화하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어 세우신 공로에 필수적으로 기인된다는 것을 잊고, 단지 성령께서 "자연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통제받지 않고,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생명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력을 주지 않으실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교리이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 3050),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 (Mystici Corporis Christi)"에서 이를 재확인하신 바이다. 리 신부님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가르치심을 거부하고 계신다.

5. 리 신부님께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와 권위와 사명을 지닌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신비체임을 무시한 결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세우신 성직자 제도 및 교도권을 부정하고 계신다. 이와 아울러 공동체인 교회는 단지 성령께만 순명해야 된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리 신부님의 주장은 개신교의 주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고, 성령 운동 사상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에 교계제도를 부정했던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 대항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가톨릭 교회 안에는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교계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신덕 도리로 선언하셨다 (DS 1776). 그리고 성 비오 10세께서는 교회의 교계제도가 역사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는 현대주의의자들의 주장을 단죄하셨다 (DS 3454). 나주 조사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거하여 광주 대교구 교구장의 교도권으로 나주 성모님께 관한 부정적인 판단이 내려졌다. 그런데 바로 그 위원회의 총무로 계시며 공지문의 신학적 뒷받침을 하신 신부님께서 교회의 교계제도와 교도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글을 발표하신 것이다. 심지어는 "교계제도에 의지하는 교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다,"라고까지 하셨다. 이것은 지나친 모순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가 개인 자유주의 위에 서있는 개신교와 같을 수도 없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필연적인 관계를 떠나서 성령과의 직접 교통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성령 운동과 같을 수도 없다. 엄연히 주님의 교회 안에는 주님의 현존이 계시며, 완전한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오류없이 설명하고 가르치는 교도권이 있으며, 죄를 사해주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권위가 있으며, 기타 인간들에게 필요한 은총들을 내려주는 성사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의 사실에 의거해서 완덕에 이르신 수많은 성인들이 계신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와 실질적으로 동일한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천주 성령께서는 그 교회의 영혼으로서, 진리의 영, 정의의 영, 사랑의 영으로서, 항상 우리를 교회에로, 진리에로, 정의에로, 사랑에로, 겸손에로, 치유에로 이끄시며, 오류와 박해 앞에서 굴하지 않고 주님과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용덕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증거하고 계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인도하여 주신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나, 하나의 완전한 신성을 공유하심으로써 항상 함께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업과 교회를 통한 성령의 성화 활동은 하나인 것이다.

6. 천주 성자의 강생의 도리가 존중되지 않는 곳에는 성모님이 거치장스런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다. 왜냐 하면, 천주 성자의 강생과 성모님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도 구세주를 보내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그래서, 가브리엘 대천사를 보내시어 준비된 하느님의 여종, 동정녀 마리아의 동의를 먼저 구하신 후에 천주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리스도의 잉태, 즉 천주 성자의 강생이 이루어졌다. 성모님의 역할은 단지 구세주의 잉태와 탄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장과 그 일생 전체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시각까지도, 가장 가까운 동반자 및 협력자가 되셨다. 성모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그리스도의 현존이 있기 마련이며, 성모님의 활동이 있는 곳에는 곧 예수님의 승리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성모님은 천주 성자의 강생의 길이시며,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의 동반자이시며 협력자이시다. 두 분은 항상 일치되어 계신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시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다. 우리가 성모님을 사랑하고 따른다는 것은 곧 우리가 강생하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따르겠다고 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친밀한 증거가 된다. 우리가 성모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하고 따를수록,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와 충성이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런데, 나주 성모님께 대한 부정적 판단의 밑바탕이 된 신학 안에서 우리는 성모 신심이나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의 올바른 이해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함께 가는 것이다.

현재 많은 이들이 나주 성모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그들이 천주 성자의 강생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천주 성자의 육화(肉化)와 수난의 사실과 이 사실이 교회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저 하는 이는 자기를 끊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오 16:24),"라고 하신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나주에서 끊임없이 자아 포기와 희생과 보속과 사랑을 강조하시는 성모님의 메시지 말씀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며, 교만과 불신 속에서 헤어나기를 거부하며 방황하는 수많은 자녀들을 생각하시며 끊임없이 흘리시는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거의 하루도 쉬지 못하고 심한 고통을 받으며 이를 봉헌하고 있는 율리아 자매의 생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목 사업을 계속하고 계시는 성직자들의 성성(聖性)을 강조하시고 그들이 신앙의 유산에 충실하며 교황님께 충성할 것을 애타게 요구하시는 이유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따르라는 것이 성모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체와 성혈이 단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신성과 영혼과 살과 피를 가지신 살아계신 완전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거듭 거듭 성체의 기적을 주시는 것을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현상"이라고 배척하지 않고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고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전승하여 주시는 영원한 구원의 진리에 대한 이해와 나주에서의 일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함께 가는 것이며,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세속화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바로 잡고, 전체 교회가 다시 불타는 선교사와 순교자의 열정과 순수함으로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천주 성령의 이끄심을 가장 충실히 따르는 길이 될 것이다.

Mary's Touch By Mail
P.O. Box 1668
Gresham, OR 97030 U. S. A.
1998년 4월 9일, 성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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