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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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3일

성모님 상의 향유
 

나는 백 용수(마태오) 신부님의 은경축 기념 미사에 참석하였다. 백 신부님은 10여년 전 월산동 본당 재직시 위를 절반 이상 절단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후두염이 생겨 지금까지도 먹지를 못한다. 미음을 빨대로 조금씩 목으로 넘기는데 잘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목을 맛사지 하기 위하여 밤중에도 일어나 2시간씩 목 맛사지를 해야만 하는 고난의 삶을 살고 계신다. "삶과 죽음은 백짓장 차이라 하는데 이렇듯 고래 심줄처럼 질긴 삶을 체험한다"고 백 신부님은 고백한다.

어느 교우 부부가 이혼하기로 하고 신부님에게 인사하러 왔단다. "너희들은 행복에 겨워 이혼하려는구나. 나는 밥 한 숟갈에다 김치 한 가닥 얹어 먹는 게 소원이다" 라고 호통을 쳤더니 그들은 다시 화해하고 지금은 잘 산다고 한다.

나는 신부님이 쓰신 책 한 권을 기념으로 선물 받았는데 은경축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에게 한 권씩 선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오후에는 나주 성모님을 뵈러 경당에 갔었다. 눈물을 흘리신 성모님 상 머리 위에서 향유가 흘러내린다는 루비노 형제의 말을 듣고 경당에 모셔진 성모님 상을 보고 확인하였다.

머리 위와 뒤, 두 곳에서 투명한 기름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장미 향기가 성모님 상 전체에서 풍겨나왔다.   

 

1991년 10월 17일

죽음의 의미
 

오 갑윤(안토니오) 형제가 주님의 품안에 들게 되었다.

이 형제는 계림동 본당에서 내가 영세를 주었는데 10여년 동안 부인의 반신불수를 고쳐보려고 무척 노력했으며 그녀에게 늘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 안정을 주려고 심혈을 기울이며 살았던 어진 형제였는데 그의 죽음은 주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부인 때문에 빨리 왔는지도 모르겠다.

전대 병원에 입원 중일 때 봉성체 해 주면서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주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형제에게 죽음을 준비하라고 말하며 순교자처럼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다. 오늘 장례미사 강론 중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나 그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생명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란 점에서 크리스찬적 죽음은 희망적이며 밝은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란 제1의 모습(형태)은 사라지나 제2의 모습(육체의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창조주의 선물이라 할 것이다.

형제여, 먼저 가시오! 우리는 뒤따라가리니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1991년 10월 18일

세계로 퍼져 나가는 나주성모님
 

율리오 부부는 20여일 동안의 여정을 통해 나주 성모님의 말씀을 전하며 많은 교포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회는 지금 그 곳 성직자들의 사생할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들으며 마음 아파한 율리아 자매의 보고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모님은 사제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많이 바치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번 미국 방문은 나주 성모님 메시지의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으며 다음에는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서 많은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가 곧 올 것으로 확신한다.

20세기 세계 성모님 발현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느낀 것은 세계의 다른 성지의 발현에 대해서는 주교들이나 성직자가 증언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 한국 나주는 평신도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천주 교회가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것처럼 한국 나주 성모님도 이름 없는 한 여인이며 주부요, 어머니인 평신도를 통해 일하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주교님과 성직자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나주는 조심스럽게 세계 속의 성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성모 성심의 승리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