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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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27일

교황 대사님,  나주에 대하여 교황님께 보고하시다.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해마다 모이는 작은 영혼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18일 율리아, 루비노와 함께 안양에 갔었으나 율리아의 고통으로 참석치 못하였다.

왜냐하면 갑자기 정신까지 혼미해진다고 하더니 쓰러져 파 신부님과 함께 중앙 병원 응급실에 데리고 가서 엑스레이(X-Ray)와 CT촬영을 해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CT 촬영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율리아 자매는 평상시 저혈압 일 정도로 낮았던 혈압 수치가 갑자기 185-120까지 오른 것은 분명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CT 촬영을 해 본 것이다. 혈압이 떨어지지 않아 중환자실에 입원 치료하였으나 30분 이상을 숨을 쉬지 않고 입술마저 시퍼렇게 되니 우리 모두는 놀랐는데 그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정신이 들어 퇴원을 하였다. 다음 날 광주에 내려가 남광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MRI를 찍어 검사해 보라고하여 그대로 했으나 이상이 없다고 한다.

율리아 자매는 특히 사순절에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기 위하여 고통을 기쁘게 봉헌하고 있기에 본인은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걱정이 된 옆의 형제 자매들이 데리고 가니 애덕으로 순명한다고 했다. 특히 지금 교황님의 질병과 고통을 위해 모든 고통들을 봉헌한다고 하니 부디 교황님의 쾌유를 빈다.

지난 11일 한국 교황 대사인 죠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님께서 교황님을 뵙고 한 시간 동안 나주에 대해서 보고하셨다 한다. 그 때 교황님은 몸이 몹시 쇠잔하시어 듣기만 하셨기에 의사가 잘 전달됐는지 걱정이되지만 교황청에서 한국 주교단과의 만찬 시간에 교황님께서 나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 교황 대사님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먼저 귀국하셨는데 그 소식을 듣고 만족해 하시고 기뻐하셨다 한다. 나주의 일이 잘 되리라고 확신하며 나주의 성모님이 전 세계에 인정받는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1996년 4월 17일

인도네시아 여행

 

부활 휴가로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인도네시아에 다녀왔다. 함께 동행했던 최 홍 형제의 동창이 그 곳에 살고 있기에 한 웅현(힐라리오) 가족과 함께 좋은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7시간이 걸려 JAKARTA에 도착, 숙소인 시티 호텔로 가는데 러시아워에 걸려 아스팔트가 아닌 비포장 도로로 가게 되었기에 인도네시아의 후진면을 다 볼 수 있었다. 수도인데도 뒷골목에는 전기가 없어 가스등을 켜고 있었다. 다음 날 노천 온천에 가기 위해 새마을호와 비슷한 특급 열차로 Bandung까지 3시간을 가면서 열대의 아름다운 나무들과 시골의 풍경을 감상할 수가 있었다.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시 몇 수가 나왔을 것이다. 반둥 역에 도착하니 우리를 안내하고자 정 아우구스띠누스와 함께 사업하는 형제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 앞좌석에 내가 타게 되었는데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내가 탄 차가 사고가 났다. 100km 이상 속력으로 내려 가는데 올라오는 차 몇 대가 보이더니 갑자기 뒷차가 추월하려는 순간 펑하는 큰 소리와 함께 우리 차 앞바퀴가 펑크가 났으나 성모님께서 받아주시어 내가 탄 차는 아무 손상 없이 그대로 멈추어 섰다. 차 왼 쪽 옆에는 좀 패어진 고랑이 있었는데 그 쪽으로 박혔으면 대형 사고가 날 뻔하였다. 앞 후렌다가 벌어져 다른 차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가 회개하도록 시간을 주시는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일행 중에 오랫동안 냉담했던 교우가 고해 성사를 보았다. 그 다음 날은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Surabaya로 비행하였다. 안내한 형제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그 집을 축성해 주었으며 부인과 갓난아이를 위해 축복기도를 드렸다.

오후엔 성당에 들려 조배하였는데 그 성당은 400년 전 네덜란드 통치 때 지은 서양 건축 양식이었다. 해발 3000m가 넘는 Trawas산에 위치한 별장에 여장을 풀었는데 환상적이었다.

이 곳에서 가장 높은 산인 Welirang(해발 3000m 가량)은 아직도 활화산으로 이른 아침이면 붉은 연기를 볼 수가 있었다. 아우구스띠노 형제는 "몇 번 이곳에 와서 그 산을 보려고 시도했으나 활화산 연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볼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라고 말하였다. 그 의미는 10년간 냉담 상태로 살다가 고해 성사로 죄의 응어리를 풀고 같이 묵주 기도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바위 중 머리산 같은 뒷산 Penang gungsa도 앞산과 비슷하게 높은 산이며 온 누리가 아름다운 나무와 그 사이에 집들도 군데군데 수놓은 듯 잘 어우러져 경관이 절경이었다. 물이 너무 맑아 풀장에서 수영도 하였다.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었다.

마지막 여정인 Bali 섬의 남태평양 바닷가를 비행하며 영화 남태평양을 떠올렸다. 주제가 "Some and chanting evening"을 부르면서 검은 모래와 맑은 물 위로 서핑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번 여행에서는 교통 사고와 두 분의 냉담에서의 회개 그리고 그들의 착한 심성과 자연의 아름다움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사랑한다 하신 성모님의 그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