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 26일
재미교포 사목 박 창득 총대리 신부님의 나주
방문
지난 4월 18일 (목) 미주 교포 사목 총 대리 박 창득 신부님과 김
택구 신부님이 나주 성모님집에 순례오셨고 이 날 성시간에 참여하셨다.
윤 율리아 자매와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하며 그 다음 날 오전 광주
교구청에서 윤 공희 대주교님을 만나뵈었다고 한다.
대주교님께서 나주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셨고 박 창득 총대리 신부님은
주교님에게 율리아를 미국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교님은 좀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한다.
김 신부님은 이 번 한국 주교단 교황청의 방문 중 교황님께서
"아시아(나주)의 이런 좋은 은혜를 나누어야 된다" 라고 하셨다고 알려 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도록 뒷처리를 잘해야 한다.
즉 준비가 잘 되어야 한다" 라고 김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1996년 5월 22일
사제서품 은경 축을
맞이하여
인생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이야, 요즈음 더욱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 학교 3학년 때 집 근처인 북동 성당 유치원 마당에서 놀다가 수녀님에 의해 인도되어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
수녀님은 이 엘리사벳 수녀님인데 지난 5월 8일 서원 50주년 금경축 행사에 초대되어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내가 고등 학교 졸업할 무렵 한 여학생의 권유로 사제 성소에 눈이 뜨였고
"성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라는 책을 읽고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입회하여 신학생이 되었는데 "교구신부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수련장
신부님의 말씀에 무조건 "예" 하고 순명하여 교구 신학교로 옮겼던 것이다.
1년 간의 수련 기간 까지 9년이라는 짧지 않은 과정을 거쳐 사제가 된 것이
25년 전의 일이다. 사제로서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된 일, 괴로웠던 때를 회상한다면, 30세에 신부가 되어 「울고 들어가 울고 나온다는 진도
본당」에 첫 부임을 한 점이다. 1년 후 군종 신부로 파견되어 4년간 군 사목을 했는데 처음엔 사제관도, 성당도 없이 남의 집을 전세 내어
살았고 개신교 예배당에서 미사를 드린 적도 있었으며 차 규헌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삼선 개헌을 반대하여 좀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다.
군 사목을 마치고 함평 본당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농민회 교구 지도 신부로서
함평 고구마 사건 때문에 5일간 단식을 하여, 결국 그 피해 보상을 받아냈을 때 큰 보람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내 이름이 Black
List에 올라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며 외국에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함평에 부임한 지 석달 만에 현 대주교님께서 지어주신 문장 공소(벽돌건물)가
전기 누전으로 전소되어 눈물로 호소한 나의 글을 보고 전국적으로 사랑의 헌금이 답지되었기에 공소를 새로 지어서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다.
그 후 계림동, 북교동, 보성을 거쳐 염주동에 부임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 4개월이 되었다. 성당을 짓지 않으려 해도 주님께서 원하시면 짓지 않을 수 없음을 체험했던 것이다.
12년 전 내가 계림동에 있었을 때 "계림동에 적을 두고 두암동 성당을
지었으면…" 하는 총대리 신부님의 뜻을 외면했는데 결국 염주동에 오게 된 것이다. 골조만 지어진 상태에 건축 기금이 5백만원 밖에 남아있지 않아
아무 것도 손을 댈 수가 없었기에 "저를 왜 이 곳에 불러 주셨습니까? 이렇게 큰 성당이 왜 필요합니까?" 하며 때론 주님께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혹시라도 못한 일이 있다면 후임 신부에게
넘겨야지…' 하며 예수님과 성모님께 온전히 매달렸다. 전 교우들이 매일 성전 신축을 위한 기도와 묵주 기도를 바치며 건축 분과 위원회를 새로
조직하고 교우들에게 "희생과 눈물 없이는 하느님을 모실 집을 마련 할 수 없으니 우리 모두 합심하여 우리의 힘으로 이 거대한 역사를 일구어
냅시다." 하며 신립금과 매주 2차 헌금과 물건 판매 그리고 바자회 등을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다보니 10년 걸릴 줄 알았던 성전을 이렇게
4년만에 완공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교우들이 힘을 합친 사랑의 기적임에 틀림없다.
사제 생활 25년 동안 나에게 가장 큰 이벤트가 있다면 사제 생활을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성모님께서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아 왔는가를 완전히 일깨워 주신 점이다.
나는 철부지처럼 제 멋대로 살았고 관리자처럼 교우들 위에 군림했으며 기도의
삶을 살지 못했으나 그런 나를 성모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시어 당신의 눈물로써 일깨워주시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내 사제"라고 하시며 불러 주신 것이다.
사제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사제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뒤 늦게야
알게 되었고 또한 앞으로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아직도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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