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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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0월 19일

피눈물 10주년 기념일

 

오늘은 나주 성모님이 피눈물 흘려주신 10주년 기념일이다. 나주 본당에서 외국인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다고 하여 본당 신부님을 만났는데 나에게 함께 미사 드릴 것을 권하였다.

나는 외국인 신부님 20여명과 함께 말레이시아 수 신부님의 주례로 기념 미사를 드렸다. 성체 축성 때는 한국어, 영어, 일어, 불어, 인도네시아어로 각각하여 국제적인 기념 미사가 되었다.

영성체 때 율리아 자매는 성체를 영했는데 얼마 후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로 변화되는 성체 기적이 일어났으며 사진과 비디오에 그 변화된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율리아 자매는 메시지도 받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내 심장을 울린다.

"나는 오늘도 세계 여러 곳에서 모인 나의 자녀들이 나의 현존을 믿고 전하도록 징표를 보여준 것이니 시급한 이 시대에 어서 서둘러 성체의 중요성에 대하여 전하도록 하여라. 내 생명 전체를 내 본질 자체에서 끌어내어 너희와 결합하고자 한 나의 사랑, 그 깊은 사랑을 지극히 사랑하는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어찌하겠느냐? 나의 몸, 나의 피, 나의 영혼, 나의 신성으로 너희를 구원하고자 하는데 마음을 활짝 열고 가까이 오는 자녀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성심은 활활 타고 있다."

"나는 내 거룩한 어머니인 마리아의 모태에서 육체를 취하였기에 내 어머니 심장의 고동에 호응하여 내 심장은 너희를 위하여 뛰기 시작했으니 내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따르기 바란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따르는 것임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이 날 참석한 외국인들은 약 700여명이었는데 미국, 일본, 사이판, 괌, 카나다, 호주, 뉴질랜드, 홍콩, 마카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불란서, 벨기에 등에서 왔으며 내국인들 역시 2000여 명 정도가 곳곳에서 모여왔다.

특히 일본에서 순례오신 92세 되신 시무라 신부님도 계셨는데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 하셨다.

저녁 8시 30분부터 나주 장애인 사회 복지관 실내 체육관에서 촛불 봉헌과 묵주 기도가 있었고 신앙 체험 발표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하여 감명 깊었고 미국에서 오신 박 엘리사벳 자매님과 강 목사님의 증언도 너무 좋아 인상적이었다.

미국에서 오신 박 엘리사벳 자매님은 나주 성모님을 전하기 위해 남미에 가면서 나주 성모님께서 주신 기적수를 가져다 나누어 주었는데 봉쇄 수녀원에도 두홉짜리 팻트병으로 반 정도를 주었다 한다. 그 물을 원장 수녀님이 수녀들에게 조금씩 먹는 물에 타주고 그 나머지를 소성당 감실옆에 놓아두고 문을 잠궜다 한다.

다음날 아침에 원장 수녀님은 소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너무나 놀라운 일이 생겨 아연 실색할 지경이었다 한다. 왜냐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반병도 채 못되던 성모님 물이 팻트병에 하나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놀라운 일에 모든 수녀님들이 주님과 나주 성모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렸다한다.

「이 어찌 놀라지 않으랴」주님과 성모님께서 하신 일은 놀랍기만 하다.

 

 

1996년 10월 31일

박 영웅 동창 신부의 은경축 축사

 

오늘 박영웅(가브리엘) 동창신부의 은경축 미사가 윤 대주교님을 모시고 나주 본당에서 있었다. 미사에 뒤이어 축하식이 있었는데 축사는 동창 신부인 내가 하게 되었다. 축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존경하올 윤공희 대주교님을 모시고 동창생 은경축 축사를 하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초등 학교 때 복사를 하면서 사제가 될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본당 신부님의 특별한 배려로 살레시오 중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랍니다. 왜냐하면 신부가 될 수 있는 소 신학교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죠. 신부님께서는 소신학교 시절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추운 겨울에 맨발로 화장실과 복도를 찬물로 청소하던 일, 난방시설 없는 침실에서 쪼그리고 자던 일, 그래서 발에 동상까지 걸렸답니다. 배고프던 시절도 있었는데 옥수수 가루 죽을 끼니 때마다 먹어야 했고 먹지 않았을 때는 이름을 써놓고 다음날에 먹어야 밥을 주는 배고픈 시절도 있었답니다. 이것은 40년 전 이야기이니까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대신학교를 다닐 때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만 소개를 하지요.

철학과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 회식을 하고자 학생처장 신부님께 허락을 받으려고 했지만 허락을 해주지 않아 신학교 뒷 동산에 군인들이 사용하던 가스굴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밤 11시경 몰래 회식을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신학생 일행 중 둘이 오지않아 기다리던 차에 인기척이 나자 누구냐, 누구! 왜 늦었어! 하고 야단을 쳤는데 그 분이 신학생이 아니었고 호랑이 같은 학생처장 신부님이 아니었겠습니까. 결국 그 벌로 일주일간 매일 한 시간씩 흙을 파서 땅을 메우는 고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박 신부님은 소 신학교 시절부터 부르는 별명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세요? 영감이랍니다. 신학교에서 쫓겨나가는 것을 라틴말로 "똘레" 라고 하는데 신학교에서 잘난척하고 영감같이 어른 행세를 하면 "똘레"를 당하곤 했지요. 박 신부님의 겉모양은 영감 같은데 행동이 어린애와 같이 순진하고 단순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좋은 품성이 있었기에 똘레 당하지 않고 어렵사리 신부가 된 것이지요. 40명 중 다섯 명만 신부가 되었으니까 말이죠. 신부님은 머리가 굉장히 영민하셔서 남이 한 마디 하면 다음 할 말까지 알고 먼저 해 버립니다. 그래서 욕도 얻어 먹기도 했지요. 신부님한테 거짓말하면 큰 일이 납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어느 신부님의 나이가 몇이고, 어디서 태어났고 언제가 본명 축일이고 사제 서품을 언제 받았는지 하는 것까지 다 기억합니다. 기억력 하나는 천재랍니다. 머리는 우수한데도 교수 신부를 하지 않고 평생 본당 신부만 하고 있지요.

신부님은 성격이 참 좋아요. 신학생 때 우리가 "여보, 영감"하고 놀려대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잘 받아들였기에 그 누구도 쉽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지요. 저 보고 화를 안내는 신부라고들 하지만 박 신부는 저보다 더 화를 안내십니다. 사랑을 표하기 위해 누구한테나 손으로 등을 치는 묘한 버릇이 있기는 합니다만 자상하시고 다정하십니다. 좋은 것은 무엇이나 다 잘 받아들이고 이해 안되는 것은 겸허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항상 상대편에 서서 도와주려고 하지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 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는 신부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성서 말씀인데 그 말씀대로 신부님은 늘 감사하며 사십니다. 그러나 신부님도 부족하여 잘못 할 수 있으니 기도하여 주십시오. 남은 한 생애를 정리하며 기도와 희생과 봉헌된 삶을 살므로써 극기와 청빈의 마음으로 생활을 개선하여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신 성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성인 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이하여 오늘까지 부모처럼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주고 계시는 누나인 말가리다 자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동창 신부들을 대신하여 감사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신부님께 축하드립니다.

3부 행사는 야외에서 음식을 들면서 노래와 춤과 무용이 있었고 특히 박 신부의 전임지인 농성동 본당 성가대의 찬조 출연이 돋보였다. 전임 신부를 위한 배려는 타 본당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동창 신부인 제 찬석 신부는 "오 솔레미오와 향수"를 불렀고 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노래를 선사하였는데 박수 갈채가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