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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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25일

사상 유래없는 성체기적이라고 증언하시는 김창렬 주교님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인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오전 8시경에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제주 교구장이신 김 창렬 주교님의 목소리였다.

주교님은 서울 가톨릭 대학 학장님으로 계셨던 나의 은사님이기에 가끔 연락이 오고 간다. 특히 나주에 대한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전화하신다. 주교님은 지난 6월 12일에 있었던 성체 기적을 직접 보시고 체험하신 분이시기에 그 때 율리아 자매가 받은 메시지 말씀이 다 정리되었나? 궁금해서 전화하신 것이다.

주교님은 나주 성모님 집에 오게된 경위를 말씀하셨다. 광주 대신학교 이사회 모임에 오셨다가 나주에 한 번 가고 싶어 광주 교구장 윤 대주교님께 "나주에 다녀오고 싶은데 길 안내를 위해 김 안당 신부를 대동하고 다녀올 수 없겠나?" 라는 말씀에 "조용히 다녀오라"는 윤 대주교님의 말씀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주 성모님께 가서 조용히 기도하고 돌아오겠다'고 생각하며 나주에 도착하여 눈물 흘리셨던 성모님상 앞에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박 루비노 형제가 왔고 그 뒤로 율리아 자매가 왔다. 율리아로 부터 성체가 내려오셨던 이야기를 듣고 주교님께서는 "앞으로는 무슨 징표든지 잘 보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큰 소리와 함께 하얀 물체가 성모님 상 앞에 내려온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의 몸인 성체였다. 그래서 주교님은 본당 신부에게 연락했고 그 성체를 잘 보관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미 윤 대주교님께서 본당 신부에게 이르기를 "나주에서 어떤 징표가 있으면 잘 보관하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지금은 성체를 나주 본당 감실에 모셨다가 교구청에 모셔갔다) 김 주교님은 윤 대주교님께 로마에서 있었던 일도 보고하셨다 한다.

즉 개신교 국제회의 연사로 초청되어 나주에서 많은 기적을 체험했던 개신교 목사에 대해 증언했으며 나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참석한 많은 주교님들과 목회자들이 이미 나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질문도 많았다고 한다. 주교님은 일전에 "한국 나주에서 있었던 성체 기적은 사상 유래없는 일이니 좀더 신중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잘 보관하면 좋겠다"고 윤 대주교님께 건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주교님에게 "이번 성체 기적을 주교님께서 로마 바티칸 교리 성성에 보고 하시지 않겠느냐"고 여쭈었더니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교황님도 인정하시니 나주의 책임자인 윤 대주교님만 인정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997년 7월 16일

뉴질랜드의 여행

 

금년 하계 휴가는 7월 7일부터 일주일간 뉴질랜드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곳에 이민하여 온 홍 로마노와 정 로마나 부부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는데 나주 성모님 집에 와서 회개했던 로마나의 장부 로마노는 내가 세례를 준바 있다.

7월 6일 오후 8시 40분 김포 공항에서 출발하여 10시간이나 걸려 폴(Paul Montague)과 함께 오크랜드(Auckland)에 도착하여 로마노 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폴은 40세가 될 때까지 사업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인데 특히 성모 신심이 강한 그는 나주에 와서 "사제가 되라"는 성모님의 말씀에 지금은 사업을 청산하고 로마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방학기간 중 나주 성모님께 와서 일주일간 지내다가 같이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심성이 곱고 겸손하기에 착한 사제가 되리라 믿는다.

 8일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church)로 1시간 비행하여 그 곳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모텔 앞에 큰 성당이 있기에 가보았더니 성공회 성당이었고 가톨릭 성당은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영국 정부가 원주민 추장으로부터 뉴질랜드를 100만불에 사고나서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위해 모든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9일 오전 7시 30분 관광 버스로 남섬 일주를 위해 퀸스타운(Queenstown)까지 하루 걸려 가는데 언덕같은 작은 모든 산들과 평야가 푸른 잔디밭이었다. 양들과 사슴 그리고 소와 말들이 떼를 지어 풀을 먹고 있는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였고 가끔 눈에 들어오는 호수들도 바다처럼 넓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먼 산에는 눈이 쌓여 마치 알프스 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이며 차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쿡(CooK)산은 국제 스키장이 있는 곳인데 비 때문에 구경을 하지 못하고 식사만 끝내고 다시 출발하여 퀸스타운에 도착하니 밤이 되었다. 저녁 미사를 마치고 하룻밤 쉬고 일어나 보니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10일 남섬의 하이라이트인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로 오전 7시 30분 관광버스로 떠나는데 비가 눈이 되어 갈수록 길에 눈이 많이 쌓여 못 갈지 모르겠다는 안내 방송이었다. "주님은 자비를 베푸소서"하며 우리는 묵주 기도를 열심히 바쳤다. '성모님께서 여기까지 보내주셨는데 도와주시겠지'하며 안심하였다.

아름다운 호수 Te Anan에 도착하니 다행히 눈이 녹아서 계속하여 갈 수 있었고 아름다운 밀림의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굴(Home Tunel 1,4Km)을 지날 때는 이 세상이 아닌 꿈에 그리던 에덴 동산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을 치켜올리는 듯한 바위산 위에는 눈이 쌓여있었고 실같은 폭포수들이 곳곳에서 흘러내리며 밀림의 고목 나무들과 폭음 소리와 함께 흘러내리는 계곡의 세찬 물소리는 우리를 속세의 잠에서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조금 후에 밀포드 사운드에 도착하였는데 바다를 끼고 높이 솟은 눈덮인 산에서 흐르는 수많은 폭포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관광 배 안에서 식사를 하며 1시간동안 산 주위를 돌면서 주님을 찬미하였다. 타볼산에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잠깐 보았던 사도들이 이곳에 집을 지어 영원히 살자고 했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했다.

이 지역의 강우량이 7000mm라는데 오늘은 맑고 상쾌하였다. 우리를 태운 기사님은 나이가 60세라고 하는데 할아버지같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기쁨을 한아름 안고 오던 중 버스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한 시간 후 다른 차로 바꾸어 타고 돌아오는데 그 동안 엄청나게 내리는 눈 때문에 소형차 몇 대가 오르막길을 오르지 못하고 옆에 서 있었다. 기사 바로 뒤에 앉은 나는 긴장하여 묵주 기도를 수십 단이나 바쳤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기사님은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용감히 잘도 오르고 내려왔다. 신비를 체험한 듯 했다. 퀸스타운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미리 예약을 했기 때문에 식당에서 늦게 먹은 김치찌개는 피곤함을 확 풀어주었다.

11일 마지막 남섬 일정으로 Christchurch에 돌아오는데 버스 안에서 관광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버스 안에서 있었기에 피곤했다. 차 안에서 묵주 기도를 50단 이상 했다.

12일 오크랜드에서 가까운 북섬 Muriwai 바닷가에 갔는데 무변광대한 바닷가에 아름다운 새들이 바위산(바닷가)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노천 유황온천장 Wairewa에서 1시간 동안 몸을 담그고 집에 돌아왔다.

13일 마지막날 11시 몬시뇰 크로닌(Monsignor Cronin)을 방문했는데 내년 4월 뉴질랜드 성체 대회에 한국 나주 율리아의 초청 건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나오면 즉시 연락주기로 하고 나주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징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Christchurch에서 비행하여 저녁 9시 40분에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경이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온 집안이 엉망이었다. 도둑이 들어와 모든 옷가지, 가방, 서랍 등을 모두 뒤져서 난장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카드, 현금, 패물 그리고 옷가지는 그 어느것 하나도 이상이 없었다. 먹다 남은 술만 없어진 것이다.

성모님이 도와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 장미 향기를 강하게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까지 체험시켜 주신 나주 성모님께 감사드린다.